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게으른 소득이 우리를 좀먹는다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한다"

현숙한 여인의 이상을 묘사하는 잠언의 한 대목이다. 양식을 먹는다는 목적보다 정당한 수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해석의 마침표를 찍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구절이다. 남편의 이런 칭찬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물론 목적과 수단의 전도를 만회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윤리적 교훈을 중요시 하면서도 그것을 최종적인 가치로는 삼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르기를 원하시는 가치는 도덕이나 윤리에 의해서는 생산될 수 없는 가치이다. 베드로의 언급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로까지 부름을 받아서다.

양식을 먹는다는 것은 곱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인간의 가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관심의 차순위가 당연하다. 그러나 게으름은 인간의 성향을 건드린다. 게을러도 소득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그 자체가 치명적인 잘못이나 오류인 것은 아니지만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는다'는 타락 직후의 인간생존 원리를 걷어차게 할 가능성은 높다. 게다가 게으른 소득에 적응된 사람이 주는 자의 고급한 부르심에 부응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말씀이 멸시되고 배푸는 자의 영광이 박탈되는 것보다 게으름 중에 굴러온 양식을 거절하는 것이 지혜롭다. 그런 양식으로 배부르면 처음에는 낯설어도 나중에는 끊을 수 없는 주초처럼 원리적인 차원에서 서서히 중독된다. 직접적인 경험은 없다만...

중독의 정도가 깊어지면, 이건 단순히 먹거리 문제를 벗어난다. 인간의 질과 무게를 건드리는 사안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에 대한 타인의 칭찬과 존경을 음식과는 다른 먹거리로 고대한다. 이를 위해 물질을 뿌리기도 하고 강요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보다 신사적인 유형으로 수단의 차별성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취득된 칭찬이나 존경은 게을리 얻은 무형적 먹거리의 대표적인 사례다. 바울은 칭찬의 출처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지적한다. 지혜자는 인자와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고 한다. 현숙한 여인은 여호와를 경외하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 여성이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게 사는 것인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원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른 방식으로 사는 모든 게으른 공짜는 달콤하고 짜릿하나 생의 가치가 그런 근성으로 중독되는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무서운 결과를 수반한다. 게으른 소득들이 여러 형태로 삶의 곳곳에서 기생하며 생의 가치를 좀먹고 있다. 날잡고 말끔하게 일소해야 하겠다. 반드시 부작용의 뻣뻣한 고개를 내밀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내밀면 때늦은 발견이다. 할수만 있다면 빨리 제거하는 게 상책이다. 집도 수시로 청소해야 되듯이, 우리의 근성이나 성향도 대청소가 필요하다. 

2012년 10월 30일 화요일

여호와를 경외하라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부족함의 전적인 부재 사이에 시차가 없다는 게 중요하다. 원인과 결과의 틀로 해석해도 의미의 자연스런 흐름에 역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의 간격이 개입되면 경외를 투자하고 풍족을 건진다는 상업적인 발상에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는 무의식적 계산이 발동한다. 당연히 마음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거래는 제어되기 어렵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여호와 경외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순수성을 상실하면 끝장이다. 사단이 군침을 흘리며 그런 끝장을 노리는 건 당연하다. 사단에게 온 천하와 그 영광을 통째로 제안하는 건 이미 예수님께 맞장의 안다리를 걸었던 광야에서 노출된 전략이야. 그런 남루한 흥정에 예수님은 결코 수락의 악수를 내밀지 않으셨어.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만을 섬기라는 것이 사단과 맞서는 최상의 방패였고 창이었지.

우둔한 사단은 자신의 음흉한 속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참신한 전략도 미련 없이 묵살해. 전략에 '일관성'이 있다는 이야기야. 그러나 그토록 변하지 않는 전략을 구사하는 사단의 미련함에 늘 걸려 넘어지는 나를 보시는 주님의 심경을 어떠실까?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사단의 이 가증한 냉소를 나 때문에 듣고만 계셔야 하는 말도 안되는 사태의 원흉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동기를 관리하고 그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영적 전쟁의 살벌한 전방이야. 하나님은 마음의 순수한 동기를 살피시고 그런 동기의 부패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사단의 노림수가 당연히 다른 모든 것들을 거래의 대상으로 제시하며 그것만은 뺏고자 할 때 그 일순위에 해당하는 동기 허물기를 고집하는 건 너무도 당연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부족함의 전적인 부재다. 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그것 이상으로 높여질 수 없는 작정의 궁극적인 방향이요 창조의 본질적인 원리이며 모든 세대에 변하지 않는 생의 최종적인 목적이기 때문이지. 달리 말하면 여호와 경외함의 부재는 천하와 그 모든 영광을 취한다 하더라도 부족함의 총체적인 충만이요 모든 것들의 상실이다. 이보다 더 탁월한 부족함의 부재 원리를 아시면 재보해 주시라. 

여호와를 경외하라...인생에게 주어진 최고의 복이 명령의 옷을 입었다. 다윗에겐 자율성의 침해를 수반하는 명령이라 할지라도 음율에 실어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2012년 10월 29일 월요일

종교개혁 이후

종교개혁 주간이다. 늘 그렇듯이 기념의 무게는 주로 16세기 초반에 50년간 벌어진 기독교의 전방위적 쇄신과 변혁 이야기에 실린다. 지금은 연구의 폭이 넓어져서 루터(비텐베르크)와 칼빈(제네바)과 틴데일(옥스포드)만 주목하던 과거와는 달리 오클람파디우스(바젤), 카피토(스트라스버그), 쯔빙글리(쮜리히), 멜랑히톤(비텐베르크), 버미글리(스트라스버그, 옥스포드, 쮜리히), 부쩌(스트라스버그), 불링거(쮜리히), 낙스(스코틀랜드), 삐레(로잔), 무스쿨루스(베른), 파렐(프랑스), 데타플(빠리), 히페리우스(마르부르크) 등의 이름도 거명되고 그들의 공적에 대해서도 전문적인 소개가 이어지고 있다. 긍정적인 현상이다. 한국교회 현실이 필요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로 150년간 격정적인 종교개혁 정신의 고백화와 체계화와 제도화와 조직화와 교육화와 문화화에 대한 관심의 빈곤을 지적하는 분위기는 아직 감지되지 않는다. 종교개혁 이후 인물들은 몇몇 거성들의 심장에서 강력하게 박동했던 개혁의 정신을 당시 열악한 치안과 의료시설 속에서 언제 직면할지 모르는 그들의 죽음과 더불어 무덤에 묻어버릴 수만은 없었다. 당연히 보다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의 심장으로 번져 교회의 전반적인 체질 속으로 안착될 필요성은 절박했다. 그들은 그걸 수행했다. 하여 종교개혁 당시의 역사에 돌려지는 관심과 동일한, 어쩌면 그 이상의 관심을 쏟고 발굴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할 분야가 바로 종교개혁 이후의 정통주의 시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먼저 개혁적인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 발전소가 바젤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에 세워졌고 기존의 로마 카톨릭 성향의 대학들도 개혁의 산실로 변해갔다. 시골과 도시를 불문하고 로마 카톨릭의 행위 중심적인 구원론과 교황을 필두로 한 위계질서 의존적인 교회의 제도들과 출생에서 사망까지 한 사람의 일대기에 성례전적 올가미를 씌워 일상마저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의 기독교 문화 속에서 신학과 목회의 뼈가 굳고 길들여진 목회자 사회의 개혁을 위해 앞에서 몇 명만이 깃발을 흔들고 열정을 불태우는 것으로는 비록 필수적인 것인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몇몇 도시에 프로테스탄트 대학이 세워져 개혁의 정신이 목회자 개인에게 직접 수혈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종교개혁 정신의 계승, 유지, 발전은 그곳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16세기 후반에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고 안착하고 발전시킨 정통주의 작업에 두각을 드러낸 당시 종교개혁 3세대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잔키우스(스트라스버그, 하이델베르그), 베자(제네바), 우르시누스(하이델베르그), 카트라이트(캠브리지, 윗기프트 등극으로 교수직을 박탈), 올레비아누스(하이델베르그), 유니우스(레이든), 퍼킨스(캠브리지), 케커만(단찌히), 그리네우스(바젤), 폴라누스(바젤) 등이다. 그들이 섬기는 도시와 교구의 색바랜 종교적 칼라는 서서히 개혁의 푸른 물감으로 채색되어 갔다. 종교개혁 정신은 단순히 교회의 변화만이 아니라 학문과 법정과 산업과 가정의 변화까지 수반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학문의 통일성은 35개 이상의 분야를 성경에 기초하여 통합한 케커만과 알스테드 손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후로도 17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인물들은 고마루스(레이든), 알스테드(헤르보른), 왈레우스(레이든), 폴리얀더(레이든), 마코비우스(프라네커), 에임즈(프라네커), 루베르투스(프라네커) 등이 있으며, 17세기 말엽까지 개혁의 촛대를 붙들었던 마레시우스(흐로닝엔), 푸치우스(우트레히트), 차르녹(옥스포드, 더블린), 오웬(옥스포드), 튜레틴(바젤) 등이며 그 이후 18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마스트리히트(우트레히트), 윗시우스(프라네커, 우트레히트, 레이든), 아 브라켈(노틀담), 픽테트(제네바), 말키우스(레이든), 레이데커(우트레히트), 보스턴(스코틀랜드) 등이 정통주의 시대를 종결하는 인물들에 해당된다.

시간의 길이로 보나 인물의 분포도로 보나 지금 우리가 종교개혁 시대를 기념하는 것은 종교개혁 전체의 1/4 조각에 불과하다. 그 조각만의 가치와 교훈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전부로 여긴다면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가 없었어도 개혁이 성공했을 거라고 간주하는 것과 일반이다. 지금 우리가 종교개혁 유산을 네 개의 조각 중 하나라도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정통주의 시대에 이루어진 종교개혁 신학의 체계화, 조직화, 고백화, 제도화, 교육화, 문화화에 쏟은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의 땀방울이 맺은 결실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종교개혁 시대의 뜨거운 열정을 전수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 개혁된 진리의 내용이 의식과 문화와 관습 전반에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어짐에 있어서는 다소 취약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종교개혁 이후의 정통주의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라 하겠다.

이제는 그 작업에 뛰어들 젊은 피가 시간을 길게 두고 해산의 고통을 시작해야 할 때인 듯하다. 물론 앞서 훌륭한 선배들이 긴 안목으로 남긴 업적과 이정표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2012년 10월 28일 일요일

교회 법령집 연구

AD 500년경 로마의 한 수도사가 된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는 공의회의 신조들을 수집하고 연구한 학자이며 특별히 헬라어 교회법 모음집을 라틴어로 처음으로 번역한 '일급' 번역가다. 란셀롯도 17세기 초반에 그라티안 법령집을 편집하여 출간하되 대단히 방대한 주석을 첨부했다. 사도적 문서들 혹은 교회법의 오류를 규명하고 반박한 프랑스의 교부학자 달레우스 문헌도 걸어둔다. 그라티안 법령의 그림자에 가려진 교회법 분야의 2인자 이예브의 16세기 로바니우스 판본도 비교연구 차원에서 리스트에 담았다. 교회법 연구는 주로 독일 지성들이 주류를 이루되, 드레이와 빅켈과 헤펠레가 탁월했다. 헤펠레의 연구는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 연구 결과물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분야에 대해 개혁주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업적은 거의 전무하다. 교회법은 사도시대 교부들을 비롯하여 각종 공의회와 유력한 교부들의 고견을 수집해서 교회의 질서를 세우고 검증하기 위한 잣대로 사용된 소위 법령집의 규범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주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를 사용했고 개신교 측에서는 그들의 오류와 모순을 그들의 언어로 입증하는 증거 문헌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비판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개신교의 근간을 이루는 내용들도 많아 긍정적인 문맥에서 인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분명한 것은 16-17세기 학자들은 교회의 법령적 전통에 비판적 조애가 깊었고 개혁주의 신학 형성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Primary sources
Dionysius Exiguus, Collectio Canonum Dionysio-Hadriana (9세기로 추정)
Dionysius Exiguus, Collectio Canonum Dionysio-Hadriana (11세기로 추정)
Dionysius Exiguus, Collectio Canonum Dionysio-Hadriana (다른 펙시밀리 버전)
Giovanni Paolo Lancelloti (ed), Corpus iuris canonici Volume 1 (Colonia, 1605)
Giovanni Paolo Lancelloti (ed), Corpus iuris canonici Volume 2 (Colonia, 1605)
Johannes Dallaeus, De pseudepigraphis apostolicis (Harderuici, 1653)
Yves de Chartres_Decretum beati luonis (Lovanius, 1561)

Best secondary sources
* Johann Sebastian von Drey, Neue Untersuchungen über die Constitutionen und Kanones der Apostel (H. Laupp, 1832)
* Johann Wilhelm Bickell, Geschichte des Kirchenrechte (Giessen, 1843)
* Karl Johann von Hefele, A History of the Councils of the Church (Edinburgh: T&T Clark, 1872)
Volume 1, Volume 2, Volume 3, Volume 4, Volume 5


교만이 속인다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에돔에 대한 오바댜의 묵시록에 언급된 구절이다. 에돔은 에서 가문을 대표한다. 에서와 야곱이 잉태 동기로서 리브가 자궁에 들어선 첫출입 때부터 그들의 관계성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했다. 그런데 에돔은 피로 맺어진 천륜도 깨뜨리고 섬겨야 할 대상인 야곱 가문을 오히려 멸절과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 살상과 약탈의 검을 무시로 휘둘렀다. 

그들의 하극상 행보는 생계의 절박이란 그나마 수긍의 고개라도 끄덕여 줄 명분에서 나온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들의 은밀한 속뜻을 가늠할 대목은 바로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 내릴까나' 구절이다. 그들의 막가파 칼부림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는 언명의 주어이신 하나님 조롱과 비웃음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오바댜의 입술에 임한 하나님의 준엄한 평가는 그들의 교만이 그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죄를 알기도 전에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 교회사 속에서 알레르기 반응의 항구적인 샘이었던 예정 이야기다. 그러나 이는 구약과 신약의 목젖을 떨면서 출고된 공통의 목소리다. 사람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하여금 백기투항 요청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심지어 하나님께 편애가 없다고 한 바울의 고백에도 모순의 짱똘을 던지는 메시지다. 한 마디로 납득이 안간다. 당연히 '내 머리로 납득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할배라 할지라도 편들지 않겠다'는 사람 나온다. 심하면 에돔의 경우처럼 천륜 뒤집기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저항의 의사표시 수단으로 가볍게 채택된다. 

여기서 난 겸손을 생각한다. 교만은 야만적인 에돔 족속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에돔과 동일한 성정의 소유자다. 이는 오바댜 후반부가 이스라엘 백성 이야기로 채워지는 이유다. 비록 내용이 멸망과 구원으로 대립을 이루고 있으나 서로 상통하는 스토리다. 겸손과 교만이 겨우 백지의 간격으로 서로 밀착되어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사야의 묵시록에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라는 말씀에 나오는 '정직' 개념도 색상만 다르고 질감은 겸손과 동일하다.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에게서 발견된다. 말씀 앞에서 정직을 붙드는 게, 이성의 피가 거꾸로 흐르고 상식의 배알이 뒤틀리는 일이라는 거 안다. 오히려 상식과 합리성을 동반하여 세상을 설득하고 급기야 하나님을 등지게 하는 방편으로 동원되는 겸손 껍데기가 사방에 즐비하여 그나마 살얼음판 분별조차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거 안다. 진정한 겸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가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먹고 마시는 자의 소산이다. 

단언한다.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만큼 겸손하다. 아무리 탄탄한 합리로 무장되어 있어도 말씀이 거절되면 교만에 속은 결과이다. 성경을 읽다가 여전히 낯설고 모순적인 대목을 만나면 두려움이 앞서는 이유다. 그래도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 지식은 있어서다. 말씀과 겸손은 불가분의 운명이다.

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Zacharias Ursinus 전집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저자요 해석자로 활약한 폴란드의 브레슬라우 (현재 Wroclaw) 출신 우르시누스 (Zacharias Ursinus, 1534-1583)의 1612년 하이델베르크 전집을 오랫동안 수배해 왔드랬다. 제3권의 행적을 포착했다. 물론 오래전에. 1권과 2권은 구글이 이름만 명부에 기재해 두고 내용은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5년 전에 개혁주의 학술원에 거금을 들여 구입한 전집이 있으니 각자의 경로를 통해 알아서들 접근하면 되겠다. 그러나 아래에 링크된 문헌들이 전집 내용의 대부분을 커버한다.

우르시누스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은 젊은 시절에 잠시 하숙을 했던 집의 주인장 멜랑히톤 아제가 맞다. 그러나 그의 삶과 행보에 보다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던 인물은 멜랑히톤 및 루터와도 우정을 나누었던 요하네스 크레토다. 형편이 어려울 때마다 그는 크레토를 찾았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 수행도 개혁의 물결에 동참해 달라는 크레토의 줄기찬 요청에 응한 결과였다. 전집의 내용물은 대부분 교수직을 수행하며 산출한 것들이다.

그가 몸이 닳도록 연구하고 가르친 대가는 기력의 이른 쇠퇴와 '욱'하는 돌발적인 성질의 잦은 표출이라 한다. 사실이다. 그러나 난 그를 독일 개혁주의 전통의 등뼈를 형성한 인물로 높이 평가하고 싶다.

Opera theologica, tomus tertius (Heidelberg, 1612)
Corpus doctrinae orthodoxae (Heidelberg, 1612)
Tractationum Theologicarum (Harnisch, 1584)
Doctrinae Christianae Compendium (Cambridge, 1585)

2012년 10월 26일 금요일

신학하는 태도

어떤 신학생이 신학하는 태도와 고전읽기 및 독서법을 물었다.

1. 일단 M.Div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시간은 짧고 과목과 과제는 많습니다. 기본기를 다지는 기간이기 때문에 수업에 충실하며 주어진 과제를 소화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더구나 **그곳에서 공부하고 계시다면 교과과정 및 독서 리스트에 유의미한 신학적 결함은 없을 것으로 사려됩니다. 과정에 충실하자, 이게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입니다.

