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9일 월요일

계시 우선적인 사색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모든 존재와 사태에 있어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선이다. 특별히 우리의 사유도 이 말씀에 순응해야 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우리의 물음을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어떤 물음을 가진다면, 이는 이미 사유의 틀과 방향을 설정하고 그 설정에 하나님의 말씀을 구겨 넣으려는 인본주의 접근법과 다르지가 않아서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의제를 수납하고 텍스트에 흐르는 논지의 전개를 존중하고 성경적 어법에 나의 사유 스타일을 의탁하는 접근법이 대안일 수 있겠다.

내가 궁금한 것,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영역, 내가 추구하는 디테일, 내가 지향하는 답변의 내용과 깊이와 형식을 다 접고 성경이 묻는 물음을 방향으로 삼아 말씀이 안내하는 지점까지 이르고 안내의 방식에 순응하고 말씀이 제공하는 지혜의 분량만큼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보다 더 계시 의존적인 사색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2014년 9월 27일 토요일

그레고리의 삼위일체

다른 모든 것들보다 이 선한 유산을 지키시길 부탁 드립니다. 이것을 위해 저는 살아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 유산과 더불어 얼마든지 죽기를 원합니다. 이 유산과 더불어 나는 모든 환란을 참아낼 것이며 모든 즐거움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는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고백을 말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이 신앙을 맡깁니다. 이제 이 신앙으로 저는 여러분을 물 속에 넣었다가 들어 올릴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위탁하는 이 신앙은 생애 전체의 동반자와 보호자며 하나의 신성과 권능이며 이는 삼위 안에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이며 삼위가 각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성이나 본성에 차별이 없으시며 높아지는 우월함도 없으시고 낮아지는 열등함도 없으신 분입니다. 

2014년 9월 16일 화요일

아타나시우스의 편지

아타나시우스의 시편예찬 서신을 읽으면서 시편 사색에 잠긴다. 시편은 정말 나 자신을 영혼의 차원에서 속속들이 드러내는 특이한 유형의 말씀이다. 학문적인 잣대로 어설프게 재단하면 그 맛이 송두리째 달아나는 깊고 오묘한 어법을 구사하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성경이다.

친애하는 마르셀리누스 (Marcellinus)

한때 나는 어떤 학구적인 노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시편에 막대한 탐구의 땀을 흘렸으며 그것에 대해 경이로운 설득력과 묘미를 발산하며 나에게 논하였지. 말하는 동안 그는 명료한 표현력을 구사했고 손에는 한 권의 시편이 들려져 있었단다. 그가 들려준 내용을 너에게 전달하고 싶구나.

아들아, 신구약 성경의 모든 책들은 사도가 언술한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으며 교육에 유익하다. 그러나 성경을 진심으로 공부하는 자에게는 시편이 각별한 보고를 제공한다. 그 안에는 인간 영혼의 움직임이 모든 종류의 놀라운 다양성 속에서 표상되고 묘사되고 있단다.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지. 그 안에서 너는 너 자신이 그려지고 있음을 보게 되며 그렇게 보면서 주어진 유형들에 비추어 자신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자신을 형성하게 된단다.

시편에서 너는 너 자신에 대하여 배운단다. 그 안에 너의 영혼의 모든 움직임과 모든 변화들과 모든 기복들과 모든 실패들 및 회복들이 그려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거야. 게다가 너의 개별적인 필요나 문제가 무엇이든 너는 이 동일한 책에서 거기에 부응하는 유형의 말씀을 일별할 수 있고 그냥 듣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너의 질병을 치유하는 방식을 습득하게 될 것이란다. 행악의 금지는 성경에 차고도 넘치지만, 시편은 우리에게 그런 금지령에 순응하는 방식을 귀띔해 주는구나. 

