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31일 목요일

잠언의 유익

잠언이 있어서 좋다.

어리석은 나로 슬기롭게 하며
경륜이 짧은 나에게 지식과 근심함을 주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명철한 자에게도 학식과 모략을 제공한다.
이렇게 잠언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혜의 샘이다.

그러나 잠언에서 얻는 지혜를
인간 문맥에서 벌어지는 위기 모면용 처세술로 간주하면
그리스도 예수와 연결된 지혜의 인격성을 놓친다.
성경의 지혜는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거기에서 비롯된 삶의 향기와 열매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잠언의 유익은 거기에 있다.
이는 고작 헬라인이 구하는
똑똑하고 근사한 지혜의 충족이 아니다.
잠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구이며
그들은 어떠한 태도로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것이 삶의 현장에 구현되는 양상은 어떤 것인지를
부부와 가정과 궁정과 군대와 이웃과 국가와 역사라는
광범위한 영역의 사례들을 풀어서 가르치고 있다.

잠언의 지혜를 돈벌이나 출세의 밑천으로 여기는 건
그것을 카네기 처세술과 동류로 격하하는 부당한 처사다.
이것이 긍정적인 사고방식 및 기복적 번영신학 풍조에 물든
일부의 교회문화 속에서는 갸우뚱한 평가로 보일 수 있겠으나
내 눈에는 그런 갸우뚱한 반응이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의 은밀한 욕망에 과도하게 적응시킨 것으로 보인다.

하루 1장씩 읽으면 1년에 12번 반복, 10년이면 120독이다.
이러한 산술과 횟수 언급에 불쾌해 할 거 없다.
지혜의 근육은 단시일에 길러지는 게 아니라
10년이나 20년 아니 일평생을 요구하는 장거리 경주임을
강조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먹고 살기 빠듯하고 바쁘다는 거 안다.
하지만 그러기에 지혜의 필요는 더욱 절박하다.
지혜에 대한 나의 평생공부 핵심은 이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처음과 나중이다."

시편낭독

날마다 시편과 잠언을 함께 읽는다.
특별히 시편은 마음의 정서를 윤택하게 한다.
정직하고 투명한 언어로 하나님을 만나고
느끼고 생각하는 그런 소통을 가능하게 하니까.

시편을 소리내어 읽으라는 권유도 받았다.
너무도 아름답고 감미로운 언어여서
혀를 그런 시어로 입히고 거기에 내 가슴을 담아
소리로 밀어내면 시편의 일상용어 효과가 있단다.

시편의 진솔하고 아름다운 언어들이
날마다 내 입술을 출입하는 평범한 일상어가 된다는 건
생각만 해도 하루종일 미소가 귀에 걸릴 일이다.
물론 자신의 언어순화 도구로 사용할 요량으로
시편을 낭독하는 건 적절하지 못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부수적인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그 자체를 추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시편의 낭독은 적극 추천한다. 해보면 정말 은혜롭다.
시편의 연감된 언어들을 내 입술로 뿜어내면 
마치 마음의 눈을 시편으로 덮고 세상을 보는 듯하다.

2012년 5월 29일 화요일

역사의 유익

역사를 공부하는 게 유익한 이유를 아들에게 물었다.

"많은 것들을 배우니까." 그건 결과이지 이유가 아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게 유익한 이유는
동일하신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고
그 역사의 중심에 선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해도 그것이 오늘과 무관한
과거의 소진된 시간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라면
굳이 무익한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 쓸 필요가 없는 거다.

그러나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그런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도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과거에서 오늘의 삶을 배운다.
예측 가능한 내일을 안심하며 기대하게 된다.
주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지 않다면
우리에겐 평강이 없고 불안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난 불확실한 우연을 껴안고 살아갈 용의가 전혀 없다.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안전한 삶의 보증이다.

2012년 5월 27일 일요일

성령강림 주일

주일 공기가 너무도 상쾌하다.

오늘 설교자 Jack은 성령의 어원적 의미로서
생명의 기본이라 할 호흡 개념을 강조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호흡도 생명도 없단다.
우리는 한 줌의 숨을 쉬더라도 그것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는
예배의 행위여야 한단다. 어얼~쑤.

2012년 5월 26일 토요일

존 파이퍼의 [혈통(Bloodlines)]

점심을 먹고 가족과 함께 서점으로 갔다.

존 파이퍼의 [혈통(Bloodlines, 2011)]을 붙들었다.
인종차별 문제를 경험과 성경과 신학으로 풀었다.
파이퍼에 따르면,
인종들 간에 물리적 문화적 신념적 차이(ethnicity)는 있지만
민족들 간의 우열을 주장하는 인종차별 옹호적인 태도나
생각이나 행위는 인종차별(racism) 개념에 해당된다.

파이퍼의 어머니는 경건이 하늘을 찌르던 분이셨다.
자녀를 교육하다 본인이 "Shut up"이란 말을 내뱉으면
곧장 세면실로 가 비누로 입술을 깨끗이 씼었을 정도다.
물론 파이퍼가 우매한 언사를 토해도 아들의 입술을
비누로 벅벅 문질렀다 한다.

파이퍼 어머니는
인종차별 정서와 행위가 상식이던 시대에 살았지만
흑인들을 노예로 삼는 것에 대한 교회의 투표에서
용기있는 '아니오' 표를 던졌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퍼는 인종차별 문화의 희생물로 가담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의 있는 그대로를 실토한다.

그러나 아무리 묵은 문화적인 때가 묻었어도
십자가의 피로써 혈통으로 말미암은 인종차별 문제를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는 논지를
힘 있는 필치로 개진한다.

일독을 권한다...

존 파이퍼 답게 무료 전자책 형태로 공개했다.
John Piper, Bloodlines (2011)

2012년 5월 25일 금요일

로마서, 앎과 삶의 어울림

로마서 12장 설교를 들었다.
11장까지 기독교 진리의 전체적인 체계를 설명한 이후에
그것을 전제로 한 삶의 구체적인 태도와 내용을 소개하는
12장에는 기독교 윤리를 압축적인 형태로 제시한다.

로마서의 교리적 설명을 생략하고 12장 이후로 전개되는
실천적인 측면만 주목하면 그것의 본의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삶에 구현함에 있어서도 얕은 연출의 수준을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진리가 우리에게 알려지고 소유되는 것은
앎과 삶의 어울림 방식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앎이 없으면 순종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는 탐욕의 위장된 몸짓일 뿐이며
삶이 없으면 지식이 교만케 하는 껍데기 인생에
사치스런 현학의 초막을 치고 안주하기 십상이다.

로마서 전체는
앎과 삶의 아름다운 심포니를 연주한다.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심포니의 음율을 빚어내야 하겠지만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하모니의 곡조가 흘러야 하겠다. 

2012년 5월 23일 수요일

너 자신을 알라

목회를 바르게 하려면 인간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다. 비록 현장에서 목회하고 있지는 않지만 목회를 하나님의 사람 섬기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이해할 때 늘 고민의 목덜미를 잡았던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서로 단절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다.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이 창조된 탓이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하나님을 응시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 없고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그 다음으로 자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일갈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플라톤의 글귀를 이보다 더 심오하고 명료하게 플어낸 해법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인간의 비참한 실상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의 대비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이해하는 지식은 최고조에 이른다는 논지에 공감한다.

인간을 독립된 존재로 뚝 떼어놓고 보면 편견에서 자유로운 객관적 지식이 확보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을 향한 선행적인 응시 없이는 인간은 DNA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다. 사유와 행위는 거기에 내재된 잠재성의 발현일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유사하다. 칼빈은 우리의 죄악들에 대한 성찰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에 대한 지식 가능성을 발견한다.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진실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 없단다. 우리의 본성적 총체적 절명적 부패에 대한 응시와 인정 없이 얻어진 하나님 지식은 인간적인 종교성의 투사일 뿐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고자 하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진 열망이다. 지혜자는 하나님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해 두셨다는 설레이는 멘트를 우리에게 던진다. 이는 자신을 꾸미거나 조작하지 않고 성경의 빛이 밝히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정직하게 보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그것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아는 지혜의 고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소리로 들린다. 무엇이 정직인가?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은 무엇인가?

