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7일 화요일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 (잠27:17)

사람이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 교훈의 비유로 지혜자가 언급한 말이다. 플라스틱 혹은 나무가 철을 날카롭게 하지는 못한다. 철은 철에 의해서 날카롭게 된다. 철보다 더 단단한 것이 철을 날카롭게 만든다는 언급은 없다. 특이하다. 그래서 친구가 중요하다.

유유상종, 끼리끼리 모인다는 사자성어 되시겠다. 성격이나 관심사나 직종이나 배경이 유사하면 서로 통하는 것이 많으니 사귐이 신속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겠다. 그러나 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과학과 학문의 최첨단이 감추어져 있음을 기억하자.

유사성이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 유사성이 많을수록 소통도 원활하고 깊어진다. 지혜자는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친다'고 말한다. 친구는 서로의 마음을 가장 투명하고 정확하게 비추는 관계이다. 그래서 친구가 중요하다.

지혜자는 몇 구절 앞에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충직한 친구의 아픈 책망이 기름과 향처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도 했다. 친구는 유사하기 때문에 서로의 표면이 아니라 이면을 알고 심층적인 지적과 평가가 가능한 사이이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만드는 것은 충돌과 마찰이 있어야 가능하다. 서로 이득의 죽이 맞아서 자화자찬 모드로 좋게좋게 나가면 충돌도 없고 날카롭게 되는 일도 없어진다. 서로 간섭하는 일도 없고 귀찮게도 하지 않아서 편하기는 하겠다. 그러나 무뎌진다.

주변에 같은 신학적 전통에 속하였고 같은 분야와 인물들을 공부하는 친구들이 있다. 짓밟고 눌러야 할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날카롭게 할 유일한 조력자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서로를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 충직한 권고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말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날카롭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친구를 위해 생명까지 버리는 최고의 사랑을 구현하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자신을 우리의 친구라고 밝히셨다. 그래서 성경을 가까이 하는 자들이 영적으로 가장 날카로운 지식과 지혜를 소유한다.

말씀은 성령의 검이고 좌우에 날선 어떠한 검보다 더 예리하여 우리를 다른 무엇보다 더 날카롭게 만드는 수단이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교제권에 속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말씀이 말씀을 날카롭게 하는 가장 엄밀한 성화의 나날들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페북에서 그런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 

The Present and Future of Biblical Theology

미국 침례교의 신약신학 학자 가 깔끔하게 정리한 글입니다.

The Present and Future of Biblical Theology (March, 2012)

2013년 8월 26일 월요일

두 마리의 토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2:42)

오늘 인턴 목회자가 선택한 첫설교 본문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즐거될 것이라는 선언의 가시적 첫걸음을 뗀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란 혁명이 발생하긴 했으나 곧장 예수님의 부재가 남긴 공백이 주었을 기독교의 종말에 준하는 공허함에 역동적인 반전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태초에 생명을 일으켰던 생기의 교회론적 부활을 경험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독 이 사건과 이 시점을 추억하며 흠모한다.

그러나 오늘 설교자는 그런 열렬한 흠모의 눈길을 성령강림 이후에 전개된 사도시대 교회의 일상적인 관습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관습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사도들이 가르친 것을 열심히 공부했다. 2) 삶의 희로애락 전반을 공유했다. 3) 더불어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그리스도 예수를 기념했다. 4) 전심으로 기도에 힘썼다. 감정적 흥분은 휘발성이 강하여 쉽게 살아진다. 그래서 흥분 직후에 네 가지의 실천으로 구성된 초대교회 관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설교에 새롭고 기발한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설교를 들으면서 성령강림 전후의 상황이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의 상황과 미묘하게 중첩되는 것을 느꼈다. 종교개혁, 생각만 해도 맥박이 곱배기로 빨라진다. 기독교가 질주하던 복음의 지리적 확장 일변도에 질적 갱신의 고삐를 제대로 당겼던 그 시대를 모두가 흠모하며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는 거룩한 말씀의 인간적인 왜곡과 교회에 군살처럼 박힌 다듬어진 행습과의 결별을 선언한 개신교의 결연한 정신 때문이다.

