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9일 월요일

악인의 존재에도 목적은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지으시되 심지어 악인도 악한 날에 그렇게 하시었다 (잠16:4)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위해 지어졌다. 악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입장을 지혜자는 피력한다. 함의가 심오하다.

먼저,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사건과 사태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유쾌한 일이든 불쾌한 일이든 하나님의 목적을 떠나서는 어떠한 것도 올바르게 이해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모든 것을 사려할 때 그것의 가장 정확한 가치와 의미에 도달한다. 이는 나의 가치관과 나의 기호와 나의 유익에 근거한 자기 중심적인 눈으로는 무엇을 보더라도 굴절된 의미와 왜곡된 가치가 양산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겠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가치관에 충돌되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나의 기호에 거슬리는 것은 거침없이 거절이나 증오로 응수한다.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이유로 사물과 사태와 사건에는 무질서가 초래되고 왜곡이 조장되고 갈등이 형성되고 다툼이 유발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문제의 원흉은 결코 자신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해서는 문제의 매듭이 풀어지지 않는다. 먼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운영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존재의 가치를 신적인 목적에의 기여에서 찾고 사태나 사건의 의미를 그런 관점으로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면 문제의 핵심이 파악된다. 문제의 근원은 우리의 가치관과 유익과 기호가 죄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하나님의 목적과 가치관과 기호를 나의 것으로 삼는 게 최상의 해법이다.

이런 지혜를 가지고 시련과 풍랑과 아픔과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 어디를 가도 나를 너무나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학교든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제거하는 것은 기독인의 해법이 아니다. 세상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대체로 이혼이나 호적을 파내거나 파면이나 퇴직이나 퇴학이나 투옥이나 이사 등의 일시적인 처방을 동원한다. 그러나 기독인의 접근법은 다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생각한다. 문제의 가까운 원인들을 제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먼저 더듬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즐거운 상황도 함정일 수 있고 괴로운 상황도 선물일 가능성을 수용하게 된다. 심지어 악한 사람들의 사악한 행동들이 사방을 우겨싼다 할지라도 악한 날에 하나님의 계획이 수행되는 수단들일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으나 이유를 불문하고 그게 최상의 해법이다.

아무리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어도, 아무리 조화되기 어려운 배우자를 만났어도, 아무리 고약한 상사가 괴롭혀도, 아무리 순종하지 않는 자식들이 말썽을 부려도, 아무리 난폭한 급우가 옆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는 경우는 없기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알려지는 계기가 아닌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맞이할 기대와 설레임이 절망과 좌절을 대신한다.

2014년 12월 24일 수요일

2014년 12월 23일 화요일

다윗의 처신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삼하16:10)

간음과 살인의 주범인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칼을 피하여 도피하는 중이었다. 충신들과 백성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몰락한 사울가의 사람 시므이가 정색을 하고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즉 1) 다윗은 왕이었던 사울을 살해하고 권좌를 찬탈하려 했고, 2)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징벌하는 차원에서 나라를 다윗의 손에서 빼앗아 반역자 압살롬의 손에 넘기고자 하셨으며, 3) 다윗은 '벨리알의 사람'이기 때문에 '꺼지라'는 독설까지 내뿜었다. 그러나 전부가 사실 무근이다.

첫째, 다윗은 권세에 눈이 어두워 사울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그마한 옷자락 한 조각의 제거로도 죄책감에 시달렸던 인물이다. 둘째,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윗의 손에서 압살롬의 손에 넘기고자 한 적이 없으시다. 셋째, 다윗에게 돌려진 '벨리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호칭이며, '꺼지라'는 말도 몰락한 시므이의 입에서 나와서는 아니되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에게는 극도로 부당한 망언이다.

무자격자 입에서 사실과 무관하게 출고된 저주를 들은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죽은 개'와 같은 시므이의 무엄한 악담을 저지하기 위해 그의 목을 베겠다고 나셨다. 이는 누가 보아도 지극히 충신다운 반응이요 지극히 정당하고 상식적인 처신이다. 그러나 저주의 대상인 다윗의 해석은 상이했다. 시므이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으며, 그가 저주하는 것은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시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하면서 관계성의 묘한 선긋기에 들어갔다. 심지어 자신의 충신들을 향해 '사탄'이란 표현도 불사했다.

말씀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죽은 개'와 '벨리알의 사람'과 '사탄'이란 부정적인 호칭이 남발되고 있는 이 상황에 한국교회 현실이 묘하게 중첩된다. 교회의 지도자에 해당되는 사람이 간음이나 살인을 저질르면 무수한 목소리가 이 사실을 지적한다. 과하게 격분한 목소리는 '벨리알의 사람'이란 호칭을 투척하며 내용에 있어서도 사실의 경계를 훌쩍 넘어선다. 이에 대하여 그 지도자의 충신들은 사실에 근거하든 안하든 사실을 발설한 모든 목소리를 '죽은 개'의 짖음을 규정하고 목을 제거하려 앞다투어 달려든다.

사태가 이 정도로 발전하면 지도자는 다윗처럼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충성심 차원에서 발동한 측근들의 격분을 조기에 진압하며 적당한 선긋기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지도자는 오히려 측근들의 충성심을 부추기고 측근들 선에서 사태가 해결되길 은근히 바라면서 어떻게든 엮이지 않으려고 교활한 침묵이나 비겁한 은둔으로 응수한다. 측근들의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으면 무고죄를 들먹이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발설한 입술까지 고소고발 조치에 돌입한다. 법적인 면죄부가 발부되기 전까지는 철회하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놓되, 고소의 철회가 넉넉한 관용으로 둔갑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면 마치 아량을 베풀듯이 고소장을 보란듯이 찢는 가증함도 연출한다.

사람은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도 저지른다. 그러나 인품과 신앙의 격은 그 사실에 대한 당사자의 반응에서 좌우되는 법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했던 사람이다. 품행이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최고의 자격을 갖춘 선지자 나단의 따끔한 지적만이 아니라 지극히 무자격한 사람 시므이가 사실에도 근거하지 않은 방발을 일삼는다 할지라도 그런 가까운 원인에 반응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과 그의 의도를 의식하며 읽어내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그의 정직과 겸손과 온유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다윗의 이런 처신이 심히 목마르다. 

2014년 12월 22일 월요일

창조의 메시지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도다 (시113:4)

비행기를 타고 고공으로 올라갈 때마다 놀이기구 타는 즐거움이 아니라 높은 곳은 사람이 머물 곳이 아니라는 낯선 느낌과 마주친다. 하나님은 우리 몸의 일부로서 발을 지으셨다. 발의 창조는 인간이 접지하여 살아가는 존재라는 암시이다. 이는 인간이 높을수록 불안하고 아찔하며, 낮은 곳일수록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과도 하모니를 이룬다. 이것이 발의 목소리다.

창조는 하나님의 첫번째 계시이다. 시인이 신묘막측 범주로 분류한 인간의 지으심은 그 자체가 이미 메시지다. 시인과 유사한 맥락에서 바울도 지어진 모든 만물이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전하는 메시지의 보고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만물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읽어내지 못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는 인간의 미련함과 우매함도 꼬집는다.

모든 만물과 역사가 전하는 메시지는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여호와가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도다'는 싯구는 우리에게 '비교급 인식론'을 제안한다. 즉, 역사와 문명이 아무리 화려하고 지고해도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높으시며 하늘이 제 아무리 끝없이 높더라도 그것을 지으신 분은 그것보다 더 높으시다.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높은 곳에 앉으신 이가 없다고 시인은 선언한다. 그러나 만물과 역사가 들려주는 메시지는 그것들과 하나님 사이에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격차에서 종결되지 않는다. 메시지의 방점은 그러한 격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세우시고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세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있다.

역사와 만물은 땅의 어떠한 것으로도 표상할 수 없도록 지고한 하나님의 실체(essentia)에 대한 지식도 증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곳에서 언제나 만물과 역사를 붙드시며 신실한 개입으로 주도하사 지고한 가치를 산출하는 계기와 수단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역사(opera)에 대한 지식도 증거한다. 자연과 성경이 계시하는 내용이 다르지가 않다던 바빙크의 지적은 감미롭다.

일평생 보아도 보지 못하고 무시로 들어도 듣지 못하고 항상 마음으로 생각해도 깨닫지를 못하는 이들에게 시인의 노래는 엄중한 책망과 애틋한 도전이다. 지고한 분이시나 천지에 충만하사 늘 거기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감사하며 영화롭게 하는지도 돌아보는 이 아침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만물과 역사의 부지런한 외침에 귀를 기울인다. 

2014년 12월 21일 일요일

2014년도 결산 (감사제목)

나에게는 2014년 전체가 통째로 감사의 제목이다. 아픔과 눈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참으로 행복하고 풍성하고 다사다난 했던 한 해였다. 부족하고 무자격한 자에게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복들을 세어보니, 그 구체적인 내용들 중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었다.

3월: 예수가족 교회에 가족으로 합류
3월: 개혁주의신학연구소 설립
3월: 합신과 대신에서 강의
4월: 종교개혁과 스콜라주의 역서(부개사), 출간
6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서론(부개사), 출간
9월: 액츠에 조직신학 교수로 임용
9월: 10년의 유학생활 종료/ 귀국과 순적한 한국적응
12월: 미러링: 더 깊은 묵상(세움북스), 출간
12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서론, 한국연구재단 우수도서 선정
12월: 15년만에 이루어진 목사 안수
12월: 북콘서트 예정, 독자와의 아름다운 만남 기대만빵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서
1. 페북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사귐과 소통
2. 한국과 미국에서 사랑하는 이들과의 만남
3. 액츠에서 외국인 학생들과 주 안에서의 사귐

Bruce Lee is Legend!


2014년 가을학기 종료

채점과 성적입력, 지난 주 미국에 와서 가장 몰두했던 일들 중의 하나였다. 2014년도 액츠의 가을학기, 오늘에야 종료했다. 좋은 학교에서 소중한 학생들과 귀한 교훈들을 큰 은혜 가운데서 나누었던 한 학기였다. 물론 학생들과 보다 풍성하고 입체적인 소통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건 다음 학기를 설레임 속에서 기다리고 기대하게 만드는 빌미요 에너지다.

액츠에서 보낸 가을학기, 참 행복했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부르심을 받아 기도와 말씀에의 전무를 장려하는 처소에서 기도와 말씀에 실컷 전무할 수 있었던 학기였기 때문이다. 주변의 큰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눈물과 신음과 격분이 영혼의 뇌관을 건드려 폭발하기 진전까지 갈 때도 많았지만 이는 순례자가 걷는 길에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과정이라 생각하며 그것도 감사하다.

이제 본격적인 방학이다. 국화꽃 한 송이를 피우려고 봄부터 울었던 소쩍새의 심경으로 2015년도 봄학기 준비에 돌입할까 한다. 보다 더 설레이는 학기를 위하여~~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적당한 무지의 제맛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20:24)

이 문구는 '사람의 걸음이 주께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말 이후에 등장한다. 즉 사람의 행보 혹은 인생이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고 있기에 자신의 미래가 사람에게 맡겨지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지식도 인간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일대기는 인간을 비롯한 어떤 피조물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으며, 땅에 기초한 미래사의 올바른 예측은 가능하지 않다. 이게 성경이 가르치는 인생에 대한 이해의 기본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인생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정도와 비례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하나님이 배제된 어떠한 삶의 뜻풀이도 헛소리 내지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사실 헛소리와 속임수는 지성적인 고상함의 격 갖추는 일에 민첩하고 꼼꼼하고 성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매끄러운 논리력과 치밀한 꼼꼼함과 감미로운 설득력을 구비했다 할지라도 회칠한 무덤의 수준을 넘어가지 못한다.

지혜자는 인생이 신적인 섭리의 손아귀에 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인생길을 하나님이 계시하신 섭리만큼 알고 적당히 무지한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무지에 머물라는 것도 아니고 그 무지에 정당화나 면죄부를 발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점궤나 사술의 신공을 맹렬히 발휘하는 '영험한' 이들에게 두툼한 복채를 투척하며 인생의 판도라 상자를 개봉해 달라고 매달릴 것을 주문하는 것도 아니다.

위에 언급된 본문의 의도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라는 것이다. 인생의 근원이요 보존자요 주관자요 심판자인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캄캄한 무지 속에서 막막한 인생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우회적인 표현이다. 무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갈증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깊을수록 인생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장래사에 대해서도 그만큼의 깊은 평강과 위로를 얻는다. 하나님과 밀착되면 될수룩 인생의 윤택과 부요함도 그만큼 증대된다.

사람의 길이 가리워져 있음은 하나님의 심술이 아니라 자비로운 섭리이다. 무지는 수치와 두려움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밀착에의 초청이다.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에게 부분적인 앎과 희미한 지식이 주어진 것도 이러한 섭리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를 지식과 논쟁의 세계가 아니라 경외와 경탄의 자리로 인도한다. 나는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 오히려 여호와 경외를 위해 미래는 적당한 무지의 베일에 가리워져 있어야 제맛이다.

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신학을 공부할 때

1.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일인지를 살핀다. 성경이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일들은 호기심에 경도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아서다. 신학적 작업은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들에 집중하고 그 주제들을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는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

2. 성경을 더 잘 이해하게 조력하는 것인지를 확인한다. 상당수의 신학적 작업들이 성경을 더욱 혼잡하게 만들고 성경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성경을 적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학적 작업이 우리로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말씀이 달콤하게 되고 말씀에 더욱 밀착하게 되어야 정상이다.

3. 성경을 가감하는 것은 아닌지를 검토한다. 성경이 분명히 언급한 내용을 침묵하게 만들거나 성경이 설정한 인지의 경계선을 함부로 출입하게 만드는 오만과 방자가 신학적 연구라는 이름으로 학계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일이 최고의 신학적 작업이다.

4. 하나님께 실제로 영광이 되는 일인지를 성찰한다. 신학자는 인간적인 호기심과 학술적인 영달에 홀려 자극적인 의혹풀이 및 대중적 관심의 구걸 차원에서 하나님의 영광과는 무관한, 심하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역행하는 선동적인 테제들을 투척하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아서다.

5. 교회에 유익이 되는 일인지를 살핀다.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고 기독교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신학적 활동이 적지 않아서다. 모든 신학적 작업은 교회의 유익을 지향해야 한다.

6. 나의 경건을 증진하는 일인지를 진단한다.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온전하게 세우는 것과 무관한 일에 보혈의 값을 지불한 생명의 너무나도 소중한 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신학이 경건을 지향하고 경건이 신학을 독려하는 것이 정상이다.

7. 세상에 빛과 소금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일인지를 가늠한다. 우리는 온 세상에 대하여 복의 근원이며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의 선교적 소명이 외면된 신학적 활동은 교회를 고인 물처럼 부패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신학교의 커리큘럼 확립과 교회의 모든 활동과 개인인의 인생에도 이상의 사안들을 신중히 검토하면 좋겠다. 

2014년 12월 17일 수요일

공의로 준비하라

의가 주의 앞을 지나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라 (시85:13)

지금은 공의와 올바름이 실종되고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는 시대다. 심지어 진정성과 정직성도 속임수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동원된다. 그러나 비록 사람은 미혹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표면적 진정성과 정직성의 가증한 연출로 하나님도 속이려는 시도가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면...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사실 의로움 상실의 현장은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도 해당된다. 의가 주의 앞을 지나가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법인데, 의의 부재는 주님을 거부하고 앞 길을 감히 훼방하는 방식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의 방식이 참으로 교묘하다. 주님의 걸음을 막아 서겠다는 고의적인 의도가 없더라도 결과적인 면에서는 교회가 훼방자일 수가 있어서다.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 생각난다. 불의를 외면하지 않았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적극적인 공의를 선포했던 마지막 선지자다. 주의 길은 그렇게 예비하는 거다. 가시적인 부흥과 덩치 불리기를 위해 공의와의 결별도 불사하는 교회를 요한이 보았다면 아마도 그 시대보다 더 준엄한 불호령이 떨어졌을 게다.

요한이 죄에 합당한 회개의 공의를 외침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예비한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교회도 최소한 요한이 쏟아낸 공의의 외침으로 그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현실은 주님의 오심을 예비할 마음이나 의식이 없다고 의심될 정도로 하나님의 공의에 무신경해 보인다.

한반도에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거짓 예언자의 광란이 비록 너무나도 유치하고 어처구니 없는 사태지만 하나님의 의중에는 심판의 날에 임할 진노의 경종 차원에서 허락하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날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이후로 지금까지 종말의 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땅한 도리를 일깨우는 경종 말이다.

주님은 공의를 사랑하는 분이시다. 주의 역사는 공의가 예비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공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십자가로 말미암는 의의 행보에 온 교회가 전심을 기울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시인의 간명한 어구에서 촉발되는 아침이다.

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주인의 심판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인 탓입니다 (시82:8)

시인은 하나님의 세상 심판권이 모든 나라에 대한 그의 소유권에 근거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이는 세상에서 불의가 자행되면 하나님의 소유물에 불의를 가했다는 의미이다. 귀한 통찰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유일한 소유자다. 이 점에서 하나님은 땅의 판단자와 현저하게 다르시다. 하나님은 주인의 신분으로 만물과 만사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분이시다. 이는 그의 판단이 어떠한 것이라도 의로우실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불의한 자가 갑부의 대로를 걸으면 대체로 사람들은 심기가 뒤틀린다. 우리가 가진 지상적인 공의의 잣대가 무시되는 듯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악인들이 소원에 지나도록 소득을 얻고 재산은 천문학적 단위로 증대되고 기력은 쇠락할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임종의 때에도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현상들이 안구에 걸리면 누구나 의분이 솟구치는 게 정상이다. 어떤 식으로든 의분은 적당히 배설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물과 역사의 주재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모든 것에는 주인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불공정한 판단을 내리고 악인의 간사한 낯을 봐주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악인의 야비한 손에서 건지지 않는다면 이는 주인의 의도를 짓밟는 것과 일반이다. 공의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조롱하는 악들이다. 모든 만물은 창조자요 소유자인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능력을 선포하는 수단이다. 이러한 목적에 위배되는 수단의 모든 오남용은 주인의 진노를 축적하는 행위이다.

포도원 주님이 생각난다. 일터에 일찍 투입된 일꾼이나 업무마감 직전에 투입된 일꾼이나 동일한 금액으로 보상해 준 주인을 천국으로 묘사한 복음서 메시지는 주인의 자격으로 모든 것을 임의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선포하고 있다.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도 강요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적인 자유성을 증거한다. 인간의 절대적 자유는 방종과 부패를 낳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의롭고 언제나 옳으신 분이시다.

세상에 모순과 부조리가 아무리 관영해도 나는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을 의심하지 않는다. 주인의 자격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판결이 분초마다 일어나고 있음을 아무런 증거가 없더라도 확신한다. 나아가 이런 소극적인 인정을 너머 주인의 의도가 구현되는 방향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청지기의 적극적인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으련다. 세상을 심판해 달라는 시인의 호소에서 나는 하나님이 언제나 이 땅에서 공의로운 심판자로 계시다는 사실을 읽는다.

