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1일 월요일

기독교 진리의 보편성과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성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지속할 것인가? (롬6:1)

이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언술 이후에 이어지는 말로서 바울이 은혜의 증대를 위해 더더욱 죄에 머물자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터무니 없는 논리를 꿰뚫고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논지를 펼치기 위한 의식 전환용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범죄를 더하면 율법을 주신 율법 수여자의 의도와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도출하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합리적인 듯하나 실상은 합리성을 구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부패성을 가리는 일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율법의 더함과 죄의 증대는 비례하고 은혜의 증대가 죄의 증대와 맞물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수여로 말미암은 죄의 증대는 죄의 수효나 분량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들까지 죄로 확인되기 때문에 늘어나는 증대를 뜻합니다. 죄의 증대로 말미암는 은혜의 증대도 물리적인 분량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 모든 지혜의 요약인데 두 지식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성을 갖는다고 간파한 것처럼 죄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면 될수록 그동안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았던 것들까지 은혜인 줄 알게 되기에 은혜에 대한 지식도 커진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여 마땅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도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듭니다. 존재와 생각과 삶과 행위에 있어서 죄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이 깊어지면 질수록 그 모든 것들을 십자가로 소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도 더해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은혜의 증대를 원한다면 죄에 머물거나 죄의 분량적인 증대를 도모할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으로 우리의 죄악된 실상을 더욱 속속들이 성찰하고 시인하고 돌이키는 것이 마땅한 듯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지속적인 종노릇 방식으로 은혜의 증대를 꾀한다는 발상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 우리를 아는 지식에 심각한 왜곡이나 결함이 있다는 증세인 듯합니다.

여기서 생각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은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 있어서도 제3사용만 강조하고 제1사용과 제2사용은 마치 무의미한 것처럼 무지하고 무시해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신학적 견해와 개혁주의 신학 사이의 차별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삼중적인 기능이 골고루 존중되는 신학의 전개로 기독교 내의 교리적 공통성과 차이성이 동시에 확인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해 보입니다.

기독교 진리의 부요한 보편성과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한 독특성은 동시에 추구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에 있어서는 빈곤한데 개혁주의 신학의 예리한 독특성만 추구하고 거기에서 신학적 존재감 확보를 도모하는 분들이 간혹 보입니다. 동시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진리의 깊고 엄밀한 내용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모든 교회가 공유하는 것만 추구하여 의도하진 않았을 테지만 결과적인 면에서는 진리의 하향 평준화를 지향하게 되는 분들도 계신 듯합니다.

제가 아는 믿음의 선배들은 진리의 부요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신학적 엄밀성에 있어서도 높은 경지를 구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교의학을 보면 교리의 엄밀성을 수호하기 위한 변증의 매서운 주먹만 휘두르지 않고 교회의 건덕을 위해 풍요로운 꼴을 마련하되 심지어 성경책 밖에서도 하늘에서 비롯된 빛의 열매들이 흩어져 있는 모든 현장과 학문 영역들을 샅샅이 뒤지고 탐구하고 엄선한 그 열매들로 교회를 섬기고자 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진리의 일반성과 독특성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철인적인 정신과 노력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폭넓은 호응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런 지향점 만큼은 고수할 수 있다면 그나마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분들의 분발을 권면하고 싶습니다. 이런 권면의 채찍은 저의 종아리를 겨냥함이 우선일 터이지요. 

2014년 3월 30일 일요일

열린교회, 방문하다

열린교회(합신), 저의 교단적 족보가 관리되고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의 진정한 의미를 나누고자 오늘은 그곳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궁금하고 그리웠던 분들과의 아름다운 만남을 말씀 안에서의 교제로 시작할 수 있어서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릅니다. 인도하신 주님과 불러주신 문정식 목사님과 성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은혜롭고 복된 주일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3월 29일 토요일

장로교 신학회에서 발표했다

오늘 도르트 신조에 대한 학회에 발제자로 참석했다. 정말 유익했다. 배운 것도 많았고 느끼기도 많이 했다. 나중에 정리해야 겠다. 다만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정말 멋쟁이 하나님 아버지께....

2014년 3월 28일 금요일

눈물에 젖은 산책길

오늘도 점심 후에 양화진에 갔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눈물에 젖은 산책길을 밟아야 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해 준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 때문에요. 그분들을 세우시고 보내셔서 이 땅에서도 생명의 씨앗이 뿌려질 수 있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이 주체가 되지 않아서요. 특별히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글귀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듭니다. 혼자서 갔는데도 기념관의 모든 기능들을 다 가동시켜 선교사의 헌신과 기운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신 분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칼빈의 신학적 구조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인간의 비참을 비교적 짧게 언급하고 이 주제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으로 곧장 돌입한다. 인간의 위로를 주제로 삼은 교리문답 작성의 목적과 일치하는 논법이다.

그러나 칼빈은 기독론을 다루는 기독교강요 2권에서 인간의 부패하고 비참한 상태를 다섯 장에 걸쳐서 길게 거론한다. 그리고 인간의 비참과 중보의 필요성은 율법과 십계명에 대한 논의에서 더욱 부각된다. 신구약의 통일성과 차이점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 예수를 논하고 그리스도 인격과 사역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는 식이다.

칼빈은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지식 사이를 연결한다. 인간이 창조시에 가졌던 본성의 탁월성은 창조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논급되고 인간의 비참한 상태는 구속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언급된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의 인간론이 창조자와 구속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골고루 분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칼빈의 신학적 구조는 이처럼 거의 모든 교리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를 아는 지식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보존하고 있다. 특이하고 탁월하고 아름답다.

2014년 3월 26일 수요일

관악산 산책로

오늘은 점심을 먹고 대한신학 대학원이 등지고 있는 관악산 등산길을 산책했다. 아직 봄기운과 화려한 봄차림은 미약하나 조만간 절경이 예상되는 산책로다. 이 대학원의 점심은 2000원이다. 대단히 저렴한 점심에 매혹적인 산책길, 그리고 학생들의 총명한 눈동자 때문에 비록 오늘은 유독 막히는 도로에 두 배의 시간을 뿌렸지만 아깝지가 아니했다.

주일이면 전철은 다채로운 등산복 차림으로 북적인다. 봄의 녹음이 조금 더 짙어지면 나도 그런 복장으로 변신할까 생각한다. 물론 주일에는 금물이고 1개월에 한번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다산의 집 사의재

자식에게 삼사재란 서재 이름을 지어준 다산의 의중은 이러했다.

"사의재는 내가 강진에 귀양을 와서 사는 집이다. 생각은 담백해야 한다. 담백하지 않으면 서둘러 이를 맑게 해야 한다. 외모는 장중해야 한다. 장중하지 않으면 빨리 단속해야 한다. 말은 과묵해야 한다. 과묵하지 않으면 바삐 멈추어야 한다. 동작은 무거워야 한다. 무겁지 않거든 재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라 하였다."

2014년 3월 25일 화요일

칼빈의 말다툼 결심

어리석은 의미가 담긴 말과 특별히 치명적인 오류와 관련된 말을 피하는 일에는 신중을 기하기로 나는 굳게 결심했다. 나는 묻을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이 바로 자기의 마음과 의지의 주인공이며 자기의 힘으로 선악간 어느 쪽으로든 향할 수 있다고 생가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혹자는 일반 사람에게 그 의미를 열심히 경고하면 그런 위험성은 제거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허위 쪽으로 기우는 것이 사람의 성향이며, 긴 강화에서 진리를 깨닫는 것보다는 한 마디의 말에서 오류를 얻는 편이 더 신속한 법이다.

Institutio 1559, II.ii.7.

양화진 산책길

점심을 먹고 산책길에 올랐다. 같은 교회에서 섬기시는 목사님의 안내를 받아 양화진에 갔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의 불모지에 피를 뿌렸던 분들의 묘비들(켄드릭 선교사는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하였다)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고, 그분들이 흘린 고결한 피의 희생이 아깝지 않도록 교회가 순교보다 더 짙게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를 풍겨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화진 옆에 있는 절두산도 방문했다. 촬영이 금지되어 사진으로 담아내진 못했지만 거기서 섬기는 분들의 설명으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꼈다. 양화진을 자주 출입하게 될 것 같다. 이번에 느끼지 못한 것들은 다음에 느끼련다.

합정동, 좋은 지역이다. 이곳에 아지트를 마련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둔스 스코투스 전집

Duns Scotus, Opera Omnia

로마서의 구조적 어법

"하물며 얼마나 더 하겠느냐"(πολλῷ μᾶλλον) 어법이 우리의 신앙적 분발과 반전을 재촉한다. 이것은 로마서의 중요한 부위에서 반복된다. 대단히 중요한 이해의 골격을 제공하는 어법, 로마서의 구조적 키워드에 해당되는 이 어법은 다음과 같은 뉘앙스를 가졌다. 우리가 죄인일 때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구원을 받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이셨다 한다면, 하물며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의롭게 되고 화목에 이른 자들에겐 얼마나 더 큰 사랑을 보이고자 하실까나? 이런 점증적인 어법이다.

구원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무엇보다 소중한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는 거였다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은 어떠한 측량의 시도도 불허할 것임에 분명할 정도로 크다고 하겠다. 구원이 출발이라 한다면 우리의 여정은 구원 이후임에 분명하다. 구원의 은혜와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큰 사랑은 "하물며 얼마나 더 하겠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잠잠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구원에 강조점을 둔 교회는 언제나 구원 이후의 보다 심오한 사랑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공명선의 공부법

공명선은 증자의 특이한 제자였다. 증자는 공명선을 3년동안 지켜 보았으나 정작 책읽는 모습은 보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책망의 입을 열었다. "너는 내 밑에서 공부를 한다면서 어찌하여 책 읽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게냐? 그런 자세로 무슨 공부를 하겠다는 말이냐?"

이에 공명선의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이 가정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으며, 선생님이 손님 접대하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조정에 나가 일하시는 것도 살펴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하시는 대로 해보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여전히 따라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문하에 있으면서 감히 제가 배우지도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옵니다."

공명선은 <효경>과 <논어>를 1만 번씩이나 읽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집에서는 활자로 된 책을 읽었으나 스승이 계신 곳에서는 스승이란 책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책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지만 스승은 만나뵐 때에만 독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집에서나 스승 앞에서나 책의 활자에만 코를 박았던 다른 제자들의 공부법과 공명선의 지혜롭고 입체적인 공부법이 지금도 여러 학습의 현장에서 대조된다. 혹시나 이 시대에 쳐다볼 스승이 없다면 너무도 섬뜩하고 안타까운 문제겠다.

천지가 책이다

홍길주의 <수여방필> 한 대목이다.

"진시황은 책을 불태웠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책을 어떻게 불태울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죽간으로 엮은 것만을 책으로 여긴 까닭에 불태워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이란 천지와 더불어 함께 생겨나서 천지와 함께 없어지는 것이다. 불태워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글자를 청므 만들었다고 알려진 창힐이나 주양이 태어나기 전부터 천지간에 책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시험삼아 동틀 무렵 구름과 바다 사이를 살펴 보아라. 거기에는 언제나 수억만 권의 책이 있다. 비록 1만 명의 진시황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어찌 이 책들을 불태울 수 있겠는가?"

박지원의 <경지에게 준 답>의 일부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진 뜨락에서 이따금 새가 지저귄다.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외쳐 말하였다. '이것은 나의 날아가고 날아오는 글자이고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이구나. 오색의 아름다운 채색을 문장이라 말한다면 문장으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이다. 오늘 나는 책을 읽었다."

2014년 3월 24일 월요일

연암의 책사랑

연암 박지원의 <선비란 어떤 사람인가> 글에 나오는 그의 책사랑 대목을 소개한다.

"책 앞에서는 하품하지 말고 기지개를 켜서도 안된다. 책에 침이 튀어도 안된다. 재채기나 기침을 할 때에는 고개를 돌려 책에 묻지 않도록 해라. 책장을 넘길 때에는 침을 바르지 말고, 손톱으로 표시를 남겨도 안된다. 책을 베고 누워도 안되고, 책으로 그릇을 덮어도 안된다. 책을 쌓아둔 것이 지저분해 보여서도 안된다. 먼지를 털어주고 좀벌레를 없애야 한다. 볕이 좋으면 즉시 말려야 한다. 남의 책을 빌렸을 때에는 잘못 쓴 글자나 내용을 고쳐서 표시해 두어라. 종이가 찢어 졌거든 때워 주고, 묶은 실이 끊어 졌다면 다시 묶은 뒤에 돌려 주어야 한다."

홍길주의 문장론

홍길주는 삼라만상 전체가 다 문자요 책이란다.

"사람이 일용기거 및 보고 듣고 행하는 일이 진실로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 아님이 없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스로 글이라 여기지를 아니하고 반드시 책을 펼쳐 몇 줄의 글을 어설프게 목구멍과 이빨로 소리내어 읽은 뒤에야 비로소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이같은 것은 비록 백만번을 하더라도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절세의 명문장은 늘 반복되나 한번도 동일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일상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홍길주가 보기에는 눈과 귀로 접하는 일월, 풍운, 조수의 변화하는 자태에서 방안에 늘어선 책상이나 손님이나 하인들의 비속어에 이르도록 글이 아닌 것이 없었던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투시하는 인문학적 소양의 발휘는 일상에서 요청된다. 

