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30일 토요일

철학과 종교

진정한 철학(vera philosophia)은 우리 인간을 유일하고 전능한 하나님께 접붙이는 참다운 종교(vera religio)여야 한다

De vera Religione, 55.113.

감사하신 하나님

어떤 문제가 인기척도 없이 의식과 삶에 잠입하는 경우가 있다. 급한 당황과 혼란이 촉발된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문제는 감사로 환대함이 합당하다. 태풍이 대양을 정화하듯 대비할 겨를도 없이 들이닥친 문제는 고도의 집중력을 포획한다. 동시에 신앙의 뚝을 허물려고 은밀하게 매복해 있던 잔 문제들이 한 방에 일소된다.

사람의 신경이 촉발되고 지성이 움직이고 의지가 결의하는 이 모든 유기적인 연결망의 건강이 회복된다. 감사와 불평이 보이는 가시적인 효과에 맡겨지지 않도록 미처 계산하지 않은 비가시적 효과에 민감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도 정밀하다. 정당히 가리셔서 정밀함의 실재에는 이르지 못하여도 믿음의 방식으로 알도록은 해 놓으셨다.

인간의 악행이 정당화될 수 없음은 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는 인간의 악행도 영원을 향하는 어떤 몸부림의 일환이며, 그토록 흉물스런 죄까지도 구원받을 인간에게 '행복한 과오'(felix culpa)임을 경험한다. 확실히 알았다는 당찬 발설의 계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근원으로 계시기에 모든 게 신비롭다.

내가 도달한 감사과 찬양의 준위는 어떤 차원의 환란까지 버틸지가 궁금하다. 극명한 모함과 손실 속에서도 헤아릴 수 없는 얻음과 유익이 공존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용서를 구하고자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삭제되는 것조차도 마다하지 않았고 바울은 동일한 백성을 위해 주님과의 단절이란 저주마저 각오할 정도였다. 신앙의 지경이 광활하다.

하나님은 선을 악으로 너무도 신비로운 방식으로 바꾸신다. 이러한 사실이 감사에 대한 혁신의 발판이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속에서도 감사의 숨결은 끊어지지 않는다. 이전에 감사의 판단은 말초신경 몫이었다. 이제는 신경의 지표 밑으로 깊이 내려간다. 신경의 중추라고 할 영혼까지 이르면 감사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에 수긍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감사하신 주님, 정말 묵상하면 할수록 무한하신 분이시다. 단순한 평강과 풍요와 형통 속에서는 이러한 주님을 만나기가 어려워서 고난이 유익이며 죽음도 유익인지 모르겠다.

성염 교수님의 구분

① 지성(mens): 영혼의 상위 부분 또는 이성혼의 가장 고양된 활동을 가리키며, 이성과 오성이 깃드는 부위이다(De civ. Dei 11.2: mens, cui ratio et intelligentia naturaliter inest).

② 이성(ratio): "지성의 한 운동으로, 그것으로 지성이 인식을 상호 분석하고 종합할 수 있는 운동"(De ordine 2.11.30: ratio est mentis motio, ea quae discuntur distinguendi et connectendi potens). 자체보다 하위인 감관에, 그리고 감각적 사물에 작용하는 기능이고 감각적 사물을 판단하기 위한 능력이다. 이성의 올바른 구사가 곧 지식 (scientia)을 구성하며 또한 오성과 인식에로 인도하는 길잡이다(ratio ad intellectum cognitionemque perducit: De vera religione 24.45).

③ 오성(intellectus): 인간이 가진 가장 숭고한 능력이고 신의 비추임을 받는 곳이 이곳이다. 오성은 이해의 원리(eo solo posse comprehendi)이자 영혼의 눈 또는 내적인 눈으로서, 이것이 있어서 사유는 신적 광명이 밝혀 주는 진리를 파악한다. 이성과는 달리, 오성은 가지적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지식에 응용되는 것이고(cognitio), 궁극적으로 얻어지는 것은 지혜(sapientia)이다.

지혜의 시작이요 이해의 출발

"부르시고 지르시는 음성으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의 캄캄함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때 나는 맡고서는 님을 그리며, 님을 한번 경험한 뒤로는 기갈이 더욱 커겨가고 있나이다."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탓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이다.

쪼개고 분리하는 분할주의 혹은 환원주의 정신이 서구 문명을 강타했다. 그 이면에는 붙이고 결합하는 통합주의 혹은 전체주의 관점에 대한 갈증은 더욱 깊어졌다. 이것이 하나님의 문명사적 섭리는 아닌지를 생각하게 된다. 최첨단 문명의 끝자락에 이를수록 인간화는 고조되고 신비는 매마를 것 같은데 종교성이 문명의 심장부를 버젓이 활보하고 있어서다.

우리는 살면서 진리의 조각들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런 진리의 단편들을 그 자체로만 사려하는 경우나 단편적인 진리의 절대화로 돌입하는 경우는 올바르지 않으며 그런 단편적인 진리마저 상실하는 태도라고 하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철학적 태도를 "호기심"(curiositas)으로 규정하고 배격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진리의 조각들은 그 자체로도 유익이 크지만 보다 큰 진리요, 보다 근원적인 진리요, 진리의 원천이요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소급할 것을 요청하는 독촉장 혹은 이정표 기능이 훨씬 강하다고 생각된다. 비와 빛처럼 온 세상에 뿌려진 진리의 조각들은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도록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목적이 있는 선물이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정표에 불과한 진리의 조각들에 뿌려지는 조명과 거기에서 챙기려는 만족이 심히 과하다는 것이다. 단편적인 진리들의 저자에게 소급하고 거기에서 안식해야 하고 안식할 수 있는데 오히려 그것을 배척하는 역주행 현상이 편만하다.

칼빈은 호기심의 거절을 오직성경 정신의 이면으로 보았다. 성경이 이끄는 만큼 나아가고 성경이 보여준 만큼 이해하고 성경이 말하는 만큼 말하는 태도는 진리의 각 조각들에 상응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자세와 직결되어 있다. 진리 전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진리의 부분이 가진 의미의 분량은 가늠되지 않는다.

성경을 유기적인 전체로 이해하고, 자연을 하나의 통합적인 창조물로 이해하고, 시간적인 분할을 넘어 역사를 시간이 생략된 통일체로 이해하는 안목은 성경의 저자시고, 만물의 창조주며, 역사의 통치자인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만 풀어진다. 다른 단편적인 결론이 의미의 과도한 분량을 챙겨서는 아니된다.

전체의 장엄함과 개체의 고유성은 대립의 문제도 아니고 택일의 문제도 아니며 상호보완 관계이다. 이 관계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과연 지혜의 근본이요 이해의 출발이다.

2013년 11월 29일 금요일

죄와 자유의 사중적인 구분

죄의 사중적인 구분

1) posse peccare, posse non peccare: 죄를 지을 수도 짓지 않을 수도 있는 타락이전 상태
2) non posse non peccare: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타락이후 상태
3) posse non peccare: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구원이후 상태
4) non posse peccare: 죄를 지을 수 없는 영화이후 상태

이것과 연관된 본성의 사중적인 자유

본성의 자유(libertas naturae)는 존재의 특정한 본성에 따른 자유를 뜻하는데 다음과 같이 본성의 상태에 따라 네 가지의 단계로 구분된다.

1) 아담의 자유(libertas Adami): 이것은 타락 이전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던 능력을 의미한다.
2) 죄인의 자유(libertas peccatorum): 이것은 타락한 본성의 한계에 부합하고 그런 한계 안에서의 자유로서 죄인이 어떠한 선도 행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무능력을 의미한다.
3) 신자의 자유(libertas fidelium): 이것은 성령으로 중생된 자들의 거듭난 본성에 고유한 자유로서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선을 행할 수도 있는 능력이 특징이다.
4) 영화의 자유(libertas gloriae): 하늘의 축복된 상태에 있는 성도의 완전하게 구속된 본성에 고유한 자유로서 죄를 짓지 못하는 절대적인 무능력을 의미한다.

 Augustine, De correctione et gratia, XII.xxxiii (PL 44:936); Muller, Dictionary, 176.

하나님은 전부시다

존재의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어거스틴 "독백"이다.
간단한 표현인데 담긴 의미의 분량은 산더미를 육박한다.

"하나님 위에는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나님 밑에 모든 것이 있고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있으며
하나님과 더불어 모든 것이 있나이다."
(Deus supra quem nihil, extra quem nihil, sine quo nihil est.
Deus sub quo totum est, in quo totum est, cum quo totum est)

Soliloquiorum, 1.1.4.

어거스틴: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창조된 온 우주의 원인이며
인식될 수 있는 진리의 빛이시며
행복을 마실 수 있는 샘이시다"(신국론 8.10.2).

철학적인 용어를 쓴다면,
하나님은 "존재의 원인, 인식의 근거, 삶의 규범
(et causa subsistendi et ratio intellegendi et ordo vivendi)"이다.

어거스틴 사상의 이중적인 틀

  1. 신앙과 이성
  2. 신과 인간
  3. 신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4. 신학과 철학
  5. 영원과 시간
  6. 진리와 거짓
  7. 선과 선의 결핍
영혼에게 진리보다 저항할 수 없도록 사로잡는
더 매혹적인 것이 어디에 또 있을까?
인간의 영혼보다 진리에 더 게걸스런 목구멍이 어디에 또 있을까?
진리를 찾으려는 사랑에 중독 수준으로 사로잡힌 사람보다
더 향기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어디에 또 있을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진정한 철학자가 어디에 또 있을까?

지혜의 총화 (어거스틴 버전)
A. - Deum et animam scire cupio. R. - Nihilne plus? A. - Nihil omnino.

어거스틴, 그에게
진리는 학습하는 무엇이 아니라 날마다 먹고 마시는 음식이며,
직업의 일환으로 철학을 개진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살았으며,
진리를 추론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했고
영원에 대한 갈망을 시간적인 것으로 해소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다운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o, aeterna veritas et vera caritas et cara aet ernitas)!  

