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0일 금요일

생의 조각

하나님은 늘 최적의 타이밍에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감사로 이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을 적기에 상기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에서 왔음을 보이시며 헛된 번영기의 허리를 꺾으신다.
인생은 이런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정인가 보다...
인생의 모든 시간 조각들은 이런 교훈의 계기들로 주어지는 듯하다.

2014년 10월 8일 수요일

깨달음의 복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13:14)

성경 텍스트를 읽었는데 나에게 의미가 되지 않는 경우가 이따금씩 있다. 그때마다 아찔하다. 송이꿀도 상대화될 수밖에 없는 영적 당분의 보고인 말씀을 먹는데도 그 천상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보다 심각한 건강의 적신호는 없기 때문이다.

위의 말씀은 1세기에 예수님을 보고서도, 그의 말씀을 듣고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알지 못했다는 당시의 시대적 어두움을 꼬집는다. 이는 빛의 근원이신 분이 오셔서 인류에게 가장 명료한 계시가 되셨어도 영적 지각들이 기능하지 않고 캄캄함 속에 갇혀 있어서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사람에게 보이고 들리도록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셨어도 깨닫지를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정상인지 모르겠다. 이는 눈과 귀의 비정상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일그러진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지각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문제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시었다. 눈의 보는 기능과 귀의 듣는 기능은 주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보고 들었다면 주께서 은총을 베푸신 증거라는 이야기다. 눈과 귀가 우리의 것이어도 주께서 주관하는 기관이란 이야기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쳤지만 의미가 읽어지지 않을 때마다 나는 복을 생각하며,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복을 간구한다. 그리고 성경을 깨닫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읽는 것은, 사회의 생리를 감지하는 것은 다 주께서 거저 베푸신 복의 결과라는 것을 곱씹는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지만 좀처럼 의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무진장 답답했다. 그때 당황하지 않고 답답함 자체를 해부의 대상으로 삼고 그 속에도 깨달음의 조각이 있지는 않을까를 살피다가 깨달음 자체의 복된 속성과 진지하게 마주쳤다.

주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어떻게든 은혜를 베푸신다. 도무지 깨달음이 비집고 들어갈 수 없도록 딱딱한 머리의 소유자도 이렇게 은총에 잠기게 만드신다. 멋지신 분!

아퀴나스 공부법

De modo studendi

1. 초장부터 깊은 해양으로 들어가려 하지 말고 얕은 개울로 들어가라.
2. 말하기를 더디하고 수다떠는 공간은 출입을 삼가해라.
3. 양심의 순수성을 보존해라.
4. 기도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중단하지 마라.
5. 술독에 빠지지 않으려면 너의 골방을 빈번하게 활용해라.
6. 자신을 모든 이들에게 사랑스런 사람으로 나타내라.
7. 타인의 행실에서 감추어진 의미를 캐내려고 달려들지 마라.
8. 어떤 이에게도 자신을 너무 친밀한 것처럼 다가가지 말라. 과도한 친밀은 모멸을 낳고 너로 하여금 공부에서 뒷걸음 칠 빙거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9. 세상 사람들의 일과 말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지 마라.
10. 위의 모든 것들보다 공허한 논쟁에 말려들지 마라.
11. 네가 듣는 것의 출처에 얽매이지 말고 언급되는 선한 것들을 기억하려 해라.
12. 네가 읽고 듣는 것들은 이해하려 노력하고 감지된 의문들은 해소하려 노력해라. 저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네 마음의 서고에 저장해 두어라.
13. 너에게 과도한 것은 추구하지 마라.
14. 수종적인 열매를 맺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발자취를 뒤따라라.

2014년 10월 5일 일요일

정의를 깨닫는다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는다 (잠28:5)

정의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누구냐가 중요하다. 사람이 악하면 정의를 깨닫지도 못한다고 지혜자를 교훈한다. 깨달음은 그 사람의 됨됨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정의만이 아니다. 다른 모든 진리에 대해서도 됨됨이의 선행성이 요구된다. 우리가 깨끗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깨끗함을 깨닫지 못하며, 우리가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을 깨닫지 못하며, 우리가 의롭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의로움에 무지할 수밖에 없다는 시인의 진술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정의"라는 말은 법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공의로운 판결을 뜻하기도 하고 그 판결의 집행을 뜻하기도 한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이다. 하나님이 서 계신 곳이 정의이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모든 판단이 정의이고 그런 판단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정의의 구현이다. 이러한 정의의 개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서는 누구도 정의를 깨닫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악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악인인가 선인인가? 우리는 모두 악인이다. 그래서 늘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자기 중심으로 판단이 내려진다. 거기에 이따금씩 "정의" 혹은 "공의"라는 낯뜨거운 면피용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그런 민망함의 무마를 위해 명백한 불의를 공의나 정의로 보이도록 사람들의 시각을 임의로 교정하는 은밀한 조작도 불사한다. 나아가 인간문맥 안에서 합의된 정의의 개념을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에 투사시켜 하나님의 의를 판단하려 하는 인간의 부패한 심성은 기회만 되면 발동한다.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DNA 단위로 내려가면 실상은 동일하다.

우리는 악하기 때문에 정의의 변별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래서 우리가 정의를 깨닫는 일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셔야만 가능하다. 우리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를 식별하지 못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셨기에 우리는 정의를 깨닫는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찾아진 바 된 사람을 가리킨다. 주께서 우리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찾고 비로소 정의를 깨닫는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보고 있다면 그것은 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