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8일 화요일

어느 봄밤에 밀려오는 생각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 자체가 감동이다.
아는 것이 생명이 된다는 것, 참으로 신비롭다.
그래서 앎을 위해 죽어도 좋다는 것,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나님을 아버지, 주님, 신랑이라 불려도 된다는 것, 황홀하다.

2015년 4월 24일 금요일

은밀한 일의 누설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잠25:9)

이는 다툼의 상황에서 상대방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자의 조언이다.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란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는 거" 모르는 바 아니다. 더군다나 남의 "은밀한 일"의 누설은 별식 중에서도 최상급 식단이다. 청중의 시선 집중력과 구미 흡입력이 대단하다. 당연히 파급력과 파괴력도 상상을 초월한다. "남의 은밀한 것" 누설에 한번 맛을 들이면 헤어나올 자가 없어진다. 남의 은밀한 일에 관심을 쏟고 누설로 존재감을 확보하고 존재하는 동안 누설을 중단하지 말아야 하는 안팎의 기대와 은근한 강요에 휩싸인다.

그런데 지혜자는 남의 은밀한 일 누설에 입맛을 들이지 말라고 조언한다. 단순히 심심풀이 땅콩 맥락 속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누설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피해가 속출하고 위기가 엄습하고 패배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다툼의 상황 속에서도 그러해야 한다고 진언한다. 이유는 듣는 자들의 꾸지람과 악평이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논쟁의 상황 속에서도 말의 수위를 조절하지 않으면 비록 겉으로는 이겼어도 속으로는 패배를 자초한다. 아무리 상대방의 깊은 취약점을 간파하고 있더라도 까발리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상대방도 파괴하고 나도 그런 파괴자가 되어 스스로 파괴되는 사탄의 함정일 수도 있다.

하나의 다툼에는 거기에 얽힌 다양한 관계성이 중첩되어 있고 얽힌 양상도 대단히 복잡하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은밀한 치부를 드러냄에 있어서도 그것이 다양한 관계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누설의 적정선을 유지해야 한다. 누설은 언제나 상대방의 몰락이나 파괴를 지향하지 않고 상대방의 돌이킴과 회복을 겨냥해야 한다. 그러나 공격을 받고 상처를 받으면 이성보다 감정의 지배를 받아 상대방의 가장 은밀하고 치명적인 약점 추적에 몰입하고 그러다가 찾으면 그 약점을 분노와 보복의 출구로 삼는다. 그러면 다툼의 상대방은 꺾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패배자로 발견된다.

아이들을 양육하며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의 은밀한 악들도 훤히 읽혀진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스리슬쩍 넘어가려 한다. 그때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나는 때때로 무의식 중에 악의 가장 은밀한 부위까지 건드리고 꼬집는다.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악의 뿌리를 지적하면 아이들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하며 곧장 반발한다. 그게 아이들의 기준이다. 그런데 그런 기준에 적응해서 교훈하지 않고 아버지의 기준을 따라 대뜸 생각지도 않은 악의 뿌리를 건드리며 책망하면 대화가 단절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아이들의 잘못을 다룰 때에도 누설의 적정선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은밀한 치부 드러내는 것을 마치 승리의 열쇠인 것처럼 집착하는 아버지의 꼴은 참으로 민망하다. 그런 아버지를 경험한 아이들은 커가면서 그런 아버지를 닮아 다툼의 상대방을 향해 그의 보다 깊고 은밀하고 근원적인 치부의 공공연한 노출에 매달린다. 상대방의 은밀한 치부는 알아도 적당히 침묵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히려 상대방의 은밀한 일을 알았다는 것은 은밀한 만큼의 사랑과 돌봄의 책임을 수반한다. 비록 다툼의 맥락이라 할지라도 '드디어 승기를 잡았다'는 쾌재가 아니라 상대방이 이런 연약함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측은히 여기며 보살피는 긍휼의 마음으로 대함이 더 아름답다.

