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31일 목요일

존재가 선행된 추구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마7:6)

성경에서 개는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되며, 들짐승에 찢겨 죽은 동물을 먹고 토한 것을 다시 삼키며 죽은 사람의 피를 핥는 동물이다. 이를 테면 나봇과 아합의 피를 핥았고 이세벨의 시체를 삼켰으며 사도 요한은 마술사, 음란한 자, 살인자, 우상숭배 및 거짓말을 하는 자들을 개들이라 칭하였다.

거룩한 것은 개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진주가 그 값어치를 모르는 돼지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돼지에게 가치의 기준은 자신의 위장이다. 고귀한 것은 고귀함을 알고 존중하는 자에게 주어짐이 합당하다. 그렇지 않으면 진주는 아무리 고귀해도 주어진 자에게 불편하고 불평의 원인이 되고 그 자체도 멸시되고 짓밟힌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이후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하셨다는 게 중요하다. 하나님은 결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시지 않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어떻게 두드리고 찾고 구하라는 말씀인가? 거룩한 것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하고 진주의 값어치를 알고 존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존재론적 접근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깨끗함을 깨끗한 자에게 보이시고 거룩함을 거룩한 자에게 보이시고 의로움을 의로운 자에게 보이신다. 하나님은 증오심이 가득한 자에게 긍휼을 맡기지 않으시고, 시기심이 가득한 자에게 공감의 비밀을 맡기지 않으시며, 거짓된 자에게 정직을 맡기지 않으시고, 포악한 자에게 자비를 맡기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는 먼저 구하는 것에 합당한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 요청된다. 예수님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팔복의 내용을 주시해 보면 복된 자의 됨됨이가 어떠하기 때문에 그가 복되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개나 돼지는 존재의 변화가 없이는 본질상 어떠한 가치나 의미도 누리지를 못한다.

여호와의 눈은 지금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향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온 땅과 만민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까지 주실지도 모른다. 아들도 아끼지 않고 죽음에 내어주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고자 하신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자가 복되다. 심령이 가난하여 자신을 다 비우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분, 자신의 죄도 아닌데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온 인류의 비참을 애통해 하신 그분, 의를 위하여 억울한 핍박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묵묵히 받으신 그분, 자신의 생명으로 원수조차 화목하게 하신 그분과 같은 자 말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온 세상과 만민을 섬기는 게 가능하다. 개의 더러움과 돼지의 무지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서 더럽게 변질되어 개가 핥고 진주보다 더 고귀한 하나님의 이름이 돼지의 발굽에 짓밟히는 일들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존재의 거듭남에 준하는 개혁이 필요한 듯하다. 중생의 씻음과 진리의 지식!

2014년 7월 29일 화요일

미움의 이유가 중요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15:14)

예수님의 논지에 의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워한다.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주님의 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주님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시었고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라고 밝히셨다.

과연 사람들은 지금 교회를 미워한다. 극도로 혐오하고 멸시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미움의 이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과 너무도 달라서다. 교회의 탐욕과 결탁과 타협과 거짓과 음행과 횡령과 독재와 횡포 때문이다. 교회가 캄캄한 세상에 빛이 아니라 더 짙은 어두움을 드리우고 썩어가는 세상에 소금이 아니라 부패의 촉매처럼 보여서다.

미움에도 격조라는 게 있다. 미움을 받는다고 무조건 '핍박'이나 '순교'라는 고품격 단어를 소환하는 것은 갑절이나 부끄러운 해석이다. 여기에 "할례 받지 않은 이 블레셋 사람이 누구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에 모독의 질퍽한 침을 튀기냐며 의분을 토했던 다윗의 언사로 목에 핏대를 올리는 것도 민망한 대처이다.

오늘날 교회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은 예수님이 앞서 언급한 내용, 즉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고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는 말씀의 실현으로 이해함이 보다 합당해 보인다. 교회가 핍박을 받는다고 것이 무조건 교회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교회가 오히려 세상보다 더 세상적일 수도 있어서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도 그러하다. 혹 핍박과 억울함을 당한다면 그런 현상보다 현상의 이면에 있는 이유를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교회가 사나 죽으나 주님이 이유이면, 사랑을 받든지 미움을 받든지 주님이 이유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2014년 7월 28일 월요일

진리를 찾아서

인생은 진리가 표출되는 계기들로 충만하다. 슬플 때에도, 기쁠 때에도, 외로울 때에도, 억울할 때에도, 이별할 때에도, 사랑할 때에도, 놀랄 때에도, 감동할 때에도, 아플 때에도, 바쁠 때에도, 나른할 때에도, 서러울 때에도, 한가할 때에도, 끔찍할 때에도 진리의 조각은 언제든지 표출된다. 다만 포착은 각자의 몫이겠다.

삶의 무수한 순간들이 다양한 각도로 최소한 진리의 한 부분은 조명한다. 진리가 포착되지 않은 순간보다 더 허무하고 무의미한 경우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진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최고로 황활한 순간도 곧장 허무로 돌변한다. 이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 전도자의 탄식과도 상통한다.

진리가 늘 목마르다.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순간마다 모든 사건과 사태와 사물을 접하면서 갈증의 촉수는 늘 진리를 더듬고 싶어진다. 진리와 접지하는 순간 영혼에 자유가 번진다. 진리는 과연 우리를 자유케 하는 능력이다. 수갑이나 족쇄만이 아니라 영혼의 결박까지 제거한다. 주님은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자유의 손을 뻗으시나 보다.

하루를 살아가며 매 순간마다 진리와의 만남이 없다면 겉으로는 자유하나 속으로는 무언가에 얽매여서 갇힌 자로 살아간다. 그러나 사도가 명시한 것처럼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 부르심에 방향이 있다. 부르심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이미 설정된 목적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상식이다.