그는 무수한 책을 읽었다. 그러나 수십권, 수백권, 수천권 읽었다는 것이 뿌듯한 지적 포만감을 주는 것으로만 만족하진 않았다. 공부는 책하고만 결부되지 않는다. 온 세상과 자연이 뿜어내는 명문장을 읽어내는 내공도 부지런히 배양해야 한다. 그 필요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표현하는 절세의 명문장이 지천에 깔려 있어서다.

활자로 된 언어만이 아니라 비활자적 언어에도 능통해야 일상의 입체적인 문헌들이 읽어진다. 하나님의 섭리인 삼라만상 전체를 문자로 번역하는 독법의 중요성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고조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번역본을 읽는다는 의미이다. 무형과 유형의 실재를 자기 언어로 번역하고 의미를 담아내는 작업이 문장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늘도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에서 천하의 기이한 문장을 읽어내고 싶다.

공부는 성실과 동의어다

머리도 나쁘고 앞뒤가 막혔고 분별력도 부족하다 생각하는 제자 황상에게 주는 정약용의 격려가 아름답다

1. 문제는 언제나 민첩하다 생각하고 총명하다 생각하는 데서 생겨난다.
2. 단번에 척척 암기하는 이들은 그 뜻을 깊이 음미할 줄 모르니 금새 잊는다.
3. 제목만 주면 글을 지어내는 이들은 똑똑하나 자신도 모르게 들뜨게 되니 문제다.
4. 한 마디만 던져주면 금세 말귀를 알아듣는 이들은 곱씹지 않으므로 깊이가 없다.
5. 너처럼 둔한 아이가 꾸준히 노력을 한다면 얼마나 대단할 수 있겠느냐?
6. 둔한 끝으로 구멍을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리면 왠만해선 막히지 않는 큰 구멍이 뚫어지니 첫째도 성실이요 둘째도 성실이요 셋째도 성실이다.

황상은 스승의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그대로 살아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단다. 공부는 책을 빠르게 읽는다고, 분별력이 빠르다고, 많은 정보를 빠르게 취한다고, 암기력이 좋다고 달인이 되는 게 아니다. 다산의 말처럼 공부는 성실과 동의어다. 어떠한 상태에 있더라도 스스로를 공부와 무관한 사람이라 단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2014년 3월 23일 일요일

하나님의 '우매함'

오늘 아침에는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신 말씀이 뇌리를 맴돕니다. 폐하실 것이라는 의지보다 폐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가 더 강하게 와 닿습니다. 어떤 방식일까?

'하나님의 우매함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해석함이 마땅하고 어떤 접근법이 합당한 것인지도 상고하게 되는군요.

성경이 아무리 우리에게 터무니가 없고 모순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사람의 생각과 판단과 기호를 따라 성경에 인위적인 의미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에 이릅니다. 신적인 우매함이 주는 역설적인 교훈의 분량은 과연 측량할 수 없을 듯합니다.

문법의 한계를 인정하자

문법에 성경 해석학의 열쇠를 내맡기는 것이 정당할까? 객관성 확보를 위해서는 결코 간과되지 말아야 할 부분이 문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문법의 고유한 역할을 과장하여 인간의 학식 자랑질의 수단으로 과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처신이다.

성경의 중지는 특정한 구절의 애매한 표현과 문법이 좌우하지 못한다. 문법은 소통의 도구이고 내용은 하나님께 의존한다. 물론 문법과 내용이 무관할 수 없음은 지당하다. 그러나 그런 관련을 근거로 지금도 여전히 완벽하게 복원될 수 없는 문법에 내용 전체의 향방을 내맡기는 것은 얼마나 우매한 판단인가.

문법은 그것이 가진 고유한 기능만큼 존중하여 인식의 외적인 원리로서 성경 자체에 충실하되 인식의 내적인 원리로서 성령의 조명과 믿음으로 성경 텍스트의 열린 의미를 희생하는 정도의 과도한 맹신은 철저히 경계함이 마땅하다.

2014년 3월 22일 토요일

개혁주의 섭리론 소논문

오늘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본 우연과 하나님의 섭리"라는 주제로 소논문을 탈고했다. 하나님의 섭리를 공부하면 할수록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앞도된다. 하나님의 속성과 섭리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는 아무도 그 분량을 측량하지 못하고 아무도 온전한 지식에 이르지를 못한다. 다가가면 갈수록 경외의 입만 벌어지고 인간의 알량한 지식의 일천함만 확인된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감추시되 감추시는 지점까지 가리셨다.

그러니 지각의 방식으로 다가가려 해도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여 적정의 선 이상은 넘어가질 못한다. 이는 마치 우리의 믿음이 반응할 수 있도록 여지를 마련하신 하나님의 의도처럼 느껴진다. 역시 하나님의 섭리도 믿음의 방식으로 알아야 하나보다.

2014년 3월 21일 금요일

Mirandola의 천문학 서적

피코 델라 미란돌라, 이탈리아 출신의 탁월한 르네상스 철학자다. 23세 약관의 문턱에서 종교와 철학과 자연과 마술에 대한 900개의 테제를 내걸로 모든 자들의 반론에 대해 변증의 의사를 밝힌 것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위엄을 강조했고 일종의 르네상스 선언문에 해당되는 문헌(De hominis dignitate)을 남겼다.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아랍어에 능통한 언어의 귀재였다. 하여 동서고금 문헌들을 닥치는 대로 섭렵했고 그런 방대한 독서와 연구에 기초하여 플라톤 사상과 신플라톤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신비주의 및 카발라 사상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인문주의 식의 통합적인 학문을 구축했다.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자유를 논하는 논제에서 이 르네상스 철학자의 이름을 거명한다. 천문학에 강한 반감을 가진 이 철학자의 링크된 문헌은 섭리론과 의지의 자유론을 다룸에 있어서 참조해야 할 자료이다. 최근에 프랑스의 갈리카 도서관이 디지털로 소장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외장하드 아랫묵에 챙겼다.

Pico Della Mirandola, Disputationes adversus astrologiam divinatricam

정약용의 공부론

공부에 자포자기 행보를 보이는 아들에게 정약용은 대뜸 "세상 선비들이 큰 공부를 못하는 이유를 아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곧장 "과거시험 준비 때문"이란 진단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강진으로 유배된 폐족의 처지를 직시하며 관직에 나가는 일이 원천봉쇄 되어 "너희는 과거시험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 기회냐"며 독서하고 필사하고 저작하는 일에 전념할 것을 자식에게 엄중한 목소리로 꾸짓고 권고한 적이 있습니다.

공부는 어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 공부이길 중단하는 것입니다. 동기의 부실이 공부의 목덜미를 붙잡는 원흉일 때가 많습니다. 진정한 공부는 부나 명예와 같은 보상에 대한 기대에서 추동력을 얻지 않습니다. 공부 자체가 순수한 목적일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공부일 수 있습니다. 어떤 목적에 경도되면 공부는 추하고 왜곡된 경향성을 띄기 쉽습니다. 전인격과 삶으로 익히고 체득된 공부는 그 자체가 세상의 복입니다.

신학의 길을 걷거나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부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생처럼 진리의 추구 자체가 우리에겐 목적이요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막강한 수단을 확보하는 준비의 일환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큰 공부와 깊은 진리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진리를 배우고 체득해도 땅에서의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상황보다 큰 공부에 더 좋은 환경은 없을 것입니다. 큰 공부는 자잘한 유익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큰 공부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큰 유익을 끼치는 것입니다. 진리가 깊을수록 세상에 비추는 빛은 더욱 밝은 법입니다. 

성경읽기 및 신학의 준비와 방법

성경은 아무나 해석을 시도할 수 있지만 누구나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의 세계는 누구나 뛰어들 수 있도록 열려 있지만 모두가 바른 신학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의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기 이전의 준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항목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성경의 참되고 확실한 의미와 그것의 적용에 대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해 주어지는 견고한 설득 (Prov. 2:6; 2 Pet. 1:20; 1 Cor. 12:3; Luk. 24:45): 이것은 신학의 출발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신학의 원리가 하나님과 성경과 성령의 조명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시작되지 않은 신학의 출발점은 필히 그릇된 종점으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시초적인 설득이 신학적 활동에 선행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 설득 때문에 아무리 신학의 고공을 행진해도 자랑과 교만은 어떠한 이유로도 뻣뻣한 고개를 내밀 수 없습니다.

2) 진실한 믿음과 순전한 마음과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Augustine, De doctrina christiana III.xxxvii): 신학에의 본격적인 돌입 이전에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하는 기도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의 가치와 기호와 의도를 겸허히 내려놓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좋고 원하시는 것을 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구제와 봉사를 다른 분들에게 부탁하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도가 말씀보다 앞선다는 순서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겠으나 무의미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말씀을 읽더라도 나의 기호와 가치와 의도를 따라 읽어서는 안된다는 점, 한 순간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3) 하나님을 향한 명확한 회심, 진실한 경건, 여호와에 대한 경외와 인간에 대한 존중 (Psal. 25:14; Prov. 1:7): 신학의 길을 간다는 것은 결코 다른 모든 것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무관심해 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은 차원에서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 대목은 확고한 돌이킴과 진실한 경건이 내면에 구비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외를, 인간을 향해서는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지 않으면 신학에 첫발도 내디딜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말입니다.

4) 진리에 대한 사랑과 갈구 (Psal. 119:40, 47, 48):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결에의도 미치지 못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진리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랑과 그것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갈구의 태도가 신학의 중요한 준비라는 말입니다. 일평생 진리만을 갈구했던 사랑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범례가 우리의 시대에도 재연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배움의 성향 혹은 경향 (John 3:21, 33): 배움은 겸손과 다르지 않습니다. 배움을 중단하는 사람은 무시로 교만과 동침하는 자입니다. 모든 의식과 생각과 언어와 행실이 배움의 항속적인 기질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늘 배우고자 하는 자에게는 교실이 따로 없고 수업시간 구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나 늘 배우고 익힙니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질까 조심하는 겸손의 자세가 바로 배움의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6) 하나님의 확증된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발성 (John 7:17): 사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도 제대로 깨닫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행하고자 하면 내 말이 나의 것인지 아버지의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의 순종을 촉구하는 기계적 의무감을 주입하지 않습니다. 외부의 강요나 압박에 떠밀린 순종은 아직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외압적인 의무감을 느낀다면 자발성의 부재를 의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7) 신앙과 선행에 대한 교리문답 수준의 교리적 지식 (Heb. 5: 12-14): 이는 어릴 때부터 교리문답 교육에 충실하여 기독교 진리의 기본적인 골격이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양식 깊숙한 저변에 단단히 박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혹 기회가 없어서 이것을 생략하고 지나간 분들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같은 초등 교리들을 익히고 또 익혀서 진리의 골격 세우는 작업이 우선적인 일일 것입니다.

8) 성경 언어들에 대한 숙지 (1 Cor. 14:5):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는 기본으로 공부해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글이나 영어나 한문성경 같은 번역문을 읽어도 좋겠지만 번역은 언제나 원문의 다양한 개념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이고 달리 생각하면 다른 나머지의 개념들은 버리는 행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의 역본들이 틀리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개별 단어와 문장이 가진 의미의 부요함은 원문에 미치지 못합니다. 영의 양식으로 때를 따라 꼴을 먹이도록 부름을 받았다면 가능하면 양질의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목회자의 도리인 것 같습니다.

9) 성경이 그 자체와 가장 조화롭고 아름답게 일치하고 있음에 대한 확신 (Augustine, epistola ad Hieronymum):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의 기록자나 특정한 시대적 상황에 근거하여 쪼개고 쪼개는 환원주의 행습을 따라 성경의 완벽한 조화와 통일성을 파괴하는 일이 신학계에 일종의 역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인간 기록자와 기록의 인간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지나치게 과장하고 거기에 몰입하여 결국 유일하신 하나님이 성경의 제1 저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학문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진 무서운 성경파괴 행위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적인 거리감이 있고 기록자가 다르고 주제의 이질성이 크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저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극복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읽고 신학을 연구하기 이전에 성경에 대해 인간의 환원주의 본성이 함부로 발휘되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의 통일성에 따른 성경의 최고의 조화와 일치에 대한 확신이 여기에서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준비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 정통주의 인물들이 주로 성경과 교부들의 문헌에 의존하며 생각하는 성경 해석학의 일반적인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성경의 지속적인 탐독 및 탐색;

2)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 원문으로 연구;

3) 성경 전체의 목적이요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향한 영속적인 조준 (John 5:39, Acts 3:18, Rom. 10:4);

4)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해 분별의 안테나를 고정;

5) 올바른 순서와 적법한 방식으로 성경의 의미와 활용을 탐구;

6) 표현에 대한 숙고;

7) 동일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평행구절 및 유사구절 비교와 보다 명료한 구절과 애매한 구절의 비교;

8) 텍스트를 해명하기 위해 이질적인 다른 구절과의 대조;

9) 성경을 활용하기 위해 새로운 신학적 언어들을 고안하는 것의 제한 (Deut. 4:2);

10) 텍스트의 해석이 사도신경 혹은 십계명과 같은 믿음의 유비 및 주된 교리들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인지를 부지런히 살핌;

11) 예언이 다른 예언에 의해 제어를 당하듯이 성경의 해석이 다른 해석들에 의해 제어를 받는 식의 분별에 대한 지속적인 연습 (1. Cor. 14: 29-33);

12) 문법과 수사학과 변증학과 물리학과 같은 일반교양 및 일반학문 전반에 대한 지식의 확충  등입니다.

