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8일 토요일

미련하지 않으려면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다 (잠28:26)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말씀이다.

단호하고 확고하다.
자기의 마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마음은 모든 정신적인 활동의 중추이다.
나의 기호와 생각과 가치와 판단을 신뢰하지 마시라.
힘써 거절하고 치열하게 내려놓는 연습에 매진하지 않으면
마음은 막강한 미련함 발산을 한 순간도 멈추지 아니한다.

자기부인,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십자가의 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를 위한 최고의 조언이다.
최고의 선물이 주어지는 일은
늘 나의 가장 은밀하고 본질적인 부분이
포기되는 방식을 취한다.

어떤 식으로든 자기를 향하는 자는 미련하다.
인간의 근원적인 부패상이 자기를 향하는 것이라던
어거스틴 통찰의 깊이는 역사 전체를 관통할 정도다.
타인의 양심을 따라 행하라는 말,
사랑을 따라 모든 것을 구하라는 말,
자기를 향하지 않는 최고급 비법이다.

성경은 아무리 봐도 우리를 위해 기록된 책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그렇게도 집요하게 지향한다.
이 두 가지가 절묘하게 맞물려 있다.
하나님과 우리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 지식의 총화라던
칼빈의 통찰이 수 세기동안 번뜩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련"만 생각해도 쉽게 확인된다...

LA 강좌길을 떠난다

오늘은 LA에 소재한 국제신학대학원(ITS)으로 출발한다. 최근에 저술한 책을 가지고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서론을 그곳에 계신 분들과 5일간 나누려고. 먼저 귀한 분들과의 만남이 설레인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향연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가 궁금하다. 신학의 기본기에 대해 깊이 상고하는 시간이길 소망한다. 초청해 주신 Jae Young Kim 교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2014년 6월 27일 금요일

미련함을 생각한다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다 (잠26:1)

성경은 미련함에 적잖은 관심을 보인다.

1) 무엇보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긴다.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보다 미련한 자는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성을 표상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들 중의 하나다. 참으로 중차대한 문제를 고작 껌 수준으로 여기는 정신의 소유자를 미련한 자라고 성경은 규정한다.

2) 성경은 미련한 자를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는 자라고 묘사한다. 황금만능 사상 혹은 화폐가치 기준의 거래를 삶의 원리로 간주하고 그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미련하다. 지혜는 땅에서 어떤 대체물이 있어서 거래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미련한 자는 그런 걸 가리지 아니한다. 성경은 이것을 무지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미련한 자는 무지하다.

3) 미련한 자는 분노의 즉각적인 표출에 민첩하다. 눈빛과 표정과 언어를 분노의 출구로 마구 동원한다. 이는 억울한 수욕도 참아내는 지혜로운 자와 사뭇 대조된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분노의 노예는 미련하다. 자신의 분노가 정당한 것임을 보이려고 공평과 자유 개념을 급히 소환하는 사람은 더더욱 미련하다.

4) 미련한 자는 자기의 길이 늘 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의 길과 다르면 모두 그르다는 판단력에 늘상 포박되기 때문에 미련하다. 자기의 생각과 다른 것들은 틀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우려고 하지를 아니한다. 지성과 인격의 지평이 확대되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유아독존 가치관의 노예이기 때문에 미련하다.

5)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다고 한다. 낙이기에 행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 지혜를 낙으로 삼는 명철한 자와는 다르다. 나에게 즐거운 것을 했을 뿐인데 그게 늘 행악이다. 행악인데 그것이 즐거운 체질의 소유자는 미련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면밀히 관찰해 보면 행악으로 분류되는 것들이 적지 아니하다. 그것도 모르고 낙의 방편으로 행악과 동거하는 자, 심히 미련하다. 이렇게 미련한 자의 아비, 살아갈 낙이 박탈된다.

6)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적당히 감추지만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떠벌린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것 자체를 삶의 낙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 가릴 건 가리고 공유할 건 공유해야 하는데, 그 경계선에 질서와 안전감이 없다. 가려야 할 것을 마구 노출한다. 그게 미련함인 줄도 모르고.

7)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에 군침을 흘린단다. 지혜자는 현명한 자의 마음이 지식에 갈증을 느끼고 추구하는 것과 미련한 자의 입맛을 대조한다. 미련한 것이 땅기면 자신에게 미련함이 있다는 표증인데 그것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취하기에 급급해 하며 달려든다. 내가 무엇에 갈증을 느끼고 있느냐가 나의 상태를 고발한다.

8) 미련한 자는 명철이 아니라 자기의 의사 표출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단다. 미련한 자는 신중하게 듣고 깊이 생각하여 올바른 판단에 도달하는 것보다 자기의사 표출에 요란한 조급증을 보인다. 상대방의 입장에는 관심도 없고 무례한 말 자르기도 불사한다.

9) 미련한 자는 눈을 땅끝에 둔다고 한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혜를 가까운 곳에서 찾지만 미련한 자는 지혜가 멀리 있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먼 곳에 던진다. 지혜는 길거리에 시장에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존재의 목청을 높이고 있는데도 거기에서 찾지를 아니하고 아득히 먼 곳에서 지혜를 추구한다. 사실 지혜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있다기보다 명철한 자 앞에서는 언제든지 어디서든 발견되는 것이다. 미련한 자의 눈은 어디에 머문다 할지라도 지혜를 포착하지 못한다.

10) 미련함은 대단히 완고하다. 성경은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빻아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진단을 내린다. 미련한 자의 소유는 미련한 것뿐이고 미련한 것만 말하고 개가 토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듯 미련한 행위를 지칠 줄 모르고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련한 자와의 마주침은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는 것보다 피해야 할 일이란다.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합당하지 아니하다. 이는 미련한 자에게 차별대우 하라는 게 아니다. 미련한 자 자신이 영예에서 멀리 동떨어져 있어서다. 영예를 기뻐하지 않고 즐기지도 않고 구하지도 아니하고 심지어 영예가 뭔지도 모르기 때문에 정당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미련함은 땅에서는 도무지 해답이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비록 "말이 조급한 사람"보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보다 미련한 사람에게 더 큰 희망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으로 상대화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미련의 해결은 미련한 자가 소멸되는 것에서 찾아진다. 당연히 해결책은 그리스도 뿐이라고 생각한다. 미련함과 무관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모두에게 해법의 필요성은 절박하다. 물론 멸망할 자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도 미련하게 보인다는 절망이 여전히 미해결로 남지말 말이다. 

2014년 6월 25일 수요일

율법의 준거성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 (롬5:13)

인간의 정체성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인간 안에는 어떠한 객관적 기준도 없다는 의미를
나는 이 구절에서 유추한다.

율법 이전에도 아담의 시대에서 모세까지
그 죄와 사망이 온 세상에 군림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율법수여 전후를 기준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율법 이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를 아니했다
율법이 더해진 것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다
죄의 물리적인 분량의 추가를 위함이 아니었다.
죄를 깨닫게 하려 함이었다.
율법의 빛이 비추기 이전에는
죄를 죄로 깨닫지를 못했다는 이야기다.
죄를 모르면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다.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는 온 인류가 그러했다.

이성의 빛으로는 죄를 죄로 알지를 못한다
이는 이성이 죄를 감지할 만큼 예리하지 못해서다
죄 자체를 인식하는 것도,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도,
죄 아닌 것과 죄를 안짓는 것도,
그 기준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것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진리의 빛이 비추어진 은혜의 결과이다.
전도를 해도 죄문제에 거부감을 표하는 현상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죄를 깨닫고 시인하고 회개하는 것이 이상하다.
그게 기적이요 은혜이다.

