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1일 금요일

잠언 31장을 읽는다

왕은 인생 중에서 삶의 의미가 무엇임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주께서 금하신 두 가지는 여자에게 힘쓰지 말라는 것과 왕들의 멸망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 땅에서 취하는 가장 큰 복이 있다면 여인을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로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궁극적인 복과 의미는 괜찮은 배우자 물색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왕의 영광은 백성의 중다함에 있다. 그러나 인생의 궁극적인 영광은 그런 영토를 넓히고자 정복의 칼을 뽑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공의를 세우고 자비를 베풀라고 진언한다. 진정으로 현숙한 아내란 공의와 자비의 열매를 가정에서 수확할 수 있도록 돕는 베필(에제르)임을 강조하며, 남편과 아내의 참모습은 무엇이며 합력하여 이루어야 할 선이 무엇임을 보이는 방향으로 붓길을 이어간다. 공의와 자비는 모든 권력자의 자격과 표지여야 한다.

최고 권력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들은 어떤 마음과 포부를 품고 있어야 하는가? 대선이 임박한 시점에서 후보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에 기준으로 삼아야 할 대통령의 자격과 지향점은 공의와 자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제적인 상황이나 한국의 실정이나 국정 경험의 유무를 판단의 배경으로 삼아 후보자를 골라서는 안될 일이다. 

막대한 정보의 우선적인 취득과 광범위한 인사권을 휘두를 수 있는 무소불위 권력이 손아귀에 들어와도, 그것을 자신의 이권과 측근들의 배 불리는 수단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공의와 자비의 향기만 진동하게 하는 수종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을 진실한 사람이 누구인가? 난 누가 그런 사람인지 궁금하다. 내 표는 그의 것이다.

2012년 8월 30일 목요일

아굴의 잠언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은 우리에게 영속적인 화두를 던진다.

이는 하늘과 바람과 물과 땅의 기묘한 지식에 도전하는 최첨단 과학과 지성이 간과한 부분을 수천년 전부터 꼬집은 사안이다. 즉 하늘을 출입하는 자가 누구며, 바람을 장중에 모으는 자가 누구며, 물에 옷을 입히는 자가 누구며, 땅의 끝을 정한 자가 누구며 그 이름이 뭐냐는 것이다.

창조의 모든 것들이 창조자의 계시라는 사상을 가졌다면 당연히 그리고 마땅히 던져야 할 물음이다. 이런 의식의 바탕을 점거한 후, 아굴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는 경고와 더불어 크고 작은 자연 현상들을 증인으로 소환하며 각자에게 부여된 저자의 의도 풀어내는 일에 열중한다. 증언을 듣고 있노라면, 주님은 반역한 죄인들이 혹 더듬어 찾으실 수 있도록 언제나 너무도 가까운 은혜와 긍휼의 거리를 유지하신 것에 감사가 복받친다.

난 잠언 30장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2012년 8월 24일 금요일

홍천 이모님댁 방문

이모님댁 방문차 홍천으로 떴다. 강원도의 정직한 기운을 그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라 자부한다. 정말 상쾌/통쾌/유쾌 그 자체였다. 오대산 아래로 흐르는 냇물에는 문명의 찌끼라곤 찾아볼 수 없도록 맑았다. 반양장 차림에도 불구하고 황급한 변신 후 아그들과 곧장 투신했다. 해발 800미터 개울의 고도에 어울리는 냉기가 살을 에이는 듯하였다. 허나 나도 아이들도 나올 맘 엄써따. 시골의 전형적인 밥상과의 재회도 오랜 여운이 예상된다.

돌아오는 길은 금요일 저녁의 서울교통 혼잡으로 후회가 막급하다. 

2012년 8월 23일 목요일

김영민의 [공부론]

구로구립 도서관에 갔었다. 김영민의 [공부론(2010)]이 눈길을 끌었다. 그의 박학과 달필은 여전하다. 일상과 철학의 화합, 앎과 삶의 통합을 추구하던 열정도 그대로다. 읽으면서, 그가 책의 해득을 위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정신의 비용 지불에 인색한 작금의 지식계에 토하는 불평에 완전 공감한다. 난 책의 백미를 김영민이 주장하고 몰입하고 있는 '일상과 공부의 합일'에서 찾았다. 독자마다 다르겠지. 

