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여호와 경외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인간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는 것: 고통과 재앙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지혜의 시작이요 원리이고 원천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삶의 시작이고 원리이고 목적이다

2015년 3월 29일 일요일

죽음에의 단상

1. 죽음은 일반은총 일체의 종식으로 간주된다.
2. 죽음은 호흡의 중단이 아니라 일반은총 향유자인 자아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3. 그러나 죽음은 동시에 본격적인 특별은총 세계로 드러가는 진입로다.
3. 죽음은 자아의 족쇄에서 풀려나는 유일한 행방구다.
4. 죽더라도 누구를 향하여 죽느냐가 중요하다.
5. 내가 죽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 기독교적 죽음의 범례이다.
6.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신다면 그의 자유를 향유하게 된다.
7. 죽음은 이 땅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썩어 없어지는 것일 뿐이라는 것과 죽음을 통해서도 소멸되지 않는 것이 진정한 가치라는 사실의 가장 강력한 증언이다.
8. 사탄의 속임수가 완전히 무효하게 되는 유일한 지점이 자아의 죽음이다.

2015년 3월 28일 토요일

미완성과 미취득의 삶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빌3:12)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얻기 위하여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으며 심지어 해로운 것이라고 진술했다. 로마의 태생적인 시민권자,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 최고의 문벌 가멜리엘 학파의 문하생, 교계의 질서라고 자부하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구별된 선민인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율법 앞에서의 무흠자, 이 정도면 당시의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 할 유용한 스팩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스팩을 무익과 악취와 혐오의 대명사인 배설물에 불과한 수준으로 격하시켜 버리다니! 어찌 사회적인 반향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가치의 이러한 반전에 사회 전체가 술렁거릴 정도였다. 이는 조금 다른 문맥에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는 총독 베스도의 말에서도 얼추 느껴진다. 이는 만약 바울이 미치지 않았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어법이다. 

모든 사랆들이 그렇게도 흠모하는 유익들을 배설물과 가볍게 동일시한 사고의 배후에는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를 얻겠다는 바울의 일념이 문맥에서 읽어진다. 그렇다. 바울의 가치를 조정하는 저울추는 그리스도 예수였다. 그를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댓가로 지불할 용의가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목숨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를 않을 정도였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주변의 평가는 전혀 과하지가 않았음이 확인된다. 진실로 바울은 예수에게 미친 사도였다. 사실 그것이 진정 사도의 사도다운 최상급 면모였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갈증 때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유혹의 떡밥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바울의 그 자유는 어떤 경지일까? 사실 숨통이 밤의 경점 단위로 끊어질 어떤 위인에게 사로잡혀 있어도 누려지는 자유와 기쁨은 상상을 불허하지 않던가. 이단들이 이런 것을 제대로 악용한다. 교주에게 올인하는 순간 교주의 경지가 자신의 경지가 되는 듯한 자유의 가식이 모든 것들을 내던지고 그를 추종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그러나 교주 따위의 인간 군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바로 바울이다. 답답한 속을 뚫어주는 술이 제공하는 자유는 고작해야 무절제한 고성방가, 노상방뇨, 주접떨기 수준이다. 법의 울타리를 마구 넘나드는 권력과 부와 명예가 주는 자유도 술취하는 수준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이는 모두 후회가 곧장 엄습하고 수치와 민망으로 인해 면상에 온도의 급상승을 초래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공하는 자유는 질적으로 다르고 정도에 있어서도 격차가 현저하다. 예수님은 진리시다. 사로잡혀 있어도 결박이 아니라 자유가 되는 것은 진리가 유일하다. 그래서 진리만이 "자유"라는 말의 사용이 용인된다. 진리만이 아니라 무한대의 사랑과 거룩과 의와 지혜와 지식과 선하심의 원형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결박되면 될수록 그의 무한한 최고급 자유가 자신의 것으로 주어진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어떠한 사물도 비록 모양새는 "자유"를 제공하는 듯하나 이내 "중독"과 "속박"의 촉수로 둔갑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유익을 위협하고 저해하는 모든 것들을 단호하게 배설물로 여겼다. 그런 단호함의 반대편에 그가 향유한 자유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가 대충 느껴진다. 온갖 종류의 보화가 다 담긴 그리스도 예수의 전인격이 진실로 바울이 누렸을 자유의 경계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과히 무한대의 자유였을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이러한 자유를 맛 본 자에게는 아무리 막대한 땅에서의 지상적 자유를 약속한들 무슨 유혹이 되겠는가! 죽음도 그를 결박하지 못하는데 그 어떤 것이 그를 묶는 유효한 족쇄일 수 있겠는가! 예수의 존재와 사역,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달리신 십자가 외에는 알지도 않고 자랑치도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에게 먹힐 미끼가 과연 무엇일까! 진정한 자유는 이런 것이다. 결박할 끈이 없어지는 자유이다. 그런 자유 앞에서는 아무리 끈적한 유혹도 일곱 길로 도망한다. 종국적인 것으로는 죽음에의 종노릇 행보를 중단하는 지점에서 진정한 자유는 날개를 단다. 자신의 생명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행보를 막을 다른 대체물은 없다.