2014년 9월 14일 일요일

소통의 범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가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합니다 (수1:17)

이 구절은 지도자와 백성 사이의 아름다운 소통의 범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종이었던 여호수아의 지도자 등극을 인정하고 환영했다.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처럼 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고 서약했다. 대신 백성이 원하는 요구는 단 하나였다. 하나님이 모세와 동행하신 것처럼 그와도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는 소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안목이 대단하다. 주님과의 동행이 인간 여호수아 자신에게 좌우되지 않고 주님께 속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의 아들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그에게도 그러시길 원한다고 했다. 국운의 성쇠를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리는 태도는 기억하며 본받아야 하겠다.

반면 어떤 해석가는 눈의 아들이 집권 초기라서 실권을 장악하지 못했고 군기를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백성이 하나는 주고 하나는 취하는 동등한 국정운영 파트너로 버릇없이 나대는 것을 방지하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독교의 지도력은 다스리고 지배하고 장악하고 탈취하고 조종하고 조작하고 겁박하는 권세와는 무관하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섬기는 신분이다. 당연히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막대한 카리스마 휘두르며 사람들의 수족은 물론이고 감정과 생각까지 결박하는 무소불위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목회자의 도리이고 사환의 본분이다. 결과는 공포와 불안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와 자비와 긍휼과 화평과 같은 성령의 열매이다.

무서운 주먹을 보이면서 사람들을 움직이려 드는 사람들이 종종 목격된다. 마음의 자발성을 따라 이루어진 행위가 아닌 모든 강압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따르고 뒤틀린 결과가 초래된다. 돈과 힘과 다른 수단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에게는 권력의 유지를 위해 더더욱 돈과 힘 및 그와 유사한 수단들 확보에 집착하게 된다. 백성의 아픔은 당연히 다각도로 증대된다.

그런 지도자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지도자의 눈치 살피기가 일과이고 모든 면에서 그런 눈치 의존적인 체질로 고착된다. 인격도 습관도 생각도 언어도 행실도 그런 식으로 변질된다. 이는 성도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세우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세우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런데 그걸 통치력의 승리라고 오독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개인의 체질과 가정의 체질과 교회의 체질과 교계의 체질로 눈길을 돌리면 동일한 현상이 목격된다. 개인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에 적응된 삶을 살아가고 가정은 가장의 심기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교차하며 교회는 담임 목회자의 카리스마 기운이 말씀의 권세와 흥왕을 대신하며 교계는 패거리 문화의 온상처럼 추락하고 있다.

어떤 공동체건 지도력을 발휘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덕목은 주님과의 동행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야만 한다. 지도자와 대립각이 세워질 법한 사안에 대해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그런 상황은 이미 그 자체가 대대적인 수술이 요구되는 중증이다. 어떤 특정한 사안보다 그걸 둘러싼 상황이 더 사실에 가깝다.

지도자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백성은 바로 그 권위에 순응하되 그러한 이상에의 갈망을 입술로 자유롭게 발설할 수 있는 분위기가 건강의 괜찮은 척도이다. 무섭게 겁박하고 광기를 쏟으면서 주변을 장악하려 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 사람도 불행하고 그와 더불어 있는 공동체도 불행하다.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 사이의 그 아름다운 소통이 그리운 아침이다. 

2014년 9월 12일 금요일

나른한 일상의 가치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행17:25)

사물의 가치는 대체로 희소성에 의존한다. 적으면 귀하게 여겨진다. 보석들이 그러하다. 자체의 가치는 고작 무생물일 뿐인데 인간문맥 속에서는 그것을 취하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에 의해 인간의 목숨과 존엄성을 걸 정도의 가치로 비대하게 과장된다.

패션에 있어서도 가능하면 사람들은 누구도 가지지 못한 자기만의 고유한 수제품 복장, 이 세상 어디서도 반복될 수 없는 디자인을 선호한다. 기계를 돌려 찍어낸 동일한 디자인이 나에게도 발견되고 다른 이에게도 발견되는 것, 견디지를 못한다. 그러나...