2. 고전 문헌들을 접하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는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한국 신학교의 아쉬운 점은 어떤 신학적 관점에서 걸러진 교재와 참고 문헌들을 쓴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휠터링 과정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안전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도가 지나치면 학생들의 신학적 변별력 감퇴라는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습니다. 텍스트야 책이니까 나 자신이 주도할 수 있다지만 목회하는 현장에는 다양한 이단들의 게릴라에 가까운 기습과 공습이 속출하기 때문에 대체로 법서의 법조문을 적용하듯 공식의 기계적인 대입으로 처신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부들과 중세 학자들과 종교개혁 인물들의 글을 직접 읽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물순물은 걸러내고 양분은 섭취하고 대응의 지혜는 길러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벌콥이나 바빙크란 거성들이 정리한 내용의 지속적인 독서는 하되 온실 속에서만 자란 체질이 되지 않도록 어느 정도의 신학적 야성은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좋습니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그곳의 교과과정 편성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부족하다 생각하여 다른 고전들을 참조하고 싶다면 일단 주어진 과제에 충실한 이후에 여력으로 그리함이 어떨까 싶습니다.

3. 신학을 공부하는 자세는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겸손과 성실한 탐구의 정신줄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특별히 진리 앞에서는 인간의 성정과 상식이 전복되는 댓가라도 과감히 지불할 수 있는 자세를 말합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기도의 호흡을 중단하지 않는 것은 **님도 잘 아시는 기본기 중에서도 신학의 골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위에 신학적 역량을 키워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를 변별하는 지각의 근육이 서서히 생깁니다. 이것은 경건의 당일치기 연습으로 수확할 수 있는 열매가 아니라 일평생 걸리는 일입니다. 신학생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 그런 건강한 신학공부 체질이 마련되지 않으면 일평생 곁길로 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 아시는 내용을 제가 많이 말하지는 않았는지~~~요. ^^ 함께 공부하는 동료로서 서로에게 좋은 자극과 도움을 주고 받으면 좋겠네요. 주님의 지혜와 총명을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4. 아! 책읽는 방법이나 이해속도 이야기를 안했네요...^^ 나이가 들어가고 있어서...ㅎㅎㅎ 저는 속독을 하는 편이 아닙니다. 정독을 하며 생각의 입술을 움직여 저자의 자리에서 말하듯이 읽습니다. 저자와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판단의 각을 세우며 읽으면 내 신학이 위험에 노출되는 일은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를 읽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반면 저자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책의 본의를 더 잘 깨닫지만 동시에 잘못된 신학에 노출되고 물드는 위험성도 그만큼 높습니다. 이런 일장일단 상황에서 저는 후자를 택하면서 전자의 장점을 살리는 독서를 했습니다. 후자의 단점을 피하기 위해서는 양서를 선택하는 게 핵심입니다. 그러면 타인의 글에 신학의 마음을 열어도 그리 위험하지 않을 테니까요. 저자의 의도도 깊이 읽으면서 위험한 신학도 경계할 수 있어 좋습니다. 이해의 속도는 저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 일단 진리의 진정한 소통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일이기에 성령의 조명을 받도록 늘 기도하며 주님 발 앞에서 독서하는 것이 첩경일 듯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지식의 전달은 있어도 진리의 전달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인간우상

"베드로 개인에게 교황직 혹은 최고의 권위가 주어졌다(Primatus Petro datur)" 문구와 이틀동안 삽바를 거머줘고 싸웠다. 키푸리안 교부의 [보편적 교회의 일치성에 관하여(De unitate ecclesiae catholicae)]란 책 원문에는 없었는데 후대에 로마 카톨릭에 의해 삽입된 문구로 여겨 16-17세기의 거의 모든 개신교 학자들이 거절했던 것이어서 그런지 관련 자료가 산더미다. 저마다 주장과 반박의 예리한 붓길을 얼마나 사납게 몰았는지 한 편의 대하 추리극을 보는 듯하야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그런 긴장감 속에서 이틀이 후딱 흘러가 버렸던 것이었다.

자료들을 보면서, 베드로 사도라는 한 명의 특정한 인간에게 다른 사도들과 차별화된 권한이 부여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그런 사례를 빌미로 다른 한 인간에게 불경한 추앙의 감투를 씌우는 간사한 작태에 목숨을 불사하고 저항의 붓을 들었던 믿음의 선배들이 일치된 마음으로 한 자리에 머리를 맞대고 모인 듯하여서 야릇한 감흥에 휘감기는 듯하였다. 기독교의 인간론 일번지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개개인은 동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에 참여하는 지체로서 동등하다. 여기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동서남북 불문한다.

이런 저항의 굵직한 역사가 제공하는 교훈을 따라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강도와 차림새만 살짝 달리해서 오히려 보다 음흉한 서열 개념이 기독교 문화의 언저리에 군살처럼 은밀하게 박히지 않도록 분별의 날을 더 예리하게 갈아야 하겠다. 물론 그 날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돌이키는 방향이 우선이고 그런 돌이킴 자체가 타인에게 그런 날이 되도록 함이 마땅하다. 

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영광의 첩경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사물의 근원이 그 사물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도록 만드시는 하나님,
사태의 원인이 그 사태 안에서는 추적되지 않도록 일하시는 하나님,
그렇게 만물을 지으시고 역사를 이끄시는 주체로 계시면서
스스로는 감추시는 하나님,

모든 만물과 생명과 호흡을 주시지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늘 은밀하게 주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우리에겐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시면서
증인으로 하여금 존재감을 알리기 원하시는 하나님,

모든 일들을 부지런히 살피는 도리를 다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숨기는 게
주께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영광의 첩경이라 생각하게 된다.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영혼을 지키시는 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분이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분이 어찌 알지 못하실까.

시각과 청각의 손을 뻗어서 정보를 취득하고 때때로 추론으로 걸러서 인식에 이르는 인간과는 달리 하나님은 창조하신 분으로서 모든 것을 직관하고 계신다. 마음의 무게도 그분의 지각을 벗어날 수 없으며 영혼의 표정도 그분의 눈 앞에서는 가려지지 않는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는 분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 있다는 말씀의 의미를 인간적인 지각의 틀에 대입하면 오해가 빚어진다. 사람의 방식과는 다르게 아시기 때문이다.

주요한 대목은 그분의 신적인 전지가 우리를 고소할 목적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지키시는 방향으로 우리를 상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천금에 눌려 질식할 정도로 타인에 의해서는 지각될 수 없는 무게를 가졌어도 주님만은 그걸 아신다는 거다. 이 땅에서 빚어지는 억울함과 분통의 무게를 가늠할 저울이 세상에는 없다. 타인의 지각이 출입할 수 없는 우리 각자의 마음을 통찰하되 나 자신보다 더 정밀한 차원까지 아시는 유일한 증인은 하나님 뿐이시다. 그분이 그런 인지력에 전능까지 동원해서 우리의 영혼을 지키고 계신단다.

무수한 갈레의 생각을 지키고자 하는 건 무모하다. 하물며 우리의 영혼을 파수하는 문제가 어찌 우리의 몫일까나. 주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의 말짱한 경성함도 허사라는 시인의 노래는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가는 삶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자비롭고 지속적인 일하심이 있다는 감사의 심경을 토로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은 사람에게 형체도 냄새도 색깔도 무게도 부피도 알려지지 않은 마음을 통찰하고 그 출입을 알 수 없는 영혼의 상태와 행보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세미하게 느껴보고 싶따!!!

포만감

하루를 일찍 접는 날도 있구나.
고작 한 페이지 반을 써 놓고서도
어디선가 밀려오는 포만감에 키보드를 접었다.
어쩌면 생각의 고갈된 바닥을 은폐하기 위해
의식의 지문을 안남기고 은근슬쩍 밀려온
엄호용 포만감일 수도 있겠다...이 요망한 것! ㅋㅋ

2012년 10월 23일 화요일

외면당한 선물

사람의 성정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심히 뒤틀어져 가치의 경중과 고저 감별력이 사망 수준이다. 주님께서 주기를 원하시는 것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멸시하고 박대하는 경우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그 증거다. 구약과 신약시대 그리고 지금까지 주님은 자신이 주기를 원하시는 최고의 것을 주고자 하셨어도 늘 우리의 부패한 기호에 떠밀려 외면을 당하셨다.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없어 그것을 주시려고 오셨어도 자기 백성들은 멀리하고 저주하고 선물로 주어진 게 아니라 타락한 분노의 발로로서 목숨까지 빼앗았다. 그렇게 흉폭하여 정상적인 대화와 관계성이 불가능한 우리의 성정을 아시고도 마술적인 전능을 동원하지 않으시고 그냥 그들의 흉포함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생명으로 받으셨다. 그래도 깨닫지를 못하였다. 하나님께 무슨 짓을 하였는지, 하나님을 적대시할 정도로 얼마나 적대적인 본성의 골이 깊은지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가 틀어지면 하나님도 안중에 없어지고 맞짱의 무례한 칼을 겨누는 타락의 극심한 부패상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몬 유대인을 통해 표출된 것 뿐이다. 특정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법도도 알고 그의 백성이라 칭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그 무서운 실상을 경고하고 교훈하는 샘플일 뿐이다. 주님은 본성이 죄로 장악된 우리에게 최상급 진주를 주고자 하셨어도 돼지의 말초적인 식견을 따라 오물로 더러워진 발굽으로 짓밟히는 꼴을 당하셨던 거다. 지금도 어디선가 재연되고 있다.

주님은 자신을 선물로 주시려고 해도 그 가치와 사랑을 읽어내지 못하는 안목의 부재가 어쩌면 주께서 인류에게 내리신 재앙의 핵심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나는 지금도 인간의 뒤틀린 기호에 집착하는 옛 습관으로 주님의 선물을 수시로 거절한다. 주께서 주시고자 하는 그것을 기대하고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경주해야 하겠다. 

루터성경 1545 비텐베르크 독역판

루터는 독일 국민들의 성경 접근력을 높이기 위해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했다. 신약은 비록 자존심을 조금 구기기는 했지만 소위 흠정역(Textus Receptus) 헬라어 성경으로 알려진 에라스무스 2판(1519)을 원본으로 삼았고 1522년에 독일어역 신약이 출판되어 나왔으며, 구약은 주로 70인역을 원본으로 삼았으며 결국 신구약이 통합된 독일어 완역판은 1534년에 나왔으나 권별로 서론이 삽입되지 않은 판본이라 아쉽다. 물론 마지막에 성경 전체가 장별로 요약본이 제공되고 있기는 하다. 링크된 판본은 1535년, 스캔상태 최상이다.

사실 루터는 성경 번역을 일생의 과업으로 여겨 죽는 순간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하여 진정한 완역본은 1545년 비텐베르크 판이라고 함이 더 정당하다. 권별로 서론이 들어가 있다. 1545년 독일어 성경의 진정한 완역본 탐색에 들어간지 어언 2시간, 폴란드 노르윅에 있는 한 도서관이 만들어 공개한 DjVu 파일을 찾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운로드 시간이다. 10시간이 넘도록 85퍼센트 정도만 진행된 채 다운로드 마비 사태에 직면했다. 취소했다 다시 진행해도 여전히 제자리다. 아~~~ 겨우 찾았는데 그냥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나보다. 이럴 때도 있지뭐~~~란 말로는 위로가 안되누나.

Martin Luther, Biblia, das ist, die gantze Heilige Schrifft deudsch (Augsburg, 1535)
Martin Luther, Biblia, das ist, die gantze Heilige Schrifft deudsch (Wittenberg, 1545)

16세기 어거스틴 전집 다운로드 방법

어거스틴 오페라 1528-1529 바젤판 전체를 다운로드 받는 방법이다.

1. 먼저 FlashGet 프로그램 깔아야 한다. 그리고 요기를 누르면 오페라 전체가 각각의 파일로 나뉘어져 있는 사이트가 뜬다.

2. 해당 사이트에 커서를 올리고 마우스의 오른쪽 버튼을 눌르면 다양한 선택이 나오는데 FlashGet으로 모두 다운로드 받기를 누른다.

3. 그러면 FlashGet 프로그램 뜨는데 다운로드 대상 파일이 다양하다. 하여 Filtering을 해야 하는데 필터링 부분에 PDF를 치면 PDF 파일만 다운로드 대상으로 선택된다.

4. 그리고 Download 버튼을 누르시면 저장할 장소 지정하는 창이 뜨는데 난 외장하드 아랫묵에 다운로드 받았다. 그건 각자 맘대로다.

혹시 FlashGet 프로그램 필요하면 요기를 누르시라. 이 프로그램 사용의 주의점은 저작권에 걸리는 것도 묻지마 다운로드 작업에 들어가기 때문에 무작위로 사용하면 안된다는 거다. 법에는 저촉되는 일이 없도록 지혜롭게 사용하면 대단히 유용하다.

2012년 10월 22일 월요일

핑계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자연과 초자연을 분리하여 은총의 영역에서 자연을 삭제하고 은총의 영역은 로마 카톨릭이 독점권을 행사하며 금전의 배를 불렸던 왜곡의 역사는 카톨릭과 개신교를 가리지 않고 지금도 어디선가 그 숨통을 유지하고 있다. 자연은 하나님의 계시와 통치가 펼쳐지는 신비로운 무대이고 때때로 자연과 대립하고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초자연은 초자연의 항존적인 좌소인 자연의 일상화된 신비로 안내하는 서곡일 수도 있다는, 믿음의 선배들이 이곳 저곳에서 남긴 사유의 조각들을 조립하여 결국 자연과 초자연의 구도를 폐기하고 모두 하나님이 만드시고 사용하신 초자연에 해당되며 항존성과 일시성 혹은 일반적인 것과 특별한 것 사이의 차이를 가졌을 뿐이라고 한 바빙크의 체계화는 위에 언급된 말씀에 기초한 것이었다.

우리는 초자연적 신비의 충만 속에서 살아간다. 바울의 언급에서 우리는 기독교 문화의 유무와 무관하게 이 땅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핑계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오병이어 경험한 사람들의 예수님 추종이 그 근저에 그런 기적을 이루신 주체가 누구냐는 물음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란 마태의 까칠한 지적은 굳이 초자연적 기적만 체험한 사람들을 겨냥한 것만이 아니다. 말씀의 총구는 이 땅에서 항구적인 자연의 형태로 제공되는 초자연의 암시를 먹고 마시고 호흡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조준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향해 그들의 무지를 정죄하는 법정의 판결문 읽어주는 재판관 자리를 넘보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고 가당치도 않다. 늘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식으로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욱 자라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의 내면을 더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며 섬겨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해함이 좋다.

이렇게 당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오늘은 그 물음의 이정표를 따라 걷는 하루이고 싶다.

나는 부자다

나는 부자다

사랑하는 아내가 곁에 있고
전통에 튼실한 화살이 세 개나 있어서다.
이 정도로 주셨으니
주께서 내게 찾으시는 것도 많겠지.
그러실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것에 부응하는 나의 현실은 도무지 신통치가 않다.

2012년 10월 21일 일요일

보상의 소통방식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주께서 나를 보실 때에 얼마나 답답해 하실까나. 주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은 꼭 상급을 걸어야 가능한 것인가를 자문한다. 물론 완전하여 자존하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의 불완전한 실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상체계 의존적인 소통이 최상급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면 우리의 행위가 어떻게 결과적인 보상에 조건을 충족하는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이 과연 마땅할까? 그건 아니다.

하여 위에 인용된 말씀에서 하나님 자신보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상급에 우선적인 갈증을 가진 우리를 애둘러 고발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과의 눈높이 소통을 위해 스스로 어법을 낮추시는 주님의 따뜻하고 자비로운 배려를 읽는다. 그리고 그런 방식의 소통이 필요함을 배운다...

루터주의 예정론

개혁주의 예정론을 정면으로 반박한 16-17세기 루터주의 학자들을 연구하면 선택과 유기에 대한 한발짝 더 깊은 통찰이 가능하다. 과학에 있어서도 기존에 발생한 실패의 문맥을 벗어난 새로운 발견은 그 가치의 수명이 잠깐 반짝이다 사라지는 유행성에 불과하다. 실패의 이유 파악이 더 중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한번의 충격적인 기적보다 무수히 반복되는 일상의 신비를 벗겨주는 게 보다 많은 분들에게 보편적 유익을 제공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고 알아도 일상과의 단절로 쉬 망각할 수밖에 없는 교리라면 장식품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박물관에 진열된 아이쇼핑 대상이 아니다. 경계선 너머의 고고한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일상과 뒤섞이는 어떠한 간격도 허용하지 말아야 할 양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하고 있다면 그런 분들의 논리와 입장이 어느 지점에서 갈등하고 묶여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 매듭을 풀어주는 것이 교리의 상용화 혹은 일상화를 위한 첩경이다. 실용주의 일변도로 가자는 건 아니다.

로마 카톨릭은 개혁주의 예정론에 관심도 약했고 당연히 비판의 날이 예리하지 않아 보다 깊은 사고의 긴박성을 조성하지 못한 반면 루터주의 예정론은 개신교의 울타리 안에서 그런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아래에 링크된 문헌들이 진리의 검을 더 예리하게 세우는 일에 유익하다. 반성도 하고 친절한 답변도 준비할 수 있는 자극제로 말이다. 눈길을 끄는 내용들도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성경의 각 구절들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이 교리적 문구 고수에 집착하여 다른 입장이 발각되면 곧장 전투적인 날부터 세우는 도그마 근성에 휘둘리는 이론적 개혁주의 신봉자도 꽤나 있는 것 같다. 예정론의 반석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다. 거기에 깊이 뿌리 내리지 않은 교리 추종자의 입술에는 생명력이 없다. 믿음의 선배들이 그런 정교한 고백에 이른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챙기면 경건의 모양만 갖추는 교리적 장신구에 불과하다.

폴라누스 예정론 읽다가 그와 대립각을 세운 루터주의 학자들의 저술들을 알게 되어 몇 개만 모아 두었다.

먼저, 하나님의 사전적인 의지(antecedens voluntas Dei)와 사후적 의지(consequens voluntas Dei)를 구분하고 후자에 근거하여 루터주의 예정론의 토대를 닦았고 토사누스, 베자, 잔키우스, 칼빈, 후터 등등을 집요하게 논박한 후니우스 문헌이다.

Aedigius Hunnius (1550-1603), Articulus de providentia Dei et aeterna praedestinatione seu electione (Frankfurt/Main: Johann Spiess, 1597)

특별히 다니엘 토사누스 입장과 대립각을 세운 후터의 단편이다.

Leonhard Hutter, De praedestinatione disputatio quarta (Wittenberg, 1594)

루터주의 예정론 중에서 가장 복잡한 스스로도 꼬인 듯한 입장을 개진한 퀸스테트 저작이다.