무엇이 죄인지, 어떻게 죄를 피하는지,
선행은 무엇인지, 어떻게 행하는지,
사람의 내면에는 인지와 판별의 기준이 없다.
그 기준은 율법의 빛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율법의 이런 기능은 중생 이후에도 유효하다.

한병수의 설교관

1. 설교자는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하여 그의 말씀이라 한다면 교훈이든 명령이든 책망이든 어떤 것이든지 송이꿀과 같이 달콤하게 여기는 자여야만 한다. 그러면 최상의 친밀감 속에서만 읽어지는 그분의 깊고 오묘한 뜻이 성경의 갈피마다 쏟아지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진리의 부요함에 흠뻑 잠기지 않은 설교는 천사 수준의 아름다운 언사와 어법으로 전달한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니다. 설교도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할 항목이다.

2.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성경과 만물을 주셨지만 믿음의 선배들과 그들이 살면서 얻은 깨달음의 기록들도 남기셨다. 모든 역사의 모든 유력한 믿음의 사람들을 샅샅이 털어서 진리의 조각을 수집하고 체화해야 한다. 여기에는 성실함이 요구된다.

3. 그 진리의 조각을 단순히 한 인간이나 어떤 사건의 산물로 아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모든 진리의 조각은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고 인간의 소유물일 수가 없다. 당연히 주님께로 소급하지 않고 인간문맥 안에서 구현된 정도의 의미에 머무르면 인간을 배끼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4. 주석도 읽고, 교의학도 읽고, 고백서도 읽고, 신조나 공의회 공문서도 읽고, 에세이도 읽고, 사전류도 참조하고, 서신도 보고, 설교문도 읽고, 신문이나 매거진도 읽고, 고전도 읽고, 시도 읽고, 역사서도 읽고, 소설도 읽되 그것에 휘둘리지 말고 진리가 드러나는 수단과 자료로 삼으시라. 

5. 설교자의 규격화에 반대한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걸맞은 진리의 아름다운 조각을 맡기신다. 그것을 잘 보존하고 드러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설교자의 인격과 성향과 공부와 방식을 고정된 격자에 구겨 넣는다면 각각의 조각이 가지는 진리의 고유성이 훼손될 수 있어서다.

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위엄있고 품위있고 고결하고 고귀하고 강력하고 향기롭고 유익하고 거룩하고 값진 진리를 굳이 누더기 언어로 옷입혀야 하겠는가! 할수만 있다면 진리의 표상에 걸맞은 가장 명료하고 아름답고 세련되고 적실한 표현을 찾고 습득하되 문학도가 될 각오로 모든 문헌들을 섭렵하는 노력까지 기울어야 한다. 거짓을 진리처럼 전달하는 것보다 진리를 마치 거짓인 것처럼 전달하는 것의 문제가 더 치명적인 것이라는 점은 면역학도 지지하는 바다. 

7. 일상의 중요성은 설교의 준비에도 빠져서는 아니되는 항목이다. 인간의 삶을 나 자신이 희로애락 빈부귀천 속에 뛰어들어 일체의 적응력을 터득하는 방식으로 읽어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라면 소통의 수단으로 확보하라. 그런데 일상보다 폭넓은 공유의 본좌가 또 있을까! 일상은 설교에 소통의 비중이 큰 만큼이나 중요하다. 

8. 무수히 많은 설교자의 사례들을 경험하고 그들의 다양한 장점들을 배우고 익히시라. 몇 가지 장점들을 일별해 본다면, 1) 표현이 탁월한 설교자, 2) 언어의 선택이 뛰어난 설교자, 3) 목소리의 높낮이 조절에 달인인 설교자, 4) 완급과 강약과 고조의 배합에 능숙한 설교자, 5) 메시지의 경중과 말의 속도를 절묘하게 조절하는 설교자, 6) 목소리의 음색이 좋은 설교자, 7) 적절한 모션을 취하는 설교자, 8) 질의응답 형식으로 적절히 청중과 소통하는 설교자, 9) 표정이 편하고 자연스런 설교자, 10) 청중과 눈을 맞추면서 전인격적 소통을 늘 시도하는 설교자, 11) 인격과 삶이 메시지와 다르지 않아서 당당한 설교자, 12) 내가 아니라 진리가 드러날 수 있도록 최대한 자신을 가리는 설교자, 13) 협박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주장하는 어투가 아니라 설득하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말투로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설교자, 14) 논문발표 수준으로 원고에 코를 박고 낭독하지 않고 청중의 눈동자를 응시하는 설교자 등이겠다. 

9. 우리는 설교의 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라. 교부들을 비롯하여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설교 선배들의 본을 맹렬히 카피하되 나의 고유한 버전으로 정착될 때까지 진전하라. 물론 설교의 내용일 경우에는 출처를 밝히면서. 카피는 죄가 아니다. 오히려 학습의 최상급 원리이다.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온전한 스승 배끼기는 제자가 도달해야 할 학습의 정상이다. 

10. 카피의 대상을 선택하는 기준을 높이라. 다시 말하지만 카피는 죄가 아니다. 우리는 일평생 진리를 카피하고 사람을 카피하고 자연을 카피하며 살아간다. 카피 자체보다 근본적인 설교자의 관심은 카피의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이다. 기준이 높을수록 카피할 사람이나 대상이 점점 없어진다. 결국 하나님의 진리 자체에 올인하게 된다. 그래서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카피하게 되는 경지까지 나아간다. 주님의 사고방식, 표현방식, 행동양식 일체를 모방의 대상으로 삼고,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나의 사고와 표현과 행동에 고스란히 옮긴다. 그분을 카피하면 할수록 모든 영역에서 그분만이 드러난다.  

11. 설교는 월요일 준비해서 토요일 끝나는 단기간의 작업이 아니다. 일평생 증인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삶 전체가 설교 준비이며 설교 자체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 나는 더 이상 고유한 내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선진들의 온갖 영향들이 뒤섞인 조합의 결정체다. 내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흠모하고 본받고 동행하고 동역하고 동거해 왔느냐가 완곡한 의미에서 이미 설교였고 설교의 준비였다. 

12. 당연히 삶의 모든 요소가 설교의 준비이며 설교 자체이다. 지극히 사소한 요소라도 그러하다. 설겆이도, 아이들과 노는 것도, 심지어 먹고 마시고 입고 겆고 앉고 눕고 자고 숨쉬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에 설교와 무관할 수 없는 것들이다. 

13. 증인과 설교자는 동의어다.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살든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증인의 신분으로 살아가며 모든 것들이 설교의 입술을 벌리는 행위이다. 테크닉도 물론 무시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땅끝까지 이르러 남녀노소 동서고금 불문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산다는 사실을 한시도 망각하지 않는 자여야 탁월한 설교자다. 그렇지 아니한가!

피코 델라 미란돌라...

중세의 천재 철학자요 신학자인 Pico della Mirandola(1463-1494)의 명저 Oratio de hominis dignitate를 읽었다. 특별히 교양의 위엄과 천사들의 영광에 대한 논의가 인상적이었다. 피코는 천사들을 세 부류로 구분한다. 세라핌과 체루빔과 드론즈가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천사들의 서열, 상위층에 해당된다. 각각의 부류는 다른 미덕을 구현한다. 세라핌은 자애를, 체루빔은 지성을, 드론즈는 정의를 대표한다. 세라핌의 상태를 얻기 위해서는 창조자에 대한 사랑으로 타올라야 하고, 체루빔의 상태는 관조와 명상을 통해 얻어지며, 드론즈의 상태는 보다 하등한 존재를 다스림에 있어서의 공의를 통해 취득된다.