친구들의 졸업파티

이번에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Amos와 Jon의 축하예배 및 파티에 참석했다. 설교는 존이 담당했다. 주제는 하나님의 신실한 공급이다. 근심과 걱정을 접으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도서관의 학습 모드에만 익숙하던 친구의 설교하는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그러나 삶의 진정성이 실린 은혜를 모든 참석자가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최고의 논문은 '끝낸' 논문이란 경구의 사실성이 확인되는 자리였다. Dr.의 수식어가 이제 그들의 이름을 일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커다란 허그를 교환하며 마음껏 축하해 주었다. 이제 아모스와 존은 학교에 출입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들과 나누었던 우정에는 이제부터 세월의 먼지가 쌓일지도 모른다. 어디에 있든지 학우로서 나누었던 순수하고 풋풋한 우정을 유지하며 앞으로는 각자의 처소에서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동역자의 관계로 들어가길 소망한다.

아모스 친구들이 마련한 인도네시아의 전통음식 맛이 구강을 꽤나 길게 장악할 것 같다. 

2012년 5월 22일 화요일

두렵고 떨리는 기준

우리는 언제나 미래가 궁금하다.
한 치 앞만 알아도 인생이 변한다고 생각한다.

허나 그런 궁금증과 갈망이 가치의 무질서를 초래한다.
미래의 한 조각만 보여주면 모든 가치를 다 건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듯한 착각에 중독되기 때문이다.
그런 착각을 유발해 준 수단에 종속되는 수순이 이어진다.
그것을 은근히 조장하고 부추기는 사람도 악하고
그것에 집착하고 매달리는 사람도 어리석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만큼 보고
벗겨주신 만큼 이해하는 것이 언제나 최선이다.
성경보다 정교하고 정확하고 객관적인 계시는 없다.
성경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 개개인과 온 세상의 미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언 중의 예언이다.

성경이 그어둔 경계선을 무시하고
자유로이 넘나드는 분들의 동기가 궁금하다.
성경의 권위보다 높아지려 하는 은밀한 욕망을 불출하고
사람에 대한 조정력과 지배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부분까지 임의로 발설하여
결국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 및 사도들의 권위보다
스스로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는 이 모든 것들이
그분들의 입술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종교성이 강한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충동하여
존경과 순종과 추종을 관리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너무도 가난한 거다. 굳이 예언의 방식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모양을 취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을 조작하고 훼손하며 인간이 인간을 추종하는
그런 결과를 산출하고 은밀히 즐기는 목회자도
참으로 가난한 거다.

만물의 찌끼 되기를 주저하지 않고 생명을 전하되
자신에겐 사망이 역사하는 결과까지 감수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간 사역의 발자취를 따라
하루빨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요구되는 기준은
불꽃 같은 눈동자로 사람의 심장과 폐부는 물론
마음의 동기까지 가쁜히 저울질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과 정직과 공의와 사랑이다. 이는 십자가로 축약된다.
어떤 목회자도 이러한 기준에서 자유롭지 않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떠한 수단으로
타인의 마음을 조정하고 하나님의 권위보다 높아지기 원하는
은밀한 습성에 흔건히 젖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2012년 5월 21일 월요일

신앙과 신학의 관계 2

학문적인 신학에 대한 반감 속에도 진지함과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다양한 동기로 말미암아 성경의 단순하고 순수한 진리에 가해진 인간의 가증한 왜곡이 완전히 극복된 신학의 시대는 없었던 탓입니다. 당연히 진리에서 인간적인 불순물을 거부하고 제거하는 작업은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제자도의 기본에 기울이는 관심과 노력처럼 결코 중단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열심의 과잉은 언제나 또 다른 혐오를 낳는 법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에 덧입혀진 교리적 껍질을 벗기는 일에 과도한 사명감에 경도된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교부들의 저작들을 비롯한 각종 원문들을 파헤치며 신학이 근원적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 사이에 맺어진 결혼의 부산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에른스트 폰 분젠(Ernst von Bunsen)과 더불어 하르낙은 심지어 바울이나 요한과 같은 사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순수한 복음을 변조시킨 주범이고, 교리의 착상은 복음의 순전한 토양에 뿌려진 불순한 그리스 철학과의 혼합이며, 교리의 발전은 그런 불결한 혼합의 누적이며, 결국 기독교 교리사는 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오류이며 순수한 복음의 점증적인 부패일 뿐이라고 일갈한 바 있습니다. 그가 리츨과 함께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본질로 돌아가려 했을 때에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아버지직 및 인간 영혼의 고결함’ 이 두 가지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교리와 신학을 거절하며 성경이란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방식은 ‘성경 전체(tota scriptura)’가 아니라 때로는 신약으로, 때로는 복음서로, 어떤 경우에는 몇몇 구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프란시스 아시시(Franciscus van Assisi)는 마태복음 10장 9-10절에서 발견하고, 톨스토이 경우에는 마태복음 5장 38-39절에서 발견하고, 드러몬드 경우에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서 최고의 선을 추구했던 사례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로 돌아가지 않고 특정한 주제나 특정한 책이나 특정한 본문이나 구절에 대한 기형적인 강조로 원시적 기독교의 회복을 꽤하려는 시도는 그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신학의 고유한 가치와 기능마저 파괴하는 부작용만 초래할 뿐입니다.

신앙과 신학, 성경과 신학, 윤리와 교리, 교회와 학교, 종교와 학문의 엄격한 분리는 성경적 계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언어 문화적 오류로서 이원론적 시대의 희생물 목록에 기독교를 등록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신학이 각 시대의 모든 인위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고 결합하는 영광스런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바빙크의 통찰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계시가 모든 인간을 향하고 있고 온 세계를 그 대상으로 삼으며 인간의 전인격과 관계된 것이라는 그의 계시론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계시는 가장 심오한 사유를 위한 자료를 제공하며 인간 및 세상과 긴밀하게 결속된 하나님 지식을 학문적 신학의 토양에 심습니다. 여기서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 철학이나 여러 학문들이 설명과 체계화의 방편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기독교의 교리적 내용 자체가 산출되는 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물에서 물을 기르는 뚜레박일 뿐입니다.

당연히 학문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것은 지성적 자유의 무한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조셉 스칼리거(Joseph Scaliger) 금언처럼 '최고의 스승이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그것은 해박한 무지(Nescire velle, quae Magister optimus docere non vult, erudita inscitia est)'라고 함이 옳습니다. 칼빈이 잘 진술한 것처럼 신학은 성경이 가는 곳까지 이르러야 하고 성경이 그어 놓은 경계선은 함부로 범하지 말아야 하는 적정과 절도의 원리에 머무는 게 가장 좋습니다. 세 가지의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공허한 호기심에 이끌려 성경이 묻지도 않는 물음을 따라 하나님께 속한 가리워진 영역까지 출입을 시도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성경이 엄연히 계시하고 있는 것인데도 침묵으로 그냥 지나가며 결국 그것을 버리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대적들이 이단적인 주장으로 진리의 변질을 도모할 때 그들이 만든 논리의 얼개를 따라 묻고 답하는 중에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데도 변증적인 이유로 개념을 산출하고 무리한 결론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들을 경계하는 학문적인 신학은 우리가 마땅히 추구할 바입니다. 