Johannes Quenstedt, Exegesis dicti Paulini, quod extat 2 Thess II v.13, agens de electione ad salutem (Wittenberg, 1679)

루터주의 예정론다운 일반성을 가장 잘 정리한 게할더스 전집 제2권이다.

Johannes Gerhardus, Loci communes theologici tomus secundus (Frankfurt & Hamburg, 1657)

2012년 10월 20일 토요일

요하네스 게하르두스 Loci theologici

요하네스 게하르두스 (1582-1637)의 Loci theologici가 인터넷을 부유하며 주인을 기다린다.

그는 17세기 정통주의 시대에 루터주의 진영에서 가장 깊은 주름을 잡았던 인물로 간주되곤 한다. 내가 알기로도 루터주의 진영에 이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가 가장 방대한 규모의 조직적 골격을 갖춘 루터주의 교의학 Loci theologici를 산출했기 때문이다. 19세기 판본도 있지만 난 1657년에 전9권으로 출간된 17세기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판본을 선호한다. 역사신학 학도의 근성 때문이다. 저자의 숨결이 보다 짙게 느껴지고 문헌의 현장성이 최대한 담보된 판본을 구하는 거. 

루터주의 신학의 총화라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출중한 인물이다. 4세기 전의 9권짜리 전집이 한 권도 누락되지 않고 제공되는 사례는 드물다. 당연히 이런 물건은 애서가의 구미 당기는 흡입력이 불랙홀 수준이다. 굳이 화폐가치 논하자면 2만불은 건지는 거다. 난 웹사이트 쥔장의 맘 변하기 전에 얼른 외장하드 주머니에 챙겼다.

Loci theologici (Frankfurt & Hamburg, 1657)

2012년 10월 19일 금요일

가치의 좌소는?

가치의 좌소는 내게 주어진 유익에 있지 아니하다.

사마리아 문둥병자 한 명이 누렸고 유대인 문둥병자 9명이 누렸어야 할 진정한 가치는 슬픔으로 얼룩진 그들의 몸이 깨끗하게 치료된 것에 있지 아니하다. 보냄을 받으신 주님께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억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일들을 통하여 주의 은혜가 전파되는 약속의 실현이 그들의 몸에 새겨진 것에 있다. 사마리아 출신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그런 방식으로 먹었으나 나머지는 아니었다.

다윗이 전쟁에서 무수히 승리한 것도 적을 섬멸하여 장수의 용맹한 이름을 떨치고 전리품 수거로 주머니가 두둑해진 것에서 그 가치가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고 전쟁이 주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을 그런 방식으로 먹고 전인격에 새겨진 것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존하여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입성한 것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진리의 깨우침과 입증이란 차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우리의 인격과 삶에 각인되는 것보다 더 큰 증인의 삶이 없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우리의 형통이 늘 목마른 가치가 되어 그것으로 복음이 좌우되는 것인 양 얽매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나 죽으나' 오직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 존귀케 되는 삶을 의미한다. 그런 개념의 거울에 내 삶을 투사하면 수많은 얼룩과 굴곡이 관찰된다. 그리고는 썩어 없어지는 가치에 목매여 일평생 그것에 종노릇 하는 건 아닌지를 성찰하게 된다. 

말씀이 머리 둘 곳이 없도록 나 자신으로 충만한 삶의 숨막히는 악취를 제거하는 방향제 같이 하늘에서 분무되는 물방울로 마음이 촉촉한 아침이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 교회라는 교회론의 정수를 잠잠히 반추하게 된다. 

Isidorus의 De summo bono

7세기 교부였던 Isidorus Hispalensis의 [최고선에 대하여(De summo bono)]의 1538년 빠리 판본과 1505년 바젤 판본이다.

최고선 개념을 창세기 15장 1절과 결부시켜 이해한 최초의 인물은 어거스틴, 그것을 교의학적 체계 속에서 교리적 논제로 꼼꼼하게 다룬 인물은 폴라누스, 그러나 그 사이에 최고선 개념으로 단행본을 출간한 인물이 바로 이시도루스 교부였다. 세간의 주목을 빗겨간 이유는 이 책이 그의 오페라에 묻혀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오페라는 종합의 풍부함을 미끼로 개별 저작들의 고유한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앗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는 이중 예정론을 일찍이 고백한 인물이다: Gemina est praedestinatio, siue electorum ad requiem, siue reprobarum ad mortem. 택자의 예정 방향이 '안식'으로 설정되어 있어 특이하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대체로 공감하는 삶으로의 예정 개념과는 살짝 상이하다. 안식이 진정한 삶이고 주님과의 삶이 진정한 안식이란 사실에 눈 뜨게 할 가벼운 독특성 정도로 이해하면 본질상 동일한 고백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겠나. 이런 맥락에서 예정론에 대한 이시도루스 언급은 폴라누스 신학에 교부적 증언으로 채택된다.

책에 이전 교부들의 이름이 전혀 거명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간 교부로 평가될 수 있겠으나 '보편적 교회(ecclesia catholica)'라는 언급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것을 감안하면 신학적 유아독존 행보를 의도한 것은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 하여 '조만간' 가방끈을 내려 놓은 이후에 한번 본격적인 학술의 날을 세워 헤집어 볼 생각이다.

Isiodorus Hispensis, De summo bono et soliloquiorum eius (Basilea, 1505)
Isiodorus Hispensis, De summo bono (Paris, 1538)

본향을 사모하는 폴라누스 아제는 이번에도 이 책의 활자나 편집 면에서 보다 월등한 빠리 신판을 거절하고 33년 전에 나온 바젤 구판을 소스로 삼았다.

참고로 이시도루스 최고의 역작은 비록 다양한 저자들의 글을 짜집기 한 것이지만 이거다.

Etymologiae (출판장소 및 년대추정 불가)

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죄는 소원의 차원!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우리에게 소원의 형태로 있다는 지적한다. 우리가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이 소원인데,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성정까지 파고든 그 어두운 소원의 뿌리를 뽑아낼 다른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 게 죄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죄와의 사투가 피 흘리는 정도까지 간다는 건 빈말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가치의 고착된 좌표를 의심하고 익숙한 기호를 거절하는 일이란 결심의 이맛살을 구긴다고 될 일이 아니거든.

바울의 언급처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되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 생각한다. 죄가 우리에게 소원으로 다가오는 이상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책임은 나에게 귀결된다. 그러니 핑계할 수 없다. 문제는 주께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지 않는 사람들 중에 죄를 다스려 낸 분이 아무도 없었다는 거다. 앞으로도...

해법이 내 안에 없다는 것으로 자존심을 운운할 필요까진 없다. 원래 인간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독립된 존재로 만들어진 적도 없고 그렇게 살아간 적도 없고 타락 이후에도 의존 본성은 여전하여 죄문제도 내 손으로 처분할 수 없다는 게 전혀 낯설지가 않아서다.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 구절 이전에 '들은 말씀을 간직해야 한다'는 말은 죄의 소원을 다스리는 실천적인 방안의 뽀얀 속살을 드러낸 멘트다.

'내가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안에 두었다'는 시인의 절박한 결단과 노래가 이 경우에 너무도 합당하여 은쟁반 위에 아로새긴 금사과와 같은 아침이다.

E-Codices

펙시밀리 자료 사이트다...참 별걸 다 만든다. 부지런도 한다.

E-codices

버나드의 오페라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의 디지털 오페라 사이트다. 라틴 교부전집 182, 183, 184, 185권에 기초한 것이다.

Opera omnia s. Bernardi

그리고 16세기 후반에 2권으로 1596년에 출간된 버나드의 오페라 베니스 판본이다.

Opera tomus primus (Venice, 1596)
Opera tomus secundus (Venice, 1596)

폴라누스 아제가 사용한 판본은 역시 자기 구역에서 출판된 1566년 바젤 판본이다.

Opera (Basilea, 1566)

2012년 10월 17일 수요일

Corpus iuris canonici (1605)

17세기 로마 카톨릭의 공식적인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다. 교황주의 학자들은 이 문헌을 맴돌며 그들의 신학을 정립했고 개신교 학자들도 이 문헌을 근거로 신학적 대립각을 세우며 비판적 논지를 펼쳤다. 문헌은 차차 살피고 일단 자료관리 들어간다.

Corpus iuris canonici by Giovanni Paolo Lancelloti (Colonia, 1605)
Volume 1 / Volume 2

성경의 영속성은 어디에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16-17세기 개혁주의 교의학 문헌들 중에는 신론이 성경론에 선행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성경에 속성이 부여되는 근거가 말씀을 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의존하고 있어서다. 즉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와 가치는 거기에 담긴 내용에도 관계된 것이지만 무엇보다 성경의 저자 자신과 그가 부여한 속성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가 쏟아내신 말씀이 영원히 서도록 시간의 갈피마다 개입하실 것이기에,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지금을 관찰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이 가능하고 삶의 안전이 보장된다. 이런 사실을 하나님이 배재된 자연 탐구로 대체하는 우매함의 둔탁한 각질은 절구에 넣어 빻아도 쉬 벗겨지지 않는다.

명토박아 두자. 하나님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성경 해석학의 혈관을 관통하지 않으면 성경이 독자에게 그 의미가 맡겨진 인문학의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풀과 꽃의 일시성은 영원한 말씀의 대체물이 아니다. 그렇게 맞바꾸는 자의 무모한 자아를 어떤 불경함이 휘감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는 자는 영원히 설 것이다. 인위적인 세습 방식으로 가문의 보존을 꽤하는 분들의 자구적인 '영존'과는 과히 다른 방식이다. 

피쿠스(Johannes Picus)의 오페라다

Johannes Picus de Mirandolanus (1463-1494)

폴라누스 아제가 인용한 분이어서 살폈는데 자료가 희귀하다. 이틀동안 잡았는데 건진 게 거의 전무하다. 그냥 접을까 하다라 막마지에 낚은 그의 오페라를 링크한다. 신플라톤 철학과 유대 카발리즘 사상을 기독교와 접목시켜 결국 특별 검열팀이 꾸려졌고 그의 13세 가지 논제들이 이단적 사상으로 단죄된 인물인데 폴라누스 아제는 어쩌자고 이런 분의 글을 교부들과 개혁교회 사이의 교리적 일치를 논하는 무대에 등장시킨 것일까. 논쟁적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로마 카톨릭이 단죄한 인물의 입술에서 어떤 권위와 설득력을 찾겠다고 그런 것일까. 여튼 의문이 꼬리를 물지만 일단 자료는 걸어둔다. 나중에 연구가 필요한 수상쩍인 인물 정도로만 정리하자. 31세로 단명한 이유도 궁금하다. 허나 지금은 신경을 꺼야지~~~

Opera Joannis Pici (Strassburg, 1504)
Pico Project

2012년 10월 16일 화요일

물음이 있는 삶

먹고 자고 읽고 쓰고를 반복한다. 반복에서 비롯되는 나른한 최면에 들어가면 일상의 쳇바퀴에 갇히는 게 수순인데, 오히려 일탈의 자극이 고조되는 오늘은 별일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물음이 문뜩 뇌리의 등짝을 긁어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살도록 지어졌다. 한번도 포기된 적이 없는 삶의 원리이며 방식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다소 추상적인 원리도 말씀으로 산다는 보다 구체적인 방식의 다른 표현이다. 만물의 존재와 질서를 권능의 말씀이 지탱하고 있다면 이는 말씀을 내신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동일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셨고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으로 살게 하셨다. 말씀대로 사는 것과 세상에서 사는 것이 서로 다른 살림이 아니다. 동일한 원리로 동일한 이유를 가지고 동일한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가며 세상은 우리가 머무는 일상에서 구현되는 소금과 빛으로 행복을 먹는다.

말씀을 먹으며 존재하는 방식의 독특성은 마치 내가 주체가 되어 어떤 가치를 스스로 생산하는 형태를 취한다는 거다. 이는 주시는 자가 스스로를 감추시고 받는 자가 주어지는 것으로 가장 높은 누림의 기쁨을 얻도록 고안된 방식이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내면에서 가장 존중된 자율성을 따라 주신 자에게 반응하게 하는 시스템이 말씀을 먹고 사는 삶의 방식이다.

생명과 만물과 호흡을 주시는 분으로서 존재의 인기척도 하시고 시혜자의 생색도 좀 내시고 신적 강제력을 동원해 마땅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촉구하실 법도 한데, 우리 주님은 외부의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우리의 반응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구걸하신 적도 없으시고 오히려 무한한 용서의 품을 늘 예비해 두시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에게 이렇게 행위의 주어로 일인칭을 사용해도 될 주님의 깊은 사려와 은혜를 생각하며 그냥 계속해서 주님을 향한 '물음이 있는 삶'을 살려고 한다. 

Niermeijer 중세 라틴어 사전

링크된 중세 라틴어 사전, 이거 하나면 끝난다. 일전에 멀러 교수님도 니어마이어 사전이면 중세 문헌들이 커버된다 카시더라. 다운로드 강추다. 라틴어-불어-영어 대조판 형식이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축약어 리스트가 빈약하다.

16세기 초반까지 라틴어로 저술된 중세 문헌들은 약어를 무진장 많이 사용한다. 읽다 보면 울화가 정수리를 수시로 드나든다. 물론 반복하면 얼추 감이 잡혀서 추정하는 스킬이 늘지만 해당 축약어의 정확한 해석으로 문장의 의미가 좌우되는 경우에는 도리가 없다. 찍는 수밖에! 고서체 판독 및 축약어의 가능 원문자 리스트를 제공하는 사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카펠의 축약어 사전이 적격이다.

중세는 안그래도 많이 어두운데 라틴어도 가독성과 접근력이 현저히 떨어지니 속이기도 쉽고 속기도 쉽고 조작도 쉽고 학적 군중심리 조성도 용이하다. 그러나 믿음의 선배들은 황무지 속에서 백합화를 발견하는 일에 명수였다. 진리의 섬광을 발견하기 위해 중세의 먼지 뒤집어 쓰는 일도 괘념치 않았다. 역사상 주님의 통치 공백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섭리의 지문채취 위해 중세 문헌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Jan Frederik Niermeijer, A Medieval Latin Lexicon (Leiden: Brill, 1976)
Adriano Cappelli, Lexicon Abrreviaturarum (Milano: Ulrico Hoepli, 1899)

Abbas Panormitanus

Nicholas de Tudeschis는 Abbas Panormitanus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교황이나 공의회 결의문의 방대한 주석으로 정평이 난 닉은 이탈리아 베네딕트 계열의 교회법 전문가다. 이후로 이 분야에 있어서 그보다 더 방대한 문헌을 산출한 학자가 없을 정도다.

Abbas Panormitanus, Commentaria in decretalium liberum (Venice, 1592)
Tomus primus
Tomus secundus
Tomus tertius
Tomus quartus
Tomus quintus
Tomus sextus
Tomus septimus (1617)
Tomus octavus
Tomus nonus
Tomus decimus (1617)

2012년 10월 15일 월요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훈계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다.

겸손을 걷어차는 것은 존귀의 길잡이를 해고하는 짓이다. 지혜자는 겸손의 핵심을 여호와 경외하는 지혜에서 찾는다.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가 겸손과 직결되어 있다는 얘기다.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 보이는 분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오만의 지름길을 남몰래 활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타인을 속이는 경우도 있지만, 때때로 스스로도 속는다.

겸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이다. 너무도 착해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의도된 계략이든 무의식적 돌발이든, 사람들의 막연한 기대치를 뚫고 짐승의 본성을 드러내는 사례가 많다. 사람이 변하지는 않았는데, 사람들 앞에서만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도 겸손에 이르는 사람은 없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방식으로 겸손해진 사람의 향기는 존귀이다. 맡아본 바에 의하면 그건 봄의 향기보다 찐했다.

살다가 존귀한 사람을 드물게 만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그를 알아보게 한 건 입술의 파장보다 겸손의 향기였다. 가공되는 순간 악취를 발하기에 모조품이 나올 수 없는 향기이다.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는 겸손한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서도 뿌려진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복음증거 방식이다.

꽃의 향기는 십리를 가지만 인품의 향기는 만리를 간단다. 꽃보다 향기로운 것이 사람다운 사람의 향기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와 겸손 이외에 다른 어떤 식으로도 그런 향기가 나오지 않도록 지어졌다. 같은 원리를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라도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 그래서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도 미워하는 자에게 복음이 증거된다.

사족: 다른 이유로 개인적인 원수가 된 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원수' 항목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하겠다. 

게르손의 전집

종교개혁 이전 중세의 마지막 주자로 활약한 요하네스 게르손의 전집이다. 그는 당시에 교황이나 공의회의 권위가 결코 선지자들 및 사도들의 성령으로 영감된 권위에 필적할 수 없다는 입장을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었던 그런 믿음의 기백을 좀처럼 구기지 않았던 인물이다. 폴라누스 경우, 그를 명명할 때에 당시 예수회 수사들에 의해 프란시스 수와레즈 독점물로 여겨지곤 했던 'Doctor Eximius' 호칭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링크된 그의 전집은 1518년 바젤에서 출간된 판본이다. 내가 탐독하고 있는 분이 소스로 사용한 문헌을 발견할 때의 기쁨이란...입이 귀에 걸리는 수준을 훌쩍 넘어선다. 아마도 다른 시대에는 시도할 수 없었던 지금의 인터넷 학문연구 방식은 수개월 어쩌면 수년의 시간과 천문학적 수치에 가까운 경비 절감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집을 몇 채나 말아 먹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ㅡ.ㅡ

조엘비키 [청교도 신학]

[청교도 신학]이 나왔다. 캠브리지 출판사가 [청교도 개관]서를 냈지만 조엘비키 편집본은 왠지 가슴 후끈한 기온차가 느껴진다. 아마도 부제에서 보이듯이 살도록 가르치는 교리를 담았기 때문인 듯하다. 저자들은 책에서 청교도 신학의 '표피만 겨우 끄적거린 느낌(we feel we have just scratched the surface)을 받는단다. 이는 그 신학의 넓이와 깊이를 본다면 겸양의 표현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교리의 정수와 교리 상호간의 연관성 표출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의 진정성을 믿는다. 이미 다른 곳에서 게제된 논문의 재탕도 보이지만, 대부분의 장들은 새롭게 쓰여진 글들이다. 멀러 교수님의 추천사에 언급된 것처럼 수년간 이 분야의 필독서로 자리매김 할 책이다. 저가구매 비결은 룸메이트 귀띔으로 입수해야 하겠다.