자유는 우리의 학구적인 땀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면벽수행 결과물로 혹은 무소유의 보상으로 여기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그런 고행이나 수도로 자유에 대한 말초신경 수준의 표피적인 개념은 경험할 수 있겠으나 자유의 본질은 경험하지 못한다. 오히려 위험하다. 자유에 대한 어설픈 경험이 참자유에 대한 갈증마저 훼손하기 때문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는 사도의 증언에서 자유가 주님 의존적인 것임을 확인한다. 주님과 독립된 자유는 없으며 그런 자유의 누림도 없다. 이는 아들이 자유하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유하지 못해서다. 진리는 진리의 영에 의해서만 경험한다.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 진리의 영이신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선물이 자유이다.

숨통이 콱콱 막히는 부자유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몸부림의 역사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당연한 현상이다. 썩어짐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고자 내뱉는 신음이 천지를 진동한다. 그 슬픈 음파의 강도가 고조되는 느낌이다. 교회가 진리의 부르심에 합당하지 않으면 절망은 필연이다.

그래서 오늘도 모든 희로애락 속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조명된 진리의 한 조각을 찾기 위해 하루치의 모든 에너지와 지력과 관심과 초점을 투입하려 한다. 오늘따라 경찰차의 싸이렌 소리가 사태의 긴박성을 더욱 부추긴다. 진리를 찾아서...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신음하는 피조물의 웃음을 찾아서...하루하루 매 순간마다...마지막 호흡이 다하는 때까지...

기독교적 삶의 원리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전5:15)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상식이고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교회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기독교는 이러한 인생관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기독교의 향기는 악취로 변하고 빛은 어둠으로 대체되고 소금의 맛도 상실하여 버림의 길바닥에 나딩구는 돌맹이 신세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의 의미와 우리 편에서의 함의를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우리 편에서는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이 우리에게 최고의 복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면 자신을 위하는 삶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그러나 주님에 대하여는 살고자 하면 살고 죽고자 하면 죽는다. 이는 그렇게 살아도 그만 안살아도 그만인 개념이 아니다. 그렇게 살면 복이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불행이다. 기독교적 인생관이 이렇다. 그런데 이러한 삶과 죽음의 원리가 모든 사람에게 최고의 복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아니된다. 모든 사람에게 복이 아니라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양심에도 저촉되는 일이겠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사는 삶은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가장 영광스런 유형이다. 손해보는 것도 아니고, 억울해 할 필요도 없다. 이는 그리스도 위하는 삶이 우리에게 최고의 은총이요 복이기 때문이다. 그런 삶으로 초청을 받았다는 것이 여전히 껄끄러운 사람들은 소돔의 관능적인 삶과 애굽의 어설픈 풍요에 아직도 미련을 두는 자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보이는 안목과 싸우셔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다는 것은 그분처럼 산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살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삶이 나의 삶에서 향기로 풍기고 빛으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삶으로 주님을 보여주는 증인이 교회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안식처를 찾아 교회에 출입하는 자들을 등치고 등의 가죽까지 벗겨 먹으려고 혈안이 된 모습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교회에 유익을 끼칠만한 자에게만 끈적한 미소를 보내지는 않는지를 말이다.

교회는 교회를 위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고 세상을 위하여야 한다. 그런 삶의 방향이 포기된 교회의 미래는 암담하다. 불행을 자초한다.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든 자신을 위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는 게 최고의 영광이요 복이라는 기독교적 삶의 역설적인 원리를 포기하면 포기하는 만큼 불행이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역설하고 있는 원리라고 생각한다. 나를 위한 나와 교회를 위한 교회는 필히 불행으로 곤두박질 친다. 그게 원리니까 그렇다.

2014년 7월 27일 일요일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는 자로다 (시33:15)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행사를 보시되 그 모든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중추적인 기관에 해당되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 분으로서 보신다는 이야기다. 하나님은 나타난 행위의 표피를 눈으로 더듬는 방식이 아니라 마음의 본질과 생리를 친히 조성하신 조성자의 눈으로 행위로 표출되기 이전의 마음 일반을 지으신 자로서 행위자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출처는 사람의 육안으로 관찰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마음을 지으신 분의 눈에는 한 치의 가감도 없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난다.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며 산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사람들의 둔한 눈길을 피하면서 은밀하게 연출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 앞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거짓과 속임수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필히 빚어지는 죄악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데도 정직이 도모되는 경우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지으신 분이라는 사실이 두려운 아침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누구도 핑계할 수 없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모두가 오해하고 배척해도 하나님이 유일한 증인으로 계시다는 위로와 안식의 근거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기쁨과 영광이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공포와 비참이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근거이고 멸망하는 자에게는 진노의 근거이다.

2014년 7월 23일 수요일

주어이신 그리스도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요4:10)

신앙과 신학은 성경의 주어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고 끝맺는다. 이 물음을 놓치면 신앙은 흔들리고 신학은 무너진다. 사탄이 줄기차게 소환하는 세상의 온갖 선악과 시험은 이 물음에서 우리를 떼어놓는 목적을 지향한다. 최소한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인류의 첫 조상이 따막은 사건은 금지령의 주어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과 맞장을 뜬 범죄이다. 법조문의 위반이나 판단의 미숙이나 행위의 경박이나 좀도둑질 차원이 아니라 명령의 주어와 관계되어 있다.

구약의 일등급 신학자라 할 욥에게 쏟어진 하나님의 무수하고 까칠한 질문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이 누구냐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종국적인 반응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냐는 자기 정체성에 관해 자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말씀이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 자신이신 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관심사도 '너희는 나를 누구냐'에 있으셨다.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가 묻고 듣고자 하신 물음의 핵심도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냐에 대한 것이었다.

여인의 궁극적인 문제는 일평생 골머리를 앓은 6명의 남편들에 관한 것도, 그녀의 껄끄러운 직업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그가 누구신 줄 알았다면 그녀는 생의 근본이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 하는 이가 오시면 모든 것들에 대해 알려주실 것인데 그가 계시하실 내용의 본질은 예배의 처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예배의 처소는 영과 진리이다. 그 처소로 나아가는 길은 메시야 자신이다. 동시에 진리시기 때문에 예배의 처소도 되신다.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누구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 영원한 생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모른다면 누구도 결코 목마르지 않을 영생수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어가 중요하다.

