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30일 화요일

어리석은 변론은 갖다버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딤후2:23)

여기서 변론(ζήτησις)은 대화의 문맥에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찾고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완전한 존재도 아닌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적 본성이다. 변론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나님도 그의 백성에게 인간의 죄문제에 대해 변론의 판을 벌이라고 하셨으며, 이사야 선지자도 열방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논하자고 제안했다. 바울 자신의 글쓰기도 변론적인 성격이 다분하다. 그러나 바울은 여러 군데에서 변론을 금하라고 권고한다. 그때마다 변론 자체가 아니라 '어리석고 무식하고 무익한' 변론을 버리라고 하였다.

변론이 어리석고 무익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칼빈은 주석에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물음들이 "경건에 아무런 유익이 없기 (nihil ad pietatem conducunt)" 때문이라 하였다. 교황주의 학자들의 신학은 바로 이러한 물음들의 미궁(labyrinthus)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질문이 처음에는 괜찮은 듯하여도 곧장 "지혜의 허탄한 과시(inani sapientiae ostentatione)"로 인해 스스로도 속는 부패의 급속한 질주를 보인단다. 특별히 소르본의 교황주의 학자들을 지목하며, 물음은 있는데 답변의 안식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들이라 비꼬았다.

그럼 변론은 언제 허용되나? 설교에서 칼빈은 변론의 물음과 반응이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고(à edifier le peuple de Dieu)" "영혼의 구원(salut des ames)"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덕이나 구원과 무관한 변론은 다툼만 일으키니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겠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가 그 내용을 채우기는 하지만 변론의 핏대는 자기의를 향하여 올린다는 사실이 관찰된다. 욥의 재난과 아픔에 겉옷도 찢고 통감의 눈물을 흘리며 재까지 머리에 뿌리던 절친들과 욥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어리석은 변론은 초라한 자기지식 키재기로 내몰았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얼마든지 연출된다. 진리가 드러나는 것보다 내 입장 건드리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것에 모든 사람들이 보다 민감하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의 최종적인 판결과 유통은 자기 입술의 몫이라는 교만은 죄가 세상에의 출입을 시도한 태초까지 소급된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일에 하나님과 같아지려 했고 결국 하나님과 같아진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성품이 겸손하고 삶이 자비롭고 입술이 정직한 중에라도 옳고그름 문제에 돌입하면 판단 종결자의 기질을 발동하고 무소불위 판결봉을 휘두른다. 이는 생각이나 의식의 과정을 생략한 즉각적인 반사신경 수준이다.

자신을 괴롭힐 목적으로 복음을 운운하는 논적들에 대해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라면 기뻐하고 기뻐했던 바울의 처신의 빛이 아침의 캄캄한 비구름과 장대비 사이를 비집는다. 그에게서 옮고그름 문제에 관계의 피가 터지도록 어리석은 변론에 매달리는 것 이상으로 생명의 복음 증거에 순교의 피를 토하는 기독인의 자세가 읽어진다. 이는 인생의 근간이 흔들리는 재앙을 댓가로 지불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옳음이 '스스로도 헤아리지 못하고 이치까지 가리울 뿐이라'며 무지의 입술을 가린 욥의 변화와도 동일하다. 오늘은 바울과 욥에게서 진정한 겸손을 묵상한다.

[종교개혁과 스콜라주의] 한글역을 탈고하며

세번째 번역본을 탈고했다.

판 아셀트와 데커가 편집한
[종교개혁과 스콜라주의] (Reformation and Scholasticism)이다.
교부, 중세, 16세기,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대가들이
범교회적 기획 차원에서 투고한 논문들의 모음집 되시겠다.

판 아셀트의 [개혁신학과 스콜라주의] (Introduction to Reformed Scholasticism)은
책제목 그대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방법론적 입문서다.
일독하면, 정통주의 신학의 기본적인 지도가 그려진다.
정통주의 신학의 개관을 제공하는 세상에서 유일한 입문서다.

멀러의 [칼빈이후 개혁신학] (After Calvin)은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최고의 대가가 단일한 관점으로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전통의 형성을 다각도로 묘사한 작품이다.
일독하면, 대가의 신학 방법론과 신학적 결론들이 손아귀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번에 번역한 [종교개혁과 스콜라주의]의 특징은
1.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의 다양성을 제공한다.
2. 중세, 종교개혁, 정통주의 등 스콜라 신학의 변천을 시대별로 그려준다.
3. 개혁파, 로마 카톨릭, 루터파, 청교도를 두루 섭렵한다.
4. 특별히 역사적 배경 설명(보스와 트루만)이 탁월한다.
5. 번역하며 정말 많이 배웠다. 특별히 멀러 교수님과 다른 내용들...
6. 그리고 이번 번역이 제일 힘들었고 동시에 제일 마음에 든다. 

2013년 4월 29일 월요일

졸업느낌, 이런거야!

학교에는 학문적인 면죄부가 주어진다.

실수와 오류가 용납되고 수정하고 개선하면 된다.
학생일 때 모든 것을 질문하고 실컷 틀리라고 말씀하신
어떤 선생님의 무한한 관용도 이런 맥락에서 주어졌다.
그러나 일단 학교를 벗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든 사상과 언어와 행실에 고유한 책임이 수반된다.
그 책임은 타인에게 떠넘기지 못한다. 자기 잘못이요 책임이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든 피하지 못한다.
졸업의 임박이 주는 이런 느낌은 졸업의 설레임을 압도한다.

또 하나의 느낌은 학교의 문턱을 벗어나면
이제 수요자가 아니라 공급자가 된다는 거다.
평생교육 차원에서 본다면 수요자의 신분은 종료되지 않는다.
그러나 공동체 차원에서 본다면 공급자의 책임이 요청된다.

졸업은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란 말이 실감난다.
이 땅에서 졸업하는 그날에도 유사한 느낌에 휘감길 듯하다.

논문방어 5월 14일

5월 14일 오전이 결전의 날이다.

나를 가르치신 분들과 학자 대 학자로 대면하는 날이다.
논문방어 현장에는 가르치는 교수와 배우는 학생의 관계성을
잠시 문밖에 풀어놓고 들어가야 한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제간의 정을 느끼기는 하겠으나
독수리가 창공에서 새끼를 떨구는 냉정함을 각오해야 한다.

제대로 방어하고 유쾌한 식탁이 이어지면 조으겠다...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마6:25)

1. 이 명령은 생의 존립과 직결된 먹고 마시고 주거하는 생필품과 결부되어 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무관한 생의 악세사리 조항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땅에서의 생이 짧으신 젊은 주님께서 무심코 내뱉으신 현실과 동떨어진 과장법일 뿐이라고 보기에는 사유의 규모가 방대하고 논리가 치밀하다. 창조와 섭리,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와 가치비교, 번영의 아이콘인 솔로몬을 능가하는 들풀의 영광, 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 이 모든 거대한 담론들이 '염려'라는 우리의 성향을 둘러싸고 절묘한 질서를 따라 쏟아진다.

2. 우리 주님은 염려하는 것(μεριμνάω) 자체를 문제삼지 않으셨다. 주님의 금령은 염려의 대상과 관계한다. 염려는 인간의 본성이다. 제거하지 못한다. 우리가 조절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염려의 대상이다. '염려'나 '근심'이란 단어를 부정적인 뜻으로만 보아서는 아니된다. 바울은 이런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가 없는 회개를 이루고 세상의 근심은 사망에 이른다는 진술로 대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신자를 논하면서 그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주님의 기쁘심에 몰입하게 된다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염려도 언급했다.

3. 문제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염려의 대상인 세상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는 거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먹고 사는 일이 죽는 것보다도 각박하고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다양한 종류의 골리앗과 늑대들이 거대한 창과 날카로운 이빨로 생존을 위협하고 있어서다. 염려의 끈을 조금만 늦추어도 살벌한 적자생존 무대에서 도태될지 모른다. 이처럼 목숨을 위해 음식과 주거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엄중한 상황인데 염려하지 말라는 건 논리적 아구가 도무지 안맞는다. 주님의 존재를 생략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명령에 명령자가 고려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4.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염려의 대상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과 동일하게 중요한 것은 그 명령의 주체가 주님이란 사실이다. 주님은 엄숙한 명령만 내리시고 관심의 손을 떼시는 분이 아니시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주님의 의지와 계획과 섭리와 맞물린 명령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위협적인 존재이나 주님께는 그렇지가 않다. 세상과 세상의 모든 권세들을 주관하고 계신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세상보다 크고 높으신 주님께서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의지의 다른 표명이다. '염려하지 말라'는 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상황이다. 즉 '주님 안에 거하라'는 명령이다.

5. 세상보다 크신 주님을 떠나면 세상보다 작은 우리는 세상을 염려할 수밖에 없다. 세상 근심으로 일평생을 소진하고 만다. 그러나 비록 세상의 근심이 아무리 압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아직까지 비유에 불과하다. 우리의 가장 심각하고 궁극적인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 자체이다. 세상은 고작해야 코의 물리적인 호흡을 인질로 삼아 일시적인 심술을 부리지만 하나님은 영혼을 능히 영원토록 멸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증언처럼, 하나님을 버림이 우리가 염려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고통이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염려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하신 이유겠다.

6. 목숨을 위하여는 염려하지 마시라.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는 염려의 바다에 잠기시라.

이는 오늘 들었던 주일설교 주제의 내 방식의 요약이다...

운동

위장의 거북이
운동을 독촉한다.

운동을 무시하면
소화도 어렵고
밤잠도 뒤척인다

나에게는 운동이
소화제요 수면제다.

