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30일 수요일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אֶחְסָר לֹא רֹעִי יְהוָה)

주석적인 부분

1. 문장의 시제: 히브리어 문법에는 영어나 한국어에 준하는 시제의 구분이 없다. 히브리어 동사는 주로 행위가 끝나지 않았음을 표현하는 미완료형 및 행위의 종결을 나타내는 완료형이 있다. 완료형은 주로 과거나 현재에 이루어진 일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고, 미완료형 경우에는 미래를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고 현재의 지속적인 혹은 습관적인 행위를 위해서도 사용된다. 시편 23편은 완료형이 사용된 5절의 “부으셨다”(שַׁבְתִּי) 및 “살리로다”(דִּשַּׁנְתָּ) 외에는 모든 동사들이 미완료 형태를 가지고 있다. 1절 앞부분의 경우는 “여호와, 나의 목자”로 번역된다. 여기에 시제를 삽입해서 의역하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일 것이다’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 모든 시제로의 번역이 가능하다. 어떤 시제가 적합할까? 물론 시제를 강요하지 않아도 해석은 가능하다. 그러나 의미의 명료성을 위해서는 시제가 필요하다. 시제의 결정은 해당되는 본문의 전반적인 문맥을 고려함이 가장 안전하다. 이런 맥락에서 “The Lord is my shepherd”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같이 히브리어 원문에 현재형을 부여한 번역 혹은 해석은 결코 어거지가 아니다. 시편 23편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화려한 과거의 안타까운 회고도 아니고 순전한 미래의 막연한 기다림 및 갈망과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며 오히려 지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행하시고 계신지를 묘사하고 있어서다. 시인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을 과거의 지나간 사태나 상태로 묘사하지 않고 당연히 과거를 추억하는 회귀적 신앙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낮으며,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것을 먼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이나 소망으로 보지도 않는다. 시인은 과거형과 순수한 미래형을 모두 거절하고 있다. 하여 시인이 선택한 시제는 현재이며 바로 지금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는 후반부 구절과 연관지어 본다면, 현재형이 어떤 특정한 시점이 아니라 모든 ‘현재’에 유효하기 때문에 여호와는 모든 순간마다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조화 혹은 지속적인 현재라고 볼 수 있으며 영원히 변경되지 않을 사실임을 나타낸다.

2. 문장의 유형: 두 가지의 독특성이 돋보인다. 먼저 본문의 유형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면 좋겠다’는 ‘희망’이나, ‘호여와는 나의 목자일 것이라’는 ‘추측’이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아니라, ‘여호와, 나의 목자’라는 너무도 확고한 ‘단언’이다. 이는 시인이 목자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하고 견고함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구절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한 지식의 관념적 확신이 아니라 삶에서 체득된 경험적인 신앙임을 확인한다. 두번째는 문장에 조건문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은 무조건적 실재요 은혜이며, 어떤 조건과 그것의 충족으로 인해 주어지는 기계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뒤집어서 말한다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내가 성취한 공로의 인과적인 결과가 아니기에 나의 무지와 실수와 범법과 연약으로 인해 변경되는 가변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3. 시편의 위치: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것이 비록 우리에게 어떤 근거나 기원을 전혀 두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색, 무취, 무감, 무정, 맹의, 맹목의 사실(fact)인 것은 아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에게 뿌리를 둔 사연이 있어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시편 23편의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시편 23편은 시편 22편 다음에 위치한다. 시편 22편은 소위 십자가의 시편이다. 시편 22편을 지나가지 않으면 푸른 초장도 쉴만한 물가도 나의 목자도 허울이고 만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십자가를 지나야 비로소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이 가능하다. 십자가의 시편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누구도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명명하지 못한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은 들판에서 양을 먹이고 지키고 돌보는 인간목자 개념과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이는 시편 23편 3절과 4절에서 잘 확인된다. 3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다윗의 영혼을 소생하게 하셨으며 그를 의의 길로 이끄셨다. 태초에 인류의 조상에게 생기를 주입하신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도 소생하게 하시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셨으며 의로운 길로의 이끄심도 십자가의 의로운 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신 것이다. 4절에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 할지라도 마치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양의 피로 인하여 죽음의 기운도 지나갔던 유월절의 역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이 함께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시편 22시편이 23편에 놓였다는 것은 시편 23편 전체의 재해석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한 줄도 읽어가질 못하는 시편이다.

4. 소유격의 의미(רֹעִי):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른다. 양은 근시안을 가졌기 때문에 양과 목자의 실질적인 관계성을 연결하는 끈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의 청력은 주파수에 예민하여 특정한 음파가 저장되면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러한 독특성 때문에 팔레스틴 목자들은 실제로 양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따라오게 훈련한다. 목자가 앞서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인지하고 뒤따른다. 양에게는 “나의 목자”가 필요하다. 여러 목자를 따르지는 못해서다. 개별적인 양의 목자가 모든 양의 목자일 수 있다. 그러나 양우리의 목자가 나의 목자가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양에게는 “나의 목자”가 필요하다. 교회에는 다양한 복수의 목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양은 모두 하나님의 양이고 양들의 목자는 오직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양들을 돌보는 사환이다. 양무리가 있으면 “나의 목자”가 없어도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양들이 앞서가는 양을 뒤따라 움직이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하다. 양이 양의 말을 들고 양을 뒤따르면 모두가 위험에 빠지기도 하고 함께 몰살하는 경우도 있어서다.

5. 양의 속성: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양의 정체성을 가졌다. 누구의 양이냐가 중요하다. 여호와의 양인가 아니면 소유자가 다른 양인가? 양은 누구인가? 양은 목자 없이는 살 수 없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양은 쉽게 두려움에 빠진다, 어리석도, 원수들에 의해 쉽게 죽는다,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무기가 없으며, 최선의 방어는 도망가는 것인데 대단히 느리다, 질투심이 강하다, 언제나 맑은 물과 푸른 초장이 필요하다, 좋은 음식과 깨끗한 물을 잘 선택하지 못한다, 자기 방식대로 행하고자 한다, 언제나 쉴만한 안식처를 찾고자 한다, 깨끗하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돌봄이 가장 필요한 가축이다, 모든 필요에 전적으로 목자에게 의존하는 동물이다, 막대기와 지팡이의 지도와 인도가 필요하다, 목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목자는 각 양에게 이를 부여하고 양들은 자기 이름에 금방 익숙하게 되고 그 이름에 반응한다, 목자나 인도자가 없으면 사방으로 흩어진다, 자기에게 친숙한 사람에 의해 쉽게 이끌린다, 인도자가 앞서가면 양무리는 따라간다, 양무리의 한 마리가 급하게 출발하면 양무리 전체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양의 속성들을 보면서 목자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확인한다.

참고문헌

1. 칼빈의 시편주석
2. 스펄젼의 시편 23편 강해
3. 교부들의 시편주석
4. 존 길의 시편주석

설교원고

1. 사람들은 주리거나 불만이 가득할 경우에 사소한 일에도 분노와 신경질을 폭발하고 대수롭지 않은 잘못이나 실수에도 까칠한 판단을 가하고 무심한 비판을 쏟습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거나 만족하게 되면 감각과 신경이 둔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노하기도 더디하고 왠만큼 불편해도 가쁜하게 견디고 상대방의 잘못에도 너그러운 마음과 넓은 포용력을 갖습니다. 이처럼 부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는 좋은 점들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존재마저 망각의 무덤에 매장하는 우도 쉽게 범한다는 것입니다.

2. 시편 23편은 다윗의 어떤 상태에서 작성된 것일까요?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시인 다윗이 당시에 처했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당시 절대적인 권력의 보좌에 올랐으며, 부와 존귀의 빼곡한 광휘에 휩싸였고, 현실적인 부의 가장 막대한 분량을 소유했고, 왕족의 즐거움이 극에 달한 시점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던 왕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평화롭고 풍요로운 상황에서 작성된 시라는 얘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고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택들을 기억의 수면에 떠올리고 있으며 그것을 사다리로 삼아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하고 있다는 사실에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감탄사를 격발하고 있습니다.

3. 다윗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때인데도 부를 즐기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고 본질을 붙들 줄 알았던 왕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을 양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하를 호령하는 왕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규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라는 일말의 뻣뻣한 신분의식 혹은 오만함 없이 자신을 오직 양으로만 생각하는 다윗의 신앙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물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이는 외적인 가치, 즉 재력과 권력과 명성 추구에 혈안이 된 당시의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자신을 바르게 아는 우선적인 지식이 없이는 어떠한 인생도 허무할 수밖에 없고 영혼만 혼탁하게 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던진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알지 않고서는 이룩한 모든 성취와 쌓은 모든 업적이 모래성과 같을 것입니다. 자기 민족의 이러한 우매함을 깨우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화두를 던졌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길 원하였고 외면적인 가치가 아니라 본질적인 가치를 추가하는 인생이길 원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인생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너 자신을 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의 과정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면서 안타깝게 인생을 접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런 정체성에 맞도록 살아가는 것은 큰 복입니다.

5.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그러한 복을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윗은 어떤 사람인지 생각나는 대로 서술해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왕이었고, 부요했고, 강력했고, 백성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았던 자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여러 유력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왕이라는 신분으로 규정하지 않았으며, 부요한 재물로도 규정하지 않았으며, 원수를 무찌르는 강력한 힘으로도 규정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좋은 평판이나 대우로도 규정하지 않았으며, 어쩌면 자신에게 있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이 규정되는 것을 거절했던 것 같습니다.