사람마다 감지력의 깊이가 다르다. 타인의 깊숙한 속을 투명하게 관찰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겉으로 드러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이 감지한 자에게는 그에 버금가는 많은 책임이 뒤따른다. 깊고 은밀한 것의 감지력은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을 사용할 때에는 주신 자의 의도를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재능을 분열과 파괴의 도구로 주시지를 않으셨다. 상대방의 은밀한 허물을 덮어주고 품어주고 스스로 깨닫도록 장구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구현하길 원하신다.

공익을 명분으로 남의 은밀한 일은 무조건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경솔하다. 모든 인간은 다 불쌍하다. 돈과 권력과 성취와 인기로 부풀려진 이미지는 대체로 거품이다. 돈이 많아도 헛되고 없어도 헛되고 권력이 많아도 헛되고 없어도 헛되고 이룬 업적이 많아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고 인기가 하늘을 찔러도 헛되고 바닦을 기어도 헛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침묵을 강요하는 것도 동일하게 경솔하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하되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처신해야 하고 동시에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늘 책임지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상대방의 은밀한 일을 누설하는 것보다 누설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은 더 깊은 경건과 신앙과 인격을 요구한다. 수위의 조절은 터뜨리고 까발리고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의 직접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파생적인 결과들과 제2의 파생적 결과들도 다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와 사회에는 고발이 난무하고 있다. 모습은 역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경건과 신앙과 인격의 현실을 누설하고 있다. 어쩌면 형제의 범죄를 발견하면 직접 찾아가서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두 세 증인을 증참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적법한 치리에 들어가는 권징의 필요성과 회복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015년 4월 22일 수요일

사랑의 건덕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1)

지식과 사랑의 기능을 사도는 예리하게 구분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단다. 경험자는 망설임 없이 이러한 구분에 긍정의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서 바울은 반지성적 태도로 지식 자체를 교만의 원흉으로 내몰려는 게 아니다. 사랑으로 제어되지 않은 지식의 끔찍한 결과를 경계하고 있다. 지식이 사랑을 지향하지 않으면 필히 교만으로 치닫는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아도 무익하다. 지식이 사랑을 위하지 않으면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심히 유해하다. 지식은 예리한 검이이서 사랑의 다스림이 없으면 외상만이 아니라 깊숙한 내상까지 유발하는 끔찍한 흉기로 둔갑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왜 그러한가? 왜 사랑은 덕을 세우는가? 왜 사랑으로 제어된 지식은 교만이 아니라 덕의 수단으로 쓰이는가? 이에 대하여 심리적인 분석과 현상적인 관찰과 생리학적 실험이 주는 도움은 극미하다. 신학적인 풀이가 필요하다. 결로부터 말하자면, 지식과 교만이 쉽게 결탁하고 사랑과 덕이 필히 연합하는 것은 창조의 원리이며 하나님의 섭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작동되게 지으셨다. 그렇게 지어진 마음이 지어진 그대로 되어지는 작동의 실현과 지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관여한다.

이는 태초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주님께서 계시하지 않으신 것을 알고자 했을 때에 아담과 하와는 교만하게 되었었다. 계시 이상의 것을 알고자 하는 그들의 지식욕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제어되지 않았었다. 계시가 아닌 다른 출처에서 공급된 지식이 그들에게 주입되자 그들은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어하는 교만의 극치를 표출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치로 규정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덕을 세우지 않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으며 치졸한 책임 떠넘기기 하극상을 연출했다. 이에 뾰족한 가시와 거친 엉겅퀴가 자연의 지표를 뚫고 돋아났다. 그렇게 하나님과 자신과 타인과 자연과의 화목은 모두 깨어졌다.