종교의 씨앗

바울은 사도행전 17장에서 아테네 지성인들 앞에서 종교성이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지적은 로마서 1장에서 보다 심오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정리된다. 종교의 씨앗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자신의 독자적인 신학적 행보가 아니라 바울의 글에 기초한 것이었다. 로마서 전체는 바로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된 바울의 설교가 어떻게 심오한 발전과 근본적인 복음의 정수로 귀결이 되었는지, 그것을 잘 보여준다. 

2014년 3월 19일 수요일

닛사의 그레고리 (Gregory of Nyssa, 335-395)

교회의 역사에서 문제가 없었던 때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질(質)이 가장 심각하고 복잡했던 기간을 택하라면 대부분의 학자들은 단연 AD 4세기를 꼽습니다. 1세기부터 3세기까지 교회는 예수님을 어떻게 구약의 관점에서 해석할 것인가에 몰입을 했습니다. 그러나 4세기에 오면 성직자와 신학자들 중에서 괜찮은 실력을 갖춘 이단들이 교회 내부에서 등장해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왜곡시켜 하나님의 교회를 대단히 어지럽게 했습니다. 이때 거짓을 막고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활약했던 대표적인 교부들이 아타나시우스, 바질,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닛사의 그레고리 등입니다. 학자들은 아타나시우스를 제외한 3사람을 ‘갑바도기아(지금은 터키가 위치한 곳) 교부’라고 부릅니다. 그 중에서 친형 바질과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이 두 사람의 유명세에 가려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닛사의 그레고리, 그는 철학과 자연과학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의 소양과 학식을 갖춘 분입니다. 한 서신에서 그는 형 바질만을 자신의 선생으로 모셨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형의 관심사를 넘어 그는 형보다 더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식견을 갖춥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Stoa), 필로(Philo)의 철학을 공부하고, 기하학과 천문학과 의학도 배웠으며 특별히 고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와 갈레노스(Galenos)의 책까지 탐독의 지경을 두루두루 넓혔던 분입니다. 바질의 권고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 그레고리는 결국 371(372)년 닛사의 감독직에 오릅니다. 그러나 이단들의 모함에 의해 교회의 공금을 유용한 혐의를 받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 그는 보다 본격적인 이단과의 전쟁을 수행하며 신학과 철학과 삶에 관하여 방대한 저작을 남깁니다.

그의 시대에 있었던 신학적 문제를 간단히 말한다면 4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인가?  2)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가?  3) 예수님과 성령님은 신이 아니라 최고의 피조물이 아닌가?  4) 예수님과 성령님이 신이라면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이신가? 이러한 주요 질문들에 대해서 교부들은 예수님을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사람으로 알았으며, 예수님의 신적인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과 성령님은 열등한 신이거나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본질(essentia divina)을 가지신 하나님이 되신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하나님(tres Deos)을 말해서는 안되고 한 분 하나님(unum Deum)을 고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신학적인 용어가 ‘삼위일체(trinitas), 즉 하나님은 세 위격(tres persona)이며 한 본체(una essentia)’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같은 본질을 가졌지만, 동시에 각 위격은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고유한 특성(proprietas incommunicabilis)에 의해서 서로 구분된다’ 이런 뜻입니다. 닛사는 이러한 삼위일체 교리를 경건의 원리(εὐσεβείας λόγος)로 삼았던 분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교리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수많은 논쟁과, 허다한 증인들의 순교와, 여러 번의 국제적인 교회 공의회(council)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조금 어렵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믿고 있는 진리의 핵심이 어떤 댓가를 지불하며 형성되어 왔는지를 한 번 상고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닛사의 그레고리, 그는 오리겐(Origen, 185-254)의 [원리론(Περὶ ἀρχῶν)] 이후 처음으로 종합적인 신학의 체계(Oratio catechetica magna)를 구축한 분입니다. 이것은 학문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신앙의 교육적인 설명을 위해 신학적 틀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무엇이 신학의 올바른 방향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신학은 성도 개개인과 교회의 성장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레고리 자신에게 신학과 경건은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학과 경건의 기본적인 전제는, 기독교의 진리가 신비(μυστήριον)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 이해보다 신앙적 수용의 중요성을 외칩니다. 신비에 대한 그의 강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전하신 하나님께 사랑과 경외심을 가지고 끝없이 다가가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권면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신적인 본성의 참여자(θείας κοινωνοὶ φύσεως)’가 되라고 권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라고 말합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아마도 하나님 자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우리의 죄와 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제롬(Jerome)의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는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동일한 방식으로 못박히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ὰνάξιον)고 하여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합니다 (PL 23:608). 예수님이 보이신 신적인 본성에 가장 가까이 참여한 자의 최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신의 본성에 참여한 자가 어떤 자인지를 베드로는 자신의 ‘겸손한 죽음’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레고리가 베드로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신비의 깊은 것들(τὰ βάθη τοῦ μυστηρίου)’을 철저하게(ἀκριβῶς) 경험한 자들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동일하게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영 안에서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언어로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한계선을 긋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수 개념이나 상식도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언어의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에는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어느 정도 적당한 지식은 전달할 수 있더라도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언어의 지혜로운 말로는 전달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권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는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인 동시에 하나님의 본성을 전달하는 최고의 방법은 우리가 그 신적인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성품이 삶의 입체적인 현장에서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제대로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경건의 비밀(τὸ τῆς εὐσεβείας μυστήριον)’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 비밀을 소유하는 것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연합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주님과의 연합이 있을 때, 비로소 경건의 비밀을 소유하고 그것을 타인과 나누는 진정한 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도망자 그레고리 (Gregory of Nazianzus, 330-390)

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행적을 감추어서, 그레고리는 교부들 중에 도망자로 불리는 분입니다. 여러 번의 성직자직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그때마다 도망에 도망을(de derobade en derobade) 거듭하곤 했습니다. 현장에서 섬기는 것보다 학문 연마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입니다. 교부들의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조적인 삶(vita contemplativa)과 활동적인 삶(vita activa) 사이에서 갈등을 했습니다. 관조적인 삶은 하나님을 보는 경지까지 이르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는 삶을 말하고, 활동적인 삶은 지식을 실천으로 옮기려고 일반적인 직업을 얻거나 성직자가 되는 삶을 말합니다.

그레고리는 관조적인 삶을 좋아하고 시와 수사학과 철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 희랍 시문학의 창시자로서, 그가 시작(詩作)에 애착을 가졌던 이유는 이방의 문학보다 기독교의 지혜와 지식이 더 우월함을 보이려는 것이었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그가 사명으로 생각했던 것은 성경에 기록된 기독교의 진리를 헬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하는 ‘하나님의 전령’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복잡한 신학적 내용을 쉽게 풀어서 일반인도 신학적인 문제에 흥미를 가지도록 한 그의 탁월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는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대주교에 임명되어, 관조하는 삶을 접고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갈라진 교회를 통합하고 바른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재능을 붓끝에 담아 지상전(紙上戰)을 펼칩니다. 물론 혁혁한 공로를 세웁니다.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이 바로 44편의 ‘연설집 (Orationes)’입니다. 그러나 그의 대주교 신분은 본인의 실수도 있었지만, 이단들의 집요한 중상과 모략으로 인해 짧게 끝납니다. 그는 예전에 주변의 강요 때문에 사시마(Sasima) 지역의 주교직을 수락하고 수행하고 있었는데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오면서 사임의 행정적인 절차를 매듭짓지 않는 실수를 범합니다. 이단들은 그런 실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결국 양다리를 걸쳤다는 비난을 받고 그레고리는 로마의 수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레고리 대주교를 신앙의 선배로 선택한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함에 있어서 그가 보여준 경건한 태도와 인간적 한계에 대한 겸손하고 정직한 인식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레고리 시대에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신학을 논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의 연장이 아니라 그냥 마음에 안심을 주는 종교적 행습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레고리는 ‘하나님을 항상 상고하는 것(pantote memneisthai)은 우리가 숨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학을 논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영원히 묵상할 것을 권합니다. 신학적 논쟁에는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는 것 자체가 사단의 목적이 되는 그런 사소하고 소모적인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걸러내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를 이기는 것이며, 인생을 절약하는 길입니다.

나아가 그레고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을 돌아볼 것을 권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죄로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는지를 정직하게 살피면, 겸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뒤틀린 우리의 생각과 언어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adunatos).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어떤 사물 그대로의 지식(to ti tote esti touto eidenai)’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대단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빛과 대기의 협조(mesoi photos kai aeros) 없이는 사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물의 표면과 부딪쳐서 반사된 빛을 겨우 눈과 신경으로 편집하여 지각된 것을 가지고 무언가를 안다고 여기는 우리의 지식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생래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우주는 물론, 지극히 하찮은 미물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도 우리가 감관(感官)으로 들어오는 정보에 근거해서 생각의 방식으로 지식을 산출하는 자로 있는 한 그 한계는 결코 극복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다 보면, 우리 자신을 통째로 부인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창조된 자연도 그 지식에 있어서 이처럼 한계를 가지는데, 하물며 우리의 지각이 더듬을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에는 얼마나 더 깊고 심각한 한계가 있을까를 짐작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레고리는 지금까지 누구도 하나님의 본질을 발견한 사람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단정을 내립니다. 우리가 ‘예수님, 그리스도, 하나님, 여호와, 진리, 생명, 영, 능력, 창조자, 주님’이란 말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런 언어들이 과연 하나님 자신의 순수한 지식을 다 담아내고 있느냐고, 그레고리는 묻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선하시고 의로우며 완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며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분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것들은 귀신들도 알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믿음이 없고 기독교를 파괴하려 드는 사람들도 언급하며 이용했던 말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리는 하나님이 결코 언어의 호칭으로 묘사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의 본질은 언어의 방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하나님(theoeides)’이 되든지, ‘그런 신성(touto theion)’을 가지든지 해야 한다고 그레고리는 믿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신도 아니고 신성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셨으며,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앞에서 길게 언급한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라는 것을 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질(Basilius Magnus)도 그랬지만, 그의 친구 그레고리도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을 생의 목적으로 두었던 이유도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지식을 얻고 정보를 나열하는 그런 차원의 공부가 아닙니다. 그런 지식을 버려서도 물론 안됩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영원토록 거하시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그 하나됨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며, 그 지식은 주님과의 더 깊은 합일(communion)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레고리는 삼위일체 교리로 휘청거린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고 간사한 궤변으로 진리를 가리고 왜곡하던 이단들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레고리 대주교를 읽으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입술에서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라는 말을 들었던 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알리는 증인의 삶은 언어의 방식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되어 동행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귀신이나 사악한 궤변가가 내뱉는 하나님의 지식 수준이 아니라 아브라함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대 바질 (Basilius Magnus, 330-379)

바질은 동방의 갑바도기아 교부들 중에 가장 유명하고 출중한 분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Magnus라는 칭호가 붙은 교부는 바질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특정한 교단이나 직위의 가치를 일부러 높이려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거의 없습니다.

바질은 부요한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슬하에서 학문적 기초를 닦았으며, 14살에 갑바도기아의 수도 가이사랴에 가서 3년 공부하고,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이 기원전 4세기에 설립한 아카데미아(Academia)에 입문하여 6년동안 수사학과 철학과 문학과 역사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최고의 고등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질은 세속적인 출세의 야망을 접고 수도원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나아가 그는 남자들을 위한 수도원을 세우고 주님과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신앙의 길을 걷습니다. 바질은 은둔생활 속에서 혼자 실천하는 신비주의 운동을 거부하고 공동생활 속에서 공동체와 더불어 수행하는 신비주의 및 금욕주의 운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이처럼 바질은 단순히 이론적인 기독교 교리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수도생활, 기독교 교육 및 예배까지 다양한 분양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적인 삶도 살았던 분입니다. 물론 너무 왕성한 활동성 탓인지 그는 50세가 못되어 단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삶의 흔적과 저술들은 4세기의 가장 탁월한 기독교 지성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이며 교회에 큰 유산이 되고 있습니다.

바질의 교리적 업적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을 ‘본질은 하나이며 실체는 셋 (mia ousia, treis hypostaseis)’이라는 도식으로 풀어낸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의 신앙과 신학이 동시에 빚어낸 최고의 업적은 ‘하나님과의 합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질이 저술한 가장 중요한 작품은 On the Holy Spirit (De Spiritu sancto)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성령의 행하신 일과 함께 성도의 궁극적인 갈망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결점에서 깨끗하게 된 자들에게 빛을 비추시는 성령 하나님은 그 자신과의 연합을 통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햇살이 밝고 투명한 물체에 떨어질 때 그 물체도 역시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령을 지닌 영혼들도 역시 신령하게 되며 그 은혜를 타인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미래의 예지, 신비들에 대한 깨달음, 감추어진 것들의 인식, 은사들의 분배, 하늘의 시민권, 천사들의 합창 속에 거하는 것, 끝없는 기쁨,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he pros Theon homoiosis), 가장 소망스런 것으로서(to akrotaton ton orekton) 하나님이 되어지는 것(Theon genesthai)이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De Spiritu 9.23).”

여기에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되어지는 것.’ 이 부분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어 바질을 이단으로 정죄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질의 전반적인 신학을 살펴보면, 인간이 신과 동등한 종류의 존재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이단으로 내몰릴 수 있는 그 절묘한 줄타기를 편하게 피해 가는 것보다는 바질이 의도하고 있는 깊은 의미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권면하고 싶습니다.