Church of the Servant

내가 소속되어 있는 북미개혁교단 Church of the Servant 교회의 사역이 잘 소개되어 있다.


Living out our mission from Trent Elders on Vimeo.

목사 안수식

2014년 12월 14일, 목사 안수식: Soli Deo Gloria

2014년 12월 15일 월요일

주석을 안내한다

성경 권별로 괜찮은 주석들이 소개되어 있고 랭킹도 표기되어 있으며, 최근에 출간된 주석들도 업데이트 해주네요...주석에 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착한 사이트입니다~~ ^^

Best Commentary

은혜로운 안수식

안수식을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는데 오셔서 목사의 소명을 부여하는 순서까지 맡아 주신 칼빈 신학교의 Julius Medenblik 총장님, 안수식에 참석하지 못하여 마음이 아팠던 아내와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무려 1시간의 생중계 카메라맨 역할을 하시느라 팔이 떨어질 정도로 수고하신 우병훈 목사님, 전종만 목사님과 김석현 목사님, 김효남 목사님, 박재은 목사님, 와 주시고 축하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아들처럼 사랑으로 늘 격려해 주시고 목회자의 본을 보여주신 Jack Roeda 목사님과 늘 동생처럼 10여년간 친구와 형님과 누님으로 늘 함께 한 Craig Koetsier와 Melinda Koetsier 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예전 미국에서 섬기던 교회에서 이곳까지 와 축하해 주신 분들과 미국 내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사랑과 격려와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고개를 숙입니다. 허다한 증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드는 종(Minister of the Word)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고 주께서 명하신 예전을 적법하게 집례하고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온전히 세우는 일에 바울(Paul)처럼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전무하는 목회자가 되도록 전력으로 질주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2014년 12월 12일 금요일

루터전집

지난 주 토요일에 "루터의 율법과 복음"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참조한 루터의 원문들이 인터넷에 공짜로 공유되어 있다. 방대한 루터전집 및 맬랑히톤 전집, 거의 링크되어 있다. 다만 루터의 경우 1513-1515년 시편주석 55권과 55-1권이 누락되어 있어서 안타깝다..

Luthers Werke

2014년 12월 11일 목요일

적응계시의 은혜

심지어 창조물에 대해서도 인간은 그것의 있는 그대로를 보거나 알 수 없습니다. 빛이나 입자 방식의 중계나 번역이 없이는 지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물이 지각되는 것도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적응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데, 우리의 본성적 지각을 벗어난 하나님은 더더욱 우리의 우둔한 머리에 적응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그분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적응계시 중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은 죄 이외에는 우리와 한결 같이 동일하실 정도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 최대의 적응이며 그런 적응을 통하여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하나님 지식의 최고점인 동시에 한계선이 되는 것입니다.

적응계시 이론과 관련하여, 인간은 유한할 뿐만 아니라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에게 성경이 적응된 것이라면 성경도 인간이 가진 모든 제한성과 부패성과 죄성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과 의심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성경이 인간의 불완전에 적응된 계시지만 성경 자체는 결코 불완전한 계시가 아닙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인간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사랑하고 계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에 당신이 의도하신 내용을 의도하신 방법대로 의도하신 분량만큼 계시했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성경은 어떠한 모자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은 무엇보다 하나님 편에서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도달하기 원하는 결론이나 디테일에 성경이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성경을 완전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인간이 보기에는 인간이 원하는 내용과 원하는 방식과 원하는 차원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불완전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 편에서의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서는 평가될 수 없는 책입니다.

다른 만물들도 그렇듯이 성경도 하나님의 자발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식과 방향과 목적을 따라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는 책입니다. 인간 중심성을 포기하는 자기부인 없이는 성경을 펼쳐도 종이와 잉크의 혼합물일 뿐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스스로 증거하고 있기에 “성경은 그 자체의 주석”(scripturam sui ipsius esse commentarium)이라는 성경의 자체 가신성은 성경 자체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원리이며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되 마치 논의나 논증을 통하여 도달하는 결론이 아닌 일방적인 계시를 대하듯이 진리의 영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이런 자세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숙지로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확신은 구원 밖에서는 이해될 수 없고 성령의 조명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믿음 이외의 방법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어 보입니다.

액츠 송년회의 격

조직신학 분과에서 가졌던 논문 발표회의 사진이다. 비록 고기맛과 숫불향에 관심과 의식의 코뚜레가 꿰이기는 했으나,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논하며 보내는 송년회의 격이 이렇다. 뿌듯했다.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논문의 전체와 디테일을 골고루 꼼꼼하게 지적하고 각자의 고유한 공부법과 논문작성 노하우와 해결책 제공에 전혀 인색함이 없는 교수님들 모습을 보면서 가슴도 뭉클했고 눈시울도 뜨거웠다. 학생들은 그런 조언들을 경청하며 수납적인 자세로 각자의 형편에 맞도록 이해하고 적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액츠의 허니문 학기를 끝마치며

액츠에 와서 첫 허니문 학기가 끝났습니다. 액츠 교수진의 일부가 되어 누린 너그럽고 풍성한 사랑과 외국어로 신학함을 도전하는 학부생들, 말씀의 수종자로 준비되기 위해 먼 나라에서 온 M.div 학생들, 본국으로 돌아가 교수로서 섬기기를 꿈꾸며 학자의 도상에 있는 석박사 외국인 학생들, 액츠 특유의 신학적 성향으로 빚어지고 있는 우리나라 석박사 학생들 등과 더불어 이루어진 첫학기 학문적 스킨쉽에 대한 평가는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감격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흠다운 곳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람들과 하나님을 궁구하며 함께 배운다는 사실이 지금도 꿈을 꾸는 것만 같습니다.

학생들의 과제물과 논문과 답안지를 읽으면서 성적을 매김과 동시에 지난 한 학기에 이루어진 나의 섬김도 반추하게 되더군요. 참 많은 생각이 머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1) 학생들을 더 사랑해야 되겠다는 것, 2) 사랑한 만큼 학생들도 변하고 자란다는 것, 3) 교수 편에서는 전달해야 할 진리의 품격을, 학생들 편에서는 고품격의 진리를 수납할 신앙과 학문적 소양을 동시에 높여주는 교수법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 4) 신학을 가르치는 것은 교실만이 아니라 삶이며 강의만이 아니라 인격적 소통까지 요구하고 있다는 것, 5) 교육은 하나님의 영광과 개인의 영적 학문적 성숙과 교회적인 건덕을 동시에 지향해야 한다는 것, 6) 수업에 박사학위 논문이나 전문 학술서를 저술하는 정도의 연구력과 집중력을 투여해야 한다는 것, 7) 가르친 이후에는 학생들이 최소한 교수의 수준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목표를 늘 의식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다음 학기에는 어떠한 일들이 발생할지,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준비에 돌입해야 겠습니다. 사랑과 실력과 겸손과 관용과 인내로써 향기나는 산 제사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흠양되는 학기이길 소원하며 말입니다...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안수에 즈음하여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궤변들과 모든 오만한 것들을 다 파하며 모든 마음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예수께 복종하게 한다"(고후10:5).

처음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 무렵 나의 정신세계 전반을 꿰뚫은 말씀이다. 학창시절, 철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경제학과 법학과 의학과 신문방송학과 정치학을 조금 배우면서 관심의 촉수는 언제나 제반 학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느냐의 여부를 더듬었다. 물론 '여기가 좋사오니' 탄성을 지르면서 안주하고 싶은 일반학문 내에서의 매혹적인 주제들에 홀린 것도 그 수효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분야든 우주 전체와 지극히 미세한 구석까지 두루 아우르는 하나님의 속성과 절대적 주권에 대해 감히 입을 다물어 침묵하는 학문은 하나도 없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심지어 악한 것들도 악한 날에 적당히 지으셔서 아름답게 하셨다는 지혜자의 기록처럼 직접적인 방식이든 간접적인 방식이든 하나님의 속성과 행하시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선포되고 결코 가리워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하나님 아는 지식을 대적하는 교묘하고 은밀하고 능란한 거짓과 속임수의 온갖 원흉들이 모든 분야에서 우매자의 영혼을 삼키려고 끈적한 군침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도 감지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 거짓과 속임수는 늘상 높아지려 하고 이미 드높아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다. 다른 대체물이 없다.

목회자의 길에 대한 결정의 기로에 서 있던 나에게 판단의 목덜미를 당기며 가장 집요하게 저지한 망설임의 주범은 참과 거짓의 문제였다. 대상과 주체의 진실성을 추구하고 싶었다. 지금 내뱉은 말은 시공간이 변하면서 얼마든지 거짓과 오류로 간주될 가능성에 늘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과 땅의 체질이 녹아져 없어진다 할지라도 시공간적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대상의 진실성은 말씀만이 보증한다.

물론 인간 주체의 진실성은 죽었다 깨어나도 확보되지 못한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인간의 마음은 수리나 치료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차원은 일찍이 첫 조상의 불순종에 의해 벗어났다. 자신을 응시하면 할수록 탄식과 좌절만 증폭된다. 그냥 죽고 거듭나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만이 주체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유일한 소망이다.

하나님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권세와 신분과 계층과 지식과 관습과 전통과 성향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앞에 복종의 무릎을 꿇게 하겠다는 목회적 다짐은 인간의 능력과 결단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바울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달린 문제다. 우리가 규정한 대적과, 우리가 마련한 방식과, 우리가 결정한 시점과, 우리가 결의한 인간적인 힘의 합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길을 실컷 질주하다 때가 이르러 주님께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안수의 날을 맞이한다. 이렇게도 못나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무지하고 비천한 자를 부르시는 자비의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나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주변에서 묵묵히 사랑으로 포용해 준 아내와 아이들과 지인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다. 

2014년 12월 9일 화요일

살아가며 배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나의 겉모습이 아니라 깊고 은밀한 본성이 드러난다. 그러면 회개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말씀은 돌이켜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성경을 대면할 때마다 이렇게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나를 슬퍼하고 주님을 기뻐한다. 이러기를 일평생 반복한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진리의 토대는 마음의 심연에 견고히 다져진다. 그 토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 속에서 그분에게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고 그분과 동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인생의 도리라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2014년 12월 5일 금요일

축복과 저주의 혼돈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잠27:14)

축복과 저주가 동전의 양면처럼 개념의 등짝을 맞대고 있는 구절이다. 동시에 내용과 방법의 긴밀한 연관성도 드러내는 지혜자의 금언이다. 축복은 귀하고 좋은 내용이다. 그러나 축복을 전달하는 방법이 축복의 고귀함에 상응하지 않으면 비록 축복 자체가 변경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주처럼 여김을 받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세포는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한 이후에 비자기 세포를 파괴하는 기이한 면역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잘못 구분하여 자기를 비자기로 여기거나 비자기를 자기로 간주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자기를 비자기로 착각하여 파괴하는 경우가 비자기를 자기로 착각하여 용인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태라고 한다.

지혜자는 본문에서 저주를 축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저주로 여겨 배척하는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즉 보다 위험한 상태를 경고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진리를 전하면서 마치 거짓인 것처럼 전달하는 것은 거짓을 전하면서 마치 진리인 것처럼 전달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이는 거짓을 소유한 자들이 아니라 진리를 소유한 자들을 겨냥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와 최고의 복을 소유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고 복을 나누면서 마치 거짓을 증거하고 저주를 퍼뜨리는 원흉으로 오해를 받는다면 세상에 그것보다 위험하고 안타까운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면 그런 일들이 곳곳에서 편만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가장 지고한 진리를 알고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 자신이 선물로 주어진 바 된 우리가 세상에 가장 심각하고 끔찍한 위험의 원흉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소름이 온 몸을 급하게 뒤덮는다.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의 인격과 삶은 그 자체가 축복을 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는 우리에게 복음에 합당한 인격과 삶을 요구한다.

우리는 축복이 타인에게 저주로 둔갑하는 일들의 원흉으로 발견되지 않도록 값없이 받은 복음을 값없이 전달하는 삶을 경주해야 한다. 축복을 축복으로 여기는 일에 우리가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이른 아침의 경박한 큰 소리 방식'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길을 뒤따르지 않으면 무엇이든 합당하지 않다.

복을 복으로 전달하는 유일한 방식은 주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다. 지금 세상은 기독교를 마치 더러운 버러지인 양 불쾌한 눈길로 쳐다본다. 복이 저주로 여겨지고 있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복을 저주의 옷으로 뒤덮어서 버려지게 만든 우리의 실상을 인정하고 정확한 타이밍과 최고급 어조로 복을 전하는 인격과 삶의 준비가 시급하다. 주의 은혜를 부르짖게 된다.

2014년 12월 3일 수요일

성경의 침묵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3:11)

이 말씀은 계시의 정도와 분량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증거한다. 또한 인간에게 적정한 무지가 있음은 하나님의 의도라는 선언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 추구욕은 이러한 사실이 거북하다. 사람의 머리에는 어느 정도 알면 더 이상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 만족의 적정선이 있다.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호기심의 촉수가 미친듯이 운신한다.

그런데도 성경은 인간의 굶주린 호기심을 만족시킬 만큼의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인간사에 대한 신적인 개입의 처음과 끝을 측량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게 성경의 분명한 입장이다. 그래서 선택해야 한다. 호기심을 따를 것인지, 성경이 호기심의 중지를 요구하는 지점에 머물 것인지를 말이다.

성경은 인간의 의문이 다 풀리도록 모든 것을 시원하고 후련하게 다 밝히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식이 얼굴을 대면하는 수준의 전체성과 명료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알고 희미하게 안다. 어떠한 주제를 잡더라도 이러한 지식의 뿌연 부분성과 마주친다. 최고급 지성을 동원해도 그런 무지의 그늘은 제거되지 않는다. 늘 그 이유가 궁금했다.

과거를 파헤쳤다. 믿음의 선배들은 출입을 불허하는 지식의 경계선에 대해 맹렬한 호기심 발동이 아니라 경외와 경탄의 태도를 취하였다. 주께서 당시의 행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신 것은 전도자의 기록처럼 그의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사람들의 어떠한 훼방이나 조작도 없이 영원토록 보존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정하신 것과 정한대로 행하신 모든 것들은 어떠한 피조물에 의해서도 더함이나 덜함도 없게 하셨다고 전도자는 기록한다. 이렇게 행하심의 의도에 대해 전도자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 알았다"고 진술한다. 그렇다. 지식과 무지 사이에 적정한 경계선이 그어진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계시된 만큼도 모르는 무지는 패망을 가져온다. 그러나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무지의 영역은 모르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모르는 무지에 머물라는 게 아니다. 성경이 그어놓은 침묵의 경계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여호와 경외와 경탄까지 이르러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경외의 탄성을 지른 바울처럼...

2014년 12월 1일 월요일

하나님의 의와 은혜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시145:17)

시인의 노래처럼 하나님은 모든 일에 은혜롭고 모든 행위에 의로우신 분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으로 인해 심장이 크게 울립니다. 여기에 의롭지 않다거나 은혜롭지 않다는 판단의 토를 달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감동으로 시인의 입술을 열어 친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움직여진 시인의 붓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정을 선명한 필체로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 누구의 어떠한 판단도 중지를 엄명하는 짤은 이 한 마디가 왜 그렇게도 큰 평강과 기쁨과 위로가 되는지를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이루어진 모든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에게 판단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경탄하며 찬미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늘 수납자의 자리에 머물러야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판단자일 수는 없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에 몸과 마음과 머리의 꼭지가 틀어지는 상황이 펼쳐져도 절망할 수 없는 이유는 한번도 포기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의롭고 의혜로운 섭리에 있습니다. 세상의 꼬라지가 엄두도 못낼 교회의 밑바닥 꼬라지에 대해서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더욱 심한 괴수의 꼬라지가 내게서 보인다 할지라도 주저앉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범사에 무시로 하나님의 의와 은총을 읽어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그러신 분이라는 시인의 선포에 있습니다. 어설픈 판단으로 경박한 반론을 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선포된 말씀에 근거하여 현상을 해석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하루종일 호흡하는 날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14년 11월 27일 목요일

어리석은 자와의 대화

어리석은 자와 같아지지 않도록 그의 우매함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지 말고, 어리석은 자가 자기의 눈에 지혜롭게 되지 않도록 그의 우매함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잠26:4-5).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이는 우매한 자에게 대답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가 뚜렷하지 않은 탓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말씀이 대답을 하라는 것과 말라는 것 사이의 양자택일 문제를 거론하고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두 가지 모두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와 대화할 때에는 그가 설정한 논지와 논리의 우매한 프레임이 있습니다. 지혜자는 우리에게 그런 우해함을 따라 대답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우매자와 같아지는 것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단서가 있습니다. 물론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지혜자는 대답을 "하라"는 말에 뒤이어 대답하지 "말라"고도 권합니다. 그러나 우매자가 자신의 기준과 판단으로 스스로를 지혜로운 자로 여기도록 방치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매자와 그의 우매한 프레임이 싫다고 입을 다물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우매자가 소통할 수 없는 고매한 기준을 따라 대답하는 것은 그에게 대답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매자의 논법을 따라 답하되 그 논법에 동화되는 것은  피하면서 우매자가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여기지는 않도록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우매자의 기준을 따라 대답하지 않는 것은 그와 같아지지 않을 수 있는 쉬운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무반응이 우매자가 스스로를 지혜로운 자로 여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지혜자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대답하지 않는 것은 지혜일 것입니다.

어떠한 행위 자체가 지혜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매한 자와 소통할 때에 그의 우매함을 따라 대답을 하고 안하고가 지혜인 것은 방향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우매하게 되는 방향과 우매자가 스스로를 지혜자로 여기는 방향을 피하는 반응이 지혜일 것입니다.

대답을 하고 안하고의 목적과 방향은 어리석은 자와 같아지지 않으면서 어리석은 자가 스스로를 지혜로운 자로 여기는 도취에 빠지지는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매함을 멀리하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나 우매자의 자아도취 방지만을 추구하는 반응은 다 온전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추구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어법을 존중함이 이 사안에 대해서도 최고의 지혜인 것 같습니다. 비록 생뚱맞은 비약으로 보이지만 전체를 조망하면 잠언의 키워드인 여호와 경외가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포획하는 비법일 것입니다. 

2014년 11월 25일 화요일

영혼을 제어하라

자기의 영혼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무너져 성벽이 없는 성과 같으니라 (잠25:28)

제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괜찮은 영혼의 소유자는 없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죄악된 본성을 가졌기에 제어될 필요가 있습니다. 제어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지혜자는 성과 사람을 비교하고 영혼의 제어가 없는 것과 성벽이 없는 것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성벽이 없는 성은 성의 기능을 못합니다. 영혼의 제어가 없는 사람은 사람의 구실을 못합니다. 인간은 선하지 않고 악하기 때문에 제어가 없으면 죄악만 저지를 것입니다. 성벽이 없으면 원수들의 공격에 벌거벗은 것처럼 노출되듯, 영혼의 제어가 없으면 우리의 원수인 죄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 것입니다.