어거스틴 사상의 3중적 구조

1. 영원, 나는 존재한다(sum): 성부, 존재론, 신국론

2. 진리, 나는 안다(scio): 성자, 인식론, 교사론

3. 사랑, 나는 사랑한다(amo): 성령, 도덕론, 행복론

영원토록 감사

추수감사 예배를 드렸다. 시간이 주어져서 오늘도 존재할 수 있어서 감사했던 어느 코미디언 911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성도님들 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몇 분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한해동안 감사했던 이야기 보따리를 푸셨다. 모든 성도들의 눈시울도 감사의 액체를 잔뜩 머금었다. 감사가 감사절의 이벤트가 아니라 범사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상황이 감사와 반대되는 역방향 질주를 고집한다 할지라도 감사해야 한다는 다짐들도 있었다. 상황이 열악하면 할수록 감사의 출처가 땅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강하게 확인된다. 암에 걸리고 가족들을 잃은 영혼이 밀어내는 역설적인 감사의 이유들을 듣노라면...영원토록 감사하고 싶다.

Thanks to God

2013년 11월 28일 목요일

Frui와 Uti

두 몸에 있는 하나의 영혼이라 불리우는 벗을 떠나 보내고
상실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는 어거스틴 진술이 백미이다.

인간의 비참은 여기에 있습니다.
유한한 것은 유한하게 사랑해야 하고
무한한 것은 무한하게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을 혼돈하고 임의로 바꾼다는 것 말입니다.

죽을 사람을 안죽을 것처럼 사랑하면
이와 동일한 비참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죽을 사람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내 영혼이 요동할 것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을 영원히 사랑하면 불별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영혼의 어떠한 흔들림도 없습니다.

향유의 목적(frui)과 향유의 수단(uti)은 구분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람은 목적인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서는 수단으로 사랑해야 한답니다(frui + uti)
향유의 유일한 목적과 궁극적인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frui) 뿐입니다.

Confessiones, IV.iv; De doctrina christiana, I.v.5.

어거스틴 사상의 조각들

하나님 지식의 3단계

하나님이 선포되고 (dicatur),
하나님이 믿어지고 (credatur),
하나님이 이해된다 (intelligatur).

신앙의 3단계 (롬바르드 버전)

1. 하나님에 대하여 믿는다 (Credere Deo):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옳다고 믿는 믿음이다.

2. 하나님을 믿는다 (Credere Deum):
하나님이 하나님인 것을 믿는 믿음이다.

3. 하나님을 신뢰한다 (Credere in Deum):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밀착하고
믿음으로 주님의 몸에 연합하는 믿음이다.

Petrus Lombardus, Sententiarum, 2:23 (PL 192:805)

삼위일체 비유들 in Augustine

1 사랑하는 분, 사랑받는 분, 사랑
amans, amatus, amor (De Trin. VIII, 10, 14; cf. IX, 2, 2);

2. 마음, 앎, 사랑
mens, notitia, amor (IX, 3, 3);

3. 기억, 이해, 의지
memoria, intelligentia, voluntas (X, 11, 7);

4. 사물, 바라봄, 의도
res (visa), visio (exterior), intentio (XI, 2, 2);

5. 기억, 바라봄, 의지력
memoria (sensibilis), visio (interior), volitio (XI, 3, 6-9);

6. 기억, 지식, 의지
memoria (intellectus), scientia, voluntas (XII, 15, 25);

7. 믿음의 지식, 인지, 사랑
scientia (fidei), cogitatio, amor (XIII, 20,,26);

8. 하나님 기억, 하나님 이해, 하나님 사랑
memoria Dei, intelligentia Dei, amor Dei (XIV, 12, 15).

악에 대한 어거스틴 어법

어두움을 볼 수 있는가?
어찌 어두움을 볼 수 있으며,
침묵을 들을 수 있으며 무를 이해할 수 있을까 ? 신비이다

어두움이 빛의 결핍인 것처럼, 악은 선의 결핍이다.
나쁜 일을 아니하면 선한 사람이지 않고
선한 일을 하지 않았으면 악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데 좋은 색만 사용하지 않고
어둡고 칙칙하고 보기 싫은 검정색도 사용한다.
왜 검정색을 쓰는가 ?
그림을 다 그리고 보니까, 검정색도 미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을 악용하나 하나님은 인간의 악도 선용한다.

식별의 대헌장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식을 구별하는 것은 오직 하나, 사랑 뿐입니다.
모두가 다 주님의 십자가 성호를 그으며, 모두가 아멘이라 화답하고,
할렐루야 노래를 부르며, 모두가 다 세례를 받고
모두가 교회에 다닌다고 할지라도, 성전을 지어 올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하는 것은 오직 하나, 사랑 뿐입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만이 기준이요 이것만이 식별의 대헌장인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서간 강해 5:7에서 

어거스틴 신학에 기여한 대표적인 오류들

1. 인간의 자유의지 개념을 과장한 펠라기안 구원론
2. 그리스도 예수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주장한 아리안 기독론
3. 배교한 목사들의 성찬을 거부한 도나티안 교회론
4. 그리스도 신성만을 인정한 네스토리안 단성론적 기독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 교리에 관련된 이단들만 88개를 열거한다.
그의 신학은 신학적 평화의 시대가 아니라 전시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진리의 빛은 가장 캄캄한 신학적 어두움과 격동 속에서 짙게 발산한다.

2013년 11월 27일 수요일

지식과 영생의 동일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이것이다 (요17:3)

영생과 지식의 동일시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오직 주님만이 구사하실 수 있는 신비로운 어법이다. 이 구절은 지식의 차원이 어디까지 높아지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없어서 신비롭다. "안다"는 것의 궁극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도 같은 의미로 예수님께 "영생의 말씀"(ῥήματα ζωῆς αἰωνίου)이 있다고 고백했다. 위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알면 영생을 얻는다는 조건문도 아니고 지식은 원인이고 영생은 결과라는 식의 인과율적 구문이 아니다.

하나님 지식이 영원한 생명 자체로 규정되고 있기에 일단 우리는 지식의 무한성과 실체성에 압도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은 전두엽에 저장된 정보도, 단백질에 박힌 기억도, 가슴을 뎁히는 감동도, 삶의 표피를 뚫고나온 실천의 열매도 아니다.

"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일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건 더더욱 신비롭다. 그분을 아는 것이 영생인 인식론은 어떤 것인지가 궁금하다. 신학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신앙의 연수가 쌓이면서 하나님을 안다는 신비의 늪으로 점차 빠져든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 속으로 변혁시켜 나가는" 것이며 "믿음과 동일한 것"으로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 접목되게 하고 거룩한 아들로 입양되고 하늘의 상속자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의 주석에는 지식의 기능이 설명되고 있다는 인상도 받지만 하나님의 지식 자체의 속성이 진술되고 있다는 점도 동일하게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영혼과 인격과 생각과 언어와 행실 모두가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다.

칼빈이 자신의 교의학을 하나님에 대한 "인식"(cognitio)으로 규정한 것은 시대의 과제를 푸는 열쇠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이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이는 교부들을 비롯하여 모든 건강한 믿음의 사람들이 추구했던 신앙의 종점이다.

바울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떠한 것도 알지 않기로 정하였고 자랑치도 않기로 작정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사도신경 전체를 차지한다. 중요한 공의회의 신조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경적 정밀성에 기여하기 위해 고백된 것들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한 개인의 영생을 넘어 이렇게 시간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으로 압축되고 있다는 느낌까지 엄습한다. 우리의 모든 배움은 "신"학이고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신"앙이다. 

2013년 11월 26일 화요일

오직 성경에 대한 제네바 신앙고백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의 신앙과 경건의 규범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의 해석에 의해 가공된 어떠한 것과도 혼합됨이 없이 오직 성경만을 따르고자 한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가감없는 동일한 말씀에 의해 가르쳐진 것 이외에 우리의 영적 다스림을 위한 다른 어떠한 교리도 감히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제네바 신앙고백 (1536/37), 1항.

루이스의 고서예찬

아타나시우스의 성육신론 서문에서 C. S. Lewis는 고서읽기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20세기의 특징적인 맹목, 후세대가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묻게 될 그 맹목은 우리가 한번도 의심하지 않은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가 근대의 문헌에만 눈길을 돌린다면 우리들 중에 누구도 이 맹목을 온전히 피해가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그것의 증대에 협조할 게 분명하고 그것에 대한 경계심도 약화시킬 것이다. 현대의 올바른 문헌들은 우리가 이미 절반은 알았던 진리를 제공할 뿐이겠고, 현대의 거짓된 문헌들은 우리가 이미 위험하게 중독된 오류들을 가중시킬 것이다. 유일한 해독제는 수세기간 지속된 은은한 해풍을 계속해서 우리의 머리에 관류하게 하는 것인데 이는 고서의 탐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De Incarnatione를 펼치는 순간 단번에 걸작임을 알아보게 되었다."

Athanasius, On the Incarnation with C. S. Lewis's Introduction.

2013년 11월 25일 월요일

허물에서 믿음으로

심판자의 태도는 온당하지 못한데도 때때로 판단하는 마음이 한 걸음 앞선다. 동기를 부여하고 의미를 수혈하고 가치를 생산하는 보다 긍정적인 태도의 유지가 중요한데 판단의 입술이 그런 다짐을 앞질러 따돌린다. 오늘도 좀 더 따뜻할걸...아쉬웁다.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계기의 적시성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타인의 은밀한 치부는 덮어주는 것이 사랑의 행위지만, 자신의 허물은 드러남이 유익이다. 치유의 첫걸음은 나타남에 있다. 나타나지 않으면 의식되지 않는다. 아예 없는 줄로 안다.

시인은 자기의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가 없다고 노래한다. 숨은 허물에서 자기를 지켜 주시라는 기도는 그런 깨달음의 부재 때문이다. 당연히 숨은 허물의 드러남은 깨달음의 시작이다. 계기를 제공한 분이 있다면 그에게 발끈할 것이 아니라 정중히 감사함이 마땅하다.

하루하루 살아가며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사안과 발끈해야 할 사안의 앞뒤도 못가리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무엇이 지정 자기를 위한 것인지, 무엇이 진정 타인을 위하는 것인지를 혼돈한다. 그때그때 감정 멋대로다.