2013년 4월 28일 일요일

소자사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25:40)

1. 권위에 있어서나 부에 있어서 사람들의 의식과 기억의 촘촘한 그물망도 투과하는 존재감 제로의 서글픈 소자들이 어디에나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무엇을 했는지,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기억도 외면하는 부류이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대에 이르러 이런 소자들의 존재를 거론하며 그들을 판결의 예상치도 못한 기준으로 삼으시는 주님 앞에서 양과 염소 혹은 택자들과 유기자들  모두는 반전의 놀라운 전율에 휘감기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듣고 평소 우리의 관심사가 미치지 못하였던 가난하고 소외된 소자에게 잘해야 하겠다는 결심이 생긴다면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저변에 깔린 추론적 교훈도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다.

2. 양이든 염소든 기준을 몰랐다는 것이다. 기준은 주님께 속하였고 당연히 심판도 주님의 몫이라는 말이겠다. 당연히 이야기의 목적이 자신의 노력으로 그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행위의 촉구를 겨냥한 것은 아니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왕국을 상속하든 영영한 불에 들어가든 그것은 그 기준이 인간에게 제시되고 인간은 피땀을 흘려 그 기준에 도달하는 부합의 여부를 따라 좌우되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여기서 나는 은혜를 읽는다. 왕국의 상속은 비록 내가 생의 현장에서 '무의식적' 사랑과 섬김의 땀을 흘리는 방식을 취하지만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끝나는 일이어서 의식도 기억도 없이 이루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3. 양과 염소에게 있어서 행위가 존재에 변경을 가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행위가 존재를 견인하지 않고 행위가 존재를 뒤따른다. 그러나 그들이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로도 구분되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와 행위의 필연적인 관계도 동일하게 중요한 대목이다. 물론 우리의 가시적인 눈에는 그런 필연성이 관찰되지 않을 수도 있기에 우리가 심판자가 되지는 못한다. 비록 우리가 열매로 나무를 안다지만 우리의 지각은 저마다 다양해서 존재를 판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의 적합성을 구비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고 행함으로 온전케 된다는 사실을 폐하지는 못한다. 본인이 주님의 양이라고 믿는다면 증거를 보이라는 야고보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4. 주님께서 친히 소자 중의 소자셨다. 한 사람의 꾸며지지 않은 존재의 실체는 소자 앞에서 드러난다. 지극히 작은 소자 앞에서는 인간의 간사한 조작과 가식이 발동되지 않아서다. 인간은 이득의 조짐이 그림자만 스쳐도 짐승의 본성에 가까운 반응으로 외식에 돌입한다. 그러나 배경도 허술하고 자체로도 흠모할 만한 어떠한 것도 없는 소자에게 뭘 건지려고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래서 소자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가 무방비로 노출된다. 우리의 주님께서 바로 그런 소자의 자리로 오르셨다. 그곳은 저주와 수치와 고통과 억울의 십자가다. 동일한 운명의 배에 올랐던 제자조차 싸늘한 배신의 등짝을 돌리고 저주의 과격한 언사까지 내뱉는 인간의 본성이 고스란히 노출된 지점이 그곳이다.

5. 주님께서 우리로 왕국의 문턱을 출입하는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고 은혜로 출입의 자격을 우리의 삶 속에 심으시고 계시다는 인상을 풍기는 본문이다. 양들은 주님의 판결을 접하면서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었다. 판결도 낯설었고 판결의 근거도 생소했다. 기억을 구석구석 살펴도 의로운 행위가 자신의 것이라고 동의할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은혜는 지나간 자취를 열매로 남기지만 그 열매 안에서는 원인이 발견되지 않도록 역사한다 함이 옳다. 양으로 택하신 것도 은혜지만 의로운 열매의 출처도 은혜이다. 그 은혜는 땅에 어떤 생색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믿음의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발견되지 않는 은밀함이 특징이다. 우리 주님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6. 비록 모든 것이 은혜라 할지라도 인간 문맥에서 요구되는 것은 여전히 소자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무의식적 사랑이며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런 사랑이다. 의식을 잔뜩 동원해서 작심하고 억지로 노력해야 겨우 빚어지는 낯설고 인색하고 어거지에 가까운 그런 사랑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소자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의식하지 말라거나 노력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최선을 다하되 그런 노력의 의식적 경지를 넘어서는 사랑과 섬김의 예술적 승화를 요구한다. 오른손의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의 은밀함이 구현될 수 있는 그런 차원 말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사랑이다. 당연히 은혜와 사랑은 결코 대립되지 않고 합력한다. 

2013년 4월 27일 토요일

부써의 이론/실천신학

부써의 로마서 주석(1536)은 그가 1530년대에
학문적 신학의 이상이라 여긴 특징들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신학의 학문적인 성격을
신학의 실천적인 성격과도 결부시켜 이해했다.
신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하고 경건하게 살도록 가르치는 학문이다.
신학은 진실로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학문이다.

사람들이 육체에 머물러 있으면서
신적인 경건의 삶에 이르도록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요구에 직면해야 한다.
신학은 우리가 단순히 소유하고 있는 지식의 분량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것을 실천하는 방법을 알기 전까지는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학식과 경건은 병행해야 한다

“In vera theologia tantum quisque rite novit quantum vita exprimit,” Bucer to Blaurer, T. Schiess, Briefwechsel der Bruder Ambrosius und Thomas Blaurer (Freiburg, 1908), 1:648; Bucer in Enarratio in Evv. 753: “Vera theologia non est theoretica et speculativa, sed activa et practica est, hoc est vitam vivere deiformem”; ibid., 1:549: “Vera theologia scientia est, pie et beate vivendi. Sine quo multa nosse, et variis de rebus posse disserere, etiam daemonum est”; Ad Romanos, 464: “Theologi veri est fugere argutias et logomachias, res vero ipsas sectari iuxta domini verbum quam simplicissime, omniaque huc referre, ut in fide in promissiones Dei, et studio in iuvandis proximis proficiamus.” In De vi et usu sacri ministerii, Tom Angl., 563: “scientia omnium ut divinissima, ita et difficullima, scientia vivendi Deum cum sis homo.” Ibid., 485: “Iam hac arte vivendi Deum, cum sit natus perditus peccatis homo, nulla omnium est difficilior.”

자료를 대하는 자세

멜랑톤은 교과과정 개혁에 각별한 의지를 가졌었다. 문헌들의 고유한 의미를 찾아가는 수고의 일환으로 헬라어와 히브리어 지식, 신학의 내용에 대한 빠른 개관, 그리고 어휘풀이, 용어색인, 불일치한 견해들 등으로 구성되는 다소 버겁고 학문적인 수업진행 도식을 제시하며 이런 멘트를 남겼다: “우리가 마음으로 소스들을 대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맞보게 되고 그의 계명은 우리에게 명료해질 것이다(cum animos ad fontes contulerimus, CHRISTUM sapere incipiemus, mandatum eius lucidum nobis fiet).” 그리스도 예수의 맛이 경험될 때까지 자료들을 마음으로 대하는 멜랑톤의 자세에서 도전의 거친 물살이 밀려온다. 에라스무스의 신학적 구호였던 Philosophia Christi 기풍이 물씬 느껴진다.

Melanchthon, De corrigendis adolescentiae studiis (1519), 19.

뿌른 라면에 쏟아진 폭소

식사기도 중에 아내의 폭소가 터졌다. 낯설었다.
사실 오늘따라 기도어가 협조하지 않아 꽤나 더듬었다.
더군다나 기도가 식기도의 분량과 길이도 넘어섰다.
허나 폭소의 직접적인 사연은 그게 아니었다.

식탁에서 물기를 잔뜩 머금은 라면의 통통한 표정 때문이다.
아내가 기도중에 실눈을 뜨고 관찰하고 있었나 보다.
사태의 심각성을 급히 감지한 후 1초만에 식기도를 정리했다.
꾸욱 눌러 두었던 폭소를 나는 그때서야 터뜨렸다.

푸하하하 ~~~크크크하

2013년 4월 26일 금요일

신구약의 통일성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믿음으로 화합지 아니했다 (히4:2)

신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전하여 들은 것은 "복음"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복음은 하나요 동일하며 그것을 받는 방식으로 믿음도 동일하다. 신구약의 통일성 문제는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거절되어 왔다. 2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말시온 (Marcion, 85-160)은 성경의 통일성을 파괴한 대표적인 주범으로 교부들의 입방아에 단골처럼 오르내린 인물이다. 서방신학 토대를 다진 터툴리안, 그의 날카로운 눈매에 감지된 "말시온의 고유하고 주요한 작업은 율법과 복음의 분리(Separatio legis et euangelii proprium et principale opus est Marcionis)"였다. 이유는 신구약의 주체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말시온은 보복의 신과 은혜의 신을 대립시켜 성경의 주체를 분리했다.

신구약의 통일성에 대해 주체의 통일성에 있어서는 변론의 목소리를 높였으나 교리의 통일성에 있어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 인물이 13세기에 등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1274), 그는 구약과 신약이 교훈의 판명성을 따라서는(ad manifestationem) 차이를 보이지만 가르침의 본질을 따라서는 (ad substantiam praeceptorum) 신구약이 동일하며 하나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원의 교리에 있어서는 신구약의 차이가 완전과 불완전(perfectum et imperfectum)의 차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의 율법은 자연의 법과 은혜의 법 사이의(inter legem naturae et legem gratiae) 중간적인 단계라고 보았다. 나아가 구약은 예수님의 성부께서 주셨고 신약은 예수님이 저자시다, 혹은 구약은 성부에게 속하였고 신약은 그리스도와 성령에게 속했다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문제의 핵심은 토마스의 인간론 이해에 있었다. 그는 구약의 사람들이 영적인 은혜(gratiam spiritualem)를 통하여 주어지는 덕의 경향(habitum virtutis)을 소유하지 못했으나, 신약의 사람들은 영적인 은혜가 마음에 주입되어(indita cordibus) 완전하게 되었다고 이해했다. 불완전한 인간의 구원은 형벌의 위협과 같은 어떤 외적인 요인(aliqua causa extrinseca)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으나 완전한 인간의 구원은 세례 자체의 능력으로 말미암는(ex virtute ipsius Baptismi) 영적인 은혜를 취득하면 족하다고 하였다. 세례는 구약의 성례와는 달리 그리스도 자신이 재정했기 때문이란 이유를 덧붙인다. 나아가 "신법의 성례 없이는 구원이 없다(sine sacramentis novae legis non est salus)"고도 하였다. 동일한 유형은 아니지만 구원의 효력에 있어서 완전과 불완전 개념으로 신구약의 교리적 통일성에 제동을 건 인물이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도 있었었다.

