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31일 토요일

RE 6월호다

연구소에 초록빛 RE가 쥔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호의 특징은 단연 권형록 목사님의 등장이다. 교회학교 시작을 독려하는 글을 쓰시었다. 삶의 가치관 정립이 일순위로 언급된다. 그리고는 신앙으로 무장된 교사확보 문제를 언급하고 교육의 내용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실을 가르치는 교과과정 문제로 넘어간다. 교회라는 현실을 감안하여 믿음의 자녀들이 교육의 대상으로 간주되며 학교의 운영에 있어서는 국가에의 의존과 예속을 피해야 하고 학생의 학비가 아닌 후원으로 해결해야 한단다. 디테일이 목마르신 분들은 HyungLok Gwon 목사님께 문의하면 되시겠다. 이번호 RE에서 나는 닛사 출신의 그레고리 신앙을 건드렸다. 깍두기 느낌은 여전하다.

대전 느낌, 좋았다

대전에 갔드랬다. 칼빈 신학교의 후배 목사님의 호출을 받고 기도로 야밤을 달구는 청년들과 말씀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다. 난 그들에게 신의 성품에 뛰어들 것을 권면했다.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방식으로...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으로...섬김의 손길이 아주 섬세했다. 텍스트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발휘할 수 없는 현장 목회자의 체득된 센스였다. 설교차 갔었는데 보고 듣은 배움의 분량이 훨씬 압도했다. 만난 청년들이 기도와 말씀과 형상으로 무장되길 기도한다.

2014년 5월 30일 금요일

친구 아버님의 묘소에 갔드랬다

친구의 아버님이 주님의 품으로 떠나셨다. 지병도 없이 건강하게 사시다가 급작스런 일로 생을 접으셨다. 친구를 비롯한 모든 유가족은 지금도 실감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는 신앙의 힘과 평강이 가득했다. 친구 아버님은 믿음으로 가정을 세우시고, 교회에 본을 보이시고, 떠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유용한 모든 것을 타인에게 나누시고 떠나셨다. 그분이 남기신 것은 믿음의 유산 뿐이었다. 친구 아버님의 잠드심과 친구의 고백을 통해 출생과 삶과 죽음은 사람의 뜻과 계획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닫는다. 아버님은 한뼘 넓이의 자연장에 묻히셨다. 공간도 모양도 소박하다. 자연으로 돌아갈 한 줌의 재는 땅에 묻혔으나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심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지였다. 생이 죽음에 의해 재해석될 필요성도 느껴진다. 땅에서의 부귀와 영화도 마지막 순간에는 맥없는 한 줌의 재이겠다. 영원토록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위해 생의 땀방울이 흘러야 되겠다는 다짐도 친구 아버님의 선물이다. 조문하러 갔다가 교훈만 잔뜩 챙기고 돌아왔다. 감사하다.



종강했다

사랑하는 합신의 1학년들과 뒹굴었던 초대교회사, 종강했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박수로 반응해 주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수업이 끝났는데 박수가 없어서 낯설었다. 박수갈채 답례에 적응되어 있는 나 자신이 민망했다. 그 민망이 와락 몰려올 무렵, 학생들이 전원 기립하여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갑자기 의식의 마비가... 뭉클했다. 많이 뭉클했다. 한국에 와 교수생활 첫걸음을 뗀 곳이고 '첫사랑' 현장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1학년들, 마음의 안구에 박힌 이들의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이 교사의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1학기동안 부족한 사람을 참아주고 호응해 준 합신의 새내기들, 많이 고마웠다. 다음 주 기말고사 '무사히' 마치기를 바라며~~


2014년 5월 26일 월요일

어디에서 살까?

어디에서 살아야 하나...집 구하는 일이 정말 쉽지가 아니하다. 아는 목사님이 알려 주신 피터팬 부동산 사이트 출입이 잦아졌다. 그러나 형편에 맞고 마음에 쏘옥 드는 전월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구나.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시던 어떤 집사님의 권고가 떠오른다. 서울 시민으로 살기가 만만치가 않다.

2014년 5월 21일 수요일

소망으로 살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8:24)

이 세상에는 살아갈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으로 간주하고 집착하는 순간 배신의 등짝을 돌립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호흡의 공급자인 동시에 호흡의 이유와 목적이 되십니다. 주님이 계셔서 숨통이 열립니다.

