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새해를 맞이하며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주님께서 친히 보이신 선,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그것은 바로 1) 공의를 행하며, 2) 인자를 사랑하며, 3)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가족은 이 구절을 2016년 1년동안 붙들고자 한다.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실행하며,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며, 각자의 눈에 좋은대로 행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을 부인하는 겸손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려 한다. 주께서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2015년 12월 21일 월요일

창세기 듣기

오늘은 창세기를 쭈욱 들었다. 무수한 인물들과 사건들로 다가오신 하나님의 자상하고 친절하고 진실하고 자비로운 첫인상을 창세기라 부르고 싶어진다. 

2015년 12월 20일 일요일

계획과 인도자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오늘은 이 말씀이 참으로 감미롭다. 내 계획이 내 인생을 주도하지 않아서 감사하다. 세운 나의 계획에 의존하지 않고 걸음의 인도자인 하나님을 의지함이 안식이요 행복이다. 

2015년 12월 18일 금요일

스튜어티 밀의 독서법

시카고 대학에서 제공하는 철학고전 읽기 목록이다.

<제1년차>
001 『미합중국독립선언서(美合衆國獨立宣言書)』
002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003 소포클레스 『안티고네(Antigone)』
004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Politics)』
005 플루타크 『영웅전(Bioi Paralleloi)』
006 『신약(新約)』중 '마태복음'
007 에픽테투스 『인생담(人生譚)』 발췌
008 마키아벨리 『군주론(君主論)(The Prince, 1513)』
009 셰익스피어 『멕베드(Macbeth, 1606)』
010 밀턴 『출판(出版)의 자유』
011 스미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1776)』
012 패더랠리스트(Fedaralist) 『미합중국헌법(美合衆國憲法)』
013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 발췌
014 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015 소로우 『시민의 반항(Civil Disobedience, 1849)』, 『월든(Walden, 1854)』
016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제2년차>
017 『구약(舊約)』중 '전도서(Ecclesiastes)'
018 호머 『오딧세이(Odyssey)』
019 소포클레스 『오이디프스 왕(Oedipus the King)』,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Oedipus at Colonus)』
020 플라톤 『메논(Meno)』
021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스 윤리학(Ethika Nikomacheia)』 발췌
022 루크레티우스 『우주론(Of the Nature of Things, 55 BC)』
023 아우구스티누스 『고백(Confessions, 397)』
024 셰익스피어 『햄릿(Hamlet, 1594-1623)』
025 데카르트 『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 1637)』
026 홉스 『리바이어던(Leviathan, 1651)』
027 파스칼 『팡세(Pensees, 暝想錄)』
028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1727)』
029 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人間不平等起源論)』
030 칸트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031 밀 『자유론(On Liberty, 1859)』
032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884)』
<제3년차>
033 『구약(舊約)』 중 '욥기'
034 아이스킬로스 『오레스티아(Oresteia)』 3부작
035 투키디데스 『펠로포네소스전쟁의 역사(The History of Peloponnesian War, 404-401 B.C.)』
036 플라톤 『향연(Symposium)』
037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Politics)』 발췌
038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1267-73)』 중 '법률론'
039 라블레 『가르강뛰아와 팡타그뤼엘(Gargantua and Pantagruel, 1535)』
040 칼빈 『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1536)』
041 셰익스피어 『리어왕(King Lear. 1605-6)』
042 베이컨 『대혁신(The Novum Organum, 1620)』
043 로크 『정치론(Two Treatises of Civil Government, 1690)』
044 볼테르 『깡디드(Candide, 1758)』
045 루소 『사회계약론(The Social Contract, 1762)』
046 기본 『로마제국 쇠망사(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776-88)』 제15-16장
047 도스토에프스키 『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1881)』
048 프로이드 『정신분석의 기원과 발달(Introductory Lectures on Psychoanalysis, 1917)』
<제4년차>
049 공자(孔子) 『논어(論語)』
050 플라톤 『국가(Republic)』
051 아리스토파네스 『여인의 평화』, 『구름(Clouds)』
052 아리스토텔레스 『시학(Rhetoric)』
053 유클리드 『기하학제요(幾何學提要, Elements of Geometry)』
05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자성록(自省錄, Mediations)』
055 엠페이리코스 『절대회의설(絶對懷疑說)』 제1권
056 『니벨룽겐의 노래(Volsunga Saga or Nibelungenlied, 1204)』
057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1267-73)』 중 '진실과 허위에 대하여' 발췌
058 몽떼뉴 『수상록(隨想錄, Essays, 1580-88)』
059 셰익스피어 『템페스트(Tempest, 1594-1623)』
060 로크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90)』
061 밀튼 『실락원(Paradise Lost, 1667)』
062 흄 『오성론(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748)』
063 니이체 『선악의 피안(Beyond Good and Evil, 1886)』
064 제임스 『실용주의(Pragmatism, 1907)』
<제5년차>
065 유리피데스 『메디아(Medea)』, 『히폴리투스(Hippolytus)』, 『트로이아의 여자』
066 플라톤 『테아이테투스(Thaetetus)』
067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Physics)』 발췌
068 베르길리우스 『아에네이드(Aeneid)』
069 성(聖) 프랑시스 『작은 꽃(Little Flowees)』
070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1267-73)』 중 '인간론' 발췌
071 단테 『신곡(The Divine Comedy, 1300)』 중 '지옥편', '연옥편'
072 단테 『신곡(The Divine Comedy, 1300)』 중 '천국편'
073 미란드라 『인간의 존엄에 대하여』
074 버클리 『인지원리론(人智原理論,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1710)』
075 뉴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1687)』
076 보스웰 『새뮤얼 존슨 전(傳)(Life of Samuel Jhonson)』
077 칸트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 to any Future Metaphysics, 1783)』
078 울먼 『일기(日記, Journal, 1774)』
079 멜빌 『백경(白鯨, Moby Dick, 1846)』
080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The Theory of Relativity, 1916)』
<제6년차>
081 아이스킬로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Bound)』
082 플라톤 『파이드로스(Phaedrus)』
083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Metaphisics)』 제7권
084 롱기노스 『숭고성(崇高性)에 대하여(Periarkhon)』
085 아우구스티누스 『자연과 성총(聖寵)에 대하여』, 『성총과 자유 의지에 대하여』
086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1267-73)』 중 '신(神)에 대하여'
087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sles, 1398)』 발췌
088 셰익스피어 『리차드 2세(The Tragedy of King Richard Ⅱ, 1594-1623)』
089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Don Quixote)』 제1부
090 스피노자 『윤리학(Ethics, 1675)』 제1부
091 흄 『자연종교에 대하여(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092 볼테르 『철학사전(Philosophical Dictionary, 1764-73)』 발췌
093 헤겔 『역사철학(Philosophy of History, 1837)』 발췌
094 다윈 『종의 기원(The Origins of Species, 1859)』 발췌
095 멜빌 『빌리 버드』
096 제임스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 1898)』
<제7년차>
097 플라톤 『고르기아스(Gorgias)』
098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대하여』
099 마하바라타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
100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
101 마이모니데스 『방황하는 자를 위한 지침』
102 존 던 『시집(詩集, Song and Sonnets, 1633)』
103 몰리에르 『타르튜프(Tartuffe)』, 『고객(顧客, Tradesman)』
104 라이프니쯔 『형이상학(Discourse on Metaphysics, 1686)』
105 칸트 『도덕철학[실천이성비판,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1790)』
106 괴테 『파우스트(Faust, 1774)』
107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lstellung, 1819-44)』
108 키에르케고르 『철학적 단편 후서(1846)』
109 도스또에프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1861)』
110 콘라드 『어둠의 속(The Heart of Darkness, 1902)』
111 프로이트 『꿈의 해석(Traumdeutung, 1900)』
112 조지 버나드 쇼 『인간과 초인(Man and Superman, 1903)』
<제8년차>
113 아리스토파네스 『섬』, 『평화』
114 플라톤 『파이돈(Phaedo)』
115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Physics)』 제2권
116 『신약(新約)』 중 '로마서', '고린도 전서'
117 가레노스 『천부(天賦)의 기능』 1 및 3
118 셰익스피어 『헨리 4세(King Henry Ⅳ)』 1
119 셰익스피어 『헨리 4세(King Henry Ⅳ)』 2
120 하비 『혈액 순환의 원리(On the Motion of the Heart, 1628)』
121 데카르트 『영혼의 목마름(The Passions of the Soul, 1650)』
122 밀턴 『투우사 샘슨(Samson Agonistes, 1671)』
123 피히테 『인간의 사명(Die Bestimmung des Menschen, 1800)』
124 바이런 『돈 주안(Don Juan)』, 칸토스 1-4
125 J. S. 밀 『공리론(公理論, Utilitarianism, 1863)』
126 니체 『도덕의 계보(The Genealogy of Morals, 1887)』
127 헨리 아담스 『헨리 아담스의 교육(The Education of Henry Adams, 1918)』
128 예이츠 『시』 14편
<제9년차>
129 호머 『일리아드(Iliad)』
130 헤로도투스 『역사(History)』 8-9
131 플라톤 『소피스트(Sophist)』
132 아리스토텔레스 『분석론(分析論)』
133 타키투스 『연대기(年代記, Annales)』
134 플로티노스 『엔네아데스(Enneades)』
135 루터 『가라테아서 평석(評釋)』 발췌
136 갈릴레오 『신과학대화(新科學對話, Dialogues Concerning Two New Sciences, 1638)』
137 라신 『페드라(Phaedra, 1667-77)』
138 비코 『신과학(Principi pi una scienza nuova)』
139 발자크 『고리오 영감(Le Pere Goriot)』
140 마르크스 『자본론(資本論, Capital, 1867)』 발췌
141 입센 『물오리(The Wild Duck)』
142 제임스 『심리학(Principles of Psychology, 1890)』 21-22장
143 보들레르 『악의 꽃(Les fleurs du mal)』
144 포앙카레 『과학과 가설(假說)』 4-5장

http://m.blog.naver.com/kang8021/40208475756에서 재인용.

2015년 12월 17일 목요일

독서토론 심사평

정죄나 훈계가 아니라 지속적인 독서에 유익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O^

1. 먼저 한 학기동안 어렵고 두터운 신학책을 일독하며 흘리신 수고의 땀과 신학적 진보에 감사를 표합니다. 함께 읽으면서 저도 많은 배움과 도전을 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2. 비록 어려운 책이지만 독서는 저자의 뜻과 의도를 간파하는 것이 우선이고, 정리는 이해된 내용의 핵심을 중심으로 진술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부분의 학우들이 이 부분에 있어서 잘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3. 그러나 올바른 독서의 또 다른 핵심은 저자와의 지성적인 대화에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토론적인 혹은 비평적인 독서"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자와 독자의 지성적 교류를 감지할 수 있는 과제물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관찰자의 자리가 아니라 사유의 현장에 뛰어들어 저자와 치열하게 씨름하는 과정이 생략된 독서는 생기가 빠진 정보의 주입일 뿐입니다.

4. 정리하실 때에 가장 안좋은 습관들 중의 하나는 저자의 언어와 표현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언표의 조각들을 있는 그대로 편집하는 것입니다. 제출하신 과제물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 있어서도 충분한 자기화의 증거를 보여주는 개개인의 고유한 언어가 발견되지 않아 아쉬움이 컸습니다. 어떤 신학적 사상을 나의 고유한 언어에 담아 세상에 출고하는 작업은 출산의 기쁨과 설레임에 준하는 일입니다.

5. 그리고 가능하면 읽은 내용에 대한 독자의 적극적인 평가가 포함된 과제물이 있는지를 보았더니 잘 보이지가 않더군요 ^^; 내용에 대한 이해도 없이 비판 일변도로 나가는 독서도 문제지만 문서화된 사상의 무비판적 용인도 동시에 경계함이 좋습니다. 물론 성경에 대해서는 무비판적 아멘만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책은 아무리 탁월한 석학의 글이라도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독서법이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6. 끝으로 저자의 어법을 따르되 흐름이 있도록 한 페이지로 요약해 내시는 솜씨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학우들의 성실과 이해도의 입증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자의 난해하고 학구적인 표현에 읽은 내용의 핵심들을 촘촘히 담아내는 이런 정도의 실력이면 이 세상에 정복하지 못하실 신학책은 없을 듯합니다.

앞에 지적한 부분들만 유의해서 신학책의 지속적인 독서를 해 가신다면 앞으로 훌륭한 목회자와 신학자로 준비되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습니다. 참으로 귀한 과제물을 성실하게 준비해서 제출해 주신 모든 학우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유익하고 은혜로운 방학 보내세요~~ ^^

2015년 12월 7일 월요일

『묵상: 성도의 품격 』, 감사의 글


감사의 글

먼저 저의 첫번째 묵상집 『미러링: 더 깊은 묵상』을 읽고 주변에 추천해 주시고 많은 격려를 보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생각으로 말씀을 가까이 하며 받은 은혜와 배운 깨달음을 공유하면 좋겠다는 뜻에서 묵상의 조각들을 블로그에 올리고 모아서 묶은 책입니다.

많은 분들이 때로는 따끔한 질책과 기발한 제안을, 때로는 진지한 찬사와 과한 호평을 보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모든 반응들은 말씀의 사역에 전념해야 할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저에게 음으로 양으로 너무도 귀한 자양분이 됐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가슴에 담고 있다가 다음 묵상집에 꼭 반영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묵상을 했습니다. 또한 묵상법의 필요성과 이유와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지속적인 수정과 보완을 해 왔습니다.

이제 다시 사랑하는 믿음의 선배와 동역자, 형제자매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두번째 묵상집을 내밉니다. 이번에는 이론편을 조금 강화해서 신구약과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말씀의 구속사적 중심성을 함께 나누고 이에 대한 단상을 간결하게 썼습니다. 이는 제가 평소에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절감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중요성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묵상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사랑의 묵상법은 첫번째 묵상집에 수록된 글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묵상의 방법들에 대해서는 강연과 북콘서트 및 질의응답 속에서 새롭게 배우고 깨달은 내용들을 기존의 묵상법과 통합하고 재구성해 보다 체계적인 형식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느낀 점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에 있어 “다 이루었다” 경지에 도달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을 알며 그 일부분도 선명하게 알지 못하고 희미하게 알기 때문에 지적인 완전성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더욱 깊어지고 확신은 더욱 견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정보의 분량과 관련된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와 관련된 사랑의 증대가 지속적인 묵상이 주는 풍성한 열매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 묵상집에 실린 실재편이 잘 보여줄 것입니다.