6. 대신에 다윗은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어떠함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을 여호와의 양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지금 ‘너 자신을 알라’는 만인들의 물음에 대해 하나님 의존적인 답변으로 응수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무수한 석학이나 성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성찰하여 스스로 득도한 자신의 정체성을 가졌다면 아직 진정한 자아를 만나거나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그 형상의 본체이신 창조자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리 화려하고 정교하고 고상한 정체성을 오랜 세월동안 터득했다 할지라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에 한 마디의 올바른 대답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7. 다윗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냐에 의존하여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아가 다윗은 단순히 자신의 정체성만 하나님의 속성에 의존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 의존적인 사유를 했습니다. 시편 23편만 보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왕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의지와 주권을 가지고 푸른 초장을 출입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곳으로 인도하고 안식하게 하신 분이 따로 계시다고 말합니다. 2) 영혼의 소생도 마음과 몸의 컨디션을 잘 조절해서 획득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다윗은 영혼을 일으키는 분이 따로 계시다고 말합니다. 3) 의로운 행보도 자신이 공의의 왕이라고 규정한 명분으로 딱이지만 의로운 행보의 주체가 계시다고 말합니다.

8. 다윗은 자신이 (사례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관통하는 중에라도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골짜기에 무슨 가로등이 어두움을 밝히고 있어서도 아니고 CCTV 카메라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어서도 아니고 자신이 최고의 전사이기 때문도 체질상 두려움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 이유를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신 함께하심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환경에 의존하여 반응하는 사람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악취가 풍기고 두려움이 엄습하는 캄캄함 속에서도 그런 상황에 기초하여 생각하고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목자이신 여호와가 영원토록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뇌에서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본주의 사색이 절망적인 현실의 희망찬 재해석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모범적인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9. (사례2) 다른 사례를 들자면, 광야에서 식탁을 마련하는 것도 인간 편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대적들은 조롱하며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사실 광야는 식탁에 채워질 음료수와 양식이 땅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셔서 식탁을 베풀어 주셨지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상황의 위태함과 장소의 척박함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함을 교훈하고 계십니다. (사례3) 또 다른 사례로서 아골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곳은 죽음의 뼉다귀가 나뒹굴고 절망의 악취가 진동하는 곳입니다. 모두가 외면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곳이지요. 그런 곳인데도 하나님은 죽음의 골짜기를 역설적인 소망의 출구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여기 저기에서 나 자신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보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와 처신을 하도록 우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10. 다윗의 신본주의 사색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경건한 안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 명패로 걸린 실질적인 주거지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물리적인 환경의 어떠함에 기초한 고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윗의 그 고백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가 자신의 삶을 영원토록 따를 것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더라도, 더위와 추위가 밤낮으로 교차하는 광야를 해맨다고 할지라도, 시체의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아골 골짜기를 다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만 있다면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것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가 자신의 삶을 영원히 뒤따를 것이기에 하나님의 집에 거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11. 다윗은 단순히 과거에 경험된 하나님을 반추하는 회귀적 신앙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문법의 특성상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문구에 확정적인 시제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편 23편 전체에서 주된 동사들이 미완료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의 어떤 시점에 하나님의 정체성과 행위가 종결된 것이 아니라 그 정체성과 행위가 지금도 유효하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시편 23편의 전반적인 맥락에 빚대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표현에 시제를 넣는다면 지속적인 현재형 혹은 현재형과 미래형의 조화로운 시제가 최격적일 듯합니다.

12.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지적 관념의 대상으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본문의 유형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면 좋겠다’는 ‘희망’이나 ‘호여와는 나의 목자일 것이라’는 ‘추측’이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아니라 ‘여호와, 나의 목자’라는 너무도 확고한 ‘단언’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인이 목자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하고 견고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어지는 구절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한 지식의 관념적 확신이 아니라 삶에서 체득된 경험적인 신앙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3. 그리고 문장에 수식어나 조건문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은 무조건적 실재요 어떤 외부에 근거하지 않은 절대적인 은혜이며, 어떤 조건과 그것의 충족으로 인해 보상처럼 주어지는 기계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뒤집어서 말한다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내가 성취한 공로의 인과적인 결과가 아니기에 나의 무지와 실수와 범법과 연약으로 인해 패하여질 수 있는 가변적인 관계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연약함이 있다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은 목자와 양의 관계성은 나의 실수나 죄로는 결코 패하여질 수 없는 탓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짓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 때문에 얼마든지 우리는 죄악에 노출되고 가담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약함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것인지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14. 도대체 목자와 양의 관계성은 어떻게 형성된 것이길래 변경될 수도 없고 끊어질 수도 없는 것일까요?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나의”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을까요?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이 비록 우리에게 어떤 근거나 기원을 전혀 두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출처도 모르는 맹목적인 사실(fact)인 것만은 아닙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성은 그 뿌리와 기원을 하나님 자신에게 두고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시편 23편의 위치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시편 22편 다음에 나옵니다.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데 시편 22편은 소위 십자가의 시편이라 불립니다. 십자가의 시편이 시편 23편 직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시편 22편을 지나가지 않는다면 푸른 초장도 쉴만한 물가도 나의 목자도 그림의 떡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십자가를 관통하지 않으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사실이 결단코 나의 고백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시편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명명하지 못합니다.

15.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은 들판에서 양을 먹이고 지키고 돌보는 인간목자 개념과는 질적으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는 시편 23편 3절과 4절에서 잘 확인되는 것처럼, 3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다윗의 영혼을 소생하게 하셨으며 그를 의의 길로 걷게 하신 분입니다. 태초에 인류의 조상에게 생기를 주입하신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도 소생하게 하시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셨으며 의로운 길로의 이끄심도 십자가의 의로운 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16. 4절에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 할지라도 마치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의 기운도 피해갔던 유월절의 역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이 함께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시편 22시편이 23편에 놓였다는 것은 시편 23편 전체의 재해석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는 시편이란 뜻입니다. 십자가를 생략하면 누구도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모든 구절들도 십자가가 투영되지 않는다면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인위적인 해석들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7. 정리하면, 고난의 때에도 슬픔의 때에도 고독의 때에도 배신의 때에도 반역의 때에도 모함의 때에도 절망의 때에도 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짓던 그 다윗은 평화와 풍요와 안정과 만족과 영광과 안식의 때에도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알았으며 하나님의 이런 속성에 근거하여 자신을 양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성취와 사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로운 역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과 상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속성과 함께하심 때문에 영원토록 하나님의 집에 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처럼 목자와 양의 관계성은 썩어지지 않는 씨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영원히 패하여질 수 없습니다.

18.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자신의 정체성과 실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사유는 다윗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자신을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근거해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체성과 상태와 사태는 하나님의 어떠함과 그분과의 관계성과 그분의 역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재산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집이나 자동차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취득한 지식이나 직업이나 직분에 의해 규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타인의 평가나 대우에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피부색과 언어와 문화와 국적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이룩한 성취와 업적이란 인간적인 공로에 의존하는 것도 아닙니다.

19. 우리를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요 우리를 살리신 구원자요 우리를 이끄시는 인도자요 우리를 지키시는 보호자요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신랑이요 우리를 다스리는 통치자요 우리를 소유하신 주님이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신 우리의 전부가 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려되지 않은 어떠한 '나'도 진정한 나일 수 없습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잠시 입은 신분의 옷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잠시 맡겨진 것들, 결국은 썩어 없어질 모든 것들은 일시적인 복장일 뿐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분과 복장을 혼돈하지 않았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망각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20. 감투를 쓰고 업적을 축적하고 유명세가 오르면 사람들은 대체로 본연의 자리를 이탈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마땅히 머물러야 할 하나님 안에서의 자기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도 가볍고 우숩게 여깁니다. 그리고 난관에 부딪치고 절망에 빠지고 빈곤에 허덕이고 관계가 끊어지고 계획이 무산되고 진로만이 아니라 퇴로까지 막히면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보는 눈과 듣는 귀로 들어오는 환경적인 정보와 현상에 극단적인 의존성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과 자신이 목자와 양의 관계라는 사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반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풍요로운 초원이나 쉴만한 물가를 거닐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떨어지고 강한 원수들의 위협적인 우겨쌈을 당할 때에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라는 사실은 변경되지 않습니다.

21. 하나님의 양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길을 이탈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당연히 선하심과 인자라는 하나님의 속성은 영원히 우리를 뒤따를 것입니다. 상태와 상황에 얽메이지 않는 하나님의 집에 영원토록 거할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목자는 바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양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양입니다.

예정론의 유익

예정론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예정론의 현저한 등장은 자유론와 운명론의 조화 혹은 극복과 무관하지 않다. 예정론은 자유의 과장과 남용으로 말미암은 피해를 해소하는 열쇠이다. 운명론의 대표적인 사례는 이슬람 종교이다. 이슬람은 타인을 죽여도 살인의 정당성을 운명 혹은 '하나님의 뜻'에서 찾기 때문이다.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작정을 동시에 포괄한다. 둘 다 포기하지 않으면서 성경이 설정한 계시의 내용만큼 존중하는 교리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진리에 늘 목말라 있다. 그런데 말씀의 수종자가 자신의 임의적인 판단을 따라 성경의 어떤 부분은 과장하고 어떤 부분은 침묵한다. 기록된 말씀은 가감없는 선포를 요청한다.

깊은 진리는 필요하기 때문에 계시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갈구하는 진리의 정도와 분량을 임의로 조절하는 것은 진리를 파괴하는 영리한 방식이다. 귀에 달콤한 수준의 진리만 말하고 귀에는 쓰지만 영혼에는 달콤한 말씀은 외면하는 방식이다. 계시는 우리에게 필요해서 주어졌다. 주어진 계시에서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발견한다.