"우리의 시대에 판결은 공공연한 뇌물증여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며 판단을 내리는 기사는 자기에게 지불된 것을 위해 판정한다" 하였던 칼빈의 시대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도 세상은 불의와 불법과 편법으로 잔뜩 얼룩져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시공간은 참으로 다양하고 은밀한 뇌물의 증여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살면서도 숨통이 막히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답답함이 목젖까지 차올라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수시로 옷차림만 바뀔 뿐입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바램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지만 빛으로 번역된 어떠한 것도 썩어지지 않을 것이 없어서 항구족인 소망일 수 없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불의하고 모순되고 불법적인 현실의 지속은 어쩌면 영원하고 보이지 않는 소망의 수요가 한번도 마른 적이 없어서 모든 시대에 모든 상황에서 인간의 갈증해소 일순위의 자리를 갖도록 주께서 의도하신 섭리의 결과라는 인상도 받습니다.

이는 소망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면서 또한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2014년 5월 20일 화요일

경외: 생명에 이르는 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잠19:23).

여기서의 생명은 호흡의 지속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삶은 살았어도 죽은 삶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삶이 가치를 담는 그릇이라 한다면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을 담았을 때에 비로소 생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지 않는 인생은 살았어도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라는 공간 속으로의 물리적인 좌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적인 내주를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자신는 하나님의 전이고 경배의 처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않는다고 지혜자는 말을 잇습니다. 여기서의 재앙도 물리적인 재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족과 복이라는 것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어떠한 재앙도 재앙일 수 없다는 역설의 뉘앙스가 강하게 풍기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에게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불행과 불만과 원망과 격분과 좌절은 대체로 여호와 경외의 부재와 연동되어 있는 듯합니다. 죄는 생명을 그 삯으로 요구하고 경외는 생명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죽을 것 같은 답답함이 있다면 여호와 경외하는 마음을 기경해 보십시오. 답답함의 원흉들이 모두 여호와 경외로 상대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외부의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물리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말입니다.

인생에는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고 여호와 경외가 생명의 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들로 충만한 것 같습니다. 단언컨대 오늘도 최소한 한번의 계기는 주어질 것입니다. 

부활은 삶의 원리다

부활이 삶의 원리라는 것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살면서 우리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신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서 2장 5절을 보십시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렸다”
이 구절에는 “살렸다”는 과거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비록 주께서 다시 오시는 종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주님과 더불어 이미 죄의 삯인
사망에서 다시 살아난 중생 혹은 일차적인 부활
혹은 영적인 부활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은
중생의 삶이요 영적인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살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범사에 사망은 우리에게 역사하고
생명은 타인에게 역사하는 삶이 바로 부활의 현재적인 삶입니다.

2014년 5월 18일 일요일

여호와의 함께하심

보디발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가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기에 가정의 총무로 삼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위탁을 했습니다 (창39:3)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표현도 가능했을 것인데 성경은 일부러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 주도적인 분으로 묘사하는 듯합니다. 그저 값없이 받은 은혜라는 뉘앙스를 굳이 풍기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입니다. 당연히 복의 근원이며 최고의 복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떠한 복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된 것의 공로를 나 자신에게 돌리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은혜임을 꼼꼼하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보디발이 목격한 것은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한 것입니다. "함께"라는 내용은 같아도 주어의 차이가 공로의 출처를 바꾸는 법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도 주어로서 당신이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알려지되 보디발과 같은 이방인의 눈에 나의 공로가 발견되는 식으로 알려지는 것보다 하나님이 과연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보이는 것이 더 아름다와 보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목숨을 걸고 주님과 동행하되 그분의 은혜라는 사실이 훼손되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 유독 마음이 끌립니다. 주일내내 그분을 묵상하며 기념하고 싶습니다. 

2014년 5월 16일 금요일

마땅히 빌 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롬8:26)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은 마땅하지 않은 것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구하는 것의 취득에 근거하여 희비의 엇갈림이 생깁니다.
이는 마땅하지 않은 것이 우리의 생을 희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지적에 우리는 대체로 불편함을 느낍니다.

결국 이런 평가가 싫어서
마땅하지 않은 것이 마땅하지 않은 줄 알면서도
마땅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뻗뻗한 어거지를 부립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추종을 보시면서
떡 먹고 배부른 까닮이란 진단을 내리신 바 있습니다.
마땅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는 생의 근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것,
정하심, 부르심, 칭의, 거룩, 영화의 수순이 바로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선이든 악이든 유익이든 손해이든 심지어 죽음이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선입니다.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살면 믿음의 대상이 증거되는 삶이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믿음의 대상과 무관한
나 자신만 드러나고 내 의만 추구하는 삶으로 전락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살아계심, 상 주시는 분이심이
바로 의인의 삶이 증거하는 내용이다.