삶은 나에게 해롭다고 생각되는 것이 보약이고 죽음과 같은 경우가 유익일 수 있다는 의미론적 반전으로 충만하다. 주님이 계셔서다. 주어가 생략된 세옹지마 경구의 우연성 개념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주님이 계시다는 증거의 하나가 바로 "반전"이다.

순적한 문맥 속에서는 원인이 발견되지 않도록 벌어지는 사태의 역전은 인간 문맥에서 걸러지지 않는 원인의 존재를 생각하게 만든다. 눈과 귀에 달콤한 증거를 제시하진 못하지만 부인하진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이것의 포착은 믿음의 도약을 요청한다.

다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아는 것의 인식도, 사는 것의 원리도 믿음이다. 과연 믿음은 큰 선물이다. 믿음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고 믿음 자체의 크기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모순과 역설과 반전의 세상에서 정신 멀쩡하게 살아가는 비결은 믿음이다.

2013년 11월 23일 토요일

하나님의 일등급 속성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에 부요하며
진노에는 탬포를 늦추시고 인자가 넘치는 분이시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샘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속성이 발휘되는 것보다 큰 영향력은 없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이 증거되는 것보다
더 슬기롭고 영광스런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하기를 더디하고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일등급' 속성이 발휘되는 일이다.

분노의 계기들이 삶의 도처에 몸 낮추고 매복해 있다.
노의 더딤과 허물의 용서라는 원리에 반응의 닻을 내리자.

분을 터뜨리면 후회와 미안함만 앙금처럼 남는다.
촉발되기 직전에 나 자신이 문제라는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제자들이 뽑은 분노의 칼도 다시 꽂으시고
12령의 천사들 동원도 만류하신 주님을 떠올리는 거다.

그리고 분노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어야 할 상황 속에서도
가해자를 향해 용서와 축복의 기도를 올리셨던 주님...

그 때가 하나님의 속성이 가장 찬란하게 발휘된 순간이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확증되는 현장이 십자가다.

자식을 키우면서 그 십자가에 서야 할 때가 많아진다.
그런데 주님을 알아가는 지식에 있어서도 자라간다. 감사하다.

2013년 11월 22일 금요일

신뢰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실력이다.

하나님께 맡길수록 권위가 세워진다.
부부나 자녀나 타인과의 관계도 하나님께 맡겨진 것만큼 견고하다.
우리의 감정이나 상황이나 능력에 맡겨지면 늘 거기에서 거기다.
살아가는 방법이 세상과는 정반대다.

무엇하나 내가 했다고 당당히 발설할 수 있는 사안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신앙고백 차원에서 승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다.
자신을 살펴보면 볼수룩 호흡하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다. 은혜가 은혜인 줄 모르도록 깊다.

한적한 공간으로 의식을 떠밀면 나의 실존이 벌거벗고 만다.
다른 소리가 개입하지 않는 고요 속에서만
다른 시선이 엿보지 못하는 하나님 앞에서만
나의 어떠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주님과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응시하는 만큼 정직할 수 있다.
곧장 증발되고 말 사람들의 평판과 합의에 자신을 내맡기지 마시라.
내맡기면 합의된 평판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타인을 대우한다.
타인을 바르게 보려면 하나님과 나 자신을 바르게 보아야 한다.

무엇을 하더라도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게 사는 거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산다. 그게 바르게 사는 거다.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이다. 허나 그게 내 안에 주님이 사시는 거다.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게 올바르게 사는 거다.

겸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곳은 주님의 은혜가 머무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사람들을 따라가고 근사한 장소에 마음이 끌린다. 그게 다 사람의 마음이다. 아무도 그런 끌림에서 자유롭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과 사랑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내려진 판단이냐 아니냐다. 아무리 외진 시골에 있더라도 주님의 영광이 어두운 세상의 그늘진 구석을 다 밝히고도 남을 빛을 얼마든지 발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웅을 끌어 내리시고 범인을 높이셔서 땅의 질서를 개간하고 고르고 평평하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오히려 천하고 빈하고 연약한 자를 들으셔서 귀하고 부하고 견고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역전극이 즐비하다.

 먼저 되었다고 교만하지 말고 먼저 각광을 받았다고 목이 뻣뻣해선 안되겠다. 본질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지 사환에게 있지가 않아서다. 타인에 대해 평가의 언사를 쏟아낼 때에도 조심해야 하겠고 나 자신에 대한 과시와 가장의 충동도 조심해야 되겠다.

주께서 보시면서 웃으신다.

성경과 전통

교회는 성경과 전통을 모두 존중한다(전통을 대표하는 것은 신조와 고백서와 교리이다. 여기서는 고백서로 전통을 대신한다). 그러나 "과"라는 접속사가 동등성을 의미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1. 고백서는 인간의 모든 구성물이 그렇듯이 상대적 제한적 권위를 갖는다. 고백서는 기독교 신앙과 삶의 유일하게 무오류한 규범인 성경과 권위의 어깨를 겨누지 못하고 언제나 종속적인 관계성을 갖는다. 전통의 가치는 성경과 합치하는 분량에 의존한다.

2. 성경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3. 성경은 규정하는 규범(norma normans)이고 고백서는 규정되는 규범(norma normata)이다.

4. 성경은 믿음의 규범(regula fidei)이고 고백서는 교리의 규범(regula doctrinae)이다.

5. 성경은 신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지만 고백서는 오직 교회적 상대적 권위만을 갖는다.

6. 성경은 성직자와 성도 모두의 일반적인 신앙과 삶을 규정하고, 신조는 교회의 직분자에 의한 공적인 가르침을 규정하고 헌법과 교회법은 정치를 규정하고 예식서와 찬송가는 교회의 예배를 규정한다.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1:7.

성경이 말하는 복 (시73:25-28)

1. 오늘 저는 “성경이 말하는 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세상에 저주나 멸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아무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복입니다. 문제는 복의 개념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중국의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 1편인 ‘홍범(洪範)'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보면 ㉠ 수(壽):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가는 장수(長壽)의 복(福)과, ㉡ 부(富): 살아 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 ㉢ 강령(康寧):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 ㉣ 유호덕(攸好德):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 ㉤ 고종명(考終命):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이 있습니다. 이러한 복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2. 그런데 시편 73편은 사람들이 복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것을 복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 개념을 가진 시인은 하늘과 땅 전체에서 하나님 외에는 사모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73편 25절에서 시인은 하늘과 땅에 주님 이외에 사모하고 소원하고 즐거워할(חָפֵץ) 어떠한 대상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주님만이 우리가 사모하고 소원하고 즐거워할 대상이 되시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이 온전히 돌리지는 때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우리의 애착이나 열정의 지극히 미소한 부분(minimam partem)이 피조계에 돌려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져야 할 영광의 전부를 횡령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마치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만 어겨도 율법 전체를 범한다는 말과 어법이 같습니다.

3. 하나님만 사모하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늘과 땅에는 몰골이 흉하고 악취가 지독한 것들이 아니라 참으로 탐스럽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관심과 애착을 노리는 유혹의 촉수들이 사방에서 우리를 무섭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미혹의 종류와 양태가 세상에는 무수하고 날로 진화하고 있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도 쏟을 우리의 관심과 애정을 적당하게 분배하고 싶은 충동을 유발하는 매혹적인 대상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4. 본문을 기록한 시인 자신도 이러한 홍수에 휩쓸려서 미끄러질 뻔 했다고 말합니다. 실족하게 하는 원인들이 사람마다 다양할 것인데, 시인이 열거하는 미혹의 원흉들은 특별히 우리를 현혹하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분노와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게 만드는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시인은 오만한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고 있습니다. 형통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4절에, 오만하고 악한 자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오히려 건강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악하고 오만한 자들이 살 때에는 괜찮게 살더라도 생의 마지막 순간 만큼은 비참하고 억울하고 불쌍할 정도로 망가져야 일반인의 가슴에 쌓인 억울함이 풀어지는 법인데 그러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지막 호흡을 들이키는 순간까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고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시인은 목도하고 있습니다.

5. 그리고 5절에서 타인이 보통 당하는 고난과 재앙을 악인들은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자신이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닥치는 재앙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하고 오만한 자에게는 그런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살찜으로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크다고 말합니다. 눈이 솟아날 정도로 살이 찐다는 것이 현대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이지만, 고대에는 풍요와 평안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은 사업을 해도 아주 악질의 사기꾼을 만나 패가망신 당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들이 계획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이윤을 취한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이사야는 ‘악인에겐 평강이 없다(사48:22)’고 했는데, 아삽은 악인들이 항상 평안하고 게다가 그들의 재물은 나날이 증대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답니다. 실족의 이유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6. 지금까지 열거된 부조리는 신경을 끊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부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성전에서 하나님 섬기는 일만 일평생 해 온 아삽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다’(14절)는 것입니다. 아삽의 관찰에 의한다면, 그의 시대는 마치 공법이 인진으로 전락하고 불법과 부조리가 처처에 횡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시대상을 현실로 부딪히며 진리로 저항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나 아삽이 경험했던 실족의 벼랑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7. 오늘 시편 73편을 함께 생각하는 이유는 아삽이 결국은 실족하지 않고 승리했고 그 비법을 소개하고 있기에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는 불법과 거짓의 악취를 호흡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비결을 진리가 실종된 자기 시대의 부패와 싸워 승리했던 아삽의 고백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삽이 그런 문제들을 극복한 비결은 복의 기준이 바뀐 것에 있습니다. 무엇이 복이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향기롭고 눈부시고 탐스러운 것들을 취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 아님을 안 것입니다. 아삽은 세상이 돌아가는 병적인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게다가 잠시 있다가 썩어 없어지는 땅의 복들이 기준이 될 때에는 그런 상황이 신앙의 근간마저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는 전혀 다른 기준을 찾았고 그 기준으로 그간 실족을 부추겼던 모든 원인들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해법은 바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8.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장 좋은 것을 뜻합니다. 우리 편에서 본다면,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바로 그것을 복이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복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엉뚱한 것을 기대하게 되고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은 구하지 않는 신앙의 불균형이 초래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마땅히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9.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해도 해석의 차원에서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조건형) 복이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 그 자체(규정형)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한 것을 마치 자신이 원하는 복을 초래하는 조건이기 때문에 복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구제하고,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잘 살고 건강하고 형통하기 때문에 그런다면, 그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열심들은 모두 어떤 이득을 취득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원된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열심들은 그 자체가 이미 복입니다.

