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8일 토요일

바벨론 강변의 노래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137:1)

하나님의 사람은 교회 생각에 눈시울이 늘 축축하다. 기억의 촉수가 시온의 그림자만 건드려도 눈물이 와락 쏟아지는 시인은 교회를 아는 사람이다. 울음이 없이는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사람이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이다. 이방인의 땅 바벨론에 사로잡혀 조롱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의 향기는 진동하고 영혼의 미는 눈부시다. 마치 가시밭의 백합화가 찔리고 상하면서 평소보다 더 짙은 향기로 대응하는 것과 유사하다. 과연 시인은 존재의 상실 속에서 존재의 진가를 발산하는 사람이다.

그는 바벨론 강변의 버드나무 위에 자신의 수금을 걸었단다. 자신들을 위해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는 사로잡은 자의 요구 혹은 조롱에 대한 거절의 표시였다. 거절이 곧 죽음을 의미했을 터이지만 시온의 노래를 포악한 자의 유흥을 돋구는 수단으로 전용되는 것보다는 목이 달아나는 거절을 선택했다. 이는 목숨을 담보로 거절의 자유를 행사한 참 자유인의 모습이다.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한 것은 시온도 이방인의 손에서 지켜내지 못한 신에게 더 이상 시온의 노래는 어울리지 않으니 그 신의 보호망도 보란듯이 뚫고 예루살렘 담벼락을 허문 바벨론의 승자에게 돌리라는 것이었다.

시인은 분하고 서러웠다. 하여 바베론의 파괴자를 위해 시온의 노래 부르는 것을 거절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를 노래하는 역방향을 질주했다. 여호와를 위한 시온의 노래는 평범한 상황 속에서의 곡조와는 현저히 다른 농도로 극히 애절했다. 노래를 넘어 절규였다. 울음을 쏟으며, 예루살렘, 너를 잊지 않겠단다.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는 일은 혹 있더라도 예루살렘 망각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오열로 표명했다. 예루살렘, 네가 망각되어 버리거나 우리에게 차선의 희열로 머문다면 우리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도 좋겠단다. 아예 노래와 무관한 인간이 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이야기다.

이어 여호와의 이름을 거명하고 그의 의로운 보응을 노래한다. 예루살렘 멸망의 주범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것은 여호와의 몫이며 거기에 수단으로 동원되는 자가 복되다는 말로 노래를 끝맺는다. 축축한 바벨론 강변에서 포로의 부르튼 입술에서 출고된 서글픈 노래가 처절함을 딛고 비장함을 넘어 애절한 설레임과 희망의 언덕에 이른 시인의 노래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의 축소판이 투영되어 있다. 교회가 기억만 스쳐도 사무친 오열을 쏟아내는 땅의 나그네, 사망의 왕노릇 권세가 곳곳에서 휘두르는 횡포의 썩은 악취가 진동하는 세상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노래를 포기하지 않는 나그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닌 것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는 압박과 비아냥이 하나님과 시온 따위는 잊고 바벨론의 강변을 즐기라고 속삭인다. 때로는 가공할 주먹으로 위협하고, 때로는 요염한 입술로 꼬득인다. 이 땅의 나그네가 아니라 땅의 주권자요 영구적인 거주자로 살라고 설득한다. 그래서 몽롱한 하늘의 명목적인 시민이 아니라 영광스런 바벨론의 자발적인 포로로 머물라고, 파괴된 예루살렘 노래는 빠진 거품일 뿐이라고, 그것을 수호하던 신 여호와는 찌질한 실패자일 뿐이니까 시온의 노래는 그냥 강변에서 바벨론을 위해 부르라는 체념과 낙심의 소리를 고루한 레코드판 돌리듯이 연일 반복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시온을 기억하며 오열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독생자의 보혈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떠올리며 시온의 노래를 눈물로 적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삶으로 거명하며 극도의 희열에 빠지는 사람을 온 땅에 두루 다니시며 찾으신다. 찾으시는 하나님께 나는 포로의 옷을 입고서도 시온을 젖은 곡조에 담은 시인처럼 발견되고 싶다. 교회를 기억하면 눈물부터 쏟아지는 사람이고 싶다. 주권이 박탈되고, 타협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보다 강렬한 목소리로 보다 애절한 리듬으로 시온의 노래를 부르던 시인이고 싶다. 시온을 떠나 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가 바로 이 시인이길 소망하며...

2015년 2월 27일 금요일

형제의 아름다운 동거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133:1)

연합하여 동거하기 위해서는 형제가 머물러도 될 인격과 삶의 여백을 각자가 갇추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서 동거할 때에는 악하고 추한 참상이 벌어진다. 상대방을 제거해야 나의 존재와 삶이 확보되고 이를 위해서는 온갖 거짓과 술수를 동원해야 내가 제거되지 않는 적자생존 원리가 지배한다. 그러면 형제와의 연합과 동거는 죽는 것보다도 싫은 생지옥을 방불한다. 이는 역사가 증인석에 있고 경험도 내부 고발자다. 가장 선한 것이 극단적인 반대편의 악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정반대의 추함으로 얼마든지 반전된다.

