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8일 금요일

하나님의 섭리

빛과 비는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가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이다. 좋은 일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아 보이는 일들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섭리이다. 예배 드리는 중에 교회당의 지붕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 편에서의 합리적 규격에 끼워 맞춰서는 안되겠다. 

앎의 본질

앎은 인격과 삶으로의 체득이다. 역도 성립한다. 정보의 단순한 전두엽 출입을 "안다"고 규정하지 못한다. 인격과 삶을 관통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정보의 유무로 무언가를 알지 못한다. 전인격을 관통할 때에 비로소 무언가를 알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렇지 않은데도 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를 속임이요 타인에 대해서도 가식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깨끗한 자에게는 깨끗한 것을 보이시고 거룩한 자에게는 거룩을 보이시는 분이라고 기록한다. 우리를 그렇게 지으신 거다. 창조의 원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처럼 되어야 비로소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온전함에 이르는 과정이라 하겠다. 

폴라누스 교의학의 영역본

박사학위 논문의 주인공인 Amandus Polanus의 교의학이 Lexham에서 영문으로 번역되어 10권으로 나온단다. 오래동안 씨름하며 읽은 책이었다. 라틴어로 무려 4500 페이지를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의 교의학을 완역한 역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역자가 Dr. Wes Bredenhof 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연락해 보니 그는 다른 우선적인 일들이 많아 이 프로젝트에서 오래전에 손을 떼었단다. 그럼 누가 번역한 것일까. 지금은 확인되지 않는다. 아무튼 영역본의 가격은 대단히 저렴하다. 구입하고 싶다.

2014년 2월 19일 수요일

C국을 방문하며

C국을 방문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리에 목마른 그분들을 대하며 사람의 사사로운 말과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만을 해명하는 시간이고 싶다. 매 시간마다 성령께서 나와 학생들을 조명하지 않는다면 헛된 발걸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엎드리게 된다. 부르짖게 된다.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방문이길 소원한다. 생명의 말씀이 증인들의 가슴에 박히고 터가 굳어지면 좋겠다. 아버지...도우소서.

2014년 2월 18일 화요일

종교개혁 정신

어떤 가치가 구현된 시점을 특정한 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본받고 따르자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지만 결과적인 면에서는 그 가치의 지속성과 현재성을 훼손하는 역기능이 발생한다.

종교개혁, 대체로 어떤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건으로 분류된다. 성경의 본래적인 진리로 돌아가는 모든 시대의 중차대한 과제인데 지금과는 상관없는 과거의 고유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종교개혁, 개념도 다양하고 지역도 다양하고 정도도 다양하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지 않으면 안되는데 16-17세기의 독특성을 배우는 것으로 종교개혁 '시대'를 기념하고 만족한다.

개혁은 완성된 적이 없었고 지금도 진행중에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이루어진 개혁의 내용에도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한 오늘날의 교회가 안타깝다. 그러나 보다 엄격한 개혁의 정신과 가치가 지금의 교회에 구현되는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과제이다.

그 과제를 감당하고 싶다...

2014년 2월 15일 토요일

디오그네투스 서신에서

우리는 "육신 안에" 있지만 "육신을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몸은 땅에 있는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눈을 따라서는 땅에 속하였고 믿음을 따라서는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육신을 따라 땅에서 살아가는 생이 될 것입니다.

영혼과 몸의 관계는 기독인과 세상의 관계와 같습니다. 영혼은 몸의 모든 지체들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기독인도 세상의 모든 도시들에 흩어져 있습니다. 영혼이 몸 안에 있지만 몸을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기독인도 세상에 있으나 세상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슬픔을 겪고 억울함을 당하지만 그것에 매이거나 좌우되지 않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어찌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실패의 방석에 풀썩 주저 앉더라도 실패를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이 기독인의 삶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심기를 건드리고 진동하게 만드는 역설이 기독교적 삶이지만 지금은 마치 다른 차원의 진동이 우리에게 발생하는 듯합니다. 이는 세상 안에 거하지 않고 세상 밖에서 삶면서도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기독인의 어울리지 않는 모습 때문인 듯합니다. 

영광의 섬광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주님의 아름다운 섭리가 섬광처럼 빛나지 않는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의식의 촘촘한 인과율적 망이 걸러내지 못하는 '우연'이나 '행운'처럼 보이는 것에서는 그 섭리가 갑절의 광휘를 발합니다. 고단한 하루를 접고 귀가하는 길에서 저는 섭리의 눈부심 때문에 혼쭐이 났습니다.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 어저께를 돌아보니 아무리 힘들고 고단하고 앞뒤가 꽉 막혀도 솟아날 구멍과 피할 길은 언제나 예비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오늘도 주님의 아름다운 섭리가 발산하는 섬광의 단 한줄기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하루를 엽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 기대치도 않았던 것들이 보일 것입니다.

하루는 그냥 시간의 무표정한 흐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진열하는 순간들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고뇌와 아픔과 억울과 슬픔도 그 영광의 발산을 막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증폭시킬 뿐입니다. '우연'이나 '행운'처럼 보이는 영광의 강도보다 십자가 위에서 발휘된 역설적인 영광의 절정이 이를 강변하고 있습니다. 

2014년 2월 11일 화요일

서로 사랑하는 교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주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으로 온 가족이 가정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를 인도했다.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쌍방적인 사랑을 강조했다. 각자가 받은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형편이나 신분이나 지위에 있더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다.

"내리사랑" 개념도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가 사랑의 주체와 객체가 되는 쌍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다. 누구도 감히 여기에 반론의 토를 달아서는 아니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 사랑을 일방적인 사랑으로 규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어떠한 댓가나 이익을 고려함이 없는 그저 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을 하되 몇몇 특정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방적인 무조건적 사랑이 한 사람의 기독교적 영웅을 만들 수는 있어도 건강한 공동체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면 생색낼 이유가 없어진다. 모두가 그렇게 사랑하면 말이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면 상하와 우열의 개념도 사라진다. 형제와 자매로 모두가 사랑을 하는 주체가 되고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 그렇다고 질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자리를 침노하는 사랑이 아니라 각자가 선 자리에서 발휘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제도나 상황이나 상태나 소유나 성별이나 노소와 무관하게 둘을 하나로 묶는 띠가 바로 사랑이다. 이러한 연합이 혼돈이나 무질서로 보일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거룩한' 혼돈이요 무질서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다. 유일한 명령이다. 신구약의 계명을 다 포괄하는 명령이다. 율법과 선지자들 및 사도들의 강령이다. 극소수의 희생적 일방적 무조건적 사랑을 생산하는 사회보다 모두가 그런 사랑의 주체로 동등하게 참여하고 협력하며 일구어진 사회가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더 지향해야 할 모습이다.

그게 교회의 모습이다. 주님의 유일한 마지막 명령이 바로 그런 교회의 쌍방적 사랑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내 가정이 그런 교회이면 좋겠다. 내가 가르치는 학교가 그런 교회이면 좋겠다. 내가 속한 교제권이 그런 교회이면 좋겠다. 내가 만나고 교제하는 다민족 자매들과 형제들이 그런 교회이면 좋겠다. "서로 사랑하는 교회" 그런 교회이면 좋겠다.

2014년 2월 10일 월요일

미국의 마지막 주일

오늘은 교회에서 마지막을 주일을 보내고 성도들과 작별을 하는데 마음에서 콧등까지 찡하며 저려 오더군요. 만나는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다는 전도자의 당연한 말씀이 눈앞의 현실로 펼쳐지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분들과의 이별이 주는 슬픔의 무게는 사랑하는 다른 분들과의 만남에 의해서만 버텨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예배의 끝자락에 사랑하는 이들이 부족한 자의 몸에 올린 기도의 손길들이 준 것입니다.

한국에서 부끄럽지 않은 주님의 종으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10여년간 지속된 유학의 보따리를 싸고 있습니다. 도무지 갚을 길 없는 은혜만 한량없이 쏟아주신 주님께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한국에 들어가면 지금까지 경험한 은혜의 분량을 훨씬 능가하는 은혜가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그 은혜는 고난과 연단과 인내의 모양으로 주어질 게 뻔해 보입니다. 그래도 설레이는 마음은 주체가 되질 않습니다.

이곳에서 두 밤을 더 보내고 비행기에 오릅니다. 도서관과 스튜던트 센터에서 신학 서적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치루는 후배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떠납니다. 자신이 진리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는 전투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뵐 사랑하는 분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미국의 마지막 주일밤을 보냅니다...

2014년 2월 9일 일요일

라틴어 공부

Wheelock Grammar: 먼저 라틴어의 기본적인 문법을 여러 번 숙독해서 문법적 구조를 통째로 머리에 암기하는 것이 라틴어 공부의 첫걸음인 듯합니다. 물론 최근에 출간된 Wheelock의 라틴어 제7판을 보시면 더 좋겠지요.

Wiktionary: 그리고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전을 찾아야 하는데 링크된 곳은 단어의 어원, 시제와 태, 뜻과 관련어, 격변화 등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곳입니다. 휘터커의 Words 프로그램 다운받아 설치해서 사용하는 것도 대단히 좋습니다.

Latin Online: 문법과 단어가 어느 정도 잡히면 문장 해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링크는 다양한 서비스가 있지만 라틴어의 문장별 해석을 연습할 수 있는 기능이 제공되고 있어 좋습니다. 조금만 연습하면 라틴어 문장에 쉽게 익숙해질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런 사이트가 없어서 저는 벌게이트 성경을 통해서 문장을 익혔습니다)

우리는 신학을 공부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벌게이트 성경과 시대별 문헌들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시대별로 라틴어 문헌들을 경험하는 가장 좋은 당연한 방법은 직접 원문을 읽는 것인데 원문만 보면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에 라틴어/영어 대조본을 읽으면서 번역의 감각을 기르는 게 좋습니다. 가능하면 영어에 너무 의존하진 마시구요. 다음 사이트가 유용한 것 같습니다.

라틴어 성경: 제롬의 벌게이트 라틴어/영어 대조본 (하루에 10절)
교부들의 라틴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 라틴어/영어 대조본 (하루에 1절)
중세의 라틴어: 토마스 아퀴나스 전집 중 라틴어/영어 대조본 (하루에 1절)
종교개혁 시대의 라틴어: 칼빈의 기독교 강요 (라틴어/불어/영어 대조판) (하루에 1페이지)

PRDL: 종교개혁 및 종교개혁 이후의 라틴어 문헌들의 링크를 걸어둔 곳입니다. 아마도 이곳보다 더 방대한 문헌들을 모아둔 곳은 없을 것입니다. 개혁주의, 루터주의, 로마 카톨릭 및 다소 극단적인 분파들의 문헌까지 망라되어 있습니다. 라틴어 읽기에 자신감이 붙은 분들은 이제 본격적인 원문과의 씨름에 돌입할 수 있는 곳입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조금씩 라틴어 문헌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탄력이 붙습니다. 라틴어 문헌들을 읽고 배우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즐거운' 라틴어 읽기가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수밖에 없습니다.

Latin Newspaper: 라틴어로 된 신문도 있습니다. 사어가 아니라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라틴어의 산 기운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알아만 두셔도 좋을 듯!

도르트 총대들의 서약

범국가적 개혁교회 총회였던 도르트 총회에 참석한 각 나라의 모든 총대들은 총회에 돌입하기 이전에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서약했다.

"저는 제가 믿고 경배하며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하며 뭇사람의 마음을 살펴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 총회에서 단순히 다섯가지 논제들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의제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교리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결정하는 의사진행 과정에서 인간의 어떠한 문헌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오류 불가능한 믿음의 규범인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용할 것이라는 약속을 드립니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의 과정에서 저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평강과 특별히 교리의 순수성 보존을 지향할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구세주 그리스도 예수시여 나를 도우소서. 당신의 성령으로 나를 도와 주시기를 당신께 간절히 비나이다."

이별의 임박

한국에 돌아갈 날이 다가온다.
이제 3일후면 홀로 중국과 한국으로 들어간다.
하여 오늘은 추억 만들기에 들어갔다.