10. 정직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도 정직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정직하면 친구가 생기고 신용이 쌓이고 엄청난 고객을 유치할 수 있고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건강한 사회의 단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는 요즘 세상에 이런 정직만 갖추어도 사회는 눈이 부시도록 밝고 투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정직을 좋아하는 이유는 정직의 결과가 달콤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정직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 발휘되기 때문에 우리는 정직의 결과보다 정직 자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정직이 조롱을 부르고 불이익을 낳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정직을 고집하지 거짓으로 삶의 전향을 꽤하지는 않습니다. 결과의 유무에 관계 없이 정직을 고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 뿐입니다.

11. 구제하는 것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이 큰 향기를 뿜어내기 때문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되돌아올 보상을 기대하고 구제하는 것은 구제가 아니라 투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제자는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 것에 탐욕의 군침을 흘리지 않습니다. 구제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의 가치를 가졌다고 믿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친구와 이웃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도 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빛을 발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의를 구하는 차원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인내하고 기다리며, 죽더라도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를 구하면 좋은 결과가 뒤따르기 때문에 의를 구하지 않고 의 자체가 복이기에 의의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12. 두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진정한 복이 대체로 명령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명령의 방식으로 되어 있지만, 독재자의 억압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명령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도 주지 않고 선택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좋고 궁극적인 복이기 때문에 그렇게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원을 표현하기 위해 명령의 방식을 취하였을 뿐입니다. 십계명을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에게 지극히 큰 복입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정죄하고 파멸로 몰고가는 걸림돌이 아닙니다. 우리의 옳고그름 시시비비 따질 필요도 없이 너무도 좋은 것이어서 명령의 옷을 입었을 뿐입니다. 십계명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교단에서 최고의 고백서로 간주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부는 감사의 항목인데 십계명을 바로 거기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13. 진실로 복은 우리의 동의나 승인을 생략하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우리의 판단이 개입하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얻을 수는 있겠으나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자연은 우리의 개입과 무관하게 주어진 것으로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그 필요를 알지도 못했는데 주어졌고 청구한 적도 없는데 이미 내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참여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그것이 은혜로 주어진 복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게 문제기는 하지만 자연은 인간의 존재와 생존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발짝 더 나아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연이 주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복의 서곡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주기를 원하시는 것으로서 우리가 그 필요를 알지도 못하였고 구한 적도 없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주어진 자연의 복이 들러리에 불과할 정도로 우리에게 궁극적인 복으로 주어지신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14. 복은 조건을 충족시킨 결과가 아니라는 것과 명령의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염두해 주면서 한번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우리에게 진실로 하나님이 주고 싶으신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하는 최고의 복이라는 차원에서 ‘먼저’ 구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명령문을 복의 조건으로 오해하고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평서문 혹은 결과문을 복으로 간주하고 결과를 추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하신 복보다 그 복의 결과로 주어지는 의식주의 문제에 병적인 갈증과 집착을 보입니다. 설혹 그런 결과적인 복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의 은밀한 성격이 담겨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복을 부수적인 것과 바꾸는 주객전도 신앙을 아무런 갈등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격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그냥 안심하고 있을 뿐입니다.

15. 사람들은 무엇이 궁극적인 선물이고 무엇이 부수적인 것인지를 잘 모릅니다. 마땅히 구해야 할 것과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을 혼돈한 대표적인 인물이 에서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뜻도 고려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인 형태의 복으로 주신 출생적인 장자권을 멸시하고 배고픔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자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행동한 에서를 음행하는 자와 같은 범주로 묶어서 ‘망령된 자’라고 했습니다(히12:16). 사람의 눈에는 지나친 혹평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에서가 간음자 만큼이나 망령된 자라는 것입니다. 복은 마땅히 구해야 하는 것이면서 하나님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에서 벗어나면 간음하는 것이요 망령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16. 또한 사람들이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멸시하고 다른 것을 구하면 단순한 우매함을 넘어서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욕심은 단순한 욕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기 원하시고 구하라고 명하신 그것 이외에 것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욕심이 잉태하면 죄가 되고 그 죄는 사망에 이르도록 자라날 것입니다. 사망의 어두움이 드리워진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구하라고 하신 그것을 구하지 않고 땅의 썩어 없어지는 것들만 잔뜩 구하고 있습니다. 허탄한 것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죽도록 싸웁니다. 자기도 죽고 남도 죽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멸적인 약육강식 방식이 독버섯과 같이 온 세상에 퍼져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사망의 악취가 풍깁니다. 교회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싸움과 분리는 교회의 전유물로 보일 정도로 심각해져 있습니다. ‘싸움을 하려거든 교회나 가서 싸워, 여기가 교회인 줄 알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싸우는 이유는 대체로 진리에 대한 저항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무엇이 복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면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필연적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할 진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우리 각자에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16. 복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근원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이 노력하고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입니다. 부자가 되고, 명예를 얻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건강하고, 좋은 집을 구입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얻고, 자식이 잘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세상에서 구경할 수 있는 복입니다. 복 맞습니다. 전도자도 사람이 해 아래서 땀의 소득으로 먹고 마시고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선물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물들은 주신 자를 찾으라는 사인으로 주어진 일시적인 방편일 뿐입니다. 영원한 것으로 인도하고 결국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엄밀한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전정한 복이 아닙니다. 아삽이 고백한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진정한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신 것은 육체로 떠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최상의 복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함께 있을 것이다,’ 즉 여호와를 가까이 함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17.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 그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여호와를 실제로 가까이 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리적인 거리 좁히기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멀리' 혹은 '가까이'와 같은 거리 개념의 의미론적 전환이 필요한데, 시편 본문에는 "가까이 함"의 의미가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라는 표현으로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믿음의 조상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상당부분 겹치는 말입니다. 

18. 시인이 말하는 “피난처”는 나 자신의 일부만 보호하고 가려주는 곳이 아닙니다. 나의 전부가 완전히 그 안에 파묻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이것도 물리적인 주거를 의미하진 않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거룩과 순종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단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거룩과 순종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맞물려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고서도 거룩해질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순종은 행위이고 거룩은 상태라는 관계성을 갖습니다.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행위와 상태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19.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기에 시인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피난처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고 거하는 방식은 물리적인 거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여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신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는 또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20. 사실 시인의 글에서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복"의 구체적인 개념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보다 명료한 개념은 신약에서 바울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방법이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심지어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것까지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보다 강렬한 그리스도 연합을 추구했던 다른 인물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생명과 죽음까지 상대화할 줄 알았던 분입니다.

21.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게 복이지만 그런 삶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쾌하고 설레이고 매혹적인 길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자의 구체적인 상태와 삶이라고 할 예수님의 복개념을 주목해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의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온 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 전체를 그렇게 긍휼히 여기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러할 때에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22. 성경은 우리에게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가장 합당하고 구체적인 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요10:30).’ 이는 가까움의 가장 깊은 경지를 묘사한 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사이의 관계보다 더 긴밀하고 분리할 수 없는 하나됨의 관계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라는 말은 ‘사랑’이란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하나됨을 표현할 때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라는 문맥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그런 하나됨을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23.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계명 순종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낭만적인 콧노래를 부르며 설레이는 발걸음을 옮기는 분위기 좋은 산책길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고통과 절망의 잔을 기울여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걸어가신 삶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와 같이 사람의 형체를 입으신 분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시고 처참한 고통을 당하시고 조롱과 멸시의 침을 받으시며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처럼 아무런 저항도 않으시며 결국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입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속았다는 분노와 원망의 시선이 이미 채찍질로 파이고 뜯겨진 등짝을 찌르고 또 찌르는 골고다의 언덕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는 아무런 보상도 영광도 취하지 못하시고 오히려 죽는 순간까지 억울함과 통증만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험하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없는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의 걸어가신 발자취는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성경에 뚜렷한 기록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선뜻 그 길을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24. 이들의 삶을 면밀히 살펴보면 복이 복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이 무엇인가? 그냥 돌밭의 자갈처럼 던져진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란 피조물 중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인간에게 부여하는 낙관적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판단을 보십시오. 인생은 지렁이와 같습니다. 마른 막대기와 같습니다. 이사야는 온 세상이 공중에 날리는 먼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인생의 길이를 언급하며 ‘밤의 한 경점’과 같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경점과 같으니이다, 시90:4). 점이라는 것은 무게도 없고, 부피도 없고, 냄새와 색깔도 없고, 의미와 가치도 담을 수 없고, 그냥 존재와 위치만 표시하는 수학적인 기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인생이 선물을 받는다면, 상급을 받는다면, 가치와 의미를 담는다면 도대체 어떤 것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생에게 지극히 크시고 높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도, 교환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당신 자신을 값없이 주신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이런 복만을 구하는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 시대와 사회와 세상은 복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세상에 희망이 남아 있다는 증겁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과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삶 속에 구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의 죄악된 질서와 가치관을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

25. 아삽은 자신의 시대에 편만한 불법과 불의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극복할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은 아삽의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공법은 인진으로 전락하고 불의는 합법적인 제도로 둔갑하고, 불법을 휘두르는 무리들이 처처에 횡행하되 제어할 장치가 없는 무질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도 그 정도가 심해서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나도 그냥 그런 방식으로 살자’는 생각과 남루한 거래를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적이 한 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보십시오. 그 길을 따라간 구름떼와 같은 허다한 증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십시오.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전정한 영광의 길인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만 흥하고 나는 철저히 쇠하여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만 기념되는 인생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만 증거하고 우리는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다 마친 이후에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과 함께 완전히 사라지는 그런 인생을 영광과 복으로 여기고 그런 길을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13년 11월 20일 수요일

카이퍼의 [일반은총], 드디어 떴다

친구들이 편집한 아브라함 카이퍼의 대작 [일반은총](De gemeene gratie) 1권 1부가 위용을 드러냈다. 공공신학 본좌라는 평이 뒤따르는 문헌이다. 기독인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하고 개입할 것이냐를 다룸에 있어서는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 정치인, 언론인, 교육가인 카이퍼의 붓이 그런 작업에 최적이란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의 붓길이 궁금하다.