형제의 동거는 "어찌 그리"라는 감탄사를 격발하게 하는 선과 미의 원천이다. "함께 거한다"는 동거는 결코 만만치가 않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용납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찢어질 수밖에 없는 게 동거이기 때문이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가장 사랑하는 남편이 동거해도 관계의 잡음이 생기고 때로는 결별의 법적인 매듭도 불사하는 부부의 중다함이 이를 입증한다. 형제와의 동거는 상대방의 인격과 삶의 습성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위만 골라서 인정하는 마춤형 동거가 아니다. 상대방의 전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동거의 의미는 동일한 공간에의 물리적 공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연합"까지 이르러야 동거다. 이는 서로의 마음과 뜻과 생각이 같아서 동거해도 괜찮은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내면의 동거는 단순히 서로를 용납하고 존중하는 정적인 상태를 넘어 각자가 삶의 고결한 일치점에 이르려는 역동적인 협력을 요구한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요구하며 생떼쓰는 자세로는 고작해야 동거의 무늬만 연출한다. 진정한 동거는 내가 먼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본을 보이는 자세에서 구현된다.

동거를 위한 삶의 고결한 일치점 확보는 특정한 개인에게 돌려지지 않고 하나님이 그 출처시다. 시인은 시의 끝자락에 "거기에서 하나님이 영생을 복을 주신다"는 문구로 끝맺는다. 즉 형제의 동거과 영생이 연결되고 있다. 형제와의 화목한 동거는 하늘에서 누릴 영생의 맛배기다.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형제의 화목한 동거에 의해 증거된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되리라"고 하시었다. 형제의 동거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천국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시온에 떨어지는 헤르몬의 이슬, 시온을 시온답게 만드는 신비로운 매체로 비유되는 형제의 연합과 동거는 모든 시대가 회복해야 할 참된 교회상을 가리킨다. 교회를 볼 때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십자가와 천국의 삶을 목격해야 마땅하다.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참된 이상의 예고편을 교회가 제공해야 한다. 천국의 향기가 아니라 지옥의 악취로 외부의 자발적 접근을 차단하는 교회의 고질적인 문제는 다툼과 분열이다. 연합과 동거는 그 해법이다. "어찌 그리 아름답고 선한가!" 시인의 시어에 투사된 하나님의 마음이다. 

거룩한 공교회 의식의 필요성과 회복이 절실하다. 밴댕이 속의 고수를 기독교적 순결의 일환으로 여기며 '좁고 협착한 길'을 명분으로 연약하고 가난하고 무지하고 유아적인 무리와 섞이는 걸 극도로 거부하고 무조건 회피하는 종교적 결벽증은 해결책이 아니다. 가라지가 섞여 있어도 알곡의 파손을 기준으로 마지막 날까지 거룩보다 사랑을 선택하고 우선시한 교부의 판단이 지금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다. 물론 여기서의 논점은 사랑의 띠를 붙들기 위해서는 거룩의 끈을 놓쳐도 괜찮다는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다. 

사랑과 거룩을 다 고수함이 마땅하나 어거스틴 할배의 교훈처럼 이 땅에서는 완전한 거룩보다 완전한 사랑이 판단의 아랫목을 차지함이 더 타당하다.

2015년 2월 26일 목요일

씨름의 대상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엡6:12)

씨름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갖추어야 할 무장의 종류와 질이 달라진다. 바울은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며 기존의 그릇된 시각부터 교정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대체로 혈과 육을 씨름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일그러진 현실의 진단이고 우리의 그런 경향성에 대한 애두른 고발이다. 이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온 교회가 씨름의 대상을 선정함에 있어서 오랫동안 심각한 헛다리를 집어 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 바울은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을 겨냥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언사를 내뱉는다.

바울은 교회를 육신적인 공동체로 여기는 자들의 비방에 익숙하다. 이는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의 중다함을 언급한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두번째 서신에서 확인된다. 유대교의 보존을 위해 무력 사용을 승인한 유대인 분파들이 빌미를 제공했을 법한 비방이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는 않는다"고 강하게 항변한다. 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무기로도 입증된다. 우리가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어떤 것이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진지도 파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용하는 무기를 보면 그가 싸우는 싸움의 대상도 파악된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육신을 가지고 살아간다. 거기에는 신경도 있어서 다양한 것들을 감지한다. 신경에 감지된 것을 따라 육신이 반응하는 것은 인간에게 전혀 이상하지 않고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 반응에는 근육도 동원되고 논리적인 두뇌도 동원되고 영리한 혀도 동원되고 피붙이 친인척도 동원되고 두툼한 사회적 인맥도 동원되고 빵빵한 경제적 신용도 동원된다. 이러한 수단들을 무기로 즐겨 동원하는 이들에게 싸움의 대상은 혈과 육임에 분명하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대응하지 않는다. 대상이 달라서다. 문제는 혈과 육 너머의 대상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한다는 거다. 나의 감정을 건드리면 감정적인 반응에 민첩하고, 나의 재산을 되로 건드리면 말의 보상을 청구하고, 나의 따귀를 건드리면 나의 손바닥도, 심하게는 주먹이 상대방의 따귀로 신속히 이동하고, 나의 가족을 건드리면 상대방의 지인들을 집단으로 매도하고 위협하는 게 인간의 성향이다. 이는 다 혈과 육을 대상으로 싸우는 현상이다. 개인도 육신으로 씨름하고 교회도 육신으로 씨름한다.