신구약의 통일성에 등뼈와 같은 지침을 제공한 인물은 크리소스톰 대주교로 그는 신구약의 "차이는 실체에 따라서가 아니라 시간의 경륜에 따른 것이다(Ἡ διὰφορα οὐκ ἐστιν κατα την οὐσιαν ἀλλα την τῶν χρονων ἐναλλαγην)'고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항상 같으시며 그의 말씀도 동일하며 그의 진리에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은 (율법과 복음) 모두에 대해서 공통으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주체의 통일성에 근거하여 율법과 복음의 통일성을 주장했다. 1534년 이후로 칼빈은 구원의 교리가 태초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항상 있을 것이다(fuit a principio, est, & semper erit)는 입장을 고수했다. 갈라디아 주석에서 그는 하나님이 모든 세대에게 동일한 교리를 전하셨고 (eandem omnibus saeculis doctrinam tradidit) 구약의 선배들과 우리는 믿음의 참된 통일성 속에서 (vera fidei unitate) 하나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항상성(Dei constantia)이 두루 빛난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신구약의 통일성은 신구약의 저자가 동일하며 하나라는 주체의 통일성과 구원에 대한 신구약의 교리가 다르지 않다는 교리의 통일성에 근거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내용을 가장 탁월한 필치로 입증하고 있다. 물론 신구약에 차이점이 없지는 않으나 본질적인 것과 경륜적인 것의 우선순위 면에서는 전자의 강조가 필요하다. 신구약을 해석하고 설교할 때에 동일한 저자와 동일한 복음과 동일한 교리와 동일한 믿음을 고려하지 않으면 성경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언어와 문법을 벗기는 인문학적 작업으로 말씀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면 성경의 달인은 똑똑한 사람들의 손아귀에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미세한 입자 수준으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만다. 공시성과 통시성의 조합이라 할 통전성이 보존되는 주석과 설교의 회복은 저자와 교리의 통일성에 근거한 성경의 통일성이 유일한 대안이다.

2013년 4월 25일 목요일

주님의 과격한 어법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마5:29)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재해석 끝자락에 등장하는 처방이다. 실족을 유발한 오른손의 제거도 같은 맥락에서 언급된다. 등골이 오싹하다. 내용의 과격성 탓이기도 하지만,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입법자 자신의 어떠한 사족도 불허하는 최종적인 유권해석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로 인해 교부들도 해석의 골머리를 앓았다.

어거스틴 해석에 의하면, 눈은 관상(contemplatio)을, 손은 행위(actio)를 가리킨다. 다르게는, 눈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듯이 고언을 제공하는 친구도 그렇다는 이해에 기초하여 오른눈은 천상적인 사안에 조언을 제공하는 친구이고 왼눈은 지상적인 일들을 돕는 친구라고 하였다. 또 하나의 해석 가능성은 상실의 두려움이 가장 큰 최상위의 애착을 느끼는 대상이 바로 눈의 의미라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가 가장 소중하고 유가치한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높아서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교훈이 본문의 핵심(in summa)이라 하였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절단도 불사해야 한다는 건 예수님의 본의가 아니고 어법의 과장된 형태(hyperbolice)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주님께서 그런 과장법을 사용하신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에 무제한적 방종(effraeni licentia)를 과도하게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눈과 손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명령을 받들어 수행하는 기관이다. 지각과 행위의 수단들이 우리로 범죄케 한다면, 수단의 제거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수단의 용도를 거머쥐고 있는 우리의 본성을 틈탄 죄를 제거해야 방지되는 사안이다. 이건 원론이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음심과 음행의 예방책은 부부간의 깊은 사랑이 유일하다. 독신의 길을 선호한 바울도 음행의 연고로 남편과 아내를 두라는 해법을 제안했을 정도다. 음심과 음행의 온갖 유혹을 무력하게 만드는 건 부부애다. 타인이 아무리 신사적인 매너를 갖추고 요염한 눈빛을 흘려도 부부애가 깊으면 모두 뻘짓으로 처리된다. 잉꼬커플 주변에는 남의 떡에 군침 흘리는 파리들도 알아서 피해간다. 그렇다고 닭살 수준까지 갈 필요는...으흠!!

주님께서 유독 음행의 문제에 과격한 어법을 구사하신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가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관계가 느슨하면 우리를 끼니로 여기는 유혹의 파리들이 떼거지로 몰려든다. 평소에는 거뜬히 뿌리치던 초등 유혹의 허술한 추잡에도 코뚜레가 잡혀 옴짝달싹 못하고 음행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은 눈이 주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향하고 손이 다른 것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신랑되신 주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다. 가장 소중한 우리의 눈동자라 할지라도 주님과의 밀착을 방해하면 포기해야 할 정도로 놀라운 복이다. 주님과의 단절을 지옥이라 한다면, 당연히 지옥에 던지우지 않으려는 우리의 가장 지혜로운 저항은 주님과의 연합이다. 깊은 신뢰를 구축하고 깊은 묵상을 추구하고 깊은 사랑의 연합을 도모하는 것이 별거 아닌 듯하여도 그게 참으로 위대한 축복이다. 나의 가장 소중한 오른눈을 포기해도 될 만큼...

이런 가치의 성경적 우선순위, 낯설게 느껴진다. 말씀에서 멀어진 상태의 방증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실제로 신체의 물리적인 제거를 해법으로 시행하는 이슬람 방식을 취해서는 아니된다. 칼의 위협이 물리적인 억제력을 발휘할 수는 있겠으나 사람의 영혼을 바꾸지는 못해서다. 음행의 눈과 손을 제거하는 방식은 성령의 검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교회는 경찰력이 사용하지 않는다. 세상 법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법의 입법자와 심판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죄인의 자리인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에 스스로 오르시는 방식이 우리의 지혜요 능력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음탕한 눈과 부끄러운 손이 되셔서 스스로 버리운 바 되신 십자가의 기독교는 정말 무서운 종교다. 그런데 신자도 불신자도 무서운 줄 모른다...그래서 더 무섭다.

수요일 식탁교제

수요일 저녁에는 온 가족이 교회로 향한다.
교회에서 저녁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어떤 '사찰 집사님' 같은 분이 음식을 준비하고
성도들은 조별로 돌아가며 뒷정리를 돕는다.

식비는 '공짜'가 아니다.
음식 준비하신 분에게 기부하는 형식으로 식탁에 참여한다.
물론 기부하는 액수는 대체로 햄버거 하나 비용이다.
없으면 기부하지 않아도 눈칫밥 분위기로 돌변하지 않는다.

수요일 식탁교제 목적은 성도들의 교제다.
그리고 자율적인 기부이기 때문에 사실상 '공짜'도 포함된다.
준비하는 분은 수익의 크기보다 성도들의 소통을 더 기뻐하고
참여하는 분들도 그것을 보고 기부의 손이 자유롭다.

나도 어느덧 수요일을 기다린다.
특정하지 않은 성도와 삼일치의 삶을 나누는 시간이 짜릿하다.
서로를 격려하고 기쁨을 기뻐하고 슬픔을 공유하는 시간,
듣고 말하는 중에 우리는 그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을 느낀다.

밥상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힘써야 할 모이기가 가벼운 발걸음을 움직여서 성사되기 때문이다.
모이기의 성격도, 밥상 앞에서는 가족 느낌이 압권이다.
끼리끼리 뭉치는 현상도 보이지만 다행히도 변죽으로 그친다.

밥상목회 불패의 법칙도 있다는데 그건 과해 보인다...

삼위일체 교리의 배열

멀러 교수님은 PRRD 3권에서 하나님의 일체성과 삼위성 논의의 순서를 지적한다.

1) 부카누스(William Bucanus)는 하나님의 속성을 논하는 서론으로 칼케톤 신조에서 가지고 온 삼위일체 개념을 언급했고,

2) 트렐카티우스(Lucas Trelcatius)는 속성론에 들어가기 전에 삼위일체 교리를 먼저 논하였다.

3) 잔키(Girolamo Zanchius)도 이러한 신학적 논의의 순서가 암시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의 De natura Dei가 삼위일체 교리를 전제하고 있으며 속성론도 삼위일체 및 기독론적 이슈와 관련하여 논하고 있다는 점을 꼬집는다. 나아가 De tribus Elohim이 전집의 배열에 있어서도 De natura Dei를 앞서지만 De natura Dei는 삼위일체 개념을 일반적인 신성과 개별적인 속성 모두를 논하는 근간으로 삼는다고 분석한다.

4) 케커만(Bartholomaeus Keckermann)은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의 삼위성, 개별적인 위격, 신적인 속성, 그리고 성경론 순으로 신학을 전개한다. 케커만의 독특성은 신론을 삼위일체 교리와 하나로 묶었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신학의 원리(principium theologiae)로서 하나의 서문격 낱권으로 통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멀러 교수님은 신학의 교리전개 순서에 있어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 중에 가장 흥미로운 분으로 지목한다. 나도 케커만 신학에서 삼위일체 교리의 선행적 논의의 이유가 궁금하다. 한번 논문으로 다루려고 한다.

PRRD, 3:162-163.