카이퍼의 많은 저술들 중 사회를 향한 기독인의 태도와 삶에 성경적 각을 잡아주는 원리들과 사례들을 제공하는 [일반은총] 이상의 뛰어난 지침서는 없어 보인다. 복음의 넓이와 공공의 삶에서 요구되는 기독인의 역할과 문화적 리더십과 과학과 예술에 있어서 타인을 향한 기여에 대한 여러 물음들에 마땅한 답변이 없어 갈하신 분들에게 시원한 얼음냉수 같다.

이번에 출간된 1권 1부가 앞으로 나올 2부 및 3부와 더불어 다룰 이야기는 아담의 출현에서 두번째 아담의 재림까지 망라한다. 온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하나님의 자비와 행하신 역사가 예리한 필치로 기술되어 있다. 사실 [일반은총] 맛배기는 3권 끝부분에 해당하는 Wisdom and Wonder라는 이름으로 출간이 되었었다. 처음과 나중이 나온 셈이다.

Abraham Kuyper, Common Grace, I-1 (CLP Academic, 2013)

2013년 11월 19일 화요일

주님 뿐입니다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73:25)

논지는 하늘과 땅에 주님 이외에 사모하고 소원하고 즐거워할(חָפֵץ) 어떠한 대상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이 돌려지는 때라고 칼빈은 강조한다. 그의 주석에 의하면, 우리의 애착이나 열정의 지극히 미소한 부분(minimam partem)이 피조계에 돌려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져야 할 영광을 횡령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현상은 모든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불경이라 한다.

"하늘과 땅"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을 가리킨다. 나아가 그 구절은 시인이 하나님 외에는 자신의 "사모할" 자가 없다는 말에 근거할 때 하늘과 땅을 매혹하여 사모하게 만드는 모든 거짓들과 환영들도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은 미혹으로 충만하다. 미혹의 종류와 양태가 무수하고 날로 진화하고 확장되어 간다. 하나님 이외에도 쏟을 관심과 애정을 적당하게 안배하고 싶은 충동을 유발하는 매혹적인 대상들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이러한 홍수에 시인 자신도 휩쓸려서 미끄러질 뻔 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미혹의 원흉들로 시인은 2절에서 14절까지 '악인이 형통하는 것'과 '악하고 오만한 자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오히려 힘이 강건하여 지는 것'과 '일반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재앙도 그들에겐 없다는 것'과 '생이 부요해서 눈이 튀어나올 정도이고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는 것'과 '악인들이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 것' 등인데 이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내용은 일평생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루종일 주님만 섬기는 자기는 '종일 내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다는 것' 등이 있다고 진술한다.

"마음의 반석이요 영원한 분깃이라."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이해이다. 하나님은 시인에게 몸과 마음이 무너질 때 존재와 상태의 보존을 가능하게 하시는 반석이다. 시인 자신을 보존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원수들의 공격도 무력하게 할 정도로 안전하고 견고한 안식처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은 눈으로 관찰되지 않고 손으로 수리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와 본질을 정확하게 아시고 최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기에 외부의 것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그 필요의 전부라고 말하는 듯하다.

"주를 멀리하는 자...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하나님을 기준으로 한 거리의 원근이 대조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망하고 가까이 하는 자는 복되다는 결과적인 대조도 이어진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가까이 함이 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며 최고의 복 자체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복된 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를 받고 멸망을 당한다.

이는 밤의 경점과 같이 짧은 인생이 고려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 1천년의 기간도 고작 하루에 불과하신 분에게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무리 화려하고 존귀하게 살아도 안개처럼 곧장 사라지는 환영에 불과하다. 측정이 불가능한 영원 속에서의 상태가 중요하다. 시간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도록 놀라운 은혜와 기쁨과 영광의 상태를 영원히 누린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화려함과 쾌락에 취하여 영원에 비추어진 자신의 실상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가장 비참한 멸망의 내용은 아닌지 모르겠다.

문제의 관건은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하느냐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물리적인 거리 좁히기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멀리' 혹은 '가까이'와 같은 거리 개념의 의미론적 전환이 필요하다. 본문에는 "가까이 함"의 의미가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라는 표현으로 암시되어 있다. 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믿음의 조상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상당부분 겹쳐진다.

피난처는 나 자신의 일부만 보호하고 가려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전부가 완전히 파묻히는 장소이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도 물리적인 주거를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15장에 의하면, 거룩과 순종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단이다. 거룩과 순종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맞물려 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고서도 거룩해질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순종은 행위이고 거룩은 상태이다. 그러나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행위와 상태가 구분되지 아니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기에 시인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았다." 피난처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고 거하는 방식은 물리적인 거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여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신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이고 싶어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시지만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하지도 않는다.

시인의 글에서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복"의 구체적인 개념이 선명하지 않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심지어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것까지도 주님을 따르고자 하였다. 이보다 강렬한 그리스도 연합을 추구했던 다른 인물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생명과 죽음까지 상대화할 줄 알았던 사람이 바울이다. 

2013년 11월 17일 일요일

초창기(1892) 칼빈의 커리큘럼

학부 4년 준비과정 (4-Year Preparatory, undergraduate)

1년차: 지리학, 헬라/로마 신화, 헬라/로마 고전
Geography, Greek, Roman and Northern mythology, Greek and Roman antiquities.
2년차: 수사학, 웅변술, 미국/화란 역사, 철학사, 논리학, 심리학, 히브리어
Rhetoric and Elocution, American and Dutch History, history of Philosophy, Logic, Psychology, and Hebrew
3년차: 일반역사, 독일어
General History and German Language
4년차: 화란어, 영어, 라틴어, 헬라어
Dutch, English, Latin, Greek languages

신학과정 (3-Year Theological Studies, seminary)

1년차: 성경지리 및 성경 고대학, 성경역사, 자연신학, 교의학 서론, 본문비평, 신약 헬라어, 실천신학
Biblical Geography and Antiquities, Biblical history, Natural Theology, Introduction to Dogmatics, Text Criticism, NT Greek, Practical Theology
2년차: 신조학, 종교의 역사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교리사, 윤리학
Symbolics, History of Religions(hinduism, islam, budhism), History of Doctrine and Ethics
3년차: 교의학, 주석학, 기독교 기초, 교회사, 강해학
Dogmatics, Exegesis, Isagogics, Church History, and Homiletics.

2013년 11월 15일 금요일

정직한 자의 기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신다 (잠15:8)

지식이 없는 소원은 선하지가 않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 지식을 일컫는다. 선 자체시고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모르고도 소원이 선할 수는 없다. 그런 소원은 대체로 자기를 향하거나 진정한 선이 아니라 오히려 해로운 것을 구하기가 쉽다.

"정직한 자의 기도"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계한다. 정직의 반대는 거짓이다. 거짓은 우리의 죄악된 본성과 결부되어 있다. 거짓에 대한 어거스틴 이해가 잘 보여준다. 거짓이란 거짓된 의도를 가지고 거짓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의도의 거짓과 내용의 거짓이 거짓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화자의 생각과 말과 청자의 이해 사이에 삼중적인 일치가 없으면 거짓이 빚어진다. 말은 두 가지를 가리킨다. 하나는 화자의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청자의 개념이다.

"정직한 자의 기도"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해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개념과 일치되는 기도이다. 마음에 쌓인 생각이 기도와 다르다면 의도의 거짓이 발생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생각과 부합하지 않으면 내용의 거짓이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는 완전한 일치가 있다. 정직의 내용이고 표준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것도 거짓일 수밖에 없다. 말씀이신 성자는 성부와 하나이다. 하나라는 것은 완전한 일치를 의미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시다.

"정직한 자의 기도"는 인간이 스스로 드릴 수 없는 기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고 내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으로 있을 때에만 비로소 정직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마음과 생각이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면 생각의 충만을 가리키는 우리의 말도 주님을 가리킬 수밖에 없고 당연히 우리의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일치와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입에 물려주신 주기도문 가지고 기도한다. 모든 기도가 주기도문 안에 표함되어 있다. 정직한 자의 기도는 주기도문 내용이 목마르고 마음에 사무친 사람의 기도이다.

"정직한 자의 기도"가 그냥 있는대로 하나님께 아뢰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의 정직일 뿐이고 내용의 정직은 아직 확보되지 않은 기도이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만큼 정직하고 하나님을 아는 만큼 기도한다.

그래서 기도의 자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과 감사와 감격과 경배의 자리인 것이다. 

2013년 11월 14일 목요일

오직 주께만 범죄하여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시51:4)

말씀을 먹다가 늘 목에 가시처럼 걸리는 구절이다. 한 가정을 파괴하고 한 여인을 유린하고 한 충신을 모살한 다윗의 인륜에도 반하는 범죄가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저질러진 일로 간주되고 마치 피해자에 대한 책임과 도의는 저버리는 듯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이 '불편하고 성가진' 구절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진리의 조각을 담아내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죄의 궁극적인 대상이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인간 및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것이니 결국 하나님과 관계되지 아니할 수 없다.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서 저질러진 하나님을 향한 죄다. 다윗은 잉태와 출산에서 시작하여 존재와 생각과 말과 행실에 하나님을 향한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인식론을 가진 사람이다. 이것을 타인들에 대한 죄책이나 도의를 무시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되겠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구절은 결코 자신과 타인과 사회와 피조물 전체에 대한 죄의식에 면죄부를 제공하지 않는다. 죄의 본질적인 성격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 타인을 향한 우리의 태도 배후에 어떤 전제들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는 구절이다.

즉 타인에 대해 저지르는 죄는 그 사람이 크든 작든 부하든 가난하든 천하든 존귀하든 차별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죄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부하, 직원, 아내, 자식, 하청업체, 후진국, 문맹국, 피난민, 이민자들 등에 대해서도 동일한 인식을 가져야만 한다.