피코는 지식에의 추구를 강조했다. 철학을 통해 인간은 존재의 사슬에서 천사의 지위까지 상승하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지적인 능력의 활용을 통해 존재의 상위 사슬로 승격될 것이라는 사상은 인간만이 자유로운 의지를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근거한다. 지식을 추구함에 있어서 그는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위엄이 투영되는 현장으로 여겼다. 하여, 모든 피조물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탐구했다. 모든 지식의 발견을 위한 900개에 달하는 논제 생산의 배후에는 이런 일반계시 개념이 자리한다.

피코는 철학자가 되고자 했다. 그는 철학자를 땅에서의 피조물이 아니라 천상의 피조물로 여길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그가 보기에, 천사들의 서열 상위층에 속한 세 부류들의 어떠한 상태에도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다. 특별히 피코는 철학자가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했다. 이윤을 산출하는 용도에 대한 적합도에 근거하여 철학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철학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철학이 소수에 의해서만 배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라고 생각했다. 철학은 인류 전체에게 열린 학문이다. 이처럼 피코는 인간의 위엄과 자연의 계시와 철학의 가치와 인류의 공감을 강조하는 중세의 괜찮은 천재였다.

2014년 6월 24일 화요일

영혼을 지키시는 분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실까 (잠24:12)

주님의 관심사는 영혼이다.
영혼을 지키시는 자로서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신다.
이는 심오한 지식의 독보적 소유를 자랑함이 아니다.
주께서 주목하고 계신 것이 무엇임을 우리에게 알림이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우리도 옳은 앎과 삶에 들어간다.

영혼을 지키시는 분의 '지각'은
안구에 걸리는 물상들의 현란한 인과로 장악되지 아니한다.
물살이 만드는 파동에 몰입하지 않으시고
그 저변의 도도한 흐름을 친히 주장하고 아시는 분이시다.
영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런 분에게 노출되어 있다.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지 않고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않고서도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변명을 내뱉는 자들에게
주님은 마음의 무게를 다시고 영혼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이 아시는 분이라고 스스로를 밝히신다.

그리고는 행한대로 우리를 갚으시는 분이라고 천명한다.
허나 사람들의 행함은 영혼의 차원까지 이르지를 아니한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다. 
순종을 말씀에서 육신적 행위로의 이동으로 생각했다.
이는 주님 보시기에 마음이 개입되지 않은 헛된 행위였다.

지금도 영혼이 존중되는 행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보는 눈을 속이고 듣는 귀에 미끼를 던지는
가식과 연출 차원의 행위들로 충만하다.
군중은 그런 행위에 무의식적 장단을 맞추며 얼추 놀아난다.
이런 짭짤한 효험이 뒤따르니 기회만 되면 동원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든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든
모든 일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읽으시고 무게를 다신다.
영혼을 지키시는 분이기에 주안점이 다르시다.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 일체는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
마음과 영혼의 차원이 늘 고려된 삶이어야 한다.

오늘 주어진 하루치의 삶도
하나님의 안목으로 조율하고 시작하자.
썩어 없어지는 몸뚱이의 향연으로 그치지 않도록,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께 노출되어 있음을 의식하며,
오늘은 그렇게 살아가자. 내일도 모레도.

2014년 6월 23일 월요일

나의 기뻐하는 바는?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암4:5)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기쁨에 적응되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아모스의 입술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기뻐하는 바라고 언급하신 항목들을 보면 은밀한 치부가 들킨 듯 얼굴에 뜨거운 수치심이 확 오릅니다. 1)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2)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3)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4) 삼일마다 너희의 십일조를 드리며, 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6)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해라.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말씀을 내던지는 죄를 저질러도 아침마다 희생을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수은제와 낙헌제를 드리기만 하면 된다는 인간의 심연에 깔린 무례한 발상을 따라 꼬집으신 하나님의 말입니다. 수은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화목과 평화를 상징하는 제사이고 낙헌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자발적인 마음의 제사를 뜻합니다.

이러한 구약적인 반어법은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그만이란 신약적인 발상의 무례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에게 외친 선지자의 불호령은 우리의 죄성도 겨냥한 것입니다. 지금도 불의로 번 돈이라 할지라도 십일조를 내면 괜찮다며 불법적인 면죄부를 스스로 발부하는 작태가 가관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을 회개나 하고 몇 푼만 투자하면 약발이 적당히 먹히고 달래지는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모스에 기록된 이스라엘 자손들의 기뻐하던 항목들은 지금도 교회 가운데서 상한가를 구가하고 있는 듯합니다. 적잖은 분들이 죄를 실컷 저지르고 죄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땅에서의 음흉한 혜택들과 결탁할 채로 예배당 앞자리에 보이도록 착석하고 고액의 헌금으로 교회의 향방을 주무르고 회개의 겉모양을 갖추고 때때로 주차안내 겸손행보 연출까지 곁들이며 목회자나 성도의 적당한 인지도를 확보하면 안심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기를 그것도 대단한 경건의 소유자인 양 중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더러 하나님은 죄짓고 제사와 십일조로 무마하는 종교적 가식의 길을 갈 데까지 가보라고 하십니다. 이런 어법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런 표현에는 죄의 심각성과 진노의 엄중함이 동시에 담겨 있는 탓입니다. 체면이나 인정 때문에 서로 괜찮다며 끈적한 동지애를 발휘할 때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세상에서 지적되는 수준의 기독교 불경에 대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로 보시는 엄밀한 기준에 입각한 처신의 긴급성을 느껴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교회가 기뻐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를 정직하게 묻고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아니 우리 개개인이 성경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체질과 기호를 가지고 있는데도 여전히 편들어 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의리인 것처럼 지인들의 접대성 두둔을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를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체질과 기호부터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쁜 칭찬과 두둔은 기대도 말고 살포도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서운할 수 있고 관계에 적신호가 올 수도 있겠지만 교회에는 생명력이 더해지고 개인은 경건이 연습되고 복음의 증거는 탄력을 받습니다.

자리만 위태롭지 않아지고 관계성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경건도 헌 신짝처럼 내던지는 꼴불견이 최소한 나에게는 연출되는 일이 없도록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에 민첩하면 참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불쾌할 쓴소리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3:1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솔로몬 성전 미문에서 평소처럼 구걸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대는 고작해야 동전 몇 닢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평소처럼 성전을 출입하던 베드로와 요한의 '우리를 보라'는 심상치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에겐 이전보다 괜찮은 무언가가 주어질 것이라는 암시였다. 하여 설레이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상을 뒤엎고 "은가 금은 내게 없다"는 금전적인 복지에 대한 기대감을 일거에 묵살하는 빈털터리 입장만 밝히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멘트는 더더욱 가관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란다. 앉은뱅이 평생에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걷는다는 것은 늘 그림의 떡이었다. 평소의 바램이 아니었다.

그런데 걷기도 하고 뛰기까지 했다. 구하던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순식간에 궁극적인 필요가 채워졌다. 구하던 것을 더 이상 구하지 않아도 되도록 궁극적인 해결책이 주어졌다. 믿어지지 않았다. 모든 백성들도 크게 놀랐다. 모두가 범상치 않은 눈빛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다. 신령한 기운의 주인공을 교주로 떠받들 기세였다.

이에 베드로가 저항의 입술을 열었다. 이 일을 놀랍게 여기지 말란다. 특정한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이 아니니까 자신들을 주목하지 말란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이 사람을 온전하게 했단다. 기적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능으로 돌린다. 처신이 정확했다.