Joel Beeke, et.al., A Puritan Theology: Doctrine for Life (Heritage, 2012)

2012년 10월 14일 일요일

전부를 팔아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어제 심재승 교수님의 진솔한 강의를 들었다. 기독교 세계관을 이론으로 배워 이론으로 전수하는 문제의 극복은 삶의 전 영역에서 기독교로 사고하고 바로 그 현장에서 기독교적 사유를 전수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적극 공감한다. 내용은 익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 분야에 뜨거운 심장과 실천으로 무장된 분의 입술에서 출고된 강의여서 남달랐다.

'개혁주의' 간판으로 자신의 신분을 덮되 속은 개혁주의 신앙과 무관한 표리부동 신학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도 동일한 것 같다. '개혁주의' 타이틀로 자신을 표명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각 성도의 가정과 일터, 목회자의 목회하는 교회, 신학자의 가르치는 신학교 현장에서 말씀으로 자신과 자신의 모든 행위를 끊임없이 개혁하는 사람이 개혁주의 신앙의 진정한 소유자다.

이런 방식으로 배우고 익혀서 가르치지 않으면 개혁주의 신앙의 미래는 없다. 오히려 그 신앙의 변질과 혐오만 양산하게 될 것이다. 입술은 개혁주의 교리를 말하지만 심장은 개혁주의 신앙으로 박동하지 않는 어설픈 신학자 혹은 목회자가 휘두르는 비판과 정죄의 칼로 인해 교회가 지불해야 하는 희생이 크다.

고귀한 것일수록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의 고귀함도 그 만큼의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 지식의 전달이 열쇠라면 책소개만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참으로 고귀한 것은 그런 방식으로 전달되기 어렵다. 인간이 배설한 관습만 물려주는 정도랄까. 고귀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의 발자취를 뒤따르며, 진리가 거절되고 천하보다 귀한 생명조차 희생의 수단으로 요구되는 사태 속에서도 십자가를 내동댕이 치지 않는 증인들의 신앙과 삶으로 전수되는 법이다.

나의 전부를 팔아서 살 진주를 아는 것도 중요하고, 전부를 걸고 그 진주를 사는 것도 중요하다. 전인격이 동원되지 않으면 알지도 행하지도 전하지도 못한다. 아쉽게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분리나 단절 없이 인격과 삶 속에 통합된 선생이 희귀하다.

키프리안 전집

교회의 통일성 주장으로 가장 정평이 난 교부 키프리안 오페라의 1593년 제네바 판본이다. 1권만 찾았다. 나머지 2권과 3권은 재보를 기다린다...ㅡ.ㅡ

Cyprianus, Opera tomus primus (Geneva, 1593)

그러나 1543년 판본도 있으니 아쉬움을 달랜다.

Cyprianus, Opera tomus primus (Antverpia, 1542)
Cyprianus, Opera tomus secundus (Antverpia, 1542)

2012년 10월 12일 금요일

부쩌의 권징

2010.10.13

교회에서 교회론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권징에 대해서 부쩌가 한 말을 아래에 인용한다.권징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권세의 성격으로 이해하는 오해를 잘 풀어주는 구절이 아닌가 생각한다. 징계는 꼭 필요하다. 징계가 없으면 교회의 존재가 유지될 수 없다고 보았던 부쩌는 권징에 있어서 동시대의 개혁주의 인묻들과 구별되는 행보를 보였었다. 카톨릭의 제도적 성격의 교회론이 권징의 강화를 꺼려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진정한 필요에 예민한 분별력을 발휘한 부쩌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The discipline of Christ consisted in this, "that all members of Christ recognize and embrace each other most intimately and lovingly, and they build one another up in the knowledge of and obedience to the son of God most zealously and efficaciously, and that the minsters of the churches know, care for and tend the individual sheep of Christ, as the chief pastor Christ set the example...In countless places in Scripture, the Lord described and set forth for us this [discipline] which we also have proclaimed so clearly for so many years in life and writings and sermons."

Amy N. Burnett, The Yoke of Christ (Missouri: SCJP, 1994), p.1.에서 재인용

레오나르도 브루니의 도서추천

그는 인문주의 학자로서 바질의 헬라어 문헌, De utilitate studii in libros gentilium (이방인 문헌들에 대한 연구의 유용성에 대하여, 1403) 을 라틴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이 번역본은 인문주의 학자에 의해 번역된 최초의 헬라교부 텍스트다. 번역 이유는 교부들의 권위 있는 입술을 빌어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는 성경과 교부들을 연구하기 위해서도 인문학은 필수라고 믿는다. 그러나 브루니는 기독교 사상가들 중에서 피르미아누스 락탄티우스(Lactantius Firmianus)를 가장 명석한 사상가요 표현력이 가장 탁월한 달변가로 간주한다. 특별히 브루니가 일독을 강추하는 책들은 락탄티우스의 Against False Religion, On the Wrath of God, The Creation of Man이다.

첫번째 책은 이방 종교의 오류와 이방 철학의 헛됨을 지적하며 기독교 신앙의 참됨을 변증한다. 의의 본질은 무엇인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참된 종교는 어떤 것인지, 악인과 의인의 결국은 어떻게 되는지를 탁월한 능변으로 진술한 책이다.

두번째 책은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진노하게 하는 감정을 산출할 수 있다고 말하는 에피큐리아 철학과 스토아 철학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책이다.

세번째 책은 신비롭고 묘한 인간의 창조를 논함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입증하는 성격을 가진 책이라 하겠다.

이번 주간에는 락탄티우스와 깊은 대화를 나눌 생각이다. 우리는 이렇게 21세기에 살면서도 3-4세기 교부들의 목소리가 전하는 지혜에 아무런 어색함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신비롭다. CCEL 사이트에 영어 번역본이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그런데 제목은 The Christian Institutions, The Anger of God, The Formation of Man이다.

라이라의 Postilla

4-5세기 교부 제롬 이후로 구약의 히브리어 원문을 가장 잘 주석한 사람이 14세기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니콜라스 라이라(Nicholas of Lyra)다.루터가 말하기를 '라이라가 없다면 우리는 구약도 신약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하였을 정도다.

1311 비엔나 공의회의 결의를 따라 히브리어 및 고대근동 언어를 연구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은 때에 라이라는 유대인 선생 라쉬(Rashi)를 통하여 히브리어 뿐만 아니라 유대적 가르침, 탈무드와 미드라쉬 전통까지 두루 섭렵한다. 그러나 그의 구약성경 해석학은 유대적인 한계에 머물지 않고 루터와 칼빈과 정통 개혁주의 사상가도 존중하는 해석학적 기념비를 세운다. 기라성 같은 중세의 신학자들, 안셀름,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보나벤쳐 등등을 제치고 라이라의 주석(Postilla)이 교부들의 주석집(Glossa ordinaria) 안에 나란히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주석 분야에서 차지하는 그의 입지전적 무게를 가늠할 수 있겠다.

어떤 학자는 라이라를 과거의 Glossa ordinaria 전통을 새롭게 갱신할 정도의 독자적인 노선을 마련한 주석가로 평가한다. 라이라는 성경의 문자를 무시하고 영적 신비적 의미만을 추구하는 해석학적 경향과 문자 자체에만 머무는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을 비판하며 이중적인 문자적 의미(duplex sensus literalis)를 주창했다. 즉 텍스트의 문자는 모든 의미의 바탕(fundamentum)이며 구약의 신약 안에서의 문자적 성취는 구약 텍스트의 영적인 그러나 역시 이차적인 문자적 의미라고 하였다.

구약의 기독론적 해석은 이중적인 문자적 의미의 이 두번째 부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의 해석학적 원리와 방법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Postilla가 인터넷에 떴다. 사실 뜬지 오래 되었다. 아가서와 계시록이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고, 나머지 64권의 주석은 라틴어의 두터운 먼지에 눌려 있다. 16-17세기 믿음의 선배들이 성경을 주석할 때마다 펼쳐 본 책이다. 소장할 가치가 충분하고, 그것도 공짜로 이런 고가의 문헌을 손아귀에 넣는다는 것은 특별히 애서가의 놓칠 수 없는 기쁨이라 하겠다. 뮌헨의 국립 도서관에 링크된 Postilla는 1498년 바질 판본이다.

Postilla super totam bibliam (1488, 1492)

Glossa Ordinaria (1603)

Glossa ordinaria는 대체로 1세기 이상의 기간동안 교부들의 문헌에서 성경 주석들을 찾아 모은 '성경의 언어 (linguam scripturae)'이라 불이우는 책이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Glossa의 형태는 벌게이트 라틴어 성경을 텍스트로 삼아 행간의 짧은 코멘트와 변두리 여백의 긴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11세기 후반에 안셀름(Anselm)와 랄프(Ralph)가 교실에서 학습용 교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표준성경 주석으로 이후에 피터 롬바르드 및 포레 길버트의 노력을 거쳐 13세기 초반에 이르러 보다 완성된 모습을 취한다. 이후 1502년 바질 판에서는 니콜라스 라이라(Nicholas of Lyra)의 주석(Postilla)이 추가된다. 종교 개혁자들 및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 대부분이 Glossa와 Postilla 합본을 사용했다.

Internet Archive와 The Lollard Society가 Glossa를 무료로 다운로드 할 수 있도록 링크시켜 두었다. 해석이 조금 어렵더라도 보관 가치가 있는 장서다. 나는 방금 전에 다 다운을 받아 하드에 차곡차곡 보관해 두었다.

Glossa Ordinaria (Venetiis, 1603) : Lollard Society 제공

Glossa Ordinaria (Venetiis, 1603) : Internet Archive 제공

국가적 재앙에 직면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된 이후, 스코틀랜드가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1650년에 총회를 열어 그 땅에 닥친 어려움의 원인을 규명하고 결국 하나님이 이 땅의 죄 때문에 쏟으신 진노 때문이라 판단한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적 사태를 결국 교회의 잘못이라 여기며 접수한 이후 이 땅의 모든 죄는 목회자가 자기의 죄처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죄의 세밀한 목록을 작성한다.

이는 1651년에 다양한 성지자의 조언을 받아 'A humble acknowledgement of the sins of the ministry of Scotland'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고 이 문헌은 1846년 The Presbyterian's Armoury 라는 책에 다시 수록된다. 이 문헌은 19세기의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회자, 호라티우스 보너(Horatius Bonar)가 자신의 책 Words to Winners of Souls에 소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을 생각할 때 아래의 죄목록을 늘 떠올리게 된다.

수행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명에 합당치 못한 경박하고 불경스러운 대화를 한 죄와 그것을 철저히 회개하지 못한 죄 사역에 임하기 전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죄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복음의 비밀을 체험하고 실제적 지식을 갖추지 못한 죄 목회를 하기에 합당하도록 자신을 훈련하지 못한 죄.

예를 들어 하나님과 교제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죄와 살아있는 사역을 할 수 있는 기회 및 다른 수단들을 증진시키지 못한 죄 이런 일을 태만히 한 것에 대해 애통해 하지 않은 죄 자기 부인을 배우지 못한 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단호하게 지지 못한 죄 죄와 죄의 비참한 결과에 대한 의식과 이해를 부지런히 함양시키지 못한 죄 썩어질 것에 대항하여 싸우지 못한 죄 금욕과 극기를 배우지 못한 죄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채로 목회 사역에 들어선 죄 그 결과로서 보내심을 받지 못한 설교자들을 많이 배출시킨 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혹은 영혼들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에서 사역에 임하는 대신, 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내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역에 임한 죄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이 적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읽고 묵상하고 말할 때도 하나님에 대해 거의 거론하지 않은 죄 모든 일에서 지나치게 이기적인 죄 자신이 동기가 되어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죄 다른 사람들이 불충하고 태만한 것이 마치 우리 자신의 신실함과 근면함을 증명해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결점을 지적하고 고쳐 주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거나 그저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지낸 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일들을 가장 적게 즐거워한 죄 하나님과 꾸준히 동행하지 못함은 물론이요 모든 일에서 하나님 인정하기를 등한히 한 죄 의무를 수행할 때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쓴 죄 공중 앞에 서기 위해 준비할 때 외에는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 드린 적이 거의 없는 죄 또 공중 앞에 서기 위해 준비할 때도 기도를 아주 등한히 하거나 피상적으로 한 죄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우리 자신이 배우고 변화되기 위해 성경을 읽는 일은 등한히 한 채 단지 목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성경을 읽었는데 그나마도 소홀히 한 경우가 많았던 죄

시간을 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심사 숙고하거나 재고해 보지 않음으로 인해 철저히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한 죄 자연인의 양심에 비추어볼 때 자신은 그다지 악한 사람도 아니요 또 악을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기만한 죄 또 그런 자신을 보고 자기의 영적 상태와 본질이 정말 변했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기만한 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파수하지 못한 죄, 즉 마음에 악한 생각이 들어와도 그것을 그대로 묵인하고 자기 반성을 소홀히 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서먹서먹 해짐은 물론이요 하나님과도 멀어진 죄

자기가 알고 있는 자신의 악한 소위들, 특히 자신의 지배적인 성격과 싸워 그것을 몰아내지 못한 죄 자신의 성향이나 교제에 있어서 시간과 관련된 유혹 및 다른 특별한 유혹들에 잘 넘어간 죄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핍박을 당하거나 위험을 초래하거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 떨며 머뭇거리고 요동한 죄 다른 사람들의 질투나 질책이 두려워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려 한 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영화로운 이름을 위해 당하는 고난을 높이 평가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과 자기사랑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죄 하나님께서 그처럼 쓰라린 재난을 이 땅에 내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이 여전히 죽어 있는 죄

우리 자신이나 이 나라가 범한 죄와 크나큰 패역을 보고 애통하기 위해 가족들과 혹은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점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 죄 사람들이 당하는 굴욕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이지 않은 죄 주님께서 우리에게 겸비하여 자신을 낮추라고 하실 때 쾌락을 구하기에 급급했던 죄 다른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힘겹게 당하고 있는 슬픈 고난, 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 예수의 나라와 경건의 능력이 흥왕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괘념치 않은 죄 교묘하고 약삭 빠르게 위선을 자행한 죄

실제의 우리 자신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한 죄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천한 것을 배우는 것보다 그들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더 많이 연구한 죄 진정한 회개 없이 피상적으로 죄를 고백한 죄 말로는 죄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단호하게 그 죄를 슬퍼하며 회개하지 못한 죄 분명히 잘못한 줄 아는 죄들에 대해서조차 자백하는 일을 등한히 여긴 죄 자신의 죄를 엄숙히 깨달았을 뿐 아니라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겠다고 서약해 놓고도 실제로는 전혀 개선하지 않은 죄 죄를 자백한 후에는 자신이 무죄한 것처럼 생각한 죄 자신 안에 있는 결점을 고치기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결점들을 찾아내어 비난하기 급급했던 죄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상태와 사는 방식을 평가한 죄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가 우리 견해에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에 따라 평가한 죄 시험 당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 그 시험을 통과하리라고 자만했던 죄 품위 있는 사람들이 타락하거나 멸망하는 것을 보고도 두려워 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그들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해 주지 않은 죄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이나 형벌이 임할 때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 그것을 관찰하거나 자신을 개선하려 하지 않은 죄

우리의 본성이 타락한 것에 대해 거의 아니 전혀 애통해 하지 않은 죄 모든 악의 쓴 뿌리요 사망의 몸이라 할 수 있는 육신 아래서 신음하면서도 그 육신으로부터 구원 얻기를 갈망하지 않은 죄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열매 없는 대화, 즉 바람직하지 못한 대화들을 나눈 죄 복음의 사역자답지 않게 무익한 담화나 설교를 하면서 어리석게 시간을 낭비한 죄 다른 사람들은 영적인 성과를 거두기 시작할 때 우리 손에서는 그것이 종종 죽어간 죄 아주 사악하고 악의에 찬 자연인과 세상적으로 친밀하게 지내면서 그 사람들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되며 자신은 영적으로 무뎌진 죄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유익이 될만한 사람들과 교제를 소홀히 한 죄 은혜가 충만하여 우리의 마음과 도덕성을 개선시켜 줄 수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기보다는 재능이 많아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를 더 원한 죄 다른 사람에게 선행 베풀 기회를 모색하지 않은 죄 기도해야 할 때는 기도 대신 다른 의무들을 수행하고 다른 의무들을 수행할 때는 그 의무 대신 기도한 죄 너무 잦은 오락과 기분전환으로 시간을 남용하고 하나님보자 자신의 쾌락을 더 사랑한 죄 목회자가 되기 위해 훈련받고 있는 청년들과 믿음의 대화를 나누기 위해 거의 아니 전혀 시간을 내지 않은 죄

주일날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죄 자신이 돌보는 양떼 또는 달느 사람들이 신앙상의 충고나 훈계를 할 때 그것을 무시한 죄 평신도가 도움이 될만한 견해나 경고를 제시할 때 그것을 받아 들이기보다 오히려 수치로 여긴 죄 우리에게 스스럼 없이 충고와 훈계와 질책을 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싫어하고 분한 마음을 품는 한편, 우리에게 어떤 충고나 훈계를 달게 받으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실하게 충고하지 못한 죄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대신, 오히려 그들과 거리를 두고 멀리한 죄 또 그들을 직접 찾아가서 말하거나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그들에 대해 말한 죄 다른 사람들의 결점이나 실책을 보고 염려하고 걱정해 주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우리 자신을 정당화한 죄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대신, 오히려 그 결점에 대해 말하며 비웃은 죄 자기 가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규모 있는 삶을 살도록 부지런히 살피지 못한 것과 그들이 교회나 사회에서 다른 가족에게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정진시키지 못한 죄 가족이나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 발끈하며 격한 감정을 드러낸 죄 탐심, 세속적인 마음, 이생의 것들을 부당하게 사모한 욕심, 또 소명 받은 의무들을 소홀히 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세상 일에 사로잡혀 산 죄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공궤하며 돌보는 일에 인색한 죄 독실한 그리스도인의 덕을 기리며 마음에 새기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두려워 하며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증오하고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끌어내리고 소멸시키려 한 죄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에 가졌던 열심과 기백이 점점 사라지는 죄 사역에 필요한 독서나 다른 준비들을 아주 등한히 하는 죄 또 설령 준비한다 해도 책을 우상화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방해하는 문자적이며 탁상 공론에 지나지 않는 준비만 한 죄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도와 주셨으니 이번에도 도와 주시려니 생각하고 기도를 거의 하지 않은 죄 자신의 은사나 재능 및 수고 등을 신뢰하여 이만큼 준비했으니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훌륭한 설교를 조리있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라고 자만한 죄 성령 안에서 능력 있게 설교하려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그 점을 게을리한 죄