바빙크는 신학이 교회에 처음 발생한 것은 어린아이 같은 천진성을 지나 사고하는 의식이 깨어났을 때라고 말합니다. 즉 계시에 대한 사색이 깊어지고 복음의 진리를 짓밟아 뭉개려는 모든 공격에 대해 모든 가용한 지식들을 동원하여 응전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을 때 말입니다. 교부들은 그러한 필요에 부응하며 당시의 철학들을 널리 활용하되 진리의 표상과 체계화에 유익한 것들만 선별하는 절충주의 태도를 보였으며, 바빙크는 이것을 마치 하갈이 사라를 섬기고 출애굽 당시에 수거한 보화들이 하나님의 장막에 사용되고 동방 박사들의 선물들이 그리스도 출생을 기념하는 것으로 활용된 경우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가져온 금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 수도 있지만 정통적인 교부들이 선별하여 사용한 철학적 개념들과 구분들은 진리의 규모를 세우는 일에 수종 드는 방편으로 동원된 것입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질서를 진리의 표상과 체계화에 동원하는 지성적인 활동은 신앙과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다고 바빙크는 말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거스틴 경우에는 ‘신앙을 통하여 지성에 이른다(per fidem ad intellectum)’는 테제를 신학의 제1원리로 삼았으며 이 둘의 관계를 잉태와 출산 혹은 노동과 임금의 관계로 이해했고 ‘지성은 신앙의 열매(fidei fructus est intellectus)’이며 ‘믿음의 보상(merces fidei)’이라 했습니다. 견고한 믿음으로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들(quae fidei firmitate jam tenes)은 이성의 빛으로(rationis luce) 지각될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빙크는 신앙과 신학을 습성과 행동(habitus et actus)로, 생득적 신학과 후천적 신학(theologia infusa et acquisita)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신앙은 계시된 진리에 대한 동의이고 신학은 계시된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과 그것의 이성적 체계화는 구분과 결합이 동시적인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 따르면, 신학은 믿음으로 소유하고 이성의 빛으로 지각한 진리들의 표상이요 체계이기 때문에 신학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믿음과 이성을 모두 무용하게 만드는 교모한 사단의 술수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과 신학, 교회와 학교, 경건과 학문, 지식과 삶, 교리와 윤리, 습성과 행위가 비록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현하는 신학을 믿음으로 추구하는 것 자체가 악한 궤계에 맞서 물러서지 말아야 할 우리의 저항이란 점을 명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과 신학의 관계성

신앙과 신학의 관계성은 바빙크의 견해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싶습니다. 신학이 없어도 믿음의 삶과 교회의 목회에 지장을 주지는 않으며 오히려 믿음이 신학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신학의 존재에 거북한 심경을 토로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렇게 신실하던 청년이 신학교에 가서는 몹쓸 목회자로 변질되어 왔다는 이야기도 이따금씩 듣습니다. 그렇게 우려하는 분들의 경험세계 속에서 벌어진 불미스런 경험들을 부정하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의 공해는 극에 달하였고 ‘취득된 지식과 경험이 우리에게 회의를 주입하고 있다’는 바빙크의 지적이 작금의 신학교육 현실을 벌거벗긴 듯한 신학의 위기를 저도 맨살로 늘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용이 유용을 제거하지 못한다(abusus non tollit usum)는 말처럼 신학의 일그러진 이미지에 대한 증험들이 신학의 ‘신’자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두툼한 객관성을 확보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신학의 오용과 과용에서 빗어진 슬픔일 뿐 신학 자체의 무용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신앙과 신학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며 대립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칸트의 도식을 빌어 말한다면, 신앙이 없는 신학은 공허하고 신학이 없는 신앙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신앙과 신학은 분리될 수 없으며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실 신학의 권위와 가치에 대한 교회 안에서의 논의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기독교의 긴 역사 속에서 때마다 의문의 고개를 내밀었던 일입니다. 신학의 학문적인 추구에 반기를 든 분들은 터툴리안 문구를 인용하며,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떠한 호기심의 요청도 없고 복음 이외의 어떠한 연구 필요성도 발견하지 않으며 우리는 믿는 것 이상의 어떠한 것도 열망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펼칩니다. 게다가 경건은 그 자체 안에 직접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있기에 학문적인 신학의 유용성과 필요성이 교회 안에서는 요청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자신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하고 순전한 영혼으로 법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지 난해한 영역의 지성적 정복에 두뇌의 불필요한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종교개혁 인물들의 단편적인 입장까지 신학의 무용성 주장에 들러리로 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물론 멜랑톤은 스콜라 학자들의 몇몇 가르침을 거부했고 쯔빙글리 역시 기독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요설의 제작자가 아니라 주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에 있다고 했으며 칼빈도 같은 맥락으로 그런 실천성 강조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이런 종교개혁 인물들의 단편적인 입장보다 과도하게 더 나아간 분들도 있는데, 칼슈타트 같은 경우에는 모든 학문적인 칭호들을 비난하며 농부들과 더불어 농부의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그 시대의 재세례파 및 메노파의 경우는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도 학문적인 교육에 담을 쌓고 일체의 교류를 금했으며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교도권을 부여한 적도 있습니다. 바빙크의 표현처럼, 다수의 사람들이 ‘교리에서 생활로, 고백에서 성경으로, 신학에서 경건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삶과 성경과 경건을 지향하는 것은 참으로 건강하고 바람직한 것이지만 교리와 고백과 신학이란 골격과 경계와 전통을 무시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아무리 괜찮은 측면이 있어도 전자에만 배타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분별마저 어려워져 더 해로워 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인간의 영혼이 가진 어떤 하나의 기능과만 결부된 사안이 아니라 전인격이 하나도 배제되지 않는 총괄적인 정신활동 전체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 이해해도 신앙과 신학 사이에 만들어진 분리와 대립에 대한 왜곡된 인상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 같습니다.

마치 눈의 망막이 빛에 대응하고 귀의 고막은 소리에 대응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는 믿음이 인식의 내적인 원리로서 외적 원리인 성경의 계시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믿는다는 것은 증명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인 통찰에 기초한 모든 지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플라톤은 지각에 기초한 감각적 세계에 대한 확실성을 믿음(Πίστις)으로 규정하며 ‘되는 것과 존재와의 관계는 믿는 것과 진리 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의 방식으로 얻는 지식과 우주적 이성(nous) 자체에서 추론된 제1 원리에 대한 지식을 구분하고 말하기를 어떤 것은 '일종의 믿음으로 원리들이 알려질 때에 이해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클레멘트 교부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얻어진 모든 지식과 확실성을 신앙으로 간주하고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어거스틴 경우에는 사회와 학문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지 않는 자는 결코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nisi credideritis, non intelligetis). 신앙은 모든 인간 공동체를 하나로 엮는 근간이며 띠입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quod non video credere non debeo)는 전제를 취한다면, 혈육과 우정과 사랑의 모든 유대는 단절되고 말 것입니다. 볼 수 없어서 믿지 않는다면 인간사회 자체는 화합의 붕괴를 신음하며 존립조차 불가능한 지경으로 치달을 것입니다. 이럴진대, 볼 수 없는 신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강한 신앙이 요구되는 것일까요?" 

이처럼 신앙이란 말은 제1 원리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으로, 우리의 자아와 지각과 사유에 대한 신뢰로, 외적 세계의 객관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모든 인간 공동체의 존립을 지탱하는 공통의 신뢰로, 직관으로 알려지고 행하여진 모든 것들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신앙은 대상과 근거와 근원에 있어서 전적인 종교적 개념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신앙 그 자체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어떤 종교적 관계를 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일반적인 개념은 히브리서 11장 1절에 명시된 것처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을 정서나 감성과만 결부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에 이해된 기독교 신앙의 가장 포괄적인 정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notitia)와 그런 지식에 대한 전적인 찬동(assensus)과 알고 찬동한 것에 대한 전폭적 신뢰(fiducia)로서 지성적인 요소와 감성적인 요소와 의지적인 요소로 대별되는 전인격을 모두 포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정의가 지식과 찬동과 신뢰 사이에 어떤 서열이 있다거나 그것들이 순차적인 단계를 따라 시차를 두고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이 배제된 신앙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칼빈은 신앙이 ‘이유들을 요구하지 않는 확신(persuasio)이며, 최고의 이성이 인증하고 어떠한 설명보다 안전하고 일정하게 마음이 안식하는 지식(notitia)이며, 하늘의 계시가 아니면 생성될 수 없는 정서(sensus)’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칼빈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교의학 각 권 제목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지식(notitia)인 것 같습니다.

