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30일 토요일

종교적 마조히즘?

하나님을 모르는 분들의 기독교 거부감과 비판과 조롱을 이따금씩 경험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그런 분들에게 당연한 현상이다. 다 우리 교회의 잘못이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너무도 소중한 경건의 자산이다. 그래서 환영의 쌍수를 들고 갑절의 욕 얻어 먹을 생각이다. 종교적 마조히즘 같지만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맞장구다.

2016년 4월 29일 금요일

중간고사 채점완료

중간고사 채점을 끝마쳤다. 250여권의 노트를 읽으면서 기독교에 대한 호감과 회심의 글들도 많이 보았지만, 기독교에 대한 거절과 비방과 조롱의 말들도 적잖게 경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은 아팠지만 보약을 먹은 것처럼 든든하다. 한 종교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고 식견을 넓히고 세상을 조금 더 알아가는 배움으로 여겨도 될 일인데 뾰족한 반감을 가진 학생들이 많다는 사실에서 기독교는 정말 진리라는 확신이 차오른다. 이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는 말씀의 실재이다.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의 기적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외모로는 전혀 가늠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그렇게도 열심히 밝은 표정으로 듣는 학생에게 기독교에 대한 호감의 글귀를 기대하고 노트를 펼쳤는데 강력한 반감과 마주하게 되고, 수업에 지질히도 나쁜 태도를 보인 학생에 대해서는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기대하고 노트를 보면 예상 밖의 열린 마음과 수용성을 확인하게 되어서다. 이번에 노트를 채점하며 가장 힘든 주간을 보냈지만 가장 압축적인 교훈과 깨달음이 수혈되는 기회여서 참으로 감사하다.

2016년 4월 25일 월요일

교수직의 기쁨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반학기를 가르쳤고 학생들의 노트를 수거했다. 읽으면서 200여명의 학생들의 노트가 보여주는 나를 확인했다. 반성과 후회와 기쁨과 보람이 교차한다. 올바른 기독교를 소개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나와 학생들 사이에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의 엇각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믿어진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다" "예수님이 실제 인물로 믿어진다" "예수님께 잘해야 되겠다"는 고백들이 보석처럼 적잖은 수효의 노트에 박혀 있었다. 비신자 학생들의 입술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복음의 증거는 전달자의 어떠함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 말씀은 무엇에 의해서도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2016년 4월 18일 월요일

이것이 경건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라 (시86:12)

이것이 경건이다. 이 노래는 찬송을 드렸다는 행위보다 전심으로 드렸다는 방식을 강조한다.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린다는 행위보다 영원토록 돌린다는 상태를 강조한다. 우리의 경건을 점검해야 할 대목이다.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찬양을 드리면 우리는 쉽게 경건의 연습이 끝났고 믿음의 도리를 지켰다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어떻게"가 중요하고 "영원히"가 중요하다. 경건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며 과거와 완료가 아니라 늘 현재와 진행이다. 

2016년 4월 16일 토요일

자랑의 특이한 이유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갈 것임이라 (약1:9-10)

자랑의 내용이 특이하다. 낮은 형제의 높음, 부한 자의 낮아짐.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자랑의 이유와는 무관한 것들이다. 그런데 왜 자랑인가? 인간문맥 안에서 관찰되는 낮음과 부함 현상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낮음도 지나가고 부함도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들은 그냥 지나가게 하라. 지나가지 않는 것들에 집중하라. 낮은 상태에서 인간의 지극히 높은 존엄성을 보존하고 부함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낮음을 아는 것은 충분한 자랑의 빙거이다. 이는 삶의 변동적인 정황이 나를 어찌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땅에서 설정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되고 규범화된 질서가 하나님 앞에서의 고유한 불변의 존엄성과 가치를 흔들거나 앞서지 못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세상의 평가에 우리의 희로애락 일체를 내밭기는 순간 세상의 기준에 서서히 결박된다. 교묘하다.  이는 삶이 우리를 배신한다 할지라도 불평하지 말고 우리가 사람들의 존대를 받더라도 우쭐대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높아지든 낮아지든 빈궁하든 부유하든 늘 하늘의 하나님께 반응하는 자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2016년 4월 10일 일요일

기도란 무엇인가 출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은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서 기도와 말씀에 전무했다. 그동안 2권의 묵상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출판사에 원고가 넘겨진 것은 묵상보다 기도에 관한 것이 먼저였다. 이후로 2년의 기간이 지나서야 단행본의 면모를 비로소 갖추었다. 기도와 말씀은 우열이나 전후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통합과 조화와 균형의 파트너다. 동등하고 동시적인 경건의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오늘 출간된 기도서와 드디어 조우했다. 여전히 부족함이 보이는 책이지만 기도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의 소략한 시도로는 만족한다. 부분적인 지식에서 비롯된 기도의 오해와 왜곡과 편협을 극복하는 도구로 사용되길 진심으로 소원한다. 

2016년 4월 6일 수요일

교만하지 말자

많이 알면 교만해질 수 있다.
책을 많이 저술해도 교만해질 수 있다.
논문을 많이 써도 교만해질 수 있다.
돈이 많아도 교만해질 수 있다.
기도가 많아도 교만해질 수 있다.
권한이 많아도 교만해질 수 있다.
연줄이 많아도 교만해질 수 있다.
예쁘고 잘생겨도 교만해질 수 있다.
재능이 많아도 교만해질 수 있다.
달변과 달필도 교만의 원흉일 수 있다.

교만하지 않으려면
이 모든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범사에 인정해야 한다.

2016년 4월 4일 월요일

아침 부서미팅 설교

"나를 정결케 하는 속죄제"(레4:1-21)

1.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하나님의 계명에는 차별이 모두 중요하다. 모든 계명의 주어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계명의 종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계명을 범한 자들의 신분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대목이다. 제사장과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법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2. "제사장...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이스라엘 온 회중...수송아지를 속죄제로...": 제사장과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죄했을 때에 바치는 속죄제의 제물이 동일하다. 제사장은 성전을 섬기는 자들이다. 이스라엘 회중의 영혼을 관리한다. 소위 영적 지도자다. 그들의 타락은 이스라엘 전체의 타락과 맞먹는다. 그만큼 섬김의 내용이 중하고 섬김의 대상이 중다한 자에게는 책임의 무게도 거기에 비례한다.

3.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양태들 중에 지각 밖에서 벌어지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랐다"는 것이 계명의 위반을 무마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는 무지나 망각으로 핑계하지 못한다. 알든 모르든 의식하지 의식하지 못하든 죄는 죄다. 그래서 경건한 다윗은 "숨은 허물"까지 깨닫게 해 달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