2013년 4월 24일 수요일

말씀과 기도의 쌍방소통

너희는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엡6:18)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계시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것이 기도이다.
우리와 주님의 관계는 계시와 기도의 쌍방소통 관계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성수 교수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나의 모든 사정을,
때로는 나 자신조차 생각하기 두렵고 부끄러운 일을,
때로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오직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아뢰는 것이며,
또한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고
응답하실 것을 기대하는 특별한 형태의 대화인 것입니다."
--- 누가복음 설교 2:13 ---

말씀과 기도는 이렇게 아룀과 응답으로 맞물린 톱니바퀴 관계이다.
말씀도 주야로 묵상하며 '말씀의 일상성'을 고수해야 하겠지만
계시에 버금가는 비중으로 '기도의 무시성'도 존중해야 하겠다.

"무릇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를 통하여 자기를 지탱할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하루하루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도는 마치 살아 숨쉬는 호흡과 같아서 한 순간도 멈출 수 없다는 것."

하나님께 귀 기울이지 않는 기도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말씀은 불안하다.
말씀과 기도는 동일하게 무시로 주야로 동시에 붙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성수 교수님을 만나다

수년전에 김성수 교수님을 처음으로 찾아뵌 건 신학과 목회의 균형점에 대한 고민의 정점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우만교회 철문에는 아무런 장식과 안내문이 없었다. 내부로 들어가도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은 벽들만이 사방에서 무표정한 백색 눈빛으로 낯선 이방인의 출입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데 권사님들 몇 분의 인자한 음파가 고막에 착지하는 순간, 건물은 건물이요 교회는 성도라는 사실이 온 의식을 관통했다. 따뜻했다. 긴장과 어색도 서둘러 무장을 해제했다. 잠시 후 교수님이 오셨고 나는 예배에 참석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끝마치고 교수님과 면담에 들어갔다.

K: 먼 곳에서 이렇게 누추한 곳에 오셨어요?

H: 오늘 예배에서 경험한 그런 은혜가 있는 곳인데, 결코 누추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자를 맞이해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K: 공부하기 힘들지요?

H: 힘들지만 한국에 계신 분들의 섬김과 수고에 비하면 마치 안식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교수님을 찾아뵌 것은 두 가지의 문제를 여쭙고 싶어서 왔습니다.

K: 내가 해답을 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허허허,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H: 첫째는 교수님의 유학에 대한 것입니다. 칼빈과 웨민에서 공부를 하시다가 접으시고 한국으로 돌아오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K: 아, 그거요~~ 허허허, 아주 옛날 일인데...칼빈과 웨민에서 공부를 했었지요. 그런데 거기서는 성경을 다르게 읽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갈등이 생겼지요. 성경을 인문학적 방법으로 저렇게 쪼개고 분석하는 게 전부도 아니고 잘못하면 말씀이 훼손될 수도 있는데...성경을 성경대로 읽고 전체를 조망해야 하는데 그런 안목이 보이지를 않아 아쉬움이 컸었지요.

H: 칼빈이나 웨민이 자유주의 입장도 아니고 비평학에 과도히 골몰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느끼신 거예요?

K: 물론 거기에 계신 분들이 자유주의 입장까지 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배우고 이해한 성경 독법과는 꽤나 달랐어요. 신약과 구약의 저자가 한 분이시고 하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비록 원문에 충실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그런 유기적인 신구약의 해석학적 소통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본질적인 게 취약해 보이니까 그 두 곳에서 학업을 지속할 수가 없었지요.

H: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오신 거로군요.

K: 한국으로 돌아와 김홍전 목사님을 찾아 갔었지요. 이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건데...

H: 궁금해요, 교수님...김홍전 목사님과 상담을 하셨군요?

K: 그런 셈이지요. 그 어르신께 이런저런 이유로 유학을 접고 왔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리고는 독일로 가는 게 좋을까요? 하고 물었어요. 그런데 김홍전 목사님은 약간 시간을 두시더니 고개를 저으시며 아니라고 하셨지요. 그러면서 성경을 원문으로 계속 읽으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게 좋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H: 그런 사연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그럼 교수님이 수업에서 히브리어 성경만 사용하는 것도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정신이 반영된 일종의 해석학적 암시라고 보아도 괜찮나요?

K: 허허허,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닌데 그런 셈이군요.

H: 그런데 교수님은 영미권을 비롯하여 유럽 대륙의 신학에도 조애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K: 많이 읽었지요. 현대의 신학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아는 정도지요. 성경을 바르게 읽는데는 그리 도움을 얻지 못했어요.

H: 저는 유학생활 중인데요.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어떤 자세로 공부해야 할지 제 나름의 가닥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때 한마디 한마디 하시는 말씀에 교수님의 권위가 묵직하게 실려서 말씀이 간단한 듯하여도 학업에 굵직한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귀한 답변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두번째 질문을 여쭈어도 될까요?

K: 도움이 되는가요? 다 지나간 개인적인 얘기인데 멀리서 온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쁘네요. 두번째는 뭔가요?

H: 신학을 공부하는 내내 교회와 신학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신학과 교회의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의 구체적인 실현에 대해서는 그림이 그려지질 않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그런 저의 고민과 궁금증에 어떤 입체적인 답변과 같으셔서 만나뵈면 꼭 여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학교의 강의와 교회의 현장목회 사이에 아름다운 균형점을 찾으시고 선보이신 모델로서 후학들이 많은 도전과 도움을 얻고 있는데요. 교수님은 교수님의 신학과 목회의 균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요? 제가 보기에는 그런 균형의 정점에 서 계신 듯한데요. 교수님은 이런 균현에 만족하고 계신지요?

K: 아하...두번째 질문이 그런 균형에 대한 거로군요. 사실 지금도 찾아가고 있는 중이지요. 많이 헤매고 있습니다. 배율을 여러모로 조정해 보기는 했지만 지금의 상태가 최선의 균형이라 여긴 결과지요. 주님께서 이걸로 기뻐하고 계실까요? 사실 학교에도 충실하지 못하고 교회에도 충실하지 못하니까 아쉬움이 많습니다. 결국 균형의 정점에 서 있지도 않고 만족하고 있는 것도 아닌 셈이네요. 이게 쉽지가 않은 문제예요. 평생 걸릴 과제일 듯하네요. 그래서 지금도 찾아가고 있답니다. 지금 공부하고 계시니까 한번 시도해 보세요.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네요.

H: 하하하...교수님, 저는 그냥 교수님의 균형이 제일 좋습니다. 교수님의 균형을 구현하는 게 저에게는 아득해 보이는 과젠걸요. 오늘 말씀해 주신 한마디 한마디를 고이 간직해서 부끄럽지 않은 후학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께요. 오늘 이렇게 무작정 찾아온 초면의 학도에게 환대와 귀한 교훈을 후하게 배풀어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이게 혹시 필요하지 모르겠다' 하시면서 십여권의 책을 선물로 주시었다. 권별로 저자 싸인까지 챙길 분위기는 아니었다. (지금도 후회가 되지마는 ㅡ.ㅡ) 마음샘 출판사가 간행한 목사님의 성경별 강설 모음집을 싸들고 미국으로 왔다. 국어가 척박한 땅에서는 월척을 낚아올린 희락에 버금가는 우리말 책이었다. 책장을 펼치면 그때의 온화한 교수님 목소리가 활자에서 튀어나올 듯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교수님의 꾸며지지 않은 중심과 대면할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다. 주고받은 언어의 교환보다 한 스승과의 인격적 교류가 주는 유익이 이런 것이구나 라는 교훈의 여운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나처럼 학생의 신분으로 있는 신학생은 모두 각 스승들의 고유한 무장을 전수받기 위해 치열하게 각개전투 들어가면 좋겠다. 사제간의 관계는 정보의 유통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성령께서 각 스승에게 위탁하신 아름답고 고유한 그것을 공유하는 관계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게 중요하고 그 스승의 고유한 비책을 배우는 게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분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늘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한번의 짧은 만남이 그동안의 간접적인 만남을 직접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주변에 이처럼 귀한 스승들이 계셔서 행복하고 감사하다.

무례 퇴치법

상대방이 연고 없이 무례하게 대한다고 흥분하지 마시라
무례의 당사자가 스스로의 잘못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다.
그에게서 즉각적인 사과의 목소리가 출고되지 않는 것은 
대체로 성대의 기능이 체면이나 민망함에 압도되어 있어서다.

일단 무례가 벌어지면 가해자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분위기의 주도권은 의외로 피해자가 거머쥔다.
이때 깔끔한 한판승을 원한다면, 고도의 예를 갖추시라.
가해자를 향한 일말의 사랑과 존경도 회수하지 마시라.

피해자의 반응에 가해자의 신경이 극도로 고조되어 있는 상황,
인간의 진정성이 가장 강력하게 먹혀 드는 절호의 시점이다.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피해자가 겸손의 허리를 숙이고 
존경의 눈빛에 흔들림이 없다면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무례가 없다.

무례와 예의 극명한 교차 속에서 깊은 존경과 신뢰가 빚어진다.
한 사람의 일대기 속에서 그런 기회, 흔하지가 않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의 평형적 정의 구현일랑 접으시라.
1마일 부탁에 10마일을 들어주고 겉옷 요청에 속옷까지 더하시라.

무례 한 토막에 운명을 내맡기는 생의 경박은 결코 연출하지 마시라.
아무리 끈질겨도 세월의 일방성에 떠밀리지 않는 인연은 없어서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듯이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에는 잊혀진다.
일시적인 무례의 멱살을 잡으려고 영원한 것을 놓쳐서는 아니된다.

'죽은 개'를 방불하는 폐족 시무이의 하찮은 무례 속에서도 
하나님께 반응하는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 주님이 짙게 투영된다.
그 상황이 주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갈 호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백성들은 그런 왕이 발산하는 영광의 섬광에 휘감기지 않았을까...

당장 무례자가 변하지 않아도 괜찮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건 아니니까.
기독인의 정체성 사수의 일환이며 하나님의 승인이 떠어지면 되니까다.
모든 자랑은 땅에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온다는 사실도 이에 부합한다.
변화가 없더라도 무례가 더할수록 예가 깊어지는 대처법은 끝까지...