기적을 일으킨 사도들의 처신은 모든 시대의 범례이다. 기적이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권능으로 일어난 것이다. 어떤 목회자나 선교사나 신학자나 장로나 집사의 개인적인 권능과 경건에서 비롯되지 아니했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 합바지 주장이나 어거지가 아니다. 모든 경우에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적용되는 원리이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나 기도나 찬양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이 발생하면 그 공로나 원인을 자신의 개인적인 경건과 권능에 돌리며 사람들의 영광을 있는대로 취하고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교주 수준의 목회자가 곳곳에서 목격된다. 겉모양이 과하지 않으면서 은밀한 실속을 챙기는 분들도 동일하게 교활하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러질 아니했다. 한 자락의 영광을 갈취하는 것도 끔찍한 저주처럼 경계했다. 바울과 바나바도 그러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자 자신들을 헤르메스 및 제우스의 육체적 현시로 간주하는 무리를 향해 격렬한 거부의 반응을 보였다. 옷을 갈기갈기 찢어 몸뚱이를 보이며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임을 역설했다.

혹 설교를 잘 한다면, 기도에 능력이 있다면, 찬양을 잘 드린다면, 겸손과 온유가 몸에 배였다면, 존영과 위엄이 있다면, 기적의 통로가 되었다면 무언가 타인과는 다른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인 양 간교하게 이득의 방편으로 잽사게 돌려서는 아니된다. 오히려 다른 모든 사람들과 성정이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보여주는 사도적 처신이 요청된다.

교회의 사이즈와 무관하게 성공과 출세와 자랑에 헐떡이는 욕망의 본질은 동일하다. 그러나 대형교회 경우에는 그런 욕망의 외면화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돈도 챙기고 명예도 챙기고 존경도 챙기고 아부도 챙기고 권력도 챙기고 뇌물도 챙긴다.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닥치는 대로 삼킨다. 약간의 체면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듯하지만 고도의 은신술을 구사하여 사람들의 눈을 가릴 뿐이다.

개인의 권능과 경건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을 이익의 방편으로 삼는다는 게 문제라는 이야기다.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그리스도 예수께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린다는 게 늘상 교회의 치명적인 문제였다. 모든 시대에 그러했다. 지금도 다르지가 않다. 이는 유명세를 경험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가 경계해야 할 문제이다.

어떠한 이적과 기사도 개인의 권능과 경건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 의식의 손아귀로 목회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거머쥐고 있어야 할 사도들의 교훈이다. 아니 죽을 때까지다.

2014년 6월 22일 일요일

외모와 중심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16:7)

외모와 중심의 구분은 쉽지도 않고 간단한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중심이나 외모라는 것은 객관적인 부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구분은 사람의 몫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게 중심이고 인간이 보는 게 외모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런 논리에 입각해서 보자면,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보는 게 중심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목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모든 관찰이 외모를 보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주목한 엘리압은 품행도 방정하고 용모도 준수하고 키도 훤칠한 지도자적 자질을 골고루 갖춘 자였고 주님께서 주목하신 다윗도 인상이 좋았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관찰되는 모습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고작해야 오십보 백보 혹은 도토리 키재기일 것입니다. 중심과 외모는 사람들의 눈으로 식별되는 구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다"는 구절이 중심과 외모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하는 듯합니다.

이 구절에 근거하여 저는 하나님의 안목이 중심이고 사람의 안목이 외모라는 구분을 지지하는 바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안목은 그분의 선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의 인간적인 눈길이 머문 인물들에 대해 하나님은 "내가 택하지 않는 자"라고 잘라서 말합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뜻과 정하심을 모른다면 누구도 중심을 보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사람을 보든 사물을 보든 역사를 보든 외모에 홀리는 일들이 즐비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사이의 격차는 하늘과 땅처럼 물리적인 잣대로는 측량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막둥이 다윗의 은밀한 중심보다 장대한 엘리압의 준수한 외모에 더 끌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시선이 중심을 관통하지 못하고 고작 외모만 더듬어도 문제인 줄도 모르고 게의치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중심을 보고 하나님은 외모를 보신다는 역발상 불경도 서슴지를 않습니다.

중심을 주목하는 문화가 가정과 교회과 사회에 정착되는 것은 내가 보는 자로 머무는 한 결코 구현될 수 없습니다. 신적인 안목의 지속적인 수혈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입니다. 성경으로 우리의 안구가 거듭나지 않으면 외모를 주목하는 악습은 결코 근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이 안내하는 그 만큼 길게 보고 높게 보고 깊게 보고 넓게 보는 중심 바라보기 문화에 동역의 어깨를 모으고 싶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과 같습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겠지만 눈이 나쁘면 온 몸에 무서운 캄캄함이 드리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목하는 그것을 주목하는 자가 있다면 그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공동체 전체가 밝아질 것입니다. 이처럼 안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우리의 안목을 유혹하는 현란한 외모를 과감히 외면하고 주님께서 보시는 그 중심을 함께 바라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14년 6월 21일 토요일

성화의 영광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훨씬 더 (롬5:9)

구원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괜찮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값없이" 주셨다는 말은 구원이 우리에게 어떠한 근거를 두지 않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행위라는 말입니다. 즉 구원의 댓가를 지불한 적이 없는데도 주어졌기 때문에 "값없이"고, 구원의 댓가가 화폐가치 개념으로 측량될 수 없도록 무한해서 "값없이"인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것은 죄의 해결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일 뿐입니다. 온 세상에 죄가 관영했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온 인류가 홍수에 휩쓸리는 집단적인 사망이 있었으나 죄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여전히 악함을 보시고도 물로써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막강한 삯이 요구되는 죄문제의 해결은 인류의 대규모 죽음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에서의 구원이 이 세상의 어떤 저울로도 계량될 수 없도록 놀랍고도 무한한 은혜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원에서 보여진 은혜의 크기는 구원을 가능케 한 희생물의 무게로 가늠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즉 완전한 하나님와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무게만큼 구원은 그 값이 측량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여지고 입증된 하나님의 사랑이 갖는 크기도 그리스도 예수의 크기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의 크기는 우리가 죄인과 원수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 받은 은혜의 크기일 뿐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는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훨씬 더" 크고 놀라운 구원과 기쁨이 주어질 것이라는 바울 특유의 점강법이 나옵니다. 화목의 자녀가 된 우리가 누리도록 초대받은 구원의 영광은 죄인과 원수의 신분에서 받은 구원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크다는 말입니다.

성화는 드디어 좁고 협착한 길로 운명지어 진 고난과 슬픔의 길이 아닙니다. 중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감격을 누리도록 주어진 영광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길을 걸어가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런 영광의 길을 마다하고 사람들의 영광에 침 흘리는 모습이 간간이 보입니다. 추해 보입니다. 주께서 가기를 원하시는 길과 이르기를 원하시는 영광을 멸시하고 사람들의 탐심이 쏠리는 곳에 성도의 발걸음도 운집해 있습니다.

오늘은 성화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이고 싶습니다. 

2014년 6월 19일 목요일

칼빈의 기본기

"주여, 나의 심장을 기꺼이 진실되게 당신께 드립니다"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주여, 나의 심장을 당신에게 제물로 드립니다"
(Cor meum quasi immolatum tibi offero, Domine)

칼빈은 자신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주님께 드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내것이 아니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소유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삶의 "어떻게"를 좌우한다. 나를 나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인의 상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지 아니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 성도의 삶이 증인의 삶이라면 삶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성도가 아닐지로 모른다는 것은 합리적인 의문이다.