죄를 저지르고 불의를 행하고 악독을 발산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욕설을 쏟아내도 돌아오는 보복의 강도가 약하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강행하는 습성이 DNA 아랫묵을 차지한다. 재력과 정치력과 조직력을 갖춘 사람들에 대해서는 순한 멍멍이의 태도를 취하면서 말이다.

지극히 연약한 자에게 행한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 행한 것이라고 주님은 친히 말씀하고 계신다. 지극히 작아서 존재감 제로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는 그 지으신 창조주를 멸시함과 같다는 지혜자의 말도 의미의 결이 동일하다. 모든 죄는 "주께만 범죄"한 것이다.

삶의 전 영역에서 이런 의식이 살아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죄에 대한 다윗의 인식론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되겠다. 교회가 이런 의식으로 단단히 무장하면 좋겠다. 나부터...

개인논문 요약

The Academization of Reformation Teaching in Johann Heinrich Alsted (1588-1638)

알스테드 신학을 통해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범학문화 현상을 조명했다.

1. 문제상황: 정통주의 시대의 지성사를 주로 연구하는 옥스포드 교수 Howard Hotson은 정통주의 인물들이 종교개혁 신학을 떠났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그들이 1) 인간의 지성적 의지적 작용적 능력의 완전성이 하나님의 이미지에 중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주장과, 2) 총체적 교육이 그 이미지의 회복을 돕는다는 주장과, 3)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는 그런 회복에 자연적인 출발점을 제공할 충분한 원리들이 있다는 주장을 펼쳐서다. 종교개혁 주역들의 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2. 문제설정: 나는 정통주의 인물들이 이러한 주장을 했다는 것에 의문을 갖졌다. 그래서 원문을 조사했다. 유사한 표현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해였고 오해의 근원도 발견했다. 학교에 대한 알스테드 언급만 사려했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였다. 알스테드 신학에서 특별히 신학과 학문의 관계성과 원리들이 무엇인지 고려하지 않아서 정통주의 인물들을 합리주의, 인본주의, 펠라기안 사상의 옹립자인 것처럼 오해했던 거다. 

3. 본문: 논증의 핵심은 땅에서 좋고 올바른 것을 연구하는 모든 진정한 학문들의 원리가 하나님 자신과 성경이란 점에 있다. 철학을 비롯한 학문의 의미가 알스테드 안에서는 이런 원리를 사려하지 않으면 오해가 발생한다. 핫슨은 학문의 원리를 간과했다. 학문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가능함을 말하였던 근거는 일반학문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성경에 뿌리를 둔 학문의 기능을 설명했던 것이다. 지정의 모두가 성경 중심적인 학문에 의해 완전하게 자라난다. 당연히 신학과 학문은 엄밀하게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고 협력한다. 그래서 케커만과 알스테드 신학은 체계가 신학이란 범주에만 머물지 않고 학문 전체의 포괄을 시도한다. 종교개혁 정신은 이렇게 정통주의 인물들을 통하여 신학적 체계화와 고백화와 교육화를 넘어 학문 전체로 확대된다. 

4. 결론: 알스테드 및 케커만을 비롯한 정통주의 학자들이 시도한 신학의 범학문화 경향은 종교개혁 신학의 이탈이 아니라 확대와 원숙으로 이해함이 더 타당하다. 이러한 평가의 근거는 그들이 핵심적인 종교개혁 가르침을 하나도 버리지도 않았고 타협도 안했으며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이다. 

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하나님을 동류로 여기는가?

네가 이러한 것들을 행하여도 내가 침묵을 지켰더니 내가 너와 동일한 줄 아는구나 (시50:21)

우리는 상대방이 취하는 반응에서 그를 해석한다. 이를 뒤집으면,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가 나를 상대에게 대단히 많이 노출하는 셈이 된다는 거다. 우리는 반응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서로를 알아간다. 상대방의 반응에 근거하여 다음 반응을 결정한다. 이러한 반응의 반복으로 관계의 날줄과 씨줄이 형성되고 앞으로의 상대방에 대한 반응의 결이 굳어진다.

하나님을 대할 때에도 유사한 패턴이 적용된다. 하나님의 존전을 한 순간도 벗어날 자가 없기에 시간의 모든 찰나가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다. 이렇게 보면 삶이란 단절되지 않는 반응의 연속이다. 무수히 이어지는 관계의 연습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의 결이 형성된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는 반응하고 있고 그것을 무수히 반복하고 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인생 일반과는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일례로, 모든 사람들은 인내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대상의 수와 시간의 길이에 있어서 무궁하다.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반응에 기초하여 다음 반응을 결정하면 곤란에 봉착한다. 곤란의 이유는 하나님이 참아주신 것인데 승인으로 읽기 쉬워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면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게 되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도 현저히 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먹이 두려워서 만들어진 반응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다. 그래서 주먹으로 공포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다스리지 않으시고 길이 참으시는 방편을 택하셨다. 강요된 반응보다 자발적 반응을 기다리고 계신다.

만약 하나님의 무궁한 인내를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투영시켜 하나님의 침묵을 승인으로 해석하게 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를 기준으로 해석된 하나님을 참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간주하게 된다. 하나님을 나와 동류로 여긴다. 무례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와 용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이처럼 자신과 하나님을 비기려고 한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나를 해석해야 하는데 순위가 뒤바꼈다. 나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해석하고 하나님께 반응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삶 전체가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며 하나님에 대한 해석이다. 하나님을 동류로 해석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된다. 자발적 두려움과 경외을 주님은 기다리고 계신다.

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고대인의 축복은?

고대인의 축복은 지상적인 것이었나? 칼빈은 아니라고 한다. 

1) 잃어버린 에덴의 복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지극히 괴로웠을 아담은 고달픈 노동의 소산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2) 하나님의 저주와 힘겨운 노동도 부족한듯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참살하는 극도의 비극까지 견뎌며 죄의 삯이 사망이란 사실을 목도해야 했다. 

3) 죽은 아들에 대한 슬픔만이 아니라 산 아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도 깊은 증오와 격한 몸서리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4) 노아는 온 세상이 쾌락으로 태평의 세월을 구가하고 있을 때에 100여년간 방주 건조에 시달렸다. 겨우 죽음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백번 죽는 것보다도 더 고생스런 삶이었다.

5) 10개월간 방주는 무덤이나 감옥을 방불했을 것이다. 짐승들의 배설물에 파묻혀 살았으며 외부로 출입할 수 없도록 갇혀 살아서다. 

6) 이러한 괴로움 이후에도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홍수에 살아난 아들까지 자기를 조롱하고 결국 자기 입으로 그 아들을 저주해야 했다. 

이로 보건대, 구약의 선조들도 지상의 생명에 연연하지 않고 보다 나은 하늘의 생명을 늘 묵상하고 고대하며 살았다는 게 칼빈의 입장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지금이나 사람 살아가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만이 소망이다.

 칼빈, 기독교 강요, II.x.10.

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멸망하는 짐승의 삶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49:20)

깨달음이 존귀도 무용하게 만든다. 깨달음이 없으면 존엄한 인간도 멸망의 짐승과 같아진다. 여기서 깨달음은 구속과 관계된 것이다. 시인은 생명을 구속하는 비용이 너무도 막대하여 충분히 지불할 위인이 아무도 없다고 단언한다. 

구속의 무한한 고비용 때문에 자신의 부를 의지하고 부요함을 자랑하는 자들도 자신들의 형제를 구속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구속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으면 짐승의 운명과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시인은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고 명예가 하늘까지 치솟아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진술한다. 인간이 아무리 부하고 영예를 블랙홀 수준으로 흡입한다 할지라도 구속과는 무관한 죽음으로 생이 종결되기 때문이다. 

노아의 시대에 홍수로 인해 온 세상이 통째로 수장되는 댓가를 지불해도 여전히 마음의 도모하는 바가 어릴 때부터 악하다는 인간의 죄성은 제거되지 아니했다. 이는 구속의 고비용을 얼추 짐작할 수 있는 가장 장엄한 비극이다. 

땅에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편을 동원해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획득하지 못하는 구속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다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아진다. 그렇다고 우리는 복음을 믿었고 구속을 받았으니 안심해도 되겠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구속을 받았다고 믿는 분들이 부를 축적하고 명예를 추구하는 범부들의 패턴을 선망하고 그 궤도에 삶을 안착시킨 경우가 적지 아니하다. 사는 동안에 자기를 복되게 하고 자기를 노래하고 스스로를 선대하는 생의 허망함에 무지하다.

구속의 존귀에 이른 이후에도 멸망하는 짐승과 같아지는 길을 걸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2013년 11월 10일 일요일

인간성을 향한 파스칼의 외침

성경의 영감을 논하면서 바빙크는
인간성을 향한 파스칼의 호통을 인용한다. 

이제 알라, 오만한 인간이여, 네가 얼마나 네 자신에게 역설인지.
겸손하라, 무기력한 이성이여. 잠잠하라, 어리석은 본성이여.
너도 모르는 네 자신의 실상을 배우려면 경청하라, 하나님을.

 Pascal's Pensées, 434; Bavinck, Reformed Dogmatics, 1:441.

2013년 11월 9일 토요일

진리 앞에서의 유연성

지성은 수단이지 원천이 아니라고 바빙크는 말한다. 지식의 기관과 원천의 동일시는 이념의 산물이다. 이는 눈을 빛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사유의 과정에서 사상 자체를 연역하는 것과 일반이다. 엉뚱하다.

세상에는 이런 뚱딴지 논법이 이곳 저곳에서 난무한다. 사물과 사물의 표상, 존재와 사유, 존재하는 것과 지각하는 것은 종류에 있어서 전적으로 다르다. 결코 동일하지 않는데도 끝까지 혼돈을 고집한다.

성경의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서의 문제로서 히포의 주교가 지적한 두 가지가 떠오른다. 즉 “진리가 알려지기 이전에 전제를 가지는 것”과 “진리가 알려진 이후에도 잘못된 전제를 여전히 옹호하는 것” 말이다.

진리 앞에 다른 전제를 앞세우는 오만함과 진리인식 이후에도 그 전제를 고집하는 완고함이 건강하고 순수하고 정직한 학문과 삶의 목덜미를 붙잡는다. 진리로 시작하고 진리에 머물고 진리를 지향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진리 자체의 우선성과 진리 앞에서의 유연성이 중요하다.