도우심을 청하며 기도 드릴 때 우리가 전할 메시지 자체보다는 메신저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한 죄 즉 어느 정도 도우심을 입어 그 일을 해내기만 하면 되지 하나님의 말씀이야 어떻게 전해지든 상관 없다는 듯이 기도한 죄 자신이 외친 그 메시지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드리지 않은 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 후 기도를 등한히 한 죄 설교할 때 세상일에 너무 빠져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를 소홀히 한 죄 또 사람들이 사업상의 일이나 거래에 대해 너무 자주 또는 너무 많이 말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일을 게을리 한 죄 목사가 가장 열심히 연구하고 설교해야 할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와 그분으로 인해 맺어진 새 언약의 탁월성과 유용성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설교하는 일을 지나치게 등한히 할 뿐 아니라 설령 설교한대 해도 제대로 하지 못한 죄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할 때 체험적 지식이나 그분으로부터 직접 받은 감명에 근거해서 설교하지 않고 오히려 남들한테 전해 들은 말에 근거해서 설교한 죄 대부분의 목사들이 너무 율법적으로 설교하는 한편 복음을 설교할 때도 진지성이 결여되어 있는 죄 멋있고 새로운 것만 계속 찾다가 목사로서 해야 할 본연의 의무들 중 많은 부분을 등한히 한 죄 그리스도를 복음에 나온 대로 단순하게 설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그 백성을 섬기지 않은 죄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기 위해 설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설교하는 죄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것에 대해 설교할 때 찢어지는 듯이 아픈 마음으로 설교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그분께 매달리고 싶은 열정에 사로잡혀 설교하지도 않은 죄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 전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설교하는 죄 일반인이 저지르는 죄에 대해 설교할 때 영혼들을 그 죄로부터 건지기 위한 목적에서 설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런 악 중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설교한 죄 악의에 찬 사람들, 파벌주의들, 중상모략 일삼는 자들에 반대할 때 열심과 성의를 가지고 말하는 대신 분한 마음에 신실하지 못하게 말한 죄 그들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잘 알아야 그것에 근거해서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점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죄 또 그 영혼이 처한 상태에 대해 기록해 두는 것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은 죄 설교 본문을 택할 때 사람에게 가장 유익이 될 뿐 아니라 그들을 세워줄 수 있는 본문을 신중하게 택하지 못한 죄 그리고 그 본문을 각 영혼의 상태에 맞게 적용시킬 줄 아는 지혜가 부족한 죄 그들이 그 본문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본문의 요점을 정확히 전하지 못하는 죄

설교 본문을 택할 때 그 말씀을 들을 영혼들의 상태와 때에 맞는 본문을 고르는 대신 우리가 말하고 싶은 점이 있는 본문을 고르는 죄 새로 연구하는 수고를 피하기 위해 똑 같은 것을 자주 설교하는 죄 말씀을 읽고 설교하며 기도하되 이런 의무를 수행하느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 자신의 의무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아주 좋아하고 이것이 양심에 찔리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양심을 무마시킨 죄 육신에 빠져 너무 많은 시간을 게으르게 허비한 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박수갈채 받는 것에 너무 신경을 쓰며 그것을 얻으면 기뻐하고 그것을 얻지 못하면 불만을 품은 죄

사람들이 아무 경고도 받지 못한 채 죄에 사로잡혀 죽어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파하지 못한 죄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보다 사람들로부터 비난이나 책망을 받지 않기 위해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죄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그의 백성에게 다 가르치지 못하는 죄 특히 사람들이 주께 충성하기보다 주를 배반하는 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 못하는 죄 우리 자신의 가르침이나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해 연구하지 않는 죄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때 마치 그 메시지가 우리에겐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자주 설교하는 죄 죄인들의 회심을 기뻐하지 않고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주의 일이 흥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흡족할 만큼 만족하며 지내는 죄 주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더 성장하게 되면 우리가 그만큼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며 또 사람들이 우리를 덜 존경하게 될까봐 두려워 하는 죄 설교와 실생활에서 경건의 능력을 끌어 내리는 죄 하나님 앞에서 하듯 설교하지 않고 사람에게 하듯 설교하는 죄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사람에게 설교할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그러할 때보다 더 많이 준비하는 죄

병든 자들을 방문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태만히 하며 설령 방문한다 해도 편파적으로 반문하는 죄 즉 가난한 사람이면 한번 심방할 것을 부유하고 중요한 사람이면 자주 심방하는 죄 게다가 가난한 사람은 그쪽에서 오라고 해야 가지만 부유하고 중요한 사람은 오라고 하지 않아도 심방하는 죄 학자의 혀로 아프고 지친 사람에게 꼭 맞는 말을 해 주는 법을 몰라 쩔쩔매는 죄 문답식으로 교리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고 태만히 한 죄 그것은 늘 하는 일인데다 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생각에서 가르치기 전에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을 뿐더러 그 사역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을 위해 간절히 구하지도 않는 죄 이로 인해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이름을 헛되어 받아들여 별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한 죄

교리문답 가르치는 일은 목회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경시하며 주의 백성에게 그것을 가르치긴 하지만 그들이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잘 가르치려 노력하지 않는 죄 교리문답을 가르치되 편파적으로 가르치는 죄 즉 상류층에 속한 부유한 사람들 중에도 교리 문답을 배워야 할 사람들이 많은데 그냥 눈감아 주는 한편 인내심을 가지고 자상하게 대해 주어야 할 무지한 사람들은 엄하게 책망하는 죄

[이상의 한글 번역본은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 p.66-86에서 인용한 것이다]
원문은 Goerge Gillespie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A Humble Acknowledgement of the Sins of the Ministry of Scotland (1651)를 참조하면 되시겠다. 

창세기 1장 1-3절 삼위일체

창세기 1장 1절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은 복수이고 '창조하다' 동사는 단수이다. 그리고 3절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하나님'은 복수이고 '가라사대' 동사는 단수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이런 불협화음(?) 문법을 그대로 두었고 70인역 헬라어 성경은 모두 단수로 처리해서 번역했다. 그런데 2절에는 '여호와의 신'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여호와'는 복수이고 '신'은 단수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런데 이 창세기 첫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만약 '하나님(엘로힘)'이 복수이기 때문에 세 위격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엘로힘)의 신'은 네번째 위격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엘로힘' 안에 언급된 세번째 위격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적인 언급을 한 것인가? 아니면 '엘로힘'은 성부와 성자만을 말하는 것이고 그 엘로힘의 '신'은 세번째 위격인 성령을 일컫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는가?

이처럼 창세기 첫부분에 등장하는, 인간의 상식과 합리성이 고개를 숙여야 하는 단복수의 신비로운 조합에 대하여 칼빈은 사벨리안 오류(성부 성자 성령은 한 위격(one hypostasis)이다)를 지적하며, 그 단어(엘로힘)의 복수성은 비록 삼위일체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는(revocat) 기능도 있지만 하나님의 많은 권능(multas Dei virtutes)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엘로힘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실체에 내재된 능력(potentiam quae in aeterna eius essentia inclusa fuerat)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였다. 성경 전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모두 창조자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분명한 사실에 기초하여 애매하게 보이는 구절을 해석해야 함이 마땅하다.

1) 그렇다면 창세기 초두에서 언급된 '엘로힘'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엘로힘의 신'도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엘로힘은 '성부'와 '성자'로 보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한 엘로힘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본다면 '엘로힘의 신'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의 난관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엘로힘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배타적인 성격으로 이해하면 안될 것이다.

2) 한편으론 이런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엘로힘의 신'에서 '엘로힘'과 '신'을 동격으로 이해할 때 '엘로힘'을 세 위격으로 규정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엘로힘(성부 성자 성령)은 영이시다. 이것을 '엘로힘의 신'이라고 표현한 것이라 주장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어떠한 해석을 취하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흔들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혹여나 여기서 이러한 생각을 교리가 성경의 권위를 장악한 결과라고 비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를 종합하여 표현한 것을 '교리'라고 의식하며 그렇게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경 전체라는 큰 문맥에서 애매한 구절들을 조명하는 식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교조적인 접근'인 것처럼 매도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랑과 부수적인 것들

Church of the Servant에 제3세계 이민들을 위해 드려지는 쉬운영어 예배(BES)가 있다. 가족들과 함께 그곳에 참석하고 있다. 오늘은 메시지에 큰 도전을 받았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존재도 의심했던 '목회자'의 자녀였다. 그런데 어떤 선생님을 만나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게 되었단다. 이유는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와 교통을 고려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 사랑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고 말았단다. 도대체 그는 어떠한 차원과 분량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고백에 눈물까지 머금어야 했을까? 진리는 사랑을 따라 구하는 것이며 사랑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압도했던 예배였다. 공부 열심히 하고 많은 정보를 취득하고 탁월한 언변을 구사하는 전달력은 진리 전달의 대단히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질적인 수단은 십자가로 증거된 하나님 사랑의 완전함을 따라 진리를 공부하고 익히고 전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은 (삼일천하 될 수도 있겠지만ㅡ.ㅡ) 그런 다짐을 해버렸다. 사중적인 인과율 안에 목적인도 있다. 사랑을 목적으로 지향하지 않는 지식이 얼마나 온전할까 생각해 보았다. 사랑이란 지향점이 생략된 지식추구 방향성은 뻔하다. 지식은 교만케 한다는 말씀이 잘 가르치듯, 교만이란 동기와 목적이 그 공백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어거스틴 해석학의 핵심은 성경의 어떤 구절을 풀이할 때에도 그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귀결되지 않는 해석은 불완전한 것이며 결국 오해와 왜곡을 빚는다는 것이다.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여러 논문을 한편씩 읽고 책을 한권씩 독파하며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동기의 순수성 보존과의 낯선 싸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외면하지 말아야 할 도전이다. 어쩌면 고급정보 취득보다 더 지난한 싸움일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든다. 너무 당연한 건데 가끔 까먹는 내용이다.

나는 은혜다

모든 게 은혜다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게 없기 때문이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주신 것도 은혜이다 책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하는 것도 은혜이다 글을 쓰고 싶은 것도 은혜이다 번역할 수 있음도 은혜이다 시대를 밝히는 선생들이 있음도 은혜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것도 은혜이다 섬기고 싶어하는 마음도 은혜이다 책과 먹거리를 구입할 수 있는 것도 은혜이다 자전거를 타는 것도 은혜이다 수영할 수 있는 것도 은혜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음도 은혜이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시간들도 은혜이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은혜이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음도 은혜이다

진리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음도 은혜이다 지식의 방식만이 아니라 인격과 삶으로 그 진리를 누릴 수 있음도 은혜이다 그 진리의 분량이 마르지 않도록 풍성함도 은혜이다 수와 언어로는 안되지만 진리로는 온 세상을 덮을 수 있음도 은혜이다 가난한 것도 은혜이다 도서구입 비용이 빠듯한 것도 은혜이다 얼굴이 앙상하고 근수가 빠지는 것도 은혜이다 시간에 쫓기며 촌음을 쪼개야 하는 상황도 은혜이다 음료수 흡입에 자유롭지 못함도 은혜이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들이 있음도 은혜이다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것도 은혜이다 자신을 less than nothing으로 느낌도 은혜이다 하나님 없이는 죽은 자와 같음도 은혜이다 세상이 헛되고 헛되다는 사실의 일상적인 경험도 은혜이다 슬픔의 눈물과 수고의 땀이 있음도 은혜이다

온 세상은 은혜로 번역될 수 있겠다 무에서 왔으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은혜일 수밖에 없어서다 모든 존재의 출발점은 은혜이다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것은 첫걸음을 내디딘 거다 그 은혜가 하늘과 땅에 충만하여 측량할 수 없는 분량임을 안다면 그건 진일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은혜의 원천임을 아는 것은 성숙이다 그 하나님이 무한한 은혜를 주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것은 원숙이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 위의 은혜임을 알고 다른 어떠한 것도 구하지 않으며 나 자신을 오히려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후사가 되어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살아가듯 은혜의 충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유일한 반응은 감사일 것이다 그 감사의 분량이 너무도 커서 다른 어떠한 불행과 억울함과 아픔도 상쇄시킬 수 없을 것이다 페친들 모두에게 은혜와 감사가 입맞추는 하루이길 기도하며...ㅡ.ㅡ

Summa 이성론 by Muller

Richard Muller, “The dogmatic function of Thomas’ Proofs,” Fides et Historia 24 (1992), 15-29. 

멀러 교수님은 먼저 신존재 증명이 칸트 철학의 결과로서 개신교의 신학 체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아퀴나스 신학처럼 17세기 정통주의 교의학 안에서는 신존재 증명이 신론에 들어가는 도입부에 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먼저 신학 서론이 언급되고 성경론이 길게 설명된 다음에 비로소 신존재 증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증명’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신론을 비롯한 다양한 적들을 거절하기 위한 것이지 기독교 신앙의 체계나 기독교 교리를 정초하기 위한 토대로 삼았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나아가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 도입은 무신론의 광란을 잠재우는 부분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보다 적극적인 면에서는 이성이 가지는 신학의 체계 속에서의 도구적 기능의 가능성도 열어 주었다고 평가한다. 멀러는 Summa가 신존재 증명으로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Summa 전체의 내용이 ‘거룩한 가르침(Sacra doctrina)’이라는 규정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은 토미즘에 대한 근현대 개신교 학자들의 평가가 간과하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측면임을 언급하며 현대 학자들의 부주의를 비판한다.

아퀴나스는 말한다.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것들은 이성으로 추구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은 믿음으로 수용될 수 있다.” 실재로 Summa의 서론 전체는 성경과 계시가 거룩한 교리의 기초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Summa가 철학과 자연적 이성으로 시작하는 신학의 체계라는 해석을 단호히 거절하는 내용이다. Summa의 순서는 이렇다: 하나님, 창조, 구속. 멀러는 지적한다: 아퀴나스는 믿음을 일으킬 목적으로 신존재 증명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존재를 수용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라고 말한다.

왜 개신교 신학 안에서는 신존재 증명이 아퀴나스 본연의 목적과 의도를 이탈하게 된 것일까? 멀러는 멜랑톤과 그의 제자 켐니츠를 언급하며 그들이 신존재 증명을 창조론에 배치하는 바람에 그 본연의 교의학적 기능이 희미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신존재 증명을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묵상하는 형태로 간주하게 되었다. 비록 우르시누스와 폴라누스와 게하르드 같은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자에 의해서 신존재 증명의 위치는 신론 앞으로 옮겨지게 되었으나 이성의 교의학 속에서의 도구적 기능은 이미 크게 손상되어 개신교 신학에서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아쉬움을 표한다.

멀러는 신존재 증명에 대한 벌콥이나 바르트나 베버의 부정적인 입장들이 그 증명의 본래적인 기능을 오해한 결과라고 말한다. 이성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이성도 주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이성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이성의 잘못된 사용을 거절하며 이성 자체도 버리려고 한다. 주님께서 주신 것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주신 그 어떤 것도 정결하고 선하다. 말씀의 빛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용되는 이성은 우리에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선물의 하나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성 자체를 문제시 한다면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것을 그릇되이 사용하게 된 것을 회개하고 이성 본연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 지혜이다.

톰 라이트의 Surprised by Hope

하늘과 부활과 교회의 사명을 논한 책이다. 하늘과 부활과 지옥에 대한 라이트의 개념에 동의가 안되는 부분이 꽤 있다. 죽은 자들과 더불어 기도하는 개념도 그렇다. 그러나 이틀동안 마치 1급 경건서적 읽는 즐거움에 포박된 듯한 시간을 보냈다. 무진장 재미있다. 많이 배운다. 흥분한다. 기분도 좋아진다.

잠잠하고 미지근한 개인과 교회로 하여금 주먹을 불끈 쥐고 무언가를 향해 질주하게 만드는 각성제와 같은 역할도 톡톡히 한다. 라이트의 해박과 학자적 성실함과 대중적인 전달력 및 설득력이 강하게 반영된 책이다. 게다가 그는 수사학의 달인이다. 인상에 남는 것들만 몇 자 적으련다. 그렇다고 꼴랑 한권을 읽고 ‘비평’이란 진중한 단어를 갖다붙일 필요는 없겠다. 그럴 자격도 안되잖아.

책제목이 ‘Surprised by Hope’인데 라이트가 놀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일독하며 그가 말하는 ‘소망으로 인해 놀라지’는 않았다. 비록 라이트는 부활의 소망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현대의 서구 교회들이 수세기에 걸쳐 간과하고 묵살했던 것이라고 줄기차게 말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카이퍼의 일반은총 교리의 성경신학 버전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별히 교회의 사명 부분에서. 그러니 생소하지 않았고 놀라지도 않을 수밖에. 접근법과 어조가 달라서 오히려 유쾌했다. 게다가 카이퍼의 언사보다 더 매끄럽고 ‘선동적인’ 필력을 과시하는 듯해 독서의 즐거움은 날개를 달았었다.

최소한 이 책에서 라이트가 말하는 자신의 신학 방법론은 이렇다. 먼저 그는 영국 국교회가 교리를 산출하는 방식이 성경과 전통과 이성 및 이것들의 종합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27). 그러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현대적 해석들은 이것들 중에 어느 것 하나에도 의존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족보도 불투명한 유사 기독교적 문화에 출처를 둔 것이라고 일갈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해석들은 성경과 1세기의 유대적인 문화 탐구를 통해 교정을 받아야 한단다. 실제로 라이트는 자신의 책 전반에서 성경과 전통을 충실히 살폈으며 교부들과 중세 학자들과 종교개혁 인물들도 소수 언급하는 시대별 안배에도 신중을 기하였다. 성경의 단어들을 1세기 전후의 유대인이 가졌던 생각에 무게를 두고 주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별히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고대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점 모두를 참조한다(35).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 어떤 독보적인 성격을 부여할 때에는 '예전에 한번도 주장되지 않았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킬 때에는 수용할 수 없는 (그렇다고 얼토당토 않지는 않은) 두 극단을 제시한 이후에 본인의 입장을 꺼내는 경향을 보인다. (나도 이런 어법을 자주 구사한다.)

여기서는 독자가 누구냐가 중요한데, 라이트는 이 책의 독자가 누군지에 대해 특정한 대상을 밝히지 않았다. 비록 서문에서 미국과 영국과 호주에서 한 강연들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지만 대체로 막연하다. 그냥 기독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정도로만 이해해도 되겠다. 고대에 ‘부활’을 의미하는 헬라어와 라틴어와 다른 언어들은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대교와 기독교 외에는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얘기다. 초기 성도들이 생각한 부활의 의미, 즉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신 것’의 의미는 예수의 영혼이 천상적인 복으로의 진입도 아니고 그가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부활은 철저하게 물리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완전하게 물리적으로(physically) 살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66). 라이트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과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것’을 동일한 실체의 다른 표상일 뿐이라고 한다(109).

