2013년 5월 5일 일요일

늘상 봄이다

자식들을 데리고 수영장에 갔다.
여름 등살에 떠밀린 봄이 애처롭긴 해도
이미 득세한 여름 선언을 늦출 수는 없어서다.

겨울동안 굳은 몸의 삐그덕 아우성, 난리가 아니었다.
심각한 체력저하 상태를 물 속에서 확인했다.
얼마나 춥고 얼마나 떨리고 얼마나 숨차든지...허걱

그러나 아이들의 웃는 모습은 늘 봄이어서 좋다..

2013년 5월 4일 토요일

신학자의 고민

신학을 공부하며 늘 뇌리의 아랫목을 차지하는 고민이 있다.

1.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글을 쓰면서 관심과 가치의 구심점이 성경의 핵심에서 멀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어느 분야를 섭렵하고 나만의 고유한 지적 상아탑을 구축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을 흡입하며 고지의 나른한 쾌감에 잠기는 방향으로 관심이 휩쓸린다. 인간문맥 속에서 합의되고 설정된 임의적인 기준에 희비를 걸고 매달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코의 호흡으로 연명하며 훅 불면 날리우는 인생의 경박이 한없이 부끄럽다.

2. 신학에서 변증은 필연이다. 어떠한 이슈든 시시비비, 옳고그름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은 신학의 실천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변론의 각을 세운다고 해서 경건의 근육이 단련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엉뚱하고 기형적인 기질이 인격과 삶에 군살처럼 박힐 위험성만 더욱 높아진다. 그렇다고 침묵이나 무관심은 더더욱 능사가 아니겠다. 하여 어떤 특정인, 특정학파, 특정시대 신학이나 신앙의 문제에 개입하고 해명하는 것은 불가피한 과제이되 성경 전체의 진리가 고백되고 보존되고 전달될 수 있도록 늘 전역사의 세계교회 전체를 의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3. 괜찮은 믿음의 선배들은 진리를 왜곡하고 파괴하는 다양한 이단들의 광란을 도저히 침묵할 수 없어서 변증의 입술을 열고 논박의 붓날을 세웠지만 상대방이 내세우는 그릇된 논지의 허리를 꺾는 것 자체를 능사로 여기지를 아니했다. 묻고 답하는 중에 무의식적 타협과 수긍에 매몰되어 진리의 순수성과 엄밀성이 무너지는 변론의 생태적 한계를 간파하고 있었기에 완급과 원근을 적당하게 조절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잘못과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책망의 채찍도 필요하고 교훈의 당근도 필요하며 의로움의 구축과 올바름의 정립도 필요한 균형 말이다.

4.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문헌들을 읽고 다양한 사안들과 마주치고 다양한 필요들을 발견한다. 다 반응하며 살기는 곤란하다.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가 유한하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선택과 집중의 기준과 방편이 궁금하여 물음의 일급 리스트에 올려두고 줄기차게 고민한 끝에 성경이 모든 역사와 모든 만물의 헤아릴 수 없도록 무수한 것들에 대한 최상의 선택과 집중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성경은 세세한 것들을 일일이 다 건드리지 않으면서 온 세상과 전 역사를 다 커버한다. 놀랍고 신비롭다. 성경에 매달리면 몸이 열이라도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들이 백기로 투항한다.

5. 성경 텍스트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한 이오타만 씹어도 진리의 황홀한 맛에 곧장 중독된다. 내 영혼에 달기가 송이꿀의 당분을 무색하게 한다. 달콤하던 모든 것들의 달콤함을 제거한다. 모든 필요가 거기에서 해소된다. 여기에서 소박한 해법을 발견했다. 변증이나 논박은 특정한 사안에 몰입되어 두뇌와 입술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공격하고 입술을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택과 집중이 내 인격과 삶에 체화되고 축적되어 그 자체가 상대방의 인격과 삶에 발견적인 해법이 되는 식이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6.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진리가 인격과 삶으로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변론의 생리는 머리와 입술을 분주하게 하여 우리 자신이 먼저 진리의 터와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선행적인 과정을 무시하고 생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함정이다. 사단은 이런 논쟁에서 지더라도 우리가 변론의 덫에 걸리기만 하면 궁극적인 면에서는 이기는 승부수를 노리고 있다. 이는 사단이 깔아놓은 논쟁의 판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조심스런 이유겠다. 그래서 전인격적 무장이 우선이고 필요에 따라서만 언어와 붓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겠다.