인문학적 소양의 부재 혹은 결핍은 신학의 도상을 질주하는 학도들의 지적 목덜미를 잡고 있다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친구들을 통해 듣는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은 김영민의 인문학 [공부론] 일독으로 어느 정도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 일독 강추!

신원하 교수님의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신원하 교수님의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는 신학교 교재로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잘 쓰여진 책이다. 오래동안 쌓인 윤리 신학자의 원숙한 내공이 골고루 배어있다. 내용도 깊고 좋지만 시대를 넘나들며 학자들과 대화하는 저자의 '화술'이 대단히 돋보인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 개인의 영적상태 진단은 물론 가정과 사회가 신음하고 있는 문제와 상처 및 이에 대한 처방까지 제공하는 알짜배기 저작이다. 게다가 단백한 문체에 더하여 두께가 얇아서도 좋다. 강추!

2012년 8월 20일 월요일

니체 [선악의 저편]을 읽고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무진장 잼나게 읽었다. 때때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생각의 소유자와 대면할 필요가 있다. 니체가 대단히 그런 인물이다. 정말 솔직하고 대담하고 거칠며 잘난척이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하나님 '죽은' 인생의 실상을 글로 고스란히 배설한 인물이 바로 니체라고 생각된다.

그의 [선악의 저편]은 선악의 개념보다 더 '본질적인' 인간의 본성 '저편'을 과격한 언사로 묘사하되 시어의 음율을 가미한 책이다. 그는 '모든 생명을 위한 더 높고 근본적인 가치는 가상에, 기만에의 의지에, 이기심에, 욕망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미화의 가장 강력한 수단'인 경건을 비롯하여 '인간은 얼마나 기묘한 단순화와 위조 속에서 살고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 모든 가상들을 제거하면 인간의 고귀한 영혼이 나오는데 그것은 '힘에의 강하고 이기적인 의지'란다.

그리고 강하고 독립되고 특이하고 지배적인 그 고귀한 영혼을 소유해야 할 '유럽 종족의 열등화'를 초래한 주범으로 기독교를 지목한다. '강한 사람을 부서지게 만들고 커다란 욕망을 병들게 하고 아름다운 행복에 의문을 품게 하고 모든 자기 주권적인 것, 남성적인 것, 정복적인 것, 지배에 대한 갈망, 최고로 성공한 유형이라 할 인간의 모든 고유한 본능을 불활실성, 양심의 궁핍, 자기 파괴로 꺽이게 하는 것, 지상적인 것에 대한 지배욕을 지상적인 것에 대한 증오로 역전시킨' 원흉이 바로 교회라고 주장한다.

'신 앞에서의 평등'이란 사상적 탈선이 유럽의 운명을 지배해 왔다는 사실을 개탄하며, 니체는 '인간의 새로운 위대함'을 찾아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새로운 미답의 길'을 떠나잔다. 위대함의 개념은 '고귀한 것, 독자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의지, 달리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 홀로 선다는 독립성, 자신의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자율성' 등이라고 역설한다. 하여 '천박한 평등'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사상적 굴레 속에 있는 유럽 문명에서 가능한 한 '가장 고독한 자, 가장 은폐된 자, 가장 격리된 자, 선악의 저편에 있는 인간, 자신의 덕의 주인, 의지로 충만한 자가 가장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은 너무도 탁월하고 잘난 인간이란 민망한 소리를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뻔뻔하게 쏟아낸다.

그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시급하고 궁극적인 과제는 '자연적 인간(homo natura)이라는 저 영원한 근본 텍스트 위에 서툴게 써넣고 그려놓은 공허하고 몽상적인 많은 해석과 부차적인 의미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여성이 새로운 권리를 자기 것으로 취하고 '주인'이 되고자 하고 '여성의 진보를 자신들의 깃발에 적고 있는 동안 놀라울 만큼 명확하게 반대의 일' 즉 여성의 퇴보가 진행되는 셈이라고 주장한다.