여기서 하늘은 땅과 찰라적인 관계성을 가진 것으로서 하늘에 거한다는 것은 땅의 특정한 곳에 계시면서 동시에 땅의 모든 곳에 계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승천은 그가 어디서든 접근이 가능하고 준비되어 계시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를 찾고자 땅의 어떤 특정한 곳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111). 나아가 라이트는 ‘하나님이 전 우주를 구속하실(redeem) 것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마지막 궁극적인 구속은 하늘과 땅이 연합하는 때에 이루어질 것이란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사용되는παρουσία 의 문자적 의미는 오신다(coming)는 게 아니라 부재(absence)와 반대되는 ‘현존(presence)’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παρουσία는 이방에서 ‘신의 신비로운 임재 혹은 초자연적 힘의 나타남’을 표상할 때에 사용되고 왕이나 황제가 식민지나 지역을 순시할 때에 사용된다(129).

라이트는 이런 의미가 재림의 기독교적 이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바울은 이 용어를 시저는 진정한 왕의 페러디일 뿐이고 예수님이 실체라는 정치적인 신학을 펼치는 차원에서 썼다고 라이트는 이해했다. 즉 예수님이 몸으로 계실 때에는 유대땅에 제한되어 계셨지만 부활 이후에는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모든 곳에 거하시며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설파하기 위해 바울이 παρουσία 단어를 썼다는 얘기다. 요한일서 2장 28절과 3장 2절은παρουσία와 ‘나타남’이 나란히 등장하고 있는데, 라이트는 여기에서 ‘나타남’이 어떤 면에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처럼 우리에게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지금 ‘현존’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나타내 보인다’는 바울의 논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이해한다(135).

140페이지에는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행위에 따른 미래의 심판 사이에는 어떠한 충돌도 없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이에 라이트는 이 두 가지가 서로 의존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말한다. 칭의에 대해서는 우병훈 목사의 ‘칭의를 말한다’의 서평을 참조하면 되겠다. 라이트가 이 책에서는 말을 아꼈거든. 라이트는 사람들이 사후에 원스텝(one-step) 방식으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입장이 기독교적 소망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뒤튼다고 생각한다(148). 그러면서 ‘사후의 삶(life after death)’이 있고 ‘사후의 삶 이후의 삶(life after life after death)’이 있다고 주장한다(151). ‘사후의 삶’에 대하여 라이트는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거할 곳(dwelling place, μοναί)’이 고대 헬라어의 용례에 따르면 ‘종국적인 안식처(last resting place)’가 아니라 장기적인 여정에서 잠시 머무는 ‘일시적인 정거장(temporary halt)’ 정도라고 주석한다.

예수님이 도둑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 한 낙원과 ‘내 소망은 몸을 떠나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한 장소도 일시적인 것이란다. 바빙크의 을 보면 성도에게 죽음 이후 부활 이전에 중간적인 상태(intermediate state)가 있다는 개혁주의 입장(동방 정교회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을 잘 소개하고 있다. 라이트가 생각하는 부활은 그런 ‘사후의 삶’이 아니라 ‘사후의 삶 이후의 삶’으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변형되고 영광스런 몸과 같은 '몸의 살아남'을 의미한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15장 44절을 언급하며 육신적인(ψυχικός) 몸과 영적인(πνευματικός) 몸의 대조를 설명한다. 여기서 라이트는 접미사 -ικός를 ‘어떤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이나 에너지’로 보고 ‘육신적인 몸’은 ‘일반적인 인간의 영혼(ψυχή)에 의해 활동하는 몸’을 말하고 ‘영적인 몸’은 ‘하나님의 영(πνεῦμα)으로 이끌림을 받는 몸’이라고 해석한다(155-56). 즉 바울의 본문은 물리와 비물리의 대조가 아니라 부폐할 수밖에 없는 물리성(corruptible physicality)과 부폐할 수 없는 물리성(incorruptible physicality)을 대조시킨 것이라고 한다. 부활, 즉 사후의 삶 이후의 삶은 하늘과 땅이 입맞추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구속과 회복이 성취되는 종말에 바로 그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이끄림을 받는 몸으로 사는 삶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라이트는 지금 살아가는 이 땅과 새 땅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지금 우리가 가진 몸과 장차 가지게 될 영적인 몸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라이트는 지옥(γέενν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것의 본래적인 의미는 어떤 이념이 아니고 고대 예루살렘 바깥에 있는 한 장소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on earth)의 문제로 이해하듯, 지옥도 사후에 가는 어떤 영원한 불못이 아니라 지상(on earth)의 문제로 이해한다(176).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는 현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정의와 자비를 교훈하기 위한 비유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이해에 기초하여 라이트는 말을 아끼면서 최후의 심판을 논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경고를 계속해서 무시한 자들은 자신들의 유효적인 선택(effective choice)으로 말미암아 한 때 인간으로 있었으나 사후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로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대신한다(182).

이정표가 없는 지극히 난해한 주제들 중의 하나인 최후의 심판에 대해 신약과 세상의 실상을 근거로 마련된 이런 종류의 해법이 틀린 것으로 간주된다 하더라도 기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라이트가 확고히 붙드는 것은, 지금의 세상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선한 창조라는 것과 창조 전체가 마지막 심판을 즐거워할 것이라는 점이다(183). 지옥에 대한 라이트의 견해는 그와 코드가 비슷한 Love Wins의 저자 Rob Bell이 Surprised by Hope을 '캐캐묵은 옛 신학의 아성을 철거한 책'이라고 평가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는 주기도문 중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진다’는 말씀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는다(고전15:58)’는 말씀에 기초하여 모든 분야에서 사랑과 공의와 미와 전도에 힘쓰란다. 카이퍼의 일반은총 교리와 유사하다.

책의 말미에는 라이트의 성경 전체에 대한 입장이 소개된다(280-82). 그에게 성경은 창조와 새창조의 이야기며, 언약과 새언약의 이야기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왕국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과 이스라엘 역사의 완성과 악의 권세의 파멸과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 설립을 통하여 어떻게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on earth)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선 자리는 사도행전 끝과 계시록의 마지막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왕국 완성이 묘사된 계시록 21장과 22장의 마지막 장면을 향하여 읽어야 한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이는 그 두 장이 지금까지 이루어진 모든 것과 성경 전체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성경을 부분과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전체로 읽는 라이트의 신학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줄기는 바로 새하늘과 새땅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왕국이란 이야기다. 한편으로 우리는 성경을 많이 보지 않으면 성경에 해박한 사람들의 입장에 경이를 표하며 대체로 수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교부들을 알고 고전들을 알고 고대근동 언어들을 섭렵하고 현대의 과학까지 정통한 사람들을 보면 신학자나 목회자가 그런 것들을 다 공부하진 않았기에 그들의 신학과 교리에 ‘묻지마 추종’ 내지는 무비판적 존중의 태도를 취하기 쉽상이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과 일 인치만 달라도 ‘묻지마 비판’의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다. 자신의 교조적 신념의 주관적인 잣대를 몽둥이로 삼아 신학적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배우려는 겸손과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이란 찾아볼 수 없다. 둘 다 피해야 할 극단이다.

그 중에 하나를 취하는 게 자유지만, 그러면 반드시 과격한 무질서가 뒤따른다. 그래서 질서의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에겐 대화가 필요하다. 물론 서로의 자유가 존중되지 않으면 안되겠지. 물론 건설적인 대화라 할지라도 진리가 거기에서 산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잖아.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로 대화하는 수밖에. 대화하지 않는 것은 교제의 단절(excommunication)이다. 마지막 수단이다. 의견의 교환은 대화지만, 비판이나 정죄는 우리의 수단이 아니다. 나 자신도 양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두렵다. 하여 여기서는 특별한 찬사나 비판의 어조로 독후감을 쓰기보다 정리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렇게 의도했다 할지라도 일독 이후에도 라이트에 대한 기존의 생각이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을 보면, '단순한' 정리에도 나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과 개혁주의 신학이 무의식 중에 작용했을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교의학에 대한 바빙크의 생각

고전적인 학문의 체계와 스콜라적 논제법(locus method)이 절충된 멜랑톤의 보편논제(Loci communes) 방식의 교의학적 한계를 바빙크는 ‘학문적인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교육이 부족했던 자들과 성경의 지식 전하기를 소원하는 자들에게 이바지한 점도 있었다’는 정도로 지적했다. 일반적인 논제들을 열거하는 방식의 교의학 체계는 루터파와 개혁파 진영에 적극 수용했던 방식이긴 하나 믿음의 진리를 보다 조직적인 규모로 다룸에 있어서는 결점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런 표제는 존속될 수 없었다고 진단한다.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보여주지 않고 주제의 산만한 배열처럼 보이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쯔빙글리 같이 ‘해제(commentarius)’라는 표제와 칼빈의 ‘강요(institutio)’와 같은 표제도 기독교의 진리체계 전체를 담기에는 과정적인 것이었다. 보다 좋은 진리의 그릇을 만들려는 작업의 일환으로 ‘교훈적인(didactica),’ ‘조직적인(systematica),’ ‘이론적인(theoretica),’ ‘실증적인(positiva)’ 등의 형용사적 표현들과 ‘교의학적(dogmaticia)’ 같은 표현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서 ‘dogmatica’란 말은 ‘도그마(δόγμα)’란 헬라어 용어에서 유래한 말인데 ‘정관(statutum), 결정(decretum), 정해진 뜻(placitum)’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세푸스 문헌에 보면,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구약책을 ‘하나님의 도그마들(θεοῦ δόγματα)’로 여겼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도그마의 의미에 대해 바빙크는 특별히 키케로의 개념이 정당함을 지적한다. 즉 도그마는 ‘확고하고 고정되어 결정적인 것이며 어떤 이유로도 움직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바빙크는 도그마의 권위가 어떠한 사람의 교훈이나 교회의 선언 혹은 확정에도 의존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모든 신학적 도그마가 귀착되는 원리는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principium, in quod omnia dogmata theologica resolvuntur, est: Deus dixit).’ 이러한 원리에 기초한 도그마를 확립하는 교회의 역할은 ‘주권적인(souvereine) 것이거나 입법적인(wetgevende) 것이 아니라 수종적인(bedienende) 것이며 선포적인(declaratorische) 것이다.’ 교회를 통하여 증거되는 진리는 교회가 깨달았기 때문에 도그마가 아니라 그 진리가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의존하기 때문에 도그마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교회가 고백하고 교의학 학자들이 발전시킨 도그마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진리와는 동일할 수 없다. 이는 교회에 약속된 성령의 인도가 있지만 인간의 오류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헤겔은 모든 역사와 도그마가 하나의 절대적인 이념에 필히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지만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불변적인 것은 없고 다만 영원히 되어지는 것만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론적 토대 위에서 ‘도그마는 그 모든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거대한 오류요 치명적인 잘못’이란 비판적 견해가 고개를 들었다. 특별히 하르낙은 자신의 교리사 저작에서 ‘도그마는 복음의 바탕에 있는 그리스 정신의 배설물’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당시 도그마에 대한 저항의 이러한 급물살이 현대의 유럽 지성사를 휩쓸고 있었지만 바빙크는 ‘도그마에 대한 반대는 동일하게 도그마에 반대한 반도그마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언제나 지독한 도그마적 형태로 존재할 뿐이라’고 하였다. 도그마의 보다 넓은 폴라누스 개념에 따르면, 도그마는 ‘성경 안에서 파악되는 모든 것, 즉 복음과 율법의 가르침(doctrina evangelii et legis)일 뿐만 아니라 모든 합의들(conciones)과 거룩한 역사(historiae sacrae)의 가르침을 포괄하고 있다.’ 바빙크는 이렇게 넓은 의미의 도그마 개념에도 만족하지 않는다. 형식적인 수준의 개념일 뿐이란다. 즉 도그마의 자료와 내용을 알지 못하면 아무런 유익도 없을 수준의 개념이란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교의학의 내용을 논하게 되었는데 종교개혁 인물들은 주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Deo vivere per Christum), 종교적 경건(religio), 하나님 경배(cultus Dei)’를 교의학의 내용으로 취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신학의 주관적인 관점이 자라서 칸트에게 도그마는 ‘개인적 도덕적 동기들에 의존하는 신앙의 확신’일 뿐이며,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지식이나 행위로 보지 않고 특별한 느낌(een bepaald gevoel)’으로 보았으며, 도그마는 ‘주관적인 감정 상태의 묘사이고 종교적 느낌의 성문화요 사고하는 의식 속에 있는 주관적인 경건에 대한 반성들’일 뿐이었다. 과학의 새롭고 실증적인 견해가 도그마에 대한 이해에 범람하게 되었다. 리츨이 대표적인 인물이며, ‘교의학은 과학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기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과학이 될 수는 없다’는 대체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세상은 과학적 객관성 추구가 대세를 이루었다. 이런 흐름에 따르면, 신학이 교육의 현장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모양새를 갖추어야 하고 그러려면 모든 ‘종교적’ 편견들을 제거해야 하고 성경이나 고백이나 신앙을 내용으로 가지지 않는 무편견의 연구를 통하여 종교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을 내용으로 갖는단다. 신학을 과학으로 여기는 것은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의 과학적 신학은 비록 토마스가 천사와 인간, 하늘과 땅, 모든 피조물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과학들이 취하는 방식과는 달리 ‘원리와 목적을 지향하듯(ut ad principium et finem)’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관계성을 사려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의학 논의를 접으면서 바빙크가 내리는 결론은 ‘교의학이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과학적 체계, 자세히 말한다면 기독교적 입장에서 하나님이 자신 및 자신과의 관계 안에 있는 것들로서 모든 피조물에 관하여 그의 말씀에서 교회에 계시하신 지식에 대한 과학적 체계’라는 것이다.

이런 바빙크의 입장에 반대하여 ‘교의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내용을 대상으로 삼으며 이는 결코 과학이 아니며 하나의 체계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베를린 신학자 카프탄(Julius Kaftan)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렇다고 바빙크가 카프탄의 교의학 개념이 경건한 감정의 상태들에 대한 묘사나 종교적 경험들에 대한 사색이나 개인의 가치판단 위에 세워진 종교적 세계관 정도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카프탄이 생각하는 교의학을 계시의 권위에 기초하여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강조하고 설명해야 하는 하나의 규범적인 과학으로 이해했다. 바빙크가 이해한 카프탄의 첫번째 견해에 따르면, 종교개혁 이전과 정통주의 시대에는 신앙과 도그마와 교의학이 지성주의 견해로 사로잡혀 있었단다. 즉 종교적 진리가 하나의 교리로서 그리고 하나의 과학적 체계로서 과학의 결과나 역사적 사실과 같이 오성적인 방식으로 수용되던 시대라는 것이다.

반면 종교개혁 시대는 지성주의(intellectualisme) 경향을 복음적 신앙의 주의주의(voluntarisme) 원리로 바꾼 시대란다. 카프탄의 두번째 견해는, 도그마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의 표현이며 이러한 근원 때문에 지성적 과학적 성격이 아니라 종교적 도덕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성경의 계시, 신앙, 도그마 순이다. 세번째 견해에 의하면, 교의학은 ‘하나님에 대한 과학이 아니며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과학적인 체계도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신앙이 지식이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긴 하지만 특별한 종류의 지식이며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개인적 경험과 도덕적 의지의 실재성을 통해 얻으며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과학적 영역에서 얻는 지식과는 판이하게 구별되는 지식이라 하였다.

카프탄에 의하면, 과학적 지식은 ‘사실의 강요’에 의존하고 있지만 종교적 지식은 ‘도덕적 경험의 방식으로 의지의 행위를 통해’ 취득된다. 나아가 하나님은 신앙의 대상이지 앎의 대상은 아니란다. 그러므로 교의학은 하나님에 대한 과학이 되고자 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신앙에 대학 학문으로 머물러 있어야 하며 신앙의 지식은 항상 내적 생활과의 관계성 속에서 해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프탄의 견해에 대하여 바빙크는 그가 신앙의 길에서 우리에게 영적으로 소유되는 종교적 지식에 대한 독특성을 강하게 변론한 것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신앙이 계시에 의존한 것이며 권위에 있어서 계시가 교의학에 우선하고 있음을 추구했던 점도 수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탄이 정통주의 입장에서 수용되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인데 그 이유는 카프탄 스스로가 ‘자신의 원리를 적용함에 있어서 의구심을 가졌으며 계시와 성경의 권위를 깨뜨린 것’에 있다고 바빙크는 지적한다. 즉 신앙이 지식의 샘이 아니고 유기적인 기관일 뿐이라고 명토박아 두면서도 카프탄은 계시의 우선성을 후순위로 밀어내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바빙크는 교의학이 ‘하나님의 지식의 체계’라고 주장한다.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이 자연의 현상들과 역사의 사실들과 같이 과학적인 연구의 대상일 수 없다는 카프탄의 올바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스로를 행위와 언어로 계시했고 그런 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지식이 객관적인 차원에서 파악되는 것처럼 그렇게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을 교의학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것이다.

카프탄이 교의학을 신앙 밖으로 밀어낸 이유를 바빙크는 과학에 대한 카프탄의 잘못된 개념에서 찾는다. 즉 카프탄은 칸트를 인정하며 선험적인 것은 인식될 수 없고 과학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다른 것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경험론적 견해에 경도되어 교의학은 하나님의 지식 자체를 대상으로 삼은 과학일 수 없고 신앙적 경험에서 얻어진 지식에 대한 과학만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바빙크는 교의학이 다른 과학들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가졌다고 해서 과학의 영역에서 전적으로 배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계시된 지식은 과학적 탐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요구하고 있단다. 교의학의 과학성을 촉구하는 '계시된 사실들의 강요'가 있다.