왜 그런 식으로 전개된 것일까? 창조의 질서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지식은 교만을 유발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창조의 질서를 주께서 붙드셨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보자.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를 세우고자 하는 의지가 발동한다. 신기하다. 그런데 그게 실재이다. 경쟁자에 대해서도 그를 사랑하면 그가 어떤 식으로든 잘 되기를 소원하게 된다. 지독하게 증오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랑을 품으면 그렇게도 불쌍하게 보이고 눈물이 흐르고 긍휼이 솟구치고 축복하며 기도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을 세우려고 한다. 원수도 경쟁자도 없어진다. 원수와는 이런 식으로 싸워야 하고 이런 식으로 승리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타인을 세워가는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자랑할 수가 없다. 사랑하고 덕을 세웠다면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지으시고 섭리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그런데 지식의 분량과 정확성을 앞세우며 건덕이 아니라 교만끼를 발산하는 분들을 이따금씩 목격한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보란듯이 꺾을 지를 고민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방편을 발굴하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몰입한다. 적당한 지점에 불가피한 덫을 놓고 적당한 시점이 포착되면 회심(會心)의 어퍼컷을 날린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표출하는 괴로운 신음을 듣고 처절한 몸부림을 보며 짜릿한 쾌감에 젖고 음흉한 쾌재를 부른다.

참으로 잔인하다. 그런데 사랑이 빠진 지식의 광기는 제법 괜찮은 볼거리다. 그래서 관객도 몰려들고 박수와 갈채도 짭짤하게 쏟아진다. 본인은 서서히 거기에 중독된다. 이제는 사랑을 곁들이면 사태가 싱거워져 사랑의 출입을 철통같이 봉쇄하게 된다. 결국 스스로 헤어나올 수가 없어진다. 그런 식으로 패망한다. 그런데 왜 지식은 교만으로 이어지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일까? 이것도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때문이다. 사랑을 지향하지 않는 지식의 종국은 교만으로 다시 패망으로 치닫는데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성정을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지으신 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렇게 통치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를 수가 없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학업에의 태만을 방조하고 나아가 그것을 지향하는 우매자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에 모든 지식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을 추구해야 함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온갖 지혜와 지식의 보고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우리는 목숨이 닳도록 배움의 길에 정진해야 한다. 맹목적인 열심이 아니라 사랑이 안내하는 건덕의 방향을 따라 질주해야 한다. 사랑의 건덕은 신비롭고 위대하다. 주께서 창조하신 선물이며 지금도 그 효력을 붙들고 계신 섭리이다. 사랑하는 것은 진실로 창조의 원리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동참하고 교회를 올바르게 세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선물이다. 

2015년 4월 20일 월요일

지도자의 시대별 배출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사2:8)

이스라엘 민족이 위태롭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던 여호수아, 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일평생 하나님의 가르침과 훈련을 받은 숙련된 지혜와 판단력의 소유자가 사라졌다. 집단적 운명의 사선을 넘나들며 개인적인 생의 사활을 걸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배웠던 원숙한 지도자가 없어진 빈 자리를 미숙한 지혜와 조악한 판단력과 어설픈 리더십이 대체했다. 그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도 알지 못하는 세대였다. 그래서 위태롭다.

행위의 표피를 뚫고 드러난 첫번째 증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었다. 애굽에서 조상들을 인도하여 내신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며 여호와의 진노를 격발했다. 이에 가나안 토착민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고 했는데 "어찌하여 내 목소리를 듣지 않느냐"는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이 쏟아졌다. 복음의 본질은 훼손되고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은 벼랑으로 내몰렸다. 불순종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니까 기준은 사라지고 각 사람은 흩어졌다.

문제의 핵심은 진리의 지식과 경건에 원숙한 원로들의 죽음이 아니었다. 어떠한 세대이든 하나님과 그의 행하신 일들에 대한 올바른 전인격적 앎의 부재가 늘 문제의 핵이었다. 세대의 흐름을 막아설 자는 아무도 없다. 해와 별은 떳다가 지는 법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해와 별의 부재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그것들이 또 다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의 새로운 거인들은 시대마다 늘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호수아 이후에 그의 리더십을 계승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 인물들을 길러내는 일이 시대마다 절실하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의 죽음 이후에 각자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며 제 길로 흩어졌다. 이에 대하여 여호수아 개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부재를 한탄하는 것은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각 세대마다 여호수아 이상의 지도력을 발휘할 후진들을 양성해야 되겠다는 다짐의 쓰라린 교훈으로 삼음이 더 합당하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가까이 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누구보다 더 잘 간파하고 선명하게 기억하는 인물들의 출현을 고대하며 준비하며 추구해야 한다.