종교개혁 운동의 역동적인 발발이 그저 흥분의 뜬구름만 부여잡고 거기에 도취되어 있었다면 실패의 도랑으로 곤두박질 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를 않았다. 기독교의 획기적인 종교개혁 직후에 진리의 고백화, 체계화, 교육화, 조직화, 제도화가 뒤따랐다. 중세의 어두운 부패와의 온전한 결별은 구호의 선언이나 혁신의 흥분을 넘어 보다 꼼꼼한 후속적 조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종교개혁 시대로의 복귀에 대한 흔모와 열정을 정통주의 시대에도 돌리는 게 마땅하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가 20세기 후반에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하고 이후로 지속적인 확대와 후속적인 조치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성령강림 및 종교개혁 자체에 여전히 흥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대대적인 혁신의 절박한 필요성이 대두될 정도로 한국교회 부패의 수위가 높다는 현실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이제는 개혁의 격정과 더불어 흥분의 거품을 제거하는 적절한 후속 조치들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동시에 묶어서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실제로 이러한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가 한국 신학계에 잔잔한 미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빠르고 넓고 꼼꼼하게 확대되면 좋겠다.

2013년 8월 25일 일요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라

다윗은 말씀의 무한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고 있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토록 작은 소리로 읊조리고 있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읽음으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읊조리고, 지키므로 얼마나 지혜롭고 명철하게 되는지를 노래하고 있다. 이런 사람을 세상은 감당하지 못한다.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말씀이 흥왕케 되고 세력을 얻는 것이 진정한 부흥이다. 

2013년 8월 24일 토요일

행위와 보응의 도식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한다 (잠24:12)

서양적 사고는 대개 이 구절을 수학적인 등가 개념으로 이해한다. 행위와 보응 사이의 산술적인 대응 말이다. 이는 보이는 행위와 보이는 보응 사이를 비교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논리적' 귀결이다. 만약 인간의 등가 기준치에 미달하면 하나님의 형평성 혹은 공의를 의심하고 불평이나 원망 혹은 서운함도 서슴없이 표출한다.

올바른 이해를 위해 우리는 행위와 보응에 관한 문구가 하나님이 마음(לִבּוֹת)을 저울질 하시고 영혼(נַפְשְׁ)을 지키시는 분이 아신다는 맥락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퉁~쳐서, 행위는 마음과 관계된 것이고 보응은 영혼과 관계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드러난 것보다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 포인트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을 평가할 때에도 그렇지만 타인에 대해 평가할 때에도 대체로 가시적인 행위와 보응의 관점에서 판단의 칼을 휘두른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자 하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주관적인 지각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것은 사태의 객관성을 빙자한 자신의 어떠함만 드러낼 뿐이겠다.

원수를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은 판단의 기준과 주체가 하나님 자신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법의 판단자도 집행자도 아니라는 얘기겠다. 같은 맥락에서 행위와 보응 도식도 하나님 자신이 판단의 기준과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라'고 한 바울의 말도 맥락의 결이 동일하다.

본문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을 요청한다. 하나님이 판단의 기준이고 주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산술적인 등가 개념으로 하나님의 고유한 판단의 자리를 넘보는 건 무례이다. 

2013년 8월 23일 금요일

하나님이 존중되는 사회적 관계성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잠22:22)

가난하고 연약하고 비천한 자들이 탈취를 당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천의 그럴듯한 들러리 명분을 끌어당길 수 있겠으나 이유의 핵심은 그들이 가난하고 연약하고 비천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반응은 대체로 상대방의 상태에 의존하고 있다. 약하면 짓밟고 강하면 수그린다. 하나님이 연약한 자와 곤고한 자를 신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이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신다'는 지혜자의 통찰이나,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시기 때문'이란 바울의 지적을 염두하지 않아서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과 없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폐하려 하신다.' 이는 권력의 역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약하다고 탈취한다. 이처럼 강한 자들의 오만한 본색이 가난한 자들 앞에서는 가려지지 않고 노출된다. 그런데 이것이 폐망의 근거를 축적하는 행위가 된다는 맥락이다.

강한 자는 약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바울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면 되겠다. 사람들의 상태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대해서는 아니된다. 모든 사람들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상대방을 대우해야 한다.