2014년 6월 18일 수요일

사랑의 성경 해석학

사랑의 성경 해석학 (예수가족 교회설립 15주년 기념 세미나 발표원고)

성경을 올바르게 읽고 묵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독서의 주체와 대상을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주체와 대상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옵니다. 성경은 독자가 고려된 계시의 기록이기 때문에 묵상에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도 필요하고 그런 필요성에 걸맞은 주체의 준비도 뒤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두 가지의 중요성이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39-41).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이끄사 영생을 주시려고 기록한 책입니다. 위의 본문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목적이 영생을 취득하는 것에 있으며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오는 것이 마땅한데 그에게로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그들이 성경을 올바르게 읽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원인에 대해 주님은 사람들이 사람의 영광을 취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안에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묵상의 대상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했습니다. 성경은 정보를 전달하는 문자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영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주체의 태도는 성경의 이러한 영적 속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묵상은 성경의 인문학적 벗기기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텍스트의 본질은 기호이기 때문에 기호 자체를 인식하는 작업이 필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최종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호가 가리키는 실체에 이르러야 비로소 해석하는 것입니다. 기호의 실체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질 당시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와 떨림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묵상의 주체인 인간의 성경 접근법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는 완곡한 뉘앙스의 언급을 하십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려는 성경 해석학은 우리를 영생과 무관한 길로 이끕니다. 거기에는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로 나아가는 해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라는 성경의 이정표를 무시하고 사람의 영광에 허덕이는 인간적인 해석학에 만족의 빈궁한 초막을 짓게 만듭니다. 바울이 분명히 지적한 것처럼, 죄의 심각성은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결단코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어떠한 행위와 상태도 죄에 농락을 당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읽기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전까지는 성경을 하나도 읽지 않은 것입니다. 죄의 그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면 우리의 성경읽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성경의 어떠한 구절을 읽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성경 묵상법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독자에게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으려고 자신에게 나아오지 않는 자들의 문제점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부재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을 기록한 요한은 다른 곳에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안다”(요일4:7)는 명료한 사실을 밝힙니다. 엄밀한 과학적 접근법이 요구되는 듯한 성경 해석학과 하나님의 사랑은 언뜻 보기에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해석학은 사랑과 은밀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해석은 비인격적 문자 해부학이 아닙니다. 저자와 독자 사이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독서는 저자의 마음을 읽는 행위이며 묵상은 저자의 뜻을 궁구하는 일이기에 만약 관계가 틀어져 있다면 저자의 마음은 읽어질 수 없으며 저자의 뜻은 틀어진 만큼 왜곡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문자와 텍스트는 기호로서 저자의 마음과 뜻을 운반하는 수레일 뿐입니다. 일단 생각이 텍스트화 되면 저자가 소외되고 해석의 열쇠는 저자를 떠나 독자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만다는 현대 해석학의 편만한 주장은 텍스트나 문자 자체의 가치를 지나치게 과장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음의 언어가 활자의 옷을 입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저자의 것이며 저자와 분리되는 순간 무의미해 질 수밖에 없고 의미의 무정부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텍스트와 저자의 분리는 해석학에 치명적인 변질과 왜곡을 낳습니다.

성경의 해석이 독자인 인간에게 맡겨져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끔찍하고 두려운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인간은 비록 만물의 영장이고 피조물 중에 가장 높은 존엄성을 가졌지만 하나님을 떠나고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피조물이 타락할 수 있는 상태의 마지막 극한까지 곤두박질 쳤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인간의 중심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상태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상태는 단순한 무의식적 실수나 비의도적 오류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정신활동 및 물리적인 행위의 중추요 총화라 할 마음이 전적인 부패의 늪에 깊숙이 잠겨 있습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거짓과 부패의 절망적인 상태를 깨닫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진술이 맞다면, 이러한 상태의 마음을 소유한 인간의 손아귀에 해석의 열쇠가 맡겨져 있다는 것보다 더 끔찍하고 아찔하고 불합리한 상황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극히 거짓되고 극도로 부패한 인간은 해석에 관여하지 않을수록 보다 정확하고 온전한 해석이 담보될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의 거짓과 부패가 해석에 관영하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방법은 자기를 부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도를 닦아서 무소유, 무아, 무념, 무욕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은 진공의 상태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무언가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그릇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탓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부인 방식으로 자신을 비우고 지우고 부정하고 무시하는 소극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채우는 방법을 취합니다. 이는 마치 어두움은 빛의 채움으로 해결되고 거짓은 정직의 충만으로 해결되고 더러움은 거룩의 충만으로 해결되고 불의는 공의의 충만으로 해결되고 악한 생각은 선한 생각의 충만으로 해결되는 식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이 요청하는 자기부인 방법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로 채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의 충만이 바로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명시적인 교회의 정의는 성경에 없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충만할 때에 나 자신은 내 안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나 자신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과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기준과 주님의 가치와 주님의 기호와 주님의 방향과 주님의 목적이 내 안에 채워질 때, 나의 가치관도 나의 기호도 나의 판단도 나의 기준도 모두 부인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주께서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살지라도 이제는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는 내 안에서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 삶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삶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 가능성은 사랑에 의해서만 확보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내 안에 그대가 혹은 그이가 있고 나는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거기에서 어떤 행위가 산출되는 경우를 우리는 ‘사랑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신비로운 상태에 처하게 만듭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나 자신이 그의 존재로 채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고 그가 나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나의 시선 머물고 그가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도 결박되며 그의 눈물이 흐르는 곳으로 나의 발이 향하는 상태에 빠집니다. 억지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나의 모든 것들이 마비되고 박탈되고 삭제되는 듯하지만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자율성 속에서 자기가 부인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로운 사랑으로 인해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인간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채워져 부인될 때 성경 해석학은 비로소 그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각종 은사들을 구할 때에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했습니다. 은사들 중에는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도 있습니다. 사랑의 방식이 아니면 건강한 지혜와 올바른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는 성경을 이해할 때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교부들의 성경 해석학 대표격에 해당되는 어거스틴은 성경의 독자에게 삼위일체 하나님만 향유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해석학을 권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바울이 가르쳐 준 성경 해석학을 종합한 것입니다. 즉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상고하는 자들이 생명 자체에신 자신에게 나아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 사랑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예수님의 지적과 같은 맥락에서 지식은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향유 혹은 사랑이 성경 해석자의 으뜸가는 준비라고 본 어거스틴 해석학에 종합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해석학과 관련하여 믿음의 인식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세상의 근원을 아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보이는 모든 것들의 비가시적 근원은 오직 믿음으로 안다고 바울은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와 같습니다. 보는 눈과 듣는 귀와 마음의 생각으로 얻는 깨달음은 결코 보지 못하는 것들에 스스로 이르지를 못합니다. 주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눈으로 관찰되지 않고 귀로도 들리지 않으며 논리적인 인과의 사슬을 동원하여 마음의 생각으로 소급해도 도무지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영적인 도약이 없이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앎은 과연 기독교 인식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도 해석학의 종점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바울 자신의 입술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을 기술한 자신의 서신에서 산을 옮길 정도의 막강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아는 것도 부분적인 앎일 뿐이며 마치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한 수준의 지식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의 고백처럼 우리의 주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막5:7)라고 고백한 귀신들도 두려움과 떨림의 반응을 일으키는 정도의 앎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란 결론을 내리면서 사랑에 의해 인식의 원리인 믿음도 상대화될 수 있음을 보입니다. 사실 사랑은 믿음과 소망을 포괄하고 있으며 믿음이나 소망보다 개념의 지경이 훨씬 넓습니다. 즉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려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전13:7)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지식과 바라는 소망의 실상과 관계되는 것이지만, 사랑은 모든 보이는 것들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단계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바라고 믿는 모든 것과의 합일까지 이루는 것입니다. 다 알지는 못해도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사랑의 띠입니다. 이는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한다”(요일4:16)고 진술한 요한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히포의 주교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단 한 글자도 읽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랑은 성경 해석학의 처음과 나중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성경 해석학이 하나님 사랑에서 시작하여 하나님 사랑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로 보건대 해석은 정보의 생산이 아닙니다. 문자의 해부나 분석에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쌍방적인 사랑의 온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의 해석학은 성경의 해석이 인간에게 맡겨진 것이라는 주장을 결코 두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가 벗겨지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안하고의 여부에 좌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초래된 파생적인 사랑이지 인간이 사랑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현상이 아닙니다. 결국 사랑의 해석학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궁극적인 해석은 문자의 기계적인 분석이 아닙니다. 저자와 독자의 긴밀한 교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두 당사자의 가장 긴밀한 상태를 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밀어를 나눕니다. 밀어는 다른 이들이 해석할 수도 없고 깨달아 알 수도 없는 말입니다. 성경은 마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신적인 밀어와 같습니다. 성경은 원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해석될 수 없도록 기록된 연애편지 같은 것입니다. 자연의 책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영원한 능력은 결코 그 안에서 발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성경의 어떠한 구절도 우리에게 송이꿀의 당분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영혼에 달기가 송이꿀 이상으로 달았던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런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에도 합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사랑하면 읽힙니다. 사랑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그의 뜻을 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성경을 펼칠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결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다 할지라도 인문학적 독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 해석학은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머릿수 만큼이나 다양하고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도 그렇고, 자연도 그렇고, 역사도 그렇듯이 최적의 의미가 생산되는 적정의 차원이 어디에나 있습니다. 극거시 관점은 미세한 존재들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생략하기 쉽고 극미시 관찰로는 존재들과 사태들 간의 네트워크 차원에서 생산되는 의미와 가치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극미시와 극거시를 비롯하여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차원들이 다 존중되고 의미와 가치의 고유한 조각으로 참여하여 어떠한 해석의 가감도 일어나지 않고 통합되고 조화되는 적정선은 바로 하나님 사랑인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의 적정선이 고려된 책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보시기에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창조해 주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의 구현 차원에서 모든 역사를 통치하고 계시며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로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영생의 주 그리스도 예수께로 나아오길 원하셔서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성경인 것입니다. 창조자요 통치자요 구원자요 계시자인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와 계시와 구원은 이처럼 모두 사랑의 차원을 맴돌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어거스틴 해석학이 강조한 것처럼 자연이든 역사든 성경이든 단 한 줄도 읽어내려 갈 수가 없습니다.