이번에 책 제목을 <묵상: 신자의 품격>으로 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묵상은 신자의 고품격 됨됨이와 삶의 모든 실천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투를 벌이지 않고서도 신자의 고유한 품위를 유지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신자의 정체성과 삶은 말씀을 규칙적인 끼니처럼 날마다 주야로 먹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신자의 품격이 묵상의 고상한 모양새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말씀으로 인해 내가 깨어지고 부서지고 낮아지고 죽고 없어지는 동시에 말씀으로 살고 말씀과 더불어 살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고 말씀 안에서 살고 말씀 자체가 그 안에서 사는 전인격적 묵상이 신자의 품격과 직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책의 출간에 함께한 강인구 세움북스 대표님과 직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묵상에 다양한 의견을 남겨 주신 「미러링」의 독자들과 제 블로그를 방문해 주시는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졸고를 읽으시고 추천사를 써 주신 류호준 교수님, 서자선 집사님, 신현우 교수님, 그리고 친구 안상혁 교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사모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위로와 지혜와 능력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2015년 양평에서 저자 한병수

2015년 12월 6일 일요일

학문의 통일성

김영규 교수님 강의의 요약과 '자의적인' 해제 (2015.12.04)

1. 인과율(원인과 결과)의 문제를 푸는 것이 대체로 철학과 학문의 역사였다. 예전에는 시공간의 물리적 논리적 원인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경우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원인을 추구하되 그 궁극적인 원인을 때로는 우연이나 운명에게 때로는 어떤 신에게 돌렸다. 그때에 교회에서 신학은 주된 학문이며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관계성을 가지고 공존했다. 지금은 학문의 통일성이 특별히 과학에 의하여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다. 일례로서 뇌과학의 발달로 심리학과 철학이 흡수되는 듯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과학이 학문의 통일성을 주도할 때에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다. 일례로, 작금의 과학 수준이 담아내지 못한 비과학적 요소들은 배제된다. 

2. 오늘날 학문의 통일성이 촉발된 배경에는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사실, 즉 개개의 부분들과 부분들의 합에서는 도무지 알려지지 않는 내용이 전체성 속에서는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분화된 전문 영역들이 각자의 기능에 의해서는 그리고 그것들의 병렬적인 통합에 의해서는 해명하지 못하는 지식의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전체성에 의해서만 담보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문제는 학문의 통일성에 대한 기호가 학문들 사이의 경계선을 허물 정도의 근본적인 사실의 발견이나 기발한 이론들의 등장과 무관하게 범람하고 있다는 점이다.

3. 오늘날 학문의 통일성을 주도하는 과학이 봉착한 한계는 인과율을 해명하되 그 궁극적인 원인으로 소급하면 할수록 혼돈으로 빠진다는 사실이다. 자연에는 분명히 질서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질서의 원인을 찾으려고 면밀히 관찰하면 그 실체가 "혼돈"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질서와 혼돈의 분리가 불가능해 졌고 혼돈에서 질서가 나온다는 비과학적 인과율 앞에서 과학은 당황하고 있다. 질서와 혼돈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 개념의 조합이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다. 혼돈이 고려되지 않으면 어떠한 현실의 질서도 해명되지 않는다.

4. 자연의 질서가 혼돈에서 나온다는 말은 오늘날 과학이 사물과 사태와 사건의 궁극적인 근원을 모른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인과율의 해명이 혼돈의 벽에 부딪혔기 때문에 문명과 학문의 수천년치 발전이 어쩌면 허상으로 간주될 상황이다. 앞으로도 학문의 발전은 혼돈을 가중시킬 방향으로 진행될 전망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의 현실과 방향은 창조의 본질과 잘 상응한다. 창조의 본질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다"는 시인의 고백에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 만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무에서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 원인이 추적되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5. 만물의 근원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당연히 말씀으로 무에서 존재하게 된 만물의 원인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추적하면 해답의 없음과 질서의 없음으로 인해 인과율의 마비가 초래된다. 인과율의 시초를 추적하기 위해 극미시 세계와 극거시 세계에 학문의 고성능 눈길을 돌려도 무질서와 혼돈만 발견된다. 기존에 질서라고 간주하고 수학적인 공식으로 안심하고 대체했던 현상들도 실제로는 무질서와 혼돈을 보인다는 사실이 과학을 당황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가역적 사실의 축적으로 인해 오늘날의 과학은 모든 현상에 질서와 무질서가 공존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6.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조작과 통제가 불가능한 무질서와 혼돈을 무시하고 인간에 의해 가공된 매끈한 질서를 자연에 강요하면 인간 자신과 자연의 파괴만 가속시킬 것이다. 인간이 지금 추구하고 있는 학문의 통일성은 과연 정당한가? 오히려 인류의 유익에 역행하는 것은 아닐까? 학문의 인위적인 통합은 결국 혼돈과 무질서를 생략하게 되고 그 결과는 자연과 역사의 있는 그대로의 통합이 아니라 인간에게 발견된 지식 조각들의 임의적인 땜질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된다.

7. 성경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고 있다. 비약적인 결론을 말하자면, 학문의 진정한 통합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게 함"이 온전한 통합의 유일한 해법이다. 모든 학문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한 형상을 이루는 보조적인 수단이란 사실에서 비로소 그 존재감을 확보한다. 

2015년 11월 27일 금요일

하나님의 전능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계19:6)

할렐루야! 우리의 주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의 능력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제한이 없기에 측량할 도구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껏해야 한계가 없다는 부정적인 어법으로 겨우 하나님의 권능을 묘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계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더듬어볼 수도 있겠지만, 긍정적인 표현의 사용이 때로는 보다 생동적인 구체성을 제공할 수 있기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전능과 통치에 대해 하늘에서 내려온 이 찬양의 소리가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레의 소리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물론 요한이 들은 찬양의 소리에 하나님의 전능 개념을 다 담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속성은 이 땅의 어떠한 것으로도 담겨지지 않고 온전히 전달할 수레로서 어떠한 종류의 번역어도 없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결국 자신을 친히 계시하신 성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전능을 인간 편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마19:26).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엇이든 원하기만 하면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은 의지하실 수도 있고(volle) 의지하지 않으실 수도 있으며(non volle), 하기로 의지하실 수도 있고(volle) 안하기로 의지하실 수도 있습니다(nolle).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무언가에 대한 의지와 비의지(volitio et nolitio)에 제한이 없습니다. 단순히 무언가에 대한 기호나 선택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무언가를 구현할 능력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무언가”의 항목에는 인간이 보기에는 불가능한 것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사실 인간의 눈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제한적인 능력에 근거하여 ‘말도 안된다’는 경솔한 판단을 내리기 쉽습니다. 심지어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그냥 꾸며낸 교훈적인 우화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홍해의 마른 갈라짐도, 요단강 흐름의 끊어짐도, 기브온 골짜기의 중천에서 벌어진 태양의 중지도, 남자를 모르는 처녀의 잉태도, 죽은 지 사흘이 지난 시체의 부활도 인간이 보기에는 맹랑한 헛소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한하신 하나님 자신과 전능하신 그분의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인간의 무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 관점에서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능을 함부로 생략한 성경 해석학은 언제나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신적인 말씀의 인간화일 뿐입니다. 신적인 전능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의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닌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해는 성경 해석학의 전제이며, 동시에 성경 전체가 신적인 속성의 계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고려가 성경 해석학의 처음과 나중이 되지 않으면 필히 오석과 왜곡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전능은 신비롭고 불가능한 일들의 이해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들도 하나님의 전능을 떠나서는 결코 이해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없이도 인간의 유한한 능력으로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일들이 대단히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일들의 주체로 언급되는 경우도 대단히 많습니다. 성경에서 그러한 경우를 접할 때 우리는 대체로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전능에 대할 명시적인 기록보다 어쩌면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걷기도 하시고 자기도 하시고 먹기도 하시고 지치기도 하시고 다치기도 하시고 울기도 하시고 노하기도 하신 일들은 모두 인간에게 너무도 평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도 되신다는 점에서 그렇게 평범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신비롭고 놀라운 것입니다.

진정한 고수는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어떠한 힘도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그러한 고수와도 같습니다. 전능하신 분이 유한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전능만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도 얻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유한의 행보를 보이실 어떠한 필연성도 없습니다.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죽기까지 연약한 무능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저에게 이것은 신적인 전능의 역설적인 모습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평범한 기록들은 신적인 전능의 관점에서 볼 때 맹목적인 에너지의 막대한 크기가 아니라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신적인 사랑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전능을 생략한 채 그 기록들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결코 읽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통치는 하나님의 전능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통치에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도무지 불가능한 초자연적 요소들도 있지만 너무도 평범해서 당연하게 보이는 자연적인 요소들도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 찬양의 내용으로 선포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 때문에 “할렐루야” 찬양은 합당하고 마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도 비록 전능자의 통치를 다 해아릴 수는 없겠으나 지식의 충분한 확보와 승인이 없더라도 하늘에서 요한에게 들린 소리처럼 당위적인 찬양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면밀히 살펴보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과 자연적 조화에서 지각되는 핑계하지 못할 신적인 전능의 충분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의지와 비의지가 모두 가능하신 전능자가 무언가를 하셨다면 그것은 평범하든 기이하든 최상의 판단에서 이루어진 최고의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최고의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 중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보다 더 좋은 일들을 행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 아래에서 일어나는 범사가 다 최고의 일들임을 저는 믿습니다. 물론 인간의 부패와 죄악이 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범사에 마땅히 감사할 수밖에 없음은 하나님의 전능에 의존한 것입니다.

2015년 11월 26일 목요일

개의 미련함 고발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잠 26:11). 잠언의 다른 곳에서는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는다고 할지라도 벗겨지지 않을 것으로서 미련함을 소개한다. 미련함은 한 개인의 일대기와 세상의 역사가 늘 보여주는 일상이다. 세상에는 온갖 미려한 것들이 지겹도록 반복된다. 인간의 미련이 바뀌지 않으니까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늘 미련한 일들을 토해내고 토한 그것을 다시 먹어댄다. 개개인의 삶도 동일하다. 늘 우매했던 그 동일한 지점에서 늘상 넘어진다. 아니 우매를 스스로 거듭 자초한다. 개는 그 본성대로 토한 것을 도로 먹기를 중단하지 않으며 인간의 이러한 우매함을 시간이 종결되는 순간까지 고발하는 직무에 충실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련함의 사슬은 주의 은혜로만 끊어진다. 오늘도 그래서 엎드린다.

2015년 11월 14일 토요일

하나님의 연단

"우리를 단련하되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시66:10).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는 분이시다. 이 연단에 모든 것들이 다 동원된다. 지극히 사소하게 보이는 일 속에서도, 완전히 무의미한 사건처럼 보이는 것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독과 궁핍과 고통과 연약과 무기력과 절망과 억울함과 슬픔과 허무함과 침체와 실수와 비참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신다. 삶에 어떠한 일이 없는 듯하여도, 내 안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듯하여도 연단은 진행되고 있다. 그 일하심이 너무도 은밀하여 우리의 지각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우리의 무지가 하나님의 연단과 일하심을 없이하지 못한다. 

2015년 11월 13일 금요일

주님의 도우심

Give us aid against the enemy, for the help of man is worthless. 나를 도우시는 분은 주님 뿐이시다. 사람의 도움은 무익하다. With God we will gain the victory. 하나님과 함께 하면 승리를 얻는다. 승리의 방식이 이러한 것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가 결국에는 승리한다. 사람의 도움을 비굴하게 구걸하지 않아도 된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주님과의 동거와 동행이 진정한 승리의 관건이다...

2015년 11월 10일 화요일

"지식과 학문의 통일성"

12월 4일(금) 저녁 7:00-9:30에 예수가족 교회에서 개혁주의신학연구소 세미나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지식과 학문의 통일성" 문제를 다룹니다. 지식의 중다한 분량과 학문의 번잡한 세분화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최적의 방법이 있다면 지식과 학문의 통합성 재고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주제는 우리 시대의 신학자요 철학자요 과학자인 김영규 목사님이 가장 적합한 강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17세기 정통주의 시대의 선수를 들자면 단연 요하네스 하인리히 알스테드 아제일 것입니다. 알스테드의 학문적 통일성 이해는 제가 소개할 것입니다. 교회에 자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원하시는 분은 아무나 오십시오~~ ^^. 간식준비 및 강의안 준비를 위해 댓글로 참석 여부를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5년 11월 1일 일요일

통합적인 성경읽기

a) 믿음의 방식: 믿음으로 묵상하기
b) 일치의 방식: 주님처럼 묵상하기
c) 존재의 방식: 됨됨이로 묵상하기
d) 실천의 방식: 행함으로 묵상하기
e) 무위의 방식: 있는 그대로 묵상하기
f) 유비의 방식: 주제를 따라 묵상하기
g) 지속의 방식: 무시로 묵상하기
h) 반복의 방식: 반복해서 묵상하기
i) 초월의 방식: 신적인 속성으로 묵상하기
j) 통합의 방식: 성경 전체로 묵상하기
k) 죽음의 방식: 자기를 부인하며 묵상하기
l) 적응의 방식: 적응 이전으로 소급하는 묵상하기
m) 주어의 방식: 주어이신 하나님을 존중하는 묵상하기
n) 우선의 방식: 성경을 따라가는 묵상하기 (주제, 논지, 논리)

2015년 10월 28일 수요일

무지한 치리자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잠28:16)

상대편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자신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이해한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게 된다.

국가의 최고 책임자가 국민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의 이해를 국민에게 강요하게 된다.

무지한 치리자는 짐승적인 포학이 의사표시 수단이고
겁박의 주먹이 의사관철 방편이다.

권세가 많을수록 높은 차원의 이해력이 요구된다.
책임이 커질수록 이해력 의존도도 높아져야 한다.

국가나 교회나 가정이나 다른 어떤 공동체나
치리자의 몰이해와 포학이 늘 문제의 원흉이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 측량되지 않는 하늘의 통치자는
길이 참으시고 널리 품으시고 포학이 없으시다.

그런 치리자에 향한 고대와 갈증이 갈수록 증대된다.

2015년 10월 26일 월요일

현세적인 복의 약속

현세적인 복에 대한 약속도 주신 이유는 4가지다.

1) 하나님과 창조에 대한 지식을 위해서다. 현세적인 복들, 즉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그 주관자다.

2) 교회를 현세의 삶 가운데서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현세적인 삶이 필요하고 삶의 유지를 위한 필수품이 필요하다.

3)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행사하고 기도하며 현세적 도움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감사의 마음은 그런 식으로 보존된다.

4) 현세적인 약속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상기하게 하며 영원한 약속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모든 현세적인 복은 그리스도 때문에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현세적인 복을 구할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를 상기할 수밖에 없어진다.

멜랑히톤, [신학통론], 285-286 요약.

2015년 10월 24일 토요일

종교개혁: 인격과 삶의 신학

1.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신다.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보복의 칼을 뽑으면 월권이다. 그렇다면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원수를 축복하고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당하는 피동성이 아니라 적극적인 능동성의 표출이다. 우리는 그렇게 저항한다. 이는 마치 오른뺨 맞고 왼뺨 돌리는 격이겠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대응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의 해법이다.

2. 종교개혁 기념하는 시기에 우리가 엄밀하고 순수한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그 신학의 품격만큼 고품격 대응이 가능한 인품과 삶의 준비를 숙고해야 한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대체로 개혁주의 신학을 바르게 아는 것도 빈사상태 수준이며,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도 안하무인 수준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원래 입술의 작용이 아니라 치열한 인격과 삶이었다. 어떤 신학자는 신학을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르고 복되게 사는 삶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그런 속성을 가진 신학을 정보로 취득하고 입술로 출고한다. 이건 아니다. 원래는 신학을 인격으로 흡수하여 삶으로 표출해야 했다.