그러니 우리의 필요를 따라 계시를 조절하는 것보다 계시를 따라 우리의 필요를 확인하고 추구하는 것이 지혜롭다. 기록된 계시로서 성경에 기록된 만큼 존중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다. 예정론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우리의 일그러진 상식과 충돌되고 어떤 잠재적 부작용이 우려된다 할지라도 침묵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진리이다.

2013년 10월 28일 월요일

자랑할 게 없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내 영혼을 소생하게 하시고 의의 길로 이끄신다 (시23:3)

본문에는 분리할 수 없는 의미의 사슬이 있다. 다윗에게 하나님의 은택과 역사는 1) 영혼의 소생이 선행하고 2) 의로운 길로의 인도가 이어지고 3) 하나님의 영광으로 귀결된다. 다윗에게 영혼의 회복은 상태의 정적인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고 동적인 방향성과 결부된 변화였다. 즉 영혼의 회복에는 목적이 있는데 다윗의 경우에는 의로운 길로 행하는 것이었다. 의로운 길로 행하는 것은 나의 이름이 하늘까지 드높이는 목적과는 무관하고 오직 하나님의 존귀한 이름이 기념되기 위함이다.

목적론적 순서대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정하시고, 이를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고 이를 위하여 우리의 영혼을 소생하게 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영혼의 회복을 경험할 때 의로운 길로의 부르심이 있음을 읽어야 하겠고 영혼의 궁극적인 회복이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음을 사려해야 한다. 동일한 관점에서, 의의 길이 목마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갈구하고 있다면 영혼이 소성되어 있다는 증거로 보아도 무방하다.

영혼의 소생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회복이다. 건강의 회복은 자신과 연관된 것이고, 관계의 회복은 타인과 연관된 것이고, 재정의 회복은 물질과 연관된 것이지만, 영혼의 회복은 하나님 자신과 직결된 문제이다.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영적 회복을 원하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피해가게 하지 않으시고 두려움이 없게 만드신다. 해로움이 우리에게 발생하지 않게 하시는 게 아니라 그런 해로움도 두렵지 않게 만드신다. 이로 보건대 세상에는 영혼의 회복을 훼방할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영혼의 소생이 없다면 건강과 관계와 재정의 어려움이 해소되고 풀어져도 의의 길은 안구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걸 감지할 영적 신경이 없어서다. 그리고 의의 길에 머물지 않고서는 어떠한 영광도 하나님께 돌리지를 못한다. 실을 바늘의 허리에 묶어서는 사용하지 못함과 일반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열망이 있다고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질서가 있고 경로가 있다. 즉 태초에 인류의 조상에게 생기를 주입했던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혼을 일으켜야 하고 의의 경로로 이끄셔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혼이 소생하는 중생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고 의로운 길로의 이끌리는 성화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며 이로써 사람의 수고와 노력으로 보태어짐 없이 하나님은 스스로가 완전한 영광에 이르신다. 우리의 영광과 감사는 주님께서 그런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를 가담시켜 주셨다는 것에 있다. 시인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자랑할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오직 여호와가 목자시고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부족함도 없는데 영혼의 소생이나 의로운 삶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함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자녀교육 단상

자녀교육 황금률은 사랑이다. 인생에 시시비비 판결로 종결되는 문제는 없다. 행위의 경계선을 긋고 구분하고 분리해도 임시방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원래 인간은 외적인 규범을 제시하고 위협을 가하는 식으로는 통제되지 않는 존재이다. 율법의 표면적인 기능처럼 위법이나 범법을 확인하는 정도이고 외적인 표출의 저지가 고작이다.

인생은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라고 한 베드로의 통찰과 인간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온갖 문제들의 궁극적인 종식이 용서를 비롯한 모든 시도들 위에 사랑을 더하는 것으로 완결되는 것이라고 한 바울의 통찰이 깊다. 비약으로 보일 정도이다.

터지는 문제마다 무작정 사랑부터 들이대는 관성적인 진단과 처방에 식상하신 분들이 많고 나도 이따끔씩 불쾌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처방이 비성경적 만능열쇠 취급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에서 다 이룬다는 예수님 자신과 사도들의 율법 해석학 때문이다.

성경의 어떤 구절을 읽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귀결되지 않았다면 아직 하나도 읽지 않은 것이라는 대표적인 교부 어거스틴 해석학의 핵심도 이와 상통한다. 물론 율법에는 하나님 사랑이든 이웃 사랑이든 비약이나 과도한 추론 없이는 사랑과 연결되기 어려운 조항들이 대단히 많다. 그게 우리의 눈에는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율법의 저자이신 성자께서 동시에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랑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모든 율법과 사랑 사이의 유기적 연결을 뚜렷하게 확인한다. 율법과 사랑의 연결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 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 원래 우리의 상식에는 모순이다.

우리의 머리에는 모순인데 실제로는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임을 자녀교육 속에서 발견한다. 자녀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어떠한 거짓말을 하고 아무리 영악한 생각과 의도를 가졌다 할지라도 해법의 마침표는 역시나 사랑이다. 자녀의 모든 문제는 사랑으로 해결되고 종결된다. 하지만 옳고그름 따지는 것은 해법의 첫걸음일 뿐인데 거기에만 매달린다.

유혹이고 함정이고 속임수다. 사랑이 더해지지 않았는데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보다 더 달콤한 유혹과 더 완벽한 함정과 더 기막힌 속임수가 있을까? 사랑까지 이르러야 문제가 종결된다. 자녀들의 거짓과 일탈과 완악은 사랑의 빈곤에 대한 신음이고 사랑의 충족을 위한 절규이다. 정말 쌩뚱맞은 비약이나 역설적인 진실이다.

자녀교육 승부수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만큼 자녀는 배우고 자라난다. 자녀들의 인격과 신앙과 삶의 크기도 사랑의 섭취량과 비례한다. 자녀의 모든 것들이 사랑과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부재와 빈곤과 왜곡이 자녀의 전부를 파괴한다. 자녀와의 문제가 풀어지지 않았다면 주님의 사랑이 전인격에 새겨질 때까지 십자가를 응시하는 수밖에 없다.

2013년 10월 27일 일요일

목회자의 자세와 목회방식

베드로는 스스로를 장로라고 밝히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목회자의 자세와 방식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벧전5).

1. 자신에게 보내어진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임을 기억하며
2.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3. 부정한 소득을 기대하지 말고 무상으로
4. 성도를 다스리는 자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본보기가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  

역동적인 기다림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시37:7)

기다림은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해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스케줄과 타이밍을 부인하고 주께서 원하시는 방향과 때를 따라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잔잔한 그러나 강력한 자기부인 행위이다.

당연히 기다림의 기간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행위의 휴지기가 아니다. 막대한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내는 겉으로 표출하는 행위가 아니라 분별과 실행을 조절하고 다스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갑절의 자제력이 요청된다. 그런데 인내의 성격이 궁금하다.

주변에 악인들의 형통이 보란듯이 펼쳐지면 속에서는 출처도 모를 잡동사니 반응들이 앞다투어 준동한다. 시인은 그것들이 대체로 분노와 불평임을 경험하고 그러지 말라고 권고한다. 의도하든 않든 심판자와 집행자의 자리를 넘보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인은 우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고 여호와를 기뻐하고 여호와께 앞길을 맡기라고 명령한다. 가장 역동적인 인내와 기다림의 방식이다. 참고 기다리는 자의 참모습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한 구절은 발견하지 못하겠다. 자 명한대로 준행하면 되겠다. 

2013년 10월 25일 금요일

유학에는 단점도 있다

1. 향수병과 외로움에 시달린다.
2. 경제적 빈곤과의 싸움이 치열하다.
3. 아파도 사고가 아니라면 병원행에 큰 재정적 결단이 필요하다.
4. 국어감도 떨어지고 한국 현장감도 떨어진다.
5. 모국어의 시원하고 유쾌하고 풍성한 소통의 부재가 심각하다. (물론 한국인 공동체가 있는 경우에는 외국어 소통의 부재로 언어가 늘지 않는다는 문제가 심각하다)
6. 익숙한 환경과 습관이 제공하는 통제력의 무장해제 때문에 방종의 분위기에 휩싸이기 쉽다. 
7. 아이들의 한국인 정체성과 모국어 감퇴가 우려된다.
8. 유학생 아내들은 가사와 자녀교육 및 외로움 때문에 유학생 자신보다 더 큰 수고와 아픔이 뒤따를 수 있다.
9. 제도적 차별의 해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차별의 불유쾌한 느낌과 늘 직면해야 한다. 이는 외국인의 인종차별 의도가 없더라도 느껴지는 내용이다.
10. 자신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정체성 혼동과의 씨름도 만만치가 않다.
11. 실력의 향상과 인격의 성숙보다 여전히 상한가를 부유하는 유학 프리미엄 이용에 결탁의 악수를 청하려는 순간들이 늘 도사리고 있어 자칫 가증한 사기꾼 근성에 빠져들 수 있다. 
12. 성취만이 아니라 좌절과 절망도 유학의 결과일 수 있다. 물론 좌절과 절망도 소중한 자산의 일부라는 것은 사실이다. 
13...

이렇게 단점들을 하나하나 꼽자면 끝이 없겠군요. 물론 이런 단점들이 극복되면 갑절의 강점으로 유익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유학에는 장점의 수효에 버금가는 다수의 단점들도 있음을 늘 염두해 두어야 할 듯합니다. 

유학을 가면 무엇이 좋을까요?