인문학적 해석학에 머문다면 우리는 기껏해야 복음을 정보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전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문학적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에 이르는 해석학은 우리를 심비에 새긴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와 향기로 만듭니다. 즉 입술의 파장이 아니라 인격과 삶으로 빚어낸 성령의 열매로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이처럼 우리의 정체성과 상태도 바뀝니다. 성경을 사랑으로 읽고 해석해야 부작용도 없고 역기능도 없습니다.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성경을 읽으면 아무리 난해한 구절을 해석할 때에라도 최적의 의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고려되고 각 구절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다른 어떠한 구절도 훼손되지 않고 제거되지 않는 의미의 적정선에 이르는 유일한 해석도 사랑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희미하던 것이 밝아지고 애매한 것이 명료하게 되고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조화의 입맞춤을 하는 해석의 묘미도 사랑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성경의 종합적인 해석의 정수는 하나님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안에 하나님 사랑을 있었다면 영생을 얻으려고 그리스도 예수께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사랑의 부재 때문에 해석의 정수인 그리스도 예수께 나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2014년 6월 17일 화요일

사랑의 증인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되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롬5:8)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이유에 대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우리에게 익숙하고 선호되는 그런 삶으로는 진정한 사랑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이스라엘 역사는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으로 증명된 하나님의 짝사랑이 연출된 극장이다. 온 세상과 열방의 역사도 그런 사랑의 현장이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했다. 몇 가지의 잘못된 행실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의 죄는 바울의 지적처럼 본성의 부패 때문에 본질상의 문제였다. 그런데도 싹슬이 진멸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냥 없던 것으로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는 무언가가 희생으로 지불된 어떤 은혜와 사랑의 결과였다.

그러니 자연을 보나 인류의 역사를 보나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보나 나아가 오늘의 나 자신을 보나 지금의 교회를 보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증명은 단절되지 아니했다. 죄인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세상의 어설픈 저울로는 도무지 측량을 불허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런 사랑 입증의 증인이다. 그런 사랑의 입증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사랑할 자격이나 근거나 상태에 있지 아니한 죄인들, 그런 원수들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부르심 말이다. 그런 부르심에 충실할 때에 우리는 복음의 증인이다. 친분이 있고 아껴줄 근거의 소유자만 골라서 그의 탐욕스런 배를 불리고 불의를 편들고 편협을 두둔하는 그런 방식으로 산다면 복음의 정수를 훼손하는 인생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가까운 내 주변만이 아니라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나 자신과 가족과 기업과 국가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대상으로 한 증인의 삶이 요청된다. 그런데 교회의 모습과 나의 꼬라지는 그런 증인의 삶과 심히 동떨어져 있음을 목도한다. 마치 의로운 재판장인 양 외부의 어떤 원인을 발굴해서 적당한 희생양을 만들고 책임을 전가하는 꼬라지 말이다.

각 사람이 모두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경주하지 않으면 아무리 모든 사람의 감탄과 동의와 갈채를 확보한 최적의 희생양이 찾았다고 할지라도 문제의 본질은 흐려지고 실패의 심연만 깊어지게 한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상의 해답을 선지자들 및 사도들의 목청이 터져라고 외쳐왔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모든 시대와 상황에 열쇠였다. 지금도 그 열쇠를 자신의 삶으로 거머쥐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2014년 6월 16일 월요일

기부를 부탁한다

친구들이 구글도 긁어내지 못한 희귀 문서들의 무임금 디지털화 작업에 발벗고 나섰다. 중요한 문헌들을 찾아내고 촬영하고 간단한 개요를 제공하는 프로젝트 발족에 자금이 필요하야 원조의 불가피한 입술을 열었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PRDL 디렉터 Todd는 상당한 훈남이다. 그런데 바짝 달라붙은 헤어 스타일이 눈에 거슬린다. 어쩌면 불쌍히 보이려는 칸셉인지 모르겠다...ㅍ ㅎㅎㅎ 녀석...전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을 끼치려는 기획이다. 관심있는 독지가의 훈훈한 기부를 부탁 드린다. 과하지는 않게 가계에는 지정이 없을 정도로만!

Junius Institute Digitization

섭리의 노래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 5:3)

미시건 아침의 황홀함은 정말 남다르다.

이른 새벽인데 잠자리를 걷어차야 했다.
오늘도 창틈을 비집은 새들의 감미로운 파장으로
귀가 황홀했기 때문이다.

황홀해서 견디지 못하도록
새벽을 깨우고야 마는 조류의 기발한 설득에
교훈 한 조각이 반짝인다.

더딘 일처리의 급속한 만회를 위해
우리는 대체로 윽박과 독촉의 방식을 채택한다.
그러나 대체로 관계성이 희생된다.

올바른 섬김의 자세로서
베드로는 양 무리의 본보기가 되라고 권면한다.
이는 밖에서 협박의 주먹을 보이는 게 아니라
내면에 자발성을 형성하는 방식이다.

이는 예전에 베드로의 가슴을 움직였던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주님의 입술에서 나온 가르침의 사도적 해석이다.

섬김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적실하고 더 효과적인
부작용 제로의 처방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섬기면 섬길수록 향기가 진동하는 방식이다.
무신경한 목석의 굳은 마음도 움직이는 능력이다.
이는 주께서 늘 쓰시는 섭리의 방식이다.

주께서 일을 이루시는 방식은
언제나 나에게는 범례이고 이정표다.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도 벗어남이 없다.