2013년 4월 23일 화요일

가려진 그대로

타인의 마음이 적당히 가려진 것도 복이다.

타인의 의도를 지나치게 알려고도 하지 마시라.
드러나지 않은 의도의 뿌리까지 캐내려고
분석의 시퍼런 날을 예리하게 세우지도 마시라

본성의 가장 은밀한 아랫묵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그리하여 타인의 마지막 속셈까지 까발렸다 하더라도
그것이 고달픈 생을 달래는 열쇠일 수는 없어서다.

혹 언어와 행실 배후를 떠받치는
교묘한 의도의 선명한 윤곽을 정확히 더듬었다 할지라도
어떠한 분량까지 내색해야 하는지가 또 하나의 과제이다.

타인의 마음과 생각과 의도는
두개골과 갈비뼈가 창조의 단계에서 이미 적당한 울타리로
호위하고 있음을 존중하는 게 오히려 상책이다.

서로의 마음과 의도가 적당히 알려지고 적당히 가려져 있음은
인간문맥 속에서의 관계성이 보존되고 그 안에
진리를 심고 가치를 산출하는 신적인 섭리의 일부이다.

귀도 모든 정보의 파장을 감지하진 못하도록 지어졌다.
그냥 지나가는 파장이 걸러지는 파장의 영역보다 넓다.
보여진 만큼 보고 들려진 만큼 듣는 게 우리의 안식이다.

이 모든 일에 주님은 의롭고 선하시고 자비롭다...

망각도 유익이다

망각이 때때로 사람을 살린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라.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고 무뎌진다.
우리에겐 고통과 괴로움과 근심을 지워내는 망각이 주어졌다.

인내는 어느 정도 기억과 망각 사이의 비율과 관계한다.
시간의 한 시점을 과장하고 감정을 몰입하는 건 위험하다.
시간의 흐름이 관점과 반응의 강도를 조절한다.

사람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스스로는 통제되지 않는
끝모른 인간의 죄성으로 침몰한다.
그 심연을 더듬고자 한다면 결국 사망이 만져진다.

망각은 우리의 무모한 죄성에 제동을 건다.
끝장을 보려는 무모한 고집의 결박에서
정신의 느슨한 상태를 마련하는 것이 의외로 망각이다.

망각은 민감도를 조절하는 적당한 마취제다.
그 효력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 유용성도 뛰어나다.
우리의 성정에 삽입된 망각은
우리 하나님의 역설적인 은혜이고 은밀한 섭리이다.

상실에서 얻는 유익이 상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신경이 예민해질 때에 망각보다 더 좋은 자연산 마취제가 있을까나.

긍휼히 여기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5:7)

지혜자는 우리에게 원수라 할지라도 절망하고 자빠졌을 때에 고소해 하거나 통쾌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유는 하나님이 그런 처신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경은 원수들의 흥망성쇠 따위에 준동하는 것 자체를 금하신다. 그들이 망하면 즐겁고 그들이 흥하면 부러움에 빠지거나 배알이 꼬이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서다. 그리고 시간의 한 시점에서 비록 일시적 원수로 여겨진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돌이킬 하나님의 잠재적 백성인 줄은 우리가 알지 못해서다.

상대방의 상태나 조건을 떠나서 우리가 모든 인간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긍휼이다. 긍휼이란 은혜롭고 자비로운 사랑과 용서와 공감의 태도를 일컫는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다. 참으로 불쌍하다. 불쌍함은 인간의 실존이다. 아무리 잘나가고 근사하고 멋있어도 죽음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시야가 좁아서 사람의 종말이 아득한 미래처럼 잘 감지되지 않아 우리는 어떠한 인간이든 필히 맞이하게 될 종말을 고려하지 않고 상대방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분노와 즐거움과 흥분과 부러움이 늘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시야의 단편성 혹은 편협성 때문에 촉발된다. 이는 하나님이 배제된 반응이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립과 갈등은 끝난 듯하여도 곧장 흔적조차 사라지는 '칼로 물배기'와 같아서 일평생 지속된다. 부모와 자녀와의 신경전은 살얼음판 상태의 긴장이 단 하루의 휴전도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주와 직원 사이에도, 지도자와 백성 사이에도, 교수와 학생 사이에도,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도 저마다 속 터지는 사연들로 휴전선을 방불하는 반목과 대립의 차가운 기운이 쉬 제거되지 않는다. 누구나 경험하고 공감하는 인간사의 현실이 그러하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서 빚어지는 현실이다. 언젠가는 죽음이 갈라놓을 관계이다. 있을 때 최대한의 긍휼로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관계의 끈이 튼실하고 만족의 배가 두툼하고 회복의 때가 이르러야 비로소 발동되는 안도의 하품이나 기지개가 아니다. 동정의 몽롱한 느낌도 아니다.

긍휼의 달인이신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셨나? 예수님께 이 땅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죽음으로 한발짝씩 다가가는 가시밭 길이었다. 그런 주님께서 자신의 속성이 어떠함을 설명하고 제자들로 그런 속성에 참여할 것을 기대하며 그러한 신적인 성품에의 참여가 그들에게 최고의 복이라는 확신 속에서 교훈하신 말씀이 바로 팔복이다. 당연히 긍휼도 다른 복들처럼 죽음으로 한발짝씩 접근하는 행보이고 동시에 우리에겐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으로 다가가는 순례이며 땅에서는 주어지지 않는 천상적인 지복의 엄습을 촉구하는 삶의 자세이다.

긍휼은 결코 기독인의 종교적 장신구가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각자의 인격과 행실로 진동해야 할 향기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에게 손해와 억울함을 유발하는 원수들에 대해서도 결코 내동댕이 쳐서는 안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이다. 그의 마음을 품는 게 다른 어떠한 희생보다 중하기에 긍휼을 접어서는 아니된다. 긍휼은 결코 타인의 악행이나 오류나 교만의 옳음을 승인하는 것도 아니고 사태와 상황과 상대의 강함에 비굴한 고개를 숙이는 나약함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승리의 깃발이다.

긍휼은 땅에서의 변동되는 모든 것을 잃더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로운 내음에 온 인격과 생이 휩싸여서 원수들도 그것에 취하게 만들고 그들의 뽀족한 창을 꺾고 살벌한 검을 녹이며 난폭한 전운의 불씨마저 꺼뜨리는 강력이다. 긍휼은 기독인의 가슴에서 한번도 그 박동을 멈추지 말아야 할 주님의 심장이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인간의 실존에 기반한 긍휼, 그런 인간을 향해 긍휼의 길을 목숨까지 희생하며 완주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첨경인 긍휼은 우리에게 취하라고 주님께서 건내시는 복이다. 그 복은 주변에 산적해 있다.

관심의 손만 뻗으면 취할 수 있도록 가장 가까운 배우자를 비롯하여 부모님과 자녀들과 친구들과 이웃들과 원수들에 이르도록 긍휼의 복으로 충만하다. 타인을 긍휼히 여김으로 주님의 향기가 발산될 빼곡한 계기들이 가까운 일상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사실 긍휼은 꼭지가 틀어진 관계성 속에서 각별한 위력을 발휘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긍휼의 출처가 지금도 우리로 진멸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임을 확인한다. 상대방의 존재를 제거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진멸되지 않고 있다는 현재 진행형 팩트를 기억하는 것이다. 

2013년 4월 22일 월요일

칼빈의 로마서 해석학

멜랑히톤, 부써, 불링거 등의 기라성 같은 로마서 주석 대가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독자들의 형편을 고려하고 시간을 배려하고 학문성의 혹시모를 결여도 의식하며 간결성과 용이성 (brevitas et facilitas)의 기치를 내걸되 대가들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는 균형점을 최대한 갖춘 또 하나의 로마서 주석을 출고하며 칼빈이 주석가의 마음가짐 잣대로 삼았던 해석학적 준칙이 있었으니 아래와 같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지속적인 합의(perpetua consensio)에 이르러야 한다는 극도로 바람직한 일을 우리는 이생에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1. 혁신적인 것에 대한 어떠한 욕정에도 선동되지 말 것
    (nulla novandi libidine incitati)

2. 상대방을 깍아내릴 어떠한 욕망에도 충동되지 말 것
    (nulla sugillandi alios cupiditate impulsi)

3. 어떠한 증오에도 격동되지 말 것
    (nullo instigati odio)

4. 어떠한 야망에도 자극되지 말 것
    (nulla ambitione titillati)

5. 유익한 것만을 추구하는 그런 필요에 의해서만 구속될 것
    (sed sola necessitate coacti, nec aliud quaerentes quam prodesse)

6. 가장 고결한 사유에 의해서만 의견차를 허용할 것
    (a superiorum sententiis discedamus)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가 이러한 준칙을 따른다면 경건의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서 방자함의 감소(minus libertatis)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칼빈의 이행칭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알았도다 (행10:35)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iustificatur homo per fidem, 갈2:16)'는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ex operibus iustificatur homo, 약2:25)'는 야고보의 이행칭의 교리가 충돌되는 듯하여 이신칭의 교리의 대표적 주창자인 루터는 야고보의 서신을 지프라기 서신으로 폄하할 정도였다. 칼빈은 바울과 야고보가 이신칭의 교리에 있어서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되 바울은 칭의의 원인으로 믿음을 말하였고 야고보는 칭의의 필연적인 증세로서 행위를 말하였기 때문에 강조점의 차이일 뿐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최근에 이행칭의 교리가 로마 카톨릭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의 종교개혁 선배들도 침묵하지 않고 껴안았던 교리라는 주장이 칼빈 신학교를 방문했다. 낯설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한 행실을 강조한 부분은 수긍할 수 있었으나 그 행위가 칭의에 원인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개신교의 원조들도 덩달아 풍겼다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은 재고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은 지금도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궁금했다. 사도행전 10장에 대한 칼빈의 주석이 핵심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칼빈은 주석에서 이 본문에 근거하여 구원의 원인(causam salutis)을 행위의 공로(operum meritis)에 돌리려는 시도를 경계했다. '의(iustitia)'라는 용어를 가지고 마치 우리가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듯이 주장하는 천박한(frivolum) 오류부터 차단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받으신 고넬료의 구제와 의로운 행위는 성도의 선행(bona sanctorum opera)이며 믿음의 결과(quod neuter potuit consequi nisi fide, Inst. III.ii.32)이지 결코 칭의나 구원의 근원일 수 없다고 진단한다.