성벽이 없으면 성의 모든 것들이 위험에 빠지듯이, 모든 정신적인 활동의 원천인 영혼도 제어되지 않으면 인간의 모든 것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말 것입니다. 감정도 제어되지 않고, 판단도 제어되지 않고, 생각도 제어되지 않고, 언어도 제어되지 않고, 몸도 제어되지 않고, 행실도 제어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발산하여 달성한 성의 탈환보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제어해서 이루어진 마음의 다스림이 낫다는 지혜자의 말에 수긍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 집니다. 영혼의 제어는 사실 자기를 부인하되 피흘리는 수준 그 이상의 싸움을 치루는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영혼을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도록 어렵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혀를 다스리는 것도 심히 어려운데, 보이지 않는 영혼을 다스리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일까요?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비법은 은혜밖에 없습니다. 야고보의 기록처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영혼을 제어함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은혜의 일입니다. 물론 마음을 다스리고 이성을 다스리고 혀를 다스리고 몸을 다스리는 훈련과 연습에 매진해야 하겠으나 은혜가 가득해야 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제어를 주님께 맡깁니다. 내 안에 까칠한 성질이 움직일 조짐이 보이면 곧장 주님을 찾습니다.

끝으로 자기의 영혼을 제어해야 한다는 말을 타인에게 적용하고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 못된 습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로 아이들을 권면한 이후에 오늘의 예배를 접었는데 녀석들이 숙연해 졌습니다. 대충은 알아 들은 모양입니다. 영혼이든 마음이든 주께서 지키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일 것입니다...

묵상집 머리말

더 깊은 묵상을 고대하며: 누가 먼저 주께 드려 갚으심을 받겠느냐?

묵상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일입니다. 당연히 두렵고 떨리는 일이면서 놀랍고 황홀한 일입니다. 물론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측량을 불허하는 거룩의 무한한 격차 때문에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날마다 순간마다 대면하는 가장 안전하고 지속적인 방식을 주께서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소통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을 만나러 지성소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땅에서 어떤 조건을 구비하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 주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면서 지성소를 가리던 휘장을 찢으셨기 때문에 원하기만 하면 무시로 출입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하는 십계명만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궤 위에 임하셔서 당신의 백성과 소통을 하셨으며, 나중에는 말씀이신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친히 소통이 길이 되셨으며,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신 이후에는 기록으로 남기신 말씀을 성령의 증거와 믿음의 들음으로 수납하게 함으로써 지금도 소통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록된 말씀의 묵상은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던 지성소의 일입니다.

지성소 출입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시고 위하여 휘장을 찢어주신 모든 하나님의 사람에게 허락된 일입니다. 그런데 이 특권을 누리지 않는 분들이 많아 보입니다. 어쩌면 특권을 특권으로 알지 못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저도 묵상의 깊이에 있어서는 여전히 초보의 어설픈 걸음마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묵상이 지극히 영광스런 특권이며 지극히 감미로운 선물이며 하루라도 거르면 생존이 위태로운 지극히 기본적인 영혼의 끼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묵상을 했습니다. 주어지는 깨달음의 수효는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과 비례하여 늘어나고 있습니다. 해가 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과의 무수한 반복 속에서도 그 새로운 깨달음의 샘은 좀처럼 마르지를 않습니다. 아침마다 그 신적인 성실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묵상법에 있어서 처음에는 제 자신이 묵상의 그물망이 되어 자아 중심적인 깨달음을 건지고 그것을 축적하는 것이 마냥 좋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묵상의 입맛이 바뀝니다. 묵상의 짬밥이 쌓일수록 교훈을 건지는 주체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깨닫기를 원하시는 진리의 본질에 제가 참여하고 그 진리를 수납하는 식으로 말씀을 대하는 그런 묵상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주님의 주도성, 주님의 우선성, 주님의 기준성, 주님의 방향성, 주님의 방법론, 주님의 최종성이 인정되면 될수록 묵상은 깊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뒤집어서 본다면, 묵상을 방해하는 가장 치명적인 인자는 바로 제 자신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은 클수록, 저의 존재감은 적을수록 묵상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는 더해지는 듯합니다.

묵상이 생각의 세계에 머물면 특유의 높은 휘발성 때문에 삽시간에 망각되고 말 것입니다. 흩어지기 전에 언어의 옷을 입히고 지면에 활자의 닻을 내려야 오래 보존될 수 있습니다. 묵상에서 나온 선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위탁된 것이기에 수령자는 청지기의 책임을 갖습니다. 위탁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을 하다가 진리의 극미한 조각이라 할지라도 망각으로 인해 흩어짐을 면하고자 서둘러 조촐한 블로그에 활자의 체인으로 묶어두려 했습니다. 어느 새 분량이 두툼해 졌습니다. 저의 신학과 삶의 뼈대와 살쩜은 이러한 진리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맞추어진 결과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묵상의 나날 속에서 조금 익힌 어설픈 묵상법과 묵상의 초라한 배설물을 엮어서 책으로 낸다는 결정에 이르기까지는 몇 차례의 망설임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묵상집 출간은 제 사유의 꾸며지지 않은 민낯과 속살을 공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탄탄하고 정갈한 조직과 체계가 구비되기 이전에 한 신학자의 머리와 가슴에 나날이 고인 내용물을 주께서 베푸신 그대로 공유하는 것도 무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묵상집을 출간하게 된 것은 세움북스 강인구 대표님의 적극적인 관심과 배려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묵상은 저를 둘러싼 인간문맥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가족들과 동료들과 친구들과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의 사랑과 어울림이 없었다면 묵상의 내용들이 산출되는 계기가 마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묵상의 궁극적인 주체요 대상이요 목적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Soli Deo Gloria!

2014년 끝자락에 선 양평에서
한병수

2014년 11월 21일 금요일

준비되는 것이 관건이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 하느니라 (잠20:21)

오늘은 단계별 질문을 던지며 아이들이 말씀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는 자가학습 메시지를 시도해 봤습니다. 여기서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탐욕에 기초한 행위로 말미암아 이른 시기에 취득된 유산'을 뜻합니다. 본문은 그런 유산이 결국에는 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른 시기에 취득된 유산은 왜 복이 되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이른 시기'라는 말에서 유산의 취득자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유추가 가능하고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어떠한 것이 주어져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복이 되지 않는다고 답합니다.

복은 주어지는 유산의 내용에도 의존하고 있지만 동시에 수납자의 준비에도 의존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유산의 내용보다 그것을 수납하는 자가 유산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올바르게 대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복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유산을 복으로 알고 받아들일 준비보다 유산의 분량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유산은 준비된 만큼 주어지는 것이 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산에 의존하고 되고 유산에 휘둘리게 되고 결국 급기야 유산의 조정을 받습니다. 이것은 복이 아닙니다.

복은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산이 주어질 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단적인 복으로 간주할 줄 모르면 그 유산에 만족하게 되고 소망을 걸고 갈망하게 되고 매달리는 수순이 이어질 것입니다. 복은 유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받을 준비의 부재로 인해 소멸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향해 말씀의 이러한 의미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답변이 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다려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복은 복의 근원이고 최고의 복 자체이신 하나님과 무관하면 더 이상 복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려주길 원하시는 유산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나님의 유산은 무한하고 영원하고 천상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겐 땅에서의 유한하고 일시적인 것에 집착의 코를 박고 탐욕의 군침을 흘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른 시기'의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유산을 무한하고 영원하고 천상적인 복인 줄 알고 받아들일 준비에 만전을 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된 때가 상속의 적기인 것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유산은 늘 준비되어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미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의 고귀한 생명으로 값주고 사신 바 된 우리는 어떤 자이며, 하나님과 우리는 어떤 관계이며, 우리의 존재와 삶은 어느 방향으로 가며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최상의 준비인 듯합니다.

미비된 상태로 급하게 취득된 무엇에 현혹되지 않고 늘 자신을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로 준비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들이 된다면 정말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2014년 11월 19일 수요일

분노의 지나감

사람의 슬기는 분노를 유보하고
공격을 지나가는 것은 자기에게 영광이 되느니라 (잠19:11)

오늘은 가정예배 시간에 자식들과 분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이 너에게 있지만 너는 그것을 다스리라 했습니다.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죄가 그 빈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선행과 죄는 그렇게 등짝을 맞대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는 분노에 민첩하지 않습니다. 분노에 압도되는 것은 죄를 다스리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노를 유보하는 자에게는 죄의 소원이 머물 빈자리가 없습니다. 분노를 유보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어떤 유형의 죄도 다스릴 수 있는 자입니다. 분노의 유보는 선한 것입니다.

우리를 공격하고 비방하고 헐뜯는 말과 행동과 상황에 우리는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때마다 지나갈 수 있다면 슬기로운 자입니다. 그에게는 영광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든 행위든 공격을 그냥 지나가지 않고 보복을 가하면 영광이 그냥 지나갈 것입니다.

여기서 영광은 땅에서 챙긴 유익에서 비롯되는 지상적인 보답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창조하고 백성으로 택한 자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시고 죽기까지 하신 주님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신 그런 영광과 유사한 것입니다.

아이들을 향해 준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공격을 당하는 상황은 영광이 주어지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지나갈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 사람의 능으로는 안되기에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베드로의 칼을 책망하신 것처럼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낳습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분노를 제거하는 방법은 지나가는 것이며 이는 십자가의 지혜와 능력으로 가능한 일임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 되시면 참 좋겠습니다~~

기쁨이 실력이다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 퍼뜨리는 것을 기뻐한다 (잠18:2)

가정예배 시간에 이 말씀으로 아이들과 3가지의 교훈을 나누었다. 첫째 자신의 의사 퍼뜨리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 무엇을 기뻐하고 있느냐가 나를 진단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셋째 기쁨의 체질은 인간이 스스로 변경하지 못하므로 명철을 기뻐하는 체질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간구는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까지다.

내가 기뻐한다 할지라도 행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들은 자제해야 한다. 행함으로 인해 자신과 타인에게 피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기뻐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보증이 없다. 만약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면 안심해도 되겠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다 자제의 대상이다. 내가 무엇을 기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내가 누구이며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확인된다. 나의 지식, 나의 생각, 나의 판단, 나의 소유, 나의 유익, 나의 논리만 사방으로 발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무진장 기뻐한다. 그의 생은 그 기쁨을 추구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이다.

내가 무엇을 기뻐하고 있느냐가 실력이다. 신령한 것을 기뻐하는 자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 기쁨이다. 일평생 기쁨으로 하나님을 지향한다. 명철을 기뻐하는 자는 지식과 지혜가 즐거움 중에 축적된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과 지혜의 습득이 고역이다. 글쓰기를 기뻐하는 자는 책과 논문을 생산하는 일이 고단하지 않다. 소통이 기쁨인 사람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에너지의 고갈이나 정신적 탈진으로 이어지지 아니한다. 사람들을 만날수록 기쁨이 증폭된다. 물론 분기점은 있다. 꿀도 족하리만치 먹어야 하듯이.

부모는 자녀들의 그릇된 행실도 교정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녀들이 어떤 것을 기뻐하는 것에 대해 부모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호가 교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녀들과 싸우는 건 감정만 상하게 하고 갈등의 골만 깊어지게 한다. 기쁨이 관건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은 무엇을 기뻐하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로 하루를 시작하자.

2014년 11월 18일 화요일

예정론 탐구

예정은 비록 피조물을 대상으로 삼지만 시공간이 마련되기 이전의 영원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이어서 참으로 신비롭고 난해하다. 이렇게 신적인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한하고 부패한 지성의 소유자인 인간이 무흠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칼빈의 경계는 과장이 아니겠다.

하나님의 예정을 인간의 헛된 호기심과 상상으로 접근하면,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고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미로로 진입하는 것이라는 그의 설명도 참으로 진솔하다. 예정론 탐구는 하나님의 신적인 지혜의 거룩한 심연으로 들어가는 일이기에 최고의 적정과 절도가 요구된다.

주께서 깊이 감추어 두시기로 정하신 사안을 인간이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거나 영원하고 숭고한 지혜를 인간이 억지로 파헤치려 하는 것은 결단코 올바르지 않다. 사안의 정도가 엄중하고 고결한 그 만큼의 깊은 겸손과 경건으로 겸비하지 않고 무작정 경박하게 뛰어드는 인간의 고삐풀린 기질을 우리는 철저히 거절해야 한다. 

2014년 11월 17일 월요일

선한 싸움을 싸우라

삶은 싸움이다. 그러나 싸움에도 차원과 격이라는 게 있다.

1. 건강 싸움이다. 오늘날 건강보다 치열한 싸움의 대상은 없다. 그러나 시간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 싸움에서 이긴 사람들이 누리는 승리감은 시한부다. 시한부 집중력만 투입하면 된다. 그 이상은 우상이다.

2. 재정 싸움이다. 먹거리의 확보는 모든 생물의 본능이다. 생계의 유지는 삶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단연 일순위다. 그래서 모두들 치열하게 일하고 치열하게 번다.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위장의 풍만에 모든 것을 걸기에는 인생이 너무나도 아깝다. 부하지도 않고 빈하지도 않은 정도로만 덤비면 되는 싸움이다.

3. 시간 싸움이다. 촌음을 쪼개는 건 현대인의 기본이다. 이유는 24시간의 제한적인 시간에 인간의 욕망을 다 담아낼 수 없어서다. 시간은 늘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관리 방식은 욕망의 질과 양을 조절하는 수밖에. 욕망의 단순화와 선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4. 스펙 싸움이다. 이력서에 한 줄을 넣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런 부산한 움직임이 고작 한 줄이다. 우리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어쩌면 단 한 문장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스펙의 두께가 몸값을 좌우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스펙이 주님의 호주머니 안의 저울추에 달리우면, 무게값이 달라진다. 땅에서의 스펙은 고작 사람들을 설득하는 수준이다. 적당히만 싸워도 된다.

5. 진리 싸움이다. 옳고그름 문제를 말한다. 이 싸움은 대단히 치열하다. 여기에서 지면 회복의 다른 대체물이 없을 정도로 사활을 거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그러나 제대로 안다고 할지라도 땅에 계시된 진리의 분량이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 부분이며 게다가 명확하지 않고 희미하게 아는 수준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심판이 내려지는 진리의 싸움은 땅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땅에서는 진리의 적정선이 있다. 계시가 기준이다. 더 알려고도 말고 덜 알아서도 안되는 기준 말이다.

6. 성품 싸움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싸움의 최고급 차원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 발휘되는 사람이 되고 삶을 사느냐의 싸움이다. 삶은 언제나 내가 기준이 되어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한다. 이 때, 우리는 대체로 주변 요인들을 바꾸는 싸움에 몰입한다. 아니다. 싸움의 대상은 성품이다. 성품이 바뀌면 기쁨과 슬픔과 분노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2014년 11월 14일 금요일

미련의 정체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잠14:9)

자신의 미련함을 진단하는 척도는 죄를 심상히 여기느냐 아니냐에 있다. 죄는 죄의 대상인 하나님과 죄의 주체인 인간이 맞물린 용어다. 죄를 심상히 여긴다는 것은 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죄는 본질상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의미하며, 경중을 무론하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겨냥한다. 사람이나 다른 피조물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더라도 궁극적인 면에서는 하나님과 관계한다. 죄를 심상히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안중에도 없다는 의미이다.

죄는 사실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거처도 없고 흔적도 없다. 그런 대상을 심상히 여기지 않으려면 죄 자체와의 소극적인 씨름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식이 보다 적극적인 상책이다.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죄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죄와의 지속적인 씨름보다 하나님 경외와 하루종일 뒹구는 씨름이 정신적인 건강에도 유익하다. 여호와 경외가 어떤 곳에서는 "주의 인자를 바라는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주의 인자를 자신의 생명보다 바라는 것이 여호와 경외이며 죄를 미워하는 것인 셈이다.

사람의 미련은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어도" 벗겨지지 않는다고 지혜자는 판단한다. 이는 죄를 심상히 여기는 자의 습성이 좀처럼 제거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여겨진다. 이런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그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인자를 갈망하는 경건의 지속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이 단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으로 굳어지기까지...

2014년 11월 12일 수요일

하나님께 반응하는 다윗

하나님께 반응하는 다윗 (삼하16:5-13)

상황: 다윗은 왕이지만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 의해 쫓기는 신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 가문의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다윗과 그의 모든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주저했다.

시므이 저주의 내용: 1) 다윗은 사울 및 그의 족속들을 피흘리게 한 자다, 2) 벨리알의 사람이다, 3) 하나님이 압살롬의 손에 왕국을 넘기셨다. 즉 다윗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화를 자초한 것이라는 진단이다.

시므이의 변화(삼하19:19-20): 전에는 시므이가 다윗을 ‘피 흘린 자, 벨리알의 사람’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내 주여, 내 주 왕께서, 내 주 왕’이라 부르고, 본인을 ‘종, 왕의 종’으로 지칭한다.

시므이의 청원: 1) 자신에게 죄를 주지 말라; 2) 자신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말며 마음에 두지 말라; 3) 자신의 범죄한 것을 인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이스라엘(요셉의 온 족속) 중 가장 먼저 내려와 다윗 왕을 영접했다.

분석 1: 다윗은 사울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와 그의 족속의 피를 흘리게 하지도 않았다. 죽여도 마땅한 원수였고 죽일 기회도 있었으나 옷자락에 칼만 살짝 대었으며 그런 행위에 대해서도 심히 괴로운 마음으로 회개해야 했던 인물이 다윗이다. 이처럼 시므이의 저주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

분석2: 다윗이 돌던짐을 받았다. 과거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며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물리쳤던 용맹한 믿음의 소년이요 영웅의 모습을 보였던 것(삼상 17:43∼49)과는 극적으로 대조된다. 만감이 교차했을 듯하다. 원수를 넘어뜨린 돌이 이제는 저주와 조롱의 돌맹이가 되어 자신에게 날아왔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장대한 적장을 무찌르던 영웅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드는 자리에서 폐족의 찌끄러기 인물에 의해 터무니 없는 조롱을 당하고 있다. 참으로 깊은 회개의 상황이다.

분석 3: 시므이는 다윗을 벨리알의 사람이라 하였다. 한글 성경에는 “사악한 자”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단순한 사악함을 넘어 사탄에게 속한 사람이란 뉘앙스가 짙게 풍기는 단어이다. 시므이는 기분이 몹시도 나쁠 언어만 골라서 다윗을 저주했다. 고후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벨리알은 그리스도 예수와 나란히 대조되는 존재이다.

분석4: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칼로부터 도망치는 신세에 처하였다. 그러나 그 원인은 사울의 피를 흘려서가 아니다. 시므이의 진단은 엉터리다.