3. 올바른 신학은 늘 성경으로 돌아갈 발판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대한 갈증을 일으킨다. 그러나 고착된 제도나 교리나 의식에 안주하면 성경을 대체하고 성경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던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필히 답습하게 된다. 성경에 지문 한번 묻히지 않고서도 사제직을 수행함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로마 가톨릭의 문제는 중세만의 현상도 아니고 특정한 집단만의 전유물도 아니고 온 교회가 늘 경계해야 할 교훈으로 오랜 역사 속에 지속되어 온 하나님의 섭리적 허용이다.

4. 나는 다양한 신학적 경험을 가졌지만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 기원과 발전과 체계화의 시대를 연구했다. 그런데 연구하면 할수록 진리의 엄밀성을 추구하게 되고 그 진리의 샘인 성경으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오류와 실수의 늪에서 허덕일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준비와 서곡 차원에서 신학을 공부한다. 그런데 인격이 그리스도 예수를 품고 삶이 십자가의 도를 담아내지 않으면 진리의 엄밀성은 결코 추구되지 않으며 성경은 아무리 다가가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먼 당신임을 늘 확인한다. 신학은 원래 경건을 요구하고 인격의 변화를 요구하고 삶의 혁신을 요구하고 실제로 수반한다.

5. 종교개혁 정신을 따라 진정 성경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경건하고 검증된 신학의 계보를 따라 믿음의 선배들이 때로는 실수로 때로는 본으로 남긴 신앙의 역사적 자취를 분별하고 가장 좋은 유산만을 선별하고 계승하고 순전하고 명료하고 충분하고 온전하고 무오류한 하나님의 신적인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되 인격과 삶의 방식으로 그리해야 한다. 인격과 삶 없이는 결코 성경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인격과 삶의 변화와 혁신과 거듭남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 요청에 부응하지 않고서도 올바른 신학을 배우고 익혔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이다.

6. 역사 속에서 구현되고 오랜 세월 검증된 바른 신학을 배우고 계승하여 인간의 고질적인 오류를 걸러내고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을 성경답게 존중하고 성경 안에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삶이 올바른 신학이다. 엄밀한 신학은 온 세상과 역사를 다 품어낸다. 신비롭다. 엄밀성과 포용성의 동행은 가능하다. 물론 그 방식은 타협과 변질과 타락의 형태가 아니라 안으로는 진리의 엄밀성을 고도로 추구하되 밖으로는 진리에 역행하는 자들의 까칠한 광기도 참고 그런 광기의 지속도 인내하는 사랑의 극한 아픔과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이다.

7. 진리의 엄밀성, 그것을 담아내는 바른 신학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마치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율법 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고스란히 드러내신 죽음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길을 가는 도상에서 부득불 그런 고통이 떠밀어낸 신음 차원에서 신학적 의분을 격발할 수는 있겠으나 그러한 때에라도 나의 신학적 후련함을 추구하지 않고 혹시 모를 진리의 훼손과 거부감 유발을 의식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때로는 비겁하게 보이고 때로는 무기력해 보인다. 그러나 진리의 부흥, 인격과 삶의 바른 회복은 인간적인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늘 인정하며 진리의 단 한 조각이라 할지라도 바르게 증거됨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각오로 묵묵히 인내의 걸음을 옮기는 게 우리의 도리이고 우리의 최선이라 생각한다.

8. 언어적인 방식이든 문헌적인 방식이든 신학적인 사안이든 문화적인 사안이든 보복은 월권이다. 그러나 보복의 중지는 여전히 소극적인 대응이다. 축복하고 기도하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런 대응의 방식으로 신학의 엄밀성을 전인격과 삶 전체로 추구하되 온 천하와 만민과 온 역사가 다 품어질 때까지 그리해야 한다. 급하게 변론의 칼을 뽑거나 비판과 정죄의 검을 휘두르는 건 승부의 포기이며 패배의 자인이다. 올바른 신학의 길은 초인의 길, 하나님만 바라보는 승부, 진리만이 위로와 만족이 되는 행보이다. 

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소요리 4-5 하나님의 지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3)

저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싶습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은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이러한 본성적인 지혜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는 신적인 지혜가 오묘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창조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묘사하되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분”(시136:5)이라고 하였으며, 바울은 새로운 창조물인 교회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하늘의 통치자들 및 권세들 모두에게 알리고자 원하셨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각종 지혜”(엡3:10)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이것은 “영원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일”(엡3:11)이라고 말합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부터 창조의 시대와 그 이후의 재창조 시대까지 펼쳐져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지혜가 번뜩이지 않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의 지혜가 개입하지 않은 역사는 한 순간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양적인 부요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단순히 분량의 차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질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히 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사람의 기준으로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은 사람의 머리가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단순히 사물이나 사태나 사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쉽게 추적되고 헤아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골2:3). 그렇기에 그리스도 예수를 모르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발견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이가 인간문맥 안에서 약간 더 지혜롭고 박식하면 그에게로 가서 지혜와 지식을 구합니다. 그러나 보석 수준의 지혜와 지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석학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제공하는 땅에서의 지혜가 아닙니다. 시대와 장소를 따라 변동되는 세상 통치자의 임시적인 지혜도 아닙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감취었던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인데 그 지혜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고전1:23, 2:7). 이 지혜는 너무도 심오해서 이 땅에서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이 세상에는 없다고 선언하고 입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지혜에 비하면 이 세상의 지혜는 미련한 것일 뿐입니다.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십시오. 로마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음을 촘촘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영원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작정에서 창조와 섭리에 이르는 구원의 모든 경륜사는 하나님의 지혜가 펼쳐지는 장입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으나 결국 타락하여 죄악과 저주와 절망의 사슬에 결박되어 있었을 때에 노아를 부르시고 아브람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다윗을 부르시고 선지자를 부르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고 사도들을 보내셔서 인류의 회복을 이루시되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으로 자신의 백성이 택자임을 보이시고 율법을 주셔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죄 아래 가두시고 인간의 혈통에 따른 편협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택하심을 따라 보편적인 교회의 구원을 이루셔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온 천하와 역사와 만민에게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범세계적 구원에 있어서 혹시 모른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 믿음의 조상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시되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의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셔서 혈통에 따른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 되셨다고 바울은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비록 인간의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지만 믿음이 결코 폐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께서 율법의 마침과 완성과 성취가 되셨으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개념에 모든 율법을 함축시켜 천하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단 하나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과 이방인, 할례와 무할례, 율법과 복음의 조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경륜은 단순히 땅에서의 인과율에 뿌리를 두지 않고 시간 이전의 영원으로 그 원인이 소급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지적하며, 사도는 위의 본문에서 아구의 개패가 조절되지 않을 정도의 메머드급 감탄사를 격발했던 것입니다. 한 인간의 구원은 땅에서의 변동적인 원인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소급하고 소급하여 더 이상의 상위 근원으로 소급할 수 없는 구원의 마지막 인자라고 할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됨됨이나 사람의 지식과 행실도 고려되지 않았기에, 바울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리브가를 향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기 위한”(롬9:11) 것이라는 진단을 내립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식이나 논리나 추론에 의해서는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질문하고 답하는 문답법이 백기를 들고 투항해야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을 책잡을 수 없고 잘못을 저질러도 하나님이 뜻하신 것이니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자들은 하나도 없게 되는 것 아니냐’는 힐문 투척자에 대해 “이 사람아 네가 누구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을 던지느냐…토기 제작자가 진흙으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반박하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앞에서 인간의 그 경솔한 아구를 닫으라고 했습니다.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을 만드신 토기장이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의 섭리는 인간에게 이성의 논리적인 동의를 구걸하기 위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과 능력이 창조만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도 분명히 증거되어 모든 입술이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부르게 만듭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경외의 탄성을 지르며 항복의 백기를 올립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여!” 

2015년 10월 21일 수요일

정의 행하기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정의를 행하기 싫어함이니라 (잠21:7)

악인은 정의를 싫어한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그들의 범법은 정의 혐오자의 삶이요 일상이다. 그들의 범법으로 말미암은 피해의 일차적인 대상은 타인이다. 그러나 지혜자는 악인의 강포가 자기의 소멸을 낳는다고 가르친다. 범법은 자기 학대라는 이야기다. 그들은 범법으로 자멸을 자초한다. 정의의 불이행과 악인의 강포와 자신의 소멸은 이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정의를 사랑하고 정의 행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를 보존하는 첩경이다. 자기를 보호하는 것은 탈취로 부를 축적하고 주먹으로 원수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를 사랑하고 법을 준행하면 된다. 여기서 정의는 하나님의 판단이고 법은 하나님의 질서이다. 창조자가 내리는 판단과 설정해 놓은 질서는 나 자신의 보존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주어진 복이다.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복이 아닌 복처럼 보이는 것에 가볍게 이끌린다. 복이 아닌 것을 추구하면 그게 불법이다. 그 불법을 좋아해서 이루어진 모든 행실도 불법이다. 그래서 복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고 그 복을 추구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복은 추구하지 않아도 문제이고 알아보지 못해도 문제이다. 다시 말하지만, 복은 하나님의 정의이고 그 정의를 추할 때에 우리에게 복이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에게 유익이다.

사회는 물론이고 교회에도 불법이 자행되고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훼손하고 내리신 판단을 거북하게 여기는 일들이 교회 곳곳에서 자행된다. 성도의 머릿수에 집착하고 헌금의 액수에 연연하고 교회의 성공적인 모양을 연출하고 하나님의 나라보다 교회의 건물 축조에 집착하고 사람의 부패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혼탁하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함과 무관하다. 그런데도 집단으로 앞다투어 매달린다.

교회를 위한다고 생각하며 실행했던 것들이 자멸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불법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도 시급하고 바르게 이해된 의를 준행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하다. 악인의 강포는 겉으로 드러난 과격함 이전에 정의 행하기를 싫어함의 결실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싫어함의 해법은 좋아함에 있다. 하나님의 정의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해야 한다.

교회를 참으로 사랑하고 보존하여 세상의 영속적인 빛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내리신 판단과 정하신 질서로서 정의 행하기를 좋아하고 소원하고 실제로 실행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위해 신학한다. 인간적인 의의 세속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적인 의의 성경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익히고 실행하기 위해서 신학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이 본분에 충실하지 않은 모든 행실은 악인의 강포로 분류된다.

2015년 10월 19일 월요일

고통과 죄의 차이

고통은 육신에 작용할 뿐이지만 
죄는 거기에 더 나아가서 마음을 더럽히고 감정을 흩뜨려 놓습니다.

고통은 개선하지만
죄는 파괴합니다.

고통은 목숨을 빼앗을 뿐이지만
죄는 영혼을 탈취합니다.

고통에 시달리다 해도 양심을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방주가 파도에 흔들려도 노아는 그 안에서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육신이 고통으로 흔들려도 기독인은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죄를 범하면 양심이 끔찍한 두려움에 눌립니다.

[회개], 76.

2015년 10월 14일 수요일

종교개혁, 현대적 의미

개혁주의신학연구소: 종교개혁 세미나 특강 (2015.10.13)

종교개혁, 그 현대적 의미 (김영규 목사)에 대한 한병수의 개인적인 요약

1. 종교개혁 운동은 성경으로 돌아가되 성경 텍스트로 돌아가는 운동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의 진정한 본질과 자유 그리고 진정한 나 자신을 알아가는 "진실의 회복"을 추구했다. 성경 텍스트의 문헌적인 회복으로 좁혀서 종교개혁 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그리고 "오직은혜" 및 "오직믿음" 개념도 종교개혁 운동의 고유한 공헌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어거스틴 신학의 회복으로 봄이 더 타당하다. 이는 "오직은혜" 및 "오직믿음" 사상의 공로를 종교개혁 인물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경건한 교부에게 돌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2. 루터는 종교개혁 깃발로 여겨지는 95개조 반박문 안에서도 밝혔고 자신의 저작들 전집의 서문에서 또 다시 강조했던 것으로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마치 종교개혁 정신의 결산처럼 강조했다. 이는 지식이 없고 명예가 없고 권력이 없고 재물이 없다는 이유로 제한과 압박과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그런 진정한 자유의 회복에 대한 외침이다. 루터의 이런 가르침을 따라 무지한 자의 배움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연약한 자의 치유를 위해 병원을 세우고, 가난한 자들의 생존을 위해 복지관을 세우는 일들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본성적인 공동체 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올바른 내용으로 그 시대에 이루어진 일들이다.

3. 르네상스 운동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의 문제점은 그 운동을 고대의 희랍 사상으로 돌아간 운동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사실 르네상스 운동의 발흥은 1277년으로 소급될 수 있다. 그리고 14세기에 잘 정립된 근대 과학의 DNA에 해당되는 실험정신 및 운동 개념들은 희랍철학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한계를 허물고 오류를 제거하고 극복하는 르네상스 운동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다시 말하면, 어거스틴 사상에 의한 희랍사상 극복이 바로 르네상스 운동의 요체라는 것이다. 물론 15세기 말렵과 16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원전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구호는 고전의 문헌적인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로의 사상적인 회귀는 아니었다.

4. 종교개혁 사상은 잘못 이해된 르네상스 운동의 극복이 아니었다.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조금 더 발견하고 인간의 본질을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각성을 보다 진지하게 시도하고 자유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신장을 성경 안에서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선언했고 구현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르네상스 사상과 종교개혁 사상은 대립이나 대체의 관계가 아니라 운동의 결이 유사하다. 다만 종교개혁 사상은 르네상스 운동보다 성경의 보다 깊은 비밀을 발견하여 드러냈고 이로써 자연과 인간과 사회의 진실을 보다 부요하게 확증하고 실현했다.

5.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에 1) 자신은 열렬한 교황주의 학자였고, 2) 교황 자체를 싫어하고 부정할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3) 오히려 교황을 높이면서 면죄부에 대한 오용을 지적했고, 4) 이웃에 대한 사랑에 더 강조점을 두고 붓길을 옮겼다는 점을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고백했다. "관습은 저항하지 않으면 필연성이 된다"(consuetudo, si ei non resistitur, fit necessitas)는 어거스틴 문구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오랜 습관에 의한 오류들과 싸우되 홀로 싸웠으며, 그런 맥락에서 "신적인 법에 의거하여 교황은 교회의 머리일 수 없다"(papam non esse iure divino caput ecclesiae)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출처가 하나님이 아니면 마귀일 수밖에 없다는 필연"(quod enim ex Deo non est, necesse est ex diabolo esse)을 알면서도 오래동안 교황을 마귀에게 속했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였다. 루터 자신은 평화를 열망했고 임종의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섭리론을 붙들었다.

6. 칼빈의 종교개혁 정신과 개혁주의 신학도 상당부분 루터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1530년을 기점으로 신학적 입장의 차이가 선명하게 확인되자 개혁주의 내에서 다양한 고백서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개혁주의 신학의 의미는 대체로 루터를 수용하되 루터가 이룬 자연과 인간과 자유와 자아에 대한 진실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넒이를 성경에 대한 보다 엄밀한 의존성과 더불어 더욱 진전시켜 나갔다는 것에 있다.