‘대공(Magnus)’이란 거창한 수식어가 붙는 바질이 이단으로 정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이 되어지는 것”이라는 표현을 굳이 선택한 것일까요? ‘신’이라는 말이 인간을 수식하는 용어로 채택된 성경적 사례도 찾아보면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간편하게 해결해서 그냥 지나가는 것보다, 저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를 바질이 어떤 차원까지 생각하고 있는지를 탐구하고 싶습니다.

바질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람이 가장 소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아져서 그분과 비기려는 사단의 무모한 도전을 우리가 계승하는 것처럼 이것을 이해하면 안됩니다. 이는 믿음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관한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경주가 겨냥해야 하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아야 할 방향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경외함이 동시에 요청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외연적인 것과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 다른 매개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공로나 업적이나 축적이나 만족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하나됨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과의 가장 순수한 상태의 합일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과의 가장 투명한 교통과 연합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진 상태를 묘사한 말입니다. 바질은 하나님이 바로 그런 교제와 연합을 원하신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축적과 정밀한 암기와 신비한 체험들이 주는 경건의 형태와는 판이하게 다른 차원의 신앙을 바질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질의 신앙은 삼위일체 교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식과 습관에 안주하지 않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하나님이 되어지는 것은 흉내와 모방의 방식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동행하고 동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성령으로 사시며 행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한다고 어떤 실체가 손아귀에 확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본질을 가장 엄밀하고 깊은 차원,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되는 그런 차원까지 전심으로 침노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리용의 이레니우스 (Irenaeus of Lyon, 2c-202)

교회는 사랑과 진리가 입맞추는 곳입니다. 사랑과 진리의 숨결이 없으면 교회는 죽은 것입니다. 그 죽음은 당장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주 은밀하게, 서서히,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게, 교회의 죽음이 이미 현실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방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생명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동원한 사랑의 수고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섬김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더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성경에 계시된 진리 그대로가 교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려는 몸부림을 보십시오. 그들의 순교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분량과 무게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원수의 날아오는 칼과 창을 가슴으로 받는 사랑도 행했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그들은 거짓의 아비 마귀의 난동을 저지하는 일에 진리의 검을 사용하는 법도 배우고 익혔습니다.

리용의 장로로 있다가 주교가 된 이레니우스는 폴리캅의 제자로서 당시 교회를 가장 아프게 했던 영지주의(Gnosticism) 이단의 정체를 가장 잘 드러낸 분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이단들을 대적하며(Adversus Haereses)” 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짓의 문제는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으로 정복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단을 정확하게 알고 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짓은 진리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은 쉽게 발각될 정도로 자체의 벌거벗은 상태를 노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혹적인 드레스로 영리하게 스스로의 추악함을 가리고 장식하여 진리 자체보다 더 진리 같은(ipsa veritate veriorem) 모습을 취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자신보다 더 탁월하고 궁극적인 어떤 것(altius aliquid et majus)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꾸미기도 합니다. 성경의 적당한 도용은 가장 효과적인 장식품의 하나로 환영을 받습니다.

그리고 거짓은 양파처럼 무수한 껍질로 싸여 있습니다. 만약 거짓이 여러 겹의 가면을 쓰다가 하나를 벗으면 아직도 그 본연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 아닙니다. '이제 속지 않았다'고 생각할 그때에 속을까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사단은 이런 방식으로 속입니다. 마치 거짓이 다 드러난 것처럼 안심하게 만들고 나서, 본격적인 거짓의 일들을 아무런 의심이나 저항도 없이 마음껏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도 빛에 의해서 드러나면 끝입니다. 빛은 그 자체로 어두움의 종말을 뜻합니다. 거짓은 우리가 아는 진리의 빛 분량만큼 벗겨지는 것입니다. 진리에 엄밀하면 그만큼 거짓의 예리한 것까지 벗기고, 넓게 알면 그만큼 두루두루 벗기고, 깊이 알면 뿌리까지 뽑아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진리에 무지한 자들은 이러한 거짓을 진리에서 분리해 낼 수 없습니다. 진리는 이성의 범주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기에 탁월한 지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거짓과의 싸움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십니다. 그리고 지금 활동하는 거짓의 아비 마귀는 머리가 밟혀져 있습니다. 제정신을 가지고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세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아무런 영향력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짓과 싸워서 지지 않는다는 확고한 보증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과 진리가 싸운다고 말할 때, 우리는 거짓이 진리의 수준만큼 높아서 대립항이 될 정도라고 과장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분명히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부가 가려진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다만 사단의 세력과 영향력을 미미하게 남겨두신 이유는, 우리가 결국 정복해야 할 것은 거짓의 아비 마귀가 아니라 진리의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임을 알게 하고 그 길로 인도하는 적당한 채찍의 필요성 때문에 두신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귀신이 쫓겨 나가고 질병이 치료된 것만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 그런 차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거짓과의 싸움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수단처럼 보이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진실로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대교회 교부들은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 아는 것을 가장 고상하고 귀한 것으로 여겼으며, 이 지식을 파헤치기 위해 가장 날카로운 지성의 날을 세웠던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을 향해 던진 예수님의 질문을 안경으로 삼아 교부들은 신약과 구약을 생명을 다해서 읽고 연구하고 교회를 위해, 이단을 향해 붓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거짓의 싸움에서 칼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 우리로 원수까지 품어야 하는 사랑의 도리마저 희생하게 만드는 부당한 호전성은 단연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의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동시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께 돌아오면 일평생 적으로 규정하고 싸웠던 대상이라 할지라도 내 생명처럼 여길 수 있는 사랑을 늘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긴 교회사 속에서 이 사랑과 진리를 모두 붙들었던 순간들을 찾는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단히 적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사랑도 턱없이 부실한데 진리에 있어서도 위험한 수준까지 변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에 하나는 세워주고 다른 하나의 무너짐은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단의 전략인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가 어느 것 하나라도 포기되지 않고 풍성하여, 은혜와 진리가 동시에 충만한 독생자의 온전한 영광을 거룩한 향기로 퍼뜨리는 지역과 시대의 증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Ignatius of Antioch)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Historia Ecclesiastica)에 따르면,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AD 35 or 50~ 98과 117년 사이) 주교는 베드로가 안디옥 주교직의 후임자로 지명했고, 예수님이 품에 안으셨던 아이들 중 하나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 중 하나라는 주장도 있습니다(PG 5:980). 그는 자신을 테오도루스(Theodorus)라 불렀으며, 이는 ‘심장에 그리스도 예수를 가진 자(is qui habet Christum in pectore)’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사도적 교부들(Apostolic Fathers)이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이그나티우스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순교의 길을 걸어가신 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복음을, 자신의 생명과 동일하게 여기는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콜베르티누스 코덱스(Codex Colbertinus)에 담긴 그의 순교 이야기(Martyrium)는, 그 당시 트라야누스 (Trajanus) 황제의 판결을 따라 ‘십자가에 못박힌 자를 지니고 다니는’ 이그나티우스가 병정들의 손에 이끌려 로마로 이송되고 그곳에서 로마인의 유희(delectionem)를 위해 사자밥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PG 5:982). 놀라운 것은, 그가 이 판결에 대하여 감사의 탄성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이런 판결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그는 “당신을 향한 완전한 사랑으로(perfecta charitate) 나를 영화롭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진실로 그는 세상 끝까지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내 하나님의 수난을 본받는 자(imitatorem passionis Dei mei)’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분입니다.

이그나티우스가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가 사도들 이후에 하나의 ‘보편적 교회(catholica Ecclesia)’라는 말을 처음으로 언급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PG 5:714). 시대와 공간을 초원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의 교회로 보았던 거시적 안목을 처음으로 보여준 교부라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에 기초하여 그는 분열(divisiones)을 악의 근원(principium malorum)으로 간주하고, 여러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언제나 분열의 문제를 지적하며 적극 피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교가 한 지역교회에 한 명만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아마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의 보편성과 하나됨을 놓치지 않으면서, 이그나티우스는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결코 비겁하고 타협적인 침묵으로 피해간 것이 아닙니다. 그때 이단들은, 예수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전혀 아프시지 않았으며, 부활도 인간 예수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육신 속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임무를 마치고 하늘로 가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이그나티우스는 이단들을 반박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실재성을 강한 어조로 외칩니다. 그는 수난과 부활의 예수님을 하나님이 계시되는 독보적인 좌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님의 실재성을 부정하면 사실 기독교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의 순교는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실재성을 외치는 마지막 증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이그나티우스가 바울의 서신들(tota epistola)을 알았으며 그것을 복수(plurals)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PG 5:655). 즉 바울의 편지들이 나중에 교회에 의해서 수집되어 성경의 목록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니라 1세기 교회에서 이미 묶음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말시온이 자기의 입맛대로 성경을 편집하여 교회를 어지럽게 하기 이전의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로마 카톨릭이 교회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잘못된 주장을 뒤집어 엎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오늘날의 성경으로 규정된 것은 교회의 권위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교회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보다 높습니다. 교회를 대표하는 교황과 미사를 집례하는 사제들은 평범한 인간일 수 없습니다. 즉 그들은 아무런 흠과 죄가 없다는 또 다른 궤변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여러 교리적인 문제들은 성경에 대한 그들의 그릇된 견해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종교개혁 및 후기 종교개혁 시기(16-17세기)의 문헌에는, 성경을 하나의 교리의 차원(locus)이 아니라 교회론을 비롯한 모든 교리들이 산출되는 원리(principium)로서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그나티우스가 이런 문맥의 중심부에 섰던 교부는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를 논함에 있어서 그는 기록된 성경에 천착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록된 문헌보다 선포되는 복음에 강조점을 두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교리들이 성경과 다르다는 뜻은 아닙니다. 선포를 기록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마틴 루터와 칼 바르트의 신학은 마치 이그나티우스의 잠재된 통찰력을 밖으로 꽃피운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이그나티우스가 일찍이 주장한 교회의 보편성은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 교단의 교리적인 차이를 단순히 다양성일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진리와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린아이 같은 교리, 성숙하지 못하여 채소를 먹는 것 같은 싱거운 교리적 체계를 갖춘 교회나 교단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모인 분들을 무조건 이단으로 규정하여 통째로 잘라내는 일은 대단히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로마 카톨릭도 예외가 아닙니다. 뭐 교단이나 교회라는 넓은 범주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까운 주변만 보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육체에 속한 자처럼 편을 가르고 타인을 비방하여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성향을 가진 자인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고아와 과부에게 이웃이 되어 주기보다 나에게 유익과 편이를 제공하는 자들을 이웃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분열을 악의 원리로 보고 거절했던 교부처럼, 우리도 경각심을 가지고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지극히 이기적인 이익의 방편으로 분열을 도모하기보다, 사랑의 띠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온 세상에 그려놓은 넓이만큼 확장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그나티우스가 순교할 때 가졌던 마음을 고백한 부분이 있어 번역하여 올립니다. 극도의 고난과 죽음에 이르는 시험을 부활의 신앙으로 잘 해석한 것 같습니다. 이그나티우스의 고백을 읽으면서 저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고난의 비밀을 한꺼플 벗겨보는 것도 큰 유익이 아닐까 싶습니다. 괄호는 헬라어를 영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시리아에서 로마에 이르는 동안 나는 바다나 육지에서 밤낮으로 사나운 짐승들과 싸우고 있다. 자유롭게 풀어주면 훨씬 더 사나워질 열 마리의 표범, 즉 막강한 군대와 대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부당한 행실들을 통해 나는 더 탁월하게 제자도를 배운다(mallon matheteuomai).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로써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를 위해 예비된 짐승들로부터 유익을 얻기 원한다(onaimen). 또한 그들이 내게 합당한 자들임을 발견하기 원한다. 나아가 그들이 나를 신속하게 삼키도록,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지 않도록 그들을 유인하고 싶다. 비록 그들은 뜻이 없어 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나를 삼키라고] 설득할 것이다 (prosbiasomai). ‘네가 나에게 가져다 줄 깨달음을 얻게 하라.’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나는 제자도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만을 얻으리라 (epituxo). 불과 화염과 난폭한 짐승과의 싸움이여 오너라. 뼈를 비틀고, 수족을 자르고, 온 몸을 눌러 부수는, 나를 향한 마귀의 지독한 고통이여 오너라. 그 괴로움 속에서 나는 오로지(monon) 그리스도 예수만을 얻으리라. 