대한민국 교회도 열조에게 돌아가신 원숙한 원로들의 부재를 아파하는 단계를 넘어 그분들의 수고와 땀이 헛되지 않도록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며 마음의 깊은 심연에서 지혜를 길러내고 진리의 샘인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복음의 분량과 깊이만큼 깨달아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까지 자라고 주변 사람들을 자라도록 양육하고 믿음의 사표가 되어줄 여호수아 같은 인물들이 배출될 수 있도록, 주께서 우리에게 두신 인물들을 발굴하고 믿음의 실력을 배양하고 발휘할 환경을 마련해 주는 적극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나도 눈을 부릅뜨고 학교에서 교회에서 스쳐가는 사람들 중에서 찾고 또 찾으련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준비된 사람들은 교회와 세상에 공공의 자산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 자산의 수혜자가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적절하게 행동해야 한다. 이따금씩 참으로 아까운 분들을 만난다. 지금 혹은 장차 하나님의 교회를 너무나도 유익하게 할 분인데 공공재의 존재감이 확보될 분위기의 부재로 인해 교회가 그에게서 아무런 유익도 누리지를 못한다. 우리 시대의 신앙을 높이 끌어올린 귀한 분들이 떠나시기 전에, 그분들의 부재를 후회하기 전에 그러한 분들을 세워 드리고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2015년 4월 17일 금요일

사모하는 하나님의 궁정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죽을 정도이며 (시84:2)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는 시인의 마음은 너무도 애절하다. 죽을 지경까지 사모했다.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도 좋을 그런 사모함이 이 시편의 정신이다. 그런 정신으로 시인은 궁정에서 보낸 하루를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고 고백하며 악인의 장막에서 어떠한 고위직에 있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밑바닥 문지기로 있는 것을 더 선호한다. 이런 심정으로 시인은 여호와의 성전 건축을 그렇게도 소원했다. 거기에 들어가 항상 주를 찬양하고 싶어했다. 이는 자신을 찬양하게 하기 위해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자의 본래적인 의도에 충실한 갈망이다. 여호와의 궁정에 대한 사활을 건 시인의 사모함은 아름답고 향기롭다.

여호와의 궁정은 가시적인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가능한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물론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 축조를 갈망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차가운 거절에 부딪혔다. 그 거절은 전쟁의 왕이었던 다윗이 피를 많이 흘렸다는 이유 때문이다. 전면에 내세워진 이유의 합당함 배후에는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했다 할지라도 영혼마저 쇠약하질 정도로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했던 그가 과연 만족했을 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런 맥락에서 다윗에게 성전건축 부적격자 판정을 내리신 듯하다. 이것은 거절보다 더 깊은 복으로의 초청이다.

다윗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전을 자기 손으로 축조하진 못했으나 항상 찬양이 쏟아지고 경배가 올려지는 시인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보행하는 성전이다. 신약이 명료화한 성전의 개념에 이미 이르렀다. 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어딘가에 예배할 곳이 있다는 그녀의 습관화된 생각을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라는 말씀으로 수정했다. 주님은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도 그런 하나님의 속성에 걸맞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거다. 예루살렘 같은 물리적인 공간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특정한 민족과 나라와 지역에 종교적 우위성을 부여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배당 건축을 위해 우리도 시인처럼 우리의 영혼이 쇠약해질 정도로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해야 한다는 건축헌금 독려는 궁색하다. 아니 우리의 신앙을 변질되게 만들 소지가 농후한 방식이다. 지금 드리는 건축헌금 액수가 장차 하늘에서 받을 보상의 규모와 비례할 것이라는 주장은 심지어 사악하다. 이는 고가의 면죄부를 구매하면 연옥에서 받는 탕감의 년수도 그만큼 늘어날 것이라던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저지른 교리적 변질과 종교적 타락의 개신교적 재연이다. 시설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시설의 과도한 강조와 집착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뒤틀지는 말라는 이야기다.