어떠한 분야에 탁월하면 칭찬과 존경이 쏟아진다. 그러나 우리가 신학이든 신앙이든 그리스도 예수께로 나아가지 않고 어정쩡한 지점에서 인간적인 칭찬과 존경의 촉수에 찔려 감염되는 순간 웃고 즐기다가 그리스도 예수를 놓치는 총체적인 상실에 직면한다.

오늘은 왠지 수가성의 한 우물가에 온 느낌이다. 예수님의 질문을 곰곰히 곱씹으며 모든 사안에서 모든 순간마다 그리스도 예수가 내 인생과 신앙과 신학의 주어이길 묵상하려 한다.

2014년 7월 21일 월요일

하나님이 상급이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3:8-9)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한다. 구원의 완성이 인간의 손아귀에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차원과 정도에 관한 권면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도 정도의 문제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있어서도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에 있어서 자라가야 한다는 정도와 관련된 권면이 있다. 하나님을 지극히 큰 상급으로 얻는다는 것도 모두에게 획일적인 상태나 동일한 내용이 아니라 미묘한 온도차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얻으려고 모든 것의 상실과 유익한 것들의 배설물 취급도 불사했다. 이것은 일회성 추구가 아니었다. 삶의 항구적인 속성처럼 그것이 빠지면 살았어도 사는 게 아니었던 추구였다. 그리스도 추구 자체가 그냥 삶이었다.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상급이란 말은 어떤 물리적인 소유물이 나의 임의적인 처분권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만 보아도 분명하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고 불변적인 분이시다.

하나님은 유한하고 한시적인 존재이며 손바닥 뒤집듯이 수시로 변하는 인간에 의해 소유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으로 주어진 바 되신다는 건 이루말할 수 없는 은혜이며 기적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그런 소유를 상상하지 못한다. 다만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바울이 취한 태도에서 그 비밀한 소유의 감미로운 실루엣을 포착한다. 바울은 모든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돌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길 소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로잡힌 바 된 바로 그것을 좇으려고 일평생 질주했던 사도였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미치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사로잡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결박되지 않고 좌우되지 않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의 모습이다.

바울은 이미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 땅에서는 완성되지 않을 질주라는 이야기다. 나그네의 여정이다. 오직 완성의 앞을 바라보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일방향 질주가 성도의 인생이다.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라는 차원의 지경을 넓혀가는 인생이다.

지경을 넓히고 또 넓혀서 나에게 하나님이 기쁨이고 하나님이 영광이고 하나님이 향유이고, 하나님이 찬송이고, 하나님이 안식처고, 하나님이 전부라는 온전한 상태에 대한 시인의 갈망과 노래가 미시건의 청쾌한 아침을 자극한다. 

사랑의 공동체

오늘은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었다. 오랜만에 뵙는 분들의 촉촉한 눈가에는 그리움과 따뜻한 사랑이 흔건했다. 긴 시간동안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사랑이 거대한 재산처럼 느껴졌다. 영혼이 든든했다. 마음도 편안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든다. 사랑하지 않고서도 사람다울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다. 교회는 조건도 없고 투자도 아닌 순수한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여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곳이기에 가장 향기로운 처소이다. '그런' 처소이길 소원한다.

2014년 7월 20일 일요일

헤세드의 흡입력

만인이 소망하는 것은 지속적인 사랑이다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비결은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에 있다.
삶의 모든 현장에서 관찰되는 사실이다.

변함이 없는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사랑의 출처를 사모한다.
사랑은 결코 내가 기준일 수 없는 행위이다.

내가 기준이 된다면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고
자신의 기분을 훼손하는 대상에게
사랑의 지속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혜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을 인하여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나를 사모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지속적인 헤세드의 사랑이 없다는 의미이다.

나의 주변에 사람들이 없다고 불평할 필요 없다.
원래 사람은 사랑을 받는 자보다 주는 자에게 이끌린다.
어떤 식으로든 늘상 주는 사랑의 사람이길 소원한다.

초대교회 성도의 삶

초대교회 시대에 성도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니케아 이전 무명의 교부가 쓴 글에서 그 윤곽을 얼추 더듬는다. 오늘날의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과 적잖은 괴리가 느껴지니 속이 불편하다. 문명의 옷차림이 변하기는 하였어도 여전히 사람이 사는 세상인데...부끄럽고 씁쓸하다. 조용한 성찰과 정직한 숙고의 자료라고 생각하여 번역해 보았다.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분된다. 그들이 머무는 나라나, 사용하는 언어나, 준수하는 관습에 의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도시에 주거하지 않고 고유한 언어의 양식도 고수하지 않고 어떤 독특성에 의해 구별되는 삶을 영위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행위의 방침은 호기심에 취한 사람들의 사색이나 숙고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니며, 어떤 이들처럼 순전히 인간적인 가르침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일도 없다. 하지만 성도들은 각자에게 주거가 할당된 대로 야만인의 도시나 지성인의 도시에 거주하며 의식주나 다른 일상적인 행위에 있어서 각 주거민의 관습을 역류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탁월하고 심히 충격적인 삶의 양식을 펼쳐 보인다.