로마의 클레멘트: 핍박과 회개

비록 역사적인 증거는 강하지 않지만, 신약성경 사도들을 이어가는 1세기 교회 지도자 가운데 로마교회 사도적인 교부들 (Apostolic Fathers) 중 하나로 알려진 ‘로마의 클레멘트 (Clement of Rome, fl. 88-97)’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신약성경 안에 포함되지 않은 기독교 문서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신 분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과 누가의 친구일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역시 객관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폴리캅에 이어 로마의 클레멘트 주교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쓴 고린도 서신(바울이 쓴 서신과 다름)에서 시기(envy)와 회개(repentance)라는 관점으로 핍박의 역사를 간파한 그의 독특한 통찰력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클레멘트는 시기를 가인으로 하여금 동생 아벨을 죽이게 만든 원흉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이유로 인하여, 야곱은 에서의 면전을 피해야만 했으며, 요셉은 형들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고 감옥소를 안방처럼 출입해야 하는 핍박을 받았으며, 모세는 파라오의 얼굴을 피해 황무한 광야길로 달아나야 했으며,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에 대한 시기 때문에 공동체 밖에서 거처를 마련해야 했으며, 다단과 아비람은 동일한 시기로 인하여 땅에 삼키운 바 되었으며, 같은 이유로 사울은 다윗을 죽을 때까지 핍박의 칼을 갈며 죽음의 창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대에도 동일한 원리를 따라 가장 위대하고 의로운 교회의 기둥들이 죽음에 이르는 핍박으로 사라져야 했던 사실을 클레멘크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비록 자신의 시기로 인하여 인내의 한계를 몇 번 드러낸 경우가 있었지만, 그는 정치계와 종교계의 불의한 시기로 인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순교로 생을 마감해야 했으며, 바울은 사도들과 동족들의 시기로 인하여 인내의 완숙함도 얻었지만 수많은 죽음의 경험들도 감수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클레멘트는 자기가 처한 핍박의 시대를 이렇게 일갈한 후 그것을 극복하는 해법으로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시고 온전하고 기뻐하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가장 우선적인 하나님의 뜻은 바로 회개라고 말합니다. 사실 주변에서 벌어지는 불의의 결과로 초래된 핍박과 고난이기 때문에 그들을 고발하고 강하게 저항하는 것이 자연스런 대안으로 제시될 법도 한데, 로마의 클레멘트 주교는 오히려 자신을 돌아볼 것을 권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 점입니다. 이는 다윗이 자식에게 쫓기며 생명의 위협을 받던 억울한 시절에 비루한 시무이가 입에 담을 수도 담아서도 안되는 그런 악담을 다윗에게 퍼부었을 때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것을 하나님이 시키신 명령으로 여기며 회개의 무릎을 꿇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단칼에 문제를 수습할 것을 제안한 충복 아비새와 요압에게 면박을 주면서까지 관여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다윗의 신앙에서 클레멘트 주교의 권고는 멀지 않습니다.

교회를 향한 핍박은 지금도 여러 가지 형태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가정적, 개인적 부문에서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확실히 배후에는 사단과 이 세상의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무리들의 분노와 격한 숨결이 빚어낸 일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시시비비 따지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타당하고 효과적인 접근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선하고 온전한 접근법은, 이것을 계기로 스스로를 돌아보며 인내의 온전함을 이루며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더욱 화려한 빛을 발휘할 수 있도록 더 적극적인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과 기적을 갈망하는 유대인의 그럴듯한 유혹이 사방에서 촉수를 내민다 하더라도, 핍박과 고난의 시대는 십자가의 의로운 판단력이 더더욱 요청되는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 클레멘트 주교가 부당한 시기(unrighteous envy)로 말미암아 촉발된 억울한 핍박이 합법적인 방식으로 자행되던 시대에 교회를 향해 ‘이것을 스스로를 돌아보는 회개와 신앙적 진일보의 계기로 삼으라’고 한 권고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순교자 폴리캅 (Polycarp)

계시록에 나오는 7개의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에서 50년간 목회를 하셨던 폴리캅, 그는 사도 요한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제자였고 사도들와 교부들의 신앙을 이어주는 진리의 중개자 역할을 했던 분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제자 이레니우스(Irenaeus)가 플로리누스(Florinus)에게 보낸 편지에서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폴리캅은 사도들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하여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분들과 교분을 나누었던 분이라 증언하고 있습니다 (Adv. Hae. iv.3). 그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과 사랑의 기도를 강조한 분입니다. 세상의 임금들과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들과 심지어 십자가의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Epi, xii).

수많은 성도들의 입술에서 지금까지 널리 회자되는 일화가 있습니다. 주후 156년경 혹독한 핍박의 시기에, 86세의 폴리캅은 종의 배반으로 군인들의 손에 붙잡혀 투옥을 당합니다. 이때 그는 종의 사악한 마음을 문제삼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드디어 운집한 군중들과 재판관들 앞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짐승들의 사나운 입술과 화형대의 뜨거운 불길로 폴리캅을 위협하며 그들이 그에게 던진 흥정의 내용은 “그리스도 예수를 저주하라 그리하면 석방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답합니다. “나는 일평생 그분의 종이었고 한번도 나를 해롭게 하신 적이 없는 나의 주인이며 구세주인 그분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소! (Mar, ix)” 나아가 폴리캅은 한 시간의 화염보다 영원한 불못이 더 무섭다고 말합니다(Mar, xi).

고문을 담당했던 형리가 이 말을 전하자 군중들은 분노를 격발했고 폴리캅은 재판의 절차가 끝나기도 전에 군중들에 의해 화형을 당하게 됐습니다. 안디옥의 순교사에 따르면, 폴리캅은 재판 전날에 이미 세 번이나 화형 당하는 장면을 환상으로 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세와 권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배웠다 (Mar, x)”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폴리캅은 예수님과 같이 실패자의 모습으로 생을 끝맺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서마나 교회는 신실한 지도자를 잃었지만, 폴리캅의 믿음은 아시아의 수많은 성도들의 가슴에서 되살아나 교회는 더더욱 강력해 졌습니다.

이런 전설도 있습니다. 폴리캅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 같이 화형대의 불길 속에서도 몸이 상하지 않았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결국 집행관이 칼로 찔러서 죽일 수밖에 없었는데 19세기에 그려진 폴리캅의 순교장면 그림에는 그런 전설을 반영한 것 같습니다. 죽은 이후에는 폴리캅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화염을 꺼뜨려서 참여한 사람들도 멀쩡한 폴리캅의 모습을 보고서는 큰 은혜와 감동과 도전에 휘싸이고 말았다고 그럽니다.

17세기에 와서는 그를 기념하는 교회(옛 서머나가 있던 이즈밀의 폴리캅 기념교회)가 세워졌고 그의 신앙은 지금도 성도들의 가슴에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게 가장 좋은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입니다. 생명, 그것을 이웃에게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폴리캅은 죽음으로 원수들을 향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랑을 실천한 분입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도 천국을 소유하고 마음껏 누린 폴리캅의 담력을 배우고 싶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2014년 3월 18일 화요일

뜻으로 드리는 산 제사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롬12:2)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권합니다. 그런 제사는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한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산 제사가 영적 예뱁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배의 권면 직후에 하나님의 뜻 분별에 대한 언급을 잇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하나님의 뜻을 심도있게 다룬 이후에 예배의 실천적인 권면으로 들어간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선행되지 않은 예배의 심각성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인간이 고안한 존재를 신으로 여길 것입니다. '고안된 신'에게 예배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이미 1장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이상으로 경배하고 섬긴다'며 뾰족한 지적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예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통적 관행을 따라 예배의 핵심으로 굳어진 불경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시급한 때입니다. 여기서의 예배는 형식적인 주일의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이라는 예배의 현장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면 우리는 거룩한 산 제사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 분별을 권합니다. 그것도 막연하고 관념적인 뜻이 아니라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붙드는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권합니다.

일평생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고 기뻐하신 뜻, 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자의 자세와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조각도 섭취하지 못하는 하루가 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2014년 3월 17일 월요일

튜레틴이 애용한 헬라어 사전

튜레틴이 즐겨 사용했던 사전, 16세기 헬라어 문헌 대중화의 주역 Favorinus의 헬라어 사전(헬-헬)이 구글에 있었네요...오늘은 이 사전의 발견으로 나른한 포만감에 젖습니다...^^

Dictionarium Varini Phavorini (1538)

믿음은 율법을 세운다

믿음으로 율법을 파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스스로를 내세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의롭다고 하실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 함과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으로 인하여 율법이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율법을 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운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유효하게 만든다는 뜻도 있습니다. 율법을 율법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믿음이란 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복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데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유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반대는 율법이 아닙니다. 믿음의 행위와도 믿음은 대립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반대는 율법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의 행위라는 방식으로 "자신 안에" 머문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율법적 행위를 통해서는 어떠한 의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만 들추어낼 뿐입니다.

복음과 율법은 서로에게 반대가 아닙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인데 이것은 율법의 마침과 완성을 위한 것이기에 결코 율법과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믿음이 율법의 행위와 무관한 것입니다. 믿음을 율법을 버리는 방편으로 삼는다면 이는 성경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과 죽음마저 헛된 것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율법의 도덕적인 교훈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며 거듭난 자에게 영혼의 양식이며 발의 등이며 길의 빛입니다. 율법을 무시하면 현대판 말시온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율법이든 복음이든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다윗에게 송이꼴의 당분을 능가하는 달콤함을 선사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며 그가 향유의 대상으로 삼고 주야로 묵상했던 것도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가 고난도 심지어 죽음조차 유익으로 여겼던 이유도 그 계명에 대한 깨달음에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율법의 근본으로 돌아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율법의 유효성을 누렸던 분입니다.

바울도 그런 믿음의 선배가 남긴 율법에 대한 이해의 족적을 밟아가신 분입니다. 저도 그 족적에서 이탈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2014년 3월 16일 일요일

신학도를 위한 푸치우스 신학연구 방법론

푸치우스는 언어, 수사학, 논리학, 철학, 역사, 진리학, 정치학, 천문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들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강조했고 학문을 수행하기 위해 잘 연마된 기술과 접근법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인격과 영성을 형성하는 이상적인 교과과정 및 유형을 개발했다.

즉 그는 정독(lectio), 명상(meditatio), 경청(auditio), 작문(scriptio), 수집 혹은 비교(collatio), 종합(collegia), 내면화(enotatio)로 구성되는 연구의 7단계 유형을 제안했다. 이 유형은 다양한 학문 분야의 기초적인 교육(institutio)과 사전 및 언어적 수단들(apparatus)에 대한 훈련과도 서로 연관되어 있다.

‘정독(lectio)’은 기초적인 학문을 공부하는 3중적 유형을 의미한다. 먼저 학생은 한 분야를 개관하기 위해 ‘종합적 혹은 체계적’ 문헌들을 조사한다. 둘째, 그는 중요한 모든 주제를 다루는 주요 저자들의 작품을 읽어야 하고 관련된 논쟁들을 파악해야 한다. 셋째, 학생은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프톨레미 같은’ 고전적인 작가들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정독 이후에는 ‘명상(meditatio)’의 시간이 뒤따라야 하는데 그때 ‘개념들, 구분들, 이론들, 중요한 사안들, 특별히 신학과 관련된 해법들을 파악하고 기억해야 한다.’

정독과 명상 이후에는 ‘성경의 주석들 및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강연과 철학적 신학적 논박으로 구성되는 ‘듣기 혹은 경청(auditio)’이 뒤따른다.

연구의 네번째 요소로서 푸치우스가 권하는 것은 특별히 신학과 관련된 연구의 기초적인 주제들에 대한 ‘글쓰기 혹은 작문(scriptio)’이며 이는 전통적인 서술 항목들을 따라 지도되고 구성된다. 즉 학생은 특별히 성경에 규정된 대로 인간과 동물과 무생물에 속하는 것들과 같이 창조된 실체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며 ‘실체’라는 항목에 대하여 글로 자신의 생각을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성질’이란 항목에 대해서도 물리적, 지적, 혹은 의지적 성질 등과 관련해서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성향’이란 항목에 대해서 학생은 지혜, 명철, 예술, 미신, 덕과 같은 지적인 성향들을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동시에 ‘행위’라는 항목에 관해서도 창조와 보존과 발생과 행동과 반응 등과 같은 사안들을 논의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이러한 항목별 논의들에 대한 진술들은 대체로 성경에서 도출한 사례들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며 작성되어야 한다.

학문 분야들에 대한 글쓰기 훈련을 보완하기 위해 학생은 자료들을 수집 비교하고 종합하는 일(collatio and collegia)에 관여해야 한다.

정독, 명상, 경청, 작문, 수집 (혹은 비교) 그리고 종합은 끝으로 ‘내면화(enotatio)’를 통하여 더욱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푸치우스 정의에 따르면, ‘내면화’는 ‘문제, 논증, 반론, 가정, 분류, 사례’라는 항목들을 따라 해당학문 분야를 내적으로 조직하고 요약하는 관점과 더불어 수행하는 이미 연구되고 기억된 자료들에 대한 정신적인 탐구이다. 즉 ‘내면화’는 스콜라적 방법론의 내면화인 것이다.

상세한 교과과정 문맥에서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이러한 학문연구 7단계는 고도로 조직화된 것이며 동시에 해당 분야의 이론과 실천을 모두 정복할 목적을 가지고 주의깊게 고안된 교육의 복합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교육(institutio)의 전 과정은 지적인 삶과 기독교적 사랑(caritas)의 실천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

연구와 사랑의 연결은『신학도를 위한 훈련과 참고도서』에서 한 장 전체의 주제로서 다루어진다. 푸치우스는 신학연구에 속한 일련의 ‘일반적인 부수적 활동들과 특별한 노력 및 훈련들’에 대해 언급한다. 연구에 수반되지 않으면 안되는 ‘일반적인 부수적 활동들’은 ‘경건의 연습,’ ‘학문적인 헌신(cura)과 정사(精査, inspectio),’ 그리고 ‘검토’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학생들이 ‘거룩한 것에 대한 지속적인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경건의 연습’은 ‘더 숙성되고 더 향상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푸치우스는 주장한다. 이 경건의 연습은 설교를 듣고 교리문답 내용에 정통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개인적인 기도’와 ‘자기 양심을 점검하는 것’과 믿음과 회개를 갱신하는 것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활동들은 부모나 멘토나 상담자나 교수들에 의해 교회와 학교의 돌봄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외적으로 경건은 정기적인 평가와 교수들과의 대화를 통해 더욱 강화되고 이로써 ‘기만과 영적인 암(fucos & carcinomata)’을 제거하게 된다면, 학생들은 ‘경건과 절도와 성실과 은사’에 있어서 단계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푸치우스는 유사한 훈련 과정을 거친 교수진의 경건과 헌신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즉 그는 신학 가르치는 교수들을 기관 내에서 목회자로 섬기면서 학생들의 영성을 형성하고 교정하는 일에 늘 개입하는 자들이라 하였다. 정규적인 연구의 두번째 부수적 활동으로 ‘학문적인 헌신과 정사’ 혹은 ‘운용과 검토’는 개인적인 방법도 있고 공적인 방법도 있다. 전자는 감독관 혹은 개별지도 교수의 활동으로 수행되는 것이며, 후자는 시찰회나 노회의 감독이나 교수진의 감독을 통해서 수행되는 것을 뜻한다.