인간에겐 동등성과 고유성이 공존한다. 이 세상에 동일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고유성이 있고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동등성이 있다. 의식주의 문제는 비본질적 요소인데 거기에 희귀성 문제를 들이대고 일희일비 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대체로 늘상 반복되고 항상 관찰되는 것은 그 존재감도 쉬이 사라진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현상이다. 생명은 우리가 죽어보지 않아서 생명과 단 한 순간도 결별한 적이 없을 정도로 친숙하다. 주변에서 부고가 들려오면 그제서야 잠깐 그 존재감을 얻다가 곧장 망각된다.

산소 마시기를 한번도 중단한 적이 없어서 호흡의 소중함도 가볍게 무시된다. 언제든지 어디에도 값없이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흔하여서 산소의 가치에 반응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희귀하다. 코 주변에 운집한 한 줌의 산소가 없으면 생이 종결될 수 있는데도 은근히 유린한다.

만물과 떨어져서 지낸 본 경험이 없어서 사람들은 만물이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으며 어떻게 주어지고 있는지를 모른다. 설명이 불가능한 신비로운 균형과 질서가 만물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에는 관심도 없다. 돈벌이와 향락의 수단 정도로만 인식한다.

전혀 희귀하지 않고 전혀 고귀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대체로 희소성의 부재 때문에 빚어진 인상이다. 그러나 그 가치가 인지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있고 한번도 떨어지지 않고 동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렇게 가깝고 분리되지 않아야 할 정도로 가치가 크다는 증거이다.

너무나도 쉽게 그 존재감이 사라지고 가치가 망각되고 필연성이 무시되는 생명과 호흡과 만물이란 선물을 주신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으셔서 그분의 존재와 고귀함과 필연성은 더 쉽게 망각되고 무시되고 지워진다. 그분을 그분답게 인정하고 감사하는 자가 희박하다.

하나님은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다. 이 선물들은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도 흔하고 익숙한 것이어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주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르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숨쉬는 거, 기적이다. 살아있음, 기적이다. 보행하고 기동하는 거, 기적이다. 자연의 질서, 기적이다. 눈의 깜빡임, 기적이다. 앉고 일어섬, 기적이다. 누워 자고 깨어남, 기적이다. 웃음과 울음, 기적이다. 공감과 소통, 기적이다. 말과 생각, 기적이다. 해석과 이해, 기적이다.

일상이 기적이다. 일상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에 어디서든 경험하고 언제든지 관찰된다. 지루한 반복 느낌이 일상의 가치를 제거하지 못하도록 주신 수여자를 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사에 인정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일상을 선물로 주시었다.

하나님이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것은 생명처럼 호흡처럼 만물처럼 한 순간도 인간과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는 순간 자멸하는 그런 결코 떠나서는 안되고 망각하지 말아야 할 분이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주어지고 싶으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방식이다.

참으로 사람의 조잡한 측량을 불허하는 분이시다.

2014년 9월 10일 수요일

하나님께 영광을 세세토록!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롬11:36)

하나님께 영영토록 영광을 돌리는 게 모든 것의 종착지다. 바울의 사유와 언어와 삶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지향했다. 그것을 지향하지 않으면 사유도 틀어지고 언어도 부실하고 삶도 불안하게 된다. 그것에 이르기 전까지는 생각도 온전하지 않고 언어도 온전하지 않고 삶도 온전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애초에 그렇게 지어졌다.

로마서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겨냥하고 있다. 어떤 구절은 마치 독립적인 언술인 양 단절적인 느낌을 주지만 독립된 의미를 부여하면 안되겠고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염원과 더불어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해석될 때 모든 구절은 의미론적 제자리를 찾아간다. 인간의 단절적인 의식으로 성경의 통일된 유기적 의미를 절단하면 안되겠다.

우리가 영원토록 영광을 돌려야 마땅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능력은 지으신 모든 만물에 분명히 알려지게 하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고 영화롭게 하지도 않은 인간의 타락과 부패에 대한 언급도, 율법에 대한 언급도, 하나님의 또 다른 의에 대한 언급도, 그리스도 예수의 영속적인 사랑에 대한 언급도, 예정론도 다 그 영광을 지향한다.