바울의 정신세계 안에 또 하나의 도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아직 얻지도 않았으며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라는 항구적인 정진의 자세이다. 이는 이렇게 해석된다. 그리스도 예수를 얻는 것은 이 땅에서 일평생 추구해야 할 목표인 동시에 그러한 추구 자체가 이 땅에서의 삶이라는 거다. 바울은 정말 못말리는 위인이다. 무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을 득하는 것은 이 땅에서는 완성과 완취가 불가능한 경주란다. 앞만 응시하며 질주해야 할 푯대란다. 그러나 비록 완성하지 못하고 온전히 가지지도 못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고작 맛보기만 주어져도 인간의 상상 그 이상의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는 푯대이다. 바울이 생각하는 나그네의 삶은 바로 그것이다. 이미 얻었다고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삶이었다. 완주해서 실증이 나고 다른 푯대를 찾아 헐떡여야 하는 그런 일회성 푯대가 아니라 아무리 누리고 성취해도 더 큰 갈증을 유발하는 신비로운 푯대를 지향하는 삶이었다.

바울이 고백하는 영속적인 미완성와 미취득의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께 완전히 사로잡힌 삶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그에게 심히 매료된다. 하늘에서 이루어질 완성과 취득을 더욱 고대하게 되는 점증적인 갈증유발 일로를 걸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은 아침이다.

2015년 3월 27일 금요일

아비의 영광스런 길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아비가 많아야 한다는 교훈과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는 책망이 교차하는 구절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아비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암담한 현실의 진단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이 서신을 읽는 자들만은 그런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부성애의 길을 가라는 아비로의 초청이다. 현실의 암담함에 대한 이해는 절망의 근거가 아니라 그런 현실을 바꾸는 소망참의 주역이 되라는 초청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그렇게 이해한다. 아무리 엄격한 명령도 우리를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세우기 위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마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 했다. 이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아무리 엄중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도 절망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과 설레임의 태도로 대함이 마땅하다. 이는 문장의 준엄한 표정이 아니라 주어의 인자한 미소를 응시하는 자의 특권이다.

아비가 없다는 진단과 아비가 되라는 도전를 투척한 바울 자신은 아내와 자녀가 없기에 혈육의 아비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바울은 단호한 목소리로 믿음의 아비로서 "내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비의 생물학적 무경험자 입장이 아니라 영적인 아비의 유경험자 입장에서 교훈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모진 경험담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아비가 된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먼저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소명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볼거리가 되었다"고 진술한다. 이 진술은 아비의 길을 가고자 하는 우리에게 언제라도 하나님에 의해 존재의 바닦에 내동댕이 쳐질 각오를 촉구한다. 세상에는 멸시와 조롱의 탄알이 늘 장전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아비가 되고자 한다면, 총알받이 신세는 우리의 일상이다.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심심풀이 볼거리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를 존재의 미말에 두어 구경거리 상황으로 내몰고 굶주린 사자가 사방에서 삼킬 자를 찾으며 끈적한 군침을 흘리고 있는 상황의 직접적인 연출자는 사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태가 이러한데 전혀 관여를 안하시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사탄의 교활하고 광포한 난동을 쓰시기로 작정하신 듯한 인상까지 받는다. 이게 지금 바울의 심정이다. 마치 하나님은 자신을 "죽이기로 작정하신 자"처럼 여겨진다.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도 현실은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분"처럼 느껴진다. 그게 아비의 마음을 품은 사도의 길이다.

구경거리 신세의 신앙적 극복이나 초탈이 아비의 행보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이어서 고백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며,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다? 무슨 말인가? 자녀에게 생명이 역사하기 위한 사망의 역사를 아비는 각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비에게 요구되는 희생이다. 아비가 되려면 자녀를 잉태하고 해산해야 하는데 거기에 따르는 고통은 죽음이다. 바울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아비의 길은 그래서 '죽으려고 작정하는 길'이다. 그런데도 가야 하고 가고 싶은 길이라는 사실이 신비롭다. 생명을 수단으로 삼아 죽기까지 전진해야 하는 길인데도 그 길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의 영광이란 역설 때문이다. 생명은 타인에게 역사하고 죽음은 자기에게 역사하면 억울하고 비통해야 마땅한데 거기에서 영광의 향기가 진동한다.

바울은 아비의 길을 고집한 사도였다. 최소한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그러했다. 자신의 입술로도 그것을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이 걸어간 생명과 죽음의 역사가 교차하는 아비의 길을 추천한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이는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 모두에게 주어진 도전이요 영광의 초청이다. 아비의 길은 분명 목회자의 길이다. 성도에게 생명을 꽃피우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거름으로 내어주는 사망의 역사를 각오해야 하는 게 목회자다. 그러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인자의 영광이듯 목회자의 길에는 영광이 뒤따른다. 세상에 대하여는 제사장 나라인 하나님의 사람들 모두가 품어야 할 사명이요 취해야 할 영광이다. 가정이든 교회이든 아비의 길을 가지는 못할망정, 아비의 길은 요리조리 피하면서 아비의 행새에는 놀랍도록 민첩하여 세상은 엄두도 못낼 악취를 발하는 지경까지 가서는 안되겠다. 그런 악취는 이단들이 충분히 뿜어내고 있다. 그런 악취 겨루기는 신경을 끊으시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를 자신의 죽음으로 내뿜는 자들이다. 신비이고 역설인데 그러해야 한다. 

2015년 3월 25일 수요일

자기의 굽은 길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시125:5). 기억해 두자.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면 범죄자의 길에 들어선다. 범죄는 유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상통한다. 범죄의 유혹, 범죄의 성향, 범죄의 행보는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길을 고집하면 그들의 차지이다. "자기의" 길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가는 자만이 평강의 향유자가 된다는 게 시인의 이어지는 노래이다.