새들의 목청이 밀어낸 것은
섭리의 노래였다.
신적인 섭리의 방식에 가락을 입힌 것이었다.

아하, 지혜는
주님의 섭리를 노래하는 새들의 가냘픈 입술에도
깃들어 있었구나.

2014년 6월 15일 일요일

미시건의 아침

미시건의 아침은 남다르다.
새들의 노래가 자명종을 대신한다.
청명한 하늘과 깨끗한 대기의
'굿'모닝 화음이 휘장처럼 은은하다.
조깅을 하며 그 아침을 흡입했다.

허나 이러한 아침의 낭만도 잠깐이다.
두살배기 조카의 꽤꼬리 음파와
앙증맞은 춤사위가 그런 아침마저 녹여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조카를 보니
밤새 준비된 최고급 아침도
하늘이 태양의 장막에 불과함과 같구나

누워자고 깨어나게 하신 주님께
무한한 감사와 찬송을 올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2014년 6월 9일 월요일

논문의 한 조각, 발표한다

오늘은 박사학위 논문의 한 조각을 세미나의 내용으로 발표한다. 성경 해석학에 대한 것이다. 교부들과 정통주의 시대 개혁교회 사이의 교리적 일치가 논지의 뼈대이다. 그러나 이런 논지는 이렇게 짧은 어구로도 설명과 전달이 가능하고 무슨 고급한 사족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음의 선배들이 시도한 방법으로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보다 풍성하고 정확하고 유익하게 읽어낼 수 있느냐의 여부에 있다. 오늘은 그 문제와 씨름하는 세미나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발표의 핵심은 "사랑의 해석학" 되시겠다. 

2014년 6월 8일 일요일

신학서론 채점중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서론 과목의 기말고사 특징은 질문도 알려주고 자료도 주고 오픈북을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걸 허용했다. 대신에 각 질문에 대해 자신이 최고의 답변이라 생각하는 것을 신앙고백 하듯이 답안지에 담으라고 주문했다. 학생들의 고백이 궁금했다. 학생들의 답변을 읽으면서 너무도 아름답고 향기로운 옥고들을 담은 답안지와 마주친다.

사실 수업 시간에 대체로 너무도 조용하고 질문도 희귀해서 학생들이 1) 말똥말똥한 눈빛 너머로 졸거나, 2) 집중은 하는데 관심이 없거나, 3) 표정은 흐뭇한데 이해가 안되거나, 4) 강의가 싫거나, 아니면 5) 내가 싫거나 했겠다는 공상에 이따금씩 젖었었다. 그런데 답안지를 보니 이해도도 높고 진정성도 짙고 고백의 규모와 골격도 흡족하고 문장력도 뛰어나다. 묶어서 책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다. 열심히 공부한 그대들, 아름답다. 학생들의 이러한 답안지 고백을 혼자서만 읽을 수 있다는 게 선생의 상급이란 생각마저 드는 저녁이다.

채점후기

채점 한 과목이 끝났다. 열 가지의 느낌이 교차한다.

1) 학생들의 답안지에 교사로서 내가 보인다.
2) 좀 더 잘 가르칠 걸, 교수법의 미숙도 발견된다.
3)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는 그때그때 점검해야 한다.
4) 참으로 탁월한 학생들이 산적해 있다.
5)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의 수효도 만만치가 않다.
6)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학업 성취도는 비례한다.
7) 교육은 강요나 주입이 아니라 본 보이기다.
8) 가르치는 대로 배우는 학생들이 많다.
9) 교사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10) 그만큼 교사의 책임은 막중하다.

학생들의 영적, 학문적, 인격적 변화를 가져오는 교육은
결코 탁월한 정보 전달자나 특이한 지식 구사자의 몫이 아니겠다
아비의 심정을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게 교육이다.
이번 학기에 절감했다.

2014년 6월 7일 토요일

첫째의 중학교 졸업

아버지 없는 졸업식, 미안했다. 그런데 시상식 자리에서 적잖게 거명되는 바람에 학교에서 스타덤에 올랐단다. 무엇보다 학창시절 중 가장 힘겨운 시기를 보냈는데 잘 견뎌 주어서 정말 감사했다. 아들래미 중학교 졸업식 동영상을 보며 울컥해진 아침이다... So sorry for my absence in the commencement ceremony of my first son. But thanks and congratulations!!!

2014년 6월 6일 금요일

교회의 위기에 직면하여

그가 또 소년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
아이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되시리니 (사3:4)

국가의 질서에 암담한 기운이 드리울 때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자신 이외에 의뢰하며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제하여 버리시되
'모든 양식과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백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정교한 장인 및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지도자의 자리에 철없는 아이들을 앉히고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손에 통치의 홀을 맞기신다.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가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의 뻣뻣한 고개를 마땅한 듯 치켜들 것이란다.

국가의 이러한 총체적 폐단과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전도된 난국의 원인을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언어와 행실에서 찾는다.
즉 그들의 입술과 몸이 여호와를 거역하며
그 거룩한 영광을 촉범했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이사야의 붓이 기술하는 하나님의 탄식이다.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여인들이 다스리는 자들이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은 포도원을 삼키는 자들이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의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을 하느냐!"

교회가 인간 의존도를 심각하게 돌아보고
돌이켜야 할 시점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님의 긍휼과 길이 참으심이 조금만 길었으면 좋겠다.
작금의 상황은 어쩌면 진노의 실재가 아니라
경고 정도의 형국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죄의 올바른 이해

"오직 주께만 범죄하여"

다윗의 진술이 특이하다.
죄의 대상을 하나님 한 분으로만 제한하는 듯한 구절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인간의 존엄성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참으로 탁월하고 경건하고 정확한 이해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근년에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한 물음이다.
정의란 존재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는 것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존재가 하나님과 어떤 식으로 결부되어 있다면
그 존재에게 어떠한 대우가 합당할 것인가?

하나님에 대한 고려가 배제된 존재에의 대우는
시도될 수 있는 최고의 대우를 해 주더라도
여전히 부당하여 정의는 세워지지 않게 되고
각 존재의 고유한 존엄성은 어떤 식으로든 훼손된다.

인간을 생각할 때
한 사람의 존엄성을 가장 정의롭게 존중하는 상태는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그만큼의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정할 때에
비로소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은 존중되고 정의는 실현되는 거다.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했고 우리야를 모살했다.
"오직 주께만 죄를 지었다"는 고백은 마치
밧세바와 우리야의 존재와 존엄성을 무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다윗의 말은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의 차원이 회개와 더불어
어디까지 높아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고백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단순히 인간에게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면
인간에게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의 경계심이 발동한다.
죄를 저질러도 인간의 존엄성에 상응하는 죄책감을 느끼고
그것에 준하는 처벌을 감수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만약 모든 만물에 대하여, 특별히 인간에 대하여
모든 죄가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죄는 신적인 차원의 무한한 위엄을 훼손한 것이며
거기에 상응하는 무한한 죄책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으며
그런 죄책을 따라 측량을 불허하는 무게의 형벌이 합당하다.

죄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할까?
죄가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고
모든 죄가 하나님께 저질러진 불법이라 한다면
죄에 대한 미움은 얼마나 심대해야 하겠는가!
이것은 이런 미움의 극대화를 기대한 어거지 주장이 아니다.
죄가 원래 그러하다.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다.
다윗의 죄도 비록 밧세바와 우리야가
가시적인 죄의 대상이지만
나단 선지자의 전언에 따르면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 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한 것이라"(삼하12:9)고 한다.
다윗도 그런 맥락에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다"(삼하12:13)고 한다.