물론 칼빈은 야고보서 주석에서 '사람이 믿음만을 가지고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non iustificatur homo sola fide)'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의 믿음은 온전한 의미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말 그대로의 공허한 지식(nuda et inani cognitione Dei)'을 가리킨다. 그리고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iustificatur operibus)'는 말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언급도 행위의 공로가 의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열매로 말미암아 그의 의가 인지되고 승인된다(ex pructibus cognoscitur et approbatur eius iustitia)'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에 자신의 기준을 따라 과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에 맞물려 타인의 행실을 판단할 때에도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무시된다. 이러한 인간의 성향을 잘 아는 칼빈은 우리의 의로움이 하나님 앞에서의 의여야 하며 행실의 의로움도 하나님의 기준에 입각해야 함을 늘 강조했다. 이런 기준을 고수하는 칼빈은 지극히 심오한 경건의 소유자가 행한 최고의 선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익할 것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초지일관 피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야는 모든 열방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와 허무라고 기록한다. 엘리바스 입술로 잘 증거된 것처럼, 욥이 비록 동방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 할지라도 '욥이 의로운들 전능하신 이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그의 행위가 온전한들 전능하신 이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성경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표현조차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받으시는 은혜와 영광의 완곡한 진술로 봄이 타당하지 않을까도 생각한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고 보존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고 간주함이 마땅하다.

2013년 4월 21일 일요일

바르트 수업 후기...

핀스트라 교수님의 바르트 수업이 엊그제 종강했다. 바르트를 읽고 수업에 참여하며 느낀 소감을 돌아가며 나누었다. 나는 두 가지를 언급했다.

1. 바르트가 처하였던 역사적 문맥과 신학적 정황을 존중하며 바르트를 읽어야 한다. 자연신학, 주관주의 신학, 계몽주의 사상, 역사적 상대주의, 2차대전 이후의 문명사적 혼돈이 혼탁하게 버무려진 복합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바르트가 자기 시대의 숙제를 푸는 열쇠를 마련하는 신학적 작업의 본의를 놓치거나 왜곡하기 쉬워서다.

2. 바르트는 교부들과 중세 학자들과 종교개혁 인물들과 종교개혁 이후의 정통주의 인물들의 문헌들을 독파하고 분석하고 활용하되 문자 그대로의 복사판 되풀이가 아니라 주로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견해를 관철하고 투사하는 방식으로 읽었다. 전통에 대한 바르트의 이러한 독법은 '신(neo)'이라는 수식어로 그의 신학적 노선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다.

청강하는 주제에 수업에서 거둔 지적 수확을 보란듯이 거창하게 열거할 수 없어서 두 가지만 말하였고 그것도 첫 문장만 언급할 수밖에 없었으나 출고되지 않은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목젖까지 차올라 있었었다.

3. 바르트의 교부, 중세, 종교개혁, 정통주의 문헌들에 대한 독서의 방대함이 놀라웠다.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의 출처에 해당되는 문헌들을 바르트 이상으로 독파한 분들이 한국이든 외국이든 희귀하기 때문에 바르트 신학의 문제점이 심각하다 할지라도 거기에 무딘 비판의 날을 세우기가 심히 어렵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었다. 물론 아무리 대가라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후대의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선이해와 후평가의 기초적인 예의는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4. 바르트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특별히 성경론, 삼위일체, 예정론에 있어서 그가 처하였던 시대적 환경과의 신학적 상호작용 속에서 역사성의 창살에 갇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수업 중에 제기한 바 있으나 핀스트라 교수님은 그 시대가 부여한 과제에 바르트가 충실했던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는 견해를 밝히셨다. 이에 나는 나를 둘러싼 시대적 환경에의 충실이 개별 신학자의 신학이 맴도는 돌쩌귀가 되어서는 안되며 성경의 중심적인 진리라는 토대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유순한 반론을 제기했다. 이에 대한 교수님의 반박은 신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각 시대의 탁월한 인물들은 다 자기에게 부과된 시대의 숙제를 풀고자 성실하게 임했던 분들이며 그들에 의해서 신학적 전통이 건강하게 이어져 온 것이라고 하시었다. 나는 재반론에 돌입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이렇게 반응하고 싶었다. 신학자의 과제는 자기가 사는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문명과 문화가 변한 미래의 상황에도 여전히 교훈 제공자의 책임이 어깨에 지워져 있기에 자기 시대의 물음에 반응하는 식으로만 신학을 추구하면 영원하고 불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견고히 붙들고 후대에 전수해야 할 말씀 맡은 자들의 도리는 져버리게 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말이다. 내 가족, 내 공동체, 내 민족, 내 국가, 내 시대라는 나 중심적인 신학의 범주를 임의로 설정하는 것은 시대에의 지나친 적응에 어쩌면 유일한 견제의 고삐마저 제거하는 셈이 될 지도 모르겠다. 모든 시대의 문제를 푸는 해법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자기가 처한 시대의 문제도 풀어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다 안전하다. 물론 자기 시대에 촉발된 문제가 보편적 해답 마련의 계기가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5. 바르트는 신학적 호불호를 떠나서 대가임에 분명하다. 바르트의 책은 한번 거머쥐면 독자가 관심의 채널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중독성이 발동한다. 그가 그리는 거대한 그림의 웅장한 체계에 갇히거나 흡수되어 헤어나올 수가 없어진다. 나는 신학적인 면에서 그의 성경론과 삼위일체 및 예정론 때문에 바르트의 제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종교개혁 인물들과 정통주의 인물들의 문헌들을 수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일례로 그의 바젤대학 선배 교수였던 폴라누스 독법에 있어서도 나와 바르트는 해석학적 평행선을 그린다. 물론 각자의 입장을 따라 취하고 버리는 절충적인 태도는 유사하나 그런 태도로 취한 내용과 자기화 방식에 있어서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6. 핀스트라 교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때때로 바르트의 문맥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하고 내린 비판적 견론을 수정하는 일들이 많았다. 전통에서 벗어나고 개혁주의 진영의 눈에 거슬리는 표현 속에서도 바르트가 본래 의도하려 했던 의미를 집요하게 찾으려는 선이해 중심적인 교수님의 태도는 나의 경박한 비판 일변도의 자세에 때때로 재동을 걸었다. 상대방을 먼저 진실하게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본의를 파악한 이후에 자신의 신학적 기호로 보다 객관적인 평가에 들어가는 태도가 한 학기내내 나를 교훈했다. 핀스트라 교수님도 사실 삼위일체, 기독론, 성경론, 예정론에 있어서 바르트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여기신다.

7. 학점(credit)으로 수강하는 학생들의 성실한 발제와 문제제기 및 토론으로 건진 유익과 교훈도 지대했다. 역시 좋은 수업은 참석자 모두가 협렵하여 이루는 선이었다. 논문작성/디펜스 준비에 쫓겼지만 이런 수업을 제공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후기끝!!!

2013년 4월 20일 토요일

John Walton의 고대근동 세미나

오늘은 휘튼의 구약학 교수 John Walton 세미나에 참석했다. 주제는 '고대근동 시각으로 창세기 읽기(Genesis through the ancient eyes)'였다. 내용은 창세기 1, 2장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30분치 강의에 너무도 흥미롭고 기발한 내용들이 많았다. 특별히 아담 이야기가 상징적인 대표성과 역사적인 개별성이 모두 고려되고 있다는 대목에서 수긍의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교수님과 이 대목을 평가하는 중에 이런 입장은 보수적인 측에 속한다고 들었다. 주로 기능적인 견지로 창세기 1, 2장 설명하는 것과 구약에 대한 월튼의 고대근동 시각이 궁금해 졌다. 하여 그분의 책을 2권이나 질렀다. 물론 아내의 선행적인 윤허를 득하여야 한다는 도서구입 기본기에 충실했다.

세미나를 듣고 질의응답 시간에 나눈 짤막한 대화는 다음과 같다.

Paul: 고대근동 시각으로 창세기를 읽는 것은 훌륭한 시도이다. 감사하다. 그러나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전통을 따른다면 창세기도 성경의 다른 부분의 빛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이를 테면, reading of Genesis through the eyes of other canonical scriptures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신약은 구약의 해석이란 전통에도 충실한 입장인데 말이다.

Walton: 창세기에 대해 다른 성경들과 저자들은 당시 자신들의 상황에 맞추어서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선지자들 및 사도들은 창세기 텍스트가 제공하는 문맥적 의미에 충실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도움을 받기는 하겠지만 주된 해석학 접근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Paul: 선지자와 사도 같은 성경 저자들이 이해한 창세기의 의미를 창세기의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보는 게 정당하지 아니한가?

Walton: 정당하지 않다. 창세기 본문에는 나오지만 다른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 창세기에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다른 성경 기록자가 다 커버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의 각권이 가진 동일한 권위를 골고루 존중해야 한다.

주문도서

John Walton, Ancient Near Eastern Thought and the Old Testament: Introducing the Conceptual World of the Hebrew Bible (IVP, 2009)

John Walton, The Lost World of Genesis One: Ancient Cosmology and the Origins Debate (Baker, 2006)

John Walton's Website

2013년 4월 19일 금요일

Love your enemies

Love your enemies (Preacher: Paul Han)
(a sermon delivered in the International Worship Service at Calvin, on April 19, 2013)

Biblical text: Matthew 5:43-44

1) What is the human being? My journey in search of an answer to this question was finalized in the second to the last verse of Ecclesiastes. In the NIV, it is written “Fear God and keep his commandments, for this is the whole duty of man.” But the Hebrew text of this verse tells us something a little bit different but very significant. It can be translated this way: “Fear God and keep his commandments, for this is the whole person or the totality of a human being.” According to this verse, the true original human being is to fear God and keep his commandments.