말씀의 은혜

베드로는 예수님을 일컬어 "영생의 말씀"이라 고백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할 때에 밀려오는 임재의 은혜는 홍수의 범람을 방불한다. 잔잔한 음성으로 가장 깊은 곳까지 가까이 오시는 주님의 지혜는 도무지 측량하질 못하겠다.

오늘은 가족들과 식후에 찬양을 불렀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에 음률을 입힌 곡이었다. 입에서 한 마디를 밀어낼 때마다 깊은 곳에서 발동한 울컥 때문에 곡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은혜다. 은혜다. 모든 게 은혜다.

2013년 11월 8일 금요일

종교: 인간의 고유성

인간의 행복은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

종교에 의해서: 이것은 인간에게 너무도 고유한 것이기에 이성보다 인간으로 하여금 짐승과 더 잘 구별되게 만들며 종교는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있어서다. 이는 짐승들도 이성의 불씨 혹은 유사물은 가지고 있지만 종교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James Ussher, A Body of Divinity, 1.

2013년 11월 6일 수요일

구이도 드 브리스의 신앙

피의 희생으로 작성된 벨직 고백서의 1562년 판본이다. 작성자 구이도 드 브리스(Guido de Bres)가 핍박의 살벌한 칼을 휘두르던 스페인 왕 필립에게 보낸 서신이 서문처럼 첨부되어 있다. 읽자마자 가슴에서 결연한 울음이 저절로 터지는 부분을 일부 번역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대의를 위하여, 아니 그리스도 예수의 대의와 진리의 증거를 위하여 쏟아진 형제들의 피가 우리를 위하여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며, 진실로 우리의 소망이 결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출교와 투옥, 추방과 학대, 고문과 다른 무수한 탄압들이 보여주고 있는 탓입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가르침을 고수하지 않았다면 육체를 따라서는 훨씬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이렇게 모진 고초를 당하고 있으니 이것보다 더 명확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을 우리의 눈 앞에 간직하고 있으며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부인하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부인하실 그리스도 예수의 엄중한 경고를 심히 경외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등짝을 채찍에 내어주고, 우리의 혀는 칼날에 내맡기고, 우리의 몸은 화염에 양도하는 것입니다.”

Guido de Bres, Confession de foy, faicte d'un commun accord par les fidèles qui conversent ès Pays-Bas, lesquels désirent vivre selon la pureté de l'Evangile de Notre Seigneur Jésus-Christ (1562)

2013년 11월 5일 화요일

싸움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히12:4)

싸우지 않고서는 변화도 성숙도 성취도 없다.
가만히 있으면 스물스물 자라는 건 죄 뿐이기 때문이다.
내면에는 끊임없는 전쟁의 결과로서 평화가 보존된다.

시대적 문제의 삽바나 멱살을 거머쥐고 매달려야 한다.
특히 젊었을 때에는 온 인류와 역사 전체를 의식하며
가장 거대하고 근원적인 물음을 선별하고 씨름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우리가 팔짱을 끼고
뜨끈한 아랫묵에 앉아 나른한 TV를 보듯이
세상을 관망하며 살아가는 그런 종류의 피동성이 아니다.

생명의 씨앗이 뿌려지기 위해서는
단단한 땅이 부드럽게 기경되지 않으면 안되듯이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고 씨름하고 부대끼며 기경해야 한다.

초등학교 교육을 받는 아이들만 보더라도
정직이란 가치가 그들의 인격과 삶에 심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단하고 심지어 기적적인 일인지가 확인된다.

정직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격적 성화 혹은 거룩도 그러하다.
치열하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발견되는 가치가 없고
죽기까지 부단하게 싸우지 않고서는 얻어지는 변화가 없다.

절망보다 미련한 것은 없고 포기보다 교만한 것은 없다. 
소망이신 우리의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고
세상 끝날까지 누구도 폐하지 못할 동행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녹록하게 보아서는 아니된다.
피흘리기까지 싸우고 또 싸워야 할 삶의 전제이다.
결국은 선을 이루게 될 삶의 은밀한 섭리적 장치이다.

이마에 수고의 땀방울이 흘러야 소득이 주어진다.
이것은 타락 이후에 부여된 하나님의 은총이요 질서이다.
그 땅방울을 핏방울로 대신하신 주님은 우리의 모범이다.

2013년 11월 4일 월요일

기다림의 은혜

학위가 손아귀에 들어온지 벌써 반년이 흘렀다. 짧았지만 주님의 손에 맡겨져서 그분이 사용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확신에 이르렀다. 주께서 원하시고 예비하신 곳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좀처럼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코너를 도는 타이밍에 이르러야 비로소 보인다는 친구의 말도 떠오른다.

오늘 오랜 시간동안 공부하고 오래동안 섬김의 자리를 찾고 기다렸던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수십년의 세월동안 참으로 고단한 인생의 밑바닥 시간을 지나온 이후에 이민자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게 되었는데 그동안의 모든 고달픔이 이를 위한 훈련이요 준비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친구'의 삶 이야기도 귀에 솔깃했다.

두 친구의 진솔한 이야기가 나로 깊고 많은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내일일을 모르는 경우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보다 조바심이 앞질러 마음을 충동한다. 의식은 환경의 변화를 중심으로 이리휘청 저리휘청 흔들린다. 이러한 과정을 부끄러워 하거나 숨기거나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유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의 성숙에 본성의 밑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고난과 역경보다 더 효과적인 계기는 없어서다. 실제로 그런 과정을 지나가야 사람이 성숙한다. 시야도 넓어지고 마음도 여유롭고 반응도 느긋하게 된다. 그리고 환경이 조정하지 못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사사롭고 소모적인 것들이 고난으로 걸러진다.

본질이 시야에 들어오고 분별력도 맑아진다. 그러니 힘들고 괴로워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사실은 결코 부인하지 못하겠다. 죽음은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지각하게 만든다. 필터링이 보다 정밀하다. 그러니 죽음도 유익이다. 아니 죽음이 최고의 유익이다. 날마다 죽고자 하였던 자기부인 대가 바울의 신앙이 생각을 붙잡는다.

죽음을 방불하는 환난과 역경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벗들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서 주어진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어찌 이 세상을 살아갈꼬. 끔찍하고 오싹하다. 주님과의 불가피한 밀착을 일으키는 '절망'과 '낭패'는 적당한 때에 삶의 갈피를 비집는다. 이때에는 무너지는 가슴보다 설레이는 기대감이 어울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인의 가치관 뒤집기는 일상이다.

2013년 11월 3일 일요일

나홀로와 더불어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19:12)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아무도 나를 보지 않을 때가 진짜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책을 저술했다. 맞는 말이지만 첨언이 필요하다. 즉 인간은 누군가가 있을 때에도 본성에 잠재되어 있던 다른 종류의 본색이 표면으로 부상한다. 꾸미고 도모하고 변신한다.

홀로 있었을 때에는 인기척도 없던 자신의 흠결이 인간관계 속에서 표출되는 일이 빈번하다. 사람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수록 유익하다. 자신도 알지 못하였던 은밀히 감추어진 허물까지 발견하게 되니까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누이는 자는 어리석다. 이유는 이렇다. 대체로 혼자 있으면 자신의 본모습이 들키지 않아서 무리를 기피한다. 코드에 맞는 사람과의 소통을 선호한다. 누구나 괜찮은 자신을 발견하고 싶어하지, 자신도 몰랐던 허물과의 직면은 불쾌한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무리와의 단절 혹은 격리를 택한다면 타인에게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경험하지 못하고 고치지도 못하고 결국 진정한 성장의 기회가 박탈되고 만다. 그러니 어리석을 수밖에. 자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객관적 나 자신을 만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무리와의 연합만이 능사는 아니다. 사람들의 기호나 반응에 대한 반작용 차원에서 '만들어진 나'로 주조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또한 나에 대한 타인의 관찰이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그런 관찰에 충실히 반응하는 것이 '최선의 나'를 만들지는 않아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에 가장 객관적인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숨은 허물에 대해 하나님께 깨달음을 요청하는 다윗은 참으로 지혜롭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알면 알수록 나 자신을 보다 정확하게 깨닫는다.

Cloude Frassen의 스코투스 연구

로마 카톨릭의 입장이긴 하나 17세기 스코투스 전문가로 통하였던 클라우드 프라센의 방대한 저작 Scotus academicus seu universa doctoris subtilis theologica dogmata (초판은 1720년) 1900년도 판본을 링크시켜 둔 사이트를 찾았다. 스코투스 신학의 체계와 내용과 방법론 연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요 문헌이다.

Cloude Frassen, Scotus academicus seu universa doctoris subtilis theologica dogmata (1900)