7. 종교개혁, 그 현대적인 의미는 종교의 개혁은 단순히 종교계 내부의 변혁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의 해석학적 신장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제도적인 관습의 철폐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과 인간과 사회와 온 인류에 성경이 말하는 보다 근원적인 진실을 부요하게 드러내고 누리고 구현하고 증거한 종교개혁 인물들의 행보가 우리의 시대에 우리의 행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안에서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실을 탐구하고 발굴하고 정립하고 살아내고 드러내고 증언하는 것이 종교개혁 기념의 본질이다.

2015년 10월 4일 일요일

종교개혁에 대한 단상

종교개혁 기념하는 시기가 다가온다. 곳곳에서 펼쳐질 종교개혁 행사들이 기대된다. 아름다운 결실을 맺고 그 모든 결실들이 협력하여 주님의 교회에 은혜롭고 따끔한 선지자적 목소리가 들려지길 소원한다. 짧은 단상을 정리한다.

1. 종교개혁 신학은 교리 몇 조각의 수정이 아니라 종교 일체의 변화였다. 물론 표면상 구원론을 둘러싼 일이지만 보다 본질적인 면에서는 신본주의 v.s. 인본주의 사이의 대립과 교체였다. 종교개혁 필요성이 고조되는 상황이란 대체로 사소한 겉모양을 취하지만 이면에는 기독교 진리의 본질을 훼손하는 속임수가 도사리고 있다.

2. 종교개혁 신학은 교회 안에서의 개혁만이 아니었다. 중세의 유럽은 대부분의 국가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기에 교회의 개혁은 범국가적 변화에 영향력을 발휘했고 때때로 현저한 변화까지 수반했다. 이로 보건대, 16세기의 개혁은 교회의 물리적인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의 회복까지 의식한 개혁의 시도였다.

3. 종교개혁 운동을 지나간 과거의 사건으로 추억하는 것은 종교개혁 정신의 현재적인 역동성을 제거하는 태도이다. 종교개혁 운동을 과거의 시간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무의식적 오류이다. 특정한 시대에 국한된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인 접근법일 수는 있겠으나 종교개혁 사상의 핵심이 반영된 이해는 아니다.

4. 종교개혁 사상의 핵심 슬로건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제대로 온전히 개혁된 교회가 있었는가?" 만약 지금까지 제대로 온전히 개혁된 교회가 없다면 우리는 이 슬로건의 앞부분도 구현되지 않은 교회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직시해야 한다.

5. 이 슬로건은 진행형 개혁을 요청하고 있다. 먼저는 최소한 종교개혁 시대에 이루어진 개혁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렇게 개혁된 교회는 보다 성경에 가깝도록 이후로도 지속적인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이처럼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 개혁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개혁에 있어서는 어떠한 지점에 이르러도 "다 이루었다" 탄성은 불가하다.

6. 개혁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고 나부터 시작해야 하고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자신이 선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 진정한 개혁은 하나님의 진리 한 조각이 나의 인격에, 나의 생각에, 나의 행동에, 나의 삶에 새겨져 보다 온전한 증인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동원된 사람들의 머릿수가 개혁의 크기를 좌우하지 않고 구호를 외치고 떠들썩한 행사를 벌인다고 개혁이 미소를 보내는 건 아니다.

7. 개혁의 성패를 외부의 반응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반드시 개혁의 본질을 벗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긍정적인 추임새를 넣는다는 것이 교회의 올바르고 온전한 개혁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혁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개혁이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개혁을 시도했고 개혁을 이루었다. 이단으로 정죄되는 길이었다.

8. 개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람의 소원과 사람의 노력과 사람의 인내와 사람의 협력으로 산출하는 인위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주께서 한 시대에 부으시는 은혜의 결과이고 누군가가 그 개혁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무한한 은혜이다. 물론 교회의 회개와 정직과 겸손이 대체로 가까운 원인으로 동원되는 모양새를 취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2015년 9월 28일 월요일

양평 미술관, "공존"

계절마다 새롭게 단장하는 양평 미술관의 이번 테마는 "공존"(coexistence)이다. 뚱뚱한 말과 홀쭉한 말, 다양한 색상의 돼지들, 반듯한 병과 기울어진 병, 영상과 조형물, 한복과 모나리자, 동양과 서양, 사나운 늑대와 천사의 날개가 공존을 시도한 겔러리 현장에서 10여년을 산 아이들은 한국과의 공존을 시도했다.










성경을 생각하며

성경을 공부하며 우리는 신적인 지혜를 절묘하게 배열하고 전시하신 하나님의 기막힌 솜씨에 경탄해야 한다. 지혜의 부요함과 미와 명료성과 통일성은 성경 곳곳에서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성경 이야기와 진술에 스며들어 있는 하나님 자신의 통일성과 합리성을 의식하며 그것이 단긴 질서와 체계를 읽어내야 한다. 읽어질 때에는 기뻐하고 읽어지지 않을 때에는 경외하면 된다. 특별히 성경은 세상의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진리의 교훈이기 때문에 우리를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한다. 세상의 교훈과는 구별된 하늘의 신령한 음식들이 풍성한 식탁, 성경이 있어서 한가위가 더욱 풍성하다.

2015년 9월 26일 토요일

가난과 부의 절충점

여호와는 가난케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이런 하나님에 대해 야게의 아들 아굴은 나를 가난케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여 주시라"고 기도했다. 오늘날 교회가 드려야 할 기도라고 생각한다. 상식 선에서만 생각해도, 가난하면 먹거리를 근심하게 되고 부하면 돈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부패가 뒤따른다. 나 개인의 삶도 그러하다. 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난하게 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주님, 저에게는 그렇게 해 주옵소서...아굴처럼....

2015년 9월 25일 금요일

세미나 있습니다


라틴어, 1주일에 정복

프레드릭 휠록의 라틴어 챕터별(전체 40챕터) 강의 비디오다. 하루에 10개씩(길어야 1시간반 정도)만 보면 5일 이내로 문법이 정복된다. 이걸 5번정도 반복하면 1개월이 걸린다. 하루종일 투자하면 하루에 문법은 독파한다. 5일간 반복하면 라틴어 문법 전체가 머리에 새겨진다. 1주일에 라틴어 문법을 끝장내는 방법이다. 그리고는 강독(라틴 벌게이트 성경)에 들어가라...6개월만 지나도 라틴어는 곧장 제2 외국어로 등극한다. 걍 덤비시라. 된다!!!

라틴어 챕터별 비디오 사이트

도르트 총회 회의록

V&R이 도르트 총회의 서기였던 호미우스(Festus Hommius) 손으로만 기록된 [진짜배기 회의록](Acta authentica)을 출간했다. 이것은 국가가 승인하고 출간한 Acta nationalis가 삭제하고 수정한 부분들의 맨살을 그대로 담았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앞으로 호미우스와 함께 지명된 다른 총회서기 담맘(Sebastian Dammam)의 [축약본 회의록] (Acta contracta)은 아마도 2권으로 출간될 것으로 예상된다. 도르트 신조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말이 필요하지 않은 진짜배기 필독서, 출간을 환영한다.

Donald Sinnema et al (eds.), Acta of the Synod of Dordt (V&R, 2015)

2015년 9월 24일 목요일

첫번째 학술서적

5월에 출간된 책이 4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도착했다. 본격적인 학술서적 출간은 처음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싼 책출간($125)은 마지막일 듯하다. 이 책은 학생 신분의 마침표인 동시에 학자 행보의 첫걸음에 해당된다.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신학자의 초심을 호흡하는 동안에는 잊지 않으련다.


2015년 9월 22일 화요일

아내의 항암치료 종료

오늘은 아내의 6개월치 항암치료가 종료되는 날이었다. 더 이상의 항암치료 필요하지 않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는 순간 아내와 나는 하늘을 날아갈 듯하였다. 정말 주님께 감사했다. 물론 재발 가능성이 늘 도사리고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6개월간 접수했던 부엌과 가사도 아내에게 절반을 돌려주려 한다. 그동안 기도와 격려와 사랑의 손길로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방인 문헌들과 성경

세상의 학문들과 기술들은 유용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적을 명심하면 좋겠다. "비록 이방인의 책이 유용하긴 하지만 거기에서 수집된 모든 지식은 성경의 지식에 비한다면 참으로 상대적인 수준이다. 이는 무릇 인간이 바깥에서 무언가를 배운다고 하지라도 만일 해로운 것이라면 성경의 단죄를 받고 유익한 것이라면 성경에 이미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공부론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기이한 음성을 듣고 신령한 장면을 목격해야 비로소 진리를 배웠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히포의 교부는 사람에게 배워야 하는 교훈들이 있고 전하여야 할 교훈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신적이고 천상적인 음성으로 땅에 엎드려 가르침을 받은" 바울도 "사람에게 보냄을 받아 안수를 받고 교회에 가입하게 된" 사실과 백부장 고넬료도 천사를 통해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으나 베드로의 방문과 가르침과 인도를 받았다는 사실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던 모세도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받았다는 사실과 이사야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던 내시가 천사의 가르침이 아니라 굳이 필립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고 교부는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에 주의해야 할 요소들이 있다. 1)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때에는 그 사람의 "손가락은 보지만 그것으로 가리켜 보이고자 한 항성은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간적인 요소가 진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2) 무언가를 깨달았을 경우에는 자신의 지력에 공로를 돌리지 않아야 한다. 스스로 깨닫는 자는 없어서다. 자신이든 스승이든 진리와 진리의 깨달음은 인간에게 그 공로를 돌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3) 어떠한 배움이든 오직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림이 합당하다. "거짓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참된 것은 어떤 것이든지 "나는 진리"라고 말씀하신 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2015년 9월 16일 수요일

경험은 신앙의 결과

경험은 믿음의 견고한 토대가 아니다. 경험은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과와 토대는 동일하지 않다. 기독교 신앙을 경험 위에 세우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것은 결코 경험의 중요성을 하대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에서 경험은 경험의 고유한 자리가 있다. 그러나 성경이 가지는 신학적 규범성을 경험이 대체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꾸이터의 표현처럼 "하나님은 전적으로 경험의 술어로 전락한다."

2015년 9월 15일 화요일

2015년도 16세기 학회

벤쿠버의 시월이 궁금하다. 16세기 학회의 잔치상에 200여 종류의 신학 주제들이 그곳에서 마련되기 때문이다. 자료집의 분량만 해도 수천 페이지를 방불할 전망이다. 다 교회에 유익한 내용이길 소망한다.

Alting의 로마서

네델란드 흐로닝엔 대학의 교수였던 야코부스 알팅의 로마서 강해집은 590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주석적인 부분도 일반 주석서를 방불하는 고품격 학문성을 갖추었다. 분량은 무려 1400페이지를 육박하되 깨알같은 폰트 사이즈에 두 개의 칼럼으로 된 것이어서 국역으로 나온다면 하한선을 잡아도 족히 8000페이지는 넘어간다. 성경 한 권에 대해 믿음의 선배들이 보인 애착과 열정과 경건이 나의 매마른 경건과 초라한 학문성을 부끄럽게 한다...실제로 부끄럽다.

Jacobus Alting, Opera theologica vol.3 (로마서 전반부)
Jacobus Alting, Opera theologica vol.4 (로마서 후반부)

2015년 9월 11일 금요일

신학용어 참고자료

리차드 멀러가 신학용어 사전을 저술할 때 참고한 자료들
신학을 튼실하게 공부하기 위해서는 신학용어 정복이 우선이다.

Altenstaig, Johannes. Vocabularius theologiae. Hagenau: Heinrich Gran, 1517.
Altenstaig, Johannes. Lexicon theologicum. Koeln, 1619; repr. Hildersheim: Olms, 1973.
Baier, Johann Wilhelm. Compendium theologiae positivae.… Edited by C. F. W. Walther. 3 vols. in 4. St. Louis: Concordia, 1879.
Baudry, Léon. Lexique philosophique de Guillaume d’Ockham: Etude des notions fondamentales. Paris, 1958.
Bauer, Walt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anslated, revised, and augmented by William F. Arndt and F. Wilbur Gingrich. 2d ed. revised and augmented by F. Wilbur Gingrich and Frederick W. Danker.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9.
Berkhof, Louis.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32; repr. Grand Rapids: Baker, 1979. This volume is the prolegomenon to Berkhof’s Systematic Theology. Berkhof’s system is not complete without it.
Berkhof, Louis. Systematic Theology. 4th ed. Grand Rapids: Eerdmans, 1939 (frequently reprinted).
Deferrari, Roy, et al. A Lexicon of St. Thomas Aquinas based on the Summa Theologica and selected passages of his other works. Washington: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49.
Du Cange, Charles. Glossarium mediae et infimae Latinitatis. 10 vols. Repr. Graz: Akademische Druck-U. Verlagsanstalt, 1954.
Gerhard, Johann. Loci theologici. 9 vols. Edited by E. Preuss. Berlin: Schlawitz, 1863–1875.
Heppe, Heinrich. Reformed Dogmatics Set Out and Illustrated from the Sources. Foreword by Karl Barth; revised and edited by Ernst Bizer; translated by G. T. Thomson. Repr. Grand Rapids: Baker, 1978.
Lampe, G. W. H., ed. A Patristic Greek Lexicon. Oxford: Clarendon Press, 1961.
Lewis, Charleton T., and Short, Charles. A New Latin Dictionary: founded on the translation of Freund’s Latin-German Lexicon, edited by E. A. Andrews; revised, enlarged, and in great part rewritten by Charleton T. Lewis and Charles Short. New York: American Book Company/Oxford: Clarendon Press, 1879.
Niermeyer, J. F. Mediae Latinitatis Lexicon Minus: A Medieval Latin-French/English Dictionary. Leiden: E. J. Brill, 1976.
Oberman, Heiko A.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Gabriel Biel and Late Medieval Nominalism. Rev. ed. Grand Rapids: Eerdmans, 1967; repr. Durham: Labyrinth Press, 1982.
Pieper, Francis. Christian Dogmatics. Translated by Theodore Engelder, et al. 3 vols. St. Louis: Concordia, 1950–1953.
Polanus von Polansdorf, Amandus. Syntagma theologiae christianae. Geneva, 1617.
Schmid, Heinrich. The Doctrinal Theology of 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Translated by Charles Hay and Henry Jacobs. 3d ed., rev. Philadelphia, 1899; repr. Minneapolis: Augsburg, n.d.
Seeberg, Reinhold. Text-book of the History of Doctrines. Translated by Charles E. Hay. 2 vols. Repr. Grand Rapids: Baker, 1977.

Turretin, Francis.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Geneva, 1679–1685; a new edition, Edinburgh, 1847.

2015년 9월 9일 수요일

종교의 자유와 법준수

동성 커플의 결혼 허가증 발급에 대한 판사의 최후 명령까지 거부하여 법정모독 등의 혐의로 구속된 킴 데이비스(Kim Davis), 5일만에 미국 시간으로 오늘 출소했다. 그는 출소하며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한다"는 말과 함께 "모든 각자가 서 있는 자리를 정확히 알고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는 섬긴다"고 고백하며 "그분이 여기에 계시므로 주저앉지 말라"고 당부한다.