1)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과객처럼 살아간다.
2) 시민의 신분으로 그들은 모든 것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나 마치 이방인인 것처럼 모든 것들을 인내한다.
3) 그러한 모든 이방 나라가 그들에게 모국으로 되어 있지만 그들이 출생한 모든 땅은 이방인의 땅이었다.
4)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지만 낙태하지 않는다.
5) 그들은 공공의 식탁을 사용하나 공공의 침대는 사용하지 않는다.
6) 그들도 육신 안에서 살지만 육신을 따라서 살지는 아니한다.
7) 그들도 땅에서 그들의 나날을 보내지만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간다.
8) 그들도 제정된 법질서를 따르지만 그들의 삶은 그런 법의 차원을 초월한다.
9)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나 모든 이들에 의해 핍박을 당한다.
10) 그들은 무명이며 정죄를 당하고 죽음에 내던짐을 당하지만 다시 살아난다.
11) 그들은 가난하나 많은 자들을 부요하게 만든다.
12) 그들은 모든 것에 있어서 빈곤하나 모든 것에 있어서 풍족하다.
13) 그들은 불명예를 당하지만 바로 그런 불명예 속에서 명예롭게 된다.
14) 그들은 비방을 당하지만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는다.
15) 그들은 매도되나 축복한다.
16) 그들은 조롱을 당하지만 그 조롱을 존대로 응수한다.
17) 그들은 선을 행하지만 행악자로 징계된다.
18) 그들은 징벌을 당하여도 마치 소생한듯 기뻐한다.
19) 유대인에 의해서는 이방인인 것처럼 공격을 당하였고 헬라인에 의해서는 핍박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미워하는 그들은 자신들을 미워하게 할 근거를 그들에게 제공할 수 없었다."

Ep. ad Diognetum, ch.5.

2014년 7월 19일 토요일

이그나티우스의 순교관

오늘 강의를 준비하다 이그나티우스 글에서 뭉클한 감동을 얻습니다. 제가 사는 환경은 안디옥의 교부와 다르지만 이런 순교관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나는 모든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모든 이들에게 단언하는 바입니다. 저는 당신들이 저를 저지함이 없이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죽을 것입니다. 저로 맹수들의 밥이 되도록 승인해 주십시오. 이로써 저에게는 하나님을 얻는 복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밀인 저는 맹수들의 뾰족한 이빨에 갈려져서 결국 하나님의 순전한 빵으로 발견될 것입니다. 오히려 사나운 짐승들을 부추겨 그 짐승들이 저의 무덤이 되고 저의 몸은 한 조각도 남아나지 않게 하십시오. 그래서 제가 잠들었을 때에 어떤 이에게도 성가신 존재가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세상이 저의 몸을 보지 못하는 바로 그때 진실로 저는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저를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께 간구하되, 이러한 도구들(맹수들의 사나운 이빨)로 말미암아 제가 하나님께 희생물로 발견될 수 있도록 부르짖어 주십시오. 베드로나 바울처럼 제가 여러분께 명을 내리는 건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이고 저는 곤고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되었으나 저는 아직도 노예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견딘다면 저는 그리스도 예수의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자유로운 몸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지금 결박되어 있으면서 저는 [세상의] 어떠한 것도 갈망하지 않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Ignatius of Antioch, Ep. ad Romanos, 4.

좋은 사이트들

초대교회 역사교재: Source Book for Ancient Church History

90여 종류의 옛 주석들을 수집한 사이트다. 설교본문 정해지면 원문을 숙독하고 이곳을 출입한다. 이 사이트는 하나의 성경 텍스트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조명된 의미들의 집합소다. 각 주석은 권-장-절을 선택하면 곧바로 읽어볼 수 있어서 좋고 입장료도 없고 세금도 안붙어서 좋다. Bible Commentaries

깨끗하고 단백한 관주성경 사이트다. 보고 있노라면, 관주성경 보던 옛 느낌과 흥분이 밀려온다. 성경이 성경을 풀어주는 관주성경 사이트를 공유하고 오프라인 상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파일까지 공유하는 착한 사이트다. 운영자께 감사를 표하며... 관주성경

2014년 7월 17일 목요일

재앙에 대한 반응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잠17:5)

여기서 "사람"은 특정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재앙이 기쁨을 유발하는 경우는 대체로 그것이 악인에게 혹은 원수에게 닥쳤을 때입니다. 평소의 행실이 음란하고 포악하고 가증하고 사악한 사람에게 재앙이 임하면 마치 하나님의 공평이 구현되는 듯하여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은밀한 갈채를 보냅니다.

이런 반응에 하나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라는 하나님 지식이 갈채의 든든한 보증과 명분까지 보탭니다. 그런데 오늘 지혜자는 사람의 재앙은 일체 기뻐하지 말랍니다. 그런 자는 형벌을 면할 수 없답니다. 그러므로 악인나 원수의 재앙이나 패망을 목격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재앙, 특별히 악인이나 원수의 재앙을 기뻐하는 것의 배후에는 일반적인 권선징악 개념이 또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물론 악한 일을 경계하고 선한 일을 권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고 오히려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의 판별과 그것에 대한 심판에 있어서 사람의 사사로운 기준이 작용하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재앙은 나의 초라한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한 주먹이 사용된 것이기에 나 자신의 사사로운 견해나 관여 없이도 나의 기준이 화끈하게 구현되고 옳다고 확인된 사건인 것입니다. 이로써 밖으로 들키지 않고도 나의 기준과 판단이 은밀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 셈입니다.

'기뻐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인간 존재의 대단히 복잡한 심리적 작용이 밀어낸 결과적 현상인 것입니다. 당연히 결과로서 기쁨은 인간의 본질과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출구인 것입니다. 우리로 기쁘게 하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면 그것에 호응하는 우리의 내면이 보일 것입니다. 지혜자는 단순히 재앙에 대한 기쁨의 표면적인 반응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란 현상으로 표출된 내면의 상태와 문제의 심각성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재앙의 주체는 얼마든지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재앙을 볼 때마다 두려워 하고 떨어야 할 것이며, 재앙을 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함께 아파하는 게 마땅한 반응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시고, 우리는 어떤 자인지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리에 엎드리는 게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늘상 무수한 재앙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무시로 반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아주 일상적인 현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함을 지혜자의 권고에서 배웁니다. 어떠한 재앙이든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한다는 것, 우는 자로 함께 울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겠습니다.