약하다고 멸시하지 말고 강하다고 비굴하지 말아야 하겠다. 건강한 사회의 확립은 하나님이 존중된 사회적 관계성에 기초한다. 하나님에 대한 존중의 시금석은 약한 자들을 대하는 태도이다. 사회에 있어서는 약자들에 대한 복지의 비중과 사회적인 배려가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가 바로 하나님을 가장 존중하는 관계성이 확립된 '사회'여야 한다. 

우선순위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잠22:1). 한참동안 의식의 발목을 붙잡은 구절이다. 읽으면서 유신론의 고품격 가치보다 유물론이 발산하는 괴이한 매력에 합당한 저항을 접고 백기투항 하는 일부 기독교의 현주소가 보여서다.

위의 구절은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 문제에 더 가깝다. 만물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향유의 대상(fruenda), 향유 및 사용의 대상(fruenda et utenda), 그리고 사용의 대상(utenda). 각각의 가치에 대응하는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 인간, 다른 피조물 순서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우리의 즐거움이 머무는 종착지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나의 기쁨이요 즐거움이 되신다고 한 시인의 고백에서 입증된다. 바울도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달리신 십자가 외에는 알지도 자랑치도 않겠다고 했다. 

인간도 향유의 대상이다. 타인을 자신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아니된다. 그런데 왜 동시에 사용의 대상인가? 인간이 향유의 궁극적인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을 향유하는 최고의 통로이다.

다른 피조물은 결코 향유 혹은 즐김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은이나 금보다 더 우리를 즐겁게 만드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궁극적인 향유의 대상인 하나님을 물질과 맞바꾼 것이겠다. 우상숭배 행위가 따로 없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차분한 어조로 격분했다.

피조물을 향유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경배의 대상일 수 없다는 십계명 1항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일례로, 하나님의 명령보다 흠없는 양의 울음에 귀가 즐거웠던 사울이 비록 하나님 경배를 목적으로 양을 아꼈어도 사술의 범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이 유신론을 때때로 앞도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재물취득 방편으로 거리낌 없이 동원한다. 이는 신앙과 삶과 창조의 질서를 뒤집는 일이겠다. 이러한 질서의 전복은 이단의 전형적인 작태기도 하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을 앉히고 인간의 가치를 재물로 교체하고 재물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수단으로 호명한다. 

교회가 이런 무질서의 대표적인 증인으로 자처하고 나선 형국까지 치달은 건 아닌지 뜨끔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참된 명예와 그분만을 기쁘시게 하여 입는 은총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적인 가치로 끝까지 고수하는 증인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2013년 8월 21일 수요일

개혁주의 신학자의 길

개혁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분들은 '지나치게 엄격한' '건조한' '죽은' '지나치게 사색적인' '차가운' 등의 수식어로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꼬집는다. 이는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자의 성향까지 겨냥한 지적이다. 반박의 격한 손사레를 치기보다 성찰이 우선이다. 물론 적당한 변명도 필요하다.

1. 개혁주의 신학은 감정이나 감흥에 휘둘리지 않고 유명세에 의존하는 법도 없고 나에게 유익이 된다거나 끌리는 호기심에 맡겨지는 법이 없으며 상황의 시급한 필요에 맞추고자 하지도 않으며 오직 진리이기 때문에 붙들고 따른다는 정신을 고수한다. 게다가 사람의 동의도 구하지 않으니 정나미가 뚝 떨어질 수 있는 체질을 가졌다.

2. 개혁주의 신학은 각 개인을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 만든다. 각자의 마음을 격동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깊고 꾸준한 책임감을 갖게 만든다. 개인으로 하여금 외톨이가 되게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친밀감이 가장 높아야 할 신학적 특성을 가졌는데 그런 이해에는 이르지를 못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3. 개혁주의 신학은 사람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제시하기 때문에 믿음의 유무를 떠나 상대방을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항구적인 끈기가 발휘될 것을 요구하는 신학이다. 찬동과 계승을 독촉하지 않는다. 강요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접근법을 취한다. 하나님의 역사에 내맡긴다.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은 끈덕진 기다림에 있어서 실패했다.

4. 개혁주의 신학은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 인간론 중심성을 거부하고 신론 중심적일 것을 요구한다. 당연히 우리의 성정에 거북하고 때때로 상식과도 어긋나고 우리의 존재감도 주변으로 밀려나는 듯한 박탈감에 부딪히기 십상이다. 나는 광야이고 죄인 중에 괴수이고 무익한 종이고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처럼 여겨진다.