눈에 띄는 것은 대선주자 허카비가 동성애 동조의 미국적인 흐름까지 대범하게 거스르며 킴을 공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그녀의 옆자리에 섰다는 거다. 앞으로 대선의 화두가 될 가능성도 짙다. 종교적 자유와 공무원의 법준수 의무의 충돌이 이렇게 마무리 되어 감사하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법의 강요를 자신의 투옥으로 저항한 킴에게 태평양 건너편의 양평에서 박수를 보낸다.

용문산엘 갔다

양평입성 1년만에 그 유명한 용문산에 갔다. 주민에겐 주차비도 입장료도 무료였다. 몇 일은 기뻐할 양평군청 조치였다. 용문산 출입을 주말에는 엄두도 못낼 일이지만 주중이라 일체의 교통체증 없이 다녀왔다. 무엇보다 산책길이 쵝오였다. 설교나 책이나 생의 중차대한 전환기에 미래를 구상하면 딱 좋을 코스였다.




2015년 9월 8일 화요일

바빙크와 칸트

바빙크는 칸트를 개신교의 철학자로 이해한다. 이유는 칸트가 최고의 선을 파악하는 것은 도덕적인 의지이며 도덕적 의지의 활동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의지와 구별되는 이성의 한계는 표상되지 않는 하나님과 자유와 영혼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선험적 가상의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마음의 생명에 있어서 주도권이 도덕적 의지에 속했다고 한다. 

2015년 9월 7일 월요일

이계호 교수의 암특강

♡~한번 쯤  읽어 볼만 한 가치가  있는  건강정보인  것 같네요 !  정독해보세요~♡

이계호교수가 밝히는 암세포를 청소하는 면역세포 활성법
(2015년 01월호)

이계호교수가 밝히는
암세포를 청소하는
면역세포 활성법

가을 단풍이 막바지 절정을 이루던 지난 11월 15일.
대전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멀리 제주도에서 비행기 타고 온 사람도 있었고, 경북 안동에서 새벽밥 먹고 올라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비싼 비행기 삯도 불사하고, 또 천리 길도 마다않고 대전까지 달려온 이유는 단 하나!

태초먹거리학교를 세운 충남대학교 화학과 이계호 교수의 건강강의를 듣기 위해서였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진행되고 있는 이계호 교수의 토요 건강강의는 언제나 관심폭발이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암 환자부터 건강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왜일까? 의사도 아닌 그에게 왜 사람들은 이토록 열광할까?
그래서 들어봤다. 이계호 교수가 한 달에 한두 번씩, 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에, 타는 목 물로 축여가며 장장 4시간 동안 전하고 있는 메시지를! 그것도 벌써 4년째 돈 한 푼 받지 않고 무료로 하고 있는 이유를!
글 | 허미숙 기자
도움말 | 충남대학교 화학과 이계호 교수
(태초먹거리학교 설립자)

part1

가을 단풍 좋은 줄 알지만…

“저도 토요일에 놀러갈 줄 압니다. 가을 단풍 좋은 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 단풍 구경 가는 대신 마이크를 잡은 사람!

충남대학교 화학과 이계호 교수다. 2014년 11월15일, 200~300명의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건강강의를 시작한 그의 첫마디는 “나는 의사가 아니다.”는 거였다. “암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다.”는 거였다.

그러나 “암 환우들이 겪고 있는 시행착오를 너무도 잘 알기에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25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딸을 둔 아버지였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스물두 살  딸의 가슴에 작은 양성혹이 발견되어 수술을 했는데 그것이 암세포였다. 그래서 수술과 항암요법, 방사선요법까지 완벽하게 했고, 당연히 완치된 줄 알았다. 그러나 섣부른 예단이었다. 너무도 사랑했던 딸은 스물다섯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그의 곁을 떠났다.

그래서 시작했다. 단풍 구경 가는 것도 마다하고 마이크를 잡은 이유다. 이계호 교수는 “수많은 암 환우들이 생사의 기로에서 겪고 있을 시행착오를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해 올바르게 먹고 올바르게 사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장장 4시간 동안 강조하고 또 강조한 말은 “암에 대한 비법은 없다.”는 거였다. 한두 가지 비법으로 암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거였다. 모든 건강한 사람에게도 암세포는 있으며, 하루에 수천 개, 수만 개가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암 환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건강하다. 도대체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이계호 교수는  “암세포가 아무리 몸에 많아도 암을 제압할 수 있는 면역력만 원래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암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줄기차게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내 몸의 면역력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몸의 면역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는 일에 두 팔 걷어부치고 열심이다. 그 실체를 소개한다.

part2

☆사람은 흙집이다

이계호 교수는 사람을 일러 ‘흙집’이라고 말한다. 우리 몸 성분을 화학적으로 분석해보면 흙과 물의 성분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뼈 성분은 흙의 주요 성분과 화학적으로 완벽하게 일치하고, 우리 몸의 액체 성분은 바다의 성분과 화학적으로 똑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의 한 부분이다.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서는 살 수가 없는 존재다. 자연의 흙과 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하고, 또 되도록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다. 이계호 교수는 “인간이 갖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건강상의 문제는 자연의 법칙에 거슬러서 살기 때문에 생긴다.”고 말한다.

왜? 성공하기 위해서! 그래서 무리를 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제대로 된 먹거리를 먹지 못하면 우리 몸의 균형이 깨지면서 면역시스템에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각종 질병의 발아점이 된다.

따라서 암을 이기는 노하우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 몸의 면역력을 약하게 하는 원인들을 해결하면 된다.

이계호 교수는 “우리 몸의 면역력에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 요소는
▶ 매일매일 먹는 음식
▶ 매일매일 사는 환경
▶ 그리고 24시간의 생활습관이 좌우한다.”
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매일매일 먹는 음식은 우리 몸의 면역력을 좌우하는 바로미터가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먹거리의 참혹한 민낯이다.

이계호 교수는 “지난 100년 동안 가장 많이 변질된 것이 바로 먹거리”라며  “먹거리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고 경제 논리가 끼어들면서 건강에 가장 큰 위협요소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part3

매일매일 먹거리에
숨어있는 면역력 위협 인자

1914년도 사과 한 개에 들어있던 영양소를 지금 섭취하려면 사과 40개를 먹어야 하는 현실!

닭장사육, 밀집사육을 통해 지방살만 잔뜩 오른 질 나쁜 닭을 먹어야 하고, 그런 고기를 먹어야 힘이 생긴다며 중요한 날에는 고기로 포식을 하고….
이계호 교수는 “고기 하나만 이야기해도 인생을 헛살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고기에 숨어 있는 무서운 함정
고기는 우리 몸에 단백질을 공급한다. 골격, 살, 혈액, 머리카락, 심지어 손발톱까지 만드는 재료다.

그래서 단백질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중요한 영양성분으로 분류돼 있고, 하루에 필요한 권장량까지 명시돼 있다. 몸무게 1kg당 0.8g이 하루 필요량이다. 몸무게가 60kg이라면 60×0.8=48g이 하루 권장량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먹다 보니 맛있어서 100g을 먹었다. 그럼 어떻게 될까? 이계호 교수는 “불행하게도 우리 몸에는 쓰고 남은 단백질을 내일까지 몸속에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100g을 먹었다면 오늘 필요한 48g은 골격을 만들고 살을 만들고 혈액을 만드는 데 쓰이지만 쓰고 남은 52g은 저장이 안 되므로 배출이 된다. 간에서 분해되고 콩팥을 통해 소변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니 고기를 많이 먹은 날은 비록 입은 즐거웠으나 간과 콩팥을 반쯤 죽이는 날이다.

따라서 내일 필요한 단백질은 반드시 내일 먹어야 한다. 군대 보내는 아들에게 미리 영양보충 시킨다고 한 달 전부터 고기를 먹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간과 콩팥을 죽여놓고 군대에 보내는 꼴이다.

고기를 먹는 방법도 문제다. 이계호 교수는 “구워먹는 대가가 너무 심각하다.”고 말한다.

요즘 들어 30~40대 젊은 부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캠핑 가는 문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캠핑 가서는 번개탄을 피우고 그물망을 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다.

이계호 교수는 “이 같은 일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이라고 말한다.

우선 번개탄은 요리용이 아니다. 가장 나쁜 건축물에서 나오는 폐목재를 재료로 하여 만든다. 이렇게 만든 번개탄에서 어떤 물질이 나올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은빛 그물망도 문제다. 그물망의 은빛은 중금속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기를 구울 때 기름 한 방울이 톡 떨어지면 연기가 나는데 그것은 PAH라고 하는 인간에게 가장 몹쓸 발암물질 종합세트다. 여성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도 폐암에 많이 걸리는 이유가 조리과정에서 나오는 연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고기를 굽다 보면 검게 탄다. 검게 탄 고기도 맛있다며 열심히 입에 쑤셔 넣는다. 그런데 검게 탄 고기를 분석해보면 검은 성분은 벤조피렌이라는 물질이다. 이것은 그룹1 발암물질로 밝혀졌다. 이것이 우리 몸속에 들어와서 접촉하는 모든 세포는 100% 암세포로 바뀐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기=삼겹살로 생각하고, 전 세계 삼겹살의 거의 대부분은 대한민국으로 수입되고 있다.

그 대가치고는 너무 참혹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장암 환자 증가율 세계 1위다. 발생률도 아시아 국가 중 1위이고  전 세계 171개 나라 중 4등이다.

이계호 교수는 “우리나라는 먹거리에 있어서는 과학이 완전히 무시된 나라”라며 “고기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너무도 가혹한 형벌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너무 과하게 많이 먹고, 바싹하게 태워서 먹는 자극적인 맛을 선호하는 음식문화가 암 발생률의 고공행진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곶감에서 복숭아까지 믿을 것이 없다
고기뿐만이 아니다. 요즘 제철 맞은 곶감 하나도 알고 보면 끔찍한 비밀이 숨어있다. 감을 깎아 곶감으로 말리면 시커멓게 변한다. 그런데 소비자들은 갈색으로 변한 곶감을 외면한다. 보기 좋은 빨간 곶감을 좋아한다.

그래서 곶감 업자는 시커멓게 변한 곶감을 빨갛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황가루를 뿌린다. 그렇게 하면 색깔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먹는 곶감은 빨간색이다.
그런데 황가루를 뿌린 곶감을 먹으면 어떻게 될까? 황이 우리 몸속에 들어오면 침하고 만나 황산이 된다. 이러한 황산은 위장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천식 환자에게는 치명적이다. 만약 집에 빨간 곶감이 있다면 반드시 물로 씻어서 먹어야 한다.

이계호 교수는 “눈에 보기 좋은 음식을 요구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과 얄팍한 상술이 맞물리면서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한 질병 통계에 걸려 있다.”고 우려한다.

심지어 복숭아에 난 기미나 주근깨까지도 용납 못하는 사회여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시중에 팔고 있는 복숭아를 보면 하나같이 하얀 백색 미인이다. 봉지를 씌워서 키우기 때문이다. 봉지를 씌우지 않으면 자외선을 받아서 복숭아에 기미가 생기고 주근깨도 생긴다. 못난 복숭아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기미, 주근깨는 만인의 적이다. 복숭아에 생기는 것까지 도저히 용납 못하겠다는 분위기다. 그러니 기미, 주근깨 생긴 복숭아는 찬밥 신세다. 하얀 백색 복숭아만 잘 팔린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복숭아는 꽃이 떨어지고 열매를 맺을 때쯤 어김없이 봉지가 씌워진다. 태양열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봉지 안에서 당도만 높이며 더할 나위 없이 곱고 예쁘게 자란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숨어있다.

이계호 교수는 “태양빛을 받아서 기미, 주근깨가 박혀 있는 복숭아는 예쁜 복숭아 10개와 맞먹는 영양성분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복숭아의 기미나 주근깨를 가리는 대가 또한 너무 크게 치르는 셈이다.

매실액도 짚고 넘어가자
이계호 교수는 “매실액에 대한 오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강에 치명타를 안겨주고 있다.”고 말한다.

매년 5~6월이면 집집마다 매실 50%와 설탕 50%로 담그는 매실액. 다들 발효효소라고 많이들 먹었지만 설탕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면서 매실액을 발효효소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매실액에서 기대하는 효능은 좀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설탕물이라고 해도 설탕보다는 낫겠지.’ 라며 여전히 봄이 되면 매실액을 담근다.

 하지만 그래도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은 설탕은 결코 좋은 물질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계호 교수는 “설탕은 설탕으로 있든지, 설탕이 발효되어 술로 되든지, 술이 발효되어 식초가 되든지 이 세 가지밖에 될 수 없다.”며 “설탕은 결코 효소가 될 수 없고 비타민이 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과학이다.

그런데 자꾸 매실액의 설탕은 좋은 설탕으로 변했다거나 몇 년 숙성시켜서 좋은 것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반찬을 만들 때도 쓰고, 고기 잴 때도 매실액을 쓰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서 “우리집은 설탕을 전혀 안 쓴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은 결코 변할 수 없다. 우리가 담가 먹는 매실액은 설탕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더해 매실액 담글 때 쓰는 황설탕에 대한 믿음도 재고해야 할 것 같다.

이계호 교수는 “굳이 설탕을 쓰겠다면 설탕 중에 제일 좋은 것은 백설탕”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소리냐고 원성이 자자할 것이지만 황설탕과 흑설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면 아주 쉽게 풀리는 문제다. 설탕을 끓이면 시커먼 원당 같은 것이 된다. 이를 정제하여 만든 것이 백설탕이다.

그런데 백설탕이 나쁘다면서 사람들이 안 사 먹자 여기에 열을 가해 황색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황설탕이다. 흑설탕은 여기에 카라멜색소를 집어넣어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황설탕도 흑설탕도 어떤 좋은 성분이 있어서 그런 색깔을 띠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열을 더 가하고, 색소를 더 넣어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몸에 더 좋은 줄 알고 더 비싸게 사 먹고 있는 꼴이다.

특히 매실액에는 이보다 더 치명적인 약점이 숨어있기도 하다. 이계호 교수는 “유독 매실만 익지도 않은 풋과일을 사서 매실액을 담그는데 풋과일의 씨앗과 육과에는 독이 있다.”고 말한다. 아미그달린이라는 독이다. 이것은 청산이다. 신경성장애물질이기도 하다.

따라서 매실액을 담글 때는 반드시 씨를 빼고 담아야 한다. 씨를 빼기 귀찮으니까 3개월 뒤에 매실을 건져내라고 하지만 청산은 처음부터 있었다. 하루를 담가도 청산은 나오고 90일을 담가도 90일만큼의 청산은 녹아나온다.

이것을 건강한 사람이 먹으면 큰 해는 없지만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임산부다. 이계호 교수는 “씨를 빼지 않은 매실액은 태아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한다. 매실액 한 병이 태아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원인 모를 신경성장애 아동을 출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지난 해 잔뜩 담가놓은 매실액을 어쩌나?’ 울상인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럴 경우 팔팔 끓여서 먹으면 된다. 청산이 날아간다. 그래도 임신부는 먹지 말라는 게 이계호 교수의 당부다.

따라서 매실액을 꼭 담가 먹고 싶다면 반드시 씨를 빼고 담가야 하고, 설탕양은 50%로 하고, 먹을 때는 7배로 희석해서 하루에 반 컵 정도만 먹는 것이 좋다.