충복들의 반응: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 하였다. 아비새의 눈에 시므이는 “죽은 개”였다. 아비새의 개인적인 견해만은 아니었다. 다윗은 “스루야의 아들들”을 언급하며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묶어서 아비새의 이해와 처신을 지적했다.

다윗의 반응: 1)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다. 2)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3)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감히 시므이의 저주에 대해 힐문할 자가 없다. 4) 원통한 상황인 것을 다윗도 안다. 하나님이 감찰하고 계시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시므이의 저주를 오히려 하나님의 선이 베풀어질 기회라고 생각한다. 5) 19장 22절: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사탄)가 되느냐?

의문: 어떻게 “죽은 개”로 간주되는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해하고, 충복들의 충성스런 반응은 “사탄”의 행위로 이해될 수 있는가? 다윗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았던 사람이다. 하나님과 사탄이란 먼 원인들을 사려했다. 하나님 중심적인 이해와 처신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것과 결부되어 있다.

교훈: 1) 우리는 삶 속에서 너무도 가까운 원인들을 주목하고 거기에 반응하며 살아간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심지어 원수의 입술에서 저주가 쏟아져도 하나님의 명령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2) 이 땅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임을 인정해야 한다. 참으로 믿음의 선배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반응하며 살아갔다. 욥의 삶을 보면 그의 엄청난 고난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의 개입이 목격된다: 하나님, 사탄, 갈대아 사람, 대풍, 여호와의 불. 그러나 욥은 이 모든 사태를 이해할 때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언사로 정리했다. 요셉도 참으로 끔찍한 형제들의 배신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가 애굽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허락 없이는 수족도 놀리지 못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어도 형들에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는 말로 사태의 전모를 이해하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아버지의 원대로 되어지는 일로 여기셨고 죽음의 쓴 잔을 자원하여 받으셨다. 

고난의 방식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8:17)

어떠한 종류의 고난이든,
고난은
깊은 세계로의 초청이다.

그런 고난의 초청을 거부하면
경박에의 안주는
불가피한 결과겠다.

고난을 만나거든
급한 해결책 추구에
허덕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단순한 생각으로 내려진
깔끔한 결론의 유혹도
경계해야 한다.

고난은 고통을 수반한다.
깊은 진리는
그 고통의 틈새를 파고든다.

그것은 잊을 수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도록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질서를 다 아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존중하며 끝까지 인내하자. 

2014년 11월 7일 금요일

무해석 묵상의 묘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해석에 관여하는 몸의 기능들이 급하게 작동한다. 묵상은 해석을 지향한다. 이의가 없다. 그러나 해석 일변도의 묵상은 다분히 지성적인 요소의 과장일 수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

어떤 날에는 성경을 묵상하며 해석 모드를 해제하는 경우가 있다. 묵상하며 말씀의 있는 그대로에 인간의 어떠한 생각도 섞지 않으려고 그냥 말씀 그대로가 남도록 하는 경우이다. 이는 무해석 묵상론을 두둔하려 함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의 우를 범하지 않고 저자의 본래적인 의도에 이르려는 엄격한 자기부인 독법의 추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미에 있어서나 가치에 있어서나 권위에 있어서나 인간의 어떠한 가감도 불허하는 최적과 최고의 계시이다. 이 땅에서 주어질 수 있는 영혼의 가장 좋은 양식이다. 양념을 치고 기교를 부리고 요리를 해서 더 좋아지는 무엇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재료가 아니다. 그 자체로 최종적인 요리이다. 이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먹는 자가 지혜로운 이유이다.

꼼꼼한 논리적 분석력과 깔끔한 정리력과 화려한 수사력이 없더라도 묵상에는 큰 지장이 없다. 물론 말씀을 맡은 교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방위적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묵상이 누군가를 가르칠 꺼리 마련하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을 가장 선명한 거울에 비추고 성찰하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이끌림을 받는 것이라면 묵상은 모두에게 열린 광장이다.

그러나 검증된 방법론의 동원 없이도 능숙하게 묵상의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할 실력자는 오늘날 희귀하다. 몽학선생 정도의 도우미가 필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묵상의 깊은 세계를 출입하는 분들의 노하우는 유용하다. 그러나 외부에서 짜준 틀 속에서의 묵상은 묵상의 최종적인 경지는 아니기에 형언할 수 없는 독생자의 영광이 읽어질 때까지 진전해야 한다.

오늘은 해석모드 해제의 맛이 유난히도 달콤했다. 말씀으로 만나는 하나님 자신이 묵상의 백미라는 결론으로 하루를 연다...

2014년 11월 4일 화요일

깊은 신앙의 테스트와 초청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17:1)

자녀를 주겠다는 약속은 이미 24년 전에 주어졌다. 그러나 자녀의 소식은 없고 하나님은 그저 자신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밝히신다. 약속도 지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전능은 과연 어떤 속성일까? 왕주먹 같은 막강한 에너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휘감았을 법한 상황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사람들 앞에서의 완전이 아니라 의와 진리와 거룩에 있어서 제한이 없으신 전능의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이다.

믿음의 조상도 심기가 많이 뒤틀렸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는 말은 이미 24년간 귓가를 맴돌던 상투적인 문구였다. 아브람의 아내로 하여금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라는 공약도 24년째 쳇바퀴만 맴도는 문구였다. 이에 믿음의 조상은 하갈을 통해 낳은 서자 이스마엘 삶이라도 형통하면 좋겠다며 말뿐인 하나님의 24년째 출산공약 불이행에 대한 서운함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중요한 믿음의 은밀한 테스트요 깊은 신앙에의 초청이다. 믿음의 조상에게 주어진 믿음의 테스트는 자신에게 어떠한 지각이나 경험이나 구체적인 선물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오로지 하나님 자신 때문에 행하여 완전함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테스트다. 만만치가 않다. 더군다나 아브람은 심기도 불편하고 마음의 서운함도 극에 달한 시점이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어떤 차원까지 이르러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초청이다. 땅의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 근거를 둔 신앙에의 초청!

태가 끊어지고 자녀에 대한 소망의 씨가 완전히 말라버린 상황 속에서도 한 아이의 아비가 아니라 여러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전능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땅의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이나 사태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아니한다. 하나님은 비록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수십년째 성취되지 않고 성취에 대한 기대감의 기미도 종적을 감춘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전능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처신에는 흠이 없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도록 믿음의 조상을 부르셨다. 이는 본문이 신앙의 깊은 테스트요 깊은 신앙에의 초청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삭이 주어지고 자신의 신앙을 뒤따르는 무리들이 중다하여 바닷가 모래의 수효보다 많고 하늘의 별들보다 더 헤아릴 수 없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 믿음은 여전히 땅에서의 현상에 의존한 땅의 신앙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루신 일들을 찬양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이루어진 일의 유무가 우리에게 신앙의 근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아니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은 경험 의존적인 신앙, 논리 의존적인 신앙, 이해 의존적인 신앙, 환경 의존적인 신앙이 아니라 계시 의존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되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보다 더 강하고 향기로운 신앙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테스트와 초청이 때때로 주어진다. 그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전능하신 분이시며 우리는 그런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한 삶의 여정을 주님 오실 그때까지 고수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속성은 땅의 일로 인해 좌우되지 않는다. 혹 하나님의 속성과 상치되는 일이 땅의 현상으로 펼쳐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여 그 현상을 해석함이 정당하다. 이는 인식의 등뼈를 통째로 교체하는 일이기에 믿음이 없는 분들에겐 상식의 숨통이 막히는 일이겠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속성이 땅의 현상에 언제든지 선행한다. 그걸 고수함이 교회와 세상 모두에게 유익이다.

2014년 10월 10일 금요일

생의 조각

하나님은 늘 최적의 타이밍에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감사로 이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을 적기에 상기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에서 왔음을 보이시며 헛된 번영기의 허리를 꺾으신다.
인생은 이런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정인가 보다...
인생의 모든 시간 조각들은 이런 교훈의 계기들로 주어지는 듯하다.

2014년 10월 8일 수요일

깨달음의 복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13:14)

성경 텍스트를 읽었는데 나에게 의미가 되지 않는 경우가 이따금씩 있다. 그때마다 아찔하다. 송이꿀도 상대화될 수밖에 없는 영적 당분의 보고인 말씀을 먹는데도 그 천상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보다 심각한 건강의 적신호는 없기 때문이다.

위의 말씀은 1세기에 예수님을 보고서도, 그의 말씀을 듣고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알지 못했다는 당시의 시대적 어두움을 꼬집는다. 이는 빛의 근원이신 분이 오셔서 인류에게 가장 명료한 계시가 되셨어도 영적 지각들이 기능하지 않고 캄캄함 속에 갇혀 있어서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사람에게 보이고 들리도록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셨어도 깨닫지를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정상인지 모르겠다. 이는 눈과 귀의 비정상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일그러진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지각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문제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시었다. 눈의 보는 기능과 귀의 듣는 기능은 주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보고 들었다면 주께서 은총을 베푸신 증거라는 이야기다. 눈과 귀가 우리의 것이어도 주께서 주관하는 기관이란 이야기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쳤지만 의미가 읽어지지 않을 때마다 나는 복을 생각하며,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복을 간구한다. 그리고 성경을 깨닫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읽는 것은, 사회의 생리를 감지하는 것은 다 주께서 거저 베푸신 복의 결과라는 것을 곱씹는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지만 좀처럼 의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무진장 답답했다. 그때 당황하지 않고 답답함 자체를 해부의 대상으로 삼고 그 속에도 깨달음의 조각이 있지는 않을까를 살피다가 깨달음 자체의 복된 속성과 진지하게 마주쳤다.

주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어떻게든 은혜를 베푸신다. 도무지 깨달음이 비집고 들어갈 수 없도록 딱딱한 머리의 소유자도 이렇게 은총에 잠기게 만드신다. 멋지신 분!

아퀴나스 공부법

De modo studendi

1. 초장부터 깊은 해양으로 들어가려 하지 말고 얕은 개울로 들어가라.
2. 말하기를 더디하고 수다떠는 공간은 출입을 삼가해라.
3. 양심의 순수성을 보존해라.
4. 기도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중단하지 마라.
5. 술독에 빠지지 않으려면 너의 골방을 빈번하게 활용해라.
6. 자신을 모든 이들에게 사랑스런 사람으로 나타내라.
7. 타인의 행실에서 감추어진 의미를 캐내려고 달려들지 마라.
8. 어떤 이에게도 자신을 너무 친밀한 것처럼 다가가지 말라. 과도한 친밀은 모멸을 낳고 너로 하여금 공부에서 뒷걸음 칠 빙거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9. 세상 사람들의 일과 말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지 마라.
10. 위의 모든 것들보다 공허한 논쟁에 말려들지 마라.
11. 네가 듣는 것의 출처에 얽매이지 말고 언급되는 선한 것들을 기억하려 해라.
12. 네가 읽고 듣는 것들은 이해하려 노력하고 감지된 의문들은 해소하려 노력해라. 저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네 마음의 서고에 저장해 두어라.
13. 너에게 과도한 것은 추구하지 마라.
14. 수종적인 열매를 맺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발자취를 뒤따라라.

2014년 10월 5일 일요일

정의를 깨닫는다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는다 (잠28:5)

정의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누구냐가 중요하다. 사람이 악하면 정의를 깨닫지도 못한다고 지혜자를 교훈한다. 깨달음은 그 사람의 됨됨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정의만이 아니다. 다른 모든 진리에 대해서도 됨됨이의 선행성이 요구된다. 우리가 깨끗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깨끗함을 깨닫지 못하며, 우리가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을 깨닫지 못하며, 우리가 의롭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의로움에 무지할 수밖에 없다는 시인의 진술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정의"라는 말은 법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공의로운 판결을 뜻하기도 하고 그 판결의 집행을 뜻하기도 한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이다. 하나님이 서 계신 곳이 정의이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모든 판단이 정의이고 그런 판단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정의의 구현이다. 이러한 정의의 개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서는 누구도 정의를 깨닫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악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악인인가 선인인가? 우리는 모두 악인이다. 그래서 늘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자기 중심으로 판단이 내려진다. 거기에 이따금씩 "정의" 혹은 "공의"라는 낯뜨거운 면피용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그런 민망함의 무마를 위해 명백한 불의를 공의나 정의로 보이도록 사람들의 시각을 임의로 교정하는 은밀한 조작도 불사한다. 나아가 인간문맥 안에서 합의된 정의의 개념을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에 투사시켜 하나님의 의를 판단하려 하는 인간의 부패한 심성은 기회만 되면 발동한다.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DNA 단위로 내려가면 실상은 동일하다.

우리는 악하기 때문에 정의의 변별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래서 우리가 정의를 깨닫는 일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셔야만 가능하다. 우리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를 식별하지 못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셨기에 우리는 정의를 깨닫는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찾아진 바 된 사람을 가리킨다. 주께서 우리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찾고 비로소 정의를 깨닫는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보고 있다면 그것은 은혜이다. 

2014년 9월 29일 월요일

계시 우선적인 사색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모든 존재와 사태에 있어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선이다. 특별히 우리의 사유도 이 말씀에 순응해야 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우리의 물음을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어떤 물음을 가진다면, 이는 이미 사유의 틀과 방향을 설정하고 그 설정에 하나님의 말씀을 구겨 넣으려는 인본주의 접근법과 다르지가 않아서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의제를 수납하고 텍스트에 흐르는 논지의 전개를 존중하고 성경적 어법에 나의 사유 스타일을 의탁하는 접근법이 대안일 수 있겠다.

내가 궁금한 것,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영역, 내가 추구하는 디테일, 내가 지향하는 답변의 내용과 깊이와 형식을 다 접고 성경이 묻는 물음을 방향으로 삼아 말씀이 안내하는 지점까지 이르고 안내의 방식에 순응하고 말씀이 제공하는 지혜의 분량만큼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보다 더 계시 의존적인 사색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2014년 9월 27일 토요일

그레고리의 삼위일체

다른 모든 것들보다 이 선한 유산을 지키시길 부탁 드립니다. 이것을 위해 저는 살아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 유산과 더불어 얼마든지 죽기를 원합니다. 이 유산과 더불어 나는 모든 환란을 참아낼 것이며 모든 즐거움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는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고백을 말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이 신앙을 맡깁니다. 이제 이 신앙으로 저는 여러분을 물 속에 넣었다가 들어 올릴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위탁하는 이 신앙은 생애 전체의 동반자와 보호자며 하나의 신성과 권능이며 이는 삼위 안에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이며 삼위가 각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성이나 본성에 차별이 없으시며 높아지는 우월함도 없으시고 낮아지는 열등함도 없으신 분입니다. 

2014년 9월 16일 화요일

아타나시우스의 편지

아타나시우스의 시편예찬 서신을 읽으면서 시편 사색에 잠긴다. 시편은 정말 나 자신을 영혼의 차원에서 속속들이 드러내는 특이한 유형의 말씀이다. 학문적인 잣대로 어설프게 재단하면 그 맛이 송두리째 달아나는 깊고 오묘한 어법을 구사하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성경이다.

친애하는 마르셀리누스 (Marcellinus)

한때 나는 어떤 학구적인 노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시편에 막대한 탐구의 땀을 흘렸으며 그것에 대해 경이로운 설득력과 묘미를 발산하며 나에게 논하였지. 말하는 동안 그는 명료한 표현력을 구사했고 손에는 한 권의 시편이 들려져 있었단다. 그가 들려준 내용을 너에게 전달하고 싶구나.

아들아, 신구약 성경의 모든 책들은 사도가 언술한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으며 교육에 유익하다. 그러나 성경을 진심으로 공부하는 자에게는 시편이 각별한 보고를 제공한다. 그 안에는 인간 영혼의 움직임이 모든 종류의 놀라운 다양성 속에서 표상되고 묘사되고 있단다.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지. 그 안에서 너는 너 자신이 그려지고 있음을 보게 되며 그렇게 보면서 주어진 유형들에 비추어 자신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자신을 형성하게 된단다.

시편에서 너는 너 자신에 대하여 배운단다. 그 안에 너의 영혼의 모든 움직임과 모든 변화들과 모든 기복들과 모든 실패들 및 회복들이 그려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거야. 게다가 너의 개별적인 필요나 문제가 무엇이든 너는 이 동일한 책에서 거기에 부응하는 유형의 말씀을 일별할 수 있고 그냥 듣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너의 질병을 치유하는 방식을 습득하게 될 것이란다. 행악의 금지는 성경에 차고도 넘치지만, 시편은 우리에게 그런 금지령에 순응하는 방식을 귀띔해 주는구나. 

2014년 9월 14일 일요일

소통의 범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가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합니다 (수1:17)

이 구절은 지도자와 백성 사이의 아름다운 소통의 범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종이었던 여호수아의 지도자 등극을 인정하고 환영했다.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처럼 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고 서약했다. 대신 백성이 원하는 요구는 단 하나였다. 하나님이 모세와 동행하신 것처럼 그와도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는 소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안목이 대단하다. 주님과의 동행이 인간 여호수아 자신에게 좌우되지 않고 주님께 속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의 아들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그에게도 그러시길 원한다고 했다. 국운의 성쇠를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리는 태도는 기억하며 본받아야 하겠다.

반면 어떤 해석가는 눈의 아들이 집권 초기라서 실권을 장악하지 못했고 군기를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백성이 하나는 주고 하나는 취하는 동등한 국정운영 파트너로 버릇없이 나대는 것을 방지하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독교의 지도력은 다스리고 지배하고 장악하고 탈취하고 조종하고 조작하고 겁박하는 권세와는 무관하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섬기는 신분이다. 당연히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막대한 카리스마 휘두르며 사람들의 수족은 물론이고 감정과 생각까지 결박하는 무소불위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목회자의 도리이고 사환의 본분이다. 결과는 공포와 불안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와 자비와 긍휼과 화평과 같은 성령의 열매이다.

무서운 주먹을 보이면서 사람들을 움직이려 드는 사람들이 종종 목격된다. 마음의 자발성을 따라 이루어진 행위가 아닌 모든 강압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따르고 뒤틀린 결과가 초래된다. 돈과 힘과 다른 수단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에게는 권력의 유지를 위해 더더욱 돈과 힘 및 그와 유사한 수단들 확보에 집착하게 된다. 백성의 아픔은 당연히 다각도로 증대된다.

그런 지도자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지도자의 눈치 살피기가 일과이고 모든 면에서 그런 눈치 의존적인 체질로 고착된다. 인격도 습관도 생각도 언어도 행실도 그런 식으로 변질된다. 이는 성도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세우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세우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런데 그걸 통치력의 승리라고 오독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개인의 체질과 가정의 체질과 교회의 체질과 교계의 체질로 눈길을 돌리면 동일한 현상이 목격된다. 개인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에 적응된 삶을 살아가고 가정은 가장의 심기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교차하며 교회는 담임 목회자의 카리스마 기운이 말씀의 권세와 흥왕을 대신하며 교계는 패거리 문화의 온상처럼 추락하고 있다.