녀석들과 함께 학교에 가서
푸스볼과 탁구와 당구로 시킨쉽 시간을 가졌다.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물리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어떤 식으로든 거리가 생긴다는 거,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거리를 만드는 원흉은 죄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 주심으로
죄의 거리를 제거하실 정도로 우리를 향한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딱 4개월만 참자. 주께서 도우실 것이니까.

2014년 2월 8일 토요일

도르트 신조의 형성 (Sinema)

2014년 2월 7일 오후 1시, Auditorium at Calvin Seminary

Dr. Donald W. Sinnema, professor of theology emeritus at Trinity Christian College in Palos Heights, IL, will be presenting on the topic, "The Project to Publish a Critical Edition of the Documents of the Synod of Dordt (1618-1619): The Sources, with a Focus on the Drafting of the Canons of Dordt."

President: Johannes Bogerman, 첫번째 draft는 4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번째 드래프트는 12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자필문은 없다. 보거만이 총회에 대필시킨 것이다.
Samuel Ward, 이 사람의 문헌들도 도로트 신조의 형성에 참조문헌 역할을 했다.

도르트 신조는 점진적인 작성의 과정이 있었다. 처음에는 1페이지로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거기에 기초하여 보다 확대되고 다시 확대의 과정이 반복되어 지금의 신조에 이르렀다.

항론파에 의해 제출된 문헌을 모두 읽었고 거기에 근거해서 답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한 사람이 제안한다. 그리고 문서작성 위원회가 구성된다. 총회에 보고된다. 위원회는 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Bogerman(위원장), Rolandus, Faukelius, Carleton (영국), Scultetus, Diodati, Polyander, Walaeus, Trigland. 첫번째 보고서의 주역이다.

첫번째 위원회 보고서, 9명이 대표하는 각 진영으로 가져가서 토론했다.

두번째 위원회 보고서, 폴리얀더 (서기였다), 첫번째 보고서에 추가문을 여백에 써 넣었다. 이것은 Hommius에 의해서 작성된다. 2번 조항, 그리스도 구속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것은 첫번째와 전혀 다르다. 완전한 수정이 이루어진 조항이다.

Hesse Amendment suggestions on second committee draft.

세번째 수정본은 최종본에 대단히 가깝다. 문헌을 보면 색깔이 다르다. 수정의 성격을 말해준다.

Breitinger Working Copy.

Original Signed Copy of Canons: 세번째 수정본 이후에는 지극히 소수의 수정안이 제시되었다. 2번 조항에 대해서는 의견차가 심하였다. 6번 조항, 예수님의 구속적 성육신은 과연 hypothetical necessity or absolute necessity인가? 논쟁이 심하였다.

false accusation에 대한 논쟁도 심하였다.

2번 조항, 6번 조항...다른 모든 조항들은 총회에서 다 승인했다.

100여건 이상의 문헌들이 도르트 신조의 작성 과정에서 생산되었다.

도르트 신조의 문서작성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중요성을 느끼는가?

1. 각 조항의 논쟁 과정을 보면서 변화상과 뉘앙스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2. 특정한 총대들의 특별한 기여도를 확인할 수 있다.

고마루스: 총대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고 개인적인 의견을 말한다.그의 역할은 무엇인가? (한병수의 질문)
그는 문서작성 위원회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견서를 제안했다. 화란 총대들 중에 세명이 하나의 제안서를 제출한 경우가 있으나 그는 독자적인 의견서를 제출했다. 다른 두 명도 독자적인 입자을 제시했다. 결론은 고마루스 역시 도르트 신조의 최종본에 서명했다. 어떤 신학적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존 페스코, 최근 논문에 전택/후택 이슈를 다루었다.

보거만이 어떻게 회를 거듭하며 보고서를 확장할 수 있었는가? 제안과 반응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결과인가? 아니면 개인의 점진적인 활동인가? (비어마의 질문)

시네마: 위원회의 활동이 있었다.

항론파의 반응은 (우병훈 질문)
일단 그들은 도르트 신조를 반대했다.

화란어 역본이 같은 해에 동일한 시기에 나왔고, 직후에 프랑스어 역본이 나왔고 그 이후에 영역본이 나왔다.

구속에 대한 이슈: 그리스도는 택자만을 위해 죽으셨다? 대부분의 화란 총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우주적인 언어들이 성경에 등장한다.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 이런 구절들 말이다. 브랜든 총대들이 그런 언어을 선호했다. efficiency and sufficiency 구분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2014년 2월 7일 금요일

유용한 인터넷 사이트 (펌글)

신학관련 각종 사이트 총망라 (최종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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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신학을 가르치시는 존경하는 김재영 교수님의 담벼락에서 국내신학사이트들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받고...조금 시간을 내어 자료를 올립니다. 언젠가는 페친들에게 소개해드리려고 맘을 먹고 있었던차였습니다. 페친들 중에 기라성 같은 신학고수들이 즐비하여 부끄럽지만...다소나마 도움이 될까싶어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기에 누락된 사이트들은 매우 많습니다. 너무 방대하여..일일이 올리지 못함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며..혹여나 국내신학자들과 해외신학자들께서는 오해 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추후에 다시..누락된 자료들을 올려드리겠습니다. 특히 해외의 신학자들의 개인사이트들과 국내의 유수학자들의 사이트들. 주석관련 사이트들과 개인블러그, 카페, 클럽 등등

일단 이 자료들은 제가 개인적으로 수십년간 애용하고 있는 사이트들입니다. 여기에 아직 올려지지 않은 사이트들도 무지하게 많이 있습니다. 이 사이트들을 이용하시되..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자면...

우선은 언어학적 훈련과 철학적 훈련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글(논문과 설교, 기타 등등)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사상과 그 배경적 지식(철학적, 신학적, 언어학적)을 내포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저 글로써만 읽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하지요. 참고로 제가 십수년 전에 모 사이트의 글을 읽다가...마치 제가 태평양 한 가운데 떠 있는 묘한 기분을 느껴..오기로 학문의 가장 기본이 되는 언어와 철학을 깊이 공부하게된 계기가 되었지요..외국의 학자들과 대화하는데..가장 쪽팔린 것이 바로 그 언어(고전어: 히브리, 헬라, 라틴어 등등)와 철학(고대와 중세, 특히 교부철학, 그리고 현대철학)이었지요..그것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더 이상의 학문적 진전을 기대할 수 없음을 뼈져리게 느꼈답니다. ㅋㅋ

그리고 논문 한 편을 써내려가더라도...각주를 위한 참고자료용으로 읽는 사람은 자료수집가에 불과하답니다. 학위와 학점을 받기 위해...의무적으로 자료를 보다보면...제아무리 귀한 자료를 보더라도...그 지식은 그에게 아무런 신학적, 신앙적 도움이 되질 못하다는 것을 후학도들과 목회자들에게 무척이나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본다는 것이 무슨 자랑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은 사실 주변의 학적, 영적 스승이 누구냐에 따라 그의 신학과 신앙과 삶의 바탕이 좌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더 분별하여 자료를 선택하고 그 자료들 속의 저자들의 신학적 바탕과 사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분별력(신학적, 영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여기에 미쳐 소개해 드리지 못한 수많은 국내,외 자료들을 더 올려드릴 것을 약속드리며...우리네 신학과 신앙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늘 잊지않는 뜨거운 성령의 임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며...본 자료들을 올립니다.

우선은 국내사이트들 위주로 먼저 올려드립니다. 물론 영어권 사이트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단 사이트에 들어가셔서..쭈~욱 흟어보시고 세부항목들을 클릭하시어 한편의 글이라도 읽어보시면...왜 이 사이트들을 추천해드리는지 감이 올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싸이클럽인 http://club.cyworld.com/clubV1/Home.cy/55230021 에는 아래에 소개되어 있는 모든 사이트들이 소개되어 있으며..국내,외 대부분의 신학아티클들과 신학분과별, 신학대학 교수별, 주제별로 모든 신학분야들의 글들이 광범위하게 소개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참조하시길...샬롬~

-에드워즈처럼 살고픈 양주골 최종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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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학술지 검색 사이트

1. 학술정보서비스 : 회원가입후 많은 논문 및 학술자료를 다운로드 가능
/ http://www.riss.kr/index.do
2. ATLA : 해외학술지검색, 한신대학교 중앙도서관 내 시스템/
http://ebscokorea.co.kr/ep/hanshin/
3. DBpia : 국내학술지검색/ http://www.dbpia.co.kr/
4. Ksi :한국학술정보/ http://kiss.kstudy.com/
5. NANET : 국회도서관/ http://www.nanet.go.kr/main.jsp
6. Thesis : 대학학위논문검색/ http://thesis.or.kr/
7. NDL : 국가전자도서관/
http://www.dlibrary.go.kr/JavaClient/jsp/ndli/index.jsp?LOGSTATUS=notok&NLSSOTOKEN=


B. 성서고고학 등 기타신학관련 사이트

1. 세계 칠십인경 학회/ http://ccat.sas.upenn.edu/ioscs/
2. 초기 유대교 문헌들/ http://www.earlyjewishwritings.com/
3. 초기 기독교 문헌들/ http://www.earlychristianwritings.com/
4. 이스라엘 성서 연구소 : 성서연구, 유대교 연구, 성서 고고학, 관련 자료 등 소개/
http://www.shalomisrael.com/
5. 평강성서유물박물관(국내): 고대 이집트와 오리엔트 문명의 성서 고고학 유물 전시, 내부시설 소개/ http://www.apm.or.kr/
6. 성서고고학협회: Biblical Archaeology Society의 엡사이트, 고고학적인 발견을 일반인에게 알림/ http://www.biblicalarchaeology.org/
7. 이미징 바이블/ http://imagingbible.tistory.com/


C. 원어성경 관련 사이트

1. 히브리소프트온라인 : HebrewSoft Online은 히브리어와 관련된 소프트웨어자료를 제공/
http://www.hebrewsoft.com/
2. 브니엘성경연구소 : 헬라어 , 히브리어에 관련된 성경, 사전, 참고 도서 및 각종 자료에 대한 정보/ http://bniel.or.kr/
3. 이상호-히브리어 원전분해 : 히브리어 원전분해 및 강해성경으로 모세오경을 재해석하고 강해함/ http://www.tanak.com/
4. 말씀의집 : 허성갑씨 가족이 운영하는 사이트. 히브리어 성경을 읽기 원하는 한국 교회를 위해 운영하고 있음/ http://hebrew.pe.kr/
5. 히브리어 신약성경(N.T. in Hebrew) : 히브리어로 기록한 신약성경, 마태복음부터 계시록까지/ http://www.iclnet.org/pub/resources/text/ipb-e/nthebrew/hebrewnt.html
6. 국제 그리스도 헬라어학회 : 헬라어 원문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
http://www.greeksforchrist.org/
7. 스타우로스원어성경연구원 : 헬라어/히브리어 문법 강의 동영상, 원어성경강해 동영상 등/http://www.stauros.net/
8. 히브리어 원전분해 및 강해성경 : 모세오경을 히브리어 원전에 근거하여 분해하고 강해/
http://www.tanak.com/
9. Marilyn Phemister의 희랍어 성경 MP3 무료 다운로드 사이트/ http://www.ccel.org/a/anonymous/gnt/mp3/
10. 각국어 성경 MP3 무료 다운로드 사이트/ http://www.audiotreasure.com/#download
11. Institute of Biblical Greek : 신약성서 희랍어의 모든 정보 제공/ http://www.biblicalgreek.org/

* 인터넷 성경 원문 보기 :
히브리어 구약/ http://www.hope-ind.com/Elpis/Hebrew/lecture/old_test_list.htm
헬라어 신약/ http://www.hope-ind.com/Elpis/Greek/lecture/new_test_list.htm
히브리어 단어장/ http://www.hope-ind.com/Elpis/Hebrew/concise/alef_dic.htm
헬라어 단어장/ http://www.hope-ind.com/Elpis/Greek/concise/alfa_dic.htm