5. 이러한 이유로 개혁주의 신학은 외로움과 고독과 인내와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신학이다. 엄청난 손실과 상실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 길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당연히 '독종'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 성향의 소유자가 풍기는 인상은 친절과 매력과 감화력과 심히 동떨어진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6. 이처럼 개혁주의 인물들과 신학에 비판을 날을 세우는 분들에게 객관적인 명분과 실증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가장 높은 가치를 가졌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가장 값없이 나누고 공유할 가장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고, 주장하고 논쟁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태도를 갖추는 수밖에 없다.

7. 나아가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설파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의 '살벌함'을 풍기고 알리는 것을 마치 개혁주의 기수의 표징인 것처럼 여긴다면 서둘러 그런 의식에서 돌이켜야 하겠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고수하는 자는 기쁨과 즐거움과 자발성과 희열과 감격으로 충만해야 한다. 내용을 담지하는 정도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8. 다윗이 주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묵상한 이유가 그 계명을 즐거워 했기 때문이고, 자신의 길을 즐거움 중에 걸어가는 것보다 더 향기롭고 매력적인 일이 없음을 생각할 때 개혁주의 신학의 길도 즐거움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는 객관적인 내용의 마땅한 수용이 주관적인 즐거움의 자발성에 의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9. 게다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고급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자의 자태여야 한다. 우월성에 도취되어 서두루고 위협하고 독촉하는 식이 아니라 아무리 수용하지 않고 거부와 비판의 태도로 일관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친절과 관용의 자세에 있어서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 과연 개혁주의 신학의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다.

10.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본성적 부패를 한 순간도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은 우리가 시간이 종결되는 순간까지 인내할 수 있는 근거이며,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진리를 아무리 거부하고 멸시하고 멀리해도 기이한 일로 여기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11. 진리를 허무는 무리들의 거친 물살에 휩쓸리고 저항하다 보면 발등의 불 끄기에도 급급하고 한발짝 물러서서 객관적 거리를 두고 전방위적 침착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심히 어렵고 고독한 일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거칠고 딱딱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 가장 높은 가치를 공유하는 것 자체가 주는 희열이 식어서는 아니된다.

12. 요약하면,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적 부요함과 그것을 전하고 공유하는 자의 고결한 자세를 늘 겸비해야 한다. 내용이 빈약한데 자세만 고매하면 안되겠고, 자세는 뻣뻣한데 내용만 부요해도 안되겠다. 이는 진리의 이성적인 정보취득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진리의 전인격적 체득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말이겠다. 신학교와 교회의 막중한 책임이 여기서 요구된다.

자발성 선물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렘24:7).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출처는 하나님 자신이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의 회심도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혜가 빚어낸 결과이다.

돌아올 마음도 없고 돌아올 능력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먹으로 강요하지 않으시고 자발적인 마음을 주셔서 껍데기나 모양만이 아니라 '전심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겠다.

우리는 순간순간 죄를 의식하고 돌이킨다. 그때마다 우리는 자발적인 마음을 따라 전심으로 돌이킨다. 그러나 그런 자발적인 회개를 가능하게 한 마음을 제공하신 분이 배후에 계시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전도자의 어법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1:3) 전도자의 답변은 이렇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일터와 수고를 걷어차고 무위도식 선언에의 돌입을 촉발할 가능성이 농후한 격문이다. 그러나 바른 말이다. 거두절미 어법으로 말하자면, 수고는 사실 죄의 결과이다. 우연적인 원인에 따른 결과라는 이야기다. 본질적인 것도 아니고 궁극적인 것도 아니라는 말이겠다.

'헛수고'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모든 한시적인 것들과의 관계를 일컫는다.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에 떠밀리고, 해는 떴다가 지기를 반복하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나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채우지 못할 바다로 연하여 흘러가고,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며, 이미 있던 것이 다시 등장하고,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듯이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니 헛수고의 연속이다.