이것 외에도 [선악의 저편]에는 다양한 분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편한 언술들로 충만하다. 너무 좋아하는 책을 보며 유사한 생각과 주장만 접하다 보면 세상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습성에 빠진다. 성경도 그렇게만 본다. 하여 이따금씩 귀에 거슬리는 험하고 거친 목소리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난 후에 성경을 읽으면 예전에 보이지 않던 진리의 뽀얀 속살이 시야에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다.

이런 차원에서 니체의 [선악의 저편] 일독을 권한다. 게다가 김정현의 니체 번역은 탁월하다. 원문과 대조해 보지는 않았지만, 언어선택 감각이 뛰어난 분이라 글맛이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할 정도니까.

2012년 8월 18일 토요일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의미를 오해한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제사보다 자비를 원한다는 기호를 밝히시되 그 이유로서 자신이 성전보다 크심을 알리셨다. '제사'는 신전에 겨우 어울리는 정도로 신의 진노나 달래고 그의 권력을 대출하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고 거룩하며 그 앞에서 선 나 자신은 얼마나 부패하고 악한지를 확인하고 시인하는 인식과 고백의 행위이다.

그토록 부패한 우리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 자체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인 것이다. 지혜의 총화라 할 하나님과 자신을 아는 이러한 인식 이후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뜻은 당연히 자비다. 예수님이 제사보다 자비를 원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종교적 의식보다 그 의식의 저변에 흐르는 의미와 목적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 맥락에서 안식일의 의미도 찾아야 된다는 거다.

성경을 우리에게 있는 인간의 조금 고급한 가치나 규범이나 도덕의 빛으로 조명할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해석의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이 고안한 어떠한 조명도 규례와 율례와 법도와 계명의 보다 중요한 것으로서 의로움과 인애와 신뢰의 비밀을 벗기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의 열쇠를 피조물 안에서 찾도록 계시되지 않았다. 계시가 되었어도 그 뜻의 비밀은 여전히 하나님께 속하도록 계시된 것이다. 탁월한 해석가에 의해 그 소유권이 이전될 수 없어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도록 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어두움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 자신의 조명이 요구된다. 교회의 긴 역사는 이러한 최고의 빛 없이 인간의 기준으로 걸러지는 내용을 성경의 뜻으로 간주한 오석의 얼룩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신실한 교부들과 중세 학자들과 종교개혁 인물들이 채택한 극복의 대안은 '성경이 성경을 스스로 해석하게 하는 것(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이었다. 

2012년 8월 17일 금요일

여호와를 인정하라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창세기를 시작으로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주체요 주어라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한 말씀도 제대로 해석되지 않듯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펼쳐지는 사태들도 하나님이 창조자요 주관자란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가난한 분들을 조롱하는 행위는 그들의 불성실과 불운이 결코 그 행위의 정당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례하고 불경하다. 이는 그 행위가 가난한 분들을 지으셨고 다스리고 계신 주를 멸시하는 일이니까.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것도 인간 문맥에 근거를 둔 사악한 처신이다. 이는 재앙의 배후에 계신 의로우신 하나님의 존재와 주권을 무시하는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니까.

가난한 분들을 보면 그를 지으신 하나님 때문에 불쌍히 여기고 긍휼과 도움의 손길을 뻗어야 함이 마땅하고, 재앙으로 신음하는 분들을 보면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그를 경외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재앙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위로하고 권고함이 합당하다.

이렇게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함이 마땅하다.

2012년 8월 16일 목요일

죄악에서 떠나는 비법

거듭난 우리가 당면한 싸움은 죄와의 싸움이다. 죄악을 피하고자 의지의 이빨도 깨물고 지성과 감성의 허벅지도 꼬집는다. 사람마다 약점이 다르고 그 약점으로 인한 유혹에 대처하는 방법도 다를 것이지만 원리는 동일하다.

그것은 지혜자가 제안한 죄악해결 비법에 집약되어 있다.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 경외함을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죄악이 속하였다. 주님께로 갈 때까지 우리에게 부과된 숙제는 악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건 우리에게 있는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경외함"을 통해서다.