자기부인 없이는 혈과 육의 멱살을 거머쥐는 씨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전쟁과 싸움과 씨름은 다 하나님께 속하였다. 우리는 거기에 영광의 소환을 받는 하나님의 군사다. 군사의 상대는 우리의 주변에 운집한 혈과 육이 아니다. 혈과 육을 총알받이 삼아 그 뒤에 교활하게 숨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및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다. 우리가 상대하는 적수의 위력이 만만치가 않다. 육신을 따라 대응하는 순간 칼도 뽑지 못하고서 필패한다. 육신에 속한 모든 무기들을 다 동원해도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혈과 육을 대상으로 싸우느라 늘 분주하다. 육적인 승리를 위한 각종 무기류 장만에 대부분의 생애와 에너지를 탕진한다. 자신의 감정과 재산과 조직의 피해에 반응이 민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군사가 아니다. 자신을 영주로 모신 노예이다. 종노릇의 대상이 다 자신의 감정이고 기분이고 논리이고 판단이다. 이를 위해 이빨을 갈고 주먹을 날리고 독설을 쏟아낸다. 이는 싸움의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빈곤에서 비롯된다. 시무이의 저주를 들으면서 육신 시무이를 적수로 보지 않았던 다윗이 떠오른다.

주변을 돌아본다. 내가 육신을 따라 씨름하고 있는 상대방은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등골이 오싹하다. 내가 육신을 따라 대응해 왔던 분들이 많아서다. 분하고 괘씸하다. 은밀한 대적인 사탄에게 오랫동안 알면서도 속아서다. 속으면서 영적인 무장도 서서히 해제되고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해서다. 사도의 가르침을 가슴의 아랫목에 간직해야 하겠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교훈 말이다.

묵상글을 올리는 이유

1. 성경을 묵상하면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최고의 유익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생각도 깊어지면 그 위인도 그러하게 된다는 지혜자의 말처럼 나 자신을 돌아보면 묵상의 깊이만큼 자라남을 확인한다. 그래서 중독된다. 끊어지지 않는다. 표피에서 심연으로, 평면에서 입체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땅에서 하늘로, 피조물에서 창조자에게로 한발짝씩 다가가는 게 성경 묵상이다.

2. 설교자를 위해서다. 남의 설교를 배끼는 것은 형벌이 따르지 않는 범죄이다. 그러나 나의 묵상글은 단문이다. 설교문 길이로는 턱없이 짧다. 설교자가 나의 묵상글을 가져가도 가공하고 살을 붙이는 자기화 과정 없이는 쓸모가 없는 분량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 묵상은 설교에 대한 목회적 윤리의 실종이 심각한 한국교회 상황에서 '배겼다'는 정죄감에 빠지지 않을 정도의 아이디어 공유를 위해 시도된 글들이다. 그러니 나의 묵상글이 설교에 유익이 된다고 판단하는 설교자 분들은 마음대로 가져가도 되시겠다.

3. 성도들을 위해서다. 성경의 표피가 제공하는 은혜 조각들이 있다. 그것만 먹어도 배부를 정도로 양질의 은혜가 성경의 표면에 가득하다. 그러나 나의 묵상글은 성경의 표피를 뚫고 들어가서 심층의 은혜로 들어가서 누리면 좋겠다는 초청이며 안내이며 소박한 사례이다. 물론 표피와 심층이 연결되어 있어서 선명한 경계선을 그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다. 그래도 성경이 초청하는 만큼의 심층까지 들어가는 것은 묵상자의 특권이다. 취하시라.

이렇게 머리와 마음에서 맴돌던 취지를 언어로 꺼내니까 민망하다....^^; 

2015년 2월 25일 수요일

하나님의 재판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신1:17)

재판이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임의로 재판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나님께 속한 재판의 특징을 모세는 몇 가지로 정리하여 가르친다. 첫째, 너희의 형제 중에서 송사를 들을 경우 쌍방간에 공정히 판결해야 한다. 둘째, 자국인과 타국인을 구별하지 않고 공정하게 판결해야 한다. 셋째, 외모를 보지 말아야 한다. 넷째, 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경청해야 한다. 다섯째, 사람의 낯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혹여라도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에 대해서는 모세 자신에게 판결권을 돌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재판은 가족이나 친족 구성원을 편애하지 않는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는 아니되는 재판이다. 의식이 가족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관의 자격 미달이다. 이 자리는 혈통의 경계를 넘어서는 가치관을 요구한다. 이는 가정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개념과는 다르다. 가정을 돌보는 일은 하나님의 공의가 가정에 머물를 때 가능하다. 혈육에 치우치지 않은 판결은 결코 가정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가정을 견고하게 세운다. 모든 가장은 이런 재판관 의식에 투철해야 한다.