세상의 어리석은 지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세상의 학문은 사람의 성장기를 따라 구별된다. 사람이 어릴 때에는 후견인 혹은 청지기의 권위 아래에 있듯이 신앙이 어릴 때에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다고 바울은 설명한다. 그러나 믿음이 장성한 이후에는,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이후에는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 세계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다. 주님은 세상에서 지혜롭다 하는 자들의 사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혜로운 자로 하여금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라"고 기록한다.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 즉 하나님은 자비와 심판과 공의를 땅에 행하시는 분이심을 깨닫는 것을 자랑의 이유로 삼으라고 한다.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어떤 생각과 판단과 결정의 배후를 조금만 들여다 보면 모든 게 자기신뢰 결과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나아가 시인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고 권하는데 이는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도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나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사람의 지혜가 신앙의 토대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인생은 의지의 대상이 아니다. 아무리 부요하고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민첩하고 아무리 준수하고 아무리 건장하게 보여도 의지의 대상은 아니다. 당연히 인간문맥 안에서 형성되고 승인되고 통용되고 가치화된 지식과 지혜와 질서에 우리의 신앙을 위탁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다.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우매함의 종식은 간단하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막대한 희생과 결단이 요구된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세상의 모든 초등학문 일체를 상대화시키는 것에는 과히 혁명에 준하는 변화가 수반된다. 우리의 사랑은 지식에 있어서 그리고 분별력에 있어서 자라가야 하는데 그런 자람이란 기존에 익숙하던 지식과 지혜와의 결별을 수반한다. 그러니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란 오명을 뒤집어 쓸 각오는 주를 따르는 자들의 기본기다. 천지를 진동시킨 주범으로 내몰려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내공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온 땅에 배푸신 일반적인 은총을 무시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온전하게 된다.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항구적인 초자연에 붙여진 이름이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소식을 전하는 방식으로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도록 마련된 계시의 수단이다. 이것과 세상의 어리석은 지혜를 혼돈하면 안되겠다.

공기는 디오게네스가, 물은 탈레스가, 불은 히파수스가 숭배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2세기의 교부 클레멘트는 이처럼 기초적인 물질들이 숭배되는 것을 개탄하며, 교회의 사랑이 지식과 분별력에 있어서 자라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한다. 우주와 인생에 관한 물음들을 머리에 넣고 살아가는 철학자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어린 아이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아무리 탁월해도 종의 아들은 상속자가 되지 못한다는 어법으로 세상의 지혜를 평가한다.

우유에 준하는 세상의 학문을 진리의 반열에 무모하게 삽입하는 이들을 교부는 베이비로 규정한다. 진리의 말씀으로 연단되지 않은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한다. 진리에 장성한 자는 이성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변하는 감별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감별력 자체가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꼼꼼하게 검증하여 분별된 "선한 것들"을 확고히 붙들어야 한다는 바울의 권고까지 교부는 추가한다. 분별의 기준이 진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른 기준으로 분별된 선악은 거짓이다. 선을 악이라고 하고 악을 선이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규모를 갖추고 모든 것들을 검증하고 분별하여 선한 것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고수하되 이 모든 행위들이 지향하는 목적의 중요성을 바울은 지적한다. 즉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자신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결과는 올바르지 않다. 이는 스스로 추해지고 망가지는 첩경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에 이르라고 주문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의의 열매로 풍성해야 한다.

이상을 정리하면 이렇다. 1) 분별의 기준인 진리를 확보해야 한다. 2)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에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 3) 진리에서 자라간 만큼 분별의 지경은 확대된다. 4) 나아가 삶의 전 영역에서 선악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5) 분별에서 중지하지 않고 분별된 악은 피하고 선은 고수해야 한다. 6) 이는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어야 한다는 지향점을 놓쳐서는 아니된다.

2014년 7월 15일 화요일

기독교적 지혜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빌1:10)

칼빈은 무엇이 유용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기독교적 지혜의 정의라고 말한다. 이 지혜는 공허한 교설과 사변으로 정신을 고문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한다.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무익한 것을 배우며 시간과 정신을 허비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당시 소르본 대학의 학자들이 일생을 탕진하며 매달렸던 주제들은 영적인 유익과 천상적인 삶의 윤택을 도모함에 있어서 심지어 유클리드 기학학의 논증보다 쓰잘데기 없는 것이라고 칼빈은 비판한다.

사단은 성도의 소명에 거치는 돌맹이 두기에 능숙하다. 실족하게 만들고, 걸려 넘어지게 하고, 삼천포로 빠지게 하는 궤변 구사력에 있어서 사단을 능가하는 존재는 없다. 유용하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집착하게 만드는 사단의 꾀임에 빠지는 분들이 적지가 아니하다. 대체로 학자들이 그런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학문'이란 명패만 사용하면 교회의 유익과 무관한 것들에 매달리고 논해도 괜찮다는 관념에 타협의 손을 쉽게 내뻗는다.

이런 우매함은 전염성도 유난히 강하다. 학문을 논하는 놀이터의 담벼락을 넘어 교회와 선교의 현장까지 비본질적 잡설과 잡무에 집착하게 만들어 시시비비 올무에 꿰고 쥐락펴락 한다. 이는 대체로 내가 살아 있어서 걸려드는 함정이다. 별거 아닌 일들 때문에 곳곳에서 충돌하고 핏대를 올리고 찢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참으로 안타깝다.

사랑으로 쉬 덮어질 허물들에 노골적인 조명등을 비추며 그것들을 동네방네 공공연히 퍼뜨린다. 그러면 그 사안에 대해 편이 깔끔하게 갈라진다. 갈라진 두 편 사이에는 싸늘한 신학적 전선이 형성되고 평화의 교류를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무언의 룰을 깨뜨리는 자는 희생양이 되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강도 높은 징계의 본보기로 채택된다.