예배당과 예식은 화려한데 진리와 영으로 드려지는 경배와 찬양이 없다면 그 자체로 회칠한 무덤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속으로는 썩은 악취가 진동하고 있는데 겉으로는 호화로운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듯하여 마음이 심히 씁쓸하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악취를 멀리하기 위해 교회를 떠나가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경고다. 목숨을 건 예배당 건축에서 하나님을 진리와 영으로 찬양하며 경배하는 내 마음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 더 시급함을 알리는 경종이다. 우리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영혼이 쇠약해질 정도로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 시인의 심장이 우리 안에서도 박동하길 소원한다.

2015년 4월 15일 수요일

허니 버터칩 아저씨~~

집 근처에 편의점이 있다. 쥔장은 멋쟁이 아저씨다. 하루는 계란을 구입하러 들렀는데, 아저씨가 나를 뚫어지게 본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김문수 전 지사장님~~ 아니신지?" "아닌데요!" 이렇게 아저씨와 나는 한바탕 웃고 친해졌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갈 때마다 "허니 버터칩" 입고일자 및 재고를 귀띔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아저씨가 재보한 그 요일에는 편의점을 출입한다. 그때마다 창고에 짱박아 놓은 그 넘을 전달한다.

봅의 향연










시편의 예정론

로마서나 에베소서 예정론의 맥락과는 사뭇 다르지만 구약 안에서도 예정의 진리가 아름다운 시어로 묘사되어 있다. 특별히 시편 139편 후반부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내 형질이 조성되기 이전에(without forme)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139:16).

시인은 시편 서두에서 하나님의 전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즉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피시고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며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노래한다. 이 지식이 자신에게 너무 기이하고 높아서 능히 미치지를 못한다는 고백과 함께 그 이유로서 자신의 오묘한 창조와 창조 이전의 신적인 정하심에 대한 언급을 이어간다.

즉 주께서 자신을 지으심이 자신의 눈에는 너무도 기이하나 주 앞에서는 자신의 형체가 숨겨질 수 없다고 말하면서 더 나아가 자신의 형체가 조성되기 이전에도 주께서는 그것을 보셨다고 말하고 주께서 자신을 위하여 정하신 날이 하루도 되기 이전에 주의 책에 기록까지 되었다고 언급한다. 이로 보건대, 시인 자신의 현존에 대한 하나님의 전지는 시인을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이고 지으시기 이전에도 이미 시인의 형체를 알고 계셨으며 시인의 모든 삶도 예정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시인에게 하나님의 예정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각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도록 많다는 경이로운 은혜를 노래하는 맥락 속에서의 정수였다.

2015년 4월 13일 월요일

이런 날도 있다

세상에나, 정말 이러한 날도 있구나. 하루종일 밀리는 차량들과 쓰름해야 했다. 서울 한복판의 퇴근시간 정체의 본색을 제대로 경험했다. 계획했던 일들이 모조리 밀려서 하루종일 미안하고 죄송하고 서글펐다. 그러나 하루를 접는 이 순간, 주님께서 순간순간 참으로 놀랍고도 절묘하게 인도해 주셨다는 생각에 감사의 탄성이 입에서 쏟아진다. 한계가 없는 은혜, 갚을 길이 없는 은혜, 나의 전 존재와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찬양이 저절로다!

2015년 4월 12일 일요일

주부들을 축복한다

가사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 땅의 모든 주부들의 수고에 감사를 표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분들의 "희생적인 사역"을 축복하고 싶다. 측량을 불허하는 그 방대한 시간과 수고가 헛되지 않고 현재를 구축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밀 한 알의 의미있는 썩어짐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잠12:20)

이 구절에 표현된 하나님의 섭리가 심오하다. 만물을 다스리고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은 선을 원하시고 화평을 원하신다. 그래서 선과 화평은 하나님이 조성하고 붙드시는 질서이고 악과 다툼은 그 질서를 파괴하고 지우려는 무질서다.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면 정직과 희락이 필연적인 결과이고, 하나님의 질서를 거슬러 무질서를 조장하면 속임과 괴로움이 필히 뒤따른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땅에서의 관찰과 추론의 결론이 도달하지 못하는 답변이다. 대체로 현상과 답변 사이의 연쇄적인 인과의 사슬이 생략되면 사람들은 승복을 주저한다.