하나님의 재판은 자국인과 타국인을 차별하지 않는다. 자국민의 우월성을 통치의 열광적인 수단으로 삼았던 인물과 시대가 있었다. 일등국민, 이등국민, 삼등국민 개념도 한 때는 번듯한 제복을 입었었다. 비록 오늘날 그런 민족주의 폐단이 제도화된 나라가 드물지만 실제로 법의 정의가 국경선을 넘어가는 경우는 대단히 희귀하다. 하나님의 재판은 공의가 피부와 문화와 제도와 언어의 경계를 넘어가지 못하는 판결을 불법으로 규정한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십계명의 제3계명 위반이다.

하나님의 재판은 외모를 주목하지 않는다. 여기서 외모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감지해 낸 판결의 모든 요소들을 총칭한다. 재판의 기준은 우리의 면밀한 관찰이나 그 관찰에 기초한 사람들 사이의 다수결 합의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시듯이 사람의 중심을 볼 때 하나님의 재판은 성립된다. "중심"은 아주 어려운 개념이다. "마음의 동기"가 "중심"에 가장 가까운 의미이다. "마음의 동기"를 읽어내는 작업이 판결의 관건이다. 그 작업의 준비는 동기를 둘러싼 변방의 시간적 공간적 요소들을 걸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재판은 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경청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귀인에게 경청의 귀를 양도한다. 이는 귀인의 사회적 신뢰도가 천인의 그것보다 높아서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현상의 당위는 사람들의 저항과 의문을 잠재우는 최상의 도구이다. 그래서 당연한 현상은 늘 악용과 오용과 과용이 군침을 흘리며 눈독을 들이는 표적의 일순위다. 당연을 당연으로 여기고 검토하지 않으면 판결은 음흉한 거짓에 놀아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재판은 당연한 현상의 틈새를 파고드는 속임수에 농락 당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재판은 사람의 낯에 휘둘리지 않는다. 사람의 면상은 오가는 구어가 없어도 얼마든지 상대방을 위협하고 제압하는 공포의 수단이다. 얼굴만 보아도 위축되고 주눅드는 사람이 있다. 재판관은 그런 자가 가진 막대한 권력과 보복이 두려워 반듯한 판결을 주저하게 된다. 두려움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재판은 하나님의 법이 가장 두렵다는 사실의 선언이다. 판결봉은 우리가 하나님을 누구보다 심히 두려워 할 분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입술이다.

재판은 섭리다. 모든 일들이 행한대로 갚아지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이다. 이런 재판은 모든 곳에서 항상 실행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러한 재판을 보여주는 구별된 처소이다. 마땅히 친족이라 해서 두둔하지 않고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멸시하지 않고 보이는 외모에 미혹되지 않고 천인의 발언이라 해서 무시하지 않고 사람의 낯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그래야 재판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의 증인이다. 모세의 재판 이야기는 하나님과 교회 이야기다. 

2015년 2월 24일 화요일

증인의 영광스런 직무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증인은 영광스런 소명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증인을 증인으로 말미암아 증거되는 주체의 불유쾌한 들러리 정도로만 생각한다. 이는 통념의 올가미에 걸린 분들의 삐딱한 발상이다. 증인의 개념에 들러리의 요소가 없지는 않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긍의 고개를 급하게 끄덕인다. 그러나 의미의 부분이 전부로 과장되는 순간 증인의 본의는 멀어지고 흐려진다. 증인은 그로 말미암아 증거되는 내용이 고귀하고 장엄하고 거룩하고 영원하고 공의롭고 클수록 그에 버금가는 유익의 수혜자다.

증인은 분명 보고 들으며 경험한 내용을 전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사도들은 그런 증인이다. 당시 사도들의 대표격인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관원들 앞에서 표명했다. 여기에서 나는 증인에 대해 싫어하는 사도들의 내색을 감지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그들은 증인의 직무에 필연성과 당위성을 부여한다. 자신의 존재감을 증인의 직무와 결부시켜 이해한다. 그래서 당시 예수의 이름을 발설하면 죽음의 위협이 가해지던 상황 속에서도 증인이길 중단하지 아니했다.