죄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 전인격의 진정성을 요구한다. 하여 죄해결은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일평생 우리를 괴롭히는 죄는 결국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인생의 등을 떠미는 방편이 아닌가도 생각하게 된다. 뭐 그렇다고 죄와 친하게 지내자는 건 아니구...ㅎㅎㅎ

2012년 8월 15일 수요일

사랑의 완성

사랑의 완성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에 있다. '그대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도둑들도 하는 그런 사랑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원수였을 그때에 우리를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원수된 자들을 사랑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요한서간 강해]에 등장하는 어거스틴 생각의 한 조각이다. 말씀에 근거한...

어거스틴의 [요한서신 강해]

어거스틴의 [요한서간 강해] 일독을 강추한다. 강해가 하나의 주제 '사랑'을 다루되 잘 기획된 한 권의 단행본 느낌을 선사해 특이하다. 독자는 읽는 내내 오늘날의 강해 방식과는 사뭇 다른 어거스틴 특유의 어법에 매료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본문의 문법과 시대적 상황에 무지하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벗기는 전문성 발휘로 학자연하지 않는다. 강해자의 의식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그의 강해는 하나님의 관점에 이끌림을 받는 듯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강추의 이유는 본서의 내용이 독자로 하여금 신적인 사랑의 웅덩이에 깊이 침수되게 만든다는 거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의 매듭이 절묘하게 풀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다만, 어거스틴 같은 교부의 강해 전체가 제공하는 메시지의 통일성을 맛보면 지금 간행되고 있는 교부들의 주석 조각들을 편집하여 엮어낸 교부주석 시리즈의 한계가 감지 되면서 밀려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건 감수해야 한다.

2012년 8월 12일 일요일

책의 우주

세기의 책벌레, 움베르토 에코와 장클로드 카리에르 사이에 오고간 대담집, [책의 우주]을 잼나게 읽었다. 책에 대한 무수히 많은 스토리가 담겨 있다. 읽는 내내 두 책벌레의 박학 키재기에 입이 벌어진다. 무진장 다양하고 재밋는 '책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의 관심 끌기에 충분하다.

2012년 8월 11일 토요일

성경읽기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땅의 이치를 따라서는 납득되지 않는 산법이다. 당연히 면벽수행 결과로 얻어질 득도의 대상도 아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풀어지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다.

성경은 이런 방식의 표상들로 충만하다. 하나님의 존재와 공의와 사랑의 통치를 전제하지 않으면 도무지 그 말끼를 알아들을 수 없는 비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글과 기록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말씀이라 하였고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을 전제하게 만든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 안에 하나님이 은연중에 전제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감추시되 내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 다가가게 된다.

물론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분명히 자라간다. 많은 정보와 혜안을 얻는다. 그러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보다 중요하고 궁극적인 이유와 결과적인 열매는 믿음의 조상에게 말씀하신 약속대로 하나님 자신이 나에게 두려움을 소멸할 방패요 나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꿀 이상의 달콤함을 제공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성경을 펼치지만 때때로 깊은 깨달음을 건지지 못할 때에라도 묘한 표만감에 잠기나 보다.

2012년 8월 10일 금요일

지식의 분량

경험되지 않은 것은 이성의 동의가 있었어도 아직 진정한 지식이 아닌 경우가 많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란 말씀은 전인격적 경험을 요구한다. 길이와 높이와 깊이와 넓이라는 차원을 고려할 때, 지식이라 간주할 적정선 아래에 있는 앎이란 안다고 하면서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가식적인 앎'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필요가 있다. 이성의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스스로 속고 속이는 앎의 수준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이 되는 차원까지 말이다. 자신과 타인은 모두 속았어도 유일하게 하나님만 속이지 못하는 은밀한 거짓이 마태복음 7장의 사례이다. 물론 구원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증언하는 대목이다.