그러나 기독교적 지혜는 사랑으로 덮어질 사안에 대해서는 덮고 지나간다. 거기에 시간과 마음과 관심사를 과용하지 않는다. 교회에 진실로 유용한 것들을 식별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가 그것이다. 그 열매의 풍성한 결실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일에 가용한 모든 재원들을 동원하여 주목하고 매달린다.

공부를 하든 목회를 하든 사업을 하든 이런 지혜가 필요하다...

2014년 7월 14일 월요일

사랑과 지식과 분별

나는 이것을 기도한다:
너희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에 있어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1:9)

바울의 기도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개인적인 바램이 아니다. 주님께서 교회로 하여금 얻도록 구하라고 본보이신 기도의 모델이다. 바울의 짤막한 기도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의 선명한 방향과 지침을 제공한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사도의 기도를 뜯어보자.

바울은 자신의 기도에서 사랑은 몽롱한 감정의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지식 및 온전한 분별력의 지속적인 증대와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당연히 뜨거운 가슴을 사랑의 전부로 여겨서는 안되겠다. 계속해서 자라나야 하는데 지식과 분별이 온전해질 때까지 자라나야 한다고 바울은 가르친다.

사랑은 바른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지식을 요청한다. 사랑하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다소 모순적인 순환적 어법이 그런 사랑과 지식의 관계를 잘 설명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된다. 알면 알수록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을 알수록 우리는 무엇이 유용한 것인지를 분별하고 인정하게 된다. 주님을 모르면 대체로 썩어 없어지는 것들에 짐승의 본능 수준으로 집착하게 된다.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보다 찰나적인 사물과 상태가 더 유용하게 보이기에 그것을 얻으려고 이성이 없는 맹수처럼 사납게 달려든다. 그런 판단력을 따라 살아간다.

이는 올바른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않은 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진정한 사랑과 온전한 사랑의 의미를 모르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여기기에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돌이키려 하지도 아니한다. 주변에서 진실하게 조언해도 구차한 잔소리에 불과하다. 마치 지식이 없는 소원의 광기처럼 지식이 없는 사랑의 맹목성도 제어할 수단이 없어 보인다.

사랑에도 격이 있다. 깊고 높고 길고 넓은 차원이 있다. 온전하지 않은 상태의 사랑을 전부로 여기거나 사랑의 최종적인 상태나 정점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 온전한 사랑의 훼방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어설픈 철부지 사랑은 로맨틱한 추억용 사랑일 수는 있겠으나 우리가 지향하고 고집해서 머물러야 할 사랑의 종착지는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분별에서 자라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자람의 정도는 무한대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야 하는 게 사랑이다. 지성과 방향과 재능과 가치를 다 걸어야 한다. 이는 수단일 수 없고 방편일 수 없고 지나가는 과정일 수 없는 게 하나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단면이 아니라 포괄적인 개념을 정립하고 그런 개념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바울의 기도가 가르치는 교훈이다. 

2014년 7월 13일 일요일

속임과 희락의 출처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잠12:20)

속임은 악을 도모하는 자의 마음으로 소환된다. 악의 도모와 속임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짝이다. 속임의 극복은 정직의 고수에서 비롯되지 아니하고 악을 도모하지 아니하는 마음을 품어야 가능하다.

악을 도모하면 가장하는 일들이 뒤따른다. 없는데 있는 척하고, 모르는데 아는 척하고, 사랑하지 않은데 사랑하는 척하고, 기쁘지도 않은데 기쁜 척하고, 진심이 없는데 진심인 척하는 일들이 뒤따른다.

악을 도모하는 자는 결코 빛으로 나아오지 아니한다. 그러면 자신의 불쾌한 정체가 드러날 수 있어서다. 온갖 종류의 속임수가 표정과 행동과 언어를 뒤덮는다. 그러나 고작해야 나뭇잎 치마에 불과한 속임수다.

악을 도모하는 것 자체가 속임수에 대한 초청이다. 그런 마음에서 속임이 스물스물 움튼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거짓을 멀리하는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는 지혜자의 잠언은 옳다. 악을 미워하는 것이 속임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다.

마음의 희락은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 찾아온다. 희락의 확보는 마음의 결단으로 되지 아니하고 집착도 무용하다. 희락은 화평을 도모하는 자의 마음에만 머문다. 화평하는 사람의 표정과 언어와 행동에는 늘 희락이 깃들어 있다.

화목을 도모하지 아니하는 자의 마음에는 희락이 없다. 사람들은 때때로 왜 나에게는 슬픔이 있고 우울이 있고 걱정이 있고 눌림과 침체가 있는지를 묻는다. 이유를 몰라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이유를 더불어 화목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한다.

속임과 희락은 마음의 도모에서 비롯되는 파생적인 현상이다. 선을 도모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출입할 수 없고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의 마음에는 희락이 없다. 

2014년 7월 11일 금요일

하나님의 속성이 열쇠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잠11:17)

인자하는 자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다.
그는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따뜻한 마음을 품는다.
그래서 타인을 널리 이롭게 하는 자로 보인다.
틀리지 않은 관찰이다.

그러나 지혜자는 인자한 자가 타인보다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인자한 자가 타인에게 끼치는 유익이 없다는 말, 아니다.
보다 궁극적인 인자의 수혜자를 주목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잔인한 자는 타인의 영혼과 몸도 해치지만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하는 사람이다.
잔인의 최대 피해자는 자신이란 이야기다.

인자한 자의 마음에는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인자가 머무는 자이기에
자신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고 사료된다.
잔인한 자는 하나님의 속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서
그 자신이 이미 최악의 피해자다.

원통한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복수의 이빨을 간다.
물론 인간문맥 속에서는 정당한 반응이다.
그러나 그런 정당성이 하나님의 속성을 밀어낸다.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진다.

하지만 원통한 일에 대해 인자로 응수하면
원수를 이롭게 하기보다 자신의 영혼이 이롭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이 내 안에서 떠나지 않아서다.
승패의 가름은 하나님의 속성에 있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면 귀한 열매가 맺는다.
그런데 그 열매는 이차적인 유익이다.
타인을 향하여 외적으로 맺어진 그 열매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보다 궁극적인 복을 읽는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 자체가 자신에게 최고의 고통이다.