악을 꾀하고자 하면 인간의 내면에는 묘한 기류가 조성된다. 무엇보다 내면의 콘트롤 타워에 자아가 그 중심을 장악한다. 이것이 악을 꾀하는 첫번째 수순이다. 자신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고서도 악이 도모되는 일은 없다. 악은 언제나 자아가 자신의 중심이길 요청한다. 자아가 자신의 중심을 손아귀에 넣으면, 다음 수순으로 가장 예민하게 반발하는 양심의 수족부터 결박하고 교묘하게 설득한다. 이는 양심의 동의가 없으면 악을 도모하는 내내 자아가 분열되는 불편함과 쓰라림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하는 양심마비 수순이다. 그러나 양심은 합바지가 아니다. 양심으로 수긍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려면 고도의 속임수가 필요하다. 악의 영향력이 이처럼 막대하다.

악을 꾀하고자 하면 사람의 양심은 서서히 마비되고 가치관은 은밀하게 변경된다. 이는 속임이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셈이다. 이러한 준비가 끝나면, 다양한 종류의 속임들이 일사분란하게 마음 속에서 협력한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 악의 도모는 과연 속임들이 마음에 내집처럼 출입할 최고의 준비이다.

그러나 화평을 의논하면 우리의 마음이 신적인 섭리의 결과 겹치면서 하나님의 뜻에 역류하지 않을 때에 찾아오는 희락으로 채워진다. 희락은 신비로운 현상이다. 대체로 코드의 일치에서 찾아온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과 코드가 일치하는 경우에도 희락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분별이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진정한 희락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발생한다. 화평은 하나님의 뜻이다. 당연히 화평을 지향하고 도모하면 하나님의 뜻과의 조화에서 비롯되는 신비로운 희락을 경험하게 된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악의 도모로 말미암은 속임이나 화평의 의논으로 말미암은 희락은 그것의 단계적인 인과가 추적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 인과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속임을 피하고 희락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분명하게 안다. 우리의 마음이 속임으로 가득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악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정직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선을 도모해야 한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리고 희락을 누리고자 한다면 화평을 도모해야 한다. 화평을 도모하지 않는 자는 결코 신적인 희락을 경험하지 못한다. 늘 불안하고 늘 격분되어 있다.

악은 미워해야 하고 화평은 의논해야 한다. 그런데 지혜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한다. 선을 도모하는 것과 화평을 의논하는 것은 선과 화평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정직과 희락이 주어진다. 다른 어떠한 수단에 의해서도 취득되지 않는 선물이다. 화평에 대해 약간의 해석학적 비약을 하자면, 바울은 둘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화평으로 여겼다는 사실에서 화평을 의논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전도자가 "슬데없는 것"이라고 혹평한 인간적인 희락과는 다른 차원이다. 

2015년 4월 10일 금요일

일과가 변하였다

밥하고 설겆이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면 아내와 아이들을 돌본다. 주께서 허락하신 상황이다. 감사하는 마음과 스스로를 더 깊이 성찰하는 자세로 하루하루 보내련다...

2015년 4월 3일 금요일

고난이 임박할 즈음

인기척도 없이 고난이 급습할 때,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
이 고난이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길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에서
현실을 적당히 가리셔서 우리 안에 주를 향한 경외심을 심으시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와 오묘한 섭리에 탄복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모든 상황이 최고의 것을 주시는 기회인가 보다.
그러기를 바라고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봄의 따뜻한 바람이
우리의 딱딱한 마음을 녹입니다.
봄은 우리를 웃게 만듭니다.
봄은 자유입니다."