바울도 그런 증인이다. 바울에 대한 아니니아 증언에 의하면,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의 뜻을 알리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라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고 한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의 목격자다. 바울도 다른 사도들과 같이 증인의 사명에 부득불 할 일이라는 필연성과 당위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엄중한 의무감에 떠밀린 비자발적 증인됨이 아니었다. 자신의 증인됨은 "자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 바울은 자발적인 증인됨을 넘어 이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를 아니했다. 자신의 전부를 증인의 직무에 걸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증인의 본의를 제대로 파악한 자의 비장한 모습이다. 증인이 된 자에게는 자신의 생물학적 목숨보다 증인의 직무가 더 소중하다. 그냥 사는 것보다 죽더라도 증인이 되는 것이 더 유익하다.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도 수단으로 상대화될 정도라면 증인의 직무가 보상하는 유익 그 이상을 제공하는 것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는 의미와 가치의 분량만큼 대우를 받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인 몸값을 높이려고 돈도 벌고 지식도 축적하고 노하우도 정리하고 다양한 경험도 확보하고 인맥도 확대하고 기발한 통찰도 발굴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기껏해야 인간문맥 안에서의 도토리 키재기다. 하지만 주님의 증인이 되면 문맥이 달라진다. 우리가 주님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과 위엄과 뜻과 계획과 섭리가 세상에 펼쳐지는 게 증인의 모습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면 열방이 그들에게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라 여길 것이라고 했다. 아브라함 경우에는 열국의 왕들이 그에게 동맹의 손을 뻗으며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다"는 이유를 밝혔다. 이삭의 경우도 동일했다. 열국이 그에게 찾아와 화친을 청한 이유도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요셉이 받은 보디발의 총애와 간수장의 은총도 그에게서 하나님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증인의 삶이 이러했다.

우리를 통하여 우리가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이 증거되실 때가 우리에게 가장 큰 영광과 유익이 제공되는 때다.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에 죽도록 수고해야 한다는 마냥 희생적인 뉘앙스가 없다.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가장 큰 영광과 유익이 주어지는 상태와 방식을 귀띔하신 듯하다. 우리의 인생에서 주님이 증거되는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구현하고 더 큰 의미를 산출하는 다른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면 날수록 우리에게 영광이고 유익이다.

그러므로 증인의 직무를 중단하는 것은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은 과장이 아니겠다. 이것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나에게서 복음이 증거되는 경우 "복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거다.

2015년 2월 23일 월요일

고아들의 지계석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잠23:10)

"지계석"은 소유의 경계를 표시하는 돌덩이를 가리킨다. "옛"이라는 수식어는 사람의 경제적인 활동으로 발생된 소유지의 변화 이전 상태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옛 지계석"은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각 지파나 가족이나 개인에게 최초로 할당한 소유지의 경계를 가리킨다. 성경은 언제나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명시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땅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과 소유라는 개념을 수반한다.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다.

구약의 율법을 따라 지혜자는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고 경고한다.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는 것은 지계석 이동의 구체적인 사례라는 사실을 곁들인다. 고아들은 연약하고 가난하고 무기력한 존재이며, 무엇보다 하나님 이외에는 의지할 대상이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들의 밭을 침범하는 것은 그들의 가난과 무기력을 농락하는 일이고 그들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하나님께 맹랑한 도전장을 내미는 것과 일반이다. 하나님이 할당하신 고아들의 밭에 탐욕의 군침을 흘리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멸시하고 부정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이유로 지혜자는 고아들의 밭을 건드리면 그들의 강한 구속자가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주께서 할당하신 고아들의 몫을 건드리는 자를 갚는 보응의 칼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런데도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약하다는 이유로 탈취하고 압제한다. 어리석은 오판이다. 약한 자들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고려하지 못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약자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가장 예민하게 작용하는 부위다. 그런데 세상의 강자들은 바로 그 부위를 건드린다. 우매하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우리의 주변에도 가난하고 무기력한 고아들이 많다. 경제적인 고아들, 사회적인 고아들, 지적인 고아들, 심리적인 고아들, 정신적인 고아들, 영적인 고아들이 힘겹게 살아간다. 그런 분들을 비웃고 홀대하고 무시하고 외면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도 탈취하지 말아야 할 밭의 경계를 표시하는 지계석을 두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지계석의 마지막 보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그들의 인격적인 존엄성이 존중되지 않으면 옛 지계석을 움직이는 악행이다.

교회 안에서든 사회 속에서든 인간을 인간답게 대우하는 것은 하나님이 태초부터 설정하신 지계석의 위치를 고수하는 선행이다. 지계석 고수는 교회의 울타리 내에서의 종교적 윤리가 아니라 온 세상이 주목하고 주의해야 할 범 인륜적 도덕의 규범이다. 사실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계명들은 지계석의 성격을 가지며 세상에 대해서는 최상의 도덕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세상이 스스로 깨달아 지계석 개념을 높은 도덕의 차원까지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세상에 지계석의 빛을 비추는 역할은 교회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혹시나 고아들의 지계석 이동에 교회가 앞장서고 있다면 세상에 드리울 도덕의 캄캄함은 예측을 불허할 정도겠다.

2015년 2월 22일 일요일

성경의 예언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1:21)

베드로는 성경을 예언으로 규정하고 그 예언의 속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즉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았고 1)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2)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경의 기록자는 분명히 사람인데 예언의 출처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을 건드린다. 그렇다면 예언의 해석이 기록자의 인간적인 뜻을 해명하는 것으로는 확보되지 않는다는 말이겠다. 그러므로 기록자의 습성이나 문체나 뉘앙스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환경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해석학은 금물이다. 그러나 경건을 빙자하여 기록자의 인간적인 여러 조건들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보기에 흉한 극단이다. 오히려 부작용만 양산한다.