1.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배워서 좋습니다. 인간은 문화적 존재라고 부를 정도로 문화 의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으면 부지불식 중에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를 호흡하며 살겠지요. 그러나 유학은 낯설고 의심스런 문화와 언어에 자신을 통째로 이식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삶의 전 영역에서 감각과 의식과 습관과 자세의 새살이 돋아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유학을 간다는 건 그런 낯설고 불편한 환경에 자신을 던진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살면서 버티는 것 자체가 전방위적 배움이고 그래서 유익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다양하고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삶의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유익의 자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웃을 유익의 방편으로 삼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배우고 사랑하고 돕고 소통할 대상의 폭과 수가 커진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국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기존의 친구마저 소통이 단절되는 역기능 사례도 없지는 않습니다. 

3. 자료들이 손만 뻗으면 닿을 지근 거리에 널려 있어서 좋습니다. 다양하고 방대한 자료들 접근력의 현저한 향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최근에 연구되고 출간된 자료들은 지금도 한국에서 용이하게 손에 거머쥐고 독파하고 싶어도 상대적인 접근 가능성이 낮습니다. 

4. 유학하는 곳에서 가르치는 유수한 여러 석학과의 개별적인 만남과 전인격적 소통을 통하여 특정한 신학적 이슈나 입장에만 치우치지 않고 석학들에 대해 보다 균형있고 포괄적인 안목을 얻을 수 있어서 유학이 좋습니다. 

5. 유학에 대한 지나친 환상과 거품을 제거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물론 유학을 오면 앞에서 언급한 여러 유익들이 있지만, 유학하지 않았을 때 가졌던 막연한 선망과 기대와 존경과 뭔가 다르다는 느낌 등등과 관련된 각종 거품들이 쑤욱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학하신 분들의 고생과 수고와 아픔과 분투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6. 자녀들이 다양한 환경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새로운 언어도 정복하고 다른 문화도 경험하고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도 만나고 교육의 여러 시스템도 경험하고 외국인과 우정을 형성하는 체질도 길러지니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7. 학문적인 실력향상 면에서도 좋습니다. 불편하고 낯선 환경에 처하면 사람은 포기하는 소수도 있지만 대체로 젖먹던 힘까지 호출하고 영혼의 깊은 밑바닥 에너지도 모땅 긁어내어 활용하고 극복하고 적응하고 결국 성취하고 마는 경향을 보입니다. 실력이 안되는 자신을 발견하면 죽기 살기로 주님께 매달리고,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상 내가 포기할 어떠한 이유도 없어지는 사활을 건 기도자가 되는 그런 기독인의 근성이 유독 유학의 현장에서 잘 발휘되는 것 같습니다. 

유학의 장점을 물으셔서 떠오르는 생각의 순서대로 숫자를 붙였는데 답이 되셨는지...결정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동성애 강연을 듣다

동성애자 연사의 거침없는 강연을 들었다. 보수적인 기독교 진영에서 거론되는 담론들의 구체적인 논지들과 키워드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강연의 핵심은 동성애적 성향 혹은 끌림을 가진 사람들을 '사람'(person)으로 대우해 달라는 것이었다.

신학적 입장의 일치와 불일치 여부에 앞서서 사랑과 은혜가 선행되면 좋겠다는 호소였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해야 한다는 '허울좋은 구호'보다 자신의 죄는 미워하되 다른 죄인은 사랑해야 한다는 태도가 예수님의 의도를 더 잘 반영하고 있단다.

강연은 구구절절 청중들의 공감과 동의를 촉구하는 엄선된 멘트들로 가득했다. 일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서원까지 밝혔다. 강연자는 연구도 많이하고 고민도 많이하고 기도도 많이하고 대화도 많이하고 집필도 많이하고 강연도 많이한 분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고민은 동성애의 외적 행위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동성애적 끌림(homosexual attraction)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절규해도 효험이 없었고 지금까지 그 끌림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성적 성향이 자신을 좌우하진 못한단다.

울림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그의 호소가 있다. 정말 동성애로 고민하고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정죄와 격리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진정으로 돕고자 한다면 사랑이란 가장 강력하고 효력적인 방법 외에는 어떠한 접근법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말이었다.

나의 깨달음은 1) 무엇보다 사랑이 먼저라는 사실과, 2) 대화가 진리를 생산하는 수단은 아니라는 것과, 3) 사랑과 이해와 포용이 있더라도 동성애 자체는 성향이든 끌림이든 묵상이든 행위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죄라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 등이다.

권징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는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올바르게 세우려는 성경적 수단이 권징이기 때문이다. 미소와 포옹과 악수와 칭찬은 문제를 푸는 궁극적인 열쇠가 아니라 사안의 위중함을 가리기도 한다.

성경에서 분명히 죄라고 선언한 것들에 대해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며 괜찮다고 덮어 버리는 것은 사형에 해당할 정도의 심각한 죄라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하는 입장에 가까워 보인다.

언사의 과격성을 이유로 주님보다 더 친절하기 위해 인위적인 마사지를 가해서는 안되겠다. 오히려 그렇게 과격한 언사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해 낸 바울의 심경과 그렇게 영감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내며 거기에 기초하여 이해하는 접근법이 보다 타당하다.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 사랑과 포용과 관용과 친절과 배려와 이해라는 이름으로 동의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부질없는 시도이다. 이는 악인이 서로 손을 잡더라도 형벌을 면치 못한다는 지혜자의 통찰에 가벼운 곁눈질만 해 보아도 확인된다.

그래서 연사의 열변이 이해는 되면서도 안타깝고 찹찹한 마음으로 들어야만 했다. 미국에는 동성결혼 합법화의 물살이 거칠다. 최근에는 뉴저지가 그 물살에 휩쓸렸다. 자유와 평등의 구현이란 자부심과 호평을 얻는 댓가로 진리의 빛에서는 한발짝 멀어졌다.

세상이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사랑과 포용이다. 교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주시는 것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복이라고 생각되는 우리의 절박한 필요를 채우셨다. 우리도 세상에 대하여 그러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2013년 10월 23일 수요일

하나님의 완전함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행17:25)

오히려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 바울은 기록한다. 그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을 말하였을 때에도 영광의 부족분 해소의 일환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되돌려 달라는 독촉이나 본전을 찾으시는 자본주의 경영인의 이미지를 주님께 씌우고자 함이 아니었다.

투자와 관리와 회수라는 경영의 순환고리 형식에 익숙한 우리의 머리에서 돌아가는 지식의 인과율적 회로로 걸러지지 않는 사도의 의도에는 하나님의 완전함과 인간의 의존성 확인만이 아니라 이러한 속성의 대조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전함에 가까이 오라는 초청의 성격까지 포괄되어 있어 보인다.

하나님은 진실로 인간의 어떠한 보충도 요구하지 않는 분이시다. 즉 영광이나 속성이나 기쁨이나 만족이나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은 외부의 어떠한 원인에 의해서도 첨삭되지 않는 분이시다.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온 우주가, 온 인류가 없었어도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인간의 의존성은 하나님의 이러한 완전성과 상반된다. 생명과 호흡과 만물이 주어지지 않으면 존재도 삶도 활동도 중단되는 전적인 하나님 의존성이 인간의 대표적인 속성이란 이야기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의 철저한 의존성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는 어떠한 것도 생각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과 인간의 전적인 의존성 대조가 가진 의미의 반쪽이다. 의미의 다른 반쪽은 주님께서 생명과 호흡과 만물에 의존하고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전성에 이르도록 초청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즉 온 세상과 온 인류가 없이도 하나님은 어떠한 부족함도 없이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온 세상의 만물이 사라져도 여전히 기뻐하고 만족하고 행복하고 완전할 수 있는 그런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높은 가치의 삶으로 초청하길 원하시고 계신지가 도무지 측량할 수도 형설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그런 초청의 자리가 있다.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려는 생각일랑 아예 접으시라. 오히려 모든 것들이 거절되고 차단되고 생략되고 박탈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만족과 행복과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경배에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 온전함에 이르기를 힘쓰시라. 생명마저 제거되는 죽음도 유익이란 말은 하나님이 전부인 성도의 입술에서 나오는 노래이다.

가혹하다. 도무지 세상이 생산할 수도 카피할 수도 없는 내용이다. 이런 곡조가 흐르는 입술의 소유자가 생산하는 삶의 고품격 가치와 향기가 마구 진동하는 유일한 현장이 교회이길 소원한다. 그러나 추하고 역겨운 악취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원흉이란 오명만 벗어도 좋겠다는 소박한 바램이 실소할 뜬구름 공상은 아닌지 모르겠다. 

2013년 10월 22일 화요일

침묵은 무덤이다

주께서 내게 침묵을 지키시면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 것입니다 (시28:1)

이는 말씀의 공급이 없으면, 즉 영생의 말씀이 영혼의 혈관에 한 찰나라도 수혈되지 않으면 살았으나 무덤에 머무는 자와 일반이란 얘기겠다. 시어가 절박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우리 영혼에 송이꿀 이상의 달콤함만 선사하는 혹은 긴급한 허기를 달래는 간식이 아니라 영혼의 생계를 좌우하는 본식이다. 먹으면 살고 끊으면 죽는다.

금식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생을 좌우하지 못한다는 결연한 고백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상징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귀의 금식보다 무서운 경고는 없을 것이다. 사선을 넘나들고 무덤을 출입하는 듯한 심경이 다윗의 시어에서 읽어진다.

침묵은 나에게 생명이요 소망이요 기쁨이요 반석이요 전부이신 주님과의 단절, 나에게 어떠한 것도 어떠한 가치도 어떠한 의미도 어떠한 미래도 소멸되고 말 단절의 경고와 같다. 다른 시편에서 다윗은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심판의 칼을 가시고 징계의 활을 당기실 것이라고 하였다. 경고든 꾸중이든 책망이든 말씀이 있는 동안에는 안심이다.