D. 국내 개인 신학자 사이트들
옛신앙/ http://www.oldfaith.net/
김명도의 신학산책/ http://www.tulipministries.com/
안명준 교수의 홈페이지/ http://theologia.co.kr/
이승구 교수의 개혁신학과 우리사회 이야기/ http://blog.daum.net/wminb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 성서교실/ http://rbc2000.pe.kr/
정성욱목사와 독자의 만남/ http://cafe.daum.net/profchung/
안인섭 교수의 교회사 연구회/ club.cyworld.com/church-history
이정석 교수의 신학문답/ http://www.jsrhee.com/
전철의 신학동네/ http://theology.co.kr/
김남중의 신학아키브/ http://doingtheology.co.kr/
이덕휴의 신학포럼/ http://godislove.net/misupart/?code=misupart&system=GodisLove
조병수 교수/ http://www.gensdei.org/main/main.htm
박경철의 구약성서연구: 신학전반정보사이트, 해외신학계 동향 및 중요 논문/ http://ot.re.kr/
김정우 교수의 학술 커뮤니티/ http://cafe.naver.com/itheo
박찬희 교수의 신학연구 네트워크 : 신학자료-역사신학(역사신학 총망라-링크)/
http://lord.kehc.org/thnetwork/weblink9.htm
라은성 교수의 교회사 커뮤니티/ http://www.eunra.com/
강원돈의 신학아키브/ http://socialethics.org/profile/
허호익 교수의 한국신학 마당/ http://www.theologia.kr/
지영근 목사 성경 연구원/ http://ncbc2.ba.ro/
조광호의 열린신약성서연구/ http://nt.re.kr/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학습개발원/ http://acha.pcts.ac.kr/pctl/index.php
박재순 교수의 홈피(열린교회) : 이 분의 신학은 교회이름과 같이 열린(자유주의경향)신학이다. 참고하시길../ http://www.netschurch.org/index.html
고 함석헌 선생에 관한 사이트/ http://ssialsori.net/


E. 각종신학학회, 성서 관련 연구소, 연구원 관련 사이트들

1. Theology Library at Spring Hill College(Department of theology) : 신학도서관 800개 사이트 링크/ http://www.shc.edu/theolibrary/
2. 한국기독교학회 : 회원가입만 하면...무료로 모든 자료를 다운로드 가능/ http://kacs.or.kr/
3. 대한성서공회 : 아주 유용한 사이트, 회원가입 후 열람가능/ http://www.bskorea.or.kr/
4. 한국신학정보연구원 : 김정우 교수 주축으로 운영되는 아주 귀한 사이트, 회원가입후 모든 자료(본 연구원 및 기타 신학 아티클 다운로드 가능 / http://iktinos.org/
5. 한국기독교학술원/ http://www.instit.ac/html/main/main.php
6. 한국개혁신학회/ http://www.reformedth.com/
7. 국제개혁신학연구원/ http://www.irt.kr/
8. 개혁신학 연구소/ http://reformedacademy.org/
9. 한국복음주의신학회/ http://www.kets.or.kr
10. 한국구약학회/ http://www.kots.or.kr/
11. 한국신약학회/ http://www.ntsk.org/
12.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학회자료, 논문자료/ http://theologia.co.kr/theologia.htm
13. 한국조직신학회/ http://ksst.kr/
14. 호서조직신학회/ http://hsta.kr/
15. 한국실천신학회/ http://www.praxis.or.kr
16.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 박명수 소장/ http://ismc.or.kr/ismc/bbs/?mid=aa
17. 한국기독교교육정보학회/ http://www.ksceit.or.kr/modules/doc/index.php?doc=intro
18. 한국선교신학회/ http://www.ksoms.org/
19. 한국민중신학회/ http://www.minjungtheology.or.kr/
20. 한국종교학회/ http://www.kahr21.org/
21. 한국신학연구소/ http://ktsi.or.kr/
22. 한국신학마당/ http://www.mokja.info/
23. 예수말씀연구소/ http://www.jesussayings.net/
24. 한국칼빈학회/ http://www.kcalvins.or.kr/
25. 한국칼빈신학연구소, 문병호 박사. 칼빈오페라원문서비스/ http://www.kicts.org/
26. 한국칼빈주의연구원/ http://www.johncalvin.kr/
27. 칼빈목회연구원/ http://calvinpics.org/board/bbs/main2.html
28. 평양대부흥/ http://www.1907revival.com/
29. 한국성서학연구소/ http://www.bibleforum.org/main/main.html
30. 성결신학연구소/ http://sgti.kehc.org/
31. 합동신학대학원 싸이버신학교육연구소 : 회원가입후 싸이버강의를 무료로 시청가능, 강의안과 자료다운가능/ http://www.hapdong-cyber.kr/bbs/board.php?bo_table=cyber
32. 우리신학연구소/ http://www.wti.or.kr/
33. 웨슬리신학연구소/ http://www.wtsi.co.kr/
34. 기장신학연구소/ http://www.theology.or.kr/zbxe/
35. 한국기독교연구소/ http://www.historicaljesus.co.kr/xe/
36.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http://jpic.org/jpic/index.html
37.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 http://cserc.or.kr
38.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http://www.nics.or.kr/
39. 케리그마 신학연구원/ http://kerygma.kr/
40.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http://www.minjungtheology.net/
41. 대구성서아카데미/ http://dabia.net/xe/
42. 한국신학도서관협의회/ http://www.ktla.or.kr/
43.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개혁신학연구회/ http://www.asta96.com/
44. 호주성산현대신학연구실/ http://cafe.naver.com/modernth.cafe
45. 인터넷매일성경연구원/ http://biblenara.org/
46. 프리셒트연구원/ http://www.precept.or.kr/
47. 한.이 성경연구소/ http://www.kibi.or.kr/welcome.do
48. 성서한국/ http://biblekorea.org/
49. 교회개혁실천연대/ http://www.protest2002.org/
50. 주요 선교학 사이트/ http://www.biblenara.org/mission.htm
51. 인터넷 선교학회/ http://www.swim.org/
52. 직장사역연구소/ http://www.bmi.or.kr/
53. 가정사역연구소/ http://www.hifamily.net/
54. 한국창조과학회/ http://www.kacr.or.kr/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in America : 교회, 선교, 각종신학아티클, 세미나 자료 제공/ http://www.prca.org/
55. 신학웹사이트 : 교회사, 포럼쟁점토론, e-text, 신학, 설교, 블러그, 저널 등 제공/
http://www.theologywebsite.com/history/index.shtml
56. 최원호 박사의 맛있는 교육 : 개인소개, 북한교육, 교육학 및 상담교육 자료실, 신앙칼럼 등/ http://www.bk21.pe.kr/index2.asp
57. 다양한 신학연구소, 신학대학교 등 총망라 링크/ http://cafe.naver.com/lwc153/2592
58. 성경화일 : 구약, 신약 성경자료, 매일성경묵상, 원어성경공부와 성경언어학에 대한 자료 등/ http://otnt.net/
59. 에스라성서연구회 : 구약, 신약, 신학 강의, 관련 자료. 성경 토론 게시판 운영/ http://ezra710.hanmom.com/
60. KCM 성경연구 : 이영제 목사가 꾸미는 Study Bible, 성경의 인물, 지명 사전과 함께 성경 각권의 개론에서부터 주제연구, 교회사 등 상세 제공/ http://kcm.co.kr/bible/bible.html
61. Biblical Studies Foundation : 신,구약을 책별로, 주제별로 나누어 성경연구자료를 제공/ https://bible.org/
62. 신학하는 친구들/ http://www.kerygma.pe.kr/
63. 성경통신교육원/ http://www.bible.kr/
64. 열린문성경연구원/ http://www.obi.or.kr/


F. 세계 개혁 신학 및 신학연구 사이트
(일부 겹치는 사이트도 있습니다.)
1. http://www.theology.ie/ 신학관련 모든 자료, 어마어마함..ㅋㅋ
2. http://www.chapellibrary.org/ 방대한 양의 개혁주의 전도소책자들이 올라와 있습니다.
아울러 개혁주의 관련 책들을 공부할 수 있도록 원문과 스터디 가이드까지 꼼꼼하게 주제별로 올려놓은 귀한 사이트입니다.
3. http://www.covenantseminary.edu/ 무료로 좋은 강좌를 들을 수 있고, 강의안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로그인만 하시면 됩니다.
4. http://www.ccel.org [미국 칼빈 대학교 도서관]
5. http://www.prdl.org/ 종교개혁후기도서관, Post-Reformation Digital Library (PRDL)
Henry meeter Center for Calvin Studies
6. http://cafe.naver.com/reformedforum [개혁신학포럼] 김향주 박사
7. http://ireformed.net/epang/psalm/list.jsp [시편찬송 연주사이트]
8. http://www.opc.org/ Orthodox Presbyterian churches
9. http://www.reformatio.de/ Akademie f?r Reformatorische Theologie Hannover Bernhardt Kaiser 교수 Die Theologische Erkl?rung der Kamen-Initiative 1999/2000, http://www.kamen-initiative.de/glaubensgrundlage.php
10. http://spindleworks.com/ Sharing Reformed Christian Resources Around The World
11. http://www.the-highway.com/ 신학자의 영문 논문 본문 자료 제공(칼빈대학교)
12. http://www.calvin.edu/library/database/card/
13. http://www.calvin.edu/meeter/bibliography/
14. http://pierreviret.org/ (피에르 비레 연구 사이트, Viret was Calvin's closest friend)
15. http://www.genevanpsalter.com/music-a-lyrics 칼빈 시편 찬송, MP3 파일제공
16. http://johnowen.org/ (존 오웬 신학 연구 사이트)
17. http://bible.christiansunite.com/ [조지폭스의 순교사, 요세푸스의 유대역사 등 영문 자료]
18. http://www.rbtr.org/index.php/ [Reformed Baptist Theological Review]
19. http://www.monergism.com/ 重生先于信心 monergis이란 구원에 있어 인간의 가능성을 배제한 성령의 단독적 사역을 의미하는 단어
20. http://kr.blog.yahoo.com/hsh0501/ [광신대] 한수환 교수
---------------------------------------------
21. http://latindictionary.wikidot.com/ [라틴어 연구 사이트, Latin -> English]
22. http://blog.naver.com/theojoon [신준호의 Karl Barth 교회교의학 읽기]
23. http://dhspriory.org/thomas/ 토마스 아퀴나스 저작 전문(영문)
---------------------------------------------
24. http://qbible.com/ [성경연구 사이트]
25. http://www.bibleforums.org/ [성경본문, LXX 등]
26. http://www.mechon-mamre.org/p/pt/pt0101.htm [히브리어-영어 성경 병용]
27. http://www.theologie-examen.de/index_erstesexamen_AT.htm (독일어 사이트)
28. http://www.lexx.co.kr/index.html (독일어 사전)
29.http://www.sdv.or.kr/dekodic/ (독한사전)


G. 교회사 관련 웹사이트들-서원모 교수 추천

1. 한국어로 역사(교회사) 관련:
경북대학교 사학과가 가장 좋습니다: http://tbi.kyungpook.ac.kr/~history/start.htm

2. 영어로는 http://www.fordham.edu/halsall/index.html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두 사이트에서 출발하면 웬만한 것은 다 찾아낼 수 있습니다.