2015년 3월 23일 월요일

자기노출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을 퍼뜨린다(잠13:16)

한 사람의 행실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법이다. 지혜자는 다른 곳에서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보인다"(잠20:11)고 했다. 내게서 나간 모든 것들이 나를 고발한다. 무엇을 말하고 어떠한 것을 행하여도 노출의 일차적인 내용은 말과 행위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말과 행위의 당사자다. 다양한 것을 말하고 다양한 이들에게 무엇을 행하여도 이를 통하여 알려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삶은 말에서나 일에서나 자기 노출이다.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퍼뜨리고 미련한 자는 미련을 퍼뜨린다. 내게서 나오는 내용물은 조작의 대상이 아니다. 아무리 화려한 언어의 옷을 입히고 거짓된 선행으로 가려도 변경되지 않는다. 미련한 자에게서 미련 이외의 것이 나올 것이라는 야무진 기대는 인간에 대한 몰이해의 소산이다. 마음에 쌓인 것이 미련이면 그것을 입술로 출고하든 행위로 발산하든 어떠한 형식으로 배설하든 내용물은 미련이다. 그래서 늘 조심해야 한다. 입술을 과하게 열어 미련을 대량으로 살포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다. 충분한 분량의 미련을 쏟아내지 않으면 직성이 견디지를 못하는 고집스런 습성, 그게 다 자신의 모습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면 어떠할까?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다"(고전1:25)고 말한다. 최고의 지혜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의 달인으로 발견된다. 그래서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권고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기에 급이 다르단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은 마땅하다. 게다가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오고 허물도 많아진다. 그러니 그나마 침묵이 상책이다.

어디에나 말들이 많다. 미련한 아우성의 과잉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타인에 대해서 말하는데 대체로 자신의 미련을 퍼뜨리는 형국이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면 내가 옳아지는 게 아니고 타인의 무지를 고발하면 나의 박식함이 입증되는 게 아니고 타인의 경박을 꼬집으면 나의 언행이 진중하게 여겨지는 게 아니고 타인의 헐렁한 기준을 꼬집으면 나의 엄밀한 수준이 드러나는 게 아니며 타인의 부패를 정죄하면 나의 의로움이 확보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빚어진다. 타인의 무언가를 재보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어떠함만 노출한다. 그런데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고발하는 것보다 덮어주는 것이 지혜롭다. 무엇보다 자신의 미련함을 주 앞에서 수습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급선무다. 공이로 찧을지라도 벗겨지지 않는 자신의 미련함과 직면하면, 타인의 못난 모습을 꼬집고 까발리는 방식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본보이는 방식이 더 우월하고 유효함을 지각하게 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않으신" 주님처럼 사랑과 용서가 언제나 우선이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판단의 칼을 잡을 때에는 사랑하는 만큼 휘두를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정의의 어떠한 구현도 의로움과 무관하다.

인간의 미련함은 천박하고 유치한 방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고상한 이름으로 고상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더 빈번하다. 그래서 미련을 미련으로 알지 못하고 표출을 중단하지 않는 부작용도 심각하다. 

불쌍히 여기소서!

번역완료 기한이 압박한다. 하여 번역 중심적인 스케줄을 작성했다. 참 빠듯하다. 해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쓰러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뒤돌아봄 없이 앞으로만 질주해야 한다. 주께서 도우시길...진실로 은혜가 단 한 순간이라도 중단하는 순간 숨통이 마비될 듯한 나날이 이어진다. 

2015년 3월 22일 일요일

경건은 건강한가?

주님께 미치지 않으면 자신에게 미친다. 어중간한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치열하게 싸우고 질주하고 부르짖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 인간은 너무도 부패했고 죄성의 뿌리는 너무도 견고하다. 가만히 있으면 절대로 저절로 괜찮은 게 나오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건의 빈곤을 절감한다. 사람은 경건한 만큼 살아간다. 경간한 만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드러난 삶과 사와 언과 행이 밑바닥 상태의 경건을 수시로 고발하고 있다. 움찔하고 뜨끔하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 그런 사람이고 싶다.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소망하면 되어지나? 큰바위 얼굴의 교훈은 사실일까? 바라보면 되어지는 변화가 경건에 있어서도 그러할까?

세상에서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경건의 몸부림...그런 몸부림의 연속이 삶이기를 고대한다. 목사, 신학자, 박사, 교수...거품이 너무도 많다. 주께서 그 이름들에 허용하신 그 이상의 것을 취하려고 거품의 보존을 추구할까 두렵다. 거품은 악취로 변하겠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경건과 실력과 인격과 삶에 있어서 얼마나 엉터리로 발견될까? 머리털 끝에서 발 끝까지 어느 하나라도 떳떳한 자랑과 연결할 구석이 없다.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는 겸비의 훌륭한 모범이다. 바울도 이러한데, 과연 몸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아도 될 괜찮은 위인이 있을까? 나? 어림도 없다. 바울의 신들메는 풀어볼 수 있을까?....키케로의 말처럼, "호흡이 있는 동안에는 소망한다"(Dum spiro spero). 

2015년 3월 20일 금요일

신성의 모든 충만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2:9)