전도자의 기준에 따르면, 심지어 지혜를 알고자 하는 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헛수고로 분류된다. 그러나 우리의 수고가 영원한 것과 관계되면 모든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떠한 영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무시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전부요 기쁨이요 소망이요 영광이요 생명이요 반석이요 지혜요 거룩이요 의로움이 되신다고 고백함이 합당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 인간의 전부라고 한 결론은 결코 상상이나 추정이나 과장이나 수사학이 아니라는 암시를 최전방에 배치한 전도자의 논술이 탁월하다. 우리가 살아가며 밟아가야 할 삶의 순차적인 궤적이 바로 "인생의 허무 지각에서 여호와 경배로"가 아닌가 생각된다. 

2013년 8월 20일 화요일

순수와 지혜

만사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자기 인생의 조정자로 발벗고 나서게 된다. 주변에서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를 만나면 그 기발하고 민첩한 인생 기획력에 충격의 아구가 닫아지질 않는다. 물론 세상에서 우리는 비둘기의 순전함에 뱀의 지혜까지 두루 겸비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지혜와 교활의 경계가 늘 모호하다. 당연히 내가 하면 지혜이고 남이 하면 교활이다. 해석자에 따라 종횡무진 그 속성이 달라지는 전천후 코걸이 귀걸이다.

난 솔직히 인생 설계도 작성과 실행에 미숙하다. '미숙'을 '순수'로 해석하면 나보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다 교활한 무리들로 분류되고 나의 '미숙'은 부끄러운 약점이 아니라 흠모할 장점으로 부각된다. 웃기는 일이다. 물론 '순수'가 요청되는 맥락 속에서는 '미숙'도 미덕으로 간주되고 지혜로운 자들은 자신의 진정성과 무관하게 대체로 교활한 자로 인식된다. 반면 '숙련함'이 요구되는 맥락 속에서는 '순수'도 미숙의 공범자로 단죄된다.

범사에 주를 인정하고 모든 행사를 주님께 맡기면 활용할 수 있는 의지와 지력과 관심과 시간과 마음의 여유는 무진장 확대된다. 그러나 원숙한 신앙을 따라 그런 인정과 의탁이 실행되지 않으면 미숙한 맹신으로 전락한다. 연습장이 없는 인생을 가장 값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법은 우리의 생명과 삶이 보혈의 무한한 댓가가 지불된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그분에게 의탁하는 것이다. 효능은 만점이다.

일단 사람들에 대해 몸값을 높이려는 피곤한 강박에서 해방된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혼신을 기울여 주가의 정상을 구가하는 즐겁고 유쾌한 몰입에 빠지시라. 포도원 주인의 관심사는 포도원의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포도원 일군들의 복지 극대화에 있다. 일군들이 포도원 자체이다. 당연히 우리에게 채용의 자비로운 손을 뻗으신다. 이거 어떠한 일이 있어서 믿으시라. 고용자는 하나님 자신이고 고용의 기준은 그분의 주머니에 있다. 

2013년 8월 19일 월요일

분노 제거법

세상에는 분노할 일들로 가득하다. 가까운 주변에도 무수한 계기들이 분노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분노의 끓는 임계점이 낮을수록 그런 계기들의 분량도 증대된다. 자신을 돌아보면 분노의 폭발이 평균 임계점 이하임을 종종 경험한다. 그래서 분노의 조건이나 환경보다 거기에 반응하는 분노의 주체 즉 나 자신에게 탐구의 시선을 돌리게 된다.

나의 상식이나 이득이나 신체나 체면이나 기호나 기준에 저촉될 때 주로 분노가 폭발한다. 그래서 분노는 당시의 상황보다 나 자신을 더 많이 드러낸다. 분노만큼 자신의 일급 비밀을 무방비로 노출하는 경우는 드물다. 외부의 자극으로 촉발된 내부의 무질서를 성급히 쏟아내는 것은 경험에 의하면 사실 자신을 향한 분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 자신은 작금의 상황과는 다른 고급한 질서와 기준을 보유한 자라는 스스로 의식화된 '사실'의 긴급한 입증의 필요성이 분노를 출구로 삼아 표출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핵심은 분노가 외부의 자극보다 내부의 이유와 보다 밀착되어 있다는 거다. 분노의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자신을 면밀히 관찰하고 정직하게 대응하자.