인생도 또한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지향함이 마땅하다. 에베소서 1장도 밝히기를,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의 찬미가 되는 것은 만세 전부터 작정하신 것의 결론이라 한다.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만드시는 모든 구원의 서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격에 합당한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세부적인 섭리이다.

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엉뚱하게 설정된 목표를 향해 이슬처럼 삽시간에 사라질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온 나날들이 적지 아니함을 확인한다. 선악의 분별이 다 그런 목표에 매달린다. 생의 희로애락 일체가 그런 목표에의 근접성을 근거로 출렁이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하나님의 눈에는 얼마나 애처롭고 안타깝게 여겨졌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 진리의 가장 체계적인 진술을 제공하는 로마서의 교리론 끝자락에 '그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것이라'는 고백이 등장하는 것이 나에게는 나의 사적인 일대기와 역사 전체와 모든 만물이 마땅히 지향하고 필히 지향하게 되는 목표가 무엇임을 모든 지력과 통찰을 다 동원하여 설파하고 싶어하는 바울의 본심으로 읽혀진다. 사도들의 공유된 본심이라 생각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세세토록 지향하는 것, 최상의 균형과 조화와 진실과 경건과 완전이 담보되는 생의 방향이다. 이러한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산제물로 내 몸을 드리고자 할지라도 마땅히 드러야 할 영적 예배와는 무관하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내 삶의 품격은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멘트에 힘써 맡기련다. 

2014년 9월 7일 일요일

실천하는 원수사랑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 왔도다 (시35:13)

시인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부당한 증언을 내뱉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사실 그들은 터무니 없는 주장과 질문으로 시인을 곤경에 빠뜨렸고 선을 악으로 갚아 시인의 영혼을 외롭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증인들이 투병할 때에 슬픔의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 하였다고 한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런 원수들을 자신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하는 것처럼 존대했고 그들을 위해 슬퍼함에 있어서는 마치 어머니를 곡함같이 하였다고 진술한다. 이쯤되면 반전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시인의 넘어짐을 기뻐했고 불량배를 동원하여 시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살까지 찢기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시인은 그들을 위한 기도의 입술을 다물지 아니했다.

그들의 치졸한 하대와 경박한 조롱은 거기에서 그치지를 아니했다. 그들은 심지어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축복하는 잔치가 벌어지는 곳에서도 망령되이 시인을 조롱하고 위협적인 이빨을 갈았다고 한다. 이러한 끝모를 원수짓도 시인을 꺾지는 못하였다. 시인은 모든 이들이 보는 공석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가운데서 주께 찬송을 올렸다고 한다.

결국 원수를 향해 밀어낸 그 기도가 자신의 품으로 돌아 왔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이런 고백을 들으면 대개는 이렇게 적용한다. 즉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니까 원수들을 위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복을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전반적인 진술을 보면, 그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는 척 연출을 시도한 게 아니었다.

기도의 되갚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원수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위하고 진심으로 그들의 복을 구하고 형제와 자매처럼 가족을 대하듯이 진심으로 아파하고 눈물을 흘려야 한다. 원수를 향한 우리의 모든 바램이 되돌아 오는 것은 뒤따르는 결과였다.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은 뒷전으로 미루고 잿밥에 눈이 어두우면 안되겠다.

주변에, 어쩌면 가장 가까운 가족들 중에 원수보다 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 한가위를 맞아 혹 나를 가장 부당하게 하대하고 비웃고 조롱하는 이들과 대면해야 한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사랑과 축복의 기회으로 여기심이 합당하다. 어쩌면 그때가 바로 가식과 연출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가 먼저 인사하고 존중하고 다가가고 친절을 베풀고 사랑할 기회이다.

하나님이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니까 이 세상에는 믿는 자들에게 어떠한 억울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자에게는 그 사랑이 다 소진되고 말라버릴 정도로 큰 부당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가 수장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죄를 독생자의 죽음으로 사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런 주의 선하심을 따라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극단적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시인에게 한 수 배웠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내용의 옳고그름 싸움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천하는 삶이라는 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