3. 역사관련 서지목록(한국어): http://www.hongik.ac.kr/~khc/
4. 지도: http://www.lib.utexas.edu/maps/historical/index.html
5. 영어 본문들: http://www.ccel.org/
6. 역사 전반 개반: http://www.hyperhistory.com/online_n2/History_n2/a.html
7. 원문자료들: http://www.perseus.tufts.edu/

8. 교부 자료(영어): http://www.newadvent.org/fathers/
9. 교부학 서지: http://www.bibl.ulaval.ca/bd/bibp/
10. 테르툴리아누스: http://www.tertullian.org/
11. 교부, 후기 고대관련 본문: http://www.phil.uni-erlangen.de/~p2latein/kirke/autor.html
12. 교부, 후기 고대관련 인터넷 자료 목록: http://www.phil.uni-erlangen.de/~p2latein/ressourc/ressourc.html
(기독교 항목을 찾을 것)

13. 중세관련: http://orb.rhodes.edu/
14. 중세원문: http://texte.mediaevum.de/index.htm
15. 중세자료: http://www.georgetown.edu/labyrinth/labyrinth-home.html
16. 비잔틴연구: http://www.doaks.org/Byzantine.html
17. 비잔틴연구: http://www.byzantina.com/byzance.htm

18. 루터: http://luther.bc.edu/default.html
19. 종교개혁본문들: http://history.hanover.edu/texts.htm
20. 종교개혁, 르네상스: http://w3.arizona.edu/~uamarrc/aboutus.html
21. 츠빙글리: http://www.unizh.ch/irg/zwingli.html

[미술, 예술, 음악]
22. 비잔틴예술: http://www.ou.edu/class/ahi4263/frameset.html
23. 중세 예술사: http://witcombe.sbc.edu/ARTHmedieval!.html#EarlyChristian
24. 그레고리안 성가: http://www.music.princeton.edu/chant_html/
25. 건축: http://web.kyoto-inet.or.jp./org/orion/eng/hst/hist.html
26. 건축, 미술: http://rubens.anu.edu.au/index.html
27. 르네상스: http://www.lib.virginia.edu/dic/colls/arh102/index.html
28. 바로크: http://www.nga.gov/exhibitions/2000/baroque/splash.htm
29. 미술사: http://www.kfki.hu/~arthp/index1.html

또한 정교회의 역사와 신앙을 알기 위해선
30. 한국정교회: http://www.orthodox.or.kr/
31. 러시아정교회: http://russia.kcm.co.kr/orthodox/orthodox.html
32. 루터교회(루터의 종교개혁): http://www.lck.or.kr/luther/index.html
33. 가톨릭 전반: http://www.koreancatholic.org/
34. 수도회: http://osb.or.kr/index.html(영성관련 좋은 자료 많음)


H. 윤리학 관련 사이트

1. 기독교윤리 실천운동/ http://trusti.kr/
2. 기독교윤리실천운동 : 생활신앙운동, 손봉호교수의 강의안, 사회정의, 윤리에 대한 토론마당 등/ http://cemk.org/
3. 박상은의 생명윤리 : 생명윤리, 의료윤리, 유전자공학 및 인간복제 및 안락사 등에 관한 글들이 있다/ http://www.sangeun.co.kr/
4. 한국개신교신학과윤리 : 장신대 교수, 기독교 윤리에 관한 논문과 신학강의안이 있다/ http://www.theology-ethics.net/
5. 기윤실 교사모임/ http://eduhope.or.kr/
6. 예수혁명/ http://jesusrevolution.com/


I. 기타 유용한 사이트들

1. http://w1.cgntv.net/seminar/
2. http://www.biblestudytools.com/
3. Reformed Orthodox Theology : http://paul-prodeo.blogspot.kr/
4. http://bible.ovu.edu/terry/
5. http://www.spurgeon.org/~phil//
6. http://www.anabaptists.org/
7. http://www.ccel.org/wwsb/
8. http://www.newadvent.org/
9. 소요리문답해설가이드/ http://www.shortercatechism.com/

* http://www.sandfields-church.co.uk/ 내에 링크되어 있는 사이트들은 아래에 있습니다.
사실 이 사이트는 매우 유용하면서도..귀하답니다. 일단 보시면..뒤로 자빠짐다. ㅋㅋㅋ
http://www.jonathan-edwards.org/
http://www.gty.org/
http://www.west.org.uk/
http://www.mlj.org.uk/
http://www.mljtrust.org/
http://banneroftruth.org/uk/
http://www.fiec.org.uk/
http://www.equip.org/
http://rbc.org/
http://www.biblegateway.com/
http://www.emw.org.uk/
http://www.aecw.org.uk/
http://www.evangelical-times.org/Website_Pages/ArticleDetail.php?articleID=1131

* evangelical-library.org.uk 내에 링크되어 있는 신학관련 사이트들은 아래에 있습니다.

General
Evangelical Times/ http://www.evangelical-times.org/
Evangelicals Now/ http://www.e-n.org.uk/
Gracenet/ http://www.grace.org.uk/
Lord’s Day Observance Society/ http://www.lordsday.co.uk/

Theology
Alliance of Confessing Evangelicals (USA)/ http://www.alliancenet.org/
Alliance of Reformation Christians (UK)/ http://www.allreform.co.uk/
Alpha & Omega Ministries/Dr James White (USA)/ http://www.aomin.org/
Centre for Reformed Theology & Apologetics/ http://www.crta.org/
Credenda Agenda (USA)/ http://www.credenda.org/
Doctrines of Grace/ http://www.gospeloutreach.net/tulip.html
Fire & Ice (Puritan & Reformed Writings)/ http://www.puritansermons.com/
Lutheran Theology Website/ http://www.angelfire.com/ny4/djw/lutherantheology.html
Lutheran Theology Website/ http://www.angelfire.com/ny4/djw/lutherantheology.html
Theologia/ http://www.hornes.org/theologia/

Church History
Biographical Sketches of Memorable Christians/ http://www.justus.anglican.org/resources/bio/bioalpha.html
Historic Church Documents/ http://www.reformed.org/documents/index.html
This site kicks off with the Apostles’ Creed, the Nicene Creed, the Athanasian Creed, the Definition of Chalcedon, the decrees of the Fifth ecumenical council, and the decrees of the council of Orange: all important early Church documents.

The Ecole Initiative/ http://www.evansville.edu/ecoleweb
The Ecole Initiative is a rather fabulous collection of material from and about the early Church period.
The Hall of Church History/ http://www.spurgeon.org/~phil//hallmap.htm
The Hall of Church History (also known, more colourfully, as “Theology From A Bunch Of Dead Guys”!) covers the whole 2000 years of Christianity.

* 유용한 Ministries(미국의 목회자료) 사이트들은 아래에 있습니다.
http://www.9marks.org/
http://biblicalspirituality.org/
http://www.publicchristianity.com/index.html
http://www.founders.org/
http://www.ligonier.org/
http://www.monergism.com/
http://www.str.org/site/PageServer
http://thegospelcoalition.org/
http://www.whitehorseinn.org/
http://www.acts29network.org/
http://www.cbmw.org/
http://christianaudio.com/
http://www.desiringgod.org/
http://www.gty.org/
http://www.matthiasmedia.com.au/
http://sovereigngraceministries.org/
http://tgcreviews.com/
http://www.truthforlife.org/

* 미국의 유용한 Magazine & Journals(목회와 사역에 유용한 자료들)
http://www.booksandculture.com/
http://www.christianitytoday.com/
http://www.modernreformation.org/default.php?page=main&var1=Home
http://www.ligonier.org/blog/category/tabletalk-magazine/
http://www.thegospelcoalition.org/themelios
http://www.worldmag.com/
http://www.boundless.org/
http://www.firstthings.com/
http://www.reformation21.org/articles.php
http://matthiasmedia.com/briefing/
http://www.touchstonemag.com/

* http://thegospelcoalition.org/ 내에 소개되어 있는 미국의 유용한 블러그 모음
http://thegospelcoalition.org/blogs/justintaylor/
http://www.crossway.org/blog/
http://andynaselli.com/
http://www.dennyburk.com/
http://www.firstthings.com/blogs/firstthoughts/
http://www.inlightofthegospel.org/
http://www.joethorn.net/
http://theresurgence.com/
http://www.patheos.com/blogs/scriptorium/
http://matthiasmedia.com/briefing/
http://thegospelcoalition.org/blogs/tullian/
http://www.worshipmatters.com/
http://www.albertmohler.com/
http://www.geneveith.com/
http://firstthings.com/blogs/evangel/
http://joshharris.com/
http://solofemininity.blogs.com/
http://www.russellmoore.com/
http://str.typepad.com/
http://upper-register.typepad.com/
http://www.whatsbestnext.com/

* http://www.challies.com/ Tim Challies 목사의 Favorite Blogs
http://thirstytheologian.com/
http://headhearthand.org/blog/
http://www.9marks.org/blog
http://thegospelcoalition.org/blogs/justintaylor/
http://www.desiringgod.org/blog
http://thecripplegate.com/
http://www.redeemedreader.com/
http://takeyourvitaminz.blogspot.kr/
http://www.whatsbestnext.com/
http://alirae.net/blog/
http://www.dennyburk.com/
http://www.boundlessline.org/
http://www.reformation21.org/
http://www.ligonier.org/blog/
http://www.bloggingtheologically.com/
http://preacherthoughts.blogspot.kr/
http://rickandsusanna.com/
http://www.rebecca-writes.com/

인류의 책임전가 행습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3:12)

팩트가 맞습니다. 그러나 팩트를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인데도 죄의 책임에 대한 하나님의 물음에 답하는 아담의 진술은 궁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다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돕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금령을 어긴 아담의 처신은 "책임전가" 신공을 구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아담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오고오는 수천년의 장구한 세대들이 일관되게 답습해 오고 있습니다. 이 신공은 책임의 소재가 추궁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동원되고 있는 듯합니다. 책임을 전가할 마땅한 대상이 눈에 걸리지 않을 경우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망각을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하는 사례들이 메스컴의 요충지를 두루두루 뒤덮고 있습니다.

역사의 길이만큼 오래된 책임전가 문화는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나 국가만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 급속히 퍼지는 역병처럼 번져 있습니다. 어디부터 건드려야 할지, 도무지 대책이 서질 않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언제나 문제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가장 단순하고 본질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금령이 직접 주어진 대상은 아담이며 하와도 이 사실을 알았던 것을 보면 아담이 자신의 아내에게 이 금령에 대해 주의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터졌다면 아담의 전달력에 문제가 있었던지 아니면 하와가 너무도 먹음직도 하고 보임직도 한 과실에 욕심이 생겨 죄를 잉태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 의존적인 사색을 한다면 문제의 책임을 아담에게 돌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아담이 팩트를 말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담을 찾아와 심문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증인의 입술에서 팩트가 진술될 때에 비로소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는 분이 아닙니다.

다 아시지만 인류의 대표성을 띠는 아담에게 먼저 물으신 것은 사실을 말하라는 의도를 가지고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담의 옹졸하고 면피적인 처신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듯합니다. 오히려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의 처신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지었고 교회가 저지른 일이라며 정확한 팩트를 직고하여 죄책을 면하고자 하였던 첫번째 아담의 처신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도록 당신은 죽으신 분입니다.

아담의 처신이 이랬어야 했습니다. 하와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한한 사랑과 무궁한 긍휼을 신뢰하며 회개의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혹 회개한 이후에 사망의 삯을 지불하게 되더라도 그런 태도를 취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를 못했던 아담, 마치 오늘날 우리의 실상을 벌거벗은 것처럼 비추는 듯합니다.

전 인류와 온 역사의 실상과 수치가 아담의 비겁한 처신에 다 압축되어 있는 듯합니다. 이에 우리는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아담의 근성을 훌러덩 벗고 자기가 짓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마치 내가 회개할 자인 것처럼 주 앞에 엎드려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여 십자가의 의를 전가하신 두번째 아담의 처신으로 살아가야 할 듯합니다.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것 자체가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군림해 온 책임전가 행습에 종지부를 찍는 효력을 낳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학교에서 실천해 보십시오. 인류의 무너진 관계성의 첫번째 원인이 말끔하게 제거될 것입니다. 동시에 두번째 아담의 영광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2014년 2월 6일 목요일

칼빈의 섭리 3

사람들에 의해 우리가 부당하게 해를 당하였을 경우, 우리의 고통을 더하고 우리 마음에 복수심을 자극하는 저들의 사악함을 지켜보되 하나님께 올라갈 것을 기억함이 좋겠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악을 행했든지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며 그의 의로우신 섭리로 말미암은 것임을 굳건히 믿어야 하겠다.

우리를 괴롭히는 재난과 고난이 인간의 간섭 없이 일어날 때에는 모든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을 그 근원으로 하여 나오고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하는 율법의 교훈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는 인류의 공통된 이해에 따라 번영이건 재난이건 모든 사건을 다만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할 뿐,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받고도 예배할 줄 모르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지었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것을 행하는 자니라."(사45:7)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주목이 중간적인 이차 원인들의 경시로 이어지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칼빈: "경건한 사람이 받는 위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만사를 권능으로 보존하고 권위와 의지로 지배하며 지혜로 조정하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결정 없이는 발생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시118:6),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기에 두려워 않으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시56:4),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시27:1),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시27: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 할지라도"(시23: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시71:14).