하나님의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무한한 임계점이 늘 궁금하다. 하나님의 분노를 정면으로 격발하는 언사와 행실의 소유자도 당장 징벌을 당하지 않는 경우들을 접하면, 꼭지가 훅 돌아간다. 동시에 하나님의 높은 임계점에 고개를 숙이고야 만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분노를 해결하는 방법은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과 기준에 내가 적응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욕망 제거법

영적으로 공허하면 욕망하는 것이 많아진다. 마음의 손아귀로 움켜쥐는 욕망이 클수록 내게 하나님에 의한 충만의 부재 혹은 결핍이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채워지는 욕망의 빈 주머니를 유한한 어떤 것으로 채우려는 것은 어리석은 헛수고다. 무한한 욕망의 유한한 해소는 또 다른 주소불명 욕망의 갈증만 부추긴다.

이는 은을 좋아하는 자가 은으로 만족함이 없음과 일반이다. 욕망은 버리는 게 상책이다. 근심도 시기도 질투도 증오도 불안도 덩달아 버려진다. 그러나 속사람이 공허한 채로 욕망에 마취제만 주입하는 것은 무수한 부작용이 뒤따르는 처신이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이 다른 욕망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식이어야 뒷탈을 방지한다.

욕망을 거머쥐면 쥘수록 욕망이 우리를 더 거세게 거머쥔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의 해소에서 비롯된다. 욕망이 해소된다 해도 욕망하는 성향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를 득하는 역설적인 비법이다. 성경에는 구구절절 우리를 온갖 종류의 결박에서 자유케 하는 진리로 충만하다. 진리가 자유케 한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면밀하게 관찰하고 정교하게 분석하고 철저하게 체득하고 지혜롭게 준행하되 성경의 진리로 인격과 삶을 장악하게 한다면 참 자유인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좌우에 날선 검보다 더 예리하여 영과 혼을 찔러 쪼개는 말씀으로 죽고자 하면 산다는 자유의 비결을 명심하자. 욕망 제거법의 구체적인 지침은 결국 성경이다. 

2013년 8월 18일 일요일

폴라누스 아제가 말하는 성경묵상 이전의 자세

1) 성경의 참되고 확실한 의미와 그것의 적용에 대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해 주어지는 견고한 설득 (Prov. 2:6; 2 Pet. 1:20; 1 Cor. 12:3; Luk. 24:45),
2) 진실한 믿음과 순전한 마음과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 (Augustine, De doctrina christiana III.xxxvii),
3) 하나님을 향한 명확한 회심, 진실한 경건, 여호와에 대한 경외와 인간에 대한 존중 (Psal. 25:14; Prov. 1:7),
4) 진리에 대한 사랑과 갈구 (Psal. 119:40, 47, 48),
5) 배움의 경향 (John 3:21, 33),
6) 하나님의 확증된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발성 (John 7:17),
7) 신앙과 선행에 대한 교리문답 수준의 교리적 지식 (Heb. 5: 12-14),
8) 성경 언어들에 대한 숙지 (1 Cor. 14:5),
9) 성경이 그 자체와 가장 조화롭고 아름답게 일치하고 있음에 대한 확신 (Augustine, epistola ad Hieronymum).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타인의 약점을 공격하는 성향의 소유자를 때때로 만난다. 이는 타인의 정서적 희생과 불안감 유발을 담보로 자신의 정서적 불안을 해소하고 빈곤을 채우려는 고약한 버릇의 일환이라 여겨진다. 타인의 약점을 응시하게 되고 격하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의 정서적 빈곤과 불안의 반증이다.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고 불안을 제거해 주는 것이 언뜻 비약적인 처방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나는 최고의 건강한 해법이라 생각한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어떻게 반응하고 계신지를 살펴보라. 완전하고 안전하고 충만하신 분의 반응을 본받으라. 원수들에 대해서도 사랑과 기도와 축복으로 응수하는 그 천상적인 여유와 자태는 단순히 행동의 복사판이 아니라 그런 반응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본받지 않고서는 결코 그렇게 반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대하는 '유익'한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을 연습한다.