이계호 교수는 “이런 잘못된 식습관 때문에 쓸데없는 문제가 많이 생기고 있다.”며 “그래서 우리나라는 종합적으로 유병장수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우리의 자녀들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자녀들은 기성세대보다 훨씬 더 질병 통계가 나쁜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적신호는 켜진 상태다. 유방암 환자의 발병률만 봐도 그렇다. 원래 유방암은 폐경기에 찾아오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발병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이런 공식이 우리나라에선 깨졌다. 미국은 40대 이하의 유방암 환자가 전체 유방암 환자의 5%밖에 안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떨까?

이계호 교수는 “우리나라는 40대 이하의 연령층에서 유방암 발생률이 전체 유방암 환자의 50%에 이른다.”고 말한다. 우리의 딸들이 심각한 환경에 노출돼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자녀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변질된 먹거리 때문에, 성공만 하라고 종용하는 기성세대들의 왜곡된 가치관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은 실패한 성공자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계호 교수는 “이래서는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도대체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길 원하느냐?”고 반문한다. 그것이 결코 암은 아닐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part4

암 환자와 정상인은
종이 한 장 차이

1960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의학자이자 면역학자인 프랭크 버넷 박사는 우리 몸에는 매일매일 수백 수천 개의 암세포가 생긴다는 사실을 밝혀낸 주인공이다.

우리가 발암인자를 피해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 발암인자의 35%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 중에서 발암인자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너무 겁낼 필요는 없다. 이계호 교수는 “낮에 생긴 모든 암세포는 밤에 잠을 잘 때 우리 몸의 면역세포가 청소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매일매일 청소할 수 있을 정도의 면역력을 유지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오늘 생긴 암세포도 잡아먹고, 내일 생긴 암세포도 잡아먹어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면역력이 떨어져 있을 때다. 면역력을 좌우하는 나쁜 환경, 나쁜 음식, 나쁜 생활습관에 의해 면역력이 떨어져 있을 때, 하필 그날, 그 운명의 날에 검게 탄 고기 한 점을 먹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청소하지 못하면 서서히 자라 10년 후 20년 후 정기검진에 덜컥 걸리면 암 환자가 된다.

이계호 교수는 “암 환자는 크게 잘못한 일이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암 환자는 특별히 나쁜 짓을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암 환자와 정상인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이다. 정상인도 언제든지 암 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매일매일 암세포가 생기는데 그것을 억제할 수 있는 면역력이 없으면 언제든지 암 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암 환자가 되고 안 되고는 면역력이 관건이다. 날마다 생긴 암세포를 청소할 수 있는 면역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part5

☆매일매일의 삶속에서
면역력 회복법

이계호 교수는 “우리 몸의 면역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대원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만약 암 환우라면 먹는 것부터 사는 방법까지 모든 것을 전혀 새로운 길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건강을 위해, 혹은 암 예방을 위해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내 몸의 면역력 회복법, 소개한다.

☆면역력을 회복하는 먹거리 원칙

1 자연스럽고 단순한 것을 먹자
이계호 교수는 “내가 하려고 하는 방법이 혹은 먹으려는 음식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단순한지 스스로 체크해야 한다.”고 말한다.  되도록 인공적인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죽염과 천일염이 있을 때 자연스러운 것은 천일염이다. 천일염을 먹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유도 권장할 만한 음식은 아니다. 우유는 원래 송아지가 먹는 것이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걸어다니기 때문에 많은 양의 칼슘과 많은 양의 성장호르몬이 필요하다.

그래서 송아지가 먹는 우유에는 칼슘과 성장호르몬이 많이 들어있다. 송아지 성장에 필요한 성장호르몬이 많이 들어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도 좋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젖소가 우유를 만드는 과정도 인공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강제적으로 인공수정을 시켜서 우유를 얻는다. 그래서 우유는 생산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우유가 아니다. 따라서 암 환우는 우유를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2 갈증 전에 물을 마시자
이계호 교수는 “암 환우들의 공통분모는 물을 적게 마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물 마시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하루에 1.5~2리터 정도 마시는 것이 좋다.

특히 소변 색깔은 내 몸의 물 부족을 알려주는 신호다. 물이 부족하면 소변의 색깔이 노랗게 변한다. 따라서 소변 색깔이 노랗다면 물 마실 때가 됐구나 생각해야 한다.

그래도 버티면 갈증이 난다. 이때는 이미 몸속의 모세혈관이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나쁜 현상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따라서 물은 반드시 갈증 전에 마시자.

제일 미련한 사람이 등산하면서 산 정상에 가서 물을 마시는 사람이다. 등산을 할 때는 물을 마시고 산을 올라야 한다.

특히 아침에 일어났는데 갈증을 느끼고 첫소변을 봤는데 노란색일 때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다. 이것은 잠자는 동안 수분 부족이 일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물이 부족해서 세포가 깨어 있어서 숙면을 취하지 못하게 된다. 그 후환은 실로 두렵다. 잠자는 시간은 암을  청소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면역세포와 암세포가 싸우는 시간이다. 따라서 잠은 충분히 자고 숙면을 취해야 한다.

한편 정수기 물을 마신다면 미네랄이 부족할 수 있다. 이계호 교수는 “이럴 때는 볶은 현미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고 권한다.

현미를 볶고 물을 끓여서 여기에 볶은 현미 반 숟가락을 넣어 휘휘 저으면 현미의 미네랄 성분이 물속에 녹아나와 미네랄이 풍부한 물이 된다.

3 착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계호 교수는 “착한 음식이라고 해서 친환경 유기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친환경 유기농도 평생 밤에 잠 한숨 못잔 채소도 많기 때문이다.

밤에도 비닐하우스에 불을 켜놓고 키우기 때문이다. 성장을 더디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밤에 잠을 안 재운다. 이런 깻잎은, 또 상추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것이 우리 몸에 들어와 좋을 리 없다.

따라서 채소는 되도록 자연스럽게 성장된 것을 먹어야 한다. 되도록 자연농으로 자란 것을 먹어야 한다. 꼬라지는 어설퍼도 영양성분은 월등히 뛰어나다.

한편 채소를 씻을 때는 담금소주+식초를 1:1로 혼합하여 물 5~10배로 희석하여 15분 정도 담가두면 된다. 그런 다음 흐르는 물에 씻어낸다. 담금주는 농약 성분을 제거하고 식초는 미생물 제거 효과가 95%다.

4 전체식을 하자
곡류도 통곡식으로 먹고, 양파도 노란 껍질까지 다 먹고, 고구마도 껍질을 벗기지 말고 먹어야 한다. 모든 재료는 전체를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유행하고 있는 것이 현미 먹기 열풍이다. 그런데 현미를 먹고 건강이 더 나빠지는 사람도 많다. 현미 먹고 위암 걸렸다고 주장하는 의사까지 있을 정도다.

이 세상에는 장점만 있는 게 없다. 현미도 두 얼굴이다. 영양학적으로 볼 때 현미는 완벽하다. 따라올 식품이 없다.

그러나 불용성 식이섬유나 피틴산 등 우리 몸에 들어와 분해가 되지 않는 성분도 들어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우리 몸에 들어와 분해되고 흡수되지 않으면 독이 된다. 장을 나쁘게 한다.

이계호 교수는 “현미가 보약이 되게 하려면 제대로 씹어야 한다. ”고 말한다. 탄수화물을 분해하는 아밀라아제라는 효소는 침속에만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현미식을 할 때는 100번 씹으라는 사람도 있고 50번 씹으라는 사람도 있다.

행여 안 씹을까봐 치아를 32개만 촘촘히 박아놓았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 그 중에 어금니가 20개다. 어금니로 맷돌처럼 갈아서 삼키라는 뜻이다.

그런데 바쁘다는 이유로, 귀찮다는 이유로 안 씹고 넘기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위로 내려가면 죽으로 되고, 이렇게 장으로 내려가면 탄수화물은 분해되지 않은 다당류 덩어리 그대로 있게 된다. 이것이 37도나 되는 장의 온도와 만나면 썩는다. 그래서 독한 방귀냄새를 풍긴다.

만약 현미식을 시작한 후 방귀냄새가 독해졌다면 독이 되는 현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계호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식습관은 맛있어? 배불러? 그러면 끝인 양적인 식사에 치중했다.”며 “이제부터는 질적인 식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례로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이 5분밖에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도 물에 말아 후루룩 마시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이렇게 먹으면 위는 행복하다. 금방 배가 불러서. 그러나 장은 불행하다.

그러나 5숟가락을 천천히 씹어 먹으면 위는 배고파서 조금 불행하지만 그 대신 장은 아주 행복하다.

이계호 교수는 “면역력을 활성화시키려면 장이 행복한 식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몸의 면역세포 80%가 장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면역력의 열쇠는 장이 쥐고 있다. 면역력을 증가시키려면 장을 보살펴야 한다.

현미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현미가 영양학적으로 완벽하다 하더라도 꼭꼭 씹어서 먹지 않고 넘길 경우 장에 독가스만 가득 차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현미식을 할 때는 두 가지 방법을 써보자.
첫째, 현미밥을 먹기 전에 색깔 있는 채소와 과일을 먼저 먹는다. 아무리 밥을 빨리 먹는 사람도 샐러드를 씹지 않고 넘길 수는 없다. 따라서 씹는 연습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소화분해효소도 듬뿍 나온다.

둘째, 현미밥을 지을 때 들깨를 넣고 짓는다. 들깨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씹게 되면 현미밥도 충분히 씹었다는 뜻이다. 특히 들깨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부족한 오메가-3가 풍부하고, 변비에도 좋으므로 적극 활용하자.

☆면역력을 회복하는 생활 원칙

이계호 교수는 “우리 몸의 면역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매일매일의 삶의 방식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3가지는 염두에 두자.

1 꼴찌라도 좋다
우리나라 산에는 소나무가 많다. 열심히 심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지 않았는데도 많은 나무가 있다. 상수리나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도토리나무다. 왜일까?

이계호 교수는 “도토리나무는 자연순화적인 나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약 그해 흉년이 들면 동물이 굶어 죽을까봐 도토리가 많이 달리게 된다. 벼이삭의 냄새를 맡고 흉년인지 풍년인지를 미리 아는 것이 도토리나무로 알려져 있다.

도토리나무에서 열리는 도토리는 다람쥐에는 일용할 양식이다. 가을이 되면 열심히 주워서 자기만 아는 장소에 저장을 한다. 그런데 다람쥐는 기억력이 별로 안 좋다. 10개를 숨기면 제일 많이 찾아먹는 것이 6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찾아먹지 못한 도토리는 어떻게 될까? 싹이 나서 도토리나무로 자란다.

그런데 만약 우리나라에 머리 좋은 다람쥐만 있어 다른 다람쥐가 숨긴 것까지 죄다 찾아 먹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산은 민둥산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이계호 교수는 “이 세상에 꼴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꼴찌가 있기에 산은 산답고 산이 푸르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꼴찌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꼴찌는 패배자로 여긴다. 최고만이 인정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너도나도 어떻게든 꼴찌에서 벗어나고자 죽을 고생을 한다. 그래서 힘들다. 정신적으로 굉장히 무리한 삶을 산다.

그 결과는 지금 참혹하게 나타나고 있다. 17세에 유방암 환자가 있고, 카이스트 다니는 최고 엘리트 학생들이 해마다 집단결핵에 걸린다.

이계호 교수는 “지금 우리의 자녀들은 실패한 성공자의 길을 걷고 있다.”며 “정말로 우리가 바라는 것이 그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꼴찌에게 필요한 것은 최고가 아니다. 최선이다. 중간자에게 필요한 것도 최선이다. 최고한테 필요한 것도 최선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최고를 요구할 게 아니라 최선을 요구해야 한다. 그래도 꼴찌하면 격려해줘야 한다. “네가 있기 때문에 산이 푸르다.”고 말해주자. 이계호 교수는 “그것이 우리의 자녀를 살리는 길”이라고 말한다.

2 마음속의 원한, 분노, 미움은 꼭 버리자
내가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자. 이것들이 있는 한 내 몸의 면역세포 활성도는 바닥이다. 면역력 회복의 가장 큰 장애다.

이계호 교수는 “마음속에 분노, 원한, 미움이 있으면 면역세포 활성화가 안 된다.”고 말한다.

잠자기 전에 ‘내가 이 인간만은 용서 안 하려고 했는데….’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고 오늘부터 지우는 연습을 하자. 누구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내 몸의 면역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원한, 미움, 분노는 반드시 비워야 한다. 그 빈자리에 기쁨, 감사, 남을 위한 봉사를 집어넣어야 한다. 이계호 교수는 “그렇게 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면역력만 원래대로 회복되면 지금 상태가 아무리 나빠도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3 늘 웃으며 살자
지구가 돌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면 웬만한 일은 웃고 넘기자. 최대한 기쁘게 살도록 하자. 웃고 살도록 하자. 왜 웃어야 할까?

이계호 교수는 “우리가 웃을 때 면역세포 활성도가 200배 이상 증가하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고 말한다.

만약 어제 저녁에 검은 고기 한 점을 먹었다면 아마도 우리 몸에는 암세포가 10만 마리 정도는 생겼을 것이다. 이때 웃으면 암세포를 제거할 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웃어야 한다. 훈련을 해서라도 웃어야 한다. 넌센스 퀴즈를 내서라도 웃어야 한다. 실제로 해보자.

“어부가 가장 싫어하는 연예인은?” “배철수!” 이 대목에서 웃음이 빵 터져야 한다.

“우리나라 연예인 중에서 잠을 제일 빨리 자는 사람은?” “이미자!”

이계호 교수는 “매일 아침 식탁에서 면역력을 높이는 이야기를 나누면 그 사이에 암세포가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한 달 전에 검은 고기 한 점을 먹었다면 이로 인해 생긴 암세포 50만 마리를 깨끗이 청소해주는 방법이라며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

보통 나이가 들면 귀가 잘 안 들린다. 그래서 보청기를 낀다. 그런데 보청기를 싸구려로 해서인지  웅웅 소리가 나서 평소에는 가방에 넣고 다니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어느 날 길을 가는데 뒤에서 자꾸만 “같이 갈 처녀” “같이 갈 처녀”라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데 자꾸 “같이 갈 처녀” “같이 갈 처녀” 하나 하도 궁금해서 가방에서 보청기를 꺼내 낀 순간 “갈치가 1000원” “갈치가 1000원”이었다는… 우스갯소리 하나!

☆면역력을 활성화시키는
스트레스 관리법

발암인자는 아니지만 암 발생에 깊숙이 관여돼 있는 스트레스. 이계호 교수는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암의 성장속도를 빠르게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스트레스 지수가 너무 높다는 데 있다.

나이 어린 초등학생부터 칠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층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오로지 성공에 목숨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하기 위해서, 성공일변도의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무리를 하고, 그래서 감당 못할 스트레스를 받고.

이렇게 쌓인 스트레스를 풀겠다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도 하고,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친구를 만나 수다도 떨고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한다.
이계호 교수는 “이러한 현재의 방법은 효과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혈액검사를 해보면 혈액 속의 활성산소 농도가 급격히 증가돼 있다.