교리의 체계화에 대한 공교회적 움직임에 뾰족한 촉매가 되었던 알렉산드리아 장로 아리우스 사상의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가 피조된 존재라는 것이었다. 즉 성자는 존재하기 시작한 때가 있었고 실체에 있어서 성부와 동일하지 않다는 그의 주장은 4세기 초반을 신학적 격동의 시대로 내몰았다. 많은 사람들이 아리우스 주장에 편승했다.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와 호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교회가 확립한 첫번째 공교회적 교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이다.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실체를 가졌다(ὁμοούσιος)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창조의 결과였다. 예수님에 대한 아리우스 장로의 이해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육체에서 출발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에서 말미암지 않았다는 바울의 인식론이 존중되지 않았다. 아리우스 장로와는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으로 이해했다. 사실 바울도 초기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육체로 대하였다. 그런 관점은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적용되어 성도들도 육체로 알았다고 바울은 자백했다. 그러나 이성이 거듭난 이후에는 육체로 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눈을 열어서 확보된 지각에서 이해가 시작되는 우리의 인지적 한계를 과장하고 과신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하다. 단추구멍 사이즈의 눈이 제공하는 뿌연 시야에 다 담으려고 심지어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도 임의로 변경하고 어거지로 거기에 구겨 넣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보는 눈이 얼마만큼 보아야 사물의 객관성에 도달할까? 듣는 귀가 얼마만큼 들어야 정보의 객관성에 도달할까? 만물의 다양성과 소리의 중다함과 우주의 광대함 앞에 우리의 눈과 귀가 감지하는 영역이 얼마나 된다고 자신의 지각을 진리의 잣대로 추앙하고 판단의 보좌에 앉히는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면, 들리는 것보다 들리지 않는 것이 많다면 눈과 귀가 조달하는 정보에 의존하면 할수록 주관적인 것이고 어리석인 일이다. 최소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그렇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우리의 머리는 그분이 친히 자신을 계시하신 성경에 의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예수님은 "신성의 모든 충만(πᾶν τὸ πλήρωμα)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시다. 완전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이것보다 더 명료하게 표현할 방법이 또 있을까?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바울식 표현으로 바꾸면 "신성의 모든 충만"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성에 있어서 완전한 하나시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도 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바울의 종합적인 그리스도 이해였다. 보다 많이 보다 멀리 보다 크고 보다 작은 세계를 목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바울의 이러한 이해가 상대화될 수는 없다. 문명의 진보란 고작해야 보고 듣는 정보의 도토리 키재기 수준의 확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가장 부요하게 증거되고 존중된 시대가 역사적 진보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바울의 그리스도 이해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발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완전하게 된다고 단언한다. 올바른 그리스도 이해 없이는 우리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없다는 이야기다. 주님을 모르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온전함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다. 성경의 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그리스도 이해는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도 왜곡한다. 

2015년 3월 19일 목요일

짐 지시는 하나님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로다 (시68:19)

시인은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경건의 촉이 신적인 섭리의 심오한 지점까지 접지되어 있다는 증거로 나는 이해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과 불순종의 행위에 반응하는 피동적인 주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말하고 행하기도 이전에 무의식의 광야에 측량할 수 없는 식탁을 풍성하게 마련해 주시는 참으로 적극적인 분이시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가장 긴요한 지점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예비해 두시고 잔치를 배설하는 분이시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날마다 축제를 방불한다. 이것을 인지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의 모든 짐을 날마다 지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의식하는 부분은 대체로 빙산의 일각 수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길이 참으심과 자비와 긍휼과 선하심을 경험하고 찬양하는 모든 계기들은 다 측량할 수 없는 항구적인 은혜의 조그마한 조각과 관계한다. 불치의 병이 치료되고 해결의 가능성이 제로였던 문제가 해결되면 그 은혜를 조금 감지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전부를 낱낱이 다 알도록 일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당신을 적당히 가리신다.

그러나 때때로 희미한 이정표 수준의 흔적을 남기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 흔적은 바로 광활한 바다와 같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협착한 진입로로 작용한다. 그래서 비인격적 강요가 아니라 자율성을 존중하는 초청이다.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가는 자가발견 학습이다. 자신이 탐구의 주체가 되어 취득한 깨달음은 그의 인격과 삶에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님의 배려 때문에 우리는 이따금씩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의 등짝을 목격한다.

그런 목격의 경험이 한번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울어야 한다. 아니 울음이 저절로 터진다. 이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묵묵히 우리의 짐을 지시되 감사치도 않고 영화롭게 하지도 않는 우리의 무지와 무례를 끊임없이 참으시는 주님께서 참다가 참다가 도저히 안되셔서 신기척을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면 감격하고 찬양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좋은 일이 생기면 누구나 그렇게 좋아하고 기뻐한다. 주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대체로 그런 맥락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을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으로 노래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대하는 우리에게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다. 수면에 떠오른 은혜만이 아니라 수면 아래의 본격적인 은혜를 주목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날마다 지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멀쩡하게 살아가는 삶의 배후에는 그런 하나님의 짐 지시는 은혜가 있다는 이야기다. 주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견디고 극복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신다는 것이 일차적인 뜻이지만 행간에는 우리가 견디고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의 짐을 지시는 누군가가 계시다는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짐 지시는 은혜가 없다면 어떠한 시험에도 우리는 필히 좌초하고 만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사실 아무리 작고 가벼운 시험도 너끈히 통과할 수 있는 실력자가 아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짐은 가볍고 멍에는 쉬우니라." 이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지고 오면 가볍게 해 주신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안하든 늘 도우시고 계시며 짐을 지시는 분이라는 이야기다. 구원은 무의식 중에라도 은혜로 주어지고 있다. 싯구에서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과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은 동격이다. 우리의 구원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폐하여질 수도 실패할 수도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짐을 지금도 날마다 지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우리의 구원이다. 구원의 완주는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아귀에 있다. 나는 성도의 견인도 여기에서 확인한다. 구원이 비록 시간 속에서 지속되는 싸움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시기에 마지막 날까지 구원이 소멸되지 않고 취소되지 않는거다.

오늘도 하루가 멀쩡하다. 앞으로도 멀쩡한 하루가 지속될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오늘도 나의 짐을 지시기 때문이며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 나도 그 하나님을 종일토록 찬양한다.

잡다한 생각

들뢰즈: 욕망은 어떤 것의 결핍이 아니라 스스로 끊임없이 창조하고 생산하는 힘이다.
한병수: 결핍인 동시에 생산력.