성경의 묵상에 요구되는 수단들

1) 성경의 지속적인 탐독과 탐색 (Augustine, De doctrina christiana, II.vii-viii);
2)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로 연구 (Hilary, Enarrationes in Psal. 118; Jerome, epistola ad Suniam);
3) 성경 전체의 목적이요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향한 영속적인 조준 (John 5:39, Acts 3:18, Rom. 10:4);
4)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해 분별의 안테나를 고정;
5) 올바른 순서와 적법한 방식으로 성경의 의미와 활용을 탐구 (Augustine, De verbis Domini, ii, xxiv; Hilary, De trinitate, iv, ix);
6) 표현에 대한 숙고 (Augustine, De doctrina christiana, II.x, III.v-vi, x);
7) 동일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평행구절 및 유사구절 비교 및 보다 명료한 구절과 애매한 구절의 비교 (Origen, Matt. 14; Augustine, De doctrina christiana, III.xx; idem., De unitate ecclesiae, v, xvi; Basil, Regul. Contract. 267);
8) 텍스트를 해명하기 위해 이질적인 다른 구절과의 대조 (Augustine, De verbis Domini, ii);
9) 성경을 활용하기 위해 새로운 신학적 언어들을 고안하는 것의 제한 (Deut. 4:2);
10) 텍스트의 해석이 사도신경 혹은 십계명과 같은 믿음의 유비 및 주된 교리들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인지를 부지런히 살핌 (Augustine, De civitate Dei, XV.vii);
11) 예언이 다른 예언에 의해 제어를 당하듯이 성경의 해석이 다른 해석들에 의해 제어를 받는 식의 분별에 대한 지속적인 연습 (1. Cor. 14: 29-33);
12) 문법과 수사학과 변증학과 물리학과 같은 일반교양 및 일반학문 전반에 대한 지식의 확충 (Augustine, De doctrina christiana, II.xxx-xxxi).

2013년 8월 17일 토요일

지식의 질

지식의 질은 지식이 기초하는 사실의 지속성 혹은 항존성이 관건이다. 일시적인 사실과 결부된 지식은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고 당연히 단명할 수밖에 없다. 참되고 유익한 지식은 영원한 것과 관계한다. 여호와 경외를 지식의 근본으로 본 지혜자의 높은 진단이 큰 감동으로 밀려오는 아침이다. 대체로 귀의 일시적인 입맛을 달래는 잡다한 일회용 지식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분류도 하고 정리도 해야겠다. 영원한 사실에 뿌리를 둔 지식의 분량을 확대해야 되겠다. 

사랑은 진리와 더불어~~~

사랑은 진리와 더불어 기뻐한다. 사랑은 진리와 분리되지 않고 늘 병행한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며 사랑의 분량은 진리의 지식과 비례한다. 아무리 달콤한 진리를 홍수처럼 쏟아내도 십자가의 사랑이 보이지 않으면 따르지 말 것이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사랑의 화신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진리와 더불어 있지 않으면 경계함이 합당하다. 그런데 쉽게 넘어간다. 세상이 사랑도 메마르고 진리에도 굶주렸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의 유사품만 등장해도 따르고 추앙한다. 사랑과 진리가 조화로운 사람의 출현이 갈급하다. 그런 사람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변별력을 제공한다. 그런 분들이 한 시대에 소수만 계셔도 바랄 게 없겠다. 물론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겠다.

2013년 8월 16일 금요일

관계성의 열쇠

인생의 현실적인 문제는 대부분 꼬인 관계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관계성의 문제는 어떤 목적을 두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어떤 욕망을 충족할 목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때로는 상대방에 대해 두려움이 생기고, 때로는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때로는 욕정의 침을 흘리고, 때로는 멸시의 뻣뻣한 고개를 들고, 때로는 간사한 목소리로 발화하고, 때로는 사곡한 언술을 쏟아내고, 때로는 비굴한 웃음을 남발하게 된다.

사람을 대하되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했던 고귀한 하나님의 피조물로 여기며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올바른 관계성 형성의 유일한 비결이며 꼬이고 일그러진 관계성을 반듯하게 정상으로 되돌리는 첩경이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고 기쁘고 설레이고 기대되고 즐겁게 되는 비책이 여기에 있다. 심판자와 사용자가 아니라 구원자 되신 주님처럼 생명으로 모든 사람들을 섬기려는 자세에 달인이 되시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신에게 최소한 하나라도 유익이 있어야 진리로 승인하고 선택하는 한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중생된 이후에도 이런 한계선 넘어로 걸음을 내딛는 일이 드물다. 현실에 대한 아첨과 진리를 현실에 구현하는 것 사이의 경계선이 늘 애매하다. 아무리 진실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생산한 진실은 참으로 연약하다. 아첨을 명분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주님께서 보시는 진실의 높은 기준에 적응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나의 진실은 과장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2013년 8월 14일 수요일

방문을 접는다.