이렇게 생긴 활성산소는 세포를 산화시킨다. 세포를 죽인다. 그래서 온갖 질병을 일으키는 원흉이다. 암세포 증식도 빠르게 한다.

이렇게 생긴 활성산소는 여행을 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술을 마신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운동을 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참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 스트레스 해소법은 전혀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술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술을 마시면 활성산소가 제일 좋아하는 짝꿍이 만들어진다. 아세트알데히드다.  술안주로 나오는 고기도 최악이다. 고기는 산성식품이다. 우리 몸속에 들어와 분해 가 될 때 활성산소가 생긴다.

따라서 스트레스 풀겠다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은 활성산소 덩어리를 만드는 셈이다.

학교에서 스트레스 받고 늦게 온 아이에게 피자, 통닭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활성산소를 증가시킨다. 공부를 잘해 서울대를 가도 결국은 실패한 성공자가 되기 쉽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핏속에 생긴 활성산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계호 교수는 “활성산소는 화학적으로 산성”이라며 “따라서 산성을 알칼리성으로 중화시키면 된다.”고 말한다. 이때 색깔 있는 채소와 과일은 최적의 알칼리성 식품이며, 최고의 항산화물질이다.

따라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빨리 색깔 있는 채소와 과일을 먹어야 한다. 이계호 교수는 “토마토의 색깔이 빨간 이유도 중요하기 때문에 눈에 잘 띄라고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활성산소를 중화시키는 물질을 먹으라고 토마토에 숨겨놓았는데 눈에 잘 안 띄면 안 되기 때문에 강조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초록색 오이도, 노란 호박도 다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 현란한 색깔을 띠고 있고, 그 색깔 속에는 중요한 성분이 들어있다. 구조는 다 다르지만 기능은 동일하다. 항산화기능이다.

그런데 여기서 쇼크 하나!
이계호 교수는 “지금 우리는 토마토 하나를 먹는 것도 건강이 나빠지는 식으로 먹고 있어 문제”라고 말한다.

토마토를 독이 되는 방법으로 먹고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출근할 때 애정의 증표로 토마토 2개를 믹서에 갈아서 주는 아내들이 많다. 그런데 그것은 남편을 골탕 먹이는 일이다. 왜?
토마토의 영양성분 라이코펜은 지용성이기 때문이다. 날것으로 먹으면 흡수율이 4%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소화되지 못한 채 장에서 돌아다니게 된다. 장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좀 지혜가 있는 아내는 삶아서 주거나 구워서 주기도 한다. 그래도 흡수율은 100%가 아니다. 역시 장을 힘들게 한다.

이계호 교수는 “외국에서는 토마토를 먹을 때 날것으로 먹든 갈아서 먹든 구워서 먹든 반드시 올리브오일과 같이 먹는다.”며 “따라서 토마토를 먹을 때는 기름성분과 같이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호박, 당근, 브로콜리를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토마토주스 갈 때 올리브오일을 몇 방울 넣어서 갈기도 쉽지 않다. 믹서기가 완전히 기름 범벅이 될 것이다.

이계호 교수는 “이럴 경우 간단한 해결책으로 호두 한 쪽과 같이 먹으면 된다.”고 말한다. 날것으로 먹든, 끓여서 먹든, 삶아서 먹든, 구워서 먹든 지용성 컬러푸드를 먹을 때는 아몬드나 잣과 같은 견과류와 같이 먹으면 환상적인 궁합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견과류에는 불포화지방산이 많기 때문에 기름을 분해하려고 기름분해효소가 왕창 나와서 지용성 성분을 100% 흡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울토마토 먹을 때는 견과류와 함께~ 꼭 기억하자.

장장 4시간 동안, 오로지 마이크 하나만 들고 서서 강의를 계속한 이계호 교수.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또 당부한 말은  “암 환자의 가장 큰 적은 포기”라는 거였다. 면역력만 원래대로 회복되는 생활을 하면 지금보다 절대 나빠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살고, 최대한 단순하게 살 것을 신신당부했다.
이계호 교수는 미국 오레곤주립대학교에서 분석화학,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샴페인(UIUC)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의 방문교수로 지냈다. 현재는 한국분석기술연구소의 소장이자 충남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태초먹거리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주요 저서는 <태초먹거리>가 있다.
출처ᆞ건강다이제스트

2015년 9월 6일 일요일

이해의 지경

사람마다 두려움의 강도가 다르고 감동의 깊이가 다르고 표현의 방식이 다르다. 연약한 자에게는 지극히 사소하게 보이는 것도 두려움의 대상이고, 정서의 근육이 약한 자는 미미한 변화에도 놀라고 격하게 반응한다.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자를 무시하고 하대한다. 나 자신도 모르게 그런 태도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발동한다.

그러나 각 사람의 내면적 형편을 존중하면 아무리 나의 생각과 기대에 낯설고 기이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납하게 된다. 이해의 지경을 넓혀가야 하겠다. 매 순간 사람들을 대할 때에 그러한 마음으로 다가가자. 가족 안에서 다양한 구성원을 대할 때에 먼저 연습하고 훈련하자. 주님의 사랑과 은혜 없이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수시로 절감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5년 9월 5일 토요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3:9)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문맥과 결부시켜 이해하고 싶어한다. 그들에게 믿음은 마치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는 도깨비의 방망이다. "믿음"은 "믿는다"는 행위보다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 어떤 것이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가진 분들은 하나님의 막강한 주먹과 에너지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으로 나의 소원 성취하는 것을 믿음의 내용으로 삼는다. 이는 믿음에 대한 오해와 왜곡과 오용의 사례이다. 

믿음의 의미는 믿음의 조상과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그가 무엇을 믿었으며 어떻게 믿었으며 무엇을 위해서 믿었으며 그 결과는 어떤 것인지를 이해해야 믿음이 이해된다. 바울은 믿음의 조상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며, 무존재를 존재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으며,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었으며, 견고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기록한다. 핵심적인 것은 믿음의 조상이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이 성취시켜 주실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믿음은 나의 소원성취 수단으로 간주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과 관계한다. 믿음의 조상을 비롯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주님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복도 나의 개인적인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믿음의 조상과 함께 받는 복이라고 바울은 가르친다. 이 복은 경제적인 부유함과 사회적인 명예와 정치적인 권세가 아니라 열방이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지는 것과 관계한다. 

판넨베르크의 자연신학

바르트와 헤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뮈니히의 조직신학 교수 판넨베르크는 자연신학 논의의 가능성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내재적 지식"(cognitio insita)와 "습득된 지식"(cognitio acquisita)의 구분에서 발견한다. 이것은 오래된 구분이다. 그러나 자연신학 가능성의 단초로는 진술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뮈니히의 신학자는 하나님에 대한 내재적 지식과 습득된 지식은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신학 가능성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내재적인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게 그의 논지이다. 기발하다. 

2015년 8월 24일 월요일

일치와 자유와 사랑

아우구스티누스의 경구가 향기롭다.

"필수적인 것들에는 일치를, 필수적인 것이 아닌 것들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들에는 사랑을 더하라"(in necessaris unitas, in unnecessaris libertas, et in omnes charitas). 성경이 설정한 필수와 피필수의 경계를 감별하는 것은 각자의 과제겠다.

2015년 8월 21일 금요일

아름다운 그리스도

나의 사랑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 사무엘은 이렇게 표현했다. “Put the beauty of ten thousand worlds of paradises, like the Garden of Eden in one; put all trees, all flowers, all smells, all colors, all tastes, all joys, all loveliness, all sweetness in one. O what a fair and excellent thing would that be? And yet it would be less to that fair and dearest well-beloved Christ than one drop of rain to the whole seas, rivers, lakes, and foundations of ten thousand earths.” (에덴의 동산과 같은 수만 낙원들의 미를 한 곳에 모으고, 모든 나무들과 모든 꽃들과 모든 향기들과 모든 색상들과 모든 맛들과 모든 기쁨들과 모든 사랑스런 것들과 모든 달콤함을 한 곳에 모두어라. 오, 이는 얼마나 대단하고 빼어날 것인가? 그러나 놀랍고도 지극히 사랑스런 그리스도 예수에 비한다면 그것은 바다 전체와 강들과 호수들과 막대한 흙의 토대에 견주어진 한 방울의 비보다 못할 것이리라)

성경의 3중적인 가르침

오늘은 왠지 존 플라벨의 경구가 가슴을 두들긴다. "The Scriptures teach us the best way of living, the noblest way of suffering, and the most comfortable way of dying.” (성경은 가장 좋은 삶의 방식과 가장 고상한 고통의 방식과 가장 평안한 죽음의 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작은 일에의 충성

작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은 위대하다. 세상에서 큰 일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관여하고 계시기에 모든 것이 위대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극히 작은 일에도 충성해야 한다. 

너 자신을 알라

Γνωθι Σεαυτον, nosce te ipsum, 너 자신을 알라

아폴로 신전의 문설주에 박힌 문구였다. 소크라테스는 이 문구에 생기를 주입했고 이로 인한 파급효과 때문에 급기야 죽기까지 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권고를 인간문맥 안에서만 생각해도 사선을 넘나들게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 발견되는 나 자신을 알면 어떻게 될까? 세상이 스스로는 산출할 수 없는 천상의 변혁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나는 알도록 지성의 촉을 최대한 예리하게 세워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나를 응시하는 것이 최상이다. 

2015년 8월 19일 수요일

올 여름에 이루어진 행사들

진주에서 신학특강

개혁주의성경연구소 특강

부산에서 교회를 위한 개혁포럼 세미나
무한에서 신학강좌


성경을 연구할 때

성경을 연구할 때에 어떤 사건이나 언급의 연대나 시기를 추적하게 된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1. 성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2. 그러나 그 역사성 부정의 반작용 차원에서 역사성에 갖히는 과잉반응 역시 잘못이다.
3. 성경은 저자나 역사의 정밀성을 집요하게 추구하지 않는다. 성경이 제시하는 역사성에 만족하는 것이 최상이다.
4. 성경 텍스트의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 집중하는 해석학의 중심성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2015년 8월 8일 토요일

근사한 가을이다

오늘은 소나기가 길게 쏟아졌다. 삽시간에 뜨거운 여름이 씻겨 내려갔다. 계절의 선수교체 현상이 나타났다. 입추답다. 온도와 바람이 완전 가을이다. 정말 시원하다. 여기는 양평이다...

중국에 다녀왔다

이번에는 새로운 동료를 만나 교제를 나누었다.

2015년 7월 10일 금요일

무서운 감시 프로그램

보이고 들리는 것들은 이제 벌거벗은 것처럼 모두 드러나게 되는 시대이다. 2012년의 사실들이 알려진 것이니까, 이것은 아마도 이 해킹팀 감시 프로그램 효용을 능가하는 무언가가 나왔으며 그것을 홍보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이탈리아 해킹팀, 전략도 뛰어나고 홍보력도 대단하다. 아마도 새롭게 개선된 감시 프로그램 거래가 물밑에서 숨가쁘게 이루어질 듯하고, 여기에 군침을 흘리는 수요자가 떼거지로 달려들 전망이다.

다음은 시사자키 정광용과 프로그래머 이준행의 대화이다.

"한국 5163부대, 8억 주고 해킹 프로그램 구매"

한국의 5163부대가 2012년 거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유출된 자료 중 'Client Overview_list_20150603.xlsx' 시트 파일에 기록된 내용.


- 이탈리아 스파이웨어 제조 업체 해킹당해 논란
- 개인정보, 각종 데이터 파일도 들여다보는 악성코드
- 유포시 스마트폰 마이크, PC 카메라도 제어 가능
- 휴대폰과 카톡 감청도 가능한 '빅브라더'형 감시프로그램
- 각나라 정부기관에 판매하다 해킹으로 들통나
- 한국에서도 5163부대가 8억원 이상 구매한 기록 있어
- 5163부대는 과거 국정원이 사용하던 명칭이지만
- 국정원은 구매사실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
- 모로코, UN사무실 PC해킹하려다 들통
- 룩셈부르크, 총리가 해킹소프트 구입사실 인정
- 통신사 통신망으로 대량 유포하는 방법도 권고
- 백신으론 잡을 수 없다는게 회사측 설명
- 실제 작동시 워드 등 다른 프로그램인 것처럼 위장 가능
- 액티브X 존재 등, 한국은 유포하기 훨씬 용이할 것
- 이론적으론 전국민 대상으로 한 감시도 가능할 것
- 유출자료, P2P통해 언제 어디서든 다운로드 가능한 상황
- 정부 나서서 범죄세력 악용 못하게 막아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5년 7월 9일 (목) 오후 7시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이준행 (프로그래머)

◇ 정관용> 이탈리아의 한 소프트웨어 개발회사가 해킹을 당해서 내부자료가 유출됐습니다. 그 가운데 고객명단도 들어있다고 해요. 그런데 이 회사는요. 스파이웨어, 쉽게 말해서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해킹하는 악성코드를 만들어 파는 회사인데 주요 고객들이 세계 각국의 정부기관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기관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요. 이미 국제사회에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이 관련 논란을 정리해서 국내에 알린 프로그래머 이준행 씨를 연결해 봅니다. 나와 계시죠?

◆ 이준행> 네, 안녕하세요?

◇ 정관용> 해킹당한 회사 이름 자체가 ‘해킹팀’이네요?

◆ 이준행> 네. 이탈리아에 있는 스파이웨어를 판매하는 회사입니다. 이 스파이웨어에 감염되면 PC에 저장된 문서파일이나 평소 사용하는 패스워드가 모두 감시기관에 전송이 되고요. 이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카메라에 있는 사진 혹은 자신이 이동하고 있는 위치정보도 전송이 되고 통화내용도 녹취돼서 감시기관에 전송됩니다. 그 외에 SNS에서 어떤 친구와 어울리는지도 확인이 되고요. 게다가 스마트폰에는 마이크가 있죠? 요즘 쓰는 노트북에는 캠이라고 부르는 카메라도 있고 이것을 통해서 자신의 주변 환경이나 사무실 내에서의 대화내용까지 모두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이 이 회사의 설명입니다.

◇ 정관용> 그런 스파이웨어는 불법 아니에요, 다?

◆ 이준행> 사실은 불법이죠. 불법인데 이 회사 같은 경우에는 국가기관의 감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솔루션을 사용해야 한다고 홍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정관용> 아, 그러니까 각국의 정부기관들이 공공의 목적으로 이런 걸 필요로 하니까 자기들은 그것을 전문적으로 개발해서 판다, 이거로군요?

◆ 이준행>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정작 이 회사가 해킹을 당했네요?

◆ 이준행> 네, 하필 이 회사가 해킹을 당하면서 고객명단이 유출되었는데요. 멕시코가 580만 유로를 지불해서 1위를 차지했고 이탈리아가 400만 유로를 지불해서 2위, 모로코가 310만 유로 이렇게 뒤를 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필 한국이 68만 6천 유로, 우리 돈으로 약 8억원을 지불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정관용> 아, 한국에 누가 샀는지까지 나온다면서요?

◆ 이준행> 그렇습니다. 여기 유출된 거래내역서를 확인한 결과 '서울 서초구 사서함 200'이라는 주소를 쓰고 있는 5613부대 이름으로 거래가 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아까 그 1등 멕시코나 2등 이탈리아, 이런 나라들에 비해서는 거래금액은 한 10분의 1 수준입니까?