‘검토’라는 세번째 부수적 활동은 결코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진지하게 수행될 필요가 있다. 검토는 학문연구 기간동안 매 학기 마지막에 그리고 두번째 세번째 학기 중 그 해의 마지막에 수행되는 것이 좋다.

[칼빈이후 개혁신학], 269-271 참조.

우리는 나으냐?

사람들은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해 줄 '임의적인 기준' 찾기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죄의 권세 아래에 있습니다. 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는 민족과 문화와 언어와 경제와 정치와 학문과 무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기준은 온 인류가 죄의 권세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기준에 근거하여 우열을 느끼고 자랑과 열등에 포박되는 것은 참으로 초라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자랑은 그리스도 예수, 그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결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 자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이 마련해 준 무대 위에서 허망하게 춤추는 것일 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보다 나의 판단이 옳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의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돌이켜 허망하게 되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무덤과 같은 목과 거짓의 혀와 독소를 머금은 입술에는 저주와 냉소 뿐입니다.

발은 피흘림에 민첩하고 그들의 길은 패망과 비참으로 얼룩져 있으며 평화의 길은 무지의 베일에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가 그렇다고 말합니다. 보다 나음이 없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자랑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랑은 내가 저들보다 낫다는 것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로서 죄의 권세가 인류를 장악하고 있는 한 다른 외적인 요소로 우열을 가리고 거기에 근거하여 자랑이 고개를 내미는 것 자체가 죄 아래서의 도토리 키재기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우열이 아닌데도 우열이라 착각하는 '심각한' 키재기 말입니다.

바울은 자랑의 모든 기반을 이런 어법으로 허물고 있습니다. 우리도 판단과 분별의 초점을 바울이 제시한 죄 문제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에 맞추는 게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다른 문제로 엉뚱한 우열을 겨루는 비교급 인생의 피곤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펼쳐나갈 수 있습니다.

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이상규/강영안 교수님을 만나다

오늘은 오래동안 뵙고 싶었던 이상규 교수님을 뵈었다. 교수님이 편집하고 계신 단행본 시리즈에 두 편의 논문을 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뵙기로는 처음이다. 교수님의 인품은 그냥 향기로 느껴졌다. 다른 확인이 필요하지 않았다.

설교도 들었다. 구약 전체를 통으로 꿰시는 성경관을 가지셨고 구약의 해석이라 할 신약의 교훈들이 구약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명하는 식으로 말씀을 이으셨다. 노트가 없었지만 들고간 책의 여백에라도 깨알같은 글씨로 촘촘하게 노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셨다. 인품과 말씀과 자태...서로 분리되지 않았으며, 어느 하나만 경험해도 다른 모든 것들이 알아지는 일관되신 분이셨다.

강영안 교수님도 함께 계셨다. 식사하는 중에 일본의 지식화 열풍이 강타한 17세기 정황에 대해 세미나에 가까운 옥언들을 쏟으셨다. 회를 먹었는데 식탁에서 이루어진 교수님의 즉흥 강의는 회보다 더 달콤했다. 석학의 쏟아지는 박학을 주체할 수 없었던 하루였다.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황홀하다...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오세택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칼빈의 인식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를 아는 지식,
서로 맞물려서 지식의 상보적인 동반자다.
칼빈이 이것을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다.
쯔빙글리가 먼저 이러한 인식론의 포문을 열었다.

비록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칼빈은 “먼저 전자에 대해 논의하고
그 다음에 후자를 논하는 것이
교수법의 정당한 순서”(ordo recte docendi)라고 하였다.

이것은 어쩌면 실존주의 사상의 침투를
칼빈이 허용한 셈이라고 주장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을 떠난 실존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범위 안에서의 실존은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

바르트는 칼빈의 어법을 차용하긴 하였으나
헤겔의 방법을 의존하여 변증법적 신학으로 기울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인간을 안다고 하는 순간 인간을 모르는 지적 줄타기가 그 특징이다.

칼빈을 읽고 배운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접근법에 엇각이 발생하면
수습할 수 없는 결론의 격차가 초래될 수 있다.
성경의 인식론적 원리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 겸손이 요구된다.

2014년 3월 14일 금요일

병문안의 특혜

오늘 저녁에는 긴급한 신호를 포착하고
급히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참으로 귀한 분을 뵈었다.
수십년간 생명과 삶 전체로
독특한 영적 감각을 길러오신 분이셨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간의 흐름이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소통은 달콤했다.
그분의 감각만이 걸러낼 수 있는 고유한 통찰들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숨소리로 인해
통찰들이 실린 목사님의 음파가 한 자락도 상쇄되지 않도록
숨쉬기의 속도도 조절하고 호흡 한 모금의 분량도 조절해야 했다.
수십년에 걸쳐 온 인격과 삶에 박으신 보석들을
하나씩 하나씩 아끼지 않으시고
무상으로 공유하는 그분의 관대함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오늘은
그동안 여러 곳에서 강의하며 쏟아내는 시간을 보내다가
한 목사님의 일대기 속에서 걸러진 교훈의 액기스를
대량으로 수혈 받은 날이었다.
마음의 배가 빵빵하다.
세상에는 배워야 할 분들과 배워야 할 교훈들이 너무도 많다.

어설픈 지적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청의 귀를 한 순간도 닫지 않아야 하겠다.

신론적인 사유

논리의 정갈한 속임수 속에 숨으려는 성향이 사람에게 있음을 바울은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을 하리요"란 사람들의 어법에서 찾습니다.

자신에게 불의가 있다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마음 속에는 '나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역설적인 도구로 쓰였기 때문에 진노와 형벌이 아니라 영광과 칭찬이 합당할 것이라'는 발상이 담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터무니가 없어도 말문이 막힐 정도인데 기막힌 논리라고 추앙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으신지 모릅니다. 이것이 만세 전에 사람들을 일부는 구원으로 일부는 사망으로 정하신 하나님의 예정론과 결부되면 이 '기막힌 논리'의 광적인 공감대는 삽시간에 급물살을 타면서 기독교 진리의 숨통을 조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이 사람아 네가 누구기에 하나님께 감히 반문의 주둥이를 여느냐?"는 다소 격정적인 어법으로 창조주 편에서의 겸손한 사유를 권합니다. 그 사유를 꼬옥 붙들고 싶습니다...저항이 좀 있어두요~~

2014년 3월 13일 목요일

개혁주의 신학의 구현자는 누구인가?

개혁주의 신학의 이상을 구현하는 길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분들은 '지나치게 엄격한' '건조한' '죽은' '지나치게 사색적인' '차가운' 등의 수식어로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는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자의 성향까지 지적하는 것입니다. 적당한 변명도 필요할 것이지만 목에 반박의 핏대를 세우기 이전에 자신에 대한 정직하고 진실한 성찰이 우선인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감정이나 감흥에 휘둘리지 않고 유명세에 의존하는 법도 없으며 나에게 유익이 된다거나 끌리는 호기심에 맡겨지는 법이 없으며 상황의 시급한 필요에 성급하게 맞추고자 하지도 않으며 오직 진리이기 때문에 붙들고 따른다는 정신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람의 동의도 구하지 않으니 외부에서 보기에는 정나미가 뚝 떨어질 수 있는 체질을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각 개인을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 만드는 경향을 보입니다. 군중이 아니라 개개인의 마음을 격동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깊고 꾸준한 책임감을 갖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신학을 고수하는 개인으로 하여금 외톨이가 되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친밀감이 가장 높아야 할 신학적 특성을 가졌는데 그런 특성의 구현에는 적잖은 미진함을 보입니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 예상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사람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제시하기 때문에 믿음의 유무를 떠나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때까지 상대방을 한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항구적인 끈기가 발휘될 것을 요구하는 신학이며 상대방의 자발성이 훼손되는 어떤 방식으로 찬동과 계승을 독촉하는 법이 없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강압이나 강요도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 요구되는 접근법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그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역사에 내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은 끈덕진 기다림에 있어서 고평가를 받기 어려울 듯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 인간론 중심성을 거부하고 신론 중심적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성정에 거북하고 때때로 상식과의 불편하고 불유쾌한 불일치도 경험하고 마치 우리의 존재감도 주변으로 밀려나는 듯한 박탈감에 부딪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광야이고 죄인 중에 괴수이고 무익한 종이고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처럼 무가치한 존재로 내몰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개혁주의 신학은 외로움과 고독과 인내와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아와 인간적인 가치관의 한 자락도 남아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에 엄청난 손실과 상실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당연히 ‘독종’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성향의 소유자가 풍기는 인상은 친절과 매력과 감화력과 심히 동떨어진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인물들과 신학에 비판의 뾰족한 날을 세우시는 분들에게 객관적인 명분과 실증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가장 높은 가치를 가졌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가장 고급한 방식으로 값없이 나누고 공유할 가장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고, 주장하고 논쟁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태도를 갖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음을 가지고 그것을 전하는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나아가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설파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의 ‘살벌함’을 풍기고 알리는 것을 개혁주의 기수의 표징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런 가식적인 생각을 서둘러 철회해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고수하는 자는 개혁신학 자체의 몽롱한 플라톤적 로멘스에 빠지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과 자발성과 희열과 감격으로 충만한 자입니다. 신학의 개혁파적 정의에서 이미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내는 교리라는 실천적 성격이 잘 증거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좋은 신학적 내용의 담지는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일 뿐입니다.

다윗이 주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묵상한 이유가 그 계명을 즐거워 했기 때문이란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길을 즐거움 중에 걸어가는 것보다 더 향기롭고 매력적인 일이 없음을 생각할 때 개혁주의 신학의 길도 유쾌한 자발성과 자율성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는 객관적인 내용의 마땅한 수용이 주관적인 자발성에 의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고급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자의 자태여야 합니다. 우월성에 도취되어 서두루고 위협하고 독촉하는 식이 아니라 아무리 수용하지 않고 거부와 비판의 태도로 일관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상대방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겸손과 친절과 관용의 자세에 있어서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과연 개혁주의 신학자의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한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본성적 부패를 한 순간도 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은 우리가 모든 대상과 사태와 상태를 시간이 종결되는 순간까지 인내할 수 있는 근거이며,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진리를 아무리 거부하고 멸시하고 멀리해도 기이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이유인 탓입니다.