마르셀 푸르스트: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1) 다양한 자아가 있다.

편집증: 하나의 자아가 다른 자아들을 대신하는 증세.
분열증: 그때그때 상황에 상응하는 자아가 등장하는 증세.

2) 동요 가운데 나를 기쁘게 하는 무언가가 생기면 비로소 새로운 자아가 형성된다. 새로운 자아는 언제나 혼돈의 틈새를 파고든다.

3) 오데트를 찾는 게 아니라 기쁨을 느끼게 하고 사랑할 만한 준비가 되도록 내가 혼돈과 흔들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인가? 마르셀은 바로 그것을 찾으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의 증인으로 살아간다. 자신도 포함된다.
전도라는 말보다 증인이란 표현을 선호한다.
(정보의 전달자가 아니라 인격으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자가 증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하면 내가 보여진다. 나의 모든 행실은 내가 밖으로 보여지는 출구이다. 우리의 행위와 말에서 내가 증거된다. 어떠한 사안이든 나는 내가 보여질 때까지 말하고 행동한다. 어떤 문제의 해답이 제시될 때까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충분히 밖으로 표출될 때까지다. 인간은 그렇게 지독하고 집요하다. 누군가를 만나 대화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선명하게 확인된다. 어떤 주제로 만나도 그 주제가 아니라 만나는 그 사람을 경험한다. 마음에 쌓아둔 것이 어떤 계기를 만나면 표출된다. 그게 대화이고 만남이다. 주제가 바뀌면 자아의 다른 부위가 드러날 뿐이다.

내 안에서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신다면 나의 행위와 말에서 주님이 증거된다. 사신다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을 내 안의 내장 어딘가에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전인격이 나의 영혼이 주님의 거처요 주님의 전이라는 이야기다.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촉매가 질문이다. 질문보다 강한 촉매는 명령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 내는 촉매다.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 안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교사다. '명령'이란 교사는 밖으로 표출되기 이전에 내 안에 무엇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2015년 3월 12일 목요일

하나님의 명령

법의 명령은 빛이요 생명의 길이요 훈계요 책망이다 (잠6:23)

법의 명령은 빛이다. 법은 질서이고 그 질서는 정적인 규칙이 아니라 순응을 요구하는 동적인 명령이다. 우리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삶의 이정표다. 단순히 방향을 보여주는 소극적인 표시가 아니라 준행을 촉구하는 적극적인 명령이다. 방향이 설정되면 지각이 뒤따른다. 비로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그래서 명령은 건강하고 올바르고 필수적인 지각의 자궁이다. 캄캄한 무지가 어두움을 벗고 지각의 환한 뜨락에서 부서진다. 지각의 잉태에서 무지가 소멸된다. 명령의 방향을 따르지 않은 지식의 실상은 또 다른 무지이다. 세상에는 무지를 지우려고 다른 무지와 결탁한다. 무지의 충만을 학식으로 착각한다.

법의 명령은 생명의 길이다. 명령의 방향이 존중되지 않은 모든 지각은 가식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 것을 알았기에 정지된 무지를 너머 역동적인 거짓이다. 필히 사망으로 인도한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올바른 지식에 이르려면 지각의 올바른 진입각이 필요하다. 명령은 그런 필요를 채워준다. 명령이 비추는 방향을 따라 사물과 사건을 응시할 때에 비로소 알아야 할 것이 알려진다. 나아가 명령이 설정한 방향을 따라 이루어진 지각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과의 만남이다. 모든 명령은 명령자인 하나님을 아는 지각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모든 명령이 주선하는 만남이다. 요한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곧 영생이라 하였다. 그래서 명령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길이다.

명령은 훈계이다. 배움을 준다. 명령을 준행하는 것은 배움이다. 명령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삶의 방향이 설정되면 배움이 일어난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의 삶으로 간직하면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여호와를 알게 된다고 증언한다. 사람들은 명령을 자유의 억압으로 간주한다. 불쾌하여 배척한다. 그러나 명령은 그 자체가 교훈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명령의 절정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지복이다.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우리의 앎과 삶으로 누리려면 명령이 제시하는 방향대로 움직여야 한다. 다르게 움직이면 필경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미움에 도달한다.

명령은 책망이다. 고침이 일어난다. 인간은 죄인이다. 존재 자체가 총체적인 고장이다. 수리가 불가능한 상태라는 이야기다. 정상적인 상태를 이탈했고 정상적인 기능도 상실했다. 회복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에스겔이 골짜기에 가서 본 환상은 마른 뼉다귀의 회생이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기적이다. 명령 이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 자력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면 외부의 명령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령은 스스로의 힘과 능으로는 해결이 안된다는 사실의 역설이다. 명령은 하나님의 외적인 개입이다. 명령으로 인해 뼈가 상합하고 생기가 주입된다. 그때 명령은 은혜의 샘이었다. 물론 고침에는 통증이 수반된다. 그런 통증은 잠간이고 회생은 영속된다.