물론 인간의 언어로 고정시킬 수 없는 개념을 ‘체계와 체계적인 구성’으로 억압하여 ‘내용이 형식에, 현실성이 이념에, 지식이 의지에 희생을 당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카프탄이 말하듯이 체계의 몰록(Moloch)을 경계하고 ‘진실된 철학은 체계의 형식으로 담아낼 필요가 없다’는 플라톤의 사유는 무시하지 말아야 하겠다. 그렇다고 이런 사상을 오용하면 안된다. 체계가 있으면 신앙적 명제들이 없고 신앙적 명제들이 있으면 체계는 없다는 카프탄의 기괴한 이원론은 그런 오용의 사례이다. 사실 카프탄과 같이 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 중생의 사실, 종교적 경험 등에서 신앙의 진리들을 도출하려 한다면 교의학에 체계의 필요성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교의학은 실증적인 과학이고 모든 소스를 계시에서 얻으며 그 내용을 계시 외에 사변을 통하여 변경하고 유포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바빙크가 보기에 하나님의 사상은 서로 모순될 수 없고 필히 그 자체 안에 유기적인 통일성을 형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상들을 고찰하고 그것의 통일성을 추적하는 것은 교의학 학자의 거부할 수 없는(onafwijsbare) 과제’라고 강조한다. 카프탄이 교의학에 있어서 모든 체계를 반대한 것은 비록 당시 신학자들 및 철학자들 대부분이 범하였던 체계적인 구성의 오류를 꼬집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찾아가는 과학적 탐구를 배제하는 지점까지 나아간 것은 과도한 것이라고 바빙크는 해석한다.

카프탄의 체계적인 구성에 대한 반대는 우리로 이런 교훈을 붙들게 만든다. 즉 ‘교회의 고백과 각 개인의 교의학은 무오하지 않고 성경에 종속되어 있으며 당연히 성경과 동등하게 설 수 없다. 그것은 진리와 일치하지 않고 인간적인 것이며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결함 있는 재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교의학 사이에는 신앙이 자리하며 혹은 신앙의 근거(ratio fidelis)가 그 사이에 있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도 그렇지만, 바빙크 시대에 발견되는 ‘교의학의 결점은 교의학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Deus dixit)을 터무니 없이 약하게 높이고 있다는 데에 있다.’

교의학의 과제와 독특성에 대한 망각이 교의학을 무시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카프탄의 뾰족한 지적에 바빙크는 동의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든 지식에 뛰어난 그리스도 사랑을 배우고 알도록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도록 과학의 축적 속에서도 다양한 겹의 신적인 지혜가 있음을 고백하게 하는 일’은 교의학을 통한 교회의 사명에 속한다고 바빙크는 정리한다. 바빙크는 종교개혁 이전과 정통주의 시대에 지성주의 견해가 주도하고 있었다는 카프탄의 지적에 아무런 교정을 가하지 않는다. 나는 카프탄의 견해에 동의하기 힘들다. 이는 중세도 그렇지만 정통주의 시대에도 주지주의, 주의주의, 신비주의, 경건주의 등등의 경향들이 혼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셀름, 보나벤처,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버나드 끌레르보 등의 거물들이 저술한 글들을 읽어보면 곧바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론과 경건과 실천이 종교개혁 시대에는 물론이고 정통주의 시대에는 보다 본격적인 통합의 모양새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무수한 문헌들을 보면 지성주의 견해가 독주하고 있었다는 카프탄의 진단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바빙크가 교의학을 성경에 기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것에 합당한 차원까지 높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에 충실한 규범적인 과학으로 규정하는 것에 전적인 동의를 표한다.

예수 그리스도 생각하며

오병이어 기적은 자연의 질서를 재해석할 단서를 제공한다.

자연에는 자연의 법이 있고 그 법은 인류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높은 차원의 질서로 진입하는 디딤돌에 불과하다. 하여 '여기가 좋사오니' 같은 태도로 자연에 안주하는 것은 금물이다. 물론 두 질서 사이에 배타적인 분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연의 가시적인 질서를 궁극으로 여기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보고 임금 삼으려고 했다. 척박한 광야에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모세의 맛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타고 이어지는 회복의 주린 목구멍을 언젠가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 기름진 것으로 만족시킬 기대감이 소멸되지 않게 하는 결코 망각할 수 없는 추억이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을 목격한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그들의 심정이 이해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응은 차갑고 헛갈린다. 아득한 소망이 눈 앞의 현실로 펼쳐질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는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란 송곳처럼 의표를 찌르는 지적에 정이 뚝 떨어진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권면으로 국권과 민족성의 상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그들을 지탱해 준 회복의 숭고한 열망을 '썩는 양식'일 뿐이라며 다된 밥상에 재까지 뿌리신다. 맛나에 대한 그들의 아름다운 기억에도 재해석의 날을 세우셨다.

그건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의 비유일 뿐이란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인데'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다. 조상들은 '맛나를 먹었어도 죽었지만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며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생명이요 영이라'고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대감이 변하여 적개심의 화신으로 변한다. 결국 그들이 기억하고 기대하던 왕국상에 치명적인 흠집을 가한 예수님을 불법의 대명사가 매달리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기대하던 왕국과 주님께서 말씀하고 가르치신 '하나님의 왕국'은 너무나도 판이하여 두 중의 하나가 제거되지 않으면 안되는 형국으로 치달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길을 꺾지 않았고 주님도 주님께서 만세 전부터 의도하신 하나님의 왕국을 '다 이루셨다.' 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썩어 없어지는 양식 조달의 수단으로 여기지는 않는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은 내가 가진 야망의 투사일 지도 모르겠다. 말씀에 전무하는 이유가 떡먹고 배부른 까닭에 움직이는 자들이 신주처럼 받드는 현세적인 욕망에 비위를 맞추고 그것을 을 이용하고 조종하여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려는 모리배의 행보는 아닌지를 놀란 가슴으로 돌아보게 된다.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자연적인 질서를 따라 예수님을 이해하고 다수의 동의를 확보하는 넓은 대로행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질서가 마치 비유처럼 들러리로 서서 기념하고 있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좁고 협착한 그러나 보다 높은 차원의 질서를 따른다.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영적 질서의 비유였다. 썩어 없어지고 먹어도 다시 주려 죽게 되는 맛나가 아니라 영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이 제공하는 질서에 부응하고 싶다.

어거스틴 할배는 존재하는 것은 선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죄일 수도 있다. '모든 열방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이사야의 진술이 그저 낯설고 불쾌할 수도 있겠다.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런 언사도 우리의 내면에 삐딱한 저항을 일으키는 말씀이다.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으면 사회법은 침묵한다. 우리의 죄의식은 거기에 익숙해져 있다. 늘 몸담고 있으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어디까지 보실까? 죄악된 본성을 보신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다. 안보셔도 마찬가지. 사실 그곳을 보시지 않는다고 그것을 모르시는 것은 아니잖아. 물론 복음서에 예수님의 율법 재해석을 보면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 착상이 된 생각에 대해서 분명한 책임을 물으신다. 미움과 음란한 생각이 그런 것에 해당된다. 그러나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것이 인간의 마음'이란 사실묘사 이후에 '이를 누가 알리요마는'이라는 서글픈 현실인식 대목을 주목하면 '무의식' 영역에서 벌어지는 마음의 실상이 어떠한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떤 것인지를 대충 짐작하게 된다.

용서를 해 주어도 용서 의식이 발동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우리의 본성이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본다면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만 명시적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멸되지 않는다'는 예레미야 애가의 기록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자. 저질러진 범죄를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에서 발견되는 은혜와 긍휼도 있지만 우리의 의식에 걸러지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도 인자와 긍휼의 무궁함이 우리의 마땅한 진멸을 막아서고 있다는 것을.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나? 우리의 의식이나 동의와 무관하게 은혜의 무궁한 충만이 우리의 존재를 떠받칠 뿐만 아니라 홍수로 인류를 쓸어도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본성에 깊숙이 파고든 죄를 무궁한 인자와 긍휼로 인하여 빛보다 빠른 간격으로 용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가까운 가시적 문맥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인과를 지나치게 과장하여 그것에 우리의 감사를 맡기는 것은 도둑이나 강도의 수준과 다르지 않다. 날마다 죽어도 해소되지 않을 우리의 죄문제를 간과하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감사는 관념의 유희일 뿐이다.

아무리 고상한 척 해도 그냥 '멋지잖아' 정도의 자위적 감사에 경박한 금박을 입힌 표리부동 속임수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 우리는 감사할 수 있다. 우리의 죄성을 아는 지식만큼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를 아는 지식이 없이도 정직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취하는 우리의 모든 반응이 그런 원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나님의 거룩과 인간의 죄를 동시에 말하지 않는 소망이나 긍정 일변도의 책은 마약이며 지적 흥분제일 뿐이다. 기분을 돋구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지식의 부요함은 결코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지 않는다. 영원한 구원과 감사로 귀결되는 불가피한 첩경이다.

멀러의 종교개혁 해석학

Biblical Interpretation in the Era of the Reform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6), 3-22.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중세와 르네상스, 종교개혁, 그리고 후기 종교개혁 사이를 선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종교개혁 시대의 성경 해석학을 탐구하는 스타인메츠의 열 가지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성경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원래 의도에 의해서 다 파헤쳐 지는 것은 아니다.
 2. 성경적 전통의 가장 원시적인 의미가 필연적으로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다.
 3. 교회를 위한 구약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상의 연속성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 연속성은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의 불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
 4. 구약은 신약의 의미를 풀어주는 해석학적 열쇠이며 그것을 떠나면 신약은 잘못 이해될 것이다.
 5. 교회와 비인간적 경험은 기독교 해석가와 성경적 텍스트 사이의 중간적인 용어이다. 6. 복음과 비율법은 성경적 텍스트의 중심 메시지다.
 7. 복음과 율법의 긴장을 상실하면 복음과 율법 모두를 상실한다.
 8. 설교를 저자의 원래 의도에 제한하는 교회는 구약을 유대인의 고유한 책으로서 거절하는 교회이다.
 9. 가장 신뢰할 만한 것으로서 성경적 전통의 가장 원시적인 의미에 설교를 제한하는 교회는 신약에서 어떤 것도 설교하지 않는 교회이다.
 10. 교회의 석의적 전통을 아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불가피한 도움이 된다. 많은 학자들이 칼빈의 성경 해석학을 오해한다.

즉 그들은 칼빈의 해석학적 전통이 20세기 성경 해석학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이 그리스도 예수를 성경의 핵심으로 여기고, 신약을 구약의 성취로 여기고, 성경을 교회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성경의 권위는 스스로 증거하며 성령의 조명을 통해 독자에게 알려지게 된다는 등등 칼빈의 석의적 작업이 갖는 다양한 신학적 측면들은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literal sense)와 통합되어 있다. 이는 칼빈이 중세적 성경 해석학과 연속선 상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칼빈은 성경 텍스트를 주석할 때 그것의 문자적 역사적 의미(literal or historical)에서,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what we ought to believe, do and hope for), 즉 풍유적 의미(allegorical)와 교훈적인 의미(tropological)와 영적인 의미(anagogical)를 찾았다. 니콜라스 라이라(Nicholas of Lyra)가 말하는 사중적 의미(quadriga)는 다음과 같다.

문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르치고,
풍유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가르치고,
도덕은 무엇을 행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신비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가르친다
Littera gesta docet,
quid credas allegoria,
moralis quid agas,
quo tendas anagogia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요, 신약은 앞으로 도래할 것의 그림자다. 구약이 신약에서 성취된 것을 가리킬 때 그 의미는 풍유적이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성도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면 그 의미는 교훈적이다. 그리고 텍스트가 하늘의 영광을 암시하고 있다면 그 의미는 신비적이다. 문자적 역사적 의미는 해석의 다른 모든 차원들이 산출되는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에 아퀴나스는 문자적 의미를 텍스트의 유일한 의미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문자적 의미는 신적인 저자의 의도와 인간적인 저자의 의도에 의해서 규정된다. 예언의 의미는 그것의 성취가 될 것이다.

칼빈이나 루터처럼 중세 주석가들도 하나님을 성경의 제1 저자로 보았으며 인간은 성경의 도구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이차적 저자라고 보았다. 그러나 일차적인 저자와 이차적인 저자 사이에 충돌이 있다고 본 것은 아니다. 사중적 의미(quadriga)에서 보다 단순화된 형태들이 중세 후기에 나왔다. 그러나 학자마다 다양한 발전의 형태가 있었다. 니콜라스 라이라는 이중적인 문자적 의미를 주장했고, 파버 스타플렌시스(Faber Stapulensis)는 성령에 의해 의도된 단일한, 전적으로 영적인 문자적 의미를 주장했다. 칼빈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구약 예언의 문자적 의미를 포로귀환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의 재건을 뜻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 속에서 이루어질 왕국의 건설까지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16세기 교회의 개혁에서 나타날 왕국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완성될 왕국의 최종적인 승리까지 그 예언의 문자적 의미에 포함시켜 이해했다. 이는 중세 주석가의 사중적 해석의 기본적인 틀이 칼빈의 해석학에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주석가의 직무는 텍스트의 단순한 문법적 의미를 넘어 교리와 도덕과 소망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루터의 경우, 그의 주석에는 언제나 믿음과 도덕이 언급된다. 그는 표준주석(Glossa ordinaria)이라 불리는 교부들과 중세적 전통을 탐구하고 그것과 대화하는 식으로 성경을 주석했다.

종교개혁 시대의 성경 해석학은 믿음과 도덕과 소망이 문자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사중적 의미에서 하나의 단일한 문자적 의미로의 해석학적 전환은 16세기 성경 해석학과 그 이전 최소 4세기 정도의 해석학적 전통과의 연속성을 잘 증거한다. 중세의 성경은 라틴 벌게이트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의 개신교 진영에서도 벌게이트 역본은 성경의 표준 번역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때 사용되던 성경은 벌게이트 역본이며, 더 중요한 것은, 참조할 수 있었던 표준주석과 다른 주석들도 벌게이트 역본에 기초한 라틴어 문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자신의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며 주석했던 칼빈도 벌게이트 역본을 늘 참조하며 주석을 했다. 베자도 그의 주석 성경에서 벌게이트 역본을 계속 언급하고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성경 해석학이 중세가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이 해석사에 미친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헌학과 수사학의 전문성이 인문주의 운동과 함께 본격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 텍스트를 선별하고 원어의 문법과 구문을 보다 정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종교 개혁자들의 해석학에 아주 기본적인 작업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2) 단순한 표준주석(Glossa) 형태가 중요한 주제별 교리에 대한 확장된 주석 (Scholia) 형태로 발전하고 본문 전체에 대해 주석을 다는 것이 루터의 글에서 발견된다.
 3) 벌게이트 역본도 신약의 경우 에라스무스와 베자의 라틴어 역본으로 점진적인 대체가 이루어 졌다.

이런 인문주의적 문헌학과 수사학은 부쩌와 불링거와 멜랑톤과 칼빈에 의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고 수용되었다. 부쩌는 주석가의 작업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 metaphrasis, enarratio, interpretatio, observatio. 불링거와 무스쿨루스와 버미글리 주석에서는 Glossa-Scholia 방식도 여전히 보이지만, 주석에 교리적 논쟁을 삽입하는 형태도 관찰된다. 멜랑톤의 경우에는 수사학적 명료성을 강조하며, 성경의 권별 주장과 경향에 대한 분석을 제공한다. 성경 텍스트로부터 교리를 뽑아내는 그의 방법은 주석에서 신학으로 이동하는 패턴을 제공한다.

칼빈도 이러한 배경에서 주석과 기독교 강요를 저술한 것이다.

정통주의/스콜라주의 구분

16세기와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을 표현할 때에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용어는 ‘Orthodoxy’와 ‘Scholasticism’이다.

'정통주의' 용어는 신학의 체계나 스타일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16세기 후기와 17세기 개혁주의 학자들의 공식적인 스콜라적 문헌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 고백서, 교리문답, 주석, 실천적 논문들도 그것들이 표방하고 있는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는 모두 정통성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파 정통주의 Reformed orthodoxy’는 개혁주의 교회의 고백적인 성격을 가진 가르침과 개혁주의 학자들이 그 고백적인 가르침의 개념을 규정하고 변증하는 일에 극도의 노력을 기울였던 1565년에서 1725년에 이르는 전 기간 및 당시의 신학적 내용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통주의는 유명한 ‘칼빈주의 5대교리’와 같은 가르침의 고백적 수용과 조직적인 신학화 작업과 논쟁적인 변증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과 유아세례 교리의 수용 및 조직화와 변증까지 넓게 포괄하는 개념이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교리들이 성경의 직접적인 교훈이라 믿었고, 당연히 주석적 작업을 통해 도달한 필연적 혹은 합리적 결론으로 도출하고 정립하고 발전시킨 것들이다. 그들의 교리들을 그들이 취한 방법론의 필연적인 결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들이 취하였던 신학 방법론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개혁파 스콜라주의 Reformed scholasticism’은 교실에서 흔히 발견되는 방법이며 종교개혁 신학의 고백적인 개혁주의 진영에서 정통주의 시대에 발전시킨 보다 세밀한 신학의 체계를 특징짓는 방법이나 스타일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 방법론은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 기간동안 논리학과 수사학에 가해진 무수한 변화들 때문에 중세의 스콜라 학자들의 방법과는 다른 것이었다. 유사한 스콜라적 방법론을 사용했다 할지라도 그것에 의해 도출되고 표상된 신학의 내용과 목적에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통주의 시대 내에서도 개혁주의 신학자들 간에 동일한 스콜라적 방법론을 사용한 결과로 얻은 교리들에 다양한 입장들을 보이는 것은 방법론과 신학적 교리 사이의 필연적인 인과를 부정하는 반증이라 하겠다. 종교개혁 인물들 및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스콜라적 방법론을 쓰면서도 교회에 은밀히 침투하여 교회를 오염시킨 것으로 여겨지는 오류들과 악습들에 대항하며 바른 가르침을 강직하게 고수하는 일에 집중했다. 칼빈이후 개혁신학, p.87-88 참조

푸코도 읽고 니체도 읽으라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을 통해 문서(혹은 언표)와 사물과 사태에 대한 의미해석 방법론에 과감한 딴지를 건다. 기존의 해석학적 방식이 문법적인 관계들, 명제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들, 언어들 사이의 메타 언어학적 관계들, 어구들 사이의 수사학적 관계성들, 유사성들, 규칙성들, 연관성들, 정신이나 의식구조, 발전이나 진화의 개념들, 경향의 개념들, 반복 개념들, 인과율 개념들 등을 해석학적 수단들로 삼았던 반면, 푸코는 오히려 언어표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비약들, 배제들, 극한들, 특이성들, 불연속들, 비약들, 희박성들, 고유성들 등을 그대로 존중하고 거기에 인위적인 규칙이나 질서와 원리를 함부로 부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존하기 위한 푸코 나름의 해석학적 전략이다. 그러니까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 안에서는 모든 권위와 질서와 습관과 관행과 상식과 원리와 경향이 모두 거절된다. 포스트 모더니즘 원흉, 맞다. 그러나 뭐 그렇다고 포스트 모던 사상을 급히 소환하여 푸코가 그 출처라며 몰아붙일 일은 아닌 듯하다. 개인적인 생각에 푸코의 고고학적 접근에도 건질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절충주의 입장을 견지하는 게 지혜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과장된 거품일 뿐인 것들이 마치 권위와 질서와 규칙과 규범인 양 해석학 바닦에서 기준으로 군림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가상들을 있는 그대로의 실체에서 거두어 내는 일에 푸코의 탈권위적 태도는 오히려 유용하기까지 해 보인다.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만 충족되면 모든 비밀과 해석이 다 풀어진 양 지적 허영을 떠는 전지(omni-scientia)의 소유자가 얼마나 많은가! 나도 자유롭지 않은 대목이다. 푸코를 읽으면서 경계해야 할 것들도 많이 보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예리한 통찰력도 상당수 경험했다. 이런 맥락에서 [지식의 고고학] 일독을 운운했다. 같은 맥락에서 '신은 죽었다'는 도발적인 언사의 주인공 니체도 꼼꼼하게 읽어야 할 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귀에 달콤한 인물의 목소리만 찾는다면 정작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편한 진실에 직면할 기회는 요원하다. 물론 성경에서 우리의 가장 은밀한 실상을 다 경험한다. 그러나 심지어 성경 속에서도 해석학적 차원에서 회피할 가능성은 여전히 농후하다.