2) Fearing God or keeping his commandments is not just an activity of humans or their duty. Fearing God, keeping his commandments, refers to who we are. This is our original identity as human beings. I know this is very strange or even absurd, but this is the most biblical definition of a human being. I am not talking about a biological, psychological, sociological, or geneological definition. But I am talking about what the Bible says about who we are as human beings. Now we can say with the Bible that if you do not fear God or if you do not keep his commandments, this means that you stop being human.

3) Our beings have an ontological connection with God’s command. Each of us knows well by faith that the universe was formed at the command of God. The author of Psalm 148 also tells us that all creatures in heaven and on earth were created because the Lord commanded them to be. Let there be light, for example, and there was light. In essence, this is also the way in which human beings were created. The command of God, thus, has an ontological relation to our being.

4) On the flip side, it also has an epistemological connection with our being. If you want to know yourself, the best way is to look at yourself in the mirror of the divine commandment. The divine commandment is the best mirror that provides us with the true knowledge of who we really are, even to its highest degree.

 5) Having this in mind, we need to think all God’s commandments in the Old and the New Testaments can be summarized in the love of God and our neighbors. The new sole commandment of Jesus Christ, in addition, is to love each other, but as he has loved us. Listen to the more nuanced thought of Jesus on the love: “If you love those who love you, what reward will you get?” The true love Jesus newly commanded us to do is toward someone else: our enemies. In this sense, to love our enemies is the highest point of the love commandment in the Old and the New Testaments.

6) To love our enemies is in fact the hardest commandment for us to do. But God’s intention for the divine command is not to bother our lives. According to Moses, the master of the divine command (like Dr. Van Reken), God’s laws were given for our blessings. The essential blessing of the divine commandment is to revael to us first of all who the commander is and at the same time who the receivers really are. Just as Calvin pronounced in the first page of his Institutes that true and solid wisdom consists almost entirely of two parts (the knowledge of God and ourselves), the true teaching of every single divine commandment also consists of the knowledge of God and ourselves.

7) Jesus Christ commands us to love our enemies. This command is the best mirror that provides us with the most gracious and most substantial blessing of knowing most deeply and exactly who the commander Jesus is and who we are. Jesus Christ is the perfect God and perfect Man who loved his enemies even at the sacrifice of his divine glory and precious life. But we were the enemies of Jesus Christ, enemies who did not recognize him, did not receive him, did not give thanks to him, did not glorify him, but rather we persecuted and crucified him to death. We made Jesus suffer and die. Indeed, we were his enemies, but he loved us. In this sense, God is truly love. Without loving our enemies, we could not know the God who is love loving us, just as John the Apostle says that those who do not love do not know God. Let us love our enemies even for ourselves.

8) What is more, love is not different from God’s nature. To love is the life of Jesus, to love is his being, and to love is his nature. This very Jesus commands us to love our enemies as he has done for us. We have to obey the sole command of Jesus Christ by loving not only our friends but more intentionally our enemies. As the totality of God’s commandments, love has a natural and beatific connection with us. To love should be natural to us. To love should be our life. To love should be our being. To love should be our whole person and nature. To love our enemies should be natural to us.

9) As Augustine says, to love loving is a great blessing for us, because by loving we can take part in the divine nature of God. (In this sense, the divine commandment is an invitation to take part in God’s nature, as Peter also implies) To fear God by keeping the ultimate command of loving our enemies as Jesus did must be our life, our whole person, the totality of our beings, our nature taking part in God’s nature, and therefore our greatest blessing.

10) When people see us, moreover, they should see the loving God in us. In short, without loving our enemies, we could not be as we are supposed to be; we could not know God and ourselves; and we could not proclaim Christ to the world (as John wrote in his Gospel). I am convinced that our ontology is being by loving; our epistemology is knowing by loving; and our mission is preaching by loving.

11) I want to share the story of a Korean pastor, Yangwon Son, who showed Korean people what the love of Jesus Christ is. He had six children. The first and the second sons were killed by a young man, when they were preaching the gospel. But the pastor adopted the killer. He loved this enemy as he had loved his two killed sons. The following is the pastor Son’s prayer of thanksgiving to God at the funeral of his two killed sons.

 1. My God, I thank You, for having allowed martyrs to be born in the family of sinners such as mine.
 2. My Lord, I thank You for having entrusted me, out of countless believers, with such precious treasures.
 3. Among my three sons and three daughters, I thank You for my blessings through which I could offer You my two most beautiful children, my oldest and second oldest sons.
 4. I thank You for the martyrdom of two of my children, when the martyrdom of one child in itself is much more precious than I could bear.
 5. I thank You for the martyrdom of my sons who were shot to death while they were preaching the gospel, when dying peacefully on his deathbed in itself is a tremendous blessing for a believer.
 6. I thank You that my heart is at peace as my sons, who had been preparing to go and study in America, are now in a place that is much better than America.
 7. God, I thank You for giving me a heart of love for repentance of the enemy who killed my sons and compelling me to adopt him as my own son.
 8. My Father, I thank you for there will now be countless more sons of heaven through the fruit of the martyrdom of my sons.
 9. I thank and thank Our Lord Jesus Christ, who has given me these eight truths in such a difficult time, the joyful heart seeking faith and love, and the faith that provides me with peace.

God’s love be with your love of your enemies in the name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Amen.

2013년 4월 18일 목요일

순종의 길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는 나를 높이사 (삼상15:30)

이는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려서 버림을 받아 왕이 되지 못한다는 사무엘의 선언 이후의 일이었다. 여호와의 말씀을 어길 때에도 사울의 변명은 궁색했다. 백성이 두려워서 그랬단다. 이에 사무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사울은 어긴 이후에도 하나님이 누구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고 적어도 장로들과 백성 앞에서는 높임을 받게 해 달라고만 매달렸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사울의 꿋꿋한 '일관성'이 돋보인다. 이는 사울의 정신세계 전체가 고스란히 노출된 사건이라 생각된다. 사실 사울의 궁상맞은 애걸에 사무엘은 호응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비록 사울이 백성들의 면전에선 높임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왕이 아니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진술처럼, 하나님을 버림은 인간의 가장 어리석은 행위이고 가장 치명적인 범죄이고 가장 쓰라린 고통이다.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버리심은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진노이며 형벌이다. 이것보다 더 두렵고 떨리는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 이외에 다른 것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은 자의 종말은 이처럼 비참하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 하라'고 당부하신 바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섬기는 자가 일평생 붙들어야 할 말씀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두려워서 그들에게 높임을 받으려는 마음이 우리로 사울의 전철을 밟게 한다.

나는 사울이 버림을 받기 이전에 불순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방식이 다른 무엇보다 섬뜩하다. 그는 사무엘의 호통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제사할 수 있도록 흠없는 양을 진멸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응수했다.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백성을 이롭게 하자는 너무나도 합당한 명분으로 그랬다는 말이겠다. 이와 유사한 버전이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울의 모습은 마태복음 7장에서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않았냐"며 항변하는 많은 분들에게 고스란히 투사된다. 다 주님의 나라 위하자고 그랬는데 예상밖의 문전박대 판결에 분통이 터진다는 얘기겠다.

만약 예수님과 항변자들, 그리고 사무엘과 사울이 지금의 교회에서 끝장토론 벌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수님과 사무엘의 패소 가능성이 농후하다. 배심원의 마음은 항변자와 사울에게 기울어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섬뜩하다. 우리들의 눈에 사울의 행실은 왕직에서 물러나고 하나님께 버림까지 받을 정도로 불법적인 것이 아닌 듯해서다. 오히려 하나님과 백성을 그렇게도 위하는 보기드문 훌륭한 지도자로 보인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 항변하는 이들의 행실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판결보다 '하나님 우편 일급 우등석에 앉으라'는 환대가 합당한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예전에는 도덕과 윤리가 미숙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성경에서 너무도 멀어져 있어서 그런걸까.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에 비해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다.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아무도 없다. 죄의 기운으로 밝아진 우리의 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의 뜻 준행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사실을 견고히 붙드는 것이 성도의 상책이다. 다 이해될리 없겠지만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길이 순종의 길이겠다. 

무서운 등교길

번개와 천둥과 폭우...
이렇게 무서운 등교길은 처음이다.
노아시대 홍수가 저절로 연상될 정도였다.
폭포수와 같은 비에 시야가 가려지고
차량은 거북이 걸음을 유지해야 했다.
비는 은혜보다 진노의 표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2013년 4월 17일 수요일

판단하지 마시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않노니 (고전4:3)

세상에서 바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울 자신이다.
당연히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알지 못하는 타인들의 판단은
바울에게 '작은 일'일 수밖에 없었겠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송곳보다 뾰족한 사도성 관련 구설수의 극복책을
끝장토론, 이단논박, 논리대결 방식에 호소하지 않았다.

나아가 바울은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며,
자신을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 뿐이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이러한 최상의 해법을 취한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주님은 바울을 바울 자신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도 재판권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다.

스스로를 우월한 존재로 높이는 것은 당연히 교만이고
열등한 존재로 비관하는 것은 은밀한 교만이다.
자기비하 역시 교만인 이유는
그런 판단이 자신을 그런 꼴로 지으신 창조자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비록 판단의 내용은 겸손처럼 보이지만
판단의 자리에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범법이고 월권이다.