이러한 확신을 갖는 이유는, 세계가 우연히 도는 것처럼 보일 때에라도 실은 어디서나 주께서 일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이 그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탄과 모든 행악자는 마치 하나님이 굴레를 씌운 것처럼 전적으로 하ㅏ님의 억제를 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고 명령하지 않는 한 우리를 해칠 어떠한 음모도 꾸밀 수 없으며, 그것을 꾸민 후에라도 준비할 수 없고, 충분히 계획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수행하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러한 확신을 가진 바울은, 어떤 곳에서는 자신의 여행이 사탄의 방해를 받았다고 말하고(살전2:18),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되었다고 말한다(살전2:18).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31:15). 다윗은 '시대'(temporum)라는 복수어를 사용하여 인간의 상태가 아무리 불안하다 할지라도 계속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다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음을 밝히려 하였다.

하나님의 후회: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했고(창6:6),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도 분명히 후회했다(삼상15:11). 자기 백성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면 즉시 그들에게 내리기로 결정한 재앙을 돌이키실 것이라고 하셨다(렘18:8). 하나님의 작정 중에 일부가 폐기도니 것처럼 언급된 구절들도 있다. 1) 요나를 통해 40일 후에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라고 하셨으나 이후에 저들이 회개하자 이전보다 더 은혜로운 선언을 내리셨다(욘3:4, 10). 2) 이사야의 입술로 죽음을 선고받은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자 하나님은 생명을 연장해 주셨다(사38:1, 왕하20:1, 5). 이런 까닭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으로 인간사를 결정하지 않으시고 각자의 공과나 하나님 자신이 공평하다 여기시는 대로 매년, 매일, 매시간, 이런일, 저런일을 결정하는 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 것은 비유적인 기술이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서다. "이스라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신다"(삼상15:29). 인간사를 통치하는 하나님의 질서는 영원하며 동시에 모든 후회를 초월하며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적자도 침묵할 수 없어서 발람은 비록 하나님의 뜻을 어겼지만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후회는 하나님을 인간적인 용어에 따라 서술하는 다른 모든 표현 방식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그에 대한 묘사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능ㄹ겨에 맞도록 그 묘사가 낮추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변화는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대한 정정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정정은 후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후회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나 의지가 번복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결의가 변경된 것도 아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 변화가 아무리 갑작스런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영원부터 예견하고 흡족해 하시며 작정하신 것을 영속적인 방법으로 수정해 나가신다. 

2014년 2월 5일 수요일

경건의 훈련: 침묵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탓입니다 (시39:9)

요셉은 자신을 푼돈에 팔아넘긴 형들의 옹졸한 시기와 선을 넘어간 배신에 대해 "나를 보내신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욥도 여호와의 불이 떨어지고 갈대아 사람들의 잔혹한 약탈이 자행되고 악창으로 몸까지 망가졌을 때에 분노와 복수의 불길에 휩싸이지 않고 입술로도 범죄치 않았으며 오히려 "주신 분도 여호와요 취하신 분도 여호와니 오직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뿐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윗은 죽은 개처럼 여겨졌던 시므이가 자신을 비루한 자로 여기며 돌맹이를 던지며 저주의 무례한 입술을 놀렸을 때에 오히려 격분한 충신들을 달래고 면박까지 주면서 "주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고 했던 분입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쓰라리고 아무리 다급해도 하나님을 사려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태를 이해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있어서 좋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억울함과 분통과 원망을 온 몸과 생으로 삼켜야 하는 고통과 희생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희생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교훈을 얻고 생을 갱신하고 시선을 사망의 땅에 떨구지 아니하고 생명과 평강의 하늘로 올리는 열매를 얻습니다. 억울하다 생각하면 한없이 억울하나 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된 요셉을 생각하면 영광의 도구로 쓰여진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억울한 희생과 참혹한 죽음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그리하신 것입니다. 욥과 요셉과 다윗은 그런 예수님을 예표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희생과 손해를 미덕으로 여기자는 건 아닙니다. 그 자체로는 할 수만 있다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실 때 기쁨으로 맞이하는 준비는 필요할 듯합니다.

막상 그런 현실에 부딪히면 내공이 드러날 것입니다. 말은 화려해도 몸은 사리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제가 늘 그러니 그런 분들의 행보가 더 잘 보입니다. 경건의 연습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낍니다. 유익이든 손해이든 하나님의 행하심을 늘 감지하며 촐삭대지 않고 잠잠히 입을 열지 않는 연습부터 하렵니다. 

칼빈의 섭리 2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책임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기도도 안하고 선행도 안하고 적법한 도리를 수행하는 것에도 게으르다. 현재 발생한 모든 문제들을 모두 하나님의 섭리 탓이라고 하면서 분명히 그 사건과 직접 관련된 사람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해서 모든 범죄를 미덕이라 규정한다.

물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한다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이 되신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 결정은 쓸데 없고 겉모양일 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삶의 한계를 정해 두셨으나 동시에 그것을 잘 돌보도록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주님은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과 도움을 예비해 두셨다.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님께서 대비책을 마련해 주셨다면 마땅히 우리는 그것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생명의 보존을 위해 하나님의 섭리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인간에게 숙고하고 경계하는 기능을 불어 넣으셨다.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노출된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적당히 가려져 있고 섭리가 의도하는 목적도 다양한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범죄를 하나님의 예정된 덕이나 선의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물론 도둑들과 살인자들 및 다른 행악자가 다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해서 자신이 정하신 심판을 수행하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저들의 범죄에 무슨 핑계를 줄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한다. 그들에게 발견되는 것은 모두가 악하지만 하나님은 그 악한 생각을 합법적으로 사용하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악의 원인과 관련해서, 나는 태양의 열로 부패되고 노출된 시체의 악취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고 싶다. 그것이 태양 광선으로 말미암아 되어 졌다고 모든 사람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그 악취가 광선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같은 맥락에서 악의 실질과 죄책은 사악한 인간에게 있다.

만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발생되며 무엇 하나 우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물의 근본 원인으로 바라보며 2차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위치에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선인이건 악인이건, 인간에 관한 한 그 계획, 의지, 노력, 능력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그것들을 원하시는 방향으로 항하게도 하시며 또 원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그것들을 제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기독인의 마음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이런 약속들과 실례들을 통하여 힘을 얻게 될 때에 모든 사람은 그들의 마음이 조정되든 혹은 남을 해치지 못하게 그들의 악의가 억제되든 다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 우리에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 및 애굽사람 눈 앞에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출3:21). 때때로 하나님은 원수들의 사악함을 분쇄하되 저들이 건전하며 온건한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만드신다. 아합을 분쇄하기 위해 사탄을 보내어 모든 선지자의 입을 거짓으로 채우게 하신 일, 젊은이의 충고를 통해 르호보암 정신을 흐리게 하였고 결국 자신의 미련함 때문에 왕국을 빼앗기게 되었으며, 때로는 저들의 정욕과 광기가 자극하는 일을 행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경우에도 하나님은 적절한 시기에 저들의 강포를 꺾으시며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신다. 일례로, 다윗에게 치명적인 아히도벨 모략을 사전에 분쇄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유익과 안전을 위해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되 심지어 사탄도 다스린다. 이 사탄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허락과 명령 없이는 욥에 대하여 감히 아무일도 하지 못하였다(욥1:12).

이러한 지식을 가지면, 번영할 때에는 감사한 마음을, 역경 속에서는 인내를, 미래에 대한 우려로부터는 놀라운 자유를 얻게 된다. 

궁극적인 원인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는 재판장이시다 (시75:7)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였다. 하나님은 만사를 움직이는 섭리의 주체시다. 원인이 가려진 사건을 우연이나 운명으로 돌리는 상식적인 해석에서 나올 수 없는 결론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결론을 고수한다. 그리고 범사에 적용한다.

형통할 때에는 찬양함이 마땅하다. 가까운 원인 제공자를 주목하여 띄우기에 들어가면 당사자를 망친다.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건 사람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것은 그 사람에게 독약이다. 설교의 울림이 컸던 헤롯의 비참한 최후가 이를 입증한다.

어려울 때에는 생각함이 마땅하다. 여기서 생각이란 주변의 원인들을 살피는 것에 머물지 않고 원인들의 원인이신 하나님을 사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한 인물의 잘못이 아무리 명확하다 할지라도 그의 멱살을 조이는 대응은 올바르지 않다.

우리는 낮추면 나쁘고 높이면 좋다고 쉽게 생각한다. 낮아지면 하나님의 저주가, 높아지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낮아짐이 복일 수도 있고 높아짐이 형벌일 수도 있다. 표면적인 현상이 궁극적인 가치에 대응되는 경우는 드물다.

자녀들이 실수하면 그들을 문제의 원흉으로 몰아부쳐 정신을 병들게 만들고, 자녀들이 화려한 성적표를 가져오면 왕자처럼 떠받쳐 온갖 당근으로 자녀들을 길들이는 부모의 과잉대응 사례는 어디를 가도 희귀하지 않다. 다 하나님이 사려되지 않았다.

궁극적인 원인이신 하나님을 사려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대상을 추앙하는 인간의 뒤틀린 본성은 고삐가 풀어지는 법이다. 열쇠를 하나님 안에서 찾지 않고 가까운 주변에서 적당한 인과를 탐색하고 찾으면 만족하는 성향이 개인과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고난도 유익이고 죽음도 영광일 수 있다는 도발적인 해석과 인식과 확신이 없어지고, 세상에서 어떤 일이 발생해도 손익의 분기점을 기준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어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렇게도 중요하다. 만물과 역사가 거기에 의존하고 있다.

범교회적 신앙선언 컨설팅을 회고하며

내가 살고 있는 Grand Rapids에서는 3일동안 범교회적 모임이 있었다. 정식 명칭은 Ecumenical Faith Declaration Consultation (Grand Rapids, Michigan, February 2-4, 2014)이었다. 여러 나라와 다양한 교단에 속한 50여명의 지도급 인사들이 이 컨설팅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나는 어떤 교수님의 추천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스스로를 개혁교회 가족으로 여기는 다양한 교단에서 초청된 분들과의 만남과 교제와 대화가 나에게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논의의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나의 권한 밖이라 생략한다.

1.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개혁주의 신앙을 추구하는 분들이 모이니까 왠지 그냥 좋았다. 각 대륙과 나라와 민족에서 온 대표들의 겉모습은 푸근한 아저씨와 아주머니 느낌을 주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입술로 끄집어낼 때에는 꽉찬 내공이 느껴졌다. 약한 자들을 들어 쓰시는 섭리인지 모르겠다. 암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면 옆집 아저씨나 아주머니 느낌이다.

2. 비록 광의의 개혁교회 소속이라 할지라도 신학적 입장과 강조점에 있어서는 너무도 다양했다. 같은 주제를 논함에 있어서도 저마다의 문화와 이슈와 관점이 반영된 다양한 목소리가 같은 공간에 쏟아졌다. 그런데 싸우거나 미워하거나 등돌리는 감정적인 대응이나 유아적인 태도는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됨, 공존 속에서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현장을 목격했다.

3. 결과적인 면에서 컨설팅의 목적은 의도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결과물을 산출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교리적 법령을 생산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참여한 대표들은 우리가 서로의 속깊은 사연까지 공유하고 조언해 주는 것 자체가 개혁교회 연대의 본질적인 모습이라 하였다. 동의하든 반대하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할 수 있는 자유가 존중되는 관계...

4. 여러 국가와 교단에서 오신 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친목을 도모하는 대화를 넘어 신학적인 이슈들과 현안들에 대해서도 정중하게 솔직한 입장을 물었다. 다들 솔직했다. 대부분 어떤 사회적 마사지를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입장을 말해 주었다. 감사했다. 말하는 분들의 표정에서 다른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원수를 맺고 등짝을 돌리는 근거가 된다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5. 서로의 신학적 견해차를 존중하는 태도가 성숙해 보였다. 자신의 입장을 소신있게 말하고 포기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입장에도 예를 갖춘다.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지 않았고 차이가 있더라도 존중하고 이유를 경청하고 배우려는 태도를 관찰하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유쾌했다. 사람의 의견은 위협적인 주먹을 보이고 다수결의 횡포를 휘두른다 해도 바뀌는 게 아니다. 유아적인 발상이다. 마음과 생각의 변화는 기적에 가깝다.