2012년 5월 20일 일요일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은혜를 받는 비결은 하나다. 구하는 것이다.
구하는 것은 입술의 언어적 활동이 아니라
온 존재가 동원되는 식이어야 한다. 즉 겸손이다.
겸손은 은혜를 구하는 전인격적 기도이다.
그렇게 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주님의 약속이다.
겸손으로 은혜를 받는 것은 그 약속이 응하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생명의 근원이라 할 마음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우선적인 일이라고 지혜자는 말한다.
마음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구절이라 하겠다.

바울은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다" 했다.
명상이나 요가나 최면이나 폭식이나 산책이 아니다.
마음을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키는 원리는
은혜를 구하는 것 뿐이며 그 방법은 전인격이 동원되는
겸손을 추구하는 것이다.

마음-은혜-겸손-온 존재 이렇게 연결된다.
다른 방식과 루트로 얻었다고 생각되는 '은혜'는
그 정체가 과연 은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겸손하지 않은데도 진멸되지 않는 것이
은혜라는 사실은 예외가 되겠으나 지향할 바는 아니다.

2012년 5월 19일 토요일

모두 은혜다

모든 게 은혜다.
무한한 은혜에 묵상의 발을 담근 이들은
그 광할한 영역에 압도되고 그 강렬한 중독성에 결박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사망의 몸에서 건저낼 이가 없어서다.
인간의 그 음울한 본질을 알면 알수록
곤고함의 정도는 측량을 불허한다.

모든 게 은혜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무시로 진멸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흐르는 슬픔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절절한 애가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괜찮은 존재로 설정하고 그 자리에 서서 보면
은혜의 은혜다운 개념은 기대할 수 없다.
허나 로마서 7/8장이 은혜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
지극히 곤고한 사망의 실존적인 자리에 서서
그 사망의 결박을 끊어 정죄가 소멸된 자리를 보면
둘 사이의 무한한 간극을 은혜가 메운다는 사실이
보인다.

모든 게 은혜인 사람은
범사에 감사를 호흡한다.

2012년 5월 18일 금요일

Buxtorf의 히브리어 갈대아어 사전

알스테드 스승으로 고클레니우스와 쌍벽을 이루는 성경관련 사전편찬 전문가로 요하네스 벅스톨프(Johannes Buxtorf)는 히브리어-갈대아어 사전에 랍비식 철학 히브리어 렉시콘을 첨부한 Lexicon Hebraicum et Chaldaicum (초판 1613)을 편찬했다. 17세기 상반기에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이 구약의 히브리어 단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참고자료 중의 하나이다. 구글 알바의 핑크빛 고무장갑 손가락이 흥칙하게 등장하는 디지털 버전도 있지만 링크된 버전은 나름 양호하다. 다만 표지가 없어서 고서의 풍미는 떨어진다. 물론 된장 못담글 사유는 아니다. 다운로드 받으시고 장서 파일함에 담으시길 추천한다.

Rudolph Goclenius의 철학사전

알스테드 옹의 스승들 중에는 17세기 초반에 최고의 사전편찬 권위자로 통하던 루돌프 고클레니우스(Rudolph Goclenius)가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 라틴어와 헬라어 철학용어 사전 Lexicon philosophicum을 편찬했다. 대단히 중요한 17세기 신학과 철학의 기초자료 되겠다.

다운로드 받으시라: Rudolph Goclenius, Lexicon philosophicum (1613)

은혜가 목마르다

은혜가 생략된 삶,
어떠한 상상력을 동원해도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다.
우리의 삶에 다른 건 다 없어져도
이것만은 생략되지 말아야 할 단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은혜다.

은혜의 충만 속에서도 은혜가 목마른 건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랑의 갈증과 흡사하다.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가 웬지 더 갈급하다.
은혜의 추가분에 대한 갈증이 아니라 어쩌면
은혜에 대한 인식의 분량에 대한 갈증인 듯하다.

모세와 바울의 사례를 보면
은혜에도 적정선이 있어 보이지만
만족의 경계선은 여전히 모호하다.
하여, 침노하는 게 상책이다.
겸손과 희생의 은혜는 자아를 향하지 않고
타인을 향한 것이기에 무한대로 구해도
거절하실 가능성이 희박한 은혜라 하겠다.

그런 은혜가 목마른 사람이 드물어서 문제지!

하나님의 존영

하나님의 영광과 존영이 빠진 빈자리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보충될 수 없다. 
위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고 
땅에서 사람의 영광으로 매우려는
그넘의 지칠 줄 모르는 습성이 꿈틀꿈틀....ㅡ.ㅡ

2012년 5월 17일 목요일

Orthodoxy와 Scholasticism 구분

16세기와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을 표현할 때에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용어는 ‘Orthodoxy’와 ‘Scholasticism’이다.

'정통주의' 용어는 신학의 체계나 스타일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16세기 후기와 17세기 개혁주의 학자들의 공식적인 스콜라적 문헌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 고백서, 교리문답, 주석, 실천적 논문들도 그것들이 표방하고 있는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는 모두 정통성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파 정통주의 Reformed orthodoxy’는 개혁주의 교회의 고백적인 성격을 가진 가르침과 개혁주의 학자들이 그 고백적인 가르침의 개념을 규정하고 변증하는 일에 극도의 노력을 기울였던 1565년에서 1725년에 이르는 전 기간 및 당시의 신학적 내용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통주의는 유명한 ‘칼빈주의 5대교리’와 같은 가르침의 고백적 수용과 조직적인 신학화 작업과 논쟁적인 변증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과 유아세례 교리의 수용 및 조직화와 변증까지 넓게 포괄하는 개념이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교리들이 성경의 직접적인 교훈이라 믿었고, 당연히 주석적 작업을 통해 도달한 필연적 혹은 합리적 결론으로 도출하고 정립하고 발전시킨 것들이다. 그들의 교리들을 그들이 취한 방법론의 필연적인 결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들이 취하였던 신학 방법론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개혁파 스콜라주의 Reformed scholasticism’은 교실에서 흔히 발견되는 방법이며 종교개혁 신학의 고백적인 개혁주의 진영에서 정통주의 시대에 발전시킨 보다 세밀한 신학의 체계를 특징짓는 방법이나 스타일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 방법론은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 기간동안 논리학과 수사학에 가해진 무수한 변화들 때문에 중세의 스콜라 학자들의 방법과는 다른 것이었다. 유사한 스콜라적 방법론을 사용했다 할지라도 그것에 의해 도출되고 표상된 신학의 내용과 목적에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통주의 시대 내에서도 개혁주의 신학자들 간에 동일한 스콜라적 방법론을 사용한 결과로 얻은 교리들에 다양한 입장들을 보이는 것은 방법론과 신학적 교리 사이의 필연적인 인과를 부정하는 반증이라 하겠다. 종교개혁 인물들 및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스콜라적 방법론을 쓰면서도 교회에 은밀히 침투하여 교회를 오염시킨 것으로 여겨지는 오류들과 악습들에 대항하며 바른 가르침을 강직하게 고수하는 일에 집중했다.