지식의 '분량'이나 '정도'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시냇물을 찾는 사슴의 갈급함은 요원할 수밖에 없겠다. 복음을 듣고 믿었는데 그거면 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송이꿀 그 이상의 달콤함에 이끌려 일평생 그것만 추구하다 생을 마감하는 그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고자 하지 않는 인생은 뭔가 중병에 걸려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은 이런 맥락에서 내 삶의 건강도를 진단해 본다.

에코의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움베루트 에코는 브랜드명 '미네르바' 성냥갑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그것을 정리하여 칼럼을 연재하곤 했는데 그것을 모아 출판한 책이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이다. 에코의 당일치기 글모음집 되겠다.

에코가 소개하는 '글을 잘 쓰는 37가지 방법'에서 잼나는 것은 '인용을 줄여라'고 하면서 '나는 인용을 증오한다. 단지 네가 아는 것만 말해라'는 에머슨의 글을 인용한 대목이다. '왜?'라는 칼럼은 '왜 성 바울로는 결혼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많은 여행 중에 만약 아내에게도 편지를 써야 했다면, 그만큼 [신약성서] 규모가 줄어 들었을 테니까' 류의 질문과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꼽을 잡게 한다. '우아하게 상스러운 말을 하는 방법'도 잼나는 표현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소장가치 없다. 기냥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후루룩 훓어보고 에코의 하루치 글쓰기의 가벼운 재치를 경험하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인터넷 관련글은 생략해도 좋겠다...영 후져서~~~ ㅡ.ㅡ

하나님의 예정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해 있다지만 정작 인간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진단이다. 이것을 잘 아는 다윗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없단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유일하게 알고 알게 하실 하나님께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인간의 부패성은 그 규모가 측량되지 않아서다.

욥은 세 친구들의 신학적 능변을 능가하는 구약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 로마서에 버금가는 진리의 규모를 세웠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요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는 자'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택함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 그런 지각에서 근원적인 자기부인이 가능했다.

우리는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적 상태의 심각성에 대해 무지한 그 만큼 그토록 심각한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 빛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은혜에도 무지한 거다. 이런 맥락에서 난 하나님의 예정을 생각한다. 진노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영생을 누리게 된 근원을 소급하면 땅에서 펼쳐지는 가까운 원인 그 너머의 차원이 있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신 뜻을 따라 정하심. 바울은 그것이 선악을 알거나 행하기도 전에, 그리고 창세 이전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피조물과 시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변경할 수 없는 불변의 신적 작정하심 되겠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우리의 마음이 구원의 여부를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이 지극히 높고 의로우신 판단력을 따라 우리를 택하신 것보다 더 크고 확실한 은혜가 없다. 피조물이 그 본성에 따른 자율성에 어떠한 강압이나 위협 없이도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그런 하나님의 정하심은 우리에게 가장 견고한 확신의 근거이며 가장 깊은 겸손의 샘이면서 가장 은밀한 은혜의 내용이다. 구원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우리 마음의 판단에 좌우되는 것이라면...아,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오싹한 일이다. 

비록 우리에게 택자와 유기자의 분별이 맡겨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이 작정과 예정의 신적인 신비를 적당한 분량만큼 노출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음부의 권세가 흔들 수 없는 확신에 거하게 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합당한 경외심을 갖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깨닫게 하사 필경 일평생 감사의 행로에서 이탈하게 않게 하시려는 성경 저자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믿는다.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신적인 인과율인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이 눈에 관찰되는 가까운 인과율을 따라 사물과 사태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인간의 안력이 결코 미치지 못할 신비라는 거 모르는 바 아니다.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이 친히 가려두신 영역,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신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알려질 수 있을 정도로만 적당히 노출하고 있다. 

당연히 신비라 할지라도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 않은 이상 묵과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인간의 호기심을 따라 성경이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도록 가려둔 영역을 함부로 범하는 것도 금물이다. 호기심에 이끌려 선을 넘어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미로에 빠진다는 칼빈의 경고는 빈말이 아닌 것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비록 이성의 빛으로도 볼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며 택자와 유기자 구별은 이성의 빛으로는 조명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에게 맡겨진 심판과 정죄의 무기도 아니다. 나는 확신과 겸손과 감사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정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일에 어떠한 주저함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