어떤 공동체건 지도력을 발휘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덕목은 주님과의 동행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야만 한다. 지도자와 대립각이 세워질 법한 사안에 대해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그런 상황은 이미 그 자체가 대대적인 수술이 요구되는 중증이다. 어떤 특정한 사안보다 그걸 둘러싼 상황이 더 사실에 가깝다.

지도자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백성은 바로 그 권위에 순응하되 그러한 이상에의 갈망을 입술로 자유롭게 발설할 수 있는 분위기가 건강의 괜찮은 척도이다. 무섭게 겁박하고 광기를 쏟으면서 주변을 장악하려 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 사람도 불행하고 그와 더불어 있는 공동체도 불행하다.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 사이의 그 아름다운 소통이 그리운 아침이다. 

2014년 9월 12일 금요일

나른한 일상의 가치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행17:25)

사물의 가치는 대체로 희소성에 의존한다. 적으면 귀하게 여겨진다. 보석들이 그러하다. 자체의 가치는 고작 무생물일 뿐인데 인간문맥 속에서는 그것을 취하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에 의해 인간의 목숨과 존엄성을 걸 정도의 가치로 비대하게 과장된다.

패션에 있어서도 가능하면 사람들은 누구도 가지지 못한 자기만의 고유한 수제품 복장, 이 세상 어디서도 반복될 수 없는 디자인을 선호한다. 기계를 돌려 찍어낸 동일한 디자인이 나에게도 발견되고 다른 이에게도 발견되는 것, 견디지를 못한다. 그러나...

인간에겐 동등성과 고유성이 공존한다. 이 세상에 동일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고유성이 있고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동등성이 있다. 의식주의 문제는 비본질적 요소인데 거기에 희귀성 문제를 들이대고 일희일비 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대체로 늘상 반복되고 항상 관찰되는 것은 그 존재감도 쉬이 사라진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현상이다. 생명은 우리가 죽어보지 않아서 생명과 단 한 순간도 결별한 적이 없을 정도로 친숙하다. 주변에서 부고가 들려오면 그제서야 잠깐 그 존재감을 얻다가 곧장 망각된다.

산소 마시기를 한번도 중단한 적이 없어서 호흡의 소중함도 가볍게 무시된다. 언제든지 어디에도 값없이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흔하여서 산소의 가치에 반응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희귀하다. 코 주변에 운집한 한 줌의 산소가 없으면 생이 종결될 수 있는데도 은근히 유린한다.

만물과 떨어져서 지낸 본 경험이 없어서 사람들은 만물이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으며 어떻게 주어지고 있는지를 모른다. 설명이 불가능한 신비로운 균형과 질서가 만물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에는 관심도 없다. 돈벌이와 향락의 수단 정도로만 인식한다.

전혀 희귀하지 않고 전혀 고귀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대체로 희소성의 부재 때문에 빚어진 인상이다. 그러나 그 가치가 인지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있고 한번도 떨어지지 않고 동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렇게 가깝고 분리되지 않아야 할 정도로 가치가 크다는 증거이다.

너무나도 쉽게 그 존재감이 사라지고 가치가 망각되고 필연성이 무시되는 생명과 호흡과 만물이란 선물을 주신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으셔서 그분의 존재와 고귀함과 필연성은 더 쉽게 망각되고 무시되고 지워진다. 그분을 그분답게 인정하고 감사하는 자가 희박하다.

하나님은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다. 이 선물들은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도 흔하고 익숙한 것이어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주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르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숨쉬는 거, 기적이다. 살아있음, 기적이다. 보행하고 기동하는 거, 기적이다. 자연의 질서, 기적이다. 눈의 깜빡임, 기적이다. 앉고 일어섬, 기적이다. 누워 자고 깨어남, 기적이다. 웃음과 울음, 기적이다. 공감과 소통, 기적이다. 말과 생각, 기적이다. 해석과 이해, 기적이다.

일상이 기적이다. 일상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에 어디서든 경험하고 언제든지 관찰된다. 지루한 반복 느낌이 일상의 가치를 제거하지 못하도록 주신 수여자를 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사에 인정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일상을 선물로 주시었다.

하나님이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것은 생명처럼 호흡처럼 만물처럼 한 순간도 인간과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는 순간 자멸하는 그런 결코 떠나서는 안되고 망각하지 말아야 할 분이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주어지고 싶으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방식이다.

참으로 사람의 조잡한 측량을 불허하는 분이시다.

2014년 9월 10일 수요일

하나님께 영광을 세세토록!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롬11:36)

하나님께 영영토록 영광을 돌리는 게 모든 것의 종착지다. 바울의 사유와 언어와 삶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지향했다. 그것을 지향하지 않으면 사유도 틀어지고 언어도 부실하고 삶도 불안하게 된다. 그것에 이르기 전까지는 생각도 온전하지 않고 언어도 온전하지 않고 삶도 온전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애초에 그렇게 지어졌다.

로마서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겨냥하고 있다. 어떤 구절은 마치 독립적인 언술인 양 단절적인 느낌을 주지만 독립된 의미를 부여하면 안되겠고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염원과 더불어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해석될 때 모든 구절은 의미론적 제자리를 찾아간다. 인간의 단절적인 의식으로 성경의 통일된 유기적 의미를 절단하면 안되겠다.

우리가 영원토록 영광을 돌려야 마땅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능력은 지으신 모든 만물에 분명히 알려지게 하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고 영화롭게 하지도 않은 인간의 타락과 부패에 대한 언급도, 율법에 대한 언급도, 하나님의 또 다른 의에 대한 언급도, 그리스도 예수의 영속적인 사랑에 대한 언급도, 예정론도 다 그 영광을 지향한다.

인생도 또한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지향함이 마땅하다. 에베소서 1장도 밝히기를,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의 찬미가 되는 것은 만세 전부터 작정하신 것의 결론이라 한다.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만드시는 모든 구원의 서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격에 합당한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세부적인 섭리이다.

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엉뚱하게 설정된 목표를 향해 이슬처럼 삽시간에 사라질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온 나날들이 적지 아니함을 확인한다. 선악의 분별이 다 그런 목표에 매달린다. 생의 희로애락 일체가 그런 목표에의 근접성을 근거로 출렁이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하나님의 눈에는 얼마나 애처롭고 안타깝게 여겨졌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 진리의 가장 체계적인 진술을 제공하는 로마서의 교리론 끝자락에 '그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것이라'는 고백이 등장하는 것이 나에게는 나의 사적인 일대기와 역사 전체와 모든 만물이 마땅히 지향하고 필히 지향하게 되는 목표가 무엇임을 모든 지력과 통찰을 다 동원하여 설파하고 싶어하는 바울의 본심으로 읽혀진다. 사도들의 공유된 본심이라 생각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세세토록 지향하는 것, 최상의 균형과 조화와 진실과 경건과 완전이 담보되는 생의 방향이다. 이러한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산제물로 내 몸을 드리고자 할지라도 마땅히 드러야 할 영적 예배와는 무관하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내 삶의 품격은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멘트에 힘써 맡기련다. 

2014년 9월 7일 일요일

실천하는 원수사랑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 왔도다 (시35:13)

시인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부당한 증언을 내뱉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사실 그들은 터무니 없는 주장과 질문으로 시인을 곤경에 빠뜨렸고 선을 악으로 갚아 시인의 영혼을 외롭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증인들이 투병할 때에 슬픔의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 하였다고 한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런 원수들을 자신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하는 것처럼 존대했고 그들을 위해 슬퍼함에 있어서는 마치 어머니를 곡함같이 하였다고 진술한다. 이쯤되면 반전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시인의 넘어짐을 기뻐했고 불량배를 동원하여 시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살까지 찢기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시인은 그들을 위한 기도의 입술을 다물지 아니했다.

그들의 치졸한 하대와 경박한 조롱은 거기에서 그치지를 아니했다. 그들은 심지어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축복하는 잔치가 벌어지는 곳에서도 망령되이 시인을 조롱하고 위협적인 이빨을 갈았다고 한다. 이러한 끝모를 원수짓도 시인을 꺾지는 못하였다. 시인은 모든 이들이 보는 공석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가운데서 주께 찬송을 올렸다고 한다.

결국 원수를 향해 밀어낸 그 기도가 자신의 품으로 돌아 왔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이런 고백을 들으면 대개는 이렇게 적용한다. 즉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니까 원수들을 위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복을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전반적인 진술을 보면, 그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는 척 연출을 시도한 게 아니었다.

기도의 되갚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원수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위하고 진심으로 그들의 복을 구하고 형제와 자매처럼 가족을 대하듯이 진심으로 아파하고 눈물을 흘려야 한다. 원수를 향한 우리의 모든 바램이 되돌아 오는 것은 뒤따르는 결과였다.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은 뒷전으로 미루고 잿밥에 눈이 어두우면 안되겠다.

주변에, 어쩌면 가장 가까운 가족들 중에 원수보다 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 한가위를 맞아 혹 나를 가장 부당하게 하대하고 비웃고 조롱하는 이들과 대면해야 한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사랑과 축복의 기회으로 여기심이 합당하다. 어쩌면 그때가 바로 가식과 연출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가 먼저 인사하고 존중하고 다가가고 친절을 베풀고 사랑할 기회이다.

하나님이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니까 이 세상에는 믿는 자들에게 어떠한 억울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자에게는 그 사랑이 다 소진되고 말라버릴 정도로 큰 부당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가 수장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죄를 독생자의 죽음으로 사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런 주의 선하심을 따라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극단적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시인에게 한 수 배웠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내용의 옳고그름 싸움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천하는 삶이라는 거 말이다.

2014년 8월 31일 일요일

형통의 비결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할 것이라 (수1:8)

평탄과 형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최고의 비법이 모두에게 목마르다. 이런 막대한 수요에 걸맞게 다양한 비법 공급자의 과잉이 일어난다. 개인의 형통이든 교회의 형통이든 만사형통 약속하는 기발하고 깜찍한 이벤트와 세미나가 곳곳에서 정신을 못차리게 할 정도다.

형통에도 격이라는 게 있다. 여호수아 서두에 등장하는 형통의 비법은 개인의 잘먹고 잘사는 삶, 교회의 금전적 수적 부흥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각자의 기호에 따라 설정된 형통의 개념은 지우시라. 성경의 형통은 하나님의 백성이 주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형통을 뜻한다.

이러한 형통과 어울리는 비법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관심을 사로잡을 만한 방식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입술로 늘 읊조리며 주야로 묵상하며 말씀의 기록된 그대로를 다 지켜 행하는 것이 비법이기 때문이다. 창조 이래로 한번도 변하지 않았던 비법이다.

언뜻 보기에는 형통하는 주체가 여호수아 자신으로 지목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도자는 언제든지 섬기는 무리들과 분리되지 않는다. 형통을 특정한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지도자의 신분과 본분에 무지한 자들의 얄팍한 묵상이고 그러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자의 어법이다.

가장은 가족 구성원 전체를, 목회자는 교회 전체를, 국가의 지도자는 국민 전체를 자아의 연장으로 생각해야 한다. 공동체의 형통이 나의 형통이고, 공동체의 아픔은 또한 나의 아픔이며, 공동체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이며, 공동체의 잘못은 나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억울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 이러한 공동체적 책임이 어깨에 맡겨진 것은 그 자체로도 영광이다. 여기서 천국의 열쇠권을 적용하면 하늘에 대한 공동체의 닫힘은 나의 책임이고 공동체의 열림은 나의 사명이란 수종자의 책임있는 의식이 요청되는 것이다.

여호수아 어깨에 걸린 책임의 막중한 무게는 무게의 크기만큼 큰 영광이다. 그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준수함에 있어서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호기심을 자극하고 의식을 결박하는 이슈들이 유혹의 촉수를 내밀어도 말이다.

형통의 성경적인 개념 정립도 필요하고 그 개념에 걸맞은 비법의 인지와 수호도 동일하게 중요하고 공동체적 형통과 책임을 의식하는 것도 빠뜨리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2014년 8월 27일 수요일

자랑하지 마라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잠27:1)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 내일에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일 일어날 일들에 대해 완벽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자랑 금지령의 대상은 모든 사람이다. 그럼 오늘 하루치의 지식은 완전한가? 그렇지도 않다. 하루의 잔여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내일에 대한 무지 수준을 방불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순간에 대한 지식은 어떠한가? 지금 내가 호흡하는 현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유무도 판별하기 어렵다. 이처럼 우리의 무지는 내일 혹은 미래라는 특정한 시간과만 배타적인 밀착성을 갖지 않고 인생 전체와 결부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염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비록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는 표현이 있어서 당일에 대해서는 염려가 허락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나 사실은 전혀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앞뒤의 인과를 나타내는 "그러므로" 접속사를 주의해서 본다면, 주님께서 하늘을 나는 가냘픈 새도 지키시고 곧장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의 풍전등화 인생도 솔로몬이 입은 영광보다 더 화려하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채워 주신다는 사실의 결론으로 염려 금지령이 발부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한다.

하나님을 아는 명철과 회개에 이르는 근심 이외의 자랑이나 염려는 어떠한 경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내일로 대표되는 어떠한 순간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적 손아귀에 있다. 내일을 자랑하지 않고 내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알고 인정하는 자에게 어울리는 삶의 합당한 자세이다. 게으르고 불성실한 삶을 살라는 게 아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은사가 닳아서 없어질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되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라는 이야기다.

자랑과 염려의 배후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이 궁극적인 원흉으로 있다. 역도 성립한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자랑에 중독되고 염려가 인생을 장악하게 된다. 삶의 생리이다.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은 졸부의 행보이다. 그렇다고 자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랑에도 방식이 있다. 지혜자는 자랑을 타인의 몫이라고 규정한다. 자신의 입술에서 출고된 자랑은 자랑이 아니라 경박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마음에는 늘 경박이 경외를 대신한다.

부득불한 경우에는 자신의 연약함과 관계된 것들을 자랑하면 된다. 그러한 바울처럼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도 논적들이 꼬투리를 잡아 맹공을 퍼부을 빌미의 재료들을 자신의 고백록에 빼곡하게 담았다. 약점과 실수로 얼룩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과하지 않고 저술 방식으로 있는 그대로를 공개했다. 대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의 대상을 삼을 정도로 큰 인물이다. 이런 인물들이 어디에도 없는 듯하여도 족히 칠천의 규모는 되리라고 믿는다. 그들의 존재로 대한민국 교회는 지탱되고 있다. 감사하다.

2014년 8월 24일 일요일

계시 의존적인 사색

스스로 알 수도 없고 (욥42:3)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다. 스스로 알 수 없다는 자력적인 인식의 한계는 지성사의 축을 뒤흔드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무수한 지성들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여 내뱉은 모든 언사의 질이 이 개념으로 가늠된다. 인간이 스스로 알아서 알려진 모든 지식들의 실상은 진정한 사실에 이르지도 않았고 올바른 진리를 담아낸 것도 아니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욥은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의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지 않았다. 즉 만물과 만사가 대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알 수 없는데도 지금까지 인류가 배설한 언어와 지식의 분량은 수천의 산더미를 이룬다. 이러한 분량이 사물의 이치를 가리우고 올바른 진리의 숨통을 틀어막는 무지한 말이라고 한다면 그 심각성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정도겠다.

욥은 동방의 으뜸가는 의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그의 출중함을 능가하는 이가 없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런데도 자신이 가진 모든 말과 지식이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들의 이치를 가리는 무지한 언사란다. 그리고 이치를 드러내고 전달하는 말과 지식의 출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그분께 묻겠단다.

욥의 경건이 혹독한 연단의 과정을 지나 이르른 지점은 바로 계시 의존적인 사색이다. 하나님 자신이 건내신 물음들 앞에서 욥은 천에 하나라도 답하지 못하였다. 주께서 던지신 물음의 난해함도 답변의 입술을 함부로 벌리지 못하게 하였지만 답변의 질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아시는 답변의 수준에 이르지를 못하기에 욥의 묵묵부답 반응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계시 의존적인 사색에서 진정한 하나님 신뢰가 가능하다. 스스로 알 수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인간의 하나님 의존성은 어떠한 종류이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스스로를 속이는 가식으로 변질되고 만다. 욥의 역동적인 삶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은 인생의 호흡도 하나님께 달렸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삶도 전적으로 구분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욥의 결론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지고 이치를 가리우는 인간의 자력적인 지식의 한계와 무례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나 자신이 이러한 무례의 원흉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나를 더더욱 오싹하게 만든다. 인류의, 아니 나 자신의 오만을 꾸짓고 교만의 목을 꺾는,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고 최상의 의미를 부여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행득의 vs. 이신칭의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잠20:7)

NIV 역본에는 The righteous leads blameless life로 되어 있어서 우리의 무흠한 행위가 의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오해는 불식된다. 아마도 KJV의 The just man walketh in his integrity에 의존한 번역인 듯하다.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이행칭의 교리를 지적하고 거절하는 효과는 짭짤하다. 그러나 나는 국역이 좋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롭다"고 되어 있어서다.

이 구절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행칭의 교리를 두둔하지 않는다.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롭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신구약 전체가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한다. 이는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종합하면, 행위가 온전하면 의로운 자가 분명히 맞지만 그렇게 의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온전히 행한 인간이 있었다.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분만이 이 땅에서 온전하게 행한 의인이다. 그분은 믿는 자에게 의로움이 되시기에 그분 때문에 우리도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우리는 온전하게 행하지 않았기에 직접적인 의의 원천이 아니라 의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의를 물려받은 자들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행하는 의인의 후손이 되었기에 복이 있으리라.

우리에게 주어진 복은 온전하게 행하여서 의롭게 된 자의 복이 아니라 우리가 전적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의 후손이 되어서 주어졌다. 그래서 잠언의 말씀은 이행득의 교리가 아니라 이신칭의 교리와 상응한다. 의인이 무흠한 삶에 이른다고 하거나 의인은 진실하게 행한다고 함으로써 이행득의 교리의 혐의를 애써 벗겨주지 않아도 충분히 해석되는 구절이다.ㅇ

2014년 8월 20일 수요일

하나님의 형상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창1:26)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자신의 속성을 보이시며 닮도록
모든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놀랍고 신기하다.

모든 것들이 이룰 때가 있도록 하시고
온갖 것들을 그 쓰임에 맞도록 적당하게 지으셨고
심지어 악한 자들과 교활한 자들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시고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모두 하나님께 속하였고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해도 그 걸음은 하나님이 이끄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라도 화목하게 되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로 복을 얻게 하시고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는 괜찮은데 필경은 사망으로 가는 길이고
악인들은 결탁의 손을 잡더라도 형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시는 뜻과 무관하지 않은
섭리적인 일들이다.