 칼빈이후 개혁신학, p.87-88 참조

알스테드 Encyclopedic Project

알스테드 옹은 전심을 기울여 야심적인 백과사적 기획에 착수했다. 그것은 절충주의 형태를 취한 것으로서 그가 경험한 후속적인 종교개혁 모델들 중에 다양한 철학적 요소들의 종합으로 구성한 것이다. 백과사전 작업의 목적은 라무스적 교육학에 뿌리를 둔 것이다. 이것이 추구하는 기능은 가능한 한 최고의 유효하고 효력이 있는 방식을 따라 학문연구 전 영역을 망라한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의 구조는 팔라틴 지역에서 추구된 후속적인 개혁의 국제적, 고백적 모델의 필요성에 대한 케커만의 부응으로 말미암아 발전된 라미즘 대안적인 철학적 체계에서 도출된 것이다. 케커만이 제공하는 구조에서 알스테드가 모은 자료는 중심적인 유럽 개혁주의 gymnasia, academies, universities에서 사용되던 교재들 중에서 선택된 것들이다.

이런 면에서 Encyclopaedia는 교회와 국가와 사회의 후속적인 개혁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된 교육적인 전통의 축적 혹은 구현이다. 그러나 알스테드는 케커만과 동일하게 보다 야심적인 목적을 추구했다. 즉 개인의 개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신적인 형상의 완전성을 각 개인에게 회복하되 백과사전 교육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전제는 낙관적인 신학적 인간론인데, 그것은 본질적인 면에서 인문주의적이다. 그러나 알스테드 마음에는 이런 낙관론이 헷세에서 추구된 후속적인 개혁의 신비적인 모형에 대한 노출로 인해 극단적인 성향으로 기울었다. 그 모델은 헤르보른과 하이델의 친숙한 개혁들을 라몬 룰의 연금술과 연금술적 논리와 혼합한 것이었다. 아리스토 철학으로 전향한 케커만은 룰리즘의 범지식적 공약이 인간의 본성과 신적인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고 강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헤르보른 라미즘 영향으로 지적인 간결성 추구에 경도된 알스테드는 모든 가용한 교육학적, 논리적, 조합적, 기억술을 하나의 단일한 철학적 만병통치 치료제에 통합할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즉 이 치료제는 기적적인 용이성을 가지고 타락한 마음의 질병들을 고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끝으로 그는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론적 절충주의 사조에 그가 경험해 온 광범위한 철학적 체계들로 구성된 백사과전 내용들에 대한 동일한 열정을 교배했다. 철학적 체계들 중에는 아카데미의 라미즘과 대학의 아리스토 철학은 물론이고 신학교의 모세적 철학과 법정의 연금술적 물리학을 포함한다. 백과사전 내의 모든 학문연구 분야들에 대한 모든 경쟁적인 철학 학파들의 가르침을 조화시키고 이전에 시도된 적이 없는 속도를 가지고 마련된 형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개혁과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이루어질 정도로 철저하게 국제화된 그런 형태 안에서 결실하는 것이 기대하는 결과이다.

Johann Heinrich Alsted: Encyclopaedia septem tomis distincta (1630) 전6권

글쓰기의 고민

스콜라적 신학(theologia scholastica)에 대한
프란시스 버만의 균형있는 평가다.

이 신학의 높이 평가할 부분이 있다면,
1) 단순하고 간결한 종류의 언어,
2) 정확하고 변증적인 방법론,
3) 철학의 사용과 보조 그리고 주제들의 질서 정연한 안배
등이 되겠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부분도 있는데,
1) 많은 부분에서 그릇되고 역겨운 교황의 절대권력 교리,
2) 수많은 철학적 궤변들,
3) 공허한 질문에 대한 호기심,
4) 보조적인 언어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논지들의 혼동,
5) 애매함과 야만성 등이 되겠다.

주제와 청중을 따라 스콜라적 흑백에
인문주의 색조의 배합은 어떤 비율이 제격인지
진리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다 사려된 문체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글을 쓸 때마다 고민하고 갈등한다.
영어는 여전히 낯설고 한쿡말은 점점 무뎌져
두 언어 모두에서 현장감이 쏘옥 빠진
껍데기 언어의 번잡한 분량만 배설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하여 신학공해 가속화의 주범 대열에 가담하는 건
아닌지를 떨리는 마음으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Francis Burman, Synopsis theologiae (1699), p.12.

2012년 5월 15일 화요일

Calvin의 Institutio 1559 원본

전집에 포함된 판본만 보다가
1559년 저술 당시에 출판된 라틴어 원본이 드뎌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참에 기독교 강요 판본들의 서문을 다시 쭈욱 읽어 보았다.

기독교 강요의 가치와 목적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는 대목을
1539년 판본의 1541년 불역본 서문에서 찾았다:

"본서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성경의 용이하고
올바른 이해에로 진입할 수 있게 하는 열쇠요
서곡(clef et ouverture)이 되어줄 것이다."

1559년판 서문에는 자기가 사일열(febre quartana)에 걸려
사선을 넘나드는 상황 속에서도 오로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유일한 바램(vnicum votum)' 때문에
저술작업 중단하지 않았단다.

칼빈의 사활을 건 성경과 교회 사랑은 어떻게 번역될 수 있을까?

칼빈의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559)

히브리서 13장 13절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바울은 아무도 반기지 않을 판단력을 구사하고 있다. 허나
나에게, 모든 하나님의 사람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이다.
그런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내 삶 속에 재연될 수 있기를...

Lullus의 보편지식 이론

Lullus에 대한 알스테드 및 케커만의 입장은 다르다.
전자는 룰루스를 옹호하고 후자는 비판한다. 전자는 후자보다
강한 절충주의 입장을 보인다는 증거 되겠다.

Lullus는 13세기 후반에 Ars generalis ultima or Ars magna를 저술한 사람이고 여기에서 종교적 철학적 속성들을 종합하려 했다.

이 책은 무슬림이 기독교 신앙을 논리와 이성으로 이기는 논쟁의 도구로 고안된 문헌이다. 그는 두 개 이상의 원판을 만들고 원둘레 부분에 알파벳 순서로 다양한 문자나 기호를 적는다. 그리고는 원판들을 돌리며 대단히 많은 사상의 조합을 만든다. 이런 것을 만든 룰루스의 기본적인 전제는 지식의 모든 분야에서 유한한 수의 부인할 수 없는 기초적인 진리들이 있다는 것과 우리는 이러한 기초적인 진리들의 조합을 연구하면 모든 분야의 모든 지식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을 생하는 논리적인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룰루스는 기독교의 교리들이 이러한 예비적인 사상들의 고정된 집합에서 인위적으로 취득될 수 있다는 보이고자 했다. 

2012년 5월 12일 토요일

믿음이란 무엇인가?

종교가 그 자체의 본성 때문에 인식의 외적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externum)을 가지고 있고 이에 대응하는 인식의 내적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internum)가 인간에게 있는데 성경이 기독교의 외적인 인식 원리라고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내적인 인식의 원리는 믿음이다.

눈이 빛에 대응하고, 귀는 소리에 대응하며, 우리 안에 있는 로고스는 우리 밖에 있는 로고스에 대응하는 것처럼, 인간에게 있는 주관적 기관이 하나님의 객과적 계시에 대응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믿는다는 것은 종종 증명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인 통찰에 의존하는 그런 확실한 모든 지식에 대하여 사용되는 용어이다. 플라톤은 지각에 기초한 감각적 세계에 대한 확실성을 믿음(pistis) 아래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런 개념을 따라 그는 '되어지는 것이 존재인 것처럼 믿게 되는 것이 진리'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적인 방식으로 얻게 되는 지식과 우주적 이성(nous) 자체에서 추론되는 제1 원리에 대한 지식으로 구분하고 말하기를 '어떤 믿음으로 원리들이 그에게 알려질 때마다 그는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사한 맥락에서 클레멘트 교부는 직접적인 모든 지식과 확실성을 신앙의 이름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특별히 어거스틴는 사회와 학문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이렇게 진술한다. "믿지 않는 자는 결코 지식에 이를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알지 못한다(nisi credideritis, non intelligetis). 신앙은 모든 인간 공동체를 하나로 엮는 근간이며 띠이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quod non video credere non debeo)는 전제를 취한다면, 혈육과 우정과 사랑의 모든 유대는 단절되고 말 것이다. 볼 수 없어서 믿지 않는다면 인간사회 자체는 화합의 붕괴를 신음하며 존립조차 불가능한 지경으로 치달을 것이다. 이럴진대, 볼 수 없는 신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신앙이 요구되는 것인가?"