믿음은 신비로운 하나님의 선물이다.

2014년 5월 14일 수요일

일상적인 만남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가 나를 붙드신 것이로다 (시3:5)

시인은 잠들고 깨어나는 일상에서 주의 붙드심을 읽습니다.

차암~~ 부럽네요.
섭리 감지력이 호흡의 차원까지 커버하고 있어 보입니다.
이는 주의 붙드심에 대한 맹목적인 억지가 아닌 듯합니다.
하루하루 매 순간마다 경험하는 실재를 고백한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희귀한 정보의 분량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남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것에서 성화의 자신감을 얻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경우
오직 하나님이 수면과 기상의 주관자란 사실에서
'천만인이 자신을 애워싼다 할지라도
두려워 할 일이 아니라'는 신앙의 담력을 얻습니다.

이런 담력은 정보의 단순한 취득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그분이 나에게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의
일상에서 다져진 내공과 맞물린 성령의 은혜인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누워 자고 깨는 일상에
머리 둘 곳이 있도록 범사에 그분을 인정하고 싶습니다.
일상 밖에서의 특별한 일들에서 주님을 발견하는 것은
내면의 신앙이 아니라 대외적 생색용일 경우가 많습니다.

지혜가 거리에서 외치고 장터에서 목청을 돋우며
떠들썩한 네 거리에서 소리치고 성문 어귀에서 말을 전한다는
지혜자의 언술에는 모든 일상에서 혹 더듬어
주님을 찾아 발견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의도가 보입니다.

일상은 결코 삶의 지루한 반복이 아닙니다.
가장 익숙한 형태로, 편한 파자마 차림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현장인 것입니다.
양장과 격식으로 꾸며진 만남보다 더 좋습니다.

급작스런 만남, 특이한 셋팅에서 이루어진 경험에서
신앙의 이야기 꺼리 발굴에 허덕이는 신앙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가능하면 지양해야 되겠어요.
일상의 신앙에서 풍기는 그윽한 향기가 더 좋거든요.

2014년 5월 13일 화요일

신론적 사유

지혜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않는 자를
거만한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잠13:1).

꾸지람은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에게 유익하고
자신을 유쾌하게 하지 않는 것들은
하나님의 진리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진리를 현상에 종속시킨 경우
본질에 대한 실존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경우인 듯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천하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선악을 정교하게 가를 정도로
예리한 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심기가
영혼의 차원까지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불편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꾸지람과 불편인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과 슬픔과 아픔과 재앙도
그런 자비로운 꾸지람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올바른 섭리적 의미에 도달하는 접근법인 것 같습니다.
이성의 꼭지가 180도 돌아갈 일이라는 거 모르지 않습니다.
나타난 것의 원인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바울의 인식론은 우리에게 거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론의 대체물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신론 중심적인 사고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2014년 5월 9일 금요일

Herman과 Jul과의 만남

오늘은 사당동에 갔드랬다. 만나기로 약속한 Julius Medenblik 총장님과 Herman Selderhuis 교수님을 뵙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곳에서 두 분을 다 뵐 줄은 몰랐었다. 빼곡한 스케줄 때문에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반가움과 친밀감은 족히 나누었다. 진짜 반갑더라. 셀더하위스 교수님과 대면한 것은 처음이다. 학위논문 출판 때문에 만났는데, Refo500 관련 팜플렛을 여러 종 주시면서 소문내 달라신다. 외모와는 달리 참 따뜻하고 소탈한 분이셨다. 7월에는 Grand Rapids에 오신단다. 그곳에서 대화의 봇따리를 풀자는 여운을 남기고 헤어졌다. 오늘 오전은 그렇게 숨가뻤다...행사의 실무를 총괄하신 안인섭 교수님껜 인사도 못드릴 정도였다.


2014년 5월 8일 목요일

Jul 총장님의 배달

칼빈 신학교의 총장님이 한국을 방문했다. 미국에서 뒤늦게 제본된 박사학위 논문을 친히 배달해 주시었다. 자상하고 따뜻한 총장님의 소탈하신 면모를 또 다시 경험한다. 이와 유사하게 2주 전 조병수 총장님은 식당에서 친히 무우무침 쟁반을 들고 다니시며 배식해 주시기도 했드랬다. 혹시나 머언 훗날에 어떤 총장이 된다면 이런 기억들을 떠올리고 말테다...Mr. President Medenblik, thanks for your kind and surprising delivery!

2014년 5월 7일 수요일

어느 곳이든 벧엘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거기에 계십니다.
어떠한 상태에 있더라도 함께 계십니다.