6. 이번 컨설팅은 모임을 준비한 주최측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다. 예기치 않은 이슈가 붉어졌고 전반적인 여론과 관심사도 그곳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주최측의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보였으나 이념적인 강행군 같은 미성숙한 처신이나 어떤 결론을 손아귀에 거무줘야 한다는 어떠한 강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기치 않은 대표들의 논의와 논지의 흐름을 존중하는 모습, 훌륭했다.

7. 도르트 총회의 역사적 사건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기회였다. 어떤 교리적인 결과물을 산출하는 자리가 아니라 어떤 사안에 대한 컨설팅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다양한 나라의 개혁교회 인물들이 참석하고 토론하는 분위기는 도르트 총회를 방불했다. 개혁교회 안에서의 연대, 협의, 혹은 협력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기회였다.

8. 복음의 진리에 더 깊어져야 되겠다는 도전을 받았다. 내가 속한 교단이나 노회나 교회만이 아니라 온 땅과 시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보다 광범위한 범주를 의식하며 진리로 무장하고, 섬김의 대상을 제한하지 않고 하늘과 땅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을 의식하며 하루하루 준비하며 살아가야 되겠다는 도전 말이다.

칼빈의 섭리

주님의 은밀한 계획: 나면서 소경된 사람의 경우,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요9:3). 재난이 출생에 앞선다고 하는 경우, 무죄한 사람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우리의 본성은 소리친다.

우리는 겸손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해명하지 않도록 힘쓰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밀한 심판을 존중하여 그의 의지를 만사의 가장 공정한 원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심한 폭풍우가 일어날 때 침침한 안개가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천둥이 귀를 때리며 공포로 우리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이 우리에게 혼란해지고 뒤엉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하늘은 항상 평온하고 청명하다.

하나님을 생각하된 자기를 창조하신 분으로 우주의 창조주로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두려워 하며 공경하는 자가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바르고 유익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개'들이 이 교리를 독살스런 이빨로 물어 뜯으며 혹은 적어도 소리내어 짖고 있는데, 이는 저들은 이성이 명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나님께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렐에게 보낸 칼빈의 편지: "내가 가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함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mihi esse negotium cum Deo)."

우주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의해 지배됨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시36:2)이란 말씀은 무슨 뜻으로 기록된 것인가에 대해 저들은 답변해야 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11:33-34). 실로 율법과 복음은 우리의 감각을 훨씬 초월하는 신비를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말씀으로 계시하길 원하셨던 이 신비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신자들의 마음을 총명의 신으로 조명했기 때문에 이제는 심연이 없어지고 다만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 생명의 빛, 확실하며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있을 따름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방법, 심연은 우리 생각에는 감추어져 있다. 이로써 우리는 그분을 경건하게 경배하게 된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고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다"(신29:29).

어거스틴: "최상의 질서를 따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선한 의지로 율법에 의거하여 행동하나 다른 점에 있어서는 율법에 의거하여 움직인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는 불변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우주 통치의 권리를 쥐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를 견실과 겸손의 율법으로 삼아 하나님의 최고의 권위에 복종하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의지를 의의 유일한 법칙이며 만물의 가장 의로운 원인으로 간주해야 한다.

Agammemnon: "죄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우스와 운명의 여신에게 있다." 이런 논리를 기독교에 적용하여 모든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무례의 극치가 곳곳에서 악취를 풍기고 있다.

칼빈의 우연 2

요나를 바다에 던지려 하셨을 때 하나님은 강한 바름을 보내시고 폭풍을 일으키셨다.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 없이는 바람이 일어나지 않으며 불지도 못한다. 자녀가 출생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밀한 손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땅이 소산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긴 하여도 여전히 사람의 삶이 떡으로만 가능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사람이 힘을 얻는 것은 풍부한 떡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하신 축복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스토아 학파의 숙명론: 자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인과의 영속적인 관계와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일련의 연속에서 파생되는 필연. 이는 바울이 피하라고 가르친 망령되고 허황된 말 중의 하나이다(딤전6:20). 우리는 하늘과 땅과 무생물 및 인간의 계획과 의지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림을 받아 지정된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고 단언한다.

바질: 운명이나 우연이라는 말은 이교도의 용어로서 경건한 신자들의 마음은 절대로 그런 것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이는 일체의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고 재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한다면 인간사에 운명이나 우연이란 말은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Against the Academics라는 나의 책에서 종종 운명이라는 말을 언급한 것에 대해 나 스스로 유감으로 생각한다...fortuna 혹은 forte, forsan, forsitan, fortasse, fortuito라는 말들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이며 모두가 전적으로 신적 섭리와 관계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이 말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흔히 운명이라 부르는 것은 은밀한 질서로 말미암아 조정되는 것이며 우연한 사건이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의 이유와 원인을 모르는 경우에 붙이는 이름일 뿐이다. 요약: 만일 무엇이든 모두 운명에 맡겨 버린다면 세계는 목적없이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인간은 섭리에 종속되어 있고 섭리의 지배를 받는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발생한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은 없다.

어거스틴의 "허용":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사건도 발생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의지는 만물의 최고 원인이며 제일 원인이란 의미이다.

칼빈: 나는 만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확실한 경륜을 따라 제정이 되었으나 그것들이 우리의 눈에는 우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물의 질서와 이유와 목적과 필연성은 그 대부분이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감추어져 있고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하나님의 의지로 발생하는 것들도 운명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섭리가 운명을 다스린다. 당신의 목적을 향해 운명을 지도한다. "운명": 전도서에 자주 사용된다. 인간은 처음 보아서는 깊이 감추어져 있는 제일 원인을 통찰하지 못하기 때문에 "운명"이라 불리운다. 우리에게 우연으로 보이는 것도 신앙에 의해서는 하나님의 은밀한 추진으로 이해된다.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일체의 변동이 하나님의 손의 은밀한 활동에서 온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다시 상대적인 필연과 절대적인 필연, 결과적인 필연과 결과의 필연 사이의 구분이 학파들 간의 무분별한 고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례: "하나님은 성자의 뼈를 부러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드셨으나 실제로는 이를 부러지지 않게 함으로써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을 자기 계획의 필연으로 제한했던 것이다." 

2014년 2월 4일 화요일

컨설팅의 질의응답 시간

피터의 견해

벨하 고백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어떤 가능성을 타진하고 싶었다. 이 컨설팅의 결과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속단하지 말라. confessional church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세나 종교개혁 시대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세계 개혁교회 연합의 결성, WCRC의 미래는? 모이고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고 연합을 이룬다. 어떤 이슈가 떠오르면 우리는 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여기에서 확인했다. 기쁨과 우려의 이슈들을 다 다룰 수 있다. 우리는 서로 관여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우리는 서로 관여할 수 있다. 사랑의 띠로 묶여져 있어서다.

윌리엄의 진행

총회는 EFD를 유일하게 만든 이유가 벨하만이 아니다. 다른 문헌들에 대해서는 이 범주에 어떻게 삽입될 수 있겠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처리할 것인가? 이 컨설팅은 벨하를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이것을 구분하면 좋겠다.

제리의 제안

EFD라는 새로운 범주의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문구가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후대에 컨설팅에 참여한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적시되지 않으면 동일한 대화와 생각만 되풀이될 뿐이겠다. 그리고 EFD가 단순히 개념적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교회 정치가 다르고 다양하다. 대단히 민감하다.

무와이의 제안

EFD 항목에 웨민을 넣는다고 생각해 보라. 어떤 일관성이 거기에 발견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들의 결과에 대해 정확하게 리포트에 명시하면 좋겠다. 진실로 이 범주를 원하는 정확하고 정직한 이유를 적시하면 좋겠다.

요시의 제안

이번 컨설팅을 통해 CRC가 얼마나 이 새로운 항목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고심해 왔는지를 느꼈다.

아프리카 대표

CRC가 시작하여 다른 목소리를 이 항목에 대해 경청한 것에 대해 감사한다. WCRC의 섬김과 영접에 대해 감사해야 되겠다. 이러한 주제를 다른 파트너 개혁교회 멤버들이 공감할 수 있어서 좋았다.

비어마의 견해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들이 들어가지 않아 아쉽다. 다음 단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겠는가? WCRC의 방향성과 다음 과제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겠다.

피터의 진행

이번 모임의 중요성은 이런 범교회적 대화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다. 그리고 8천만명의 개혁교회 멤버들은 다양한 문화와 경험과 관점을 가지고 있다. WCRC의 집행부는 신앙고백 차원의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5월에 모인다. 우리는 고백적인 교회이다. 벨하 고백서는 어떻게 불려지든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구현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가 중요하다. 단순히 벨하만을 언급하지 않는다.

신실한 것과 인내하는 것은 유사하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WCRC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 정말 중요한 것은 동일한 공유점, 우리를 묶는 것, 우리가 믿고 말하고 지지하는 것들이 중요하다. WCRC은 범교회적 기구이다.

남아공 대표

컨설팅의 목적은 결론을 도출하는 게 아니다. 어떤 결과물을 산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서로 조언해 주는 것 자체가 WCRC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여기에서 무슨 대대적인 행사를 성취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동일한 개혁신앙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 마지막 보고서는 정말 잘 정리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DECREE를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다. 어떤 소통의 장을 마련하여 마음을 모으는 게 중요하다.

다우어 생각

나이가 들수록 역사적인 성향을 갖는다. 고백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WCRC 논의의 한 일부가 될 수 있어서 좋았다. 보고서도 너무도 좋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부흐레 (남아공 대표)

교회의 정치에 있어서 다양성과 차이점은 때때로 우리를 실망하게 만든다. 어떤 새로운 시대를 묵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화의 장을 열어 어떤 가능성을 타진하는 모습이 큰 감동으로 밀려온다.

제리의 결어

가치관이 중요하다. 어떤 문헌이 왜 중요하고 가치있나? 어떤 새로운 항목이 만들어질 수 있다. 너무도 중요한데 고백서 레벨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을 포괄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벨하는 삶을 언급한다. 이것들은 교회가 옆으로 재낄 수 있는 이슈들이 아니다. 정의와 연합과 화목은 삶과 교회의 필수적인 사명이다. 벨하 고백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그런 사유의 가능성을 마련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WCRC의 목적은 7년마다 모이는 총회가 아니다. 이러한 대화에서 연합과 공감과 협력이 진행되는 것에 있다. 선교에 있어서 대화가 필요하다. 교단간, 종단간 대화를 희망한다. 다른 교회도 우리와 더불어 교회의 선교를 언급하고 논의할 수 있다. 조언을 서로 구한다. 연합이 무엇인가? 놀라운 다양성 속에서 어떻게 하나됨을 이룰 수 있는가? 무엇이 정의이고 신학인가? 개혁주의 신학적 사유가 너무도 중요하다. 범교회적 발걸음도 옮기자. 

칼빈의 우연

하나님의 섭리는 운명이나 우연한 사건과는 정반대다. 예나 지금이나 만사의 우연한 발생설은 보편적인 견해로 굳어졌다. 야수의 만남, 강풍의 급습과 배의 파선, 나무에 의한 압사 등은 다 우연이라 항목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말씀한다. 이 말씀에서 만사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따라 지배되고 있음을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의 손으로 지배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발휘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따라 원인이 추적되지 않는 온갖 수단들도 적정하게 사용하는 분이시다. 참으로 놀라운 일들의 원인인 태양의 빛을 만드시되 태양 이전에 빛을 만드신 것은 태양이 태양의 창조 이전에 존재하는 것들의 원리 혹은 필연적인 원인일 수 없음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태양 없이도 스스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태양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 히스기야 왕을 위하여 태양의 그림자가 십도 물러간 것은 태양의 일과적인 출몰은 자연의 맹목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자신의 부성적인 은총을 새로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친히 태양의 운행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전능은 이미 정해진 수로를 따라 흐르도록 강에게 명하는 그런 혼란한 운동의 일반적인 원리가 아니라 개개의 특수한 운동을 향해 작용하는 권능이다. 역경에 처했을 때에 우리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명령이 업이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는다. 우리에겐 기이한 힘, 기이한 활동, 기이한 운동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을 따라 모든 피조물은 지배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이 스스로 아시며 원하셔서 결정하지 않는 한 어떠한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섭리는 하나님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하늘에서 팔짱만 끼고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열쇠의 관리자가 되셔서 모든 사건을 지배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게을러서 활동하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에피큐로스 학파의 질병은 항상 세계에 충만하다. "우주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이 제정하신 자연의 질서를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신 개별 피조물을 특별히 돌보시기 때문이란 사실을 저들이 부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저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섭리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하진 않겠다." "우리는 하나님이 개개의 사건들을 조정하며 이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결정된 계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연히 발생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113:5-6). "성경은 하나님의 결정이 없이는 세상에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다 명백하게 설명하기 위해 가장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거들도 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난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신다"(시75:6-7). 나는 이 사실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 없이는 바람이 일어나지 않고 불지도 못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참조: Institutio I.xvi.