이처럼 신앙이란 말은 제1 원리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며, 우리의 자아와 지각과 사유에 대한 신뢰이며, 외적 세계의 객관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이며, 모든 인간 공동체의 존립을 지탱하는 공통의 신뢰이며, 직관으로 알려지고 행하여진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신앙은 대상과 근거와 근원에 있어서 전적으로 종교적인 개념을 제공한다. 신앙 그 자체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어떤 종교적 관계를 표시하고 있다. '소망하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 신앙의 일반적인 개념이다. 이는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 속에서 혹은 객관적인 참이라고 여겨지는 것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리스도 안에 계시하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 복음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선물하신 약속들을 개개인이 전유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기독교의 신앙은 모든 지식(notitia)와 그에 대한 찬동(assensus)과 그것에 대한 전적인 신뢰(fiducia)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그 대상과 근거와 근원이 전적으로 오로지 하나님 안에 있다.

Albertus Magnus: 신앙은 확고한 집착과 찬동을 행하는 빛이요 따라서 그것은 신적 진리에 대한 지식에 이르는 길과 수단이다(fides lumen est, certissimam faciens adhaesionem et assensum...et ideo est via et medium ad scientiam veritatis divinorum).

Johannes Calvinus: 신앙은 확실하고 확고하며 완전히 확립된 확신(certa firma plena et fixa certitudo)이요 이해(apprehensio)보다 확신이요 믿음의 의지적 신뢰와 안전(cordis fiducia et securitas)이다. 

신앙이란?

사고는 사상의 샘이 아니고
지성적 표상은 사물의 원인이 아니며
자아는 비자아의 생성자가 아니다.
그와 유사하게 신앙, 중생, 경험도
우리의 종교적 지식의 원천이 아니며
신학의 첫번째 원리도 아니다.
.................

보편적인 의미에서
신앙은 지식과 확신을 얻는 아주 의례적인 방식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신앙으로 시작한다.
우리의 자연적인 성향은 믿는 것이다.
다만 취득된 지식과 경험이 우리에게 회의를 주입한다.
신앙은 사회의 근저이고 과학의 바탕이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모든 확실성은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바빙크, 교의학 1:565-66.

믿음의 자유

은혜에 대한 갈증해소 차원에서 집어든
바빙크 교의학의 깊은 통찰력에 쑤욱 빠져든다. 

"수학적 명제를 부정할 수 없듯이 지식은 강요한다.
그러나 믿는 것은 자유롭고 지극히 고결한 자유의 행위이다.
이는 가장 깊은 자기부정 행위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싸움이다.
중심의 죄악들과 머리의 오류들이 집단으로 신앙을 덮친다.
그리고 그들은 종종 스스로를 위한 가상을 가지고 있다."

 바빙크, RD 1:591-92.

파스칼의 일갈

파스칼은 말한다

하나님을 찾으려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반대의 기질에 이끌리는 자에게는 충분히 모호하다.

택자들을 드러냄에 있어서는 충분한 빛이 있고
그들을 모욕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어두움이 있다.
버리운 자들을 어둡게 하기에는 충분한 캄캄함이 있고
정죄하고 변명할 수 없게 하기에는 충분한 판명성이 있다.

(Il y a assez de lumière pour ceux qui ne désirent que de voir,
 et assez d'obscurité pour ceux qui ont une disposition contraire.
 Il y a assez de clarté pour éclairer les élus,
 et assez d'obscurité pour les humilier.
Il y a assez d'obscurité pour aveugler les réprouvés,
 et assez de clarté pour les condamner, et les rendre inexcusables.)

Pascal, Oeuvres (Paris: Hachette, 1858) 1:345.

신앙과 신학

신학의 오용으로 몸서리를 친 경험자는
신앙이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용이 유용을 제거하지 못한다
(abusus non tollit usum)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지성적 자유의 무한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조셉 스칼리거 금언처럼 '최고의 스승이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그것은 잘 배운 무지이다
(Nescire velle, quae Magister optimus docere non vult, erudita inscitia est).' 

칼빈이 잘 진술한 것처럼
신학은 성경이 가는 곳까지 이르러야 하고
성경이 침묵으로 그어 놓은 경계선은
함부로 범하지 말아야 하는 적정과 절도의 원리에
머무는 게 상책이다. Bavinck, Reformed Theology, 1:605

신학자의 통합성

신학자가 된다는 건
성경 전체의 유기적인 통일성에 정통하는 것이다.
모든 이단들은 성경의 적은 부분에서 출발하고
나머지 전체를 무시하는 것이 그들의 인표이다. 

신학자는 취득된 자료들에 지성적 작업을 가해야 한다. 
교리들은 성경에 진술된 그대로의 말에 따르지 않고(kata reton) 
성경에 나타난 의도에 따라(kata dianoian) 세워진다. 
교리들은 믿음의 결론(conclusiones fidei)이며
동시에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존중한 결과여야 한다.

삼위일체, 그리스도 두 본성론, 만족론, 성례론 등은
성경의 단 하나의 표현에 기초하지 않고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흩어져 있는 많은 증거들에 의해
구축된 교리적 결론이다.

 참조: Bavinck, RD 1:617.

2012년 5월 11일 금요일

믿음의 사람들

히브리서 11장에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의 삶이 열거된다.
그런데 나와 유사한 삶을 살았던 증인들이 목록에 없다.

내 삶이 문제인가
ㅎㅎㅎ 그럴리가
ㅡ.ㅡ 그럴지도
저자가 '시간이 부족'하여 생략한 목록에
포함될 것이라는 추정에 기대는 건 내키지 않지만
달리 위로할 뽀족한 해석이 없다니...
아~~ 궁색하다.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보고
보다 좋은 부활을 얻고자 악형도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던 믿음의 선배들...
그런 열조들 앞에서 나도 나의 달려갈 믿음의 행보를
다 수행하고 왔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

칼빈은 향기(Christi suavis odor)의 두 가지 기능을 지적한다

하나는 택한 자들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이며
다른 하나는 유기된 자들로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향기이다

 질문이 생긴다...

그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생명과 죽음의 향기를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즉 죽음의 향기라고 규정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합당한 답변이 필요하다
칼빈이 생각하는 복음의 규정을 생각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복음은 구원 얻을 자에게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안내자며
구원 얻기로 작정되지 않은 자에게는 사망으로 달려가는 촉진제다

 나아가 칼빈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복음의 본질(natura evangelii)과 관련하여 문제를 제기한다
즉 복음은 구원을 위하여 선포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고유한 기능(proprium evangelii officium)이다
그러나 복음의 부수적인 또는 우연적인(accidentali) 기능도 있다
즉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고 넘어지게 만든다

모퉁이의 머리돌이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반석이며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거쳐 넘어지는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다
 고유한 기능과 우연적 기능으로 구분하여
복음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헤르보른 신학자 Johann Heinrich Alsted (1588-1638)

헤르보른 신학자 Johann Heinrich Alsted (1588-1638)

그는 16세기 초반에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을
학문의 전영역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확장하되
선배들과 동료들이 다각도로 시도한
고백화, 조직화, 체계화 및 교육화 작업을 정리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거대한 체계 속에 통합한
Encyclpaedia septem tomis distincta (1630), 즉
가장 완성도가 높은 체계들의 체계를 산출해낸
개혁주의 신학자다. 수상한 천년주의 주장으로
신학적 경계령이 내려진 분이기도 하다...ㅡ.ㅡ

지금은 박사학위 작업을 잠시 보류하고
2주일간 알스테드 연구차 학문적 외도에 들어간다.
그의 글을 읽을수록 그가 얼마나 거대한 사유의 세계를
학문적 교구로 삼아 활동하고 누비며 교회를 섬겼는지
그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지금까지 가방끈을 붙들고 있으면서 고작 도달하여
지금의 내가 선 자리를 보니 천금의 부끄럼이 짓누른다.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하워드 핫숀이 실토한 것처럼 그를 연구함에 있어서
두 가지의 난해함이 섵부른 탐구의 시도를 저지한다.
하나는 워낙 다양한 인물과 문헌들을 취합했기 때문에
알스테드 자신의 고유한 생각의 경계선 찾기가 곤란하고,
비록 이 문제가 그런대로 극복된 경우라 할지라도
그가 다루는 학문의 방대함과 포괄성이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난관으로 등장한다.