하나님은 성경 기록자의 모든 조건들을 결코 배제하지 않으셨다. 시간의 특정한 시점에서 괜찮은 수단들을 급작스레 골라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장구한 섭리적 준비가 있었으며 시간의 한 시점에 이르러서 활용의 형태를 취했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활용의 사실을 구실로 삼아 인간의 무지와 실수와 연약과 제한까지 성경의 속성에 그대로 전이되어 성경도 무지와 실수와 연약과 제한이 있다는 식으로 성경의 신적인 속성을 제거하는 논법은 온당하지 않다. 그 이유는 베드로의 해명처럼 성경의 예언이 그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이 포괄되어 있는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아서다. 

성경이 성경이기 위해서는 사람의 뜻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발화된 것이어야 한다. 기록자의 고유한 조건은 "성령의 감동"이다. 사유가 깊고 어휘가 중다하고 수사학에 능하여 기록의 적격자로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감동이 없다면 성경 기록자의 자격에는 미달이다. 성령의 감동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다"는 뜻으로서 기록자의 사사로운 뜻을 제어하는 동시에 기록자의 모든 조건들을 하나님의 뜻 전달에 적절히 동원하고 활용하는 감동을 의미한다. 성령의 감동이 있었다면 인간의 뜻은 배제되고 인간의 조건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한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감동은 예언이 전달되고 기록되기 위해 성령이 행하시는 기록자의 준비이다. 

나아가 성경의 예언은 그렇게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내용의 출처에 관한 조항이다. 즉 성경은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 자기의 말을 활자화한 것이 아니다. 즉 기록자의 준비가 있으나 그렇게 준비된 기록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입에서 출고된 모든 말이 무조건 예언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나님으로부터" 말한 것이어야 예언이다. 베드로의 설명에 의하면, 성경의 모든 예언은 이렇게 두 가지의 조건이 모두 갖추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의 감동에 의한 기록자의 준비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신적인 출처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예언일 수 없다. 

이렇게 기록된 성경의 예언은 사사로운 해석을 거절한다.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이 예언의 출처시기 때문에 기록자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의 기록이기 때문에 예언을 기록자의 주변적인 상황에 대한 반작용인 것처럼 역사적인 환경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의 증거에 의존하여 이해해야 한다. 물론 기록자의 인간적인 조건들을 수단으로 쓰셨기 때문에 도구적인 차원에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겠다. 그러나 해석의 주도성과 궁극성을 그런 인간의 조건들에 부여하면 사사로운 해석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의 조건들에 대해서는 도구적인 성경만 고려해야 한다. 

2015년 2월 16일 월요일

성경의 경제학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잠15:6)

"소득"이란 어떤 것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이전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나아가 이로 말미암은 능력과 자유의 확대로도 해석된다. 우리에게 어떤 것이 주어지면 혹은 취득되면 유쾌함이 정상인데 악인은 그렇지가 않다고 지혜자는 주장한다. 일반 사람의 생각에 소득과 고통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의 조합이다. 하지만 악인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다. 이는 선한 자들의 상황과는 심히 대비된다. 선한 자에게는 능력과 부와 지혜와 지식이 자랄수록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더욱 크게 기뻐하고 환영한다. 그러나 악인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자유가 확대되면 될수록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위협은 증대된다.

지혜자는 우리에게 소득 자체의 증감보다 취득자의 상태가 더 중요함을 교훈한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선악 상태보다 소득의 유무에 더 예민하다. 지혜자는 지금 우리의 그러한 일그러진 관점과 우선순위 상태를 교정하려 한다. 악할수록 부가 고통이고 선할수록 부의 유무에 좌우되지 않는다. 마음의 선악이 선행하고 삶의 빈부가 뒤따른다. 이것이 뒤바뀌면 가치는 왜곡되고 질서는 전도되고 도모와 삶과 행실의 방향은 역행한다. 어떤 이에게는 빈곤이 유익이고 무지가 유익이고 중지가 유익이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는 부가 유익이고 지식이 유익이고 활동이 유익이다. 동일한 사람의 경우에도 어떤 때에는 부가 유익하고 어떤 때에는 빈곤이 유익이다.

본문은 우리가 악인이 아니라는 착각에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중생자라 할지라도 때에 따라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주어진 지혜와 교훈의 말씀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과분한 소득과 부당한 손실을 골고루 경험한다. 소득이 기쁨인 것만도 아니고 손실이 고통인 것만도 아니다. 우리가 선할 때로는 소득이 우리와 다른 모두에게 유익이며, 악할 때에는 소득이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고통이다. 악할 때에는 소득보다 손실이 고통의 제거이며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들기에 유익이고 기쁨이다. 소득이 고통이지 않으려면 선한 됨됨이가 우선이다. 악한 자에게는 소득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의 경제학적 원리이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재화나 화폐의 흐름보다 인간의 됨됨이가 기준이다. 하나님의 경제학은 시장경제 개념과는 판이하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경제활동 주체로 시장에 참여하고 있지만 거기에 어떠한 강제성도 부과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경제의 주체시다. 사람이 마음과 행위로 경제의 흐름을 결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인간의 됨됨이를 향한 경제의 본질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하나님이 보시는 화폐와 재화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인간에게 궁극적인 유익을 제공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수단은 언제나 수단적인 기능 이후에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상이다.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최상의 기능이다. 우리가 악할 때에는 손실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경제적인 후퇴지만 속으로는 됨됨이의 진전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처럼 경제적 흥망이 좌우하지 못한다. 오히려 어떠한 경제적인 상황도 하나님의 뜻에 이바지할 수밖에 없다.