명령은 타협과 합의와 절충이 아니라 확정이다. 사람의 판단을 섞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명령의 예리한 날이 영과 혼을 파고들어 찌르고 쪼갤 때에도 명령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게 상책이다. 책망을 받으면 필경은 지혜롭게 된다는 게 지혜자의 금언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사람의 생각을 섞는다는 것은 명령의 부실을 주장하는 것과 일반이다. 이는 나의 생각이 들어가면 있는 그대로의 명령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령의 주어이신 하나님의 판단을 고치려는 불경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책망이며 우리는 책망의 대상이다. 책망의 망치로 부수시고 책망의 칼끝으로 미련을 벗기시는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전인격을 의탁하는 것이 바로 책망의 수용이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뻣뻣하다.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자위적인 '괜찮다' 의식이 영혼의 숨통을 열어주는 껍질의 파쇄를 방해한다. 우리의 내면은 왜곡된 인상과 병든 지식과 고질적인 타성과 오염된 기질과 쾌쾌한 습성으로 빼곡하다. 결코 괜찮지가 않다. 명령의 들음은 생기의 주입이다. 시들고 혼미한 영혼을 시술하는 매스의 수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명령을 들으면 살아난다. 명령이 우매를 지혜로, 무지를 앎으로, 미련을 현명으로, 나태를 성실로, 환각을 각성으로 되돌린다. 명령은 빛이고 길이고 교훈이고 책망이다. 우리의 영혼과 삶에 필수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명령이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혼미하고 삶은 퇴락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복이다.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12)

우리는 모두 땅에 거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바울은 삼층천 출입자다. 구약에 대한 지적 전문성에 있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최고의 석학이다. 다른 사도들과 비교할 수 없는 분량과 수준의 학식을 구비한 인물이요 구약 전문의 완벽한 암송자요 출중한 내용 전달자다. 나아가 몸으로 계셨던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배운 다른 제자들과 구별되게 3년이나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사도였다.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과 시공간 안에 있는 피조물과 역사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바울보다 뛰어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도 그런 그가 자신의 지식을 희미하고 부분적인 것일 뿐이라고 공언했다. 질과 분량에 있어서 바울에 비해 현저히 빈약한 지식의 소유자인 우리는 어쩌라는 말인가!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발언은 겸양의 수사법 구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한 꾸며지지 않은 시인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교정한다.

인간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을 즉각적인 취득이 아니라 매개체를 통하여 취득한다. 그 매개체가 바로 "거울"이다. 그러니까 거울은 방법이고 지식은 내용이다. 사용하는 거울의 투명도에 따라 취득되는 지식의 질과 양이 달라진다. 거울들 중에는 유리로 된 거울도 있고, 빛이라는 거울도 있고, 역사라는 거울도 있고, 고전이란 거울도 있고, 사람이란 거울도 있는데 자기 자신도 그런 거울들 중에 포함된다. 택하는 거울의 종류에 따라 거기에 비추어진 지식의 차원도 달라진다. 물리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빛과 유리로 된 거울이 필요하고, 지금의 객관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지나간 역사와 고전의 거울이 필요하고,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타인과 자신이란 거울이 모두 필요하다.

세상의 지식만이 아니라 기독교적 진리의 취득을 위해서도 필요한 최고의 거울은 단연 성경이다. 성경의 거울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지식의 질과 분량은 우리의 육안이나 빛이나 타인이나 고전이나 역사라는 거울에 비추어진 것과는 판이하며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월등하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든, 천상적인 것들에 대해서든, 인간적인 것들에 대해서든, 사회적인 것들에 대해서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든 최고의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요 거울이 있다면 바로 성경이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성경을 기독교 진리가 주어지는 원리이며 원천이라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을 통째로 암송했고 성령의 감동까지 받은 사람인데 자신의 지식을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일 뿐이라고 한다.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자. 바울의 고백처럼 이 땅에서 우리가 취득할 수 있는 지식은 희미하고 부분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의 취득은 지극히 정상이다. 희미한 것인데도 선명하게 안다거나 부분적인 것인데도 전체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수상하다. 주로 이단들이 합당하고 정상적인 무지를 비웃으며 그것을 포교의 틈새로 활용하고 선명하고 전체적인 지식을 미끼로 투척한다. 그들의 전략은 주로 '요걸 몰랐지'다. 하나님의 신적인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바울 자신도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데 그보다도 더 선명하고 전체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은 최소한 이 땅에서는 정상이 아니다.

이 땅에는 선명하고 전체적인 지식이 주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주어지지 않는다.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에 만족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전체를 말하지 않고 어떤 부분만을 말하고 침묵한다. 그 침묵의 경계를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설정한 지식의 지계표를 임의로 변경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분명히 알도록 계시된 성경의 기록에 대해서도 무지해야 한다는 주장과는 무관하다. 성경의 가르침에 눈길도 주지 않는 무관심과 성실하지 못해서 무지에 머물게 된 게으름에 인식론적 면죄부를 발부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앎의 경계를 넘으려는 당돌한 시도보다 그런 경계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 의도 파악에 관심을 요청하고 싶다.

여기서 우리는 지식의 희미함과 부분성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중요성, 특별히 사랑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희미하게 알고 부분적인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항상 있어야 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발휘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아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안다는 지식과 사랑의 선순환적 연관성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식의 선명함과 희미함 사이의 간격, 그리고 부분성과 전체성 사이의 여백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매운다는 그런 연관성에 주목하고 싶다. 이 땅에서 선명하고 전체적인 지식으로 채워진 자에게는 적정한 희미함과 부분성을 가진 사람과는 달리 미지의 대상을 추구하는 믿음과 소망이 비집고 들어갈 빈공간이 없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가치가 생산되는 독특한 현장이 바로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이다. 완전한 지식을 확연하게 안다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고 완전히 알게 되는 그 때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필요하지 않다. 이 땅에서의 사랑도 나 자신의 인격과는 무관하게 나온 완전한 지식의 기계적인 배설물일 뿐이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얻는 완전한 앎이 비록 땅에서의 희미하고 부분적인 지식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그곳에서 이루어질 놀라운 가치와 의미가 생산되는 천상적인 희미함과 부분성은 여전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때가 이르러서 새하늘과 새땅에 가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에는 이르지를 못해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자연과 역사는 물론 성경을 읽을 때에라도 거울을 보는 듯한 희미함과 거울이 담아내는 부분성을 존중하되 자연과 역사와 성경에 계시된 정도의 적정한 희미함과 부분성에 최대한 이르도록 노력하는 우리의 도리이다. 이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장 화려하게 꽃피는 현장은 바로 그 지점이기 때문이다. 신명기 29장 29절의 말씀도 이러한 이해를 돕는다. 거기서는 오묘한 일과 나타난 일을 구분하고 전자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후자는 우리에게 속했다고 모세는 진술한다. 나타난 일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고 오묘한 일의 협조가 없다면 나타난 것은 희미하게 아는 지식의 경계를 넘어갈 수 없다는 말이겠다. 동시에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인격적 학구열 발휘를 요구한다.