개혁교회 공통 신앙고백 컨설팅

Session 2:

Confessional Needs of This Century

21th century human identity

- Social identity is constructed
- With a variety of disordered loves
- Tolerance allows plural forms of identity
- Youth and emerging adults as homeless souls

21th century environment (social and natural) - VUCA

- Volatible
- Uncertain
- Complex
- Ambiguous

- 우리는 글로벌 흐름에 노출되어 있다. 권력에 대한 다른 견해들을 피력하고 있다. 성에 대한 이해도 복잡한 역학이 얽혀 있다.

- 교회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 관용의 시대에다. 다양한 형태의 표상을 허용하는 문화이다. 정부가 다양성을 억압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 세대는 묻는다.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는다.

- 불확실성 시대이다. 예측할 수 없는 문화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왜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생각하며 스스로의 가두어진 관점을 직시하게 된다.

- 변덕과 불확실과 복잡과 애매함이 시대를 규정하고 있다.

In this 21th century setting how are global and local church dynamics changing?

- observe
- name
- describe

Public statements of faith shape church self-identity

Does that identity need reshaping?
여기서 말하는 identity는 무엇을 뜻하는가? 만약 이것이 교회의 본질(nature of church)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과연 교회의 본질이 변했는가? 그렇다면 새로운 고백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교회를 둘러싼 작금의 환경에 포커스를 둔 교회의 변화된 정체성을 표명하는 것이라면 고백서가 아니라 다른 어떤 종류의 선언문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들이 변한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대문에 해석에 있어서 특정한 상황에 걸맞는 변화가 강조점 차원에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벨하: 만약 사람들의 삶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무수한 고백서는 무효하다. 고백서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한다.

고백서는 말씀에 대한 보다 견고한 반응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회 정체성 이해가 핵심이다.

남아공 상황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혼합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고백서가 필요하지 않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 상대주의, 각자의 진리가 있다. 우리는 고백서를 reality of current day라고 생각한다. 개념 정의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교회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신조이다. 그러나 개별 교회는 각자의 처한 상황 속에서 시대적 과제를 푸는 고백서를 산출하는 것은 당연하다...(남아공 대표자)

모든 회중이 교회이다. 교회는 행동할 권리를 가진다. 고백서를 산출할 수 있다 (독일 대표자)

- In inviting ways
- With appropriate boundary lines
- Globally as one in Christ Jesus

Public statements shape church witness to the world

Does the global Reformed church need to update its witness?

- Who needs our global witness?
- Can public statements of faith aid that witness?

- 우리가 어떻게 진리에 변경을 가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고백서가 필요한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던 문화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다. 교회정치, 혹은 문화 때문에 고백서의 개념에 차이가 발생한다. 고백서가 삶의 실천과 연관성이 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민이 글로벌 교회 현상을 촉진했다. 교회를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고백서는 가슴에서 나와야 한다. 가슴에 호소하는 것이어야 한다. (카멜론 대표)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언어를 사용하고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남아공 대표)

벨하의 핵심은 고백서로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회개가 관건이다. 

2014년 2월 3일 월요일

한병수의 토론법

중요한 토론에 앞서 생각해야 할 부분들

1. 토론은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는 수단이 아니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타인의 견해와 평가를 건지는 기회이다. 싸움과 승리의 개념에서 벗어나라. 그런 개념이 토론을 지배하면 감정이 상하고 관계가 깨어진다.

2. 토론은 구두로 전달되는 견해의 교환만이 아니다. 표정도 언어이고 반응의 시기와 속도와 색깔과 어투도 많은 내용을 전달하는 언어이다. 입술로 구술된 내용에만 집착하여 상대방의 종합적인 견해를 간과하면 오해의 챗바퀴만 돌아간다.

3. 찬성과 반대의 반응에 감정으로 대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찬성하면 함박꽃이 피고 반대하면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은 때때로 상대방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훼방하는 압박용 행위로 기능한다. 유도하고 몰아 붙이는 수단의 일환으로 말이다.

4. 토론의 주제를 정확히 숙지하고 가능한한 객관적인 논거들을 수집하고 그것에 근거한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정리하고 명료하게 표현한다. 객관적인 논거가 자신의 입장과 충돌될 경우에는 그런 약점도 솔직히 밝히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방어로 기능한다.

5. 토론하는 내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 전체를 의식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과 뜻과 계획과 역사를 사려하며 지금 입술을 열어 말하는 모든 내용들이 거기에 최대한 부합할 수 있도록 마땅히 해야 할 말들을 입에 물려 달라고 성령께 의뢰한다.

6. 토론의 목적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알아가고 순종하는 것에 있다. 이는 상대방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목적과 동전의 양면처럼 등짝을 맞대고 있다. 상대방의 견해를 꺾어야 직성이 풀리는 체질을 가졌다면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것이다. 개선하라.

7. 반론이나 모순이나 억지의 주장을 들어도 절대 흥분하지 않는다. 흥분은 자신의 바닥을 급하게 드러내는 행위이다. 오히려 정확히 듣고 이해하는 경청의 태도를 끝까지 견지하고 침착하게 조목조목 반문하고 재발론을 제시하고 근거를 밝히는 것이 불필요한 갈등과 주변적인 이슈들로 인한 논지의 흐려짐을 면하는 방법이다.

8. 찬성보다 반대에서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고 더 풍성한 이해와 설명이 자극된다. 반대의 유익을 기억하고 반대자를 환영하고 존중한다. 그런 마음의 태도는 토론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능력이다. 그런 분위기의 보존이 건설적인 토론을 가능하게 한다.

9. 토론도 산제사의 일부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다. 사람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간주하면 사람들의 입장 키재기로 그칠 공산이 크다. 한마디 한마디를 상대방의 입장 격파하는 목적이 아니라 신앙고백 하듯이 진실되게 내뱉어야 한다.

10. 토론은 사랑의 수단이다.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올바른 생각을 교환하고 서로의 약점과 단점이 개선될 수 있도록 지적과 평가와 대안의 입술을 여는 행위이다. 모든 율법이 사랑에서 이루듯이, 토론도 사랑에서 종결됨이 합당하다.

2014년 2월 2일 일요일

베드로의 선택: 하나님의 아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마14:28, 22-33)

도입: 인생은 선택의 충만과 연속인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도 선택이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도 선택이고 어디를 가는 것도 선택이고 누구를 만나는 것도 선택이고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선택이고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선택이고 불평하고 감사하는 것도 선택이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도 선택이기 때문에 선택을 떠나서는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삶과 선택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선택의 달인이 될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베드로의 예수님 선택을 살피면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를 선택하는 삶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배경: 본문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발생한 일입니다. 22절에 보면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는 예수님의 다급한 모습이 나옵니다.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왜 그렇게 서두르신 것일까요? 그것은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보인 무리들의 반응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요한의 기록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고" 했다고 나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급한 필요인 끼니를 경이로운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경험한 무리들이 로마의 압제에 짓눌려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고대하던 그 오랜 갈망이 예수님에 의해 해소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으로 의도했던 목적을 완전히 빗나간 것입니다. 광야에서 주린 자들을 먹이신 것은 바람과 모래만 가득한 광야에서 맛나로 조상들을 먹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깨닫게 하고 맛나의 실체가 바로 자신의 피와 살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 것인데 그런 목적이 무산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매한 갈망과 기대를 접한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슬프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그 이후에 벳새다로 가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곳으로 먼저 제자들을 재촉하여 보내신 것은 제자들도 무리들의 정치적 메시야 추구에 경도되고 거기에 반응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할 사명을 져버릴 수 있음을 아시고 취한 조치인 듯합니다. 사실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는 그들의 모친과 더불어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발탁해 달라는 정치적 야심을 내비쳤고 이에 다른 제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도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갈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이런 유아적인 상태에 있는 제자들을 보호하실 의도로 제자들을 서둘러 뱃길에 오르도록 독촉하신 듯합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적인 메시야란 사실을 보이고자 한 사건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베드로가 물 위로 걸은 기적 이후에는 예수님의 신분을 의심하는 종교 지도자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냐에 대한 기적과 의심 사이에 센드위치처럼 끼어 있습니다. 당연히 본문도 그리스도 예수의 정체성 계시와 관계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배를 타고 건너편에 간너가는 중에 일어난 놀라운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기록처럼 오병이어 사건의 장소는 벳세다로 가는 도상에 있는 한 들판이라 한다면 제자들은 그 근방에서 벳새다로 가고자 했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항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그들의 가는 뱃길이 순적하지 않았고 역풍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도했던 벳세다로 가지 못하고 예기치 않게 게네사렛 지역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실 육로와 해로의 길이가 비슷하기 때문에 제자들이 얼마든지 걸어서도 갈 수 있었는데 뱃길을 택한 것을 보면 폭풍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5절을 보십시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지 않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십시오.

제자들이 뱃길에 오른 시점은 저녁 직후이기 때문에 늦어도 8시에는 육지를 떠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밤 사경이 새벽 3시부터 6시에 해당되는 시간이라 한다면 배를 탄 시간은 최소한 7시간 이상이고 역풍과 사투를 벌인 시간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참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심기가 심히 불편하고 슬프고 두려운 상황에서 인간적인 재앙만이 아니라 자연적인 재앙까지 맞이하고 여러 시간 사투까지 벌이는 제자들의 심경은 한마디로 참담했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와 슬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까지 있었을 지도 모를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물로 뛰어들어 주님께로 갔고 다른 제자들은 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세찬 바람을 보고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이에 주님은 베드로를 건져주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을 하였느냐?"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께 배에 오르매 바람이 그쳤다고 말합니다.  

생각1: (폭풍과 인생) 제자들이 폭풍을 만난 것은 우리가 처한 삶의 현실과 상당히 유사해 보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발생한 폭풍은 평소에는 잠잠하다 급작스런 변화가 일어나는 지중해성 기후의 전형적인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지도 않았고 특별한 원인이 제공되지 않았는데 커다란 위협과 공포가 인기척도 없이 배를 급습하는 것, 마치 인생이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합니다. 

생각2: (도전과 망설임) 여기서 제자들이 경험한 폭풍은 선택의 대상이 아닙니다. 선택의 자유와 무관하게 들이닥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고통을 당했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을 때에는 두려워 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어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며 아우성을 질렀다고 말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입술을 열어 "만일 주시라면 물 위로 걸어가게 명령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주님께서 "오라" 하셔서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위협적인 환경을 보다가 믿음은 의심으로 교체되고 물 위를 걷던 발은 물 속으로 빨려들어 갔습니다. 결국 실패한 것입니다. 