방패와 상급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15:1)

믿음의 조상은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두려움의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안전하고 인숙했던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났기 때문에 가해졌을 주변의 무력적인 위협이 유력한 원인일지 모른다. 어쩌면 그의 두려움은 그런 환경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외부적인 원인이든 내부적인 원인이든 아브람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에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로서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기 때문이란 사실을 밝히신다. 그러나 상급은 두려움과 무관해 보이고 방패와 상급 사이에도 어떤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면밀한 묵상을 요구하는 구절이다.

"방패"는 두려움을 해소하는 수단이다. 하나님이 "방패"라면 물리적인 보호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라. 두려움의 해소가 방패됨의 입증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상책이다. 대체로 사람들의 두려움은 자신에게 있는 소유물을 빼앗기는 것에 근거한다. 경제적인 재산이나 정치적인 지위나 신체적인 건강이나 사회적인 명성이나 미래적인 희망이나 물리적인 생명에 박탈의 위협이 가해지면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러면 사람들은 위협의 외적인 요소들을 없애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두려움이 제거되기 위해서는 내면적인 요소의 해결도 요청된다. 재물의 경우, 재물을 약탈하는 외부의 위협만이 아니라 재물의 약탈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내면의 상태도 두려움에 일조한다. 내 견해로는 외부의 위협보다 내부의 상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만약 우리에게 상실할 것이 없다면 두려움의 뿌리가 완전히 제거되는 셈이겠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어떠한 것을 상실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두려움을 유발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가졌다면 그를 두려움에 내몰 위협의 모든 요소가 완전히 일소되는 것이겠다. 믿음의 조상에게 건낸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방패"라는 것은 두려움을 유발하는 위협의 외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것을 넘어 두려움의 보다 근원적인 요소로서 우리의 일그러진 마음이 자초하는 내면의 위협도 막아내는 방패를 의미한다. 무언가를 상실해도 이에 대하여 어떠한 위협이나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마음의 담력을 제공하는 방패는 다른 어떤 것보다 유익하다. 문제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내부의 자해적인 위협을 막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적인 위협보다 우리의 내부에서 가해지는 위협을 막아주는 유일한 방패시다.

본문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란 표현은 "방패"와 무관하지 않고 "방패"의 이면이며 구체적인 설명이다. 즉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방패"가 되신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신다면 우리는 어떠한 것을 상실해도 두렵지가 않아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다른 어떠한 소유보다 위대하고 탁월하고 광대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보물보다 더 귀하신 분이시다. 우리의 의보다 더 의롭고, 우리의 거룩보다 더 거룩하고, 우리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우리의 부함보다 저 부하시고, 우리의 능력보다 더 강하시고, 우리의 미보다 더 아름다운 분이시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만 되신다면 우리에게 있는 어떠한 것을 상실해도 우리를 두렵게 만들지는 못한다. 심지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도 우리의 영혼은 어찌하지 못하는 이 땅의 어떠한 세력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지를 말라신다.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두려움의 대상이다. 하나님만 경외하는 사람,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두려워 할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그 누구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하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 되겠다고 믿음의 조상에게 약속을 하시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시다. 이것보다 더 막강한 방패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하나님을 자신의 지극히 큰 상급으로 여기는 자는 외부나 내부의 어떠한 위협이나 두려움도 능히 막아내는 방패의 소유자다. 어떠한 경우에도 염려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고 늘 기뻐하고 감사하고 평안하고 즐거워할 사람이다. 믿음의 조상은 그런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고 우리도 그러하다. 

2015년 2월 13일 금요일

부득불의 경지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고전9:16)

복음전파 열의에 있어서 바울은 참으로 못말리는 사도였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기에게 자랑이 아니란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자타가 공인한 전도의 왕이었다.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그가 움직인 전도의 발걸음이 남긴 족적의 길이는 20,000 킬로를 육박했다. 그는 자랑해도 결코 과대포장 위험이 없는 성실한 전도자의 삶을 살아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랑과는 결별했다. 자랑을 위해 인위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행보에 천착하는 사람과는 얼마나 판이한가!