7. 당장 반박의 피를 토하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가 초래될 것 같은 긴박한 상황들이 많이 발생한다. 이때 침묵은 비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진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등판이 위험하다. 웨민 고백서가 산출된 이후에 곧장 영국 본토에는 실종되고 그렇게도 우람한 진리의 체계가 뿌리마저 뽑히는 기현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가볍지 않고 단순한 것도 아니다. 지식의 생산과 진리의 파종이 항상 병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 말이다. 물론 진리가 어느 시대나 지역에 심겨지는 것은 기적이고 은혜이다. 진리를 머리만이 아니라 심장과 수족에 보관하는 건 은혜 수혜자의 도리겠다.

8. 보다 심오하고 높은 진리의 골격을 다시 생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역사 속에는 이미 주님께서 허락하신 교훈들로 충분하다. 그것을 전인격과 삶에 담아내는 것은 교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사 속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난 진리의 고백들을 입술에 올렸다고 신학자의 소임을 접는다면 큰 오산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한 시대의 심장을 관통하게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자신의 심장에 담아낸 진정한 진리의 사람들이 나타나야 가능하다. 사단은 이것을 경계한다. 생명보다 귀한 진리를 시끄러운 논쟁의 꺼리로 매도하는 일에 능란하다. 진리가 논쟁의 도마 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9. 교회는 진리의 터와 기둥이다. 진리는 교회의 신분이고 인격이고 삶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교회가 이 정체성을 포기하면 진리가 무너진다. 천재나 영웅 몇 사람의 활약으로 때우려는 창조적 소수 발상은 접으시라. 하나님의 사람들 개개인이 모두 동일한 비중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것은 일회성 운동이나 이벤트가 아니기에 선동이란 접근법도 접으시라. 우리의 방법론은 진리의 터와 기둥으로 각자가 선 자리에서 일평생 살아내는 삶이어야 한다. 우리가 진리의 터로 닦아져야 하고 기둥으로 세워져야 한다. 

2013년 5월 3일 금요일

진주상인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진주를 샀느니라 (마13:46)

예수님은 땅의 신비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천국의 심오한 세계를 비유로 설명하는 중에 농부와 상인을 언급한다. 농부는 밭에 감추어진 보물을 우연히 발견했고 상인은 진주라는 특정한 대상을 찾다가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천국의 성격은 수동성과 능동성이, 소극성과 적극성이 공존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반응은 동일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밭과 진주를 접수했다.

천국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도 아니고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게 예수님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오직 선택하신 백성에게 지각과 출입이 허락되는 전적인 은혜이다. 농부는 밭에 감추어진 보물이 있는지도 몰랐었고 필요도 몰랐었고 구하지도 않았었다. 그런 보물과의 만남은 인과를 읽어낼 수 없을 때에 우리가 이름을 붙이는 '우연'이란 섭리로 찾아왔다. 그래서 은혜인 줄도 모를 정도의 은혜이다. 보물이 평소에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눈에는 가려졌던 것임에 분명하다.