자연에는 다 파악되는 못하나 안정적인 질서가 있고
사회에도 다 읽어낼 수 없으나 특정한 패턴이 있고
그 속에서 무수한 가치가 생성되고 소멸되며
일뱡향 시간의 배설물은 다채로운 색상으로 역사를 수놓는다.

악하고 오만한 자들이 형통하여
소득은 마음의 소원을 늘상 상회하며
평안한 삶에 재물까지 속속 불어나며
일반 사람들이 이따금씩 당하는 고난도 없고
죽을 때에도 고통은 커녕 기력만 더해가는
피가 거꾸로 솟는 현상들이 아무런 제재도 없이
합법적인 질서인 양 사회를 부조리로 물들이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도무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메가톤급 탄식을 자아내는 상황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어 가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는 만세 전에 작정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본질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선 자리에서 성실하고 진실한
사랑과 공의가 입맞추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2014년 8월 18일 월요일

18세기 공부법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신학을 수종드는 철학(논리학, 윤리학과 형이상학 포함)과 고전(언어와 연설과 역사와 시에 대한 연구)을 예비적인 학문으로 공부해야 한다. 

철학 공부법

1. 선생이 강의하기 전까지는 철학을 시작하지 마라. 전문가 없이는 공부하기 어려운 학문이 철학이고 고전읽기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함이다. 교재 이외의 문헌들을 보려고 시간을 할애하지 마라. 너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에 매달리는 것은 세월의 허비이기 때문이다. 강의에 충실해라. 

2.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오전과 저녁 시간을 할애해라. 철학은 냉철하고 명료한 두뇌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른한 오후는 고전읽기 시간으로 적격이다.

3. 철학에 있어서 두툼한 지식이 확보된 이후에는 각 교재에서 논의되는 어떤 물음들에 자신의 견해를 간결하게 노트해라. 

4.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이 나오면 표시해 두고 그것을 설명해 줄 문헌들을 참조해라. 그래도 풀어지지 않는다면 선생에게 문의해라.

고전 공부법

1. 헬라어와 라틴어 고전들을 오후에 읽어라.

2. 독서 리스트를 작성하고 첫번째 잡은 책을 완독하면 다음 문헌으로 넘어가는 방식을 고수해라. 

3. 속도하지 마라. 이해력과 독서의 속도는 비례한다. 서둘러 백독하는 것보다 면밀히 정독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4. 어떤 책들은 일독이면 족하고 반복해서 읽어야 할 책들도 있다. 

5. 중요한 고전들을 읽은 이후에는 그에 관한 이차 문헌들을 참조하라. 난해한 부분들이 푸어질 것이다.

6. 노트를 준비해서 1) 주제별로 정리하고 2) 의심스런 부분을 메모하고 3) 비상한 표현들을 적어두고 4) 낯선 문구들도 수집하고 5) 기억해야 할 잠언들도 기록해라. 

7. 실습에 힘쓰라. 운문과 산문을 작문해야 한다. 가장 찬란한 사상들과 사유들과 인물들을 모방하고 변경을 가해 보라. 

8. 역사서를 읽을 때에는 지도와 연대표를 사용해라. 

대학생의 경건연습

1729년도, 영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공부법 가이드북 안에 나오는 대학교육 목적과 경건의 지침들에 관한 대목이다.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훈련을 받고 세상에서 선을 행하기 위해 대학으로 보냄을 받았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모든 것들 중에서 너의 창조주를 주야로 섬겨야 함을 기억해라. 이것은 너의 지극히 높은 지혜이며 너의 지극히 큰 행복이다. 이것이 없다면 지금부터 영원토록 너는 공고하고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고 그 다음에 배우도록 힘써야 한다. 좋은 학자가 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좋은 성도가 된다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다. 진실한 사람이 배움의 적정한 공유까지 갖춘다면 사람들 중에서는 물론이고 은총과 선함이 결여된 현명한 사람들 중에 가장 고결한 학자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언제나 보다 바람직한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경건하고 진실한 삶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침들을 주의하여 준수해라. 1. 아침 저녁으로 채플에서 꾸준히 기도해라. 이것은 평범한 필수 지침이다. 기도를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젊은 학도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학업에 하나님의 은택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공적인 기도시간 이외에도 항상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을 짧게 가져라. 3. 아침마다 밤마다 기도하기 전에 신약이나 구약에서 (신약은 더 자주) 1장을 읽어라. 30분 정도 요구된다. 학업에 약간의 지장을 주는 듯하지만 거기에서 얻는 유익에 비하면 전혀 아깝지가 않다. 4. 경건과 거룩에 있어서 깨우침과 향상을 위해 절적한 시기가 주어질 때마다 읽도록 2-3권의 경건서를 늘 구비해라. 5. 절대로 선술집에 가지는 마라. 불가피한 일로 가더라도 오래 머물지 말고 마시지는 마라. 6. 유명세에 탐닉하지 마라. 극소수의 방문객만 있어도 만족해라. 7. 규정된 시간 이외에는 학내를 벗어나지 않도록 해라. 8. 학교에서 평화와 질서를 위해 상급생들 앞에서는 순종적인 예를 갖추어라. 9. 휴양을 위해 할당된 시간 이외에는 무언가에 늘 집중해야 한다. 나태를 경계해라. 

2014년 8월 17일 일요일

원수사랑 훈련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눅6:27)

원수는 정신적, 금전적, 물리적, 신체적 피해를 유발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명하신다. 주님의 말씀이니 반박할 수야 없겠으나 마음의 진실한 수긍에는 이르지 못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터무니가 없어서 믿는 터툴리안 신앙(credo quia absurdum)과 이해하기 위해 믿는 어거스틴 신앙(crede ut intellegas)을 고수하려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원수가 나에게 끼치는 모든 피해보다 더 고결한 가치가 있음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우리의 몸이 원수의 피해에 노출되어 있다면 원수사랑 행위로 증거하는 가치의 크기는 우리의 삶과 생명도 능가하는 것이겠다.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면 생명보다 귀한 것을 이 세상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느냐를 물어야 한다. 땅에 썩어 없어지는 것들이 전부라고 알고 있다면, 원수가 나에게서 빼앗고자 하는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그 가치를 위해서는 나의 목숨조차 상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내려놓을 수 없다면, 엄밀한 의미의 원수사랑 가능성은 없어진다.

땅에서 주어지는 것 이상의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이 나의 생명보다 귀하다는 판단을 가지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원수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한 자기부인 없이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고 내 생명보다 소중한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란 사실을 몰라도 그러하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란 사실 즉 땅에서는 도무지 제공되지 않는 하늘의 진리가 선포되고 그 진리가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명하셨다. 그렇게 앞서 살아가신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그런 원수사랑 실천으로 그 향기가 발산된다.

원수사랑, 나의 인격과 삶과 신앙의 바로미터 같다. 원수사랑 상황에 직면하면 곧장 들려 올라가는 나의 본성적인 가벼움을 때때로 목격하기 때문이다. 원수사랑 훈련은 일평생 지속될 전망이다. 마귀와 죄 이외에 다른 어떤 대상도 원수의 항목에 남아나지 말아야 하니까 마지막 호흡을 내뱉는 순간까지 그 훈련이 중단될 수 없어서다.

훈련의 강도를 기준으로 본 순서대로 자아에서, 가정에서, 회사에서, 교회에서, 국가에서, 모든 나라에서 범사에 동시에 진행되는 듯하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해야 되겠다.

2014년 8월 12일 화요일

징계와의 화친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잠12:1)

여기서 징계는 강한 책망과 거절의 언사를 의미하고 때때로 수정을 위해 처벌도 수반하는 개념이다. 징계를 싫어하는 마음의 배후에는 대체로 교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나는 고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완전주의 교만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짐승의 징표란다.

짐승은 자신의 본성을 수정하지 않는다. 불변의 본성을 따라 생각하고 움직이며 일평생 살아간다. 당연히 짐승에게 징계는 소귀에 경읽기다. 어떠한 변화나 수정도 기대할 수 없다. 짐승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런 종류의 기대감을 갖는다는 게 어리석은 자세겠다.

그런데 징계의 거부는 금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만은 아니라는 건 상식이다. 우리 안에서도 뾰족한 지적의 목소리가 고막을 살짝만 건드려도 곧장 격렬한 불쾌와 보복의 이빨을 드러낸다.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짐승의 본성이 흉물스런 모습을 드러낸다.

변하지 않는 사람과 종종 마주친다. 좋은 것들은 한결 같을수록 좋다. 그러나 죄인의 관념과 습성에 가공할 천착을 보이는 불변의 사람들은 혹시 어리석은 짐승에 가깝지는 않은지 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런 성찰의 눈으로 나 자신을 수시로 돌아보게 된다.

한 사람이 바뀌는 건 기적이다. 한 가정의 변화도 기적이다. 교회의 변화, 사회의 변화, 국가의 변화, 세계의 변화도 기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겠다. 대부분의 사람이 징계를 싫어하고 수정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칭찬과 고수가 본성적인 기호이다.

이와는 달리 수정과 변화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사랑하는 자라고 지혜자는 규정한다. 나는 불완전한 자이고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자이고 배운 바가 내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복이라고 믿고 주를 향하여 나날이 자라가는 자가 지혜자다.

변화는 익숙하던 것들과의 이별과 생소하던 것들에의 적응을 요구한다. 당연히 거북하고 불편하다. 그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접으시라. 오늘은 나 자신에게 징계와의 화친을 권하였다. 짐승은 되지 말아야지...

2014년 8월 10일 일요일

영혼의 주림은 없다!

주는 의인의 영혼을 주리지 않게 하신다 (잠10:3)

이 구절에 대한 첫번째 반응은 눈물이다. 대체로 언어의 형태로 끄집어낼 수 없는 사연의 배설에는 눈물이 최적의 출구이다. 오늘은 뭔가 깨닫기는 했는데 적합한 언표를 찾아내지 못하여 눈물이 광대뼈 위로 미끄러 졌나보다. 암튼 비에 씻긴 하늘처럼 영혼은 개운하다.

위의 인용문은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는 기근은 있어도 영혼의 배고픔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는 지혜자의 단언이다. 그런데도 영혼이 주림으로 신음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무엇보다 주께서 말씀만 하시고서 정작 영혼의 공복을 책임지지 않으신 것이라는 해석은 금물이다. 주님은 어느 때에나 무흠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의 인격과 삶이 의에 역주행을 일삼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봄이 더 타당한 반응이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깨달음이 없고 뭔가 교훈을 산출하려 해도 머리와 마음에 재료가 바닥난 영적 궁핍과 마주친다. 그때마다 나의 불의한 삶을 성찰하게 된다.

사실 위장의 기근은 즉각 감지된다. 그러나 영혼의 주림은 한참을 지나서도 감지되지 않아 영적 기갈이 무의식의 상태로 지속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감지한 것 자체가 은혜라는 이야기다. 영적 빈곤과 기갈의 인식은 영적 풍요와 윤택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방식이다. 아직도 한국은 주님의 은혜가 여기저기 감지되고 있어 기회의 때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영혼의 주린 상태를 알고서도 영혼의 양식에 묵상의 숟가락 들어 올리기를 못마땅해 하거나 게을리 한다면 주님의 자비로운 초청도 묵살하는 무례가 아니겠나! 어떤 사람들은 몸에 비타민이 부족하면 각종 과일이나 야채가 땅긴단다. 생리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영적 영양분의 부족에는 왜 이리도 무신경한 것일까!

주님은 분명 우리의 영혼을 주리지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영적 영양분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무수한 종류의 자극을 무시로 동원하는 분이시다. 나 자신의 기호를 보아도 그렇고, 친구들의 소식을 들어도 그렇고, 나라의 향방을 주목해도 그렇고, 교회의 상태를 보더라도 그 필요성이 수시로 감지된다.

특별히 교회의 무기력한 상태와 불의한 모습을 보면, 영혼의 심각한 빈곤이 교회의 광범위한 실태라는 사실이 뼈져리게 느껴진다. 주께서 의인의 영혼을 주리지 않게 하겠다고 하셨어도 교회가 이렇게 진리의 핍절로 허덕이고 있다면 교회의 불의를 돌아봄이 마땅하다.

나아가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돌아가는 꼬라지, 비참의 사회적 국가적 세계적 창궐을 보면서도 세상의 빛과 소금인 교회가 각성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진동시킬 진리의 깊은 경지를 추구하고 수혈하지 않는다면 영적 주림에 대한 신경과 감각의 심각한 마비를 의심해야 된다. 부에 대한 교회의 맹목적인 집착과 하늘을 찌를듯한 오만도 심히 의심된다.

악인의 소욕은 좌절시킬 것이라는 뒷부분 구절이 돌이키지 않는 우리의 교회에 적용될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아마도 눈물에 녹은 하나의 사연이라 생각된다. 주여, 건물과 재정은 무너져도 말씀하신 대로 교회의 영혼만은 주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2014년 8월 8일 금요일

고난도 유익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119:71)

시인은 고난 당하는 것 자체를 유익이라 하지 않았다. 고난을 유익이라 한 시인의 이유는 고난으로 인해 주님의 율법을 깨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말씀의 깨달음이 고난보다 낫다는 가치관이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주의 입술에서 나오는 법은 천천의 금은보다 좋다고도 하였다. 오늘날 교회가 들으면 심히 거북하고 까무라칠 가치의 틀이겠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시인도 어리석게 살았으나 고난 이후에는 계명의 뜻과 힘을 깨달아 순종하게 되었단다. 물론 고난이 삶의 불편과 시간의 낭비와 마음의 내상만 남긴다면 그것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당연히 맹목적 고행은 우리의 지향할 바가 아니겠다. 다만 고난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는 게 고난조차 유익으로 만드는 상책이다.

고난은 내가 원하는 소원에 역행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내가 좋아하는 기호에 거슬리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기호와 소원이 외면되는 현실을 달가워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와 언어와 행실에 방향을 부여하는 그 기호와 소원이 거절되면 비로소 보이는 의미와 방향이 있다. 그것을 제공하는 샘이 바로 하나님의 율례이다.

화나고 억울하고 슬프고 힘든 것은 대체로 기호와 소원의 거절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결코 거절되지 못할 기호와 소원을 붙들면 화나고 억울하고 슬프고 힘든 일도 없어질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시고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든 일들을 성취하고 마시기에 거절될 일이 없는 하나님의 소원을 붙드는 건 최상의 지혜겠다.

시인의 경험을 보면 하나님의 기호와 소원은 주로 우리의 기호와 소원이 향방을 잃을 때에 포착되는 듯하다. 우리의 경험도 이를 지지한다.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끊으려고 온갖 출처모를 고난을 동원하나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깨달음의 계기로 바꾸시는 선을 이루신다. 고난 이전에는 주님의 선하심이 주어져도 깨닫지를 못하다가 고난으로 비로소 깨닫는다.

고난은 인기척도 없이 원인을 감추면서 슬그머니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대체로 갑절의 분노가 격발한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는 계기는 그 원인의 디테일이 가려져 있어도 중요성이 삭감되는 것은 아니다. 시련을 만나거든 거절의 격한 손사레로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야고보의 권면으로 반응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이미 가장 놀라운 승리이다. 고난도 유익으로 이해하고 처신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넘어뜨릴 뾰족한 묘안은 어디에도 없다. 죽음도 유익이라 하는데 아무리 간교한 사탄인들 어찌 우리를 실족케 할 재간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법을 천천의 금은보다 더 사모하고 고난조차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 자의 향기가 교회에 진동하면 좋겠다.

2014년 8월 7일 목요일

약할 때 강함이라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후12:10)

바울이 받은 계시는 지극히 컸다. 이는 그의 정교한 저술들만 봐도 확인된다. 이처럼 자랑의 꺼리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자신을 위해서는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단다. 이는 약함과 강함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주님의 역설적인 가르침 때문이다.

지극히 큰 여러 계시로 자만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에서 육체에 자만 억제용 가시 곧 사단의 사신을 보내셨을 때였다. 떠나가게 하려고 주님께 세번이나 구했으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교훈이 주어졌다.

일평생 바울을 괴롭히고 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가시가 바울에게 준 교훈은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하다"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약함"은 교훈을 목적으로 한 일회성 수단이 아니었다. 자신의 약함을 "큰 기쁨으로" 일평생 자랑한 것이 그 증거이다.

바울의 해괴한 처신, 사실 납득하기 어려웠다. 우리의 약함과 그리스도 예수의 강함이 어떻게 서로 상응하고 동시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실감의 경험이 없어서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 문득 그런 경험이 급습했다. 말씀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약할 때 말씀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반면 우리가 강하면 강할수록 진리의 말씀은 그만큼 가소롭게 여겨진다. 말씀과 우리 사이에 이런 힘의 기묘한 반비례가 있는 줄 예전에는 그리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하였다.

사람이 약해지면 다른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한다. 눈이 약하신 분들은 귀가 밝으시고 귀가 어두우신 분은 눈의 관찰이 예리하다. 우리에게 어떤 약함의 가시가 있으면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신경이 자극된다. 평범하던 말씀도 천지를 진동하는 진리임을 감지하게 된다.

일평생 바뀔 기미도 보이지 않는 연약함을 내 안에서 발견한다. 그러면 주님께 원망을 쏟고 한탄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사도에게 배운다. 비록 영혼을 찌르는 뾰족한 가시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높아지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말이다.

연약함이 발견될 때마다 어떠한 말씀이 나에게 위력을 발휘하고 꿀보다 달콤한 진리의 어떠한 맛을 경험하게 될 것인지를 기대하게 된다. 개인의 성향이든 건강이든 가정의 문제이든 모두가 우리로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여 마련하신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없는 날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런 연약함 속에서 강하게 발휘되는 말씀의 위력을 마음껏 즐기라고 권면하고 싶다.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항구적인 문제의 삽바를 하루종일 거머쥐고 씨름하는 분들이 적지 아니하다.

바울은 "큰 기쁨으로"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다. 주님의 강함이 거기에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이다. 자아의 지경을 넓혀 공동체로 여기고 나 자신을 그 몸의 한 지체로 여긴다면 해결되지 않는 교회의 문제도 주님의 강함이 발휘되는 출구라는 이유로 감사할 수 있겠다.

주변에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나 사건이 있더라도 그런 확대된 연약함 속에서 발휘되는 주님의 강함을 큰 기쁨으로 향유하는 믿음의 거인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면 좋겠다.

2014년 8월 6일 수요일

믿음은 승리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다 (요일5:4)

여기서 "이김" 혹은 "승리"의 헬라어 원문은 "비케"(νίκη)이다. 어떤 학자는 "비케"를 "승리하는 수단 혹은 방편"으로 번역한다. 내가 보기에는 두 번역이 다 가능하다. 믿음은 승리의 방편인 동시에 승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세상을 이기는 삶,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나 간절히 소망하는 하나님 자신을 인정하며 사는 삶이다. 그분 때문에 승리할 수밖에 없어진다.