2015.4.3.

한국에 온지 7개월로 접어드는 10세 딸래미의 시

2015년 4월 2일 목요일

고품격 기호와 즐거움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우매함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잠1:22)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저질렀던 도둑질의 실상을 이렇게 고백한다. "도둑질한 물건이 아니라 도둑질이 즐거워서 저지른 일입니다." 친구들과 더불어 있어서 죄악도 즐거움이 된다는 맥락에서 더듬은 기억이다. 악행이 즐거움의 중독적인 대상일 수 있을까? 있다. 어리석은 자들은 우매함을 좋아하고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향유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지혜자는 기록한다.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진술이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악한 것과 좋은 것을 어느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는 말인데, 과연 악한 것을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이 사실일까?

죄악과 우매함과 거만에도 즐김의 경지가 있다. 물론 인정하기 싫고 인지하지 못하는 경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나는 사람의 느낌이나 상식보다 성경의 진술을 더 신뢰한다. 죄악과 우매와 거만을 즐긴 대표적인 사례를 나는 사울의 불순종 사건에서 목격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취약점만 골라서 괴롭히던 아말렉 족속의 모든 소유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노소 및 가축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엄명을 받았었다. 그러나 적장인 아말렉의 왕 아각은 죽이지 않고 생포했고 괜찮아 보이는 가축들도 죽이지를 않았다. 이 사건의 진상은 사울의 변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평가에서 확인된다. 즉 사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탈취"에 급급했고 그가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다.

그런데도 사울 자신은 죄를 죄로 여기지를 않았으며 오히려 즐김의 대상으로 여겼었다. 그는 승전한 이후에 "갈멜로 내려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기쁨과 자랑에 취했었다. 적장을 생포하여 백성들의 눈에 확인시켜 기념의 극대화도 도모했고 괜찮은 양이나 소와 같은 전리품을 수거하여 백성들의 열렬한 호응도 이끌었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종교적 명분으로 자기를 위하여 이루어진 이 모든 행실의 양심적인 거리낌도 지우려고 했다. 이에 사무엘은 이 모든 일련의 사태를 "탈취"라는 정확한 표현으로 진단했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의 승전을 전용하여 자신의 치적을 치장하고 기념하는 계기로 삼았기에 그것은 "탈취"였다. 자신의 것이 아닌데 함부로 건드렸던 것이다.

사울은 자신의 죄를 죄로 여기지를 않았고 그 죄를 기념과 즐김의 대상으로 여겼다. 왜 그랬을까? 지혜자의 진술에 의하면, 어리석고 거만한 죄인들은 자신의 기호와 즐거움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아서다. 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과 코드가 맞고 그 마음에 흡족하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기호와 즐거움 자체를 의심하는 거, 불쾌한 일인 줄 안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을 점검의 대상으로 여기고 객관적인 판단과 교정을 시도하는 것, 어른의 모습이다. 그러나 적잖은 사람들은 나의 즐거움이 곧 선이라는 등식의 기만을 알아채고 인정하는 어른이길 거부한다. 어린 아이의 유치함을 털어내는 것인데도 그것을 무슨 굉장한 억울함과 희생으로 여긴다.

나의 기호와 즐거움은 사실 온전한 순종의 필수적인 항목이다. 억지로 떠밀려서 행하는 타율적인 어거지 순종보다 안쓰러운 게 또 있을까? 없다. 하지만 기호와 즐거움은 그 자체로 선하지는 않기에 품격의 질적 승화가 필요하다. 기호와 기쁨에도 격이라는 게 있다. 어리석은 자가 우매함을, 거만한 자가 거만을 좋아하고 즐기는 저질의 기호와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좋으심과 즐거움이 나의 기호와 기쁨이 되는 그런 고품격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좋아 보이고 죄가 즐거운 게 우리의 성정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계시기에 기호와 즐거움에 있어서도 거듭남이 가능하다.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우리의 성정을 농락하지 못하는 경지가 심히 목마른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