상인의 경우에는 다르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떨어지는 설명이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상인이 보였던 진주의 집요한 추구는 자신의 직업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가치추구 활동의 일환일 뿐이지 천국의 실체를 스스로 알고서 자기 힘으로 찾아낸 행보로 보기는 곤란한다. 단적인 증거로서, 기대하지 못했던 "극히 값진 진주"와의 일상 단절적인 만남과 자기의 모든 소유까지 댓가로 지불하는 극단적인 거래는 평소의 이윤추구 행위와는 구별된다. 진주의 발견이 일상의 연장처럼 보이는 것은 범부들도 삶의 자리에서 혹 더듬어 쉬 발견할 수 있도록 가까이 오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봄이 타당하다.

천국이 은혜로 알려지고 주어진다 해서 장터의 싸구려 물품으로 취급하는 것은 무례하다. 기존의 모든 삶과 가치를 무익한 것으로 여겨야 할 정도의 값진 진주가 천국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제자도의 필수 항목으로 언급되고 있음도 동일한 맥락이다. 김성수 교수님은 이와는 대조적인 사례로서 천국을 팥죽 한 그릇과 거래한 에서의 망령된 행실을 꼬집었다. 천국을 배설되고 말 먹거리 수준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우리에게 생존의 기반이 바뀌었다. 밭을 접수했고 기존의 진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진주 취급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천국과 세상의 적당한 지점에서 어정쩡한 양다리 걸치기 자세로 미지근한 삶을 지속한다. 생업을 접고 집을 팔고 가족을 화끈하게 떠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주님께서 거하시는 우리는 각자가 땅에서의 천국이다. 삶의 양태는 동일해도 질은 현저히 달라졌다. 요지는 그런데도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진주를 산 상인의 처신처럼 천국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거다.

슬프지만, 어쩌면 아직 우리가 천국이 뭔지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런건가! 

2013년 5월 2일 목요일

믿음을 보겠느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이 구절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포기할 줄 모르는 과부의 호소 이야기로 강조하고 반전 접속사 '그러나'를 던지신 이후에 내리신 상당히 단절적인 인상을 풍기는 이야기의 결론이다. 동문서답 어법의 달인이신 예수님의 의중이 궁금했다. 김성수 교수님의 풀이가 압권이다. 교수님은 먼저 과부가 호소하는 내용을 주목한다. 헬라어 동사 'ἐκδικήσω'는 '원통함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라는 개념에 착안하여 과부의 호소는 민생고 해결이 아니라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신원하여 달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야기의 핵심은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이 험하고 어렵고 힘들다는 것과 이러한 경우 신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와 믿음'을 교훈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인자가 올 때'라는 것은 '믿음과 사랑이 점점 식어가는 때일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요 또한 주의 재림이 가까운 때일수록 세상은 더욱 악하고 부패할 것을 미리 알리시는 말씀이다. 마지막 때가 임박하면 세상은 더욱 악하고 부패할 것이고, 우리의 눈길이 어디에 머물든지 그곳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 나라와 약속에 대한 기대가 식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함을 지적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김성수 교수님은 '세상이 너무 악하여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듯하여도, 악한 세상 가운데서 천지간에 홀로 서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마치 고아나 과부와 같은 억울한 처지에 있다는 생각에 젖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흔들리지 않고 완성을 향하여 전진할 것이므로 신자는 여전히 자비롭고 의로우신 재판장의 긍휼과 은혜와 도우심을 하나님께 기대하고 간구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온 세상이 사방에서 종말의 끝자락 장면을 연출하는 듯하여도 화들짝 놀라거나 기이한 일 벌어진 것처럼 떠들석할 필요 없다. 공법이 인진으로 변하고 불법이 합법으로 둔갑하고 반듯한 제도의 옷을 입고 공공연한 거리를 활보한다 할지라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종말론적 낭패감에 주저앉을 필요가 없다. 물론 종말은 성경의 핵심적인 교훈이며 성도의 믿음에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는 진리이다. 그러나 고대나 중세 및 종교개혁 시대에 횡행하던 경악과 공포의 사건들에 비한다면, 지금은 종말론의 '종'자도 언급하기 곤란한 평화의 시대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며 오늘날의 혼탁한 시대상에 구린내 나는 숟가락을 얹어 무너진 리더십을 관리하고 어떤 모양이든 한 몫 챙기려는 시한부 종말론이 심지어 멀쩡한 기성교회 강단에서 예의 그 역겨운 고개를 내밀도록 멍석을 깔아서는 안되겠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보고자 하시는 믿음을 예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상에는 나를 안심시킬 증거가 도무지 감지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오직 하나님 자신에만 근거한 하나님 신앙을 주님은 보시기를 원하신다.