죽음의 기운을 몰고 다니는 형 에서의
집요한 추적과 상봉의 두려움 속에서 야곱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러한 마음상태 속에서도
"과연 하나님은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도
우리는 스스로의 지각으로 알지를 못합니다.
그래도 안다면 무한한 은혜의 결과일 것입니다.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출입을 목격한
야곱의 사닥다리 경험은 사람의 의식과 판단이 중지된
꿈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은혜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벧엘에 있어도 우리는 그러한지 잘 모릅니다.
"어느 곳"이 얼마든지 벧엘일 수 있음도 잘 모릅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눈동자는 값없이 의인된 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음부에 거한다 할지라도 거기 계실 분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 수요예배 드리신 성도들의
영혼을 파고든 메시지인 듯합니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합니다.
참으로 야속한 규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규정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주시고자 하는 것과
우리가 기대하는 것 사이의 무한한 간격에서 비롯된 듯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일어나는 갈등과 충돌의 불쾌한 현상에서
우리의 참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은총에서 멀어진 우리 말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보다 높은 차원의 가치는
하나님의 뜻과 공의와 거룩과 영광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방인의 기호가 머무는 종착지가 아닙니다.
당연히 이방인이 구하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바르게 식별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안에 "이방인이 구하는 것"과
씨름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 같습니다.

선한 동기와 올바른 목표의 확보는
비록 보이지는 않아도 가장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교회가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지점이길 바라게 되는군요.

2014년 5월 6일 화요일

주님을 중심으로 모시라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괜찮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를 어쩌지요?
주님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가
너희 안에 거하시길 원하며"라 한 바울의 기도처럼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곳에 모시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질문했던 제자들을 향해
"믿는 것이 너희의 일이라"는 답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함이 어떨까 싶습니다.

행한대로 갚으시되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동기의 무게를 다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에 근거한
갚으심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그곳보다 더 큰 은혜와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생명력의 출처

요즘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유쾌하고 기발하고 유명하고 바람직한 것들도 생명력의 원천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는 생명의 살아있는 운동력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도무지 해명할 수 없지만 부정될 수 없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주님은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최고의 것을 이미 선물로 주셨는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영생의 말씀이라 해도 결코 과장된 수사가 아닌 것입니다. 

코람데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도 감사한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중심을 본다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는 중심이란 대체로 마음의 찰라적인 동기일 것이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아마도 모든 만물과 역사와 우리 각자의 일대기 전체를 그 모든 것들 너머에서 보시되 그 모든 것들의 본질을 꿰뚫는 중심일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란 인식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는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를 것입니다.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함부로 판단자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세상이 심지어 하나님의 순적한 섭리마저 거스르는 역류의 현상을 보인다 할지라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주님께서 의로운 우수로 역사의 축을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이 안식처와 같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공휴일의 헐렁한 도심지를 뚫고 합정동의 조용한 연구소에 왔습니다. 십분이 멀다하고 울부짖는 기계식 주차장의 모터 돌아가는 기계음도 오늘은 들리지가 않아 노트북의 팬 돌아가는 소리가 굉음에 가까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에 대해서도 우리는 상대적인 지각과 반응이 불가피한 인생인가 봅니다. 그래서 영원한 말씀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의미있는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대적인 인간이 절대적인 가치에 편승할 수 있어서 좋아 보입니다...

2014년 5월 4일 일요일

하나님의 교회란~~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역동적인 사심이 가장 명확하게 경험되고 증거되고 보여지는 곳입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되는군요. 그리고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터는 기반이고 기둥은 만국까지 선포되는 것을 뜻합니다. 사탄의 집요한 공격은 진리의 터를 허물고 기둥을 꺾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너지면 교회의 본질도 훼손될 수밖에 없음을 사탄의 영특한 머리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 진리의 보존과 전파...오늘 설교를 통해 가슴에 새긴 교회의 본질입니다...

2014년 5월 2일 금요일

청교도의 기도 특강

백석 신대원에 가서 청교도의 기도에 대해 두 번의 특강을 했습니다. 예배실의 강단에서 강의하는 바람에 강의가 아니라 저도 모르게 '설교'를 하고 왔습니다. 백석 학생들의 진지한 눈빛과 적극적인 호응과 흐트러짐 없는 집중력이 인상에 크게 남습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목회자가 되시라는 당부와 함께 강의를 접었는데 나 자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내용을 말하고 말았다는 부끄러운 마음도 들더군요. 이것이 말을 많이 하는 자의 삶에 늘 되풀이될 듯하네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