그러나 침묵이 시작되면 사태의 영적 움직임이 감지되지 아니한다. 이는 하나님의 침묵이 무덤을 방불하는 이유겠다. 그의 입김으로 생령이 된 우리에게 침묵보다 큰 공포는 없다. 주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면, 성경을 펼쳐도, 기도의 무릎을 꿇어도, 선행의 몸부림을 시도해도, 파수꾼의 경성도 허사로다. 코에 호흡이 있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을 뻗어도 헛수고다.

그런데 누구도 앗아가지 못하는 소망이 있다. 예수님의 유언이다. 말씀이신 주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떠나시지 않고 함께 하신다는 약속 말이다. 우리에게 영원한 침묵은 없다는 이야기다. 회개하지 않음으로 말미암는 일시적인 침묵, 그로 인한 영적 신경의 마비, 그래서 소통의 단절이 가져오는 극도의 영적 답답함은 있어도 영원히 지속되진 않는다.

우리들 중에는 때때로 침묵의 캄캄한 무덤에 머무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절망과 좌절은 아직 이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입술이 있어서다. 하나님은 기록된 당신의 말씀을 회수하진 않으신다. 말씀의 삽바를 거머쥐고 은혜 베푸실 때까지 씨름하면 된다. 영혼의 밑바닦에 박힌 죄악의 군살을 기억으로 긁어내고 회개하면 된다. 그게 우리의 최선이다.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는 거다.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그리고는 기다리는 거다. 주께서 침묵을 중단하실 때까지...

2013년 10월 18일 금요일

일을 감추시는 하나님의 영광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91:14)

하나님의 어법은 대체로 이러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고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우리를 높인다는 인과적인 어법 말이다. 이런 어법에 따르면 마치 구원과 높임의 근거가 우리에게 있고 원인은 우리의 선행적인 공로에 있는 듯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상태와 실행을 촉구한다.

그러나 성경의 전반적인 뉘앙스는 하나님은 언제나 앞서 행하시고 먼저 이루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받았고 사랑을 알고 사랑하게 된다. 주님께서 먼저 당신을 계시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이름을 안다. 이는 주님께서 이미 마련하신 식탁에 그냥 숟가락만 얹으라는 뉘앙스다. 복음의 정수가 늘 그렇듯이.

그런데도 주님께서 늘 우리의 상태와 행실을 보시고 거기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 주신다는 방식에는 여전히 해석학적 오해나 오용이 기웃거릴 여지가 남는다. 이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와 결부된 사안이다. 인간의 자유는 모든 공로와 영광이 인간에게 돌려져야 할 근거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명토박아 두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셨고 그렇게 하셨다. 독생자를 주심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으로 주시었다. 그런데 단순히 주시는 선물의 지고한 가치의 소유권만 넘겨지는 식으로 주시지를 않으셨다. 주시는 방식에 있어서도 최고의 선물에 상응하는 자발적 주체로서 자유로운 능동의 손을 뻗어 취하는 방식이다.

자유는 인간이 주님께서 마련하신 가장 지고한 가치의 선물을 취하는 신비로운 형식이다. 수혜자 편에서는 가장 깊고 고급한 감사가 산출되는 틀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을 앞서 행하시고 모든 것을 주시되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으시고 주셨는데 왼손의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심으로 일을 감추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깊이 증거된다.

선물의 질도 경이롭고 주시는 방식도 신비롭다. 멋쟁이 하나님!

2013년 10월 17일 목요일

다 주의 조화다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고 (욥12:16)

세상의 거절로 인한 상실감, 무기력, 허탈감은 아무리 메가톤급 무게가 실렸어도 맛배기에 불과하다. 때때로 버틸만한 분량으로 주어지는 거절의 경험은 나쁘지가 않다. 하나님에 의해 거절되고 버려지는 것의 위중함을 맛보는 기회일 수 있어서다. 이는 삶의 적소에 배치된 요긴한 알람장치 정도가 아니겠나.

살면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닦 경험도 그러하다. 생의 부패하고 일그러진 실상을 볼 수 있는 최저의 지경까지 내려가는 불가피한 상황, 몸부림을 치면서 결코 내게 있어서는 아니될 일이라는 생각으로 피하는 것은 소극적인 태도겠다. 그런 상황이 없으면 인생의 실상에 대한 감각도 무뎌지기 때문이다.

반찬 하나에도 그 자체로는 무용하고 먹거리도 아닌 다양한 양념들이 참여하고 뒤섞여야 제맛이 나듯이 인생의 맛도 그러하다. 어쩌면 타인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아주 생소한 절망의 오솔길로 접어들 때,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은 희귀한 양념 사용의 기회라고 보아도 좋겠다. 사전정보 없는 경험이라 제맛이다.

자라온 환경들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 각자가 다채로운 성장배경 탓인지 삶의 색상과 향기와 촉감도 저마다 다양하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그런 고유한 삶들이 악기처럼 집단을 이루어서 빚어내는 감미로운 화음은 마치 한 편의 거대한 심포니를 방불한다. 섭리의 심포니다. 각자가 주체로 참여하고 있으면서 섭리다.

때때로 괴상한 악기가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 가지고 소리를 섞어도 견딜만 하다. 다 주의 섭리적 조화일 수 있어서다.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에겐 영원한 상실감과 무기력과 허탈감이 불가하다. 그 정도가 아무리 심각해도 맛배기 정도의 경종일 뿐 우리에게 어떠한 위협도 가하지를 못한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까.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욥의 통찰이 귓가에 심포니와 같다.

사랑이 낚시바늘 같이 나를 꿰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시간대를 살아간다.
지금 정신이 멀쩡하고 건강하고 무언가가 주어져 있을 때
마음과 힘과 뜻과 생명을 다하여 누군가를 사랑하자.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주변에 있다는 것,
사랑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건 축복의 때여서다.

말하는 입술과 바라보는 눈빛도,
합리적인 상식과 신중한 생각도,
사랑이란 최고급 가치의 생산을 위해 주어진 소여인 까닭이다.

언젠가는 일반은총 일체를 반납해야 할 때가 급습한다.
그 때와 일시는 아무도 모르도록 감추어져 있다.
가리워진 영역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최상의 것을 투자하는 거다.

사랑은 다 벗겨지지 않고 적당히 가려진 세상에서
삶의 모든 순간마다 처한 모든 상황에서 모든 타인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원리이며 최상의 지혜이다.

역설적인 신뢰

신뢰는 합당한 조건이 가추어질 때
비로소 실행되는 의지의 피동적인 행위가 아닌 듯하다.

신뢰는 언제나 하나님께 있으며
근원을 하나님께 둔 신뢰는
생산적인 속성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런 신뢰는 사람을 움직인다.
신뢰하기 힘든 사람들도
신뢰할 만한 근거들로 채워지게 만든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으면,
값없는 신뢰는 신뢰성이 없는 사람에게 돌려지기 어렵다.
사람이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여호와 신뢰에 근거하여 사람을 신뢰하면
신뢰할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하지 않은 사람들도
신뢰의 수혜자가 된다. 신기하다.

이것이 특정한 인물에게 해당되는 생각인지,
보편화될 수 있는 생각인지
아직 충분한 검증이 이루어진 객관적 경험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암튼 신뢰와 신뢰성이 없는 사람는 서로 어울리지 않지만
모순적인 만남과 결합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의 옅은 섬광은 급하게 스쳤다. 

2013년 10월 15일 화요일

다윗의 신본주의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가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23:6)

하나님이 목자라는 사실에서 양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 다윗의 신본주의 정신은 삶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사는 것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궁전의 물리적 찬란함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과 인자라는 속성에 귀속되는 실재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다윗에겐 두려움의 실질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가로등이 어두움을 밝히고 CCTV 카메라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중심적인 신본주의 사색이 절망적인 현실의 희망찬 재해석을 낳았다.

광야에서 식탁을 마련하는 것도 인간 편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식탁에 채워질 음료수와 양식이 땅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현장이 광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베푸셨다. 장소의 성격보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했다.

아골 골짜기는 죽음의 뼉다귀가 나뒹굴고 절망의 악취가 진동하는 현장이다. 모두가 외면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런 곳인데도 하나님 편에서는 역설적인 소망의 출구로 간주된다. 하나님이 전부요 주님만이 소망임을 확인하는 장소로는 아골 골짜기가 최상이다.

선하심과 인자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집에 거할 것이라는 실생활 속에서의 신본주의 정신은 다윗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이 누구나 가능하다. 광야와 아골 골짜기도 그런 주거를 훼방하지 못한다.

멀러 교수님의 65주년 생신기념 논문집

2013년 10월 9일 칼빈 신학교는 박사과정 개설 2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박사과정 개설에는 제임스 드 영 당시 총장과 핀스트라 교수 및 멀러 교수의 학문적 의기투합 결과였다. 멀러 교수의 회고적인 강연이 있었고 핀스트라 교수가 나오더니 순서지에 명시되지 않은 순서를 진행할 것이란다. 그 순서는 멀러 교수의 65년 생신기념 논문집이 브릴 출판사의 협조를 얻어 53명의 필진들에 의해 쓰여졌고 그것을 깜짝 이벤트로 멀러 교수에게 증정하는 것이었다.