그런 신앙은 항상 낙망하지 않는 기도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름다운 기도문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마8:3)

문둥병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를 갖추며 청원의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황금의 입술'이라 불리우는 교부는 언어의 귀재답게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시면(si rogaveris Deum),' 혹은 '주여 깨끗하게 하소서(domine, munda)'가 아닌 예수님 자신의 신적인 의지를 존중하고 신적인 권능을 고백하는 참으로 지혜로운 일거양득 혹은 '일타쌍피' 어법을 관찰하고 격찬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산상에서 율법의 본래적인 의미와 사랑과 신실함을 가르치고 하산하신 이후에 벌어졌다. 산에서는 입술로 교훈을 전하셨고 아래로 오셔서는 행위로 교훈을 실천해 보이셨다. 예수님의 교훈은 삶과 동일했다. 이는 주님께서 선보이신 교육학의 시청각적 극대화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을 만지셨다. 이는 부정한 사람을 만지지 말라는 율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였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행위는 때때로 율법 폐기론의 범례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자신의 주장을 성경에 강요하길 좋아하는 무리들의 습관성 문법일 뿐이다. 예수님은 깨끗해진 그에게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제사장의 확인을 받으라고 하셨다. 율법 폐기자가 아니라 완성자의 모습이다. 여기서 문둥병의 부정함은 인간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부정함의 상징이며 제사장의 확인을 명하신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율법의 진정한 의미이고 본질적인 실체이며 궁극적인 완성임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 대목에서 황금의 입술은 우리가 하나님의 덕에 이르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실질적인 장애물은 육신의 문둥병이 아니라 '영혼의 문둥병(animae lepram)'이 문제의 원흉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부정한 자를 만지신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litteram legis)를 범하기는 하셨으나 본래의 취지(propositum)를 범하지는 않으셨다. 문둥병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이나 흉한 모습으로 인해 겪는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부정함 때문에 이스라엘 진 밖으로 쫓겨나야 하는 영적인 죄문제를 상징한다.

의지나 말씀만이 아니라 굳이 손의 접촉으로 질병을 치료하신 것은 예수님이 율법의 고의적인 폐기자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입안자요 해석자요 완성자요 심판자가 되신다는 사실의 선포이며 확증이다. 바울의 지적처럼 율법은 범법 때문에 '더하여진 것'이다. 당연히 율법은 의술이나 윤리나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범죄와 직접 관계한다. 문둥병 조항도 예외일 수 없으며, 당연히 문둥병의 치료는 죄문제의 해결과 유비적인 연관성을 갖는다고 이해함이 합당하다.

'예수님이 의지만 하신다면 무엇이든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문둥병자 입술에서 나온 고백과 청원의 탁월함이 번뜩이는 대목은 바로 여기이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의 주체요 죄사함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께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신 응답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예수님의 행적은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지극히 사소하게 보이는 행위나 언행이나 거동도 율법 해석의 단초이다. 과연 모세의 기록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예수님은 율법의 해석이라 함이 정당하다.

오늘은 복음서가 무더위의 급습을 황급히 따돌리는 듯한 매력을 보란듯이 발산한다. 최소한 주님께 다가가는, 마음에 쏘옥 드는 근사한 기도문 한 소절은 건졌다. "주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무슨 신앙고백 같은 평서문에 불과해 보이는데 나에게는 너무도 매력적인 기도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