2013년 11월 1일 금요일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시기구분

나타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말미암은 것이라는 원리에 기초하여 온 세상이 말씀으로 지어진 줄 안다는 바울의 고백은 보이고 나타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미 지나가서 보이지 않지만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고대성을 사모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경험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구원의 나타난 형식적 수단(칼빈)이란 사실에서, 수단 너머의 보다 깊은 구원의 비가시적 근원으로 소급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이는 믿음이 모든 예정된 자들에게 허락되는 은혜의 결과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의 신학적 사색은 그 은혜가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놀라운 구속적 은혜의 근원을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 외에 다른 것으로 돌리려는 어떠한 신학적 시도들도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목회적인 차원에서 전도와 기적과 믿음의 고백과 지식의 증가와 인격의 성숙과 삶의 향상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과 성화에 대하여 가지는 도구성의 가치 이상의 과도한 의미를 그러한 것들에 부여할 때 비록 가시적인 성장과 부흥의 효과를 거둘 수는 있겠지만, 건강하고 교회다운 교회의 참모습을 건설함에 있어서는 은밀한 역주행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가 중세의 어두운 신학적 오류와 침체에 각성과 개혁의 강력한 빛을 던져 주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종교개혁 정신을 일깨우는 각성의 계기가 너무 과장되어 보다 깊은 진리의 근원으로 소급하는 일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신학적 만족과 안주가 루터주의 진영에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는 신학의 옛날 얘기만은 아닙니다. 한국에 개혁주의 신학이 들어올 때를 유심히 살펴보면, 동일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 한국에서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표준문서 같은 역할을 한 책입니다. 정말 훌륭한 책입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벌콥의 가치가 과장되면 한계를 한계라고 말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은 벌콥의 한계에 대한 건설적인 지적과 함께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벌콥의 소스로 소급하는 신학적 진일보를 내디뎌야 할 시점이 훨씬 지난 때인데도 그러한 노력의 기색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한 신학자와 그의 신학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가 사용한 소스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벌콥에게 표준 텍스트가 되었던 바빙크의 개혁주의 교의학 전권이 번역되어 출판된 것은 획기전인 진일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에 새순이 돋아나는 봄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과 같습니다. 나아가 바빙크도 정복하고 그의 소스였던 17세기 정통 개혁주의 신학으로 소급하여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이 새롭고 원숙한 계절을 맞이하는 때가 조속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16세기 및 17세기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 끝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신학의 종점이 아니라 정거장일 뿐입니다. 종교개혁 및 중세 시대를 지나 교부로 소급하고 결국 성경의 근원적인 진리에 이를 때까지 신학적 소급은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이런 신학의 여정은 모든 목회자와 신학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며, 그 여정은 죽는 순간까지 끝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논할 때에 우리는 ‘과거에 빚지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에 있어서도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이 유럽과 북미를 휩쓸었던 20세기 신학은 17세기에 이루어진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마치 계몽주의 사상을 잉태한 주범으로 간주하여 연구와 계승의 대상이 아니라 철저히 경계하고 비판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 시도를 했습니다.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을 16세기 종교개혁 정신의 신학적 체계화로 보는 분들이 가뭄에 콩 나듯 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말기부터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재평가 필요성을 제기하는 분들이 하나 둘씩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기수가 하이코 오버만과 데이빗 쉬타인메트 교수의 신학적 계보를 이어가고 현저히 발전시킨 리차드 멀러 교수입니다. 멀러 교수는 교부신학, 중세신학, 종교개혁 신학과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 본질에 있어서는 연결되어 있으며 방법론과 양상에 있어서는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를 가지고 다음과 같은 구분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 종교개혁 1세대:

쯔빙글리(Huldrich Zwingli, 1484-1531): De vera et falsa religions commenatrius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Loci communes, Martin Luther Werke
부처(Martin Bucer, 1491-1551): Defensio adversus axioma catholicum
(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 Simon Grynaeus 1493-1541, William Farel 1489-1565)

- 종교개혁 2세대: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 Loci communes
칼빈(John Calvin, 1509-1564):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 1499-1562): Loci communes
무스쿨루스(Wolfgan Musculus, 1497-1563): Loci communes
히페리우스(Andreas Hyperius, 1511-1564): De theologo, Elementa christianae religioinis, Methodus theologiae
비레(Pierre Viret, 1511-1571): Disputationes chrestiennes, Instruction chrestienne, Exposition familiere sur le Symbole des Apostres
아레티우스(Benedictus Aretius, 1505-1574): Examen theologicum, S S theologiae problemata seu loci communes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 Compendium christianae religionis, Confessio ex exposition simplex orthodoxae fidei, Sermonum decades quinque, De scripturae sanctae authoritate, De origine erroris, De testament seu foedere Dei

- 초기 정통주의 시대 (1565-1618-1640): 종교개혁 2세대의 사망, 고백서 및 교리문답 형성; 국제적인 개혁주의 총회(Dort, 1618-1619)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엄밀성 제고, 30년전쟁(1618-1648); 여러 유력한 학자들이 사망 (특징: 고백적 울타리가 형성된 이후에 왕성한 신학적 체계화가 이루어짐, 신학적 학문적 통합의 움직임도 활발함)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 1545-1602): Opuscula theological selecta
잔키우스(Girolamo Zanchius, 1516-1590): De natura Dei, De religione christiana fides, De scriptura sacra, De tribus Elohim
퍼킨스(William Perkins1558-1602): De praedestinationis modo et ordine
베자(Theodore Beza, 1519-1605): Confessio christianae fidei, Propositions and principles of divinitie, Quaestionum et responsionum christianarum libellus, Tractatioines theologicae
다네우스(Lambertus Daneaus, 1535-1590): Isagoges christianae, Methodus sacrae scripturae, Compendium sacrae theologiae, Ethices christianae, Politices christianae, Physice christianae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1534-1583): Doctrinae christianae compendium, Explicationes catecheseos, Loci theologici, Scholastica materiis theologicis exercitationes
올레비아누스(Kaspar Olevianus, 1536-1587): De substantia foederis, Expositio symboli apostolici
부카누스(William Bucanus, 1603): Institutiones theologicae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 A treatise of the Christian religion
토사누스(Daniel Tossanus, 1541-1602): Synopsis de patribus
트렐카티우스(Lucas Trelcatius, 1542-1602): Scholastica methodica locorum communium institutio
케커만(Bartholomaeus Keckermann, 1572-1609): Praecognita philosophica, Scientiae metaphysicae, Systema logicae, Systema sacrosanctae theologiae, Systema ethicae
폴라누스(Amandus Polanus, 1561-1610): Syntagma theologiae christianae, Symphonia Catholica
루베르투스(Sibrandus Lubbertus, 1556-1625): De principiis christianorum dogmatum
에임즈(William Ames, 1576-1633): Medulla ss theologiae, Bellarminus enervates, Disputatio theological de perfection ss scripturae
볼레비우스(Johannes Wollebius, 1589-1629): Compendium theologiae christianae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 1563-1641): Disputationes theologicae
왈레우스(Antonius Walaeus, 1573-1639): Loci communes s. theologiae, Enchiridion religionis reformatae
알스테드(Johann Heinrich Alsted, 1588-1638): Definitiones theologicae, Metaphysica, Methodus sacrosanctae theologiae, Theologiae didactica, Theologia catechetica, Theologia naturalis, Theologia polemica
트위스(William Twisse, 1578-1646): Ad Jacobi Arminii collationem cum Francisco Junio, Vindiciae gratiae potestatis ac providentiae Dei, Dissertatio de scientia media
마코비우스(Johannes Maccovius, 1588-1644): Loci communes, Metaphysica, Distinctiones et regulae theologicae et philosophicae
우셔(James Ussher, 1581-1656): A body of divinity
러더포드(Sameul Rutherford, 1600-1661): The covenant of life opened, Disputatio scholastic de divina providentia, Exercitationes apologeticae pro divina gratia
샬피우스(Johannes Scharpius, 1572-1648): Cursus theologicus

- 정통주의 절정의 시대 (1640-1685-1725): 유력한 인물들의 사망, 낭트칙령, 재앙적인 사회적 문화적 격변기, 영국의 대규모 삼위일체 논쟁의 발발, 사무엘 클락의 신학에 대한 논쟁; 탈고백화 시대의 시작 (특징: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하고 편찬된 정절기다, 논박적, 스콜라적, 규정적, 교육적, 문답적 형태의 신학적 쟝르들이 다양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었음, 아미랄드 논쟁과 소무르 학파와의 논쟁, 코케이우스 언약론에 대한 논쟁, 언약론적 관점이 개혁파 정통주의 체계에 폭넓게 수용됨, 소시누스 학파의 도전, 데카르트 및 스피노자 철학의 발흥)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 1630-1706): Theoretico-practica theologia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ius, 1603-1669): Summa theologiae, Summa doctrinae de foedere et testament Dei
마레시우스(Samuel Maresius, 1599-1673): Collegium theologicum sive systema breve universae theologiae, These theologicae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 1589-1676): Disputatio philosophic-theologica, Selectae disputationes theologicae
오웬(John Owen, 1616-1683): Theologoumena pantodapa
벤델린(Marcus Friedrich Wendelin, 1584-1652): Christianae theologiae, Collatio doctrinae christianae Reformatorum et Lutheranorum
F. 투레틴(Franciscus Turretinus, 1623-1687): Disputatio theological de scripturae sacrae auctoritate,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위시우스(Herman Witsius, 1636-1708): De oeconomia foederum Dei, Theologia pacifica, heologus modestus
브라켈(Wilhemus a Brakel, 1634-1711): 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
M. 레이데커(Melchior Leydekker, 1642-1721): De veritate religionis reformatae seu evangelicae, Disputatio historic-theologica de Arianismo, Exercitationes theologicae, Synopsis controversiarum de foedere et testamento Dei
픽테트(Benedict Pictet, 1655-1724): Theologiae christiana
말키우스(Johannes Marckius, 1656-1731): Christianae theologiae medulla, Compendium theologiae christianae
J. 튜레틴(Jean Alphonso Turretin, 1671-1737): De theologiae naturali, De veritate religionis judaicae et christianae, Cogitationes et dissertationes theologicae

- 후기 정통주의 시대 (1725-1770): 교의학적 체계가 사라지지 않았고 특별히 교리적 정통을 보존한 후속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 운동을 이끈 경건주의 인물들을 비롯한 후세들이 여전히 개혁파의 고백적 체계에 생동력을 부여하고 있었음; 그러나 신학은 철학과의 연관성을 상실하고 해석학의 학문적 방법론이 완전히 무너진 시대였고, 스콜라적 방법론이 아카데미 및 대학에서 표준 방법론의 자리를 상실하게 됨.

길(John Gill, 1697-1771): Complete Body of Doctrinal and Practical Divinity
쉬타퍼(Johann Friedrich Stapfer, 1708-1775): Institutiones theologiae polemicae universae, Grundlegung zur wahren religion
비텐바흐(Daniel Wyttenbach, 1706-1779): Theses theologicae praecipua christianae doctrinae, Tentamen theologiae dogmaticae methodo scientifica pertractatae
베네마(Herman Venema, 1697-1787): Exercitationes de vera Christi divinitate, Institutes of Theology

- 중요한 고백서들:

Gallican Confession (1559),
Scots Confession (1560),
Belgic Confession (1561),
Thirty-Nine Articles (1563),
Heidelberg Catechism (1563),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Irish Articles (1615),
Confession of Sigismund (1614),
Brandenburg Confession (1615),
Canon of Dort (1619),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