순서가 진행되는 중에도 멀러 교수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기념 논문집의 두께를 능가하는 두툼한 본인의 생신기념 논문집을 손에 넘겨 받더니 답사를 이어가지 못하였다. 청중들은 기립하여 박수로 경의를 표하였다. 이에 멀러 교수는 "정말 정말 영광이다"라는 멘트와 함께 감격한 눈시울은 물기로 촉촉했고 입술에는 감동의 미세한 진동이 잔잔하게 일어났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단다. 참석한 청중들은 박수로 화답하며 축하의 분위기를 높이 떠밀었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장면이다.

이번에 출판된 멀러 교수의 생신기념 논문집은 자신의 지도교수 David Steinmetz의 스승인 Heiko A. Oberman에 의해 만들어진 Studies in the History of Christian Tradition 시리즈의 170번째 책이었다. 논문집의 제목은 Church and School in Early Modern Protestantism: Studies in Honor of Richard A. Muller on the Matur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이다. 이 논문집은 지금까지 멀러 교수의 학술적인 활동으로 종교개혁 및 종교개혁 이후 시대의 학문연구 발전에 끼친 혁혁한 공로가 지금까지 합당하게 평가되지 않았음을 주목했다.

그래서 이 논문집은 멀러 교수의 학문적인 영향이 어떠한 분야에 얼마만큼 끼쳤는지 그 대략적인 정도를 가늠하는 작은 시도였다. 집필진은 다양한 나라와 다양한 기관과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멀러 교수의 신학적 영향력이 대충 가늠된다. 본서에 논문을 기고한 저자들의 이름은 아래과 같다. 행사와 관련된 비디오는 여기를 클릭하면 되시겠다.

Yuzo Adhinarta, Willem J. van Asselt, Irena Backus, Jordan J. Ballor, J. Mark Beach, Andreas J. Beck, Joel R. Beeke, Lyle D. Bierma, Raymond A. Blacketer, James E. Bradley, Dariusz M. Bryćko, Amy Nelson Burnett, Emidio Campi Heber, Carlos de Campos Jr., Kiven S.K., Choy R., Scott Clark, John V. Fesko, Paul W. Fields, W. Robert Godfrey, Alan W. Gomes, Albert Gootjes, Charles D. Gunnoe Jr., Aza Goudriaan, Fred P. Hall, Byung Soo Han, Nathan A. Jacobs, Frank A. James III, Martin I. Klauber, Henry M. Knapp, Robert Kolb, Mark J. Larson, Brian J. Lee, Karin Maag, Benjamin T.G. Mayes, Andrew M. McGinnis, Paul Mpindi Adriaan C., Neele Godfried Quaedtvlieg, Sebastian Rehnman, Todd Rester, Gregory D. Schuringa, Herman Selderhuis, Donald Sinnema, Keith D. Stanglin, David C. Steinmetz, David S. Sytsma, Yudha Thianto, John L. Thompson, Carl R. Trueman, Theodore G. Van Raalte, Cornelis P. Venema, Timothy J. Wengert, Reita Yazawa, Jeongmo Yoo, Jason Zuidema.


믿음의 선배 다윗의 하나님 생각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 (시23:1)

배가 부르거나 만족하게 되면 감각과 신경이 둔해진다. 분노나 신경질도 더뎌지고 불평과 원망도 머리둘 곳이 없어진다. 좋은 점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평화로이 안락을 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마저 망각의 무덤에 매장하는 우도 더불어 범한다는 거다.

칼빈은 시인 다윗이 당시에 처했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절대적인 권력의 보좌에 올랐으며, 부와 존귀의 빼곡한 광휘에 휩싸였고, 현실적인 부의 가장 막대한 분량을 소유했고,  왕족의 즐거움이 극에 달한 시점에 있었다.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던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고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택들을 기억의 수면에 떠올리고 있으며 그것을 사다리로 삼아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하고 있다는 사실에 칼빈은 감탄사를 격발하고 있다. 부족함이 없는 때인데도 본질을 붙들었다.

다윗은 자신을 양이라고 한다. 천하를 호령하는 왕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규정이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라는 일말의 뻣뻣한 신분의식도 없이 자신을 양으로만 생각한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안식하게 하신 분, 다윗에겐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영혼을 회복하신 분, 의로운 길로 인도하신 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관통하는 중에라도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게 만드시는 분, 나를 지팡이와 막대기로 위로하는 분, 원수의 목전에서 나신에게 상을 베푸시는 분, 머리에 기름을 부어 축배의 잔이 넘치게 하시는 분...

다윗의 마음과 기억에는 하나님 뿐이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는 일평생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기에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 것이란다. 다윗은 지금 뭔가 아쉬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주먹'이나 '동정'을 구하는 게 아니라 그분을 경배하고 있다.

고난의 때에도 슬픔의 때에도 고독의 때에도 배신의 때에도 반역의 때에도 모함의 때에도 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짓던 그 다윗은 평화와 풍요와 안정과 만족과 영광과 안식의 때에도 하나님이 목자라며 자신의 신분을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기초하여 규정한다.

나는 누구인가? 다윗의 어법에 따르면 양이다. 하나님이 목자시기 때문이다. 이런 규정의 정당성은 인간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어떠함과 그 관계성에 의존하고 있어서다. 하나님이 고려되지 않은 어떠한 '나'도 진정한 나일 수 없다. 다윗은 왕이지만 잠시 입은 옷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신분과 복장을 혼돈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망각하지 않아서 가능했다. 감투를 쓰고 업적을 축적하고 유명세가 오르면 사람들은 대체로 본연의 자리를 이탈한다.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기 정체성에 머무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도 망각한다.

다윗의 '양' 정체성은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살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그의 인도와 돌봄과 보호가 없다면 벼랑으로 떨어지고 이리의 이빨에 뜯기고 광야를 헤매게 된다. 풍요로운 초원과 안전하고 밝은 길과 화목한 밥상과 넘치는 잔은 모두 목자의 일이었다.

다윗은 그것을 지각했고 시인했다. 

2013년 10월 14일 월요일

복개념 재설정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기뻐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112:1)

복의 본질이 이것보다 더 명료하게 요약된 구절은 발견하기 어렵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크게 기뻐하는 것이 복이란다. 그러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하고 부요와 재물이 집에 쌓이게 될 것이라는 구절이 이어져 마치 복개념이 거기에서 풀어지는 듯하다. 오석이다.

마태복음 6장도 구조가 유사하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이라는 말씀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명령의 목적을 우리가 소원하는 모든 것들이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에서 찾으려는 것과 일반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의 우선적인 추구를 다른 모든 것들의 소유에 필요한 수단으로 여기는 자는 여호와 경외와 계명의 준수도 부와 강성의 수단으로 여길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여호와 경외와 계명준수 및 하나님의 나라와 의 추구 자체를 목적으로 본다.

강성과 부의 소유는 파생적인 결과이다. 복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기뻐하는 것 자체에 있다. 여호와 경외와 그 계명의 준수는 태초에 창조의 목적이고 방향이고 원리이고 본질이다. 본래의 목적과 방향과 원리와 본질에 충실한 것이 복이라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경외와 기쁨은 이론으로 머리에 저장하고 지식으로 암기하는 방식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선물이다. 주어져야 한다. 즉 요한이 잘 기록하고 있듯이 그리스도 예수의 경외와 기쁨이 우리 안에서 충만해야 가능하다. 진정한 복은 그리스도 없이는 향유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성경 해석학의 중심에 위치시킨 믿음의 선배들이 취한 태도는 수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13년 10월 13일 일요일

높은 기준치 제시는 교회의 책임이다

의식과 관심의 문화화가 선악의 문제는 아니지만 적절한 주의는 필요하다. 문화의 변화에 따라 사람의 의식과 관심도 변해서다. 안다는 것과 아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의 인식론에 있어서도 문화는 변화의 주도적인 인자다. 인식도 문화의 장단에 맞추어 춤추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하면 인식론의 결도 과학만큼 예리하고 정교해야 우리의 의식과 관심도 만족하고 안식에 도달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제도 정밀도가 달라졌다. 물론 오늘날 존재를 가늠하는 수단과 존재의 유무를 판단하는 잣대의 발달은 과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보는 눈과 듣는 귀의 확장일 뿐 지각으로 인지하는 본질과 방식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의 최첨단 과학으론 사이즈가 10의 마이너스 18승미터 아래로만 내려가도 존재의 상태는 파악되지 않고 존재의 유무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이것이 지금의 유행이다. 

시대마다 문화의 변동을 따라 성경의 객관성과 진정성에 멸시와 조롱의 안다리를 걸고 넘어진 무리들이 늘상 있었다. 문제는 객관성과 진정성을 판단하는 세상적 기준의 미숙과 가변성에 있다. 물론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많은 오류들이 벗겨진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와 권위와 객관을 가볍게 무시할 정도로 과학의 판단 기준치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변동될 수 있는 기준치의 가변적인 속성도 문제다. 그러니 판단은 늘 무지의 도착적인 향연일 뿐이라는 이후 세대의 판단에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겠다. 

지나가는 유행성 기준치의 새로운 등장에 열광하고 과장하고 경도되는 것이 섭리의 부분일 수는 있겠으나 불변의 진리를 알고 고수하는 자들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아니겠다. 정교한 최첨단 학문의 속성은 극미시와 극거시 세계의 과학적 탐구가 보여준 한계로도 충분하다. 

다양한 분야의 최첨단 무대에서 주름 꽤나 잡는 분들의 성경 부정적인 언사가 때때로 귀에 거슬린다. 성경에 대한 의도적인 거절일 수도 있겠고 스스로가 그들이 가진 저급한 유행성 기준치의 희생물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다. 어떤 경우이든 비판의 마침표는 그분들이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교회가 늘 세상과 역사 전체를 의식하며 제시하고 살아내고 풍겨내야 할 높은 진리의 기준치를 제시하지 못해서다. 사람들이 설득되는 일반적인 기준치 이상의 높은 기준치 제시의 책임은 교회에 있다. 교회가 보여주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기준이 있다.