진리를 허무는 무리들의 거친 물살에 휩쓸리고 저항하다 보면 발등의 불 끄기에도 급급하고 한발짝 물러서서 객관적 거리를 두고 전방위적 침착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심히 어렵고 고독한 일임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체질과 어투와 행실이 거칠고 딱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 가장 높은 가치를 공유하는 것 자체가 주는 희열이 식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적 부요함과 그것을 전하고 공유하는 자의 고결한 자세는 늘 겸비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용이 빈약한데 자세만 고매하면 안되겠고, 자세는 뻣뻣한데 내용만 부요해도 안될 것입니다. 이는 진리의 이성적인 정보취득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진리의 전인격적 체득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양한 교단에서 다양한 신학을 경험해 보면, 비록 신학적 다문화 경험이 좋은 것만도 아니고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최소한 교파주의 우물 속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심히 안타까운 교훈은 짭짤하게 건질 수 있습니다. 신학을 배우러 가는 교단의 교실마다 타교단 비판에 무슨 애국심 수준의 ‘교파심’ 발휘가 콘테스트 현장을 방불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여 까칠한 비판을 토하는 분들의 면면을 나도 까치한 눈을 부릅뜨고 살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보존하고 선포하고 퍼뜨리는 일에 진실한 노력과 특심을 가지지는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학적 존재감을 타교단 신학의 부실과 허술과 부조화와 유아성 확인과 지적에서 찾으려는 참으로 가난한 신학자와 목회자가 적지 않습니다. 나도 이런 부류에 몸을 담았었고, 지금도 개가 토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는 자세의 지향점은 그것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파들도 동일하게 자신의 신학을 최고로 여길 것이지만, 저도 개혁주의 신학을 성경에 가장 가깝고, 가장 좋은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고, ‘전성경’(tota Scriptura)과 ‘오직성경’(sola Scriptura) 정신을 가장 잘 유지하고, 하나님 자신만을 높이고 하나님이 전부이며, 진리와 사랑의 조화 및 이론과 실천의 융합에 가장 충실하고, 신구약의 통일성에 가장 민감하고, 통합적인 신학을 가장 잘 구현하는 신학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성 제고를 위해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길이의 정도를 더하고자 하루하루 성경을 묵상하고 글을 읽고 대화하고 실천하는 일에 개개인이 전심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최소한 자신을 향해서는 가장 좋고 좁고 엄밀한 신학 추구에 언제나 주마가편 차원의 매서운 회초리를 들어야 하겠으나 타인을 향해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타인에게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며 기준치의 미달을 지적하고 신학적 못난이로 매도하고 가슴에 일평생 잊혀지지 않을 상흔을 남기며 개혁주의 신학에 싸늘한 반감만 불러 일으키고 결국 사람도 잃고 좋은 신학에도 어두운 이미지를 드리우는 비판 일변도를 질주하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허물고 훼방하는 자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전파하길 원한다면, 자신을 향해서는 가장 좋은 신학의 가장 높고 깊은 엄밀성을 추구하되 타인을 행해서는 원수라도 기도하고 축복하며 사랑하는 가장 길고 넓은 포용성을 추구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면서도 가장 답답하고 해롭고 거칠고 무례한 것을 주는 것처럼 오해하고 거절하게 만드는 것은 증인의 참모습과 무관해 보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길 원한다면 내향적 엄밀성과 외향적 포용성의 조화를 어느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은 버려야 하는 배타적 택일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런 관점의 균형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어지는 문제는 이것이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성향이 담아질 수 있는 큰 인격과 신앙을 구비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것까지는 스승의 몫이지만 그것을 인격과 삶과 교회에 구현하는 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각자의 몫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길을 걸어가는 자의 태도로 하나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고전13:8)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그렇게 진단했고 모든 기독인도 그래야 한다는 따끔한 일침을 날리고 있습니다. 진리를 거스리는 일이라면 차선책이 아니라 안하는 게 상책일 것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위하지 않고 거스르는 것을 행위능력 자체가 동결되는 사안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것과 진리를 위하는 것이 나란히 대비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 것이지만, 바울은 진리를 거스르지 말라는 소극적인 처신을 넘어 진리를 위하라는 적극적인 태도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순간과 모든 삶이 진리를 위하지 않으면 진리에 대해 역방향을 질주할 수밖에 없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교회의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진리의 봉사자(ministri veritatis)요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덕과 올바른 교리의 권위(Dei gloriae, ecclesiae aedificationi et sanae doctrinae autoritati)를 훼방하지 않고 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고, 명예로운 이미지를 관리하고,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고, 비대한 세속권력 앞에 눈도장 찍기에 바빠 발바닥에 땀이 맺히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은밀하고 어두운 수단과의 결탁에는 주저함이 없는 목회자가 되어 진리를 거스르는 원흉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진리를 위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할 일이 없어지는 백수 목회자가 되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며 늘 뇌리의 아랫목을 차지하는 다음과 같은 고민들과 단상들을 짧게 나누고 싶습니다.

1)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글을 쓰면서 관심과 가치의 구심점이 성경의 핵심에서 멀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어느 분야를 섭렵하고 나만의 고유한 지적 상아탑을 구축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을 흡입하며 고지의 나른한 쾌감에 잠기는 방향으로 관심이 쏠립니다. 인간문맥 속에서 합의되고 설정된 임의적인 기준에 희비를 걸고 매달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코의 호흡으로 연명하며 훅 불면 날리우는 인생의 경박이 한없이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 신학에서 변증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는 어떠한 이슈든 시시비비, 옳고그름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은 신학의 실천적인 본성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변론의 각을 세운다고 해서 경건의 근육이 단련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엉뚱하고 기형적인 기질이 인격과 삶에 군살처럼 박힐 위험성만 더욱 높아지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침묵이나 무관심은 더더욱 능사가 아닐 것입니다. 하여 어떤 특정인, 특정학파, 특정시대 신학이나 신앙의 문제에 개입하고 해명하는 것은 불가피한 과제로 간주하되 성경 전체의 진리가 고백되고 보존되고 전달될 수 있도록 늘 전역사의 세계교회 전체를 의식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3) 괜찮은 믿음의 선배들은 진리를 왜곡하고 파괴하는 다양한 이단들의 광란을 도저히 침묵할 수 없어서 변증의 입술을 열고 논박의 붓날을 세웠지만 상대방이 내세우는 그릇된 논지의 허리를 꺾는 것 자체를 능사로 여기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묻고 답하는 중에 무의식적 타협과 수긍에 매몰되어 결국 진리의 순수성과 엄밀성이 무너지고 마는 변론의 생태적 한계를 간파하고 있었기에 완급과 원근을 적당하게 조절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잘못과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책망의 채찍도 필요하고 교훈의 당근도 필요하며 의로움의 구축과 올바름의 정립도 필요한 균형 말입니다.

4)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문헌들을 읽고 다양한 사안들과 마주치고 다양한 필요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의 유한성 때문에 이러한 것들에 다 반응하며 살기는 곤란할 것입니다. 선택과 집중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낍니다. 선택과 집중의 기준과 방편이 궁금하여 물음의 일급 리스트에 올려두고 줄기차게 고민한 끝에 성경이 모든 역사와 모든 만물의 헤아릴 수 없도록 무수한 것들에 대한 최상의 선택과 집중이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은 세세한 것들을 일일이 다 건드리지 않으면서 온 세상과 전 역사를 다 커버하고 있습니다. 놀랍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성경에 매달리면 몸이 열이라도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들이 백기로 투항하는 현상을 일상처럼 접합니다.

5) 성경 텍스트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 자체가 가장 즐겁고 행복함을 느낍니다. 한 이오타만 씹어도 진리의 황홀한 맛에 곧장 중독되고, 그것이 내 영혼에 달기가 송이꿀의 당분을 무색할 정돕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맛본 바울이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조차 배설물에 불과하고 해로운 것으로 여겼던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에서 발견한 변증의 소박한 해법은 변증이나 논박이 특정한 사안에 몰입되어 두뇌와 입술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공격하고 입술을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택과 집중이 내 인격과 삶에 체화되고 축적되어 그 자체가 상대방의 인격과 삶에 발견적인 해법이 되는 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진리가 인격과 삶으로 머물러야 하는 곳입니다. 변론의 생리는 머리와 입술을 분주하게 하여 우리 자신이 먼저 진리의 터와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선행적인 과정을 무시하고 생략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교모한 함정으로 보입니다. 사단이 팠습니다. 사단은 이런 논쟁에서 지더라도 우리가 변론의 덫에 걸리기만 하면 궁극적인 면에서는 이기는 승부수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는 사단이 깔아놓은 논쟁의 판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조심스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전인격적 무장이 우선이고 필요에 따라서만 언어와 붓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7) 당장 반박의 피를 토하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가 초래될 것 같은 긴박한 상황들이 많이 발생함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때 침묵은 비겁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논쟁의 무대에 준비되지 않은 등판이 더 위험해 보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산출된 이후에 곧장 영국 본토에선 실종되고 만 그렇게도 우람한 진리의 체계가 뿌리마저 뽑히는 기현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가볍지 않고 단순한 것도 아닙니다. 지식의 생산과 진리의 파종이 항상 병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 말입니다. 물론 진리가 어느 시대나 지역에 심겨지는 것은 기적이고 은혜일 것입니다. 진리를 머리만이 아니라 심장과 수족에 보관하는 건 은혜 수혜자의 도리일 것 같습니다.

8) 보다 심오하고 높은 진리의 골격을 다시 생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역사 속에는 이미 주님께서 허락하신 교훈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사 속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난 진리의 고백들을 고작 입술에 올렸다고 신학자의 소임을 접는다면 큰 오산일 것입니다. 그것을 전인격과 삶 전체에 담아내는 과제는 교회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한 시대의 심장을 관통하게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자신의 심장에 담아낸 진정한 진리의 사람들이 나타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생명보다 귀한 진리를 시끄러운 논쟁의 꺼리로 매도하는 일에 고도의 교활함을 보입니다. 사탄은 진리가 논쟁의 도마 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안깐힘을 쓰고 있습니다.

9) 교회는 진리의 터와 기둥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교회의 신분이고 인격이고 삶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천재나 영웅 몇 사람의 활약으로 때우려는 ‘창조적인 소수’ 개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진리의 보존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개개인이 모두 동일한 비중으로 진리의 터와 기둥이란 교회의 정체성 보존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은 일회성 운동이나 이벤트가 아니기에 선동이란 접근법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방법론은 진리의 터와 기둥으로 각자가 선 자리에서 일평생 살아내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터로 닦아져야 하고 기둥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10) 끝으로 겸손에 대한 것입니다. 칼빈은 겸손이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토대라는 것과 신앙의 덕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며 천사를 마귀로 만드는 건 교만이나 사람을 천사로 만드는 건 겸손이라 한 교부들의 생각을 “항상 열렬히”(semper vehementer) 곱씹으며 기독교의 교훈을 묻는 이들에게 "항상" 이렇게 답했다고 말합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humilitatem)이다.” 이런 답변은 우리가 “본성의 가능성에 대해”(de naturae possibilitate) 무엇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본성은 상하였고 부서졌고 뒤틀렸고 망했지만, 그런데도 사람이 자기에게 어떤 덕이 있다고 의식하며 동시에 자랑과 교만을 삼가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겸손 이외에는 자기에게 피난처가 없다고 진심으로 느낄 때에 거기에 비로소 겸손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악에 불과하기”(non nisi mali)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무언가를 돌린다고 해서 우리의 복지가 그만큼 삭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낮음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을 준비(in remedium paratam)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생각을 삭제하는 것에 있지 않고 자신의 “자애와 야심”(φιλαυτίας και φιλονεικίας)이란 질병을 퇴치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질병 때문에 사람들은 시야가 흐려지고 스스로를 과대하게 평가하는 경향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성경이란 진실한 거울”(veraci scripturae speculo) 속에서 스스로를 바르게 인식할 것을 권합니다. 칼빈에게 겸손은 결국 “성경 앞에서의 겸손”이며, 성경이 세상에서 합의된 다양한 종류의 모든 겸손들을 상대화할 기준인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분류

- 종교개혁 1세대: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Swiss, 1484-1531): De vera et falsa religions commenatrius
루터(Martin Luther, German, 1483-1546): Loci communes, Martin Luther Werke
부쩌(Martin Bucer, German, 1491-1551): Defensio adversus axioma catholicum, De Regno Christi
          (비록 교의학적 체계를 산출하진 않았으나 종교개혁 1세대로 활약한 인물들 중에는 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 Wolfgang Capito 1478-1541, Simon Grynaeus 1493-1541, William Farel 1489-1565 등이 있습니다.)

- 종교개혁 2세대: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German, 1497-1560): Loci communes
칼빈(John Calvin, French, 1509-1564):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 Italian, 1499-1562): Loci communes
무스쿨루스(Wolfgan Musculus, German/French, 1497-1563): Loci communes
히페리우스(Andreas Hyperius, German, 1511-1564): De theologo, Elementa christianae religioinis, Methodus theologiae
비레(Pierre Viret, French, 1511-1571): Disputationes chrestiennes, Instruction chrestienne, Exposition familiere sur le Symbole des Apostres
아레티우스(Benedictus Aretius, Swiss, 1505-1574): Examen theologicum, S S theologiae problemata seu loci communes
불링거(Heinrich Bullinger, Swiss, 1504-1575): Compendium christianae religionis, Confessio ex exposition simplex orthodoxae fidei, Sermonum decades quinque, De scripturae sanctae authoritate, De origine erroris, De testamento seu foedere Dei
드 브레스(Guy de Bres, French, 1522-1567), Confession de foy

- 초기 정통주의 시대 (1565-1618-1640): 1565년을 전후로 종교개혁 2세대가 대부분 사망했고, 고백서 및 교리문답 작성이 완료된 시점이며, 1618년은 국제적인 개혁주의 총회(Dort, 1618-1619)가 있었으며 그곳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성 제고되는 획기전인 분기점이 마련됨, 30년전쟁(1618-1648)도 그때 발발했다; 1640년대에 여러 유력한 학자들이 사망함 (특징: 고백적 울타리가 형성된 이후에 왕성한 신학적 체계화가 이루어짐, 신학적 학문적 통합의 움직임도 활발함)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 Dutch, 1545-1602): Opuscula theologica selecta
잔키우스(Girolamo Zanchius, Italian, 1516-1590): De natura Dei, De religione christiana fides, De scriptura sacra, De tribus Elohim
퍼킨스(William Perkins, English, 1558-1602): De praedestinationis modo et ordine
베자(Theodore Beza, French, 1519-1605): Confessio christianae fidei, Propositions and principles of divinitie, Quaestionum et responsionum christianarum libellus, Tractatioines theologicae
다네우스(Lambertus Daneaus, French, 1535-1590): Isagoges christianae, Methodus sacrae scripturae, Compendium sacrae theologiae, Ethices christianae, Politices christianae, Physice christianae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German, 1534-1583): Doctrinae christianae compendium, Explicationes catecheseos, Loci theologici, Scholastica materiis theologicis exercitationes, Admonitio christiana
올레비아누스(Kaspar Olevianus, German, 1536-1587): De substantia foederis, Expositio symboli apostolic
부카누스(William Bucanus, Swiss/French, d.1603): Institutiones theologicae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English, 1535-1603): A treatise of the Christian religion
토사누스(Daniel Tossanus, French, 1541-1602): A synopsis or compendium of the fathers
트렐카티우스(Lucas Trelcatius, Dutch, 1542-1602): Scholastica methodica locorum communium institutio
케커만(Bartholomaeus Keckermann, German, 1572-1609): Praecognita philosophica, Scientiae metaphysicae compendiosum systema, Systema logicae, Systema sacrosanctae theologiae, Systema ethicae
폴라누스(Amandus Polanus, Swiss/German, 1561-1610): Syntagma theologiae christianae
루베르투스(Sibrandus Lubbertus, Dutch, 1556-1625): De principiis christianorum dogmatum
파레우스(David Pareus, German, 1548-1622): Collegiorum theologicorum quibus universa theologia orthodoxa
에임즈(William Ames, English, 1576-1633): Medulla ss theologiae, Bellarminus enervates, Disputatio theological de perfection ss scripturae
볼레비우스(Johannes Wollebius, Swiss, 1589-1629): Compendium theologiae christianae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 Dutch, 1563-1641): Disputationes theologicae
왈레우스(Antonius Walaeus, Dutch, 1573-1639): Loci communes s. theologiae, Enchiridion religionis reformatae
알스테드(Johann Heinrich Alsted, German, 1588-1638): Definitiones theologicae, Metaphysica, Methodus sacrosanctae theologiae, Theologia scholastica didactica, Theologia catechetica, Theologia naturalis, Theologia polemica
트위스(William Twisse, English, 1578-1646): Ad Jacobi Arminii collationem cum Francisco Junio, Vindiciae gratiae potestatis ac providentiae Dei, Dissertatio de scientia media
마코비우스(Johannes Maccovius, Dutch, 1588-1644): Loci communes, Metaphysica, Distinctiones et regulae theologicae et philosophicae
리베투스(Andreas Rivetus, Dutch, 1572-1651): Catholicus Orthodoxus, Oppositus Catholico Papistae, Critici sacri libri quatuor
우셔(James Ussher, English, 1581-1656): A body of divinity
러더포드(Sameul Rutherford, Scottish, 1600-1661): The covenant of life opened, Disputatio scholastica de divina providentia, Exercitationes apologeticae pro divina gratia
샬피우스(Johannes Scharpius, Dutch, 1572-1648): Cursus theologicus