2015년 3월 9일 월요일

건강 주의경보

건강에 유의해야 되겠다. 안면이 시큰하다. 눈동자에 약간의 통증도 느껴진다. 모든 게 그렇지만, 하나님의 교회 섬김도 투철한 자기관리 없이는 지속되지 못한다. 주께서 숨을 거두실 때까지 건강한 몸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시간과 체력 안배에 주의해야 되겠다. 잠깐 있다가 주께로 돌아가는 인생, 늘 죽음으로 저울질된 사안의 우선순위 따라서 시간을 관리하자. 오늘도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줄 것이 있기를 소원하며, 주의 도우심을 구하련다. 제사보다, 수양의 기름보다 듣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고, 우리 편에서는 주님의 거룩한 진리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고 자유케 하고 기쁘게 하는 시간이길 소원한다. 

2015년 3월 6일 금요일

나른한 오후의 산책

방에 찌그러져 있는 나를 
식후에 나른해진 몸을
아내가 산책길로 떠밀었다. 
가깝지만 늘 그림의 떡이었던 식당 
'길조'의 앞마당도 밟고 지나갔다.

5개월이 지나서야 
드디어 괜찮은 산책길도 
하나 발굴했다. 
봄햇살이 수북히 쌓인 오후, 
봄맞이 몸풀기에 들어간 
양평의 물상들이 
안구를 자극한다.


자유의 과잉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21:25)

왕의 부재와 개인의 자율성은 비례한다. 통치자가 없으면 당연히 외부의 강요와 억압과 통제도 사라진다. 여기서 "왕"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넓게는 일반적인 권위 일체를 일컫는다. 규범이나 예절이나 상식이나 관습이나 도덕이나 윤리나 교훈이나 제도나 질서나 다수결 혹은 심지어 지식과 경험조차 권위의 다양한 얼굴이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자유에 막대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자신의 생명이 수단화될 정도로 자유에 대한 열망은 참으로 대단하다. 자유의 수호를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자살도 불사한다. 그러나 만약 자유의 개념이 왜곡되어 있다면 무서운 종노릇의 끔찍한 희생물로 전락하고 만다.

사람들은 자기의 소견에 옳다고 판단하는 대로 살아간다. 세상에는 이것이 자유의 보편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자유는 통치와 지배와 억압과 통제를 상징하는 "왕"의 부재를 요청한다. 그래서 "왕"의 권위적인 숨결이 느껴지는 어떠한 것도 거부하고 부정한다. 통치자의 권위도 부정하고, 통치하는 그룹이 만들어낸 규율도 부정하고, 그런 규율이 체질화된 관습도 거부하고, 규율이 제도의 옷을 벗은 주류 문화도 거부하고, 부모와 스승의 권위도 거부하고, 성을 구분하는 남녀의 생물학적 경계도 무시한다. 자신이 옳다고 하는 자기의 소견 이외에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드물게 외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자기의 소견과 일치하는 경우이다.

사실 사람들은 세상의 일그러진 질서 속에서 신물이 나도록 개인적인 모순과 사회적인 부조리를 경험했다. 부당한 규정과 편파적인 판결에 염증이 났다. 어두운 물건을 뒷문으로 거래하고 고급한 정보는 측근에게 빼돌리고 사회적 시스템의 정상적인 작동을 입맛대로 조작하고 생존의 경제적 위협으로 순응을 강요하는 야비한 권위의 파행적인 남용이 우리의 고귀한 삶을 분노와 좌절로 얼룩지게 했다. 권위의 부정은 어쩌면 권위 자체의 부정보다 권위의 과잉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세대가 이전 세대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음도 무작정 후세대의 무례로만 돌릴 게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볼 계기로 여김이 더 합당하다.

과잉의 경계선은 대체로 외부의 어떤 권위가 나의 소견과 충돌되는 바로 그 지점이다. 문제는 나의 소견도 과잉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나의 인생이 아니라 부모의 기호를 따라 꼭두각시 인생을 살았다고 여기며 부모의 모든 흔적을 나에게서 지우려는 것, 사회의 기대와 가치의 프레임에 갇혀 죄수처럼 살았다고 여기며 일체의 사회적인 규범과 관행을 배척하는 것, 교회문화 속에서 나도 모르게 벌어진 교리의 주입을 종교적 폭력으로 여기며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허울이나 악으로 여기는 것 등은 개인적인 소견의 과잉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게다가 부모와 사회와 종교가 준 그동안의 유익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속아준 것으로도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한다.