항상 영원을 의식하고 살아내며 증거해야 할 성경에 입각한 기준치 제시의 과제에 교회가 부응하고 있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우리의 의식과 관심이 깊고 높고 넓고 길지 않으면 안되겠다. 세상의 무딘 기준과 판단의 잣대로도 위협을 느낀다면 교회가 교회답지 않은 거다. 

후원자를 찾습니다

칼빈 신학교 안에는 종교개혁 및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 관한 연구, 자료수집, 및 무상 자료보급 차원에서 유니우스 연구소(Junius Institute)가 멀러 교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발족이 되었으며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목회자들 및 학자들이 시대별로 인물별로 필요한 원문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16-17세기 디지털 도서관(Post-Reformation Digital Library)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및 신학교가 봉착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로서 열악한 자료보급 환경에 청신호가 켜진 것처럼 고맙고 반가운 서비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PRDL의 결점이 있다면 대륙에 있는 학자들의 라틴어, 불어, 독일어, 영어 문헌들은 제공되고 있는데 유독 퓨리탄 문헌들의 보급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직시한 유니우스 연구소는 앞으로 청교도들 중에 유력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자료확보 및 디지털 작업을 위해 청교도 문헌들을 다량 소장한 목회자들 및 학자들을 물색하고 접촉도 시도하고 있습니다. EEBO/SWRB를 통해 청교도 자료들을 접할 수 있지만 무료가 아니고 Google Books도 다운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다수 문헌들이 여전히 영미권 밖에서는 그림의 떡입니다.

유니우스 연구소 운영의 문제점(?)은 영리추구 기관이 아니라 자원봉사 차원에서 자발적인 운영 멤버들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발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연구소가 외부의 지원 없이는 장수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안팎으로 후원자를 부지런히 모집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는 지인들 중에 개신교의 뿌리와 본류라고 할 16-17세기 자료들을 발굴하고 무상으로 보급하는 일에 뜻과 관심이 있으신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사실 연구소의 청교도 문헌 디지털화 작업이 우리에게 집적적인 도움이 제공되는 기획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간접적인 면에서는 우리에게 큰 유익을 제공할 것이고 그러기에 믿음의 형제자매 중에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일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유니우스 연구소는 기존의 PRDL 구축으로 세계적인 자료보급 사이트로 여러 나라와 학회에서 인정과 격찬을 받았고 앞으로의 발전적인 귀추에 촉각을 모으는 사람들도 적지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일을 잘하고 결과물도 좋고 장래도 촉망되는 연구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혹 금액의 다소와 무관하게 후원의 마음이 있으신 분들이나 기관이 있다면 연락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Post-Reformation Digital Library

신론 중심적인 신학

강영안 교수님은 사도신경 구조를 설명하실 때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신경의 전부라고 말씀한다. 이유는 "Credo in" 구절이 신경에 세번 등장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포함되어 있다. 사도신경 구조가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라고 해서 마치 교회나 세상은 배제되는 것처럼 어떤 '상실감'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바빙크도 교의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한 하나님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단다. 교의학이 신론 중심적일 수밖에 없음도 모든 진리는 하나님 자신이 출처시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라 한다. 바빙크에 의하면 교의학이 취급하는 모든 교리들은 하나의 핵심교리 "신지식"(Cognitio Dei)에 대한 해설이다.

이토록 강한 신론 중심적인 신학을 외치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이 향기롭다. 이는 지식 자체가 생명이 되는 경우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뿐이라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교의학의 "유일한 내용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숙고하면 할수록 더더욱 감격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

신론 중심적인 신학이 세상의 신음에 무관심의 싸늘한 등짝을 돌리는 이들에게 면죄부로 악용되는 것은 경계해야 하겠다.

수학을 넘어서

수학을 알면 사유의 길이 보인다. 때로는 피곤하고 때로는 안타깝다. '이건 아닌대'의 입증에는 용이하다. 대단한 박식가와 달변가도 정교한 수학적 회로를 수시로 이탈한다.

그렇다고 수학에 진리의 객관성을 부여할 필요까진 없다. 수학도 동의의 폭이 넓기는 해도 여전히 행하는 주체가 사람이란 본질적 주관성을 극복하진 못해서다.

수학에는 조화도 있고 체계도 있고 질서도 있지만 대립도 있고 모순도 있고 비약도 있다. 세상이 수로 되어 있다는 주장의 근거들을 그냥 허술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학이 세상을 다 덮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더더욱 그러하다. 수학적 객관성과 정밀성이 때때로 진리를 가늠하는 경우를 본다.

수긍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도록, 왠만한 지성이 반박의 대립각을 함부로 세울 수 없도록, 거절하면 몰지각과 맹신의 협의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도록 수학화된 현장이 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과 경향 일반을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요구되는 계시의 방식으로 성경을 주셨다. 수학적 잣대가 가볍게 무시되는 것을 세상은 견디지를 못한다.

비록 히포의 주교가 "지혜는 모든 것에 수를 주었다"고 하면서도 수학자를 경계하되 심지어 진리를 말하는 때에라도 그리해야 한다고 한 태도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언급된 수학은 인간의 언어와 과학과 문화와 논리와 체계와 질서와 대립과 모순과 비약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의 총화로서 이해하면 되겠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2013년 10월 12일 토요일

가을의 은혜

좋고 선한 것의 시작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늘 확인한다.
악을 멀리하는 것도 나의 확고한 결단과 강한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앞선다는 사실을 늘 확인한다.

그런데도 내 의지의 자율성이 아무런 강제나 강요도 없이
주체처럼 모든 것을 행하도록 스스로를 감추시는 하나님을 늘 확인한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라는 지혜자의 지적을 늘 확인한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 되시면서
당신을 가리고 숨길 보다 큰 것이 존재하지 않는
천하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면서 늘 가리시는 하나님을 늘 확인한다.

강한 바람과 떠들썩한 지진과 화끈한 불의 요란한 연출이 아니라
관찰되지 않도록 미세한 음성으로 함께 계시면서 모든 것을 행하실 때
우리는 강요나 압박이 아닌 자유로운 은총의 기운에 휩싸인다.

이번 가을에는 그런 은혜에 짙게 물들고 싶다.

Todd의 논문발표: Scholastic Piety

버나드 드 무어,

1) 말키우스 신학의 주석가가 되기 이전에 실천신학 교수였다.
2) 학생들이 교실에서 다룬 주제들의 종합이 말키우스 신학의 주석이다.
3) 말키우스 자신도 드 무어에게 부탁했다. 특정한 주제를 다루어 달라고.

마스트리히트

1) 설교는 신학의 실천적인 파트에서 코어이다. 신학의 궁극적인 핵심은 실천에 있다.

The research question of this chapter

1. Much of recent research focuses on the integration and compatibility of scholastic method and practical piety.

2. What can be concluded from Marchius and then De Moor stating self-consciously that they will not handle theology with a practical section on every locus?

3. Does this methodological decision indicate a deeper problem as older scholarship alleges? An impermeable division into doctrine and practical piety?

다른 종류의 신학서적 저술도 교차독서 방식으로 서로 분리되지 않게 하는 독법이 가능했다.


A broad trajectory

1. Theology in its essence is practical
2. Theology in its method is theoretical-practical
3. Trajectory: Ames, Voetius, Hoornbeek, Marckus, De Moor

말키우스, 마스트리히트, 드 무어, 호른벡은 모두 에임즈를 뒤따른다.

마스트리히트: 이론과 실천을 병행하는 신학자로 인식된다.
그러나 방법에 있어서는 어떤 책은 이론적/변증적인 성격만을 가졌고, 어떤 책은 실천적/경건적인 성격만을 가진 책을 구별해서 저술했다.

신학은 설교이고 설교는 실천이다.

Theoretica-practico theologia는 설교의 최고 방법이다.
120페이지에 걸쳐
Medulla and The case of Conscience도 유사한 구조이다. 이론과 실천이 개별적인 책으로 구분되어 있다.

Marckius

How do various systems approach practical piety?

Separated from the main system
  1) Ames: Medulla & Casus Conscientiae
  2) Marckus: Compendium & Commentaries
  3) De Moor: Perpetuus Commentarius & exegetical commentaries

Incorporated
  1) Ames: Sciagraphia (HC를 주제별로 다룬 책이다)& commentaries
  2) Hoornbeek: Theoretica practica
  3) Mastricht: Theoretica-Practica Theologia

말키우스: Hobbes and Spinoza가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라고 신학서론 논하면서 언급한다.
스콜라적 방법은 실천적 경건을 배제하지 않는다.

라이든의 대학은 어떤 것이었나 그 시대에?

말카우스, 4년동안 이사야만 다루었다. 지금의 시각으론 실망할지 모르겠다. 이사야 속에서 교리적 논제들을 다루었다.

푸치우스: 데카르트 철학에게 저항했고
말키우스: 스피노자 철학에게 저항했다. 연관성이 있는가?
                우리는 방법론적 회의를 신학적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드 무어: 말키우스 논지를 강화했다.
헤어보른: 유화적인 데카르트 철학이 부유하고 있었다.

라이든/우트레히트 대학에서 각자의 고유한 교과과정 가졌는가?
드 무어는 두 기관에서 가르쳤다. 데카르트, 라이든 대학을 졸업했다.