서부일정 접었다

2주일의 서부 일정을 끝마쳤다. 무진장 피곤했다. 그러나 참으로 행복했다. 강의와 설교와 여행을 허락하신 하나님과 가능하게 한 지인들의 사랑과 섬김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직립으로 자다가 모처럼 등짝을 방바닥에 붙이니 몸이 일어나려 하질 아니했다. 이렇게 중천에 뜬 태양을 바라보며 늦은 아침을 시작한다. 상쾌하다...

2014년 7월 8일 화요일

고통을 생각한다

사전은 고통을 육신과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이라 한다. 요즈음 보다 근원적인 고통으로 '스트레스'가 일순위로 언급된다. 다양한 파생적 고통을 조장하는 정신적인 고통의 비중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보다 심각하고 끔찍한 고통이 여호와를 버린 것, 그를 경외함이 우리 안에 없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고통은 때때로 무엇은 해야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와 같다. 아프면 생각도 행위도 중단한다. 아파야 무엇이 문제인지 감지한다. 고통은 피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그래서 고통은 제어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고통에 대한 반응의 순발력은 빛의 속도를 방불한다. 상황이 그런 속도를 요구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고통 감지력이 없으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다. 몸의 고통은 신경이 감지한다. 그런데 영혼의 고통은 감지의 기관이 모호하다. 여기에서 죄의 삯이 사망이란 사실이 중요하다. 영혼의 고통 감지력은 죽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무엇이 고통인지 모르고 고통이 있어도 감지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어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집단적인 죄와 심각성을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적한다. 여기서 악과 고통은 분리되어 있지가 않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근본적인 고통이다. 다른 건 파생적인 고통이다.

만약 여호와를 경외함이 고통인 줄 모른다면 심각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개인이든 교회든 국가이든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으면 극도의 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며 극도의 고통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감지하지 못하면 불경건 행보는 제어되지 않고 중단되지 않는다. 지금 여호와 경외의 여부도 모른다면 그건 위태로운 중증이다.

고통 감지력의 회복이 시급하다. 내 속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있는지를 꼼꼼하게 살펴야 하겠다. 훅 불면 날리우는 죄악된 존재의 가벼움을 직시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겠다. 오만의 뾰족한 고개를 숙이고 겸손의 둥근 허리를 굽혀야 하겠다. 영적 고통을 감지하는 신경의 회복을 오늘은 묵상한다.

2014년 7월 7일 월요일

사람의 도를 넘어가면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고통이다.
고통도 한계선을 넘으면 고통으로 여기질 않는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측량할 수 없다.
지혜와 지식도 도가 넘으면 있는 줄도 모른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 분량이다.
사랑도 도가 넘으면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점을 기억함이 좋겠다.

인간의 주먹 사이즈의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아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고 믿음의 비약이 필요하다.

성령의 조명도 믿음도 다 은혜이기 때문에
성경을 바르게 읽어내는 것은 은혜의 결과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기 때문에 믿음으로 더듬어야 한다.

자유를 생각한다

1. 인간의 자유는 피조된 자유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와는 다르다. 인간에게 설정된 피조물적 자유를 넘어가면 자유가 박탈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유의 확대라고 착각한다. 이걸 읽어내는 게 중요하다.

2. 인간의 자유는 외부에서 부여된 자유가 있다. 돈이 있고 시간이 있고 명성이 있으면 허락되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소유물이 제공하는 자유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댓가의 지불이 요구된다. 워낙 은밀해서 감지되기 어려운 댓가이다.

3. 인간이 생각하는 자유는 오히려 구속을 자유로 오인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내가 소유하여 누리는 자유의 수단에 내가 결박된다. 사람들은 우리가 많이 소유하면 자유도 그만큼 확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만큼의 은밀한 결박이 확대된다.

4. 부자유의 가장 큰 원흉은 인간 자신이다. 돈이 없어서 소비하지 못하는 부자유, 건강이 나빠서 움직이지 못하는 부자유, 관계가 틀어져서 소통하지 못하는 부자유 등은 아직도 본질적인 부자유가 아니다. 자신을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부자유가 최악의 부자유다. 

5.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기에 자신의 소유물에 의해 자유가 좌우된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돈에 결박되고,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에 결박되고, 권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에 결박되고, 죄성을 가지고 있으면 죄의 노예가 된다.

6. 소유물이 제공하는 자유의 배후에는 결박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은 소유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소유물에 의해 사유자가 소유당한 바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계시는 방식으로 그분을 소유하면 자유는 차원이 달라진다. 

7. 인간이 생각하고 구현할 수 있는 자유의 차원은 고작해야 피조물적 자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자유는 신적인 차원까지 확대된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8. 성도에게 허락된 자유는 신적인 자유이다. 목에 죽음의 칼이 들어와도 빼앗기지 않는 자유는 신적인 것이다. 땅의 육신을 위협하고 죽이는 권세에 얽매이지 않고 영혼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분에게만 제한되는 자유의 확대가 성도에게 가능하다. 

9. 성도의 자유는 빈부나 귀천에 의존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늘의 원리가 붙들고 있어서다. 땅의 어떠한 요소도 간섭할 수 없는 하늘의 자유는 성도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땅의 자유와 하늘의 자유를 거래하는 우매자가 적지 않다. 

10. 자유의 극대치 혹은 가장 높은 차원의 자유는 내가 부인되면 될수록 증대된다. 부자유의 마지막 원흉은 인간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부인 없이는 진정한 자유의 구가도 그림의 떡이겠다. 자기를 부인하는 최고의 방편은 믿음이다.