문제의 가까운 원인들이 우리의 시야를 덮으면 억장이 무너진다. 해결의 실마리가 안보인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그 답답함과 숨막힘은 사실 가까운 원인들 때문이 아니라 그 원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까운 원인들의 보이지 않는 원인이신 하나님을 보면 숨통이 트이고 가슴이 시원하게 뚫어진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비록 사태는 여전히 암담해도 그 사태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는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문제일 경우, 우리가 느끼는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는 더욱 선명하고 섬세하다. 이는 나의 죄와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극명하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죄를 더 짓자? 그럴 수 없느니라.

믿음은 방편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승리이다. 헤어나올 수 없는 역경의 늪에 빠져보면 안다. 이런 경우에는 해답이 없다. 해결의 기미도 찾아보기 어렵다. 부르튼 입술에는 좌절의 한숨만 연거푸 출고된다. 믿음이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승리인 경우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답답해도, 땅을 꺼뜨리는 한숨이 쏟아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런 상황이 변화될 일말의 조점도 안보인다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여전히 승리할 수 있다. 믿음이 승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 그게 승리이다.

승리의 근거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상황의 변화에서 찾으려는 '유혹'이 있다. 이는 믿음을 승리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유혹이다. 그러나 믿음은 또한 그 자체로 승리이다. 상황의 호전이 수반되지 않더라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면 그 자체가 승리이다.

믿음은 그 자체로 승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승리는 누구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뒤따른다. 그 승리를 방해하는 유일한 원흉은 우리 자신의 불신이다. 믿음은 상황을 바꾸는 마술봉이 아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이고 승리이다.

항구적인 기도의 이유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7)

신앙의 나이테가 한겹씩 늘어날 때마다 이 말씀의 질감이 달라진다. 기도는 삶에서 어쩌다가 만나는 환란 수습용 비품이 아니라는 사실이 절감된다. 기도는 삶의 모든 순간들을 위해 '명하여진 은혜'이다. 한 순간도 기도와 무관할 수 없기에 기도는 쉬지 말아야만 한다.

일상의 모든 소소한 일들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혹 해결된 일들이 있더라도 나의 능과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지극히 소소한 일조차도 없다는 것, 이는 신앙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실이란 깨달음에 젖어든다. 심지어 존재하는 것도 그러하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인간의 본질적인 상태를 이것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하는 표현이 있을까? 존재하고 살고 기동하는 모든 것들이 주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인간의 실존은 한번도 변경된 적이 없다. 누구도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살고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한 순간도 기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겠다. 기도 없이는 움직임도 가능하지 않다. 그런 상황이 주어질 때마다 유쾌하고 즐겁지는 않으나 나 자신의 처한 본성을 직시할 수 있어서 유익이다. 죽음 앞에서는 그 유익의 크기가 갑절이나 더하겠다.

지혜자는 우리에게 어려운 때에 숙고를 권하였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누구인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지를 환란의 때보다 더 선명하게 확인하는 기회는 많지가 않다. 타인의 고난을 진실하게 이해하는 최고의 준비도 환란의 때이겠다.

시간은 반복되지 않고 매 순간마다 만나는 경험도 동일하지 않다. 하나의 경험이 전달하는 교훈의 색조와 결은 고유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포착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겠다. 요즘 그런 숙고의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생의 고유한 순간들, 놓치고 싶지가 않다.

나에게는 이것이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명령문을 대할 때마다 강요나 억압이 아니라 영혼의 소생과 갈등의 종식과 눈의 밝아짐을 경험한다. 성경은 이렇게 은혜로운 명령으로 충만하다. 은혜 베푸시고 싶으셔서 '안달'이 나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014년 8월 3일 일요일

징계를 인내하라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12:7)

징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지적한 말씀이다. 징계는 하나님이 아들로 우리를 대우하는 것이기에 참으란다. 참을 때에 징계의 고난은 연단이 되기에 참으란다. 아들을 고난으로 연단하는 이는 아버지다. 그런 연단과 훈련이 없다면 아들이 아니라고 한다. 징계하는 분은 공포의 아버지가 아니다. 징계의 채찍을 든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는 법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고통의 농도는 짙어진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무한하기 때문에 그 고통의 농도도 측량을 불허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성자의 반열에 곧장 등극하는 기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자들은 서서히 성장한다. 그런 성화의 필수품은 징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를 가리키기 위해 헬라어 "παιδεία"를 사용한다. 교육이나 훈련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징계는 파괴를 겨냥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가 밝혔듯이 거룩에의 참여를 돕기 위해서다. 즉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다. 물론 징계가 당시에는 즐겁지가 않다. 그러나 징계로 연단된 사람은 의의 평온한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각자가 풍기는 고유한 향기를 경험한다. 그들 중에는 시기심이 생길 정도의 안정된 의가 느껴지는 도전적인 분들도 있다. 처음에는 부요한 가정에서 좋은 부모 밑에서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삶의 기구한 사연을 들어보면 연단의 결과라는 사실이 금새 확인된다. 인간은 원래 미련하다. 이것을 지혜자는 아이들의 마음에 미련함이 있다는 말로 묘사한다. 훈련이 없으면 죽는다고 말하고 우매의 충만 속에서 길을 잃는다고 단언한다.

징계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인내이다. 우리를 아들로 여기고 계시다는 사실의 증거이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즐겁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을 뒤덮은 미련함이 벗겨지고 삶에 박힌 우매함이 제거되기 위해서는 고통이 수반된다. 성화는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 아들의 신분 재확인과 거룩에의 참여와 의의 평강한 열매라는 영광의 중한 것에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스런 징계와 연단은 과연 경한 것이겠다. 그리고 고통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다. 지나간다.

본문에서 이런 의미도 생각해야 한다. 징계는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이 없이는 파괴의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징계는 분명히 부모의 몫이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이 없는 분노의 출구로 동원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교사도 학생을 징계해야 하겠으나 부모의 사랑으로 그리해야 한다. 학생의 파괴가 아니라 변화와 성장을 원한다면 아비의 심정으로 눈물이 묻은 사랑의 채찍을 사용해야 한다. 목회자도 동일하다. 성도를 권징해야 한다. 그러나 재판관의 차가운 판결이 아니라 아비의 마음으로 파괴가 아니라 성화의 방편으로 그리해야 한다.

2014년 7월 31일 목요일

존재가 선행된 추구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마7:6)

성경에서 개는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되며, 들짐승에 찢겨 죽은 동물을 먹고 토한 것을 다시 삼키며 죽은 사람의 피를 핥는 동물이다. 이를 테면 나봇과 아합의 피를 핥았고 이세벨의 시체를 삼켰으며 사도 요한은 마술사, 음란한 자, 살인자, 우상숭배 및 거짓말을 하는 자들을 개들이라 칭하였다.

거룩한 것은 개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진주가 그 값어치를 모르는 돼지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돼지에게 가치의 기준은 자신의 위장이다. 고귀한 것은 고귀함을 알고 존중하는 자에게 주어짐이 합당하다. 그렇지 않으면 진주는 아무리 고귀해도 주어진 자에게 불편하고 불평의 원인이 되고 그 자체도 멸시되고 짓밟힌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이후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하셨다는 게 중요하다. 하나님은 결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시지 않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어떻게 두드리고 찾고 구하라는 말씀인가? 거룩한 것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하고 진주의 값어치를 알고 존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존재론적 접근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깨끗함을 깨끗한 자에게 보이시고 거룩함을 거룩한 자에게 보이시고 의로움을 의로운 자에게 보이신다. 하나님은 증오심이 가득한 자에게 긍휼을 맡기지 않으시고, 시기심이 가득한 자에게 공감의 비밀을 맡기지 않으시며, 거짓된 자에게 정직을 맡기지 않으시고, 포악한 자에게 자비를 맡기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는 먼저 구하는 것에 합당한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 요청된다. 예수님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팔복의 내용을 주시해 보면 복된 자의 됨됨이가 어떠하기 때문에 그가 복되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개나 돼지는 존재의 변화가 없이는 본질상 어떠한 가치나 의미도 누리지를 못한다.

여호와의 눈은 지금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향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온 땅과 만민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까지 주실지도 모른다. 아들도 아끼지 않고 죽음에 내어주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고자 하신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자가 복되다. 심령이 가난하여 자신을 다 비우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분, 자신의 죄도 아닌데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온 인류의 비참을 애통해 하신 그분, 의를 위하여 억울한 핍박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묵묵히 받으신 그분, 자신의 생명으로 원수조차 화목하게 하신 그분과 같은 자 말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온 세상과 만민을 섬기는 게 가능하다. 개의 더러움과 돼지의 무지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서 더럽게 변질되어 개가 핥고 진주보다 더 고귀한 하나님의 이름이 돼지의 발굽에 짓밟히는 일들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존재의 거듭남에 준하는 개혁이 필요한 듯하다. 중생의 씻음과 진리의 지식!

2014년 7월 29일 화요일

미움의 이유가 중요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15:14)

예수님의 논지에 의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워한다.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주님의 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주님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시었고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라고 밝히셨다.

과연 사람들은 지금 교회를 미워한다. 극도로 혐오하고 멸시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미움의 이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과 너무도 달라서다. 교회의 탐욕과 결탁과 타협과 거짓과 음행과 횡령과 독재와 횡포 때문이다. 교회가 캄캄한 세상에 빛이 아니라 더 짙은 어두움을 드리우고 썩어가는 세상에 소금이 아니라 부패의 촉매처럼 보여서다.

미움에도 격조라는 게 있다. 미움을 받는다고 무조건 '핍박'이나 '순교'라는 고품격 단어를 소환하는 것은 갑절이나 부끄러운 해석이다. 여기에 "할례 받지 않은 이 블레셋 사람이 누구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에 모독의 질퍽한 침을 튀기냐며 의분을 토했던 다윗의 언사로 목에 핏대를 올리는 것도 민망한 대처이다.

오늘날 교회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은 예수님이 앞서 언급한 내용, 즉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고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는 말씀의 실현으로 이해함이 보다 합당해 보인다. 교회가 핍박을 받는다고 것이 무조건 교회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교회가 오히려 세상보다 더 세상적일 수도 있어서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도 그러하다. 혹 핍박과 억울함을 당한다면 그런 현상보다 현상의 이면에 있는 이유를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교회가 사나 죽으나 주님이 이유이면, 사랑을 받든지 미움을 받든지 주님이 이유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2014년 7월 28일 월요일

진리를 찾아서

인생은 진리가 표출되는 계기들로 충만하다. 슬플 때에도, 기쁠 때에도, 외로울 때에도, 억울할 때에도, 이별할 때에도, 사랑할 때에도, 놀랄 때에도, 감동할 때에도, 아플 때에도, 바쁠 때에도, 나른할 때에도, 서러울 때에도, 한가할 때에도, 끔찍할 때에도 진리의 조각은 언제든지 표출된다. 다만 포착은 각자의 몫이겠다.

삶의 무수한 순간들이 다양한 각도로 최소한 진리의 한 부분은 조명한다. 진리가 포착되지 않은 순간보다 더 허무하고 무의미한 경우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진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최고로 황활한 순간도 곧장 허무로 돌변한다. 이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 전도자의 탄식과도 상통한다.

진리가 늘 목마르다.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순간마다 모든 사건과 사태와 사물을 접하면서 갈증의 촉수는 늘 진리를 더듬고 싶어진다. 진리와 접지하는 순간 영혼에 자유가 번진다. 진리는 과연 우리를 자유케 하는 능력이다. 수갑이나 족쇄만이 아니라 영혼의 결박까지 제거한다. 주님은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자유의 손을 뻗으시나 보다.

하루를 살아가며 매 순간마다 진리와의 만남이 없다면 겉으로는 자유하나 속으로는 무언가에 얽매여서 갇힌 자로 살아간다. 그러나 사도가 명시한 것처럼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 부르심에 방향이 있다. 부르심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이미 설정된 목적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상식이다.

자유는 우리의 학구적인 땀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면벽수행 결과물로 혹은 무소유의 보상으로 여기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그런 고행이나 수도로 자유에 대한 말초신경 수준의 표피적인 개념은 경험할 수 있겠으나 자유의 본질은 경험하지 못한다. 오히려 위험하다. 자유에 대한 어설픈 경험이 참자유에 대한 갈증마저 훼손하기 때문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는 사도의 증언에서 자유가 주님 의존적인 것임을 확인한다. 주님과 독립된 자유는 없으며 그런 자유의 누림도 없다. 이는 아들이 자유하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유하지 못해서다. 진리는 진리의 영에 의해서만 경험한다.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 진리의 영이신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선물이 자유이다.

숨통이 콱콱 막히는 부자유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몸부림의 역사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당연한 현상이다. 썩어짐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고자 내뱉는 신음이 천지를 진동한다. 그 슬픈 음파의 강도가 고조되는 느낌이다. 교회가 진리의 부르심에 합당하지 않으면 절망은 필연이다.

그래서 오늘도 모든 희로애락 속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조명된 진리의 한 조각을 찾기 위해 하루치의 모든 에너지와 지력과 관심과 초점을 투입하려 한다. 오늘따라 경찰차의 싸이렌 소리가 사태의 긴박성을 더욱 부추긴다. 진리를 찾아서...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신음하는 피조물의 웃음을 찾아서...하루하루 매 순간마다...마지막 호흡이 다하는 때까지...

기독교적 삶의 원리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전5:15)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상식이고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교회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기독교는 이러한 인생관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기독교의 향기는 악취로 변하고 빛은 어둠으로 대체되고 소금의 맛도 상실하여 버림의 길바닥에 나딩구는 돌맹이 신세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의 의미와 우리 편에서의 함의를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우리 편에서는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이 우리에게 최고의 복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면 자신을 위하는 삶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그러나 주님에 대하여는 살고자 하면 살고 죽고자 하면 죽는다. 이는 그렇게 살아도 그만 안살아도 그만인 개념이 아니다. 그렇게 살면 복이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불행이다. 기독교적 인생관이 이렇다. 그런데 이러한 삶과 죽음의 원리가 모든 사람에게 최고의 복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아니된다. 모든 사람에게 복이 아니라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양심에도 저촉되는 일이겠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사는 삶은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가장 영광스런 유형이다. 손해보는 것도 아니고, 억울해 할 필요도 없다. 이는 그리스도 위하는 삶이 우리에게 최고의 은총이요 복이기 때문이다. 그런 삶으로 초청을 받았다는 것이 여전히 껄끄러운 사람들은 소돔의 관능적인 삶과 애굽의 어설픈 풍요에 아직도 미련을 두는 자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보이는 안목과 싸우셔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다는 것은 그분처럼 산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살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삶이 나의 삶에서 향기로 풍기고 빛으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삶으로 주님을 보여주는 증인이 교회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안식처를 찾아 교회에 출입하는 자들을 등치고 등의 가죽까지 벗겨 먹으려고 혈안이 된 모습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교회에 유익을 끼칠만한 자에게만 끈적한 미소를 보내지는 않는지를 말이다.

교회는 교회를 위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고 세상을 위하여야 한다. 그런 삶의 방향이 포기된 교회의 미래는 암담하다. 불행을 자초한다.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든 자신을 위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는 게 최고의 영광이요 복이라는 기독교적 삶의 역설적인 원리를 포기하면 포기하는 만큼 불행이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역설하고 있는 원리라고 생각한다. 나를 위한 나와 교회를 위한 교회는 필히 불행으로 곤두박질 친다. 그게 원리니까 그렇다.

2014년 7월 27일 일요일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는 자로다 (시33:15)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행사를 보시되 그 모든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중추적인 기관에 해당되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 분으로서 보신다는 이야기다. 하나님은 나타난 행위의 표피를 눈으로 더듬는 방식이 아니라 마음의 본질과 생리를 친히 조성하신 조성자의 눈으로 행위로 표출되기 이전의 마음 일반을 지으신 자로서 행위자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출처는 사람의 육안으로 관찰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마음을 지으신 분의 눈에는 한 치의 가감도 없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난다.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며 산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사람들의 둔한 눈길을 피하면서 은밀하게 연출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 앞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거짓과 속임수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필히 빚어지는 죄악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데도 정직이 도모되는 경우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지으신 분이라는 사실이 두려운 아침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누구도 핑계할 수 없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모두가 오해하고 배척해도 하나님이 유일한 증인으로 계시다는 위로와 안식의 근거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기쁨과 영광이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공포와 비참이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근거이고 멸망하는 자에게는 진노의 근거이다.

2014년 7월 23일 수요일

주어이신 그리스도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요4:10)

신앙과 신학은 성경의 주어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고 끝맺는다. 이 물음을 놓치면 신앙은 흔들리고 신학은 무너진다. 사탄이 줄기차게 소환하는 세상의 온갖 선악과 시험은 이 물음에서 우리를 떼어놓는 목적을 지향한다. 최소한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인류의 첫 조상이 따막은 사건은 금지령의 주어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과 맞장을 뜬 범죄이다. 법조문의 위반이나 판단의 미숙이나 행위의 경박이나 좀도둑질 차원이 아니라 명령의 주어와 관계되어 있다.

구약의 일등급 신학자라 할 욥에게 쏟어진 하나님의 무수하고 까칠한 질문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이 누구냐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종국적인 반응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냐는 자기 정체성에 관해 자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말씀이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 자신이신 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관심사도 '너희는 나를 누구냐'에 있으셨다.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가 묻고 듣고자 하신 물음의 핵심도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냐에 대한 것이었다.

여인의 궁극적인 문제는 일평생 골머리를 앓은 6명의 남편들에 관한 것도, 그녀의 껄끄러운 직업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그가 누구신 줄 알았다면 그녀는 생의 근본이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 하는 이가 오시면 모든 것들에 대해 알려주실 것인데 그가 계시하실 내용의 본질은 예배의 처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예배의 처소는 영과 진리이다. 그 처소로 나아가는 길은 메시야 자신이다. 동시에 진리시기 때문에 예배의 처소도 되신다.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누구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 영원한 생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모른다면 누구도 결코 목마르지 않을 영생수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어가 중요하다.

어떠한 분야에 탁월하면 칭찬과 존경이 쏟아진다. 그러나 우리가 신학이든 신앙이든 그리스도 예수께로 나아가지 않고 어정쩡한 지점에서 인간적인 칭찬과 존경의 촉수에 찔려 감염되는 순간 웃고 즐기다가 그리스도 예수를 놓치는 총체적인 상실에 직면한다.

오늘은 왠지 수가성의 한 우물가에 온 느낌이다. 예수님의 질문을 곰곰히 곱씹으며 모든 사안에서 모든 순간마다 그리스도 예수가 내 인생과 신앙과 신학의 주어이길 묵상하려 한다.