생각3: (진정한 성공과 실패)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는 어떤 것일까요? 그의 실패는 자신의 연약한 믿음과 의심 때문에 발생한 일이지만 결국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받아 함께 물위를 걸어서 배로 돌아 왔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과 주님의 강함을 경험했고 자신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로 진정한 성공의 근원이 어떤 것인지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에 머물러 있었던 제자들은 비록 베드로의 실패는 모면할 수 있었지만 주님의 성공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생각4: (무모한 도전?)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불에 뛰어든 것을 보고서 무모하고 돌발적인 행동을 취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배의 행선지라 할 벳세다 출신 어부였고 그것도 신출래기 어부가 아니라 수십년의 경험을 가진 베테랑 어부였기 때문에 폭풍에 출렁이는 바다의 위험성과 대처법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을 것이기 때문에 충동적인 행동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베드로는 위험을 알면서도 뛰어든 것입니다. 이 행동은 오히려 "오라"는 예수님의 명령과 베드로 자신의 믿음에 의해 촉발된 행동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생각5: (두려움과 본질) 상황을 다시 보십시오. 모든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두려움이 닥치면 사사로운 일들은 뒷전으로 밀리고 사느냐 죽느냐의 가장 긴급하고 본질적인 문제만이 전면에 부곽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유일한 관심사는 사느냐 죽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다른 것에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본질에 대한 집중력의 차이를 낳습니다. 비록 동일한 폭풍 가운데에 있지만 베드로가 물 위에 선 것과는 달리 다른 제자들은 배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마도 그 제자들은 배 안에서의 상황이 물 위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배는 물보다 더 안전한 곳입니다. 당연히 배의 안전은 그들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기에 그들의 생각과 마음과 시간과 도모와 에너지도 본질이 아닌 수단에 불과한 배에 쏠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6: (베드로의 선택은 동행) 교회도 이러한 두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교회는 사느냐 죽느냐의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나 어떤 교회는 안전의 유무가 교회의 재정과 건물과 조직과 행정에 있다고 생각하여 거기에 엄청난 재원을 쏟습니다. 교회에는 상당히 많은 사사로운 일들과 비본질적 사안들이 막대한 재원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분쟁과 말썽과 대립과 다툼과 분열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일들에 일일이 개입해야 한다면 몸이 열이라도, 인생을 수십번 살더라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선택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는 폭풍에 격동하는 바다의 위험을 알면서도 예수님과 더불어 있으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더 편하고 안전하게 보이는 배 안에 머물고자 하지 않고 겉으로는 불편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물에 뛰어들어 주님께로 간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위기는 폭풍처럼 격동하는 세상이 교회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위기의 본질은 오히려 자신의 안목을 따라 안전이라 판단되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되 정작 주님과는 동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생각7: (궁극적인 실패) 실패는 가시적인 행동이 아니라 무의식적 상태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에서 실패를 생각하면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든 가시적인 모습이 눈앞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두려움의 현장에 찾아 오셨어도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 배에 머물고자 했던 다른 제자들의 상태가 제 눈에는 실패로 보입니다. 이런 실패는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했던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피난처요 안식처가 되십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못하는 분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천사나 인간이나 동물이나 하늘과 땅에 있는 그 어떠한 것도 감히 겁박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이보다 더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안식처가 없습니다. 모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생각8: (주님과의 '불편한' 동행)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동거하고 동행하는 것의 실상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녹의 경우에도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들리운 것을 마치 에덴동산 같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에서 일평생 주님과 걷다가 죽음도 생략하고 천국으로 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랬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고속도로 같이 평탄하고 순적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협착한 길입니다. 문도 좁아서 출입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길입니다. 제자들만 보아도 12명 중에서 베드로만 주님께로 갔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마치 삶과 죽음이 등짝을 맞대고 있는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있는다고 해서 폭풍이 자동으로 잠잠해 지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님께로 가서 주님과 동행을 했지만 폭풍의 기세가 꺾어진 것은 아닙니다. 배에 돌아왔을 때에 비로소 바람이 그쳤다고 말합니다. 주님과의 동행을 편안하고 나른한 땅에서의 안식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좁고 협착하고 불편하고 위태로운 길처럼 보이는 인생의 길입니다. 

생각9: (하나님의 아들) 베드로를 비롯하여 이 상황을 지켜본 모든 제자들은 엎드려 절하며 경의를 표할 정도로 심히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적 자체에 눈이 휘둥그레 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물에서의 걷기가 어떻게 가능하며 어떤 것인지의 문제로 쑥덕대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으로 반응을 했습니다. 요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거친 자연이 예수님께 순한 양처럼 순응하는 기이한 일을 면밀히 분석하고 꼼꼼하게 모방하고 싶어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런 수단적인 것에 관심을 빼앗기지 않고 이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신 주체로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의 종착지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무리에게 전달하기 원하였던 교훈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안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 및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동의했던 고백의 씨앗은 이때부터 심겨졌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다른 제자들도 삶의 선택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 뿐이라는 교훈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경험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수렴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기적적인 경험 자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여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베드로의 가시적인 실패와 다른 제자들의 무의식적 상태의 실패보다 훨씬 심각하고 은밀한 실패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기적에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따라서는 안되는데 기적에 머물면 그런 실패를 답습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맛보고도 주님께로 나아가지 않는 분들의 전형적인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교훈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적용

1.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하고 전능하고 전지하고 자비롭고 인자하고 공의롭고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만물과 역사의 창조자요 주인이요 통치자요 심판자가 되신다는 지식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분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폭풍의 한 가운데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이 가장 안전한 안식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2. 사나운 폭풍이 우리의 인생을 강타할 때에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두려운 상황은 오히려 우리에게 본질을 보여주고 사사로운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돌리게 만들며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선명하게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환란날에 주님을 구하면 그가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놀라운 축복의 징후가 폭풍일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3. 선택의 기로에서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동행하는 길을 가십시오. 물 위를 걷고 싶다면 만족과 안주의 배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를 배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땅의 안전과 만족과 안식을 과감히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안전하다 생각하는 때가 안전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망각하는 가장 위태로운 때일 수 있습니다. 편안하고 안전하고 무탈한 삶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겉으로는 조금 더 불편하고 조금 더 불안하고 조금 더 분주해도 물이라는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현장으로 뛰어드는 것이 본질적인 안전을 추구하는 길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증거하는 길입니다. 

4. 주님과 동행할 때에 경이로운 일들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자랑하지 마십시오. 특이한 경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수단일 뿐입니다. 이적과 기사 자체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자연'처럼 보이는 경이로운 기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수효를 능히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모든 자연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무감각은 누구의 개입도 없는 자연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항구적인 기적에 적응되고 익숙해진 것일 뿐입니다. 무수한 기적들 중에 몇 가지를 경험한 것에 신앙과 인생을 걸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무한한 기적의 몇 조각을 경험했을 뿐입니다.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기적은 그러한 본질의 수단일 뿐입니다. 

5. 실패를 두려워 마십시오. 믿음이 작고 의심이 있다는 지적도 두려워 마십시오. 실패하면 실패를 경험하고 그 실패를 아는 것만큼 성공한 것입니다. 나의 한계를 알면 아는 만큼 성공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의 선택을 저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이해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기준을 취하는 순간 삶의 모든 내용들은 그 기준의 횡포에 노출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환난이 닥칠 때마다 세상의 기준을 홍보하는 처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거하고 동행하는 것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환란이든 형통이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만 영화롭게 되고 증거될 것입니다.

6. 김명일 목사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위대한 분이심을 보는 구경꾼이 되지 말고 그분을 담아내는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배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관찰하고 위대한 분이라고 찬양하는 것은 쉽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위인들을 존경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명이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자여야 하고 그분의 위대하고 영화로운 생명의 복음을 체득하고 전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막상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실 때 입을 열어서 고백할 수 있었던 사람은 베드로 뿐이었습니다.

7. 편하고 익숙한 삶에 젖으면 믿음으로 사는 삶의 원리를 상실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을 얻었어도 믿음을 빼앗기면 모든 것들을 잃는 것입니다.

8. 주님과 동행하는 것과 무관한 모든 것들은 개인이든 교회이든 과감하게 제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번거롭고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도 수반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과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때때로 그런 고통의 결단이 감수해야 할 듯합니다. 편하고 익숙한 것에 안주하는 것보다 불편하고 낯설어도 예수님과 동거하고 동행하는 것이 훨씬 났습니다. 

2014년 2월 1일 토요일

신비 (Jeremy Begbie)

신비(Mysterion)란, 1) hiddenness, 2) ungraspability, 3) ambiguity, 4) paradox.

신비에 대한 두 가지의 사유방식:

1. mystery - driven by negatives

     1) What we can’t know: 하나님 지식은 인간이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가? God’s self inaccessible. 인간은 유한한데 하나님은 무한하다. 우리는 예배를 하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올려도 하나님 자신에 도달하진 못한다.
     2) What we can’t speak about: God’s self unspeakable (apaphatic tradition: 위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가 대표적인 인물),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만질 수 없고 지각할 수 없다. PPST. 음악,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전달하는 도구이다. 보이지 않고 세상을 넘어선 것에 도달하는 수단이다. Music opens the door for us to an unknown realm a world that has nothing in common with the outer world of the senses that...
     3) 신비의 건조화를 피해야 한다.

2. mystery – driven by pasitives

신약에서 신비는 open secret이다. 즉 The saving plan of God, shown and effected in Jesus Christ. Christ himself is the mystery of God. 복음으로 하나님의 신비가 드러났다. 그런데 왜 신비라고 말하는가? Mystery needs to be revealed.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시는데 이는 사람에게 발견되게 하려 하심이다. God’s self accessible. God’s self becomes speakable. 복음을 통해서다. 말씀을 통해서다. 우리의 세상은 신비 자체가 파고든다.

신비의 네 가지 의미는 예배에 의해 극복된다.

1) Recovery of hiddenness. 우리는 스스로 발견할 수 없다. 1) 신비는 우리에게 보여질 필요가 있다. Infinites of space and time. Melody fragments a music of compassion, noise of enchantment. Among the inner parts something open. Something wild a long rumour of wisdom keeps winding into each tune cantus firmus fierce vigil of contingency love’s congruence. Michael o’siadhail.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아무리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도 소음일 뿐이다. 음악적인 매타포,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위해 필요하다. 말과 이미지는 그것을 통하여 실질적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우주를 보라. 기계가 아니다. 건축을 보라. 건물에 투영된 우주와 세상과 신판과 긍휼을 보라. 우리의 보는 눈을 돕는다. 생명의 나무,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모든 열방의 치유를 위해 접근이 가능하다. 놀라운 우주의 광대함과 경이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 냉소, 무신경 등등...

2) Recovery of ungraspability, 이것은 성경의 단어 ‘신비’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신비는 계시되어 파악되는 것으로서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연합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uncontainable이다. 무한하다. 그래서 드러난 신비이고 유한을 옷입은 무한이다. 말할 수 없고 형설할 수 없는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되신 분이시다. 음악은 이런 상황에 중요한 수단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음악가의 중요성은 지대하다. 우리가 증거하고 들어야 할 복음이 전달되는 수레이다. What is the world that art takes for granted? It is one in which perception is always incomplete...

3) Recovery of ambiguity.
        Present age                 Resurrection of Jesus + outpouring of Spirit
                                          Coming age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부으심 때문에 모든 이 땅에서의 애매함은 사라진다. 복음은 현재를 부정하는 듯하나 진정한 현재와 실재를 말하기 때문에 애매한 것이 아니다. 음악과 예술에서 아직 이르지 않은 미래에 대해 앞당겨 묘사하고 말하고 표상한다.

4) Recovery of paradox.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희생. 모든 역설은 이것에 집중한다. 온 세상에 모든 관원들의 눈에는 덮혀진 것이었다. 당연히 십자가는 역설이다. 많은 비유가 역설을 활용한다. 음악과 예술. 캠브리지 교회의 동쪽 창문. 윗쪽 창문. 예수님의 십자가, 그 밑에 실재의 역사적인 왕의 그림이 있다. 아마도 헨리 8세이다. 누가 진짜 왕인가? 여기서 진정한 권세의 역설이 풀어진다. 신비는 우리를 흡입한다.

James MacMillan. 수치스런 십자가 죽음이 영광과 입맞춘다. 주님의 내려오심, 그것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심. 역설이다. 음악은 하강과 상승이 교차한다. 거기에 조화가 아름다운 향기를 풍긴다. 감미로운 멜로디와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이 병행하는 음악을 들었다. 음악은 언어가 서술하지 못하는 그런 역설의 신비를 묘사한다.

2014년 1월 31일 오전 10시, Calvin College Chap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