세월의 심술인가? 행복한 시간은 화살처럼 보다 빠르게 지나간다. 상대성 이론은 복잡해도 이렇게 늘상 경험된다. 벌써 이륙의 시간이 코 앞이다. 고국에서 보낸 여러 일정들이 마지막 아침에 기억의 아쉬운 형체를 내민다. 기간은 짧았는데 여운은 오래 지속될 소중한 만남들이 많았다. 감사하다. 이제 곧 미국행 비행물체 속에 몸을 싣겠지만 마음은 늘 고국의 지표에 접지해 있을 듯하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개혁의 길이라~~~

오늘 한 선생님이 선물하신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를 읽었다. 조국의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의 내용을 일별한 것도 좋았고 그런 문제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경험한 것도 좋았다. 10여년의 기간동안 현장에 없어서 감지할 수 없었던 조국교회 문제의 실상에 대한 주옥 같은 관찰과 진단과 처방을 접하면서 의식의 공백이 채워지는 듯하였다. 특별히 '교단과 총회의 답답한 현실'에 대한 구교형 목사님의 '거침없는 하이킥'이 인상에 남는다. 

신앙의 본질

예수님은 따르는 무리들을 보시며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하셨다. 욥을 향한 사단의 참소도 핵심은 그가 까닭없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조건부 경외, 조건부 추종은 주께서 싫어하는 것이며 사단에겐 참소의 빙거겠다. 신앙의 본질에 더욱 다가가고 싶어진다. 

2013년 8월 12일 월요일

일상의 항구적인 기적

여독이 중했으나 벌써 해독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오늘은 글자도 눈에 들어오고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우정을 다룬 글도 읽어진다. 안구도 초점을 회복했고 심신도 리듬을 되찾은 듯하다. 잠자리 한번 깊었다고 완상복귀 지점으로 이리도 쉬 돌아오니 일상이 기적으로 보이는 건 전혀 기이한 일이 아니겠다. 오늘도 하루종일 기적과 뒹굴었고 기적을 흡입했다. 항구적인 기적에 뭍혀서도 심장마비 조짐은 일천하니 주님의 사랑과 섭리가 마냥 신비롭고 은혜롭다.

신앙의 종점

사람들에 의해 승인되는 진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이 참된 경건인 것 같다. 후자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런데도 그런 것을 요구하고 계신 주님은 인생으로 하여금 얼마나 높은 가치에 이르도록 초청하는 것일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고 이끄시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욥기를 읽으면 이런 생각에 더더욱 강하게 휘감긴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상태도 아직은 신앙의 종점이 아니라니. 욥기의 결론에 눈길이 이끌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속성 앞에서 비로소 인간의 본질이 드러나니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지식 사이에는 서로 선순환적 참조의 고리가 있나보다.

2013년 8월 11일 일요일

욥의 재앙

욥이 당한 재난의 해법은 가까운 원인들을 제거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즉 스바 사람들을 박멸하고 갈대아 사람들의 진영을 불사르고 기상청의 일기예측 정확도를 높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고 욥의 이야기은 그것에 초점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우리의 인간적인 눈에 걸리는 가시적인 원인의 배후로 소급하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지 않고 하나님이 세상을 경영하는 섭리에 정통하지 않는다면 해석학적 헛다리를 짚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돌팔이 수준의 처방만을 '노련'하게 남발하고 말 것이다.

욥의 재난은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매머드급 경쟁과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의 신적 전쟁의 희생물 스토리가 아니다. 사건의 주도권이 주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욥기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접근해야 제대로 해석된다. 욥기는 1) 하나님의 속성과 2)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3) 여호와 경외의 진정한 의미와 4) 우리의 궁극적인 복 개념과 5)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다. '1장에서 욥이 누리던 복인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진정한 복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복의 수단 혹은 서곡일 수 있다.

42장의 복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교훈이 욥 이야기에 담겨 있다. 욥에게 일어난 재앙은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복제거의 결과이다. 그런 고난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