기독교를 나쁘게 말하고 왜곡하는 사람들과 문헌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고 보다 엄밀하게 소망의 말을 겸비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들에게 경청의 귀를 더 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들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될 일이다. 진리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외연을 최대한 넓히라고 권하고 싶다.

백승영의 니체

백승영의 [니체: 건강한 삶을 위한 긍정의 철학을 기획하다], 한국인 학자의 니체 연구서로 탁월하다. 백승영에 따르면, '철학은 인식적 차원의 지혜를 찾는 것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실존적 행위가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건강한 삶의 본능에서 나오는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니체 철학의 진수란다.

허나 이런 긍정의 철학은 죽음과 부활의 복음에 대립각을 세우기 마련이다. 니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복음이 십자가 상에서 죽'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니체에겐 '복음'이 아니라 '나쁜 소식' 즉 '화음'일 수밖에 없다. 백승영은 주 안에서의 평등과 한 몸이라는 공동체 정신이 니체로 하여금 비판의 망치로 기독교 문화를 철거하는 일에 광기를 드러내게 했단다.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민주주의 정신에 대해서도 위대한 인간의 하향 평준화요 기독교의 아류일 뿐이라며 거부한다. 백승영은 니체를 '인간과 세계의 병증을 진단하고 치유하는 의사, 건강하게 살기를 가르치고 권유하는 교유자며 계명가'라 격찬한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네 자신을 창조'하고 '네 자신의 주인이 되'고, '네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하며 '네 자신에 대한 긍지를 지녀야' 한다고 설득하며 '먼저 네 자신이 되어라(Werde, wer du bist)!'는 니체의 경구를 읊조린다.

물론 세상을 이해하고 문명을 판독하는 니체의 눈빛은 특이하고 예리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 니체는 자신의 시대가 보여준 풍조의 역방향을 취하는 반응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의 저돌적인 철학은 당시의 보편화된 사조 뒤집기의 수준에 머무를 뿐이었다. 보이는 것들의 가까운 인과에 입각한 세계관이 펼칠 수 있는 한계를 잘 보여준 사례라고나 할까!

예정론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해 있다지만 정작 인간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진단이다. 이것을 잘 아는 다윗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없단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유일하게 알고 알게 하실 하나님께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인간의 부패성은 그 규모가 측량되지 않아서다.

욥은 세 친구들의 신학적 능변의 합을 능가하는 구약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 로마서에 버금가는 진리의 규모를 세웠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요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는 자'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택함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 그런 지각에서 근원적인 자기부인이 가능했다. 우리는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적 상태의 심각성에 대해 무지한 그 만큼 그토록 심각한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 빛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은혜에도 무지한 거다. 이런 맥락에서 난 하나님의 예정을 생각한다.

진노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영생을 누리게 된 근원을 소급하면 땅에서 펼쳐지는 가까운 원인 그 너머의 차원이 있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신 뜻을 따라 정하심. 바울은 그것이 선악을 알거나 행하기도 전에, 그리고 창세 이전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피조물과 시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변경할 수 없는 불변의 신적 작정하심 되겠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우리의 마음이 구원의 여부를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이 지극히 높고 의로우신 판단력을 따라 우리를 택하신 것보다 더 크고 확실한 은혜가 없다.

피조물이 그 본성에 따른 자율성에 어떠한 강압이나 위협 없이도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그런 하나님의 정하심은 우리에게 가장 견고한 확신의 근거이며 가장 깊은 겸손의 샘이면서 가장 은밀한 은혜의 내용이다. 구원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우리 마음의 판단에 좌우되는 것이라면...아,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오싹한 일이다. 비록 우리에게 택자와 유기자의 분별이 맡겨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이 작정과 예정의 신적인 신비를 적당한 분량만큼 노출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음부의 권세가 흔들 수 없는 확신에 거하게 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합당한 경외심을 갖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깨닫게 하사 필경 일평생 감사의 행로에서 이탈하게 않게 하시려는 성경 저자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믿는다.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신적인 인과율인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이 눈에 관찰되는 가까운 인과율을 따라 사물과 사태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인간의 안력이 결코 미치지 못할 신비라는 거 모르는 바 아니다.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이 친히 가려두신 영역,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신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알려질 수 있을 정도로만 적당히 노출하고 있다. 당연히 신비라 할지라도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 않은 이상 묵과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인간의 호기심을 따라 성경이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도록 가려둔 영역을 함부로 범하는 것도 금물이다. 호기심에 이끌려 선을 넘어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미로에 빠진다는 칼빈의 경고는 빈말이 아닌 것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비록 이성의 빛으로도 볼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며 택자와 유기자 구별은 이성의 빛으로는 조명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에게 맡겨진 심판과 정죄의 무기도 아니다. 나는 확신과 겸손과 감사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정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일에 어떠한 주저함도 없다.

그분

항상 무언가를 주시는 하나님, 그러나 주시는 그분이 누구신지 모르도록 스스로 감추시는 하나님, 보이지 않아도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믿음의 방식으로 알리시는 하나님,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범사에 그를 인정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 성도의 삶을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고 못박으신 그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한다.

 내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선물로 받아 누리며 그 속에 파묻혀 살지만 적당한 관조의 거리를 두고 그 모든 것들을 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더듬어야 하겠다. 모든 것들을 밝히 보고 누리도록 빛을 비추지만 정작 그 빛을 발광하는 태양을 쳐다볼 수 없어 눈을 감아야 잔상이 보이듯이, 육의 눈꺼플을 내리고 주님께 마음의 지향점을 맞추어야 하겠다.

 오늘은 왠지 그분이 많이 보고싶다.

판단의 기준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미련한 자의 행위는 모두 미련하다. 존재가 원인이고 행위는 그 열매니까. 물론 존재를 부인하는 듯한 지혜로운 우발적 처신이 돌연변이 같이 연출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건 존재의 산물이 아니기에 당사자의 미련함은 벗어진 것이 아니다. 미련한 자의 미련함은 그의 행위에 근거한 판단이 아니다. 자기 행위를 바른 것으로 '여긴다'는 내면의 자의식에 근거한다.

나 자신의 행위를 바르게 여긴다는 것은 행위의 시시비비 기준이 내게 있다는 무의식적 전제가 깔려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마음의 태도다. 반면 권고를 듣는 자의 지혜는 자기 행위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지 않는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처럼 판단의 출처가 미련함과 지혜를 좌우한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타인의 판단을 작은(ἐλάχιστόν)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판단을 받는다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판단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의 태도가 이미 지혜의 샘이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삼을 분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판단을 두둔하는 게 아니다. 아무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헤아린 그 헤아림을 따라 자신도 헤아림을 받는다고 바울은 충고한다.

요지는 우리 각자가 자신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다. 타인을 판단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타인의 판단을 너끈히 수용하고 비록 뾰족한 경우에도 경청하는 마음의 여백을 넉넉히 마련해 두자는 이야기다. 타인의 판단을 듣고 품으면 나도 지혜롭고 타인도 치유된다. 참으로 요상하나, 엄연한 사실이다. 말씀은 언제나 쌍방의 윈윈을 지향하나 보다.

오늘은 내가 나 자신의 판단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잠언을 의식의 전광판에 선명하게 새겨 두련다. 

교부 및 중세 학자들의 서신 사이트

교부들과 중세 학자들의 서신을 라틴-영어 대조판 형식으로 1259개나 모아둔 사이트다. 교의학과 교리적 논박서를 찾기는 쉽지만 개인적인 서신의 출처를 확인하고 원문을 발굴하는 건 대단히 어렵다. 아마도 이런 고뇌를 아는 자의 땀으로 만들어진 사이트가 분명하다.

디지털 어거스틴 전집

디지털 어거스틴 전집이다. 책별로도, 교부전집 권별로도 볼 수 있어서 시간절약 차원에서 만점이다. 게다가 사진파일 없어서 다운로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 촌음 쪼개는 분들에게 적격이다. 라틴어를 모르시는 분들도 필요한 부분 긁어서 구글 번역통에 넣으면 의미의 디테일은 안되지만 윤곽은 파악된다.

AURELII AUGUSTINI OPERA OMNIA

2012년 10월 11일 목요일

오리겐 오페라 1536년 바젤판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과 함께 출간된 문헌이다. 스캔상태, 더 이상 섬세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pdf 다운로드 시간이 무진장 길다. 한 페이지에 총 소요시간 1분 가량이다. 고화질의 폰트를 누리는데 지불해야 할 댓가일 수 있겠으나, 난 접었다. 나중에 마나님께 알바 부탁 올려야 되겠다. 그림의 떡이지만 보는 것으로도 충분한 만족도에 이른다. 자료는 Jena 대학 아카이브 제공이다. 폴라누스 논문에 오리겐 각주는 이것으로 해결한다.

Origenis Adamantii opervm pars secvnda (Basilea, 1536)

생사

죽음 앞에서는 숙연해 지는 법이다.
앞서 지나간 분들의 추억이 가슴을 적신다.

사람은 아무리 못나고 악해도 불쌍하다.
죽음에 일평생 종노릇만 하다가 죽는 이들이 태반이다.
사람들을 대할 때에 그들의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 있는 동안에 최고의 사랑과 진리를 맛보도록
내 생을 다 태워서 사랑하고 섬기어야 하겠다.
여기에는 재만 남도록...

2012년 10월 10일 수요일

역설적인 증인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이어서 예수님은 '본다고 하니 저희 죄가 그저 있다'고 하셨다. 뚱딴지 같은 동문서답 어법이다. 보고 듣는 지각에서 가치를 경험하고 축적하며 문명을 이룩하는 인간에게 예수님의 '본다'와 '죄'의 동일시는 억울함을 넘어 '배째라' 냉소까지 자아낼 수 있겠다. 이는 인간의 생겨먹은 근본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다'는 행위는 빛의 협조를 필히 요구한다. 빛과 시간이 같다는 사실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가지는 치명적인 한계는 시간의 개입 없이는 이해의 문턱에 한 발짝도 들어서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시간으로 번역되지 않으면 이해도 납득도 불가능한 게 전두엽 안에 꼬여 있는 인간 이성의 실상이다. 시간의 흐름을 근거로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인과의 문법을 가지고 사물과 사태를 해석하는 인간에게 시간의 형식을 상대적인 것으로 돌리고 심하게는 제거할 수도 있는 영원 개념은 폭행에 가까울 수 있겠다.

세상의 창조에 대한 인간의 이해도 역시 시간에 근거한다.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원인과 결과라는 시간적인 인지의 다발로 엮어주지 않으면 말씀의 명령으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는 멀쩡한 시각의 소유자로 소경되게 하는 사안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역설들로 충만하다. 영원하신 주님께서 주어로 계셔서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않으면서 성경을 벗기고 세상을 주석하는 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시도인가!

그래서 증인의 방식이 요구된다. 성도의 삶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성경의 해석이요 진리의 번역이 되어야 한다는 방식 말이다. 이 시간의 세상이 아니라 저 영원의 세상을 근거로 살아가는 성도의 역설적인 삶은 소경의 눈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다. 그게 소명이다.

성경해석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갈증에 시달리고, 쉬 손아귀에 잡히기에 찾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권태에 빠진다. 성경은 성령의 탁월하고 심오한 조율로 구성되어 그 안에 보다 명료한 구절들은 우리의 기갈을 해소하고 다소 애매한 구절들은 우리의 까탈스런 입맛을 일소한다." 이는 어거스틴 할배의 교훈이다. 성경의 애매한 부분도 이유가 있고 명료한 부분도 다 이유가 있다. 이러한 성경의 조화로운 난이도 배합은 어쩌면 우리의 짐작보다 더 심오한 것인지도 모른다.

성경의 개별 구절들이 다른 구절들의 조명으로 의미가 밝아지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성경의 적법하고 요긴한 사용인 것처럼만 생각하면 마음의 한 구석이 허전하다. 의미의 난이도 문제를 넘어 각 구절들의 명암과 색조가 있는 그대로 조화를 이루어서 각각이 고유한 기능과 분량을 따라 성경 전체의 의미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합당한 해석학적 조명을 받아야 하겠다. 일부 학자들의 문맥타령 촉발할 가능성이 농후한 주장인 줄 안다.

성경을 책으로 이해하는 인문학적 관념에 한번도 반론의 옆차기를 날려보지 않은 분들에게 성경은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란 바울의 '성경책' 개념이 귀에 거슬릴 수 있겠다. 영어로 말하자면, 성경은 Bible이나 Scripture가 아니라 The Word of God이다. '책'을 해석하는 방식과 '쓰여진 글'을 이해하는 방식은 서로 유사할 수 있겠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은 책을 구분하고 장을 나누고 절을 쪼개고 단어를 해부하는 환원주의 방식과는 대단히 다르다. 그렇다고 전체주의 사상처럼 부분들의 집합이나 조각들의 맞춤에서 부분들의 합 이상으로 생산되는 개념의 잉여를 취하는 방식도 아니다.

왜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의 섭리이고 하나님의 존재이고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빛이고 하나님의 계시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소통이고 하나님의 행위이고 하나님의 임재이다. 칼빈이 언급했던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성경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을 인식과 행위 차원과만 결부시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성경의 주어인 동시에 성경 밖에서 그 성경을 조명하고 계신 하나님 자신이 배제된 어떠한 해석도 성경의 본래 의미와 목적을 벗어나게 되어서다. 

하나님이 조절하신 명암과 색상에 맞도록 성경의 각 구절들을 이해하되 동시에 그 조각들이 그 모든 조각들의 주어이신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안에서' 조화롭게 통일되는 접근법을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거이 궁금하다. 

금서목록

교황 바울 3세가 종교개혁 이후 1542년에 신앙의 순수한 가르침을 수호하고 거짓된 교리들의 난립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종교재판소 (Roman Inquisition)를 설립했다. 이 기관은 1559년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읽지 말아야 할 저자들과 문헌들 목록을 작성하여 배포했다. 거기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종교개혁 선배들의 이름들이 모조리 거명되어 있고, 로마 카톨릭의 교리적 경계선을 벗어나는 중요한 문헌들도 명시되어 있다.

물론 종교재판소의 검열을 통과한 문헌들은 책 표지에 nihil obstat (이 책은 [로마 카톨릭의] 어떠한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 혹은 imprimatur (이 책은 출판이 되어도 좋다)라는 직인과 더불어 도서관을 활보할 수 있었다. 링크된 금서목록 자료들은 1559년과 1564년에 확정된 것이다. 아쉽게도 판본이 더 깔끔한 1559년 로마판은 다운로드 불허한다.

1559년 판본이 중요한 이유는 크리소스톰의 Opus imperfectum in Matthaei Evangelium이 로마 카톨릭의 교회와 성경에 대한 입장에 위배되는 언급들을 담고 있고, 그가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위경(Book of Seth)이 소스로 활용되고 있고, 헬라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심령이 가난한 자' 문제에다, 아리우스 사상의 흔적까지 보인다는 이유로 위서로 간주되어 금서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1564년 판본에서 보이듯이 그 이후로는 사라져 버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Index Auctorum et librorum prohibitorum (Rome, 1559)
Index Librorum prohibitorum (Colonia, 1564)

2012년 10월 9일 화요일

아퀴나스 Catena aurea

아퀴나스 사복음서 해석이다. 소스는 교부들의 문헌에 의존하고 있다.

Thomas Aquinas, Catena aurea (Rome, 1470)

Tomas primus: Catena aurea super Matthaeum
Tomas secundus: Catena aurea super Marcum
Tomas tertius: Catena aurea super Lucam
Tomas quartus: Catena aurea super Ioannem

Catena aurea in one volume (Google, 1660)

16세기에 출판된 크리소스톰의 오페라

크리소스톰 전집이다. 신구약의 통일성과 차이성을 이해하는 데에 단초를 제공한 교부다. 이에 관한 그의 명문은 이렇다: "신구약의 차이는 실체를 따라서가 아니라 시간의 경륜을 따라서다 (Ἡ διὰφορα οὐκ ἐστιν κατα την οὐσιαν ἀλλα την τῶν χρονων ἐναλλαγην)." 칼빈은 이 문구를 인용하며 신구약의 관계성을 논하였다. 동시에 그의 자유의지 및 예정론 입장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황금의 입술을 가진 거성이라 할지라도 변별력은 늘 요구된다.

16세기에 출판된 그의 오페라를 바이에른 도서관이 제공한다. 나는 한 곳에 모두었고! 마지막 7권은 저작설 논란이 뜨거웠던 문헌이다. 아리우스 사상이 약간 배어 있어서다. 심지어 16세기 판본들은 고대 판본과는 달리 그 부분들을 삭제하여 위서의 혐의는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아퀴나스, 식스투스, 폴라누스 같은 인물들은 황금의 입술에서 나온 글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 줄에 서려고 한다...

Johanni Chrisostomi Opera (Basilea, 1539)

Tomus primus
Tomus secundus
Tomus tertius
Tomus quartus
Tomus quintus
Tomus sextus (Index)
Tomus septi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