다윗의 고백은 죄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만물에 대하여, 특별히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리 작고 천하고 가난하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인간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견지해야 하겠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마저 육신으로 알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와의 인격적인 만남 이후에
어떠한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않겠다고 고백했다.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창조의 원리를 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관점으로
사람들을 대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2014년 6월 5일 목요일

해석학의 주의점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는 분으로서 말씀하고 약속하는 분이시다.
성경은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성경의 진정성과 약속의 진실성과 사실의 객관성은
저자이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며 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인간적인 문맥에 끌려 다니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행위를 발생한 사태의 수습으로 이해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나님은 정하시고 아시고 행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시다.
성경 해석학의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2014년 6월 3일 화요일

두렵고 떨리는 현실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사1:16-17)

하나님의 백성은 본래 이래야 한다. 선을 행하고 의를 세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가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 되었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기 때문이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했다.
이는 고대의 이스라엘 모습만이 아니다.
지금도 전혀 낯설지가 않은 현상이다.
게다가 교회가 그런 현상의 주범인 경우가 허다하다.

선을 행하고 정의를 세우고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는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인 교회가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사명이다.
그런데 세상은 고사하고 교회 안에서도
그런 사명의 완수 가능성이 요원해 보인다.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 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 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이 말씀이 나에게는 오늘의 양식이다...

2014년 6월 2일 월요일

칼빈의 세네카 주석에서

Claudian의 경구

"덕은 그 자체가 자신의 보상이며, 운명에서 안전하다.
그것만이 널리 빛을 비추며 그것은 어떤 영예의 흔적에 의해서 생기지 않는다."

Seneca의 경구

"정직한 거래의 보상은 그 자체 안에 있다."

Calvin의 해석

"덕 자체가 최고의 목적이며
그 자체에 의해 추구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다."

Ovid의 경구

"당신은 해칠 힘이 있었지만 아무도 해치지 않았으며
감옥의 위협으로 겁박하신 일도 없습니다."

Calvin의 생각

"우리는 어떠한 무모함과 어떠한 오만함에 의해서도
인내가 깨어지지 않는 군주를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Calvin의 시대상

"우리의 시대에 있어서 판결은 공공연한 뇌물증여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판단을 내리는 판관은 자기에게 지불된 것을 위해 판정하는 듯합니다."

Augustine의 생각

"그들에게 있는 그들 자신의 사악함을 기소하자. 그들이 우리와 공유하고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해서는 동정하자."

Cicero의 생각

"역사는 삶의 여교사다."

Calvin의 해석

"우리는 거울을 보듯이 역사 안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관찰한다. 우리는 우리가 피해야 할 것과 따라야 할 것을 우리의 눈으로 구별한다."

Socrates의 말

"만일 누군가가 가장, 공허한 겉치레, 위선적인 말과 외양으로 지속적인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는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이다. 참된 영광은 깊은 뿌리를 박고 그 가지를 넓게 펼친다. 그러나 모든 가장들은 연약한 꽃들처럼 이내 땅에 떨어지며 위조된 것은 어떤 것도 지속될 수 없다."

Calvin의 반응

"우리의 시대에도 정직의 와양과 가면을 썼으나 내면의 악덕이 뚝뚝 떨어지는 인간 괴물들이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시대의 딸인 진리가 자신을 드러낼 때 그들은 밀랍처럼 녹아내릴 것이다."

Cicero

"덕이 쉽지 아니한 것처럼 덕의 항구적인 가장도 만만치가 않다."

Ovid

"증거된 부와 그 부에 수반되는 무신경한 사치,
사람들은 과도한 소비 속에서 더 소비하려 든다.
갈증 속에서 과음한 사람처럼
그는 내부에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커진 갈증에 내몰린다."

Seneca

"모두를 용서하는 것은 아무도 용서하지 않는 것과 같은 무자비함"

Calvin의 이해

"지나침과 모자람 사이에 놓인 중용이 덕이다. 관용의 과용으로 덕이 악습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마땅히 용서를 허용하되 모든 사람에게 그래서는 아니된다."

Cicero

"무벌의 예상보다 더 강력한 범죄의 유혹은 없다... 오 악행의 관습이여 너는 수치의 원리나 수치심이 없는 인간들이 처벌을 내리고 행동의 자유가 주어진 것을 알았을 때 그들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는가! 인간의 본성에 심어진 저 악은 자유로운 범죄 고나습에 의해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간다...적합한 가혹함은 관용의 맹복적인 과시보다 낫다."

Cicero

"국가는 상과 벌이라는 두 가지에 의해 통치된다...이 두 종류에는 어떤 억제가 있다."

Publilius Syrus

"훌륭한 재판관은 어떤 것을 얼마만큼 붐배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Cicero

"너그러운 처리와 관용은 엄격함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 행하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에만 권해져야 한다."

Gregory

"정당하게 판단하는 모든 사람은 그의 손에 저울을 갖고 있다. 저울의 한쪽 접시에는 정의를 다른쪽 접시에는 자비를 둔다. 정의를 통해서는 위반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자비를 통해서는 범죄에 대한 처벌을 부드럽게 한다."

Seneca

"폐하께서 백성을 아끼실 때 그것은 곧 폐하 자신을 아끼는 것입니다...미력한 시민 한 사람의 잔인함이 끼치는 해악은 얼마나 적습니까? 그러나 군주의 격노는 전쟁을 방불하는 일입니다...위대한 영혼은 위대한 지위에 적합하며...위대한 영혼의 표지는 평화롭고 평정심을 갖는 것과 불의 및 잘못된 것들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서 격분하는 것은 여자의 일입니다... 잔인하고 끔찍한 분노는 왕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Livius

"누구도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법에 따라 심문을 받지 아니할 정도로 다른 사람보다 높아져 있어서는 아니된다."

Seneca

"자기와 동등한 자와의 대결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자기보다 우월한 자와의 경합은 어리석은 일이며, 자기보다 열등한 자와의 시합은 경멸적인 일입니다."

Antonius Pius

"왕은 천 명의 원수들을 죽이는 것보다 한 명의 시민 구하기를 더 좋아한다."

Nero

"원수를 죽이는 것, 바로 이것이 지도자의 가장 위대한 덕이다."

Seneca의 응수

"시민들을 보전하는 것이 나라의 아버지가 할 보다 큰 의무이다."

Cicero

"사람이 자신의 동료에게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신성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이다."

Claudian

"오직 관용만이 신들을 우리와 동등한 입장에 올려 놓습니다."

Seneca

"우리의 눈 앞에는 타인의 결점이 있으며, 우리 자신의 결점은 우리의 등 뒤에 위치한다... 인간은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임을 부인하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극미한 사치의 모습도 용납하지 않는다. 폭군은 살인자에 대해 분노하고 성전 약탈자는 좀도둑에 대해서 분노한다. 인간의 대부분은 죄에 대해서가 아니라 죄인에 대해서 분노한다."

2014년 6월 1일 일요일

다윗의 율법신앙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 이상으로 달도다 (시19)

이는 C. S. 루이스가 "시편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시이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시"로 생각했던 시편이다. 
이러한 시를 노래한 다윗의 경건이 궁금하다. 
율법에 의해 순금과 송이꿀도 가볍게 상대화되는 건 
어떤 경건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일까나. 

율법의 완벽과 확실과 바름과 순결과 정결과 진실을 
읽어내는 다윗의 경건에 심히 압도된다. 
더군다나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요 마침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 이전에 이르른 경지라는 점이 
더더욱 몸 둘 바를 모르도록 뜨끔하다.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복되도다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였으며 
그런 즐거움에 떠밀려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할 정도로 그 법을 가까이 한 인물이다.
말씀의 경이로운 신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