1630년에 출간된 이 방대한 분량의 학문 백과사전,
Encyclopaedia는 총 37개 학문연구 분야를 다루되
전체 5000페이지에 달하는 논의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과 동일하게 방대한 책인 신학 백과사전
Methodus theologiae (1614-1622)도 함께 연구한다.

신학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훈련과 체득과 결실을
추구하는 곳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분 자신과
그분이 행하신 일들로 구성되고 세상의 어떠한 곳도
역사의 어떠한 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사유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에 모든 것을 다 취급하게 되는 곳이다.
이는 지식의 통일성을 추구한 알스테드 신학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다. 

2012년 5월 10일 목요일

알스테드 연구의 난해함

알스테드,

그는 난해한 연구의 대상이다.
그의 글은 그의 선행자들 및 동시대 인물들의 글과 구분하기 어렵고 자신의 학생들이 발의한 논제들도 어디까지 그의 것인지를 확인하기 만만치 않도록 혼재되어 있다. 그의 왕성한 저술활동, 그러나 자신의 고유한 글의 경계선을 밝히지 않음으로 독자들은 고유한 알스테드 입장 진술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했다 하더라도 난해함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식의 모든 영역을 학문적 교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건드리지 않은 영역이 없거든.

1630년에 출간된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 Encylopedia는 총 37개의 학문연구 분야를 다루되 전체 5000페이지에 달하는 논의로 구성되어 있다. 동일하게 방대한 신학 백과사전 Methodus theologiae (1614-1622)는 7권으로 된 시리즈다. 지식 전체를 통합하려 한 대범한 알스테드 도전의 동기가 궁금하다. 이를 살피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낯설다

히브리서 10장 33-35절이다.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내 삶에 해당되지 않는 말씀일 수 있다는
아찔한 생각이 엄몰하는 아침이다.

2012년 5월 9일 수요일

제네바 바이블의 로마서

하나님의 위대한 자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간을 향해 선포된다.
그의 의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것이 된다.
인간이 자신의 부패로 인해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과 본성 모두를 배격하는
극도의 불경을 저질렀을 때에
하나님은 그의 종 아브라함,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인
그와 맺으신 약속들을 기억하사
무한한 관대를 가지고 인간의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완전한 순종에 있도록 정하셨다.

그리하여 할례받은 유대인과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 동일한 의의 표지로서
할례를 받게 하셨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그와 맺으신 언약이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성취되지 않은 듯한 것은 유대인이
(축복의 씨앗인) 그리스도 예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가 참된 구속자란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가 오직 유대인만 혹은
그들을 더 염두해 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에서 사례에서 보이듯이
육체를 따른 아브라함 자손들이
모두 그의 후손인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믿음으로 접붙임을 받은 자들은 약속의 상속자다.

그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 있다.
그의 값없이 베풀어진 자비를 따라
일부는 선택되어 구원을 받고
일부는 유기되어 정죄를 받는데
이는 성경이 명백히 증언하는 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의 경우가 입증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비록 인간의 눈에 인지되진 않지만
아브라함 가문의 자연적인 후손을 따라
택자들을 취하셨다.

이후에 이방인이 가진 구원의 우선권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긍휼에서 출고된 것이며
이는 다시 유대인을 향해 되돌아올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하나로 통합된
이스라엘 전체를 모으실 것이다.

믿음과 교리의 토대가 마련되고
이후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뒤따른다.
즉 모든 사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 안에서
정직한 양심을 따라 모든 인내와 겸손과
존경과 지도자에 대한 순종과 자비 베푸는 것과
노인을 공경함과 그리스도 예수로 옷입고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가르친다.

끝으로 바울은 형제들로 힘써 하나될 것과
사안한 자들의 간사와 궤변을 피하라고 당부한다.

제네바 바이블은 로마서를
교리와 실천의 구조로 이해한다.
11장까지는 하나님의 심오한 교리적 내용을 다루고
이후로는 그 교리의 심오함이 일상으로 구현되는
그런 진리의 지식에 합당한 성도의 삶을 다룬다는 거다.

늘 하나님 자신이 성경의 저자시며
그분의 뜻과 계획과 섭리를 중심으로 푸는 해석학은
16세기 중후반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David Wells의 The Courage to Be Protestant (Eerdmans, 2008)

쉬어가는 시간에 David Wells의
The Courage to Be Protestant (Eerdmans, 2008)을
홀짝홀짝 야금야금 조금씩 읽는다.

이 책은 웰즈가 15년간 저술한 4권의 요약판인 동시에
시대의 변화가 반영된 업데이트 성격도 다분하다.
앞서 저술된 책들의 각주를 반복할 필요가 없어
모든 각주를 생략해 가독성이 다소 높아진 버전이다.

베이커가 이 책을 반땅하는 바람에 유혹을 못이겨 집었다.
역사신학 전공자가 팔이 안으로 굽는 현상일 수 있겠으나,
교회로 하여금 본래의 고전적인 경건으로 돌아갈 것을
정중히 촉구하는 웰즈의 논지가 젤루 마음에 드는 대목이다.

현대의 문화적 습성으로 소멸되고 있는
고전적인 경건의 메시지를 힘있는 언사에 담아낸
열정적인 전도자의 목소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귀에 쩌렁쩌렁 울린다. 

16세기 독일학교 연구

16세기 독일의 학교: German and Latin schools로 구분된다.

라틴 학교는 다소 고등한 지적 훈련을 받은 교사들이 가르친다. 대개는 신학과 법학과 의학 교수진 활동으로 진급하는 하나의 단계로 의도된 학교이다.

대학에서 공부는 철학부에 있는 한 과목으로 시작한다. 2년이 지나면 학생들은 학사를 받고 다른 2년을 마치면 석사를 받는다. 일반학문 분야의 학업은, 먼저 대학 1/2년차에 학생들은 물리학을 일부 배우면서 주로 논리학에 전념한다. 남은 과정들은 물리학, 수학, 천문학, 형이상학, 심리학, 윤리학, 정치학 등으로 구성된다. 헬라어와 그리스 문헌들 및 고전 라틴어와 로마 작가들을 공부한다. 인문주의 학자들에 의해 번역된 아리스토 역서들도 포함된다.

학업의 방식은 주로 중세적인 형태를 따라 강의와 논박이다.

Collegium, 탁월한 재능과 좋은 성품을 가진 학생들이 신학 연구에 전염한다, 교리문답 배우고 교회를 섬기도록 하는 기관이라 하겠다. 당시의 문제는 교사들이 일단 현장에서 활동하게 되면 자신의 재능과 기량을 향상시킬 전문적인 수단이 없다는 거다. 겨우 경험의 축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슬픈 상황이다. 물론 공휴일은 자신의 기량을 높이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Brieg 정관에 따르면 교사들은 하루에 최대한 2과목을 가르쳐야 한다. 보다 큰 도시나 좋은 학교에서 교사들은 자신들의 지적 향상을 위해 도서관을 활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주로 종교적인 내용의 문헌들이 많았지만, 라틴/그리스 시인들과 연사들의 문헌들도 있었다. 물론 일반학문 자료들도 어느 정도 소장하고 있었다.