11. 믿음이 제공하는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저촉을 받는 무한대의 자유이다. 바울처럼 모든 것에 자유한다. 믿음은 우리의 신분과 재산과 지식과 경험과 인맥과 업적의 공로적 횡포에서 우리를 구제하는 수단이다. 믿음보다 더 좋은 선물을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12. 무한하고 광대하고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피조물적 자유의 최대치 그 이상의 차원이 제공되는 근거이다.

13.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어두움의 결박은 풀어지고, 생명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시면 사망의 결박도 없어지며, 거룩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부패의 횡포도 소멸되고, 소망이신 그분으로 인해 절망의 사슬도 끊어진다.

14. 아들이 자유케 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유하지 못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자유의 열쇠시다. 잃어버린 자유를 찾아서 우리는 자아를 회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부인에서 그리고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신앙에서 그 열쇠를 발견한다. 

2014년 7월 3일 목요일

신학의 정의를 다루다

ITS 강의 셋째날, 신학의 정의를 다루었다. 신학의 정의를 생각하면 할수록 막강한 부담감에 압도된다. 신학을 대충 정의하고 싶어질 정도다. 신학에 대한 이해가 신학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에 의존하는 경향이 감지된다. 정보를 다룬다는 자세로 신학을 하면 신학함에 나의 생명과 삶이 개입되지 않아도 될 정의에 만족한다. 그러나 목숨과 인생을 걸고 신학을 할 각오로 신학에 접근하면 나의 생명과 삶도 수단으로 동원되는 신학의 정의에 도달한다.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하였고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맞물려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근거하여 믿음의 선배들은 신학을 하나님에 의해 학습되고 하나님을 배우고 가르치며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 자신이 신학의 주체와 대상과 목적이란 개념을 확립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 선언문을 언급하기 전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전제하고 있다는 대목을 주시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신적인 지혜와 지식의 완전한 정복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도달하는 것과 연결된다. 미묘하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이성의 필름이 끊어지는 단절적인 비약 없이는 출고될 수 없는 고백이다. 그 비약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측량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신비를 인간의 유한한 머리에 구겨넣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신앙의 귀결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논리로 그 비약의 안다리를 걸어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은 신비로운 분이시다. 신학의 주체와 대상과 목적이 그런 분이시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신비로 둔 영역은 신비대로 존중하고, 나타내신 것은 성경이 밝힌 명료성의 정도까지 이르러야 한다. 신학의 적정선은 이런 신비성과 명료성의 성경적 비율이 최대한 존중되는 지점에서 그어져야 한다. 그 선이 무시되면 하나님의 영광도 무시된다. 같은 맥락에서 이론과 실천의 성경적 배합도, 사랑과 정의의 성경적 균형도, 그런 적정선의 일부로서 존중해야 되겠다.

이건 자랑이다...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표정은 대체로 진지하고 밝았다. 오늘도 학생들이 푸짐한 밥상을 마련했다. 모밀국수, 해물 부침개와 풋고추도 곁들였다. 교수 회의실의 데스크 다리가 휠 정도였다. 점심식사 중 "어려운데, 한 마디도 놓칠 수 없습니다," "신학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인 줄 예전에는 몰랐네요," "밥상의 질은 강의의 질에 의존하는 범인데, 오늘은 개교 이래로 최고의 밥상인 듯합니다" 등의 피드백이 쏟아졌다.

이렇게 젊은 교사에게 적당한 격려성 멘트에 인색하지 않으신 어르신 학생들의 재치에 감사한 마음, 가누지를 못하였다. 

2014년 7월 2일 수요일

하나님을 아는 지식

ITS 강의 둘째날이 끝났다. 첫날보다 좋았다. 민망한 자평이다...

오늘은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의 인식론을 길게 다루었다. 난 이 대목이 제일 재미있다. 강의할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이 누적된다. 그래서 더 좋아진다. 오늘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 자체의 무한한 영광과 기쁨을 많이 강조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영생이며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영생을 맛보는 삶이다. 영생은 최고의 선물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삶은 그 최고의 선물을 누리고 즐기는 삶이다. 향유의 달기가 송이꿀을 능가한다. 견줄 대체물이 없을 정도로 황홀하다.

가장 슬프고 고통스런 삶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무지의 삶, 그분을 경외함이 없는 무신경의 삶이다. 이는 타락한 인류의 근본적인 고통이고 재앙이며 저주이다. 하나님 없는 자들이 아무리 형통해도 분통해 할 필요없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라.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무엇이 고통인지 모르고 고통에 대한 의식나 신경이 없을 정도로 불쌍하다. 고통의 분량은 무한대다. 고통도 도를 넘어서면 고통 감지력도 무의미해 진다. 게다가 형통까지 더해지니 고통에 대한 무지는 극도로 치닫는다. 불쌍의 정도는 증폭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의 비밀이 나로 하여금 건강한 가치관과 처신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너무도 고상하다. 피조물 안에서는 비유가 없을 정도다. 심지어 유익한 흠모의 대상도 배설물과 해로운 것으로 상대화될 정도이다. 기독교 인식론의 매력이다.

2014년 7월 1일 화요일

공로, 하나님의 선물

주님은 우리의 선한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행한대로 갚으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언급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어거스틴 해석이 존중되지 않으면 자칫 인간이 선행의 주체인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 어법을 따라 우리의 공로를 다시 묘사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tua meritum)를 치하해 주신다. 
그러나 우리의 공로로서(tanquam tua meritum) 그러하지 않으시고
그의 선물로서(tanquam sui dona) 우리의 공로를 치하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선물을 주시되 마치 우리 안에서 우리의 기호가 발동하여 우리가 주체인 것처럼 그 선물을 누리도록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아주 높은 방식으로 선행을 선물하는 분이시다. 그 선행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인데 그것에 대해 보상까지 주신다는 것은 은혜 위의 은혜겠다.

하나님의 은혜는 생각하면 할수록 신비롭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돌릴 공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다. 특정한 대상과 관계된 것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마다 모든 사안에서 그러하다. 

멋쟁이 주님, 영원토록 변치 않으셔서 너무도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