바울에게 전도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필연적인 직무로 간주했다. 하지만 종의 의무이기 때문에 전도를 경홀히 여기거나 눈가림 정도의 적당한 시늉으로 떼우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주의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결사적인 태도와 행실을 본보였다. 그래서 제자들과 동료들의 애틋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진 고통과 죽음 가능성이 농후했던 예루살렘 입성까지 감행했다. 나아가 무익한 종에게 주어진 일이기에 감격과 감사 속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했다고 진술한다.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숨까지 건 의무감을 가지고 전력으로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의 신앙이 불편하고 거북하다. 그걸 감격으로 여기는 건 더더욱 불쾌하다. 전도를 일생의 사명과 의무로 간주하는 이론적인 시도는 모두에게 가능하다. 실제로 그런 시도가 주는 정서적인 위안이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그것을 가슴에서 솟아나는 삶의 원리로 간주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여 필연의 차원까지 의식하며 살아내는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 전도를 필연적인 사명으로 여기고 그런 필연성을 자발적인 마음으로 수용하는 바울의 상식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강력한 도전이다.

바울에 비해 복음을 전파하는 나의 태도와 행보는 유아적인 수준이다. 종이라는 의식부터 빈약하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복음을 증거한 이후에 주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필연적인 직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여기지를 않는다. 복음증거 이후에 오히려 나는 스스로도 가슴이 뿌듯하고 알아줄 사람의 칭찬에 목마르고 민망한 자화자찬 언사가 입술에서 때를 가리지 않고 무더기로 출고된다. 종의 경지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상태이고 현상이다. 전도를 불가피한 일로 간주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살아내되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도 않은 바울의 경지에 진실로 도달하고 싶다.

물론 이단적인 사상에 경도된 열심으로 전도를 마치 천국행 티켓이나 천국의 최고급 주택을 확보하는 방편으로 여기며 기형적인 방식으로 전도의 역기능만 부추기는 분들의 살벌한 행보가 마치 바울이 보여준 전도의 본보기에 부응하는 것인 양 호도하는 것은 금물이다. "부득불 할 일"에도 격이라는 게 있다. 외형의 유사성을 담보로 본질의 현저한 이질성을 묵살하는 무리들의 억견은 사절이다.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그럴싸한 모양새가 아니라 바울의 신앙과 삶 전체가 실린 부득불의 경지가 지금도 곳곳의 교회에서 뜨겁게 재연되길 진심으로 고대한다. 

2015년 2월 11일 수요일

인자와 잔인의 역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잠11:17)

인자함의 직접적인 수혜자는 바로 자신이다. 잔인함의 직접적인 피해자도 바로 자신이다. 인자함과 잔인함은 외부로 발산되기 이전에 이미 자신에게 먼저 작용한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유익하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만든다. 타인의 유익과 행복이 싫어서 인자함을 접고 잔인함을 선택하는 우매자가 있다. 타인에게 위협이나 손실을 가하기 이전에 자신의 영혼이 먼저 잔인함의 희생물로 내몰린다. 참으로 자해적인 우매자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래서 영혼을 관리하고 윤택하게 하는 일이 막막하고 난해하다. 그러나 지혜자는 인자를 영혼의 관리자로 지명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인자한 사람이다. 그런 마음의 소유자는 자신의 영혼을 유익하게 만든다는 거다. 반대로 타인을 겁박하고 위협하고 매몰차게 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학대하는 사람이며 그의 몸도 해로움에 내던지는 자라고 꼬집는다. 통찰력이 깊고 예리하다.

이로움과 해로움이 구현되는 방식이 참으로 흥미롭다. 이는 자신을 유익과 해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지 않고 타인을 유익하게 하고 윤택하게 해야 비로소 자신의 영혼을 이롭게 하는 방식이며 타인을 해롭게 하고 위협하면 그 위협과 해로움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되 더불어 살도록 지으셨고 더불어 살아가되 상대방의 유익이 나의 유익이 되게 하고 상대방의 해가 나에게도 해가 되는 방식이다.

지혜자의 이 금언은 산상에서 전하신 예수님의 복 개념과도 상통한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 혹은 인자한 자에게는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는 그가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 하시었다. 이는 타인에게 인자와 긍휼과 자비를 베풀면 그것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복이 된다는 이야기다. 나아가 타인의 복과 자신의 복이 동시적인 현상임을 의미한다. 타인을 대하는 것은 자신을 대하는 것과 동일하다. 자기 양심보다 타인의 양심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이 받고 싶은 것으로 타인을 먼저 대접하는 것이 기독교 진리의 황금률인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에게 사랑과 공의와 위로와 평안이 임하기를 원한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동일한 것을 타인에게 대접하면 된다. 물질의 계량적인 손익을 기준으로 이 원리를 판단하지 마시라. 우리에게 진정한 유익을 제공하는 것은 땅에 썩어 없어지는 것들보다 하나님의 속성 혹은 성품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 안에 머물고 발산되는 유익은 이 세상의 물량적인 척도로는 가늠되지 아니한다. 인자한 자가 받는 영혼의 이로움은 우리의 영혼에 이질적인 어떤 물질의 증감이 좌우하지 못한다. 진정한 이로움은 우리가 인자할 때 신적인 속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인자한 자들의 중다한 출현으로 하나님의 향기로운 성품이 진동하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고대하게 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