학교의 교사들은 가르치는 것과 교회의 사역이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서 교사를 지명하는 일은 성직자들 및 교회 위원회의 손에서 결정된다.

Leisnig 정관에 따르면 교사들을 지명하는 것은 목회자의 몫이고 집사를 선정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즉 경건하고 교육을 받았고 합당한 사람을 선호한다. 조교들은 교사가 뽑는다. Zahna, Kemberg, Bitterfeld 경우에는 교사 지명권이 목회자와 카운설에 있었다. Havelberg 교구의 경우에는 목회자의 조언과 동의를 얻어 의회가 교사를 지명한다. 교사와 조교들은 인정을 따라서가 아니라 능력과 덕스러운 행동에 근거하여 지명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편파적인 방식으로 교사가 지명되는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주로 조사관, 주관 감독원, 지방 의회의 영향으로...

16세기 독일에서 교사 지망생 시험은 주로 종교적 신념과 읽기 쓰기 산술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조사로 구성된다.

Breslau (1528)에는 모든 교직원이 의회에 의해 지명된다. 

2012년 5월 8일 화요일

제네바 바이블의 시편

제네바 바이블의 시편에는
제2 저자에 대한 언급이 일체 제공되지 않는다.
특이하다. 시편은 가장 고귀한 진리의 보고이며
지복에 속한 모든 것들이 그 안에 담겨 있단다.

우리의 머리와 이성의 잣대로는 측정되지 않는 무한한 지혜,
저울로 달아볼 수 없는 보배들의 무한한 무게를 이해하고
그 보배들이 한아름 채워지고 영원한 생명 얻는 방법이 제공되는
동일하게 무한한 고백의 학교란다.

시편에는 유일하신 구속자요 중보자인
그리스도 예수가 가장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사악한 무리들의 일시적인 융성
그 이후에 벌어지는 그들의 패망은
형설할 수 없는 비참의 극단으로 치닫게 될 것이란다.

시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경외와 사랑을 배우고
부패하지 않을 영광의 면류관을 취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다시 오심을 열망하게 될 것이란다.
이런 방식으로 시편에서 손을 뗄 수 없게 하는 소개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서론으로 제공되고 있다.

시편의 제2저자에 무게를 두거나
당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해석의 근간으로 삼지 않고
독자들의 시각을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초점을 맞추도록
서론을 구성한 것이 제네바 바이블의 특징을 보여주는
괜찮은 단면이라 하겠다.

Philip Schaff와 John Huss

Philip Schaff(1819-1893)의 이력은 특이하다. "출생을 따라서는 스위스인, 교육을 따라서는 독일인, 선택을 따라서는 미국인"이라 말하기를 본인도 즐겨했다. 세 개의 국적 소유자에 걸맞은 광범위한 인맥을 가졌으며 운신의 폭도 넓었다. 샤프의 가장 탁월한 작업은 History of the Apostolic Church (독일어 1851, 영어 1853)와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전7권(1858-1890) 저술이며 이로 인하여 미국에서 교회사 연구의 신기원을 이룬 인물로 평가된다. 또 하나의 역작은 번역인데, Herzog의 [개신교 신학과 교회의 백과사전] 영역이다.

샤프의 아들 David Schaff는 얀 후스의 De ecclesia 영역으로 유명하다. 후스의 라틴어판 전집도 인터넷에 다운로드 가능하다.

De ecclesia (translated by David Schaff into English)
Historia et monumenta (1558/ 1715)

2012년 5월 7일 월요일

시간의 의미

등교길에 아들이 시간의 의미를 물었다.

빛의 이동일 뿐이라는 물리적인 설명도
일분 일초가 우리 속으로 파고들어
인격과 삶의 살쩜으로 번역되는 질료라는
철학적 설명도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하여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책임이 따른다는 정도로만 말하고 화제를 접었다.

공짜로 주어지는 것의 미학은 이런 거다.
인간이 모든 가용한 능력을 동원하고 일평생을 할애해도
산출해 낼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공짜에는
인간의 어설픈 협력의 지문이 쉬 찍혀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메시지만
전달하는 독특한 은혜와 계시의 방식이 된다는 거.

아~ 오늘도 비에 젖은 24시간에는 공짜 은총으로 충만하다.
이 은총의 충만한 기운을 내 인격과 삶으로 번역하는 일에
난 너무도 게으르다...ㅡ.ㅡ

2012년 5월 6일 일요일

신학의 정서

신학적 격동의 세월에 저술된
16세기 종교개혁 및 17세기 개혁주의
문헌들을 읽는다는 것이
나의 신학적 정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하게 된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증거되고
성례가 적법하게 집행되는 것을
교회의 표지로 여긴 믿음의 선배들이
오직 성경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좌우에 날 선 어떠한 검보다
더 예리한 저항의 검을 휘두르되

거기에 생명과 인생을 건
십자가 방식의 비장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가 오직 말씀의 토대 위에 세워진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본질에
충실한 모습을 갖출 때까지
피눈물 나는 탐구와 선포의 여정을
중단하지 않았던 그 격정과 열망이
신학의 정서 아랫묵을 서서히 데운다.

2012년 5월 4일 금요일

제네바 바이블의 마인드

"가치 있는 일을 기획하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중차대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지는
일상적인 경험이 넉넉히 입증할 뿐만 아니라
합당하고 탁월한 모든 것들은 녹록하지 않다는
우리를 교훈하는 금언도 동일한 것을 확증한다.

주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집이며,
성자 하나님이 머리요 완성으로 계신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를 세워가는 것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가진 일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2012년 5월 3일 목요일

제네바 바이블 Geneva Bible 1560

1560년판 제네바 바이블을 절반가에 구입했다.

제네바 바이블은 성경을 근거로 삼아 산출한 개혁주의 전통을 성경에 다시 투사하여 성경을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믿음의 선배들이 이해한 성경의 중심적인 내용과 난해한 구절들의 의미를 기초로 하여 보다 나은 의미의 세계로 도야할 수 있는 발판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아주 소박한 개혁주의 Glossa ordinaria(주석성경) 되겠다. 물론 1599년판이 등장할 때까지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1576년에는 톰슨의 신약노트, 1568년과 1579년에는 두 개의 개혁주의 교리문답, 1599년에는 유니우스의 계시록 주석이 추가된다. 즉 본문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고 제네바 바이블의 개혁주의 성향을 보강하는 방향으로 노트가 증보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신약에서 마태복음 서두에 등장하는 Argument를 살펴보면, 제네바 바이블의 독특성이 맨살로 경험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기록한 이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의 심장을 다스렸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숫자에 있어서는 넷이지만 효력과 목적에 있어서는 마치 전체가 그들 중 하나가 작성한 것처럼 동일하다. 물론 글의 스타일과 양식은 다양하다. 어떤 이는 장문을 구사하고 다른 이는 간결한 표현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과 주장에 있어서는 그들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지향한다. 즉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온 세상에 공표한 거다..."

오늘은 처음으로 성경읽기 시간에 제네바 바이블의 안내를 받았다. 조개가 한 알의 진주를 잉태하기 위해 이물질이 들어올 때마다 체액으로 감싸며 오랜 인고의 세월을 보내듯 진리를 추구하며 타국으로 떠나야 했던 믿음의 나그네 선배들도 영적, 물리적 핍박의 이물질이 그들을 위협하고 날카롭게 찌를 때마다 진리의 말씀으로 상처를 감싸고 인내하며 만들어낸 진주 흔적들이 여기저기 채취된다. 오늘부로 제네바 바이블로 하루를 열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