맞다. 우리는 잘못된 권위의 횡포로 오랜 시간동안 신음하며 살아왔다. 권위의 부정과 배척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 그러나 부당한 권위의 제거와 개인적인 소견의 과잉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은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자존적인 전능자가 아니다. 참으로 연약하다. 너무나도 쉽게 무너진다. 더 연약한 사람들도 있다. 그분들은 어떡하나! 자기의 소견이 권위의 요체라는 주장이 나에게는 마치 연약한 자들은 죽으라는 묵언으로 들린다. 이는 마치 자신의 소견이 자신의 존재와 생존을 지탱해 줄 정도로 강하고 출중하고 견고하고 지속적인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내 알 바 아니라는 적자생존 법칙이다. 약자는 종교나 도덕이나 규율이란 아편을 맞으며 살아가고 강한 자에게는 그런 따위들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내 입장은 이렇다. 나에게는 왕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보다 뛰어난 왕이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높낮이가 없다. 모두가 동등하다.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왕으로 군림하는 것은 일체 거부한다. 어떠한 도덕과 규율도 나는 권위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나에게는 유익한 권위시다. 그분이 설정한 질서만이 나에게는 규범이다. 개인과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사회와 국가와 시간과 자연의 다양한 질서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 만큼의 권위만 인정하려 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를 나의 소견보다 더 행복하고 유익하게 하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 그분의 자녀요 벗이요 종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기쁨이요 행복이요 영광이다.

나보다 못한 것들이 휘두른 권위의 횡포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인정해야 할 권위까지 거부하며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우매함과 불행이다. 게다가 그런 상태를 자유의 극치라고 여기며 도무지 헤어나올 마음과 의식조차 없으니 더더욱 애달프다. 성경은 왕의 부재를 불행한 무질서로 간주한다. 이는 진정한 왕의 부재로 인해 무수히 많은 종류의 그릇된 왕들이 진정한 왕의 공석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무소불위 자유를 원했으나 속박이 대체하는 격이다. 자유의 과잉은 속박의 다른 얼굴이다. 최고의 존재를 나의 왕으로 모실 때에 비로소 가장 완전한 자유를 구가함은 만인의 상식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왕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나의 주인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괜찮치가 않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최고의 자유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때에 구현된다. 

2015년 3월 4일 수요일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17:10)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기 위해 우리의 심장을 살피시고 폐부를 시험하는 분이시다. "살핀다"는 것은 눈의 관찰로 무언가를 알아내는 정보취득 행위를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의중을 꿰뚤어 보신다는 의미이다. "시험"도 합격과 불합격 여부를 가리는 테스트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든 영적 작용까지 훤히 보시고 아신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행위와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은 하나님의 눈에 알려진 우리의 의중과 동기에 근거한다. 물론 플러스 하나님의 자비이다.

우리는 세상의 불쾌한 모순과 터무니 없는 부조리에 진저리가 났다. 우리의 이러한 반응은 대체로 "우리의 눈"에 관찰되고 확인된 사실에 근거한다. 사악한 자들이 권세를 휘두르고 간사한 자들이 성공하고 게으른 사기꾼이 돈다발을 껴안고 야비한 남자와 요염한 여자가 미녀와 훈남을 차지한다. 우리의 의협심은 이러한 사실들에 발끈한다. 익히 들었던 신적인 공평함이 이런 것이라면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할지라도 수상한 속성을 가진 존재일 것이라는 추정에 물증을 확보한 것처럼 신이 불쾌하고 미워진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공평의 박약한 개념과 초라한 기준을 인정하고 내려 놓는다면 하나님의 속성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의 길이 참으심에 탄복하게 된다. 하나님은 전지한 신이시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보시고 아는 만큼 아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보다 심오한 차원의 증거와 물증을 가진 분이시다. 하나님의 판단과 보응은 결코 우리가 고작 인간적인 수단으로 긁어 모은 증거력에 의존하지 않으시고 거기에 제한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증거 수집력은 우리가 아무리 과하게 상상해도 그 상상을 초월한다.

하나님이 주목하고 기준으로 삼으시는 우리의 심장과 폐부는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했다. 이는 거짓과 부패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을 능가하는 존재가 없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거짓과 부패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거짓의 아비요 부패의 괴수인 사탄과의 결탁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의 마음은 그래서 거짓되고 부패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과신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괜찮은 마음의 소유자는 없다. 그냥 스스로 괜찮다고 자위하며 자기최면 상태로 들어갔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의로운 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더더욱 없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혀에는 속임으로 충만하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을 머금었다. 당연히 출고되는 것은 저주와 악독이다. 게다가 피 흘리는 일에의 민첩함은 과히 경이롭다. 파멸과 고생을 자초한다. 평강의 길로 안내하는 이정표에 일말의 눈길도 할애하지 않는다. 영혼의 창문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의 실루엣도 내비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평가절상 목적으로 저급한 기준 찾기에 골몰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주변을 관찰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을 노래하지 않는 사태와 사건은 하나도 없음을 확인한다. 모순과 부조리가 우리의 시야와 의식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을 관찰하지 못한 결과이다. 하나님은 분초마다 시험하고 판결하고 보응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보응에는 중단과 단절이 없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행위와 행실대로 갚으신다. 행위와 행실의 무게는 하나님의 호주머니 안에 있는 신비로운 저울추에 좌우된다.

우리의 안구에 모순과 부조리 현상이 걸리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에 이의를 제기할 근거 제거를 위함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판단에 항변할 자가 없어진다. 하나님의 심오한 판단력을 다 파악하진 못해도 그 판단을 반박할 수는 없을 정도의 현상이 만인들의 눈에 관찰되는 것도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이다. 인간의 죄악된 행실, 그 행실을 밀어낸 인간의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 죄악된 행실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자만,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그 판단에 대한 인간의 심경과 반응과 항변까지 골고루 고려된 섭리의 신적인 촘촘함이 참으로 경이롭다.

하나님은 인간의 심장을 살피시고 폐부를 시험하사 행위와 행실대로 갚으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참으로 정교하게 묘사한 진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