Burman and Descartes 대화했다. 코케이우스는 데카르트에 대해 negative하지는 않았으나 데카르트 추종자는 아니었다. 푸치우스와 데카르트 사이의 갈등은 Pactum salutis와 관계되어 있다. 

2013년 10월 10일 목요일

태양

설교학을 듣다가 아름다운 시를 접하고서
브레이크 시간에 급역의 유혹에 넘어갔다. 
1980년에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Czeslaw Milosz가 쓴 "The Sun"이라는
시를 사알짝 의역했다.

모든 색상의 출처는 태양이다.
그러나 빛에는 어떠한 개별적인 칼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은 전 색상을 방출한다.
온 세상은 한 편의 시와 같고
공중에 뜬 태양의 배역은 시인이다.

다채로운 세상을 그리고자 하는 이는
누구든지 태양을 직시하지 말지어다
그렇지 아니하면 
눈으로 수집된 시상의 기억은 지워지고
눈에는 달구어진 눈물만이 고여서다. 

무릎을 접고 고개를 잔디까지 낮추어라
그리고 지표가 튕겨낸 빛을 응시하라
상실된 모든 것들이 거기에서 발견된다.
별들도, 장미들도, 여명과 땅거미도...

2013년 10월 8일 화요일

해와 궁창의 비유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다 (시19:4)

해가 중요하다. 장막은 해의 드러남을 위한 배경이요 수단이다. 시인은 해를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고 묘사한다. 해가 하늘 이끝에서 나와 저끝까지 운행하여 그 열기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는 언사를 이어간다. 계시의 충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만물은 저마다 우리에게 유익을 끼친다. 역사도 갈피마다 풍요로운 교훈을 전달한다. 그러나 만물과 역사는 주님의 계시가 드러나는 장막이다. 문제는 만물과 역사가 너무도 크게 느껴져 그 자체의 가치에도 이르기 어렵고 이르면 안주하고 만다는 거다.

장막을 수단으로 삼으셔서 위하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태양은 바라보질 않는다. 창조는 성경의 첫 페이지에 등장한다. 이건 장막이다. 성경은 창조 이후에 창조를 배경으로 삼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가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가치의 세계로 초청하고 계신지를 주목해야 한다. 주변적인 것에 욕구의 발목이 잡혀 초청장 자체를 물어 뜯고 할퀴거나 거기에 매달리고 도취되는 일들이 우리의 일상을 죄다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성경의 가치 기준으로 가늠해야 한다.

시인은 해와 장막을 기술하다 느닷없이 여호와의 율법과 교휸과 여호와 경외하는 도 이야기로 넘어간다. 태양의 열기에서 아무도 피하지 못하듯이, 순금보다 더 사모해야 하고 송이꿀 이상으로 달콤하여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주님의 계시가 없는 곳은 하나도 없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붓이 기록하고 있듯이, 주님은 이렇게 말하신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우리는 이 땅에서 주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으며 열매 자체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속성을 향유하며 그런 속성까지 발휘되길 원하시는 부르심을 받았다.

생의 목적이 장막 자체에 사로잡혀 태양을 바라보지 못하는 이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는 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진정한 선교사의 사명이다. 알아내고 살아내고 전달해야 할 사명은 결국 궁창이 마련된 이유로서 해, 즉 하나님의 속성과 관계되어 있다.

2013년 10월 7일 월요일

벌레의 신세

벌레를 잡고 벌레를 말리고 벌레를 진열하고 벌레의 종과 목과 학명과 서식지와 채집장소 및 시간까지 기입하는 작업에 자식과 함께 몇 일동안 매달리고 있다. "벌레 같은 인생"이란 욥기의 기록 때문인지 벌레의 신세가 생소하지 않고 미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성경에 벌레도 인생의 중요한 비유로 언급되고 있음을 보고 피조물 중에 필요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깊고 섬세한 하나님의 계시적인 배려가 느껴지니 벌레와 더불어 보낸 시간이 나쁘지가 않았다. 그러나 벌레와의 밀착관계 유지는 거절한다.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고 한 칼빈의 통찰이 어쩌면 벌레와 같은 미물을 관찰하다 촉발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도 훓고 지나갔다. 암튼 아들의 과제가 많은 생각을 자극했다.

2013년 10월 5일 토요일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 (롬9:18)

바울은 가슴이 아프다. 골육의 친척이 주님을 떠나서다. 이스라엘 출신이 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말씀을 인용한다. 그리고는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을 언급한다. 바울의 성경 해석이 깊고 특이하다.

바울은 약속을 따라 난 창세기 인물들의 계보를 언급하되 특별히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신" 하나님의 '구별'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진술한다.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대체로 상식의 꼭지가 돌아가고 곧장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라는 반응이 쏟아진다. 이런 반응으로 바울을 비방하던 사람들은 바울이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는 낭설을 퍼뜨리고 다닌다며 바울을 코너로 내몰았다.

허나 신학적 궁지에서 진리는 더욱 번뜩이는 법 아니던가. 본문을 비롯하여 9장에서 11장까지는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고 설명이고 바울이 설파하는 교리적 이해의 절정이다. 특별히 11장 끝절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을 강조하는 대목에 이르면 하나님과 영광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사람의 됨됨이나 행실은 물론이고 천사들 및 시공간 속에서의 어떠한 피조물과 사태에도 원인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지만이 원인으로 있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버리심이 생략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은 사람이 좋아하고 사람에 의해 다듬어진 개념을 담는 화려한 언어적 장신구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의 최종적인 목적으로 설정해도 가식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다. 의로운 분의 의지만이 원인으로 있는 행하심은 가장 순전하게 의로우신 행위이다. 거기에 인간의 합의되고 구성된 의의 기준을 섞으려고 해서는 아니된다. 계시된 그대로의 말씀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우리의 기호와 감각과 상식과 판단을 거기에 맡기고 순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분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만 의존하고 있는 예정,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누구인지,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인지, 시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는 극히 신비로운 하나님의 진리이다. 칼빈의 고백처럼,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없다." 

평강과 불안

평강은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누리지를 못한다. 주님은 평강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주님과의 선행적인 화목이 없다면 어떠한 평강도 기대할 수 없겠다. 마음에 불안이 기웃거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불안은 나를 기도의 자리로 떠밀고 주님과의 화목을 독촉한다. 그래서 때때로 불안도 유익이다.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사유하라

하나님의 의지를 기준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은 가장 높고 균형잡힌 세계관과 인간관을 가진 자라고 단언한다. 무수히 많은 찌라시 기준들이 세상에 난무하고 교회의 문턱 넘어로도 범람하고 있다. 진정한 인간존중, 창조의 세계를 대하는 가장 높은 기준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다소 단절적인 논법이 오늘은 송이꿀의 당분을 능가한다.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듯한 짜릿함이 가을의 풍요마저 무색하게 만드누만...^^

2013년 10월 1일 화요일

기쁨의 대상이 중요하다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잠1:22)

기쁨이란 코드의 일치에서 유발된다. 어떤 사람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대상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 코드가 확인된다. 일례로, 뱃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별식과 같이 쫄깃한 험담을 즐기는 사람은 대체로 친한 벗까지도 이간한다. 그런데도 즐거우니 중단하지 아니한다.

기쁨은 행위의 방향이다. 거만한 자들은 생각과 말과 행실이 거만을 지향한다. 이유는 거기에 즐거움이 있어서다. 그들의 거만은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 항구적인 성향이다. 언어 몇 토막과 행위 몇 조각을 고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일그러진 기쁨을 제거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기쁨의 대상을 지향하고 향유하려 한다. 소요리 문답이 또 떠오른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항구적인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거. 시인은 이따금씩 '여호와는 내 기쁨'이란 고백을 내뱉는다. 바울은 확대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나의 기쁨'이라 칭하였다.

기쁨의 대상이 어떤 것이냐가 실력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우매함을 좋아하고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고 미련한 자들은 무지가 무슨 영광의 면류관인 줄 안다. 지혜가 부르지만 싫어하고 기회의 손을 뻗어도 돌아보지 않는단다. 지혜의 영을 부었어도 거절한다.

이런 자들에게 지혜자는 재앙이 폭풍처럼, 두려움이 광풍처럼, 근심과 슬픔이 홍수처럼 임할 것이란다. 여호와 경외를 싫어하고 그의 교훈과 책망을 경시한 결과란다. 그런데도 자신이 기뻐한 대상은 돌아보지 않고 밖의 원인에 대한 푸념과 불평 쏟아내는 데만 골몰한다.

하나님을 지극히 큰 상급으로,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귀한 상급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한 믿음의 조상과 모세의 판단이 지금도 요청된다. 의인들은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고 그의 거룩을 기념하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 그런 믿음의 선수들이 곳곳에 있다. 부럽고 향기롭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해답이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이 해답이다. 다른 게 즐거우면 거기에 중독된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신 하나님께 시인처럼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매달리는 수밖에 없다. 기쁨의 체질을 바꾸어 주시라고 말이다.

사랑...

사랑할 이유도 없고, 사랑할 상황도 아니고, 사랑할 자격도 없고, 사랑할 명분이 없는데도 사랑하면 사랑의 본성이 그 황홀한 자태를 드러낸다. 사랑할 이유가 생겨나고, 사랑할 상황이 조성되고, 사랑할 자격이 발견되고, 사랑할 명분도 마련되는 사랑의 발생적인 본성 말이다.

사랑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런 때를 침노하고 생산하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이런 본성의 위력은 관념의 땀으로는 파악이 불가하고 현장에서 구현될 때에 비로소 확인된다. 그 현장에서 하나님께 속해 있음도 확인하고 하나님도 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