2014년 7월 21일 월요일

하나님이 상급이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3:8-9)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한다. 구원의 완성이 인간의 손아귀에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차원과 정도에 관한 권면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도 정도의 문제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있어서도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에 있어서 자라가야 한다는 정도와 관련된 권면이 있다. 하나님을 지극히 큰 상급으로 얻는다는 것도 모두에게 획일적인 상태나 동일한 내용이 아니라 미묘한 온도차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얻으려고 모든 것의 상실과 유익한 것들의 배설물 취급도 불사했다. 이것은 일회성 추구가 아니었다. 삶의 항구적인 속성처럼 그것이 빠지면 살았어도 사는 게 아니었던 추구였다. 그리스도 추구 자체가 그냥 삶이었다.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상급이란 말은 어떤 물리적인 소유물이 나의 임의적인 처분권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만 보아도 분명하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고 불변적인 분이시다.

하나님은 유한하고 한시적인 존재이며 손바닥 뒤집듯이 수시로 변하는 인간에 의해 소유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으로 주어진 바 되신다는 건 이루말할 수 없는 은혜이며 기적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그런 소유를 상상하지 못한다. 다만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바울이 취한 태도에서 그 비밀한 소유의 감미로운 실루엣을 포착한다. 바울은 모든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돌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길 소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로잡힌 바 된 바로 그것을 좇으려고 일평생 질주했던 사도였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미치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사로잡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결박되지 않고 좌우되지 않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의 모습이다.

바울은 이미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 땅에서는 완성되지 않을 질주라는 이야기다. 나그네의 여정이다. 오직 완성의 앞을 바라보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일방향 질주가 성도의 인생이다.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라는 차원의 지경을 넓혀가는 인생이다.

지경을 넓히고 또 넓혀서 나에게 하나님이 기쁨이고 하나님이 영광이고 하나님이 향유이고, 하나님이 찬송이고, 하나님이 안식처고, 하나님이 전부라는 온전한 상태에 대한 시인의 갈망과 노래가 미시건의 청쾌한 아침을 자극한다. 

사랑의 공동체

오늘은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었다. 오랜만에 뵙는 분들의 촉촉한 눈가에는 그리움과 따뜻한 사랑이 흔건했다. 긴 시간동안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사랑이 거대한 재산처럼 느껴졌다. 영혼이 든든했다. 마음도 편안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든다. 사랑하지 않고서도 사람다울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다. 교회는 조건도 없고 투자도 아닌 순수한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여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곳이기에 가장 향기로운 처소이다. '그런' 처소이길 소원한다.

2014년 7월 20일 일요일

헤세드의 흡입력

만인이 소망하는 것은 지속적인 사랑이다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비결은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에 있다.
삶의 모든 현장에서 관찰되는 사실이다.

변함이 없는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사랑의 출처를 사모한다.
사랑은 결코 내가 기준일 수 없는 행위이다.

내가 기준이 된다면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고
자신의 기분을 훼손하는 대상에게
사랑의 지속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혜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을 인하여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나를 사모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지속적인 헤세드의 사랑이 없다는 의미이다.

나의 주변에 사람들이 없다고 불평할 필요 없다.
원래 사람은 사랑을 받는 자보다 주는 자에게 이끌린다.
어떤 식으로든 늘상 주는 사랑의 사람이길 소원한다.

초대교회 성도의 삶

초대교회 시대에 성도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니케아 이전 무명의 교부가 쓴 글에서 그 윤곽을 얼추 더듬는다. 오늘날의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과 적잖은 괴리가 느껴지니 속이 불편하다. 문명의 옷차림이 변하기는 하였어도 여전히 사람이 사는 세상인데...부끄럽고 씁쓸하다. 조용한 성찰과 정직한 숙고의 자료라고 생각하여 번역해 보았다.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분된다. 그들이 머무는 나라나, 사용하는 언어나, 준수하는 관습에 의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도시에 주거하지 않고 고유한 언어의 양식도 고수하지 않고 어떤 독특성에 의해 구별되는 삶을 영위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행위의 방침은 호기심에 취한 사람들의 사색이나 숙고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니며, 어떤 이들처럼 순전히 인간적인 가르침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일도 없다. 하지만 성도들은 각자에게 주거가 할당된 대로 야만인의 도시나 지성인의 도시에 거주하며 의식주나 다른 일상적인 행위에 있어서 각 주거민의 관습을 역류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탁월하고 심히 충격적인 삶의 양식을 펼쳐 보인다.

1)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과객처럼 살아간다.
2) 시민의 신분으로 그들은 모든 것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나 마치 이방인인 것처럼 모든 것들을 인내한다.
3) 그러한 모든 이방 나라가 그들에게 모국으로 되어 있지만 그들이 출생한 모든 땅은 이방인의 땅이었다.
4)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지만 낙태하지 않는다.
5) 그들은 공공의 식탁을 사용하나 공공의 침대는 사용하지 않는다.
6) 그들도 육신 안에서 살지만 육신을 따라서 살지는 아니한다.
7) 그들도 땅에서 그들의 나날을 보내지만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간다.
8) 그들도 제정된 법질서를 따르지만 그들의 삶은 그런 법의 차원을 초월한다.
9)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나 모든 이들에 의해 핍박을 당한다.
10) 그들은 무명이며 정죄를 당하고 죽음에 내던짐을 당하지만 다시 살아난다.
11) 그들은 가난하나 많은 자들을 부요하게 만든다.
12) 그들은 모든 것에 있어서 빈곤하나 모든 것에 있어서 풍족하다.
13) 그들은 불명예를 당하지만 바로 그런 불명예 속에서 명예롭게 된다.
14) 그들은 비방을 당하지만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는다.
15) 그들은 매도되나 축복한다.
16) 그들은 조롱을 당하지만 그 조롱을 존대로 응수한다.
17) 그들은 선을 행하지만 행악자로 징계된다.
18) 그들은 징벌을 당하여도 마치 소생한듯 기뻐한다.
19) 유대인에 의해서는 이방인인 것처럼 공격을 당하였고 헬라인에 의해서는 핍박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미워하는 그들은 자신들을 미워하게 할 근거를 그들에게 제공할 수 없었다."

Ep. ad Diognetum, ch.5.

2014년 7월 19일 토요일

이그나티우스의 순교관

오늘 강의를 준비하다 이그나티우스 글에서 뭉클한 감동을 얻습니다. 제가 사는 환경은 안디옥의 교부와 다르지만 이런 순교관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나는 모든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모든 이들에게 단언하는 바입니다. 저는 당신들이 저를 저지함이 없이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죽을 것입니다. 저로 맹수들의 밥이 되도록 승인해 주십시오. 이로써 저에게는 하나님을 얻는 복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밀인 저는 맹수들의 뾰족한 이빨에 갈려져서 결국 하나님의 순전한 빵으로 발견될 것입니다. 오히려 사나운 짐승들을 부추겨 그 짐승들이 저의 무덤이 되고 저의 몸은 한 조각도 남아나지 않게 하십시오. 그래서 제가 잠들었을 때에 어떤 이에게도 성가신 존재가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세상이 저의 몸을 보지 못하는 바로 그때 진실로 저는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저를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께 간구하되, 이러한 도구들(맹수들의 사나운 이빨)로 말미암아 제가 하나님께 희생물로 발견될 수 있도록 부르짖어 주십시오. 베드로나 바울처럼 제가 여러분께 명을 내리는 건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이고 저는 곤고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되었으나 저는 아직도 노예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견딘다면 저는 그리스도 예수의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자유로운 몸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지금 결박되어 있으면서 저는 [세상의] 어떠한 것도 갈망하지 않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Ignatius of Antioch, Ep. ad Romanos, 4.

좋은 사이트들

초대교회 역사교재: Source Book for Ancient Church History

90여 종류의 옛 주석들을 수집한 사이트다. 설교본문 정해지면 원문을 숙독하고 이곳을 출입한다. 이 사이트는 하나의 성경 텍스트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조명된 의미들의 집합소다. 각 주석은 권-장-절을 선택하면 곧바로 읽어볼 수 있어서 좋고 입장료도 없고 세금도 안붙어서 좋다. Bible Commentaries

깨끗하고 단백한 관주성경 사이트다. 보고 있노라면, 관주성경 보던 옛 느낌과 흥분이 밀려온다. 성경이 성경을 풀어주는 관주성경 사이트를 공유하고 오프라인 상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파일까지 공유하는 착한 사이트다. 운영자께 감사를 표하며... 관주성경

2014년 7월 17일 목요일

재앙에 대한 반응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잠17:5)

여기서 "사람"은 특정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재앙이 기쁨을 유발하는 경우는 대체로 그것이 악인에게 혹은 원수에게 닥쳤을 때입니다. 평소의 행실이 음란하고 포악하고 가증하고 사악한 사람에게 재앙이 임하면 마치 하나님의 공평이 구현되는 듯하여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은밀한 갈채를 보냅니다.

이런 반응에 하나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라는 하나님 지식이 갈채의 든든한 보증과 명분까지 보탭니다. 그런데 오늘 지혜자는 사람의 재앙은 일체 기뻐하지 말랍니다. 그런 자는 형벌을 면할 수 없답니다. 그러므로 악인나 원수의 재앙이나 패망을 목격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재앙, 특별히 악인이나 원수의 재앙을 기뻐하는 것의 배후에는 일반적인 권선징악 개념이 또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물론 악한 일을 경계하고 선한 일을 권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고 오히려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의 판별과 그것에 대한 심판에 있어서 사람의 사사로운 기준이 작용하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재앙은 나의 초라한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한 주먹이 사용된 것이기에 나 자신의 사사로운 견해나 관여 없이도 나의 기준이 화끈하게 구현되고 옳다고 확인된 사건인 것입니다. 이로써 밖으로 들키지 않고도 나의 기준과 판단이 은밀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 셈입니다.

'기뻐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인간 존재의 대단히 복잡한 심리적 작용이 밀어낸 결과적 현상인 것입니다. 당연히 결과로서 기쁨은 인간의 본질과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출구인 것입니다. 우리로 기쁘게 하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면 그것에 호응하는 우리의 내면이 보일 것입니다. 지혜자는 단순히 재앙에 대한 기쁨의 표면적인 반응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란 현상으로 표출된 내면의 상태와 문제의 심각성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재앙의 주체는 얼마든지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재앙을 볼 때마다 두려워 하고 떨어야 할 것이며, 재앙을 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함께 아파하는 게 마땅한 반응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시고, 우리는 어떤 자인지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리에 엎드리는 게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늘상 무수한 재앙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무시로 반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아주 일상적인 현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함을 지혜자의 권고에서 배웁니다. 어떠한 재앙이든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한다는 것, 우는 자로 함께 울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겠습니다.

세상의 어리석은 지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세상의 학문은 사람의 성장기를 따라 구별된다. 사람이 어릴 때에는 후견인 혹은 청지기의 권위 아래에 있듯이 신앙이 어릴 때에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다고 바울은 설명한다. 그러나 믿음이 장성한 이후에는,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이후에는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 세계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다. 주님은 세상에서 지혜롭다 하는 자들의 사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혜로운 자로 하여금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라"고 기록한다.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 즉 하나님은 자비와 심판과 공의를 땅에 행하시는 분이심을 깨닫는 것을 자랑의 이유로 삼으라고 한다.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어떤 생각과 판단과 결정의 배후를 조금만 들여다 보면 모든 게 자기신뢰 결과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나아가 시인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고 권하는데 이는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도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나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사람의 지혜가 신앙의 토대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인생은 의지의 대상이 아니다. 아무리 부요하고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민첩하고 아무리 준수하고 아무리 건장하게 보여도 의지의 대상은 아니다. 당연히 인간문맥 안에서 형성되고 승인되고 통용되고 가치화된 지식과 지혜와 질서에 우리의 신앙을 위탁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다.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우매함의 종식은 간단하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막대한 희생과 결단이 요구된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세상의 모든 초등학문 일체를 상대화시키는 것에는 과히 혁명에 준하는 변화가 수반된다. 우리의 사랑은 지식에 있어서 그리고 분별력에 있어서 자라가야 하는데 그런 자람이란 기존에 익숙하던 지식과 지혜와의 결별을 수반한다. 그러니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란 오명을 뒤집어 쓸 각오는 주를 따르는 자들의 기본기다. 천지를 진동시킨 주범으로 내몰려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내공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온 땅에 배푸신 일반적인 은총을 무시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온전하게 된다.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항구적인 초자연에 붙여진 이름이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소식을 전하는 방식으로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도록 마련된 계시의 수단이다. 이것과 세상의 어리석은 지혜를 혼돈하면 안되겠다.

공기는 디오게네스가, 물은 탈레스가, 불은 히파수스가 숭배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2세기의 교부 클레멘트는 이처럼 기초적인 물질들이 숭배되는 것을 개탄하며, 교회의 사랑이 지식과 분별력에 있어서 자라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한다. 우주와 인생에 관한 물음들을 머리에 넣고 살아가는 철학자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어린 아이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아무리 탁월해도 종의 아들은 상속자가 되지 못한다는 어법으로 세상의 지혜를 평가한다.

우유에 준하는 세상의 학문을 진리의 반열에 무모하게 삽입하는 이들을 교부는 베이비로 규정한다. 진리의 말씀으로 연단되지 않은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한다. 진리에 장성한 자는 이성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변하는 감별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감별력 자체가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꼼꼼하게 검증하여 분별된 "선한 것들"을 확고히 붙들어야 한다는 바울의 권고까지 교부는 추가한다. 분별의 기준이 진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른 기준으로 분별된 선악은 거짓이다. 선을 악이라고 하고 악을 선이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규모를 갖추고 모든 것들을 검증하고 분별하여 선한 것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고수하되 이 모든 행위들이 지향하는 목적의 중요성을 바울은 지적한다. 즉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자신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결과는 올바르지 않다. 이는 스스로 추해지고 망가지는 첩경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에 이르라고 주문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의의 열매로 풍성해야 한다.

이상을 정리하면 이렇다. 1) 분별의 기준인 진리를 확보해야 한다. 2)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에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 3) 진리에서 자라간 만큼 분별의 지경은 확대된다. 4) 나아가 삶의 전 영역에서 선악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5) 분별에서 중지하지 않고 분별된 악은 피하고 선은 고수해야 한다. 6) 이는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어야 한다는 지향점을 놓쳐서는 아니된다.

2014년 7월 15일 화요일

기독교적 지혜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빌1:10)

칼빈은 무엇이 유용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기독교적 지혜의 정의라고 말한다. 이 지혜는 공허한 교설과 사변으로 정신을 고문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한다.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무익한 것을 배우며 시간과 정신을 허비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당시 소르본 대학의 학자들이 일생을 탕진하며 매달렸던 주제들은 영적인 유익과 천상적인 삶의 윤택을 도모함에 있어서 심지어 유클리드 기학학의 논증보다 쓰잘데기 없는 것이라고 칼빈은 비판한다.

사단은 성도의 소명에 거치는 돌맹이 두기에 능숙하다. 실족하게 만들고, 걸려 넘어지게 하고, 삼천포로 빠지게 하는 궤변 구사력에 있어서 사단을 능가하는 존재는 없다. 유용하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집착하게 만드는 사단의 꾀임에 빠지는 분들이 적지가 아니하다. 대체로 학자들이 그런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학문'이란 명패만 사용하면 교회의 유익과 무관한 것들에 매달리고 논해도 괜찮다는 관념에 타협의 손을 쉽게 내뻗는다.

이런 우매함은 전염성도 유난히 강하다. 학문을 논하는 놀이터의 담벼락을 넘어 교회와 선교의 현장까지 비본질적 잡설과 잡무에 집착하게 만들어 시시비비 올무에 꿰고 쥐락펴락 한다. 이는 대체로 내가 살아 있어서 걸려드는 함정이다. 별거 아닌 일들 때문에 곳곳에서 충돌하고 핏대를 올리고 찢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참으로 안타깝다.

사랑으로 쉬 덮어질 허물들에 노골적인 조명등을 비추며 그것들을 동네방네 공공연히 퍼뜨린다. 그러면 그 사안에 대해 편이 깔끔하게 갈라진다. 갈라진 두 편 사이에는 싸늘한 신학적 전선이 형성되고 평화의 교류를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무언의 룰을 깨뜨리는 자는 희생양이 되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강도 높은 징계의 본보기로 채택된다.

그러나 기독교적 지혜는 사랑으로 덮어질 사안에 대해서는 덮고 지나간다. 거기에 시간과 마음과 관심사를 과용하지 않는다. 교회에 진실로 유용한 것들을 식별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가 그것이다. 그 열매의 풍성한 결실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일에 가용한 모든 재원들을 동원하여 주목하고 매달린다.

공부를 하든 목회를 하든 사업을 하든 이런 지혜가 필요하다...

2014년 7월 14일 월요일

사랑과 지식과 분별

나는 이것을 기도한다:
너희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에 있어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1:9)

바울의 기도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개인적인 바램이 아니다. 주님께서 교회로 하여금 얻도록 구하라고 본보이신 기도의 모델이다. 바울의 짤막한 기도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의 선명한 방향과 지침을 제공한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사도의 기도를 뜯어보자.

바울은 자신의 기도에서 사랑은 몽롱한 감정의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지식 및 온전한 분별력의 지속적인 증대와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당연히 뜨거운 가슴을 사랑의 전부로 여겨서는 안되겠다. 계속해서 자라나야 하는데 지식과 분별이 온전해질 때까지 자라나야 한다고 바울은 가르친다.

사랑은 바른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지식을 요청한다. 사랑하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다소 모순적인 순환적 어법이 그런 사랑과 지식의 관계를 잘 설명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된다. 알면 알수록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을 알수록 우리는 무엇이 유용한 것인지를 분별하고 인정하게 된다. 주님을 모르면 대체로 썩어 없어지는 것들에 짐승의 본능 수준으로 집착하게 된다.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보다 찰나적인 사물과 상태가 더 유용하게 보이기에 그것을 얻으려고 이성이 없는 맹수처럼 사납게 달려든다. 그런 판단력을 따라 살아간다.

이는 올바른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않은 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진정한 사랑과 온전한 사랑의 의미를 모르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여기기에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돌이키려 하지도 아니한다. 주변에서 진실하게 조언해도 구차한 잔소리에 불과하다. 마치 지식이 없는 소원의 광기처럼 지식이 없는 사랑의 맹목성도 제어할 수단이 없어 보인다.

사랑에도 격이 있다. 깊고 높고 길고 넓은 차원이 있다. 온전하지 않은 상태의 사랑을 전부로 여기거나 사랑의 최종적인 상태나 정점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 온전한 사랑의 훼방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어설픈 철부지 사랑은 로맨틱한 추억용 사랑일 수는 있겠으나 우리가 지향하고 고집해서 머물러야 할 사랑의 종착지는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분별에서 자라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자람의 정도는 무한대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야 하는 게 사랑이다. 지성과 방향과 재능과 가치를 다 걸어야 한다. 이는 수단일 수 없고 방편일 수 없고 지나가는 과정일 수 없는 게 하나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단면이 아니라 포괄적인 개념을 정립하고 그런 개념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바울의 기도가 가르치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