- 정통주의 절정의 시대 (1640-1685-1725): 유력한 인물들의 사망, 낭트칙령, 재앙적인 사회적 문화적 격변기, 영국의 대규모 삼위일체 논쟁의 발발, 사무엘 클락의 신학에 대한 논쟁; 탈고백화 시대의 시작 (특징: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하고 편찬된 절정기다, 논박적, 스콜라적, 규정적, 교육적, 문답적 형태의 신학적 쟝르들이 다양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었음, 아미랄드 논쟁과 소무르 학파와의 논쟁, 코케이우스 언약론에 대한 논쟁, 언약론적 관점이 개혁파 정통주의 체계에 폭넓게 수용됨, 소시누스 학파의 도전, 데카르트 및 스피노자 철학의 발흥)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 Dutch, 1630-1706): Theoretico-practica theologia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ius, Dutch, 1603-1669): Summa theologiae, Summa doctrinae de foedere et testament Dei
마레시우스(Samuel Maresius, French, 1599-1673): Collegium theologicum sive systema breve universae theologiae, These theologicae
푸치우스(Gisbertus Voetius, Dutch, 1589-1676): Disputatio philosophic-theologica, Selectae disputationes theologicae
오웬(John Owen, English, 1616-1683): Theologoumena pantodapa
벤델린(Marcus Friedrich Wendelin, German, 1584-1652): Christianae theologiae, Collatio doctrinae christianae Reformatorum et Lutheranorum
F. 투레틴(Franciscus Turretinus, Swiss/Italian, 1623-1687): Disputatio theologica de scripturae sacrae auctoritate,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하이데거(Johann Heinrich Heidegger, Swiss, 1633-1698): Corpus theologiae Christianae, Dissertationum selectarum, Sacram Theologiam Dogmaticam, Historicam & Moralem illustrantium
위치우스(Herman Witsius, Dutch, 1636-1708): De oeconomia foederum Dei, Theologia pacifica, Theologus modestus
브라켈(Wilhemus a Brakel, Dutch, 1634-1711): 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
M. 레이데커(Melchior Leydekker, Dutch, 1642-1721): De veritate religionis reformatae seu evangelicae, Disputatio historico-theologica de Arianismo, Exercitationes theologicae, Synopsis controversiarum de foedere et testamento Dei
픽테트(Benedict Pictet, Swiss, 1655-1724): Theologia christiana
말키우스(Johannes Marckius, Dutch, 1656-1731): Christianae theologiae medulla, Compendium theologiae christianae
J. 튜레틴(Jean Alphonso Turretin, Swiss, 1671-1737): De theologia naturali, De veritate religionis judaicae et christianae, Cogitationes et dissertationes theologicae

- 후기 정통주의 시대 (1725-1770): 교의학적 체계가 사라지지 않았고 특별히 교리적 정통을 보존한 후속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 운동을 이끈 경건주의 인물들을 비롯한 후세들이 여전히 개혁파의 고백적 체계에 생동력을 부여하고 있었음; 그러나 신학은 철학과의 연관성을 상실하고 해석학의 학문적 방법론이 완전히 무너진 시대였고, 스콜라적 방법론이 아카데미 및 대학에서 표준 방법론의 자리를 상실하게 됨.

길(John Gill, English, 1697-1771): Complete Body of Doctrinal and Practical Divinity
스타퍼(Johann Friedrich Stapfer, German, 1708-1775): Institutiones theologiae polemicae universae, Grundlegung zur wahren religion
비텐바흐(Daniel Wyttenbach, German/Swiss, 1706-1779): Theses theologicae praecipua christianae doctrinae, Tentamen theologiae dogmaticae methodo scientifica pertractatae
베네마(Herman Venema, Dutch, 1697-1787): Exercitationes de vera Christi divinitate, Institutes of Theology

- 루터파 정통주의 인물들

Philipp Melancthon (1497-1560): Loci Communes Rerum Theologicarum
Jacob Heerbrand (1521-1600): Compendium Theologiae
Martin Chemnitz (1522-1586): Loci Theologici
Leonard Hutter (1563-1616): Loci Communes Theologici
Mathias Hafenreffer (1561-1619): Compendium Doctrinae Coelestis
George Calixtus (1585-1656): Epitome Theologiae
Jesper Rasmus Brochmand (1585-1652): Universae Theologiae Systema
Johann Gerhard (1582-1637): Loci Theologici
Nicholas Hunnius (1585-1643): Epitome Credendorum
John Conrad Dannhauer (1603-1666): Hodosophia Christiana Sive Theologia Positiva
Abraham Calov (1612-1686): Systema Locorum Theologicorum
John Andrew Quenstedt (1617-1688): Theologia Didactilo-Polemica Sive Systema Theologiae
David Hollaz (1648-1713): Examen Theologicum Acroamaticum

- 중요한 고백서들: 종교개혁 및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고백적 다양성

Gallican Confession (1559),
Scots Confession (1560),
Belgic Confession (1561),
Thirty-Nine Articles (1563),
Heidelberg Catechism (1563),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Irish Articles (1615),
Confession of Sigismund (1614),
Brandenburg Confession (1615),
Canon of Dort (1619),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최선과 최악

Corruptio optimi pessima

가장 좋은 것의 부패는 최악이다.
최고선과 최대악은 이렇게 등짝을 맞대고 있다.

말씀 맡은 영광

유대인의 유익은 무엇인가?
모든 면에서 대단히 큰 유익을 얻었으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것이라고 바울은 답변한다.
말씀을 맡은 것보다 더 영광스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일평생 감사하고 감격하며 찬양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도 그런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자...

2014년 3월 11일 화요일

섭리의 오묘함

하나님의 섭리는 깊고 오묘하여 능히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파해쳐도 바닥을 도무지 드러내려 하질 않습니다. 사람의 머리로 다 파악되지 않으셔서 너무도 좋습니다. 조작의 음흉한 손길이 미치지 못할 거잖아요. 그리고 크고 작은 세계에서 동시에 조화롭게 행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뭘 좀 했다고 자랑할 수가 없음을 느낍니다. 겸손의 허리를 동이고 늘 주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일하심을 인정하며 감사하는 하루이고 싶습니다.

2014년 3월 10일 월요일

우리의 유대적 자화상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않느냐?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네가 도둑질을 한다는 게 웬말이냐?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네가 간음이 웬말이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라는 네가 신전을 털었다는 게 웬말이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는 게 웬말이냐?

우리는 주장하는 자세에 능하고 정작 자신은 돌이키지 않습니다.
유대인을 향한 바울의 지적이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군요.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들도 분간해 내고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며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졌으며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들의 선생이라 자임하되
정작 자신은 가르쳐서 돌이키지 않았던 유대인,
마치 우리의 자화상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것 같아서요...

2014년 3월 8일 토요일

율법은 삶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가 의롭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듣기의 목적이 행하는 것에 있다는 말입니다.
듣기만 하는 분들은 많이 들어서 정죄하는 일에 능합니다.

행하기만 하는 분들은 의미 없는 맹목적인 몸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들어서 행하도록 하는 것이 율법의 의도인 것입니다.
율법은 죄의 억제력과 예수께로 이끄는 몽학선생 역할을 넘어
의로운 삶에 규범의 빛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삶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해가 오늘 아침에는 저에게 꿀이네요~~

2014년 3월 6일 목요일

마음의 문제: 신론적 접근

마음에 혹은 인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상실한 마음으로 이끌리게 된다. 마음의 문제는 누구도 자력으로 풀어내지 못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바울은 마음의 문제를 신론적인 관점에서 진단하고 해법도 신론적인 차원에서 풀어간다. 오늘날 탁월한 과학자가 지금의 문제를 풀려고 물질과 현상에 매달리는 것과는 전혀 딴판이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 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것, 예레미야 선지자의 엄숙한 지적처럼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이요 악독이다. 이것을 푸는 유일한 열쇠가 하나님 자신이란 바울의 통찰을 하루종일 묵상하고 싶다. 

2014년 3월 5일 수요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οὐχ ὡς θεὸν)이 불경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는 말의 뜻이다. 이는 불신자가 주의해야 할 지적이 아니라 기독인이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경고이다. 마음과 영으로, 생각으로, 입술과 행실로 나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주님~~~~. 늘 두렵고 떨립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논리 속에서 허망하게 되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캄캄함에 빠지는 건 필연적인 수순이다. 

2014년 3월 4일 화요일

중심에 대한 이해

중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눈이 있어서 보는가? 보기 위해서 눈이 있는가? 중심에 관한 문제이다. 보고자 하는 의지가 눈의 존재에 선행한다. 이는 발생학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입증되는 사실이다. 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서 눈을 뜨고 방향과 초점을 맞춘다. 

세상을 보더라도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중심임을 확인한다. 구원에 있어서도 그렇다. 구원을 우리의 공로나 인간적인 어떤 계기나 가시적인 원인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린다. 성경은 그런 신론적인 차원에서 구원의 문제를 항상 풀어간다.

[로마서] 섬김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신다(롬1:9)

바울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겼고 자신의 심령으로 섬겼다. 복음 이외에 다른 내용으로 섬기지를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가시적인 외모가 아니라 심령으로 섬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섬기다"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경배"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무엇임을 생각하게 한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심령으로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그렇게 섬기는 하나님이 증인이 되신다는 바울의 고백도 중요하다. 자신의 인간적인 성취감과 사람들에 눈에 들켜서 확인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앞으로도 그런 삶은 지향하지 않겠다는 단언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인 삶을 언제나 추구해 온 곳이다. 나도 그러한 삶의 태도를 마지막 호흡을 내뱉는 순간까지 고수하고 싶다.

2014년 3월 2일 일요일

히브리서 4장의 신구약 통일성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음이라 (히4:2)

여기에는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이 동일한 복음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유익의 유무도 믿음과 관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일한 복음에 동일한 믿음이 신구약에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다. 구약과 신약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의 교리에 있어서도 차등이나 우열이 없다. 차이가 있다면 칼빈의 지적처럼 명료성의 차이일 뿐이며 크리소스톰의 언급처럼 경영에 따른 차이일 뿐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구약에 미리 약속된 복음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1:2)

구약은 복음을 약속한 책이며 복음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선지자들의 기록이다. 구약을 복음과 무관한 율법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울의 관점과 대립된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복음에 관한 책이다. 약속된 복음과 구현된 복음을 각각 기록한다. 구약의 성도들도 같은 복음을 전해 들었으며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동일한 믿음의 요구를 받았기에 신약의 성도들과 다르지가 않다. 여기에 신구약의 통일성이 발견된다. 즉 동일한 복음, 동일하신 그리스도, 동일한 믿음의 원리가 신구약에 적용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복음의 본질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즉 복음은 선지자를 통하여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것인데 그 아들은 인성과 신성으로 구분되며 육신을 따라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되신 분이시다. 바울이 생각한 복음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관계된 것이다. 예수님 자신과 그의 행하신 사역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폴라누스 영역본은 아직 미정이다

폴라누스 번역자일 것으로 추정된 분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분은 이 번역 프로젝트 책임 번역자로 일하다가 긴급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여 접었다고 하더군요. 지금 Logos Bible의 폴라누스 번역 프로젝트 담당자에 의하면 로고스가 추진하고 있는 일은 폴라누스 교의학을 번역해도 될 만큼의 충분한 관심사를 확보하면 영역본을 내겠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쉽네요...ㅜ.ㅜ 영역본 출연으로 폴라누스 전공자의 주가도 덩달아 올라가나 했는데 말이에요 ^^ 17세기의 가장 방대한 교의학들 중의 하나인 Syntagma의 영미권 진입은 아직 시기상조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