◆ 이준행>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래도 우리 돈으로 한 8억원 정도를 주고 스파이웨어를 샀다, 이거죠?

◆ 이준행> 네, 맞습니다.

◇ 정관용> 이 5163부대는 국정원이 사용하던 거라고 알려져 있는데 국정원은 ‘이 5163이라는 부대명칭을 더 이상 쓰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 구입여부는 확인해 줄 수 없다’ 이렇게 말했는데요. 어떻게 보세요?

◆ 이준행> 네, 맞습니다. 국가정보원이 어떤 일을 하는지 또는 누구를 대상으로 감시활동을 벌이는지 당연히 비밀에 붙여져 있기 때문에 확인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료는 어디까지나 이 업체정보에 기록된 것에 불과하고요. 하지만 해외기관들 같은 경우에는 거래사실을 속속 시인하고 있는데요. 미스피츠에서에서 정리한 바에 따르면 모로코 같은 경우에는 UN본부 사무실PC에다가 이 프로그램을 꼽아서 UN을 해킹하려 했다는 아프리카 언론들의 보도도 있었고요. 룩셈부르크 같은 경우에는 총리가 직접 이 소프트웨어 구입사실을 시인하기도 했습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모로코가 이 회사한테 뭘 사서 유엔을 해킹한 게 드러났다?

◆ 이준행> 네, 맞습니다.

◇ 정관용> 룩셈부르크는 현직 총리가 지난 정부 때 이 회사의 프로그램을 샀던 사실을 인정했다?

◆ 이준행> 네, 맞습니다.

◇ 정관용> 우리나라는 일단은 국정원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 이준행>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래서 이걸 샀으면 뭘 할 수 있는 겁니까? 국정원은?

◆ 이준행> 우리가 흔히 쓰는 문자메시지라든지 SNS에서 누군가와 대화하는 그 모든 내용들을 감시할 수 있습니다.

◇ 정관용> 그렇게 되면 지금 우리 휴대전화 감청이 과연 가능하냐, 아니냐. 문자 메시지나 카카오톡 같은 것 실시간으로 감청이 되느냐, 안 되느냐 논란이 많았었는데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다 할 수 있는 겁니까?

◆ 이준행> 그렇습니다. 물론 법제적인 문제가 있기는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스파이웨어를 설치하는 순간에 그 PC나 혹은 스마트폰 자체의 통제권이 이제 기관으로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스마트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들을 감시할 수 있는 것이 되겠죠. 그런데 이것이 어떤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서 비밀리에 진행되고 국가 기반의 어떤 시스템까지 모두 구축이 된다는 점에서 모두의 우려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정관용> 방금 이준행 씨도 언급했지만 현재 우리 법률상으로는 휴대전화 감청 이거는 안 되게 되어 있는데 하지만 국정원이 샀다고 하는 것으로 지금 알려져 있는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휴대전화 실시간 감청, 각종 SNS 실시간 감청이 가능하다, 이거죠?

◆ 이준행> 그렇습니다. 이 회사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 정관용> 게다가 컴퓨터의 화상카메라, 스마트폰의 마이크, 이런 것까지도 사용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원격으로 제어가 가능하다고요?

◆ 이준행> 그렇습니다. 이 회사에서 홍보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의 스크린샷을 보면 실제로 이 사람이 지금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어느 프로그램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누구와 대화하고 있고 어떤 통화를 나누고 있는지까지 모두 한 눈에 살펴볼 수 있게끔 총체적인 빅브라더 같은 감시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영화에 나오던 그런 프로그램들이군요.

◆ 이준행> 맞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이것은 조금 아까 언급하신 것처럼 누군가가 악성코드를 접근해서 심어야만 가능한 건가요, 작동하려면?

◆ 이준행> 그렇습니다. 기본적으로 스파이웨어이기 때문에 악성코드하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집에 침투를 해서 USB를 꼽든지 혹은 스미싱 문자를 보내서 낚아서 프로그램을 깔도록 하는 것인데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이 업체는 우리가 흔히 쓰는 인터넷 통신망 자체를 국가가 관여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가 통신망에 개입을 해서 전국에 프로그램을 배포하면 된다고 공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는 우리가 쓰고 있는 PC나 스마트폰에서 자동으로 프로그램이 설치되는 자동업데이트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거를 통해서 스파이웨어를 배포하라고 이 회사가 각국 정부에 공고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3.20 사이버테러'라고 그 방송사와 은행권 PC가 일제히 꺼진 사건이 있었는데요. 그 수법과 동일한 수법으로 국가기관이 감시프로그램을 전국에 설치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 정관용> 아, 우리가 흔히 액티브X, 이런 것 있지 않습니까?

◆ 이준행> 네, 맞습니다.

◇ 정관용> 그런 것에다가도 이것을 심으면 그 모든 사람들 컴퓨터에 다 무한정 퍼질 수도 있는 거네요?

◆ 이준행> 맞습니다. 국내 상황의 경우에는 은행사이트를 방문할 때마다 프로그램을 설치하도록 국가가 강제하는 상황도 있기 때문에, 게다가 통신사에 감청장비 설치를 강제하는 법률안 개정안도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서 실제 이 시스템이 도입이 된다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 설치와 실시간 정보 감시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이 되고 있습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일단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가능은 하게 됐다는 거죠.

◆ 이준행> 네, 맞습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 정관용> 사용해서 이용한다면 실제 그렇게 이용하는지 안 하는지는 아직 모르는 것이고?

◆ 이준행> 네.

◇ 정관용> 흔히 그런데 이 스파이웨어, 악성코드 잡으려고 다 백신프로그램 쓰잖아요?

◆ 이준행> 네.

◇ 정관용> 이걸로도 안 됩니까? 못 잡아요?

◆ 이준행> 맞습니다. 이번에 유출된 자료에 의하면 이 업체는 백신프로그램으도 절대 탐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백신프로그램에서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고요. 그래서 감시대상이 되고 있는 사용자들이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프로그램, 워드프로세스를 쓰든지 혹은 스프레드시트를 쓰든지 그것처럼 위장을 해서 작동하도록 구현했다라고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감청한 자료를 전송을 해야 될 텐데 그 전송하는 것 또한 아이피를 위장해서 감시기관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숨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한 매뉴얼을 갖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정관용> 그래요. 그렇게 유출된 자료가 무려 400기가나 된다는데 그 자료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이준행> 이 자료는 토렌트, P2P형태로 배포가 되었는데요. 한마디로 전 세계 인터넷 어디에나 지금 존재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고요.

◇ 정관용> 다시 말해서 그 자료는 누구나 볼 수 있다는 거죠?

◆ 이준행>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 자료를 면밀히 분석하면 지금 한국의 구매자로 기록되어 있는 그쪽에서 지금 국정원은 아니라고 하니까요. 과연 스파이웨어를 판매한 회사랑 어떤 협력관계를 구축했는지 어떤 이메일을 주고받았는지 그래서 누구를 감청하려고 했는지까지도 혹시 내용이 들어있다면 유출될 수 있다는 겁니까?

◆ 이준행> 맞습니다. 여기에는 각국 정보가 누구를 콕 집어서 감시하고 있었는지 어떤 세계정세를 고려해서 어떤 기관을 공격하려고 했는지 어떤 타국을 공격하려고 했는지까지 모두 담겨져 있을 것으로 지금 추정이 되고 있고요. 그것 때문에 모로코가 UN 컴퓨터를 해킹하려고 했었던 사실도 지금 밝혀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SNS에 확산되고 있는 한 메일에 따르면 감청을 하기 위한 표적들을 고르는 그런 내용들도 다 유출되고 있는 상황이고요. 그래서 전 세계의 언론들이 과거 위키리크스라는 사이트에서 문서를 유출했을 때처럼 이 메일 정보를 모두 분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정관용> 아, 여기저기에서 막 분석에 들어갔겠군요?

◆ 이준행>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주요 언론에는 이게 거의 보도가 안 되든데 이게 해킹 당한 게 7월 6일이라면서요?

◆ 이준행> 그렇습니다.

◇ 정관용> 며칠 사이에 국제적으로는 상당히 논란이 크다고요?

◆ 이준행> 네, 맞습니다. 기본적으로 위키리크스의 외교문서 유출에 준해서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보도를 하고 있는 상황인데다가 이번에 그 유출되었던 자료들 중에서는 소스코드들, 그러니까 이 문제의 스파이웨어 소스코드까지 공개가 되면서 각 PC나 스마트폰에 어떻게 스파이웨어가 침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보완취약성까지 모두 공개가 된 상황입니다. 그렇다 보니까 이것들로 인해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어떤 해킹이라든지 또는 서버 공격들에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이라서 어제 같은 경우에는 미국에서 증권거래소가 마비가 되었다든지 혹은 비행기 시스템이 마비가 된 그 상황들도 이것들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정관용> 이것은 뭐 언론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빨리 그 내용을 정확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겠네요.

◆ 이준행> 네, 맞습니다.

◇ 정관용> 이 자료를 분석해서 그걸 또 악용하려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 이준행> 네, 맞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이 자료를 통해서는 아닐 수 있겠습니다마는 이번에 해킹 당한 해킹팀이라는 회사의 프로그램을 민간이 막 함부로 산다면 아까 스미싱 문자 같은 걸 이용하면 악성코드를 심어서 이런저런 범행도 저지를 수 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 이준행> 네, 맞습니다.

◇ 정관용> 우리나라에 지금 막 활개를 치고 있는 보이스피싱 사기단 등등이 이런 기술을 활용하면 이것은 문제 아닙니까?

◆ 이준행> 맞습니다. 유출된 기법을 활용해서 악성코드도 만들 수 있는 상황이다 보니까 각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현재 긴급히 보안패치를 배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장 유럽연합 같은 경우에는 이 스파이웨어가 러시아 정부기관에 공급이 되면서 이탈리아 당국에 대해서 신속한 조사를 촉구하고 있고요. 지금 각계에서 기술적인 요소들, 외교적인 요소들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여러 논란이 퍼져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 정관용> 전 세계에 상당히 많은 업체가 이 업체랑 거래를 했군요. 일단 드러난 걸로만 봐도 말이죠.

◆ 이준행> 그렇습니다.

◇ 정관용> 후속 보도가 계속 잇따를 것 같은데 예의주시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도움말씀 잘 들었습니다.

◆ 이준행> 네.

◇ 정관용> 프로그래머 이준행 씨의 도움말씀 들었습니다.

[CBS 시사자키 제작진]

원문출처: 노컷뉴스

2015년 7월 6일 월요일

더글라스 무의 로마서

더글라스 무는 "복음"이 로마서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신칭의" "구원"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도 등장하나 그것들은 "복음"이란 광범위한 주제에 포괄되는 부분들에 불과하다. 로마서에 대한 무의 구조적 이해는 다음과 같다.

1. 편지의 서론: 1:1-17
   1.1. 지침 (1:1-7)
   1.2. 감사와 정황: 바울과 로마성도 (1:8-15)
   1.3. 서신의 주제 (1:16-17)

2. 복음의 핵심: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1:18-4:25)
   2.1. 죄의 우주적인 지배 (1:18-3:20)
     2.1.1. 모든 사람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져야 할 책임이 있다 (1:18-32)
     2.1.2. 유대인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져야 할 책임이 있다 (2:1-3:8)
     2.1.3. 온 인류의 죄책 (3:9-20)
   2.2.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3:21-4:25)
     2.2.1. 칭의와 하나님의 의 (3:21-26)
     2.2.2. "오직 믿음으로" (3:27-4:25)

3. 복음에 의해 주어지는 확신: 구원의 소망 (5:1-8:39)
   3.1. 영광의 소망 (5:1-21)
     3.1.1. 칭의에서 구원으로 (5:1-11)
     3.1.2. 은혜의 통치와 삶 (5:12-21)
   3.2. 죄의 결박에서 자유함 (6:1-23)
     3.2.1. 그리스도 연합으로 죄에 대하여는 죽음 (6:1-14)
     3.2.2.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의를 섬김 (6:15-23)
   3.3.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함 (7:1-25)
     3.3.1. 율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연합 (7:1-6)
     3.3.2. 율법 아래서의 유대인의 역사와 경험 (7:7-25)
   3.4. 성령 안에서의 영생의 확신 (8:1-30)
     3.4.1. 생명의 영 (8:1-13)
     3.4.2. 양자의 영 (8:14-17)
     3.4.3. 영광의 영 (8:18-30)
   3.5. 신자의 안전에 대한 축언 (8:31-39)

4. 복음의 변증: 이스라엘 문제 (9:1-11:36)
   4.1. 도입: 하나님의 약속과 이스라엘의 약조 (9:1-5)
   4.2. 약속을 규정함: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9:6-29)
     4.2.1. 이스라엘 중의 이스라엘 (9:6-13)
     4.2.2. 반론의 반박: 하나님의 자유와 목적 (9:14-23)
     4.2.3. 하나님의 새 백성 부르심: 이스라엘/이방인 (9:24-29)
   4.3. 이스라엘 약조의 이해: 구원사의 절정인 그리스도 (9:30-10:21)
     4.3.1. 이스라엘, 이방인, 하나님의 의 (9:30-10:13)
     4.3.2. 이스라엘의 책임 (10:14-21)
   4.4. 요약: 이스라엘, 택자, 강퍅한 자 (11:1-10)
   4.5. 약속을 규정함: 이스라엘 미래 (11:11-32)
     4.5.1. 이스라엘 거절하신 하나님의 목적 (11:11-15)
     4.5.2. 유대인과 이방인의 상호관계: 이방인 신자들에 대한 경고 (11:16-24)
     4.5.3. 모든 이스라엘 구원 (11:25-32)

5. 복음의 변혁적인 능력: 기독인의 행실 (12:1-15:13)
   5.1. 주제의 핵심: 전적인 변혁 (12:1-2)
   5.2. 겸손과 서로 섬김 (12:3-8)
   5.3. 사랑과 그것의 현시 (12:9-21)
   5.4. 기독인과 세속의 권력자들 (13:1-7)
   5.5. 사랑과 율법 (13:8-10)
   5.6. 빛 아래서의 삶 (13:11-14)
   5.7. 연합을 위한 간구 (14:1-15:13)
     5.7.1. 서로 정죄하지 마라 (14:1-12)
     5.7.2. 형제로 넘어지게 말라 (14:13-23)
     5.7.3. 우선권을 타인에게 두라 (15:1-6)
     5.7.4. 서로 받으라 (15:7-13)

6. 결문 (15:14-16:27)
   6.1. 바울의 사역과 전도여행 계획 (15:14-33)
     6.1.1. 뒤돌아봄: 동방에서 바울의 사역 (15:14-21)
     6.1.2. 전망함: 예루살렘, 로마, 스페인 (15:22-29)
     6.1.4. 기도요청 (15:30-33)
   6.2. 인사말 (16:1-23)
     6.2.1. 베베의 칭찬 (16:1-2)
     6.2.2. 로마 성도에게 인사 (16:3-16)
     6.2.3. 경고, 약속, 은총을 간구함 (16:17-20)
   6.3. 송영 (16:2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