나를 판단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삶의 태도와 양식이 달라진다.
타인의 판단을 의식하면 타인의 평가에 춤추는 인생을 살아간다.
스스로를 판단의 주체로 여기면 불통의 삶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나 자신을 비롯하여 천지와 만물의 판단자가
오직 그리스도 예수라는 사실을 인격과 삶의 닻으로 여긴다면
인간 문맥에서 이는 우월과 열등이란 교만의 물살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타인도 판단하지 말고 자신도 판단하지 마시라.
타인을 판단하면 정죄나 비교의 올무에 걸려들 것이고
자신을 판단하면 자만이나 비하의 족쇄에 스스로 결박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나 타인이나 판단하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시다.
이런 관점으로 타인을 보면 사랑과 섬김과 권면이 촉발되고
이런 시각으로 자신을 보면 자랑이 십자가 뿐임을 고백하게 된다.

그렇다고 바울의 이러한 판단중지 입장을
자신의 부덕과 악행에 대한 외부의 왈가불가 중지처럼 여기는 분 계시다면
장마가 맨땅을 두들겨서 일으킨 먼지의 분량이 무색할 정도의
회초리 세례가 그에게는 보약일지 모르겠다. 

믿음의 출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칼빈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ἐξουσία)'의 의미가 마치 주님을 영접하고 거절할 능력(facultatem) 혹은 선택의 자유(liberum arbitrium)인 것처럼 생뚱맞은 해석을 도출하는 교황주의 학자들을 일컬어 물에서 불(ignem ex aqua)까지도 끄집어낼 자들이라 비꼬았다. 실제로 온 세상을 지으셨고 온 세상에 계시었던 로고스가 자기 땅에 오셨지만 세상이 그를 알지도 못하였고 영접도 아니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과 영접은 인간의 실력이 아니라는 증거겠다. 같은 맥락에서 믿음과 영접의 가까운 주체가 사람이긴 하지만 혈통이든 육정이든 사람의 뜻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근원적인 뜻에서 비롯된 은혜임을 곧장 밝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우리가 받은 것은 뒤이어 기록된 말씀처럼 은혜와 진리로 이루어진 독생자의 충만한 영광을 따라 받은 것이기에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함이 합당하다. 여기서 두 가지의 결론이 뒤따른다. 첫째, 주님을 믿고 영접한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타인에게 영접의 계기와 수단을 제공한 분들이 어떤 공로나 댓가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기적이다. 땅에서의 시공간적 인과로는 설명되지 않는 단절적인 변화이기 때문이다. 요한의 기록처럼 세상이 주님을 알지도 영접지도 않았기에 믿음이 기대될 수 없는 상황에서 알고 영접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다.

혈통이 믿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아무리 설득하고 강요한다 할지라도 믿음을 생산하진 못한다. 믿는 가정의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의 자동적인 상속자가 되지는 않는다. 믿음의 가정에서 불신자 자녀가 나오기도 하고 목회자의 자녀들 중에서도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허다하다. 이상할 거 없다. 이미 믿음의 조상 집안에서 보란듯이 벌어졌던 일이었다. 즉 에서가 언약의 징표로서 할례를 받았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미워하신 바 되었다. 이는 믿음이 하나님의 뜻으로만 주어지는 천상적인 선물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믿음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혈통을 따라 당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마땅한 은혜이다.

한 가정에 양과 이리가 공존할 가능성과 한 교회에도 양과 이리가 공존할 가능성과 한 신학교 안에서도 양과 이리가 공존할 가능성을 누구도 거부하지 못한다. 알곡과 가라지의 공존, 어쩌면 은혜를 더욱 은혜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장치일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러한 까닭에 너무 지나친 심판자의 행보는 위험하다. 본인이 머리 둘 곳도 없어질 것이지만, 타인들도 주변에 남아날 자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방비 상태의 신학적 무장해제 입장을 두둔할 수는 없다. 주님은 가라지의 개입도 허용을 하셨지만, 확고한 진리의 울타리를 성경의 기록으로 우리에게 제공하신 분도 주님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경의 확고한 진리를 가장 잘 담아낸 시대와 인물과 체계과 적용을 넓은 교회사 속에서 탐색하고 발굴하는 작업은 그래서 필요하다. 결국 깔대기가 역사신학 전공으로 기울었다. 이런~~~ 이건 직업병의 중증인가? 가능성, 농후하다! ^^

2013년 4월 16일 화요일

고백적 통일성 안에서의 신학적 다양성

Theological Diversity in Confessional Unity

멀러 교수님이 즐겨 쓰시는 표현이다. 진리의 고백적 통일성 안에 신학적 다양성의 공존이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특징이란 이야기다. 물론 이것은 다른 모든 시대의 신학에도 해당되는 표현이다. 비록 고백적 울타리의 기준은 디테일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지만 말이다. 일전에 멀러 교수님께 개혁교회 고백의 울타리는 어떤 것이냐고 여쭈었다. 주저하지 않으시고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라고 답하셨다. 반가웠다. 내 개인적인 입장과도 같아서다.

답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멀러 교수님이 루터교회 안에서 신앙의 뼈가 굳으셨고 장로교회 교단에서 안수를 받으시고 목회까지 하셨지만 지금은 미주 개혁교회 교단(CRC)에 몸답고 계시기 때문이다. 당연히 벨직 고백서와 도르트 신조와 하이델 교리문답 중에서 택일하지 않으실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 짐작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웨민 고백서를 지목하신 이유가 궁금했다. 이에 교수님은 개혁교회 고백의 가장 견고하고 규모 있는 체계라는 설명을 붙이셨다. 박사과정 진학결정 직전의 일이라 더더욱 반가웠다.

어떤 중량급 교수님의 집에 초대를 받아 교회의 일치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었다. 역시 일치의 기준점을 어디에 잡고 계신지가 궁금했다. 그분은 사도신경 고백하면 일치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주적 교회라면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의 백성이면 된다는 이야기고 교단이나 교리의 차이가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을 폐하는 게 아니라면 일치의 기준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백성됨의 가시적 확인은 사도신경 고백에 있다는 논리셨다. 고민이 깊어졌다.

고백적 울타리의 기준도 다양하고 각 울타리 내에서의 신학적 입장도 다양하다. 우리는 서로 왕성한 소통을 하다가도 어느 것 하나에 걸리면 곧장 절교로 돌입한다. 절교의 꺼리가 안되어도 심사가 뒤틀리면 교제의 단절이란 마지막 수단을 쉽게 사용한다. 기분이 좀 상하고 소통에 사소한 삐그덕 징조만 보여도 절교의 칼을 급하게 뽑는 건 종교적 경박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진리의 본질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개별적인 성품의 미숙함이 관여하는 듯하다. 진리는 들러리 명분일 뿐이고. 물론 심각한 진리의 문제라면 예외겠다.

고백적 통일성과 신학적 다양성의 조화를 생각하다 나름대로 여문 입장은, 자신을 향해서는 고백의 가장 엄밀한 기준을 적용하고 신학의 날을 가장 예리하게 다듬어야 하겠지만 타인을 향해서는 신학적 원수라 할지라도 용납하고 품고 사랑하고 공존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모든 개인은 서로 동일하지 않다. 생각도 성품도 성향도 습성도 가치관도 관점도 강조점도 다르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변한다면 그건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나긴 하지만 기적에 기대어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먼저 본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본을 보이고 빛을 비추는 소극적인 태도가 불가피해 보인다. 신학이 깊고 높고 넓고 길면 주변이 알아서 진동한다. 타인에게 주장하는 자세는 곤란하다. 오해를 풀어주는 정도의 적극성은 필요하다. 그러나 입장의 차이가 동일해질 때까지 강요하면 결국 교제의 단절로 접어든다. 진리의 본질적인 왜곡과 훼손이 아니라면 신학적 입장의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곰팡이 조금 폈다고 된장단지 통째로 버리는 극단은 경계하면 좋겠다.

자신에게 결정적인 배신의 카드를 사용할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늘 함께 데리고 다니면서 전대관리 직무까지 맡기신 예수님의 의중이 너무도 궁금하다. 고백적 기준의 하하선과 신학적 다양성의 상한선 설정 문제는 더 복잡하게 되었다. 풀어낼 지혜가 목마르다.

2013년 4월 15일 월요일

애통의 복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팔복을 생각하면 낭패감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하나같이 지상에서 실현 불가능할 것 같아서다. 게다가 팔복의 면면을 하나하나 훓어봐도 복과는 무관해 보여서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아마도 천국의 모습을 맛배기로 혹은 훈육 차원에서 귀띔해 주신 것이라며 슬쩍 넘기려고 해도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하였다는 언급에서 곧장 무너진다. 이런저런 사유의 좌충우돌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팔복은 그리스도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한 복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기 위함이다.

팔복에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는 이사야의 진술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심령의 가난, 애통, 온유, 의에의 갈증, 긍휼, 마음의 청결, 화평, 핍박은 지갑을 두툼하게 하고 권력의 수직상승 같은 성공의 비법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복을 기대하던 사람들이 실망의 등짝을 급하게 돌이킬 사안인데 그게 복이란다. 복을 주님과 무관한 나의 유익으로 여긴다면 아무런 쓰잘데기 없는 것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복이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밀착과 연합이 복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애통하는 자는 복되다. 애통은 예수님의 마음을 일컫는다. 특이한 것은 애통의 대상이라 할 목적어가 명시되어 있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으려고 오셨기에, 애통의 대상은 모든 시대와 온 땅에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일 것이라는 추측 말이다. 나아가 우리에겐 하나님의 백성 판별하는 절대적 기준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우리가 애통해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이라 보아야 할 듯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분, 알고도 합당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는 분, 가난하고 연약하고 무지하고 불안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분 모두가 애통의 대상이다. 자신과 타인이 모두 가능하다.

애통하는 자가 복된 이유는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어떤 위로인가? 나 개인의 사태가 잘 풀려서가 아니다. 이사야 40장의 진단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죄사함 때문이다. 이는 마치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시는 것처럼 예수님 같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서 밀려오는 위로이다. 죄사함의 위로는 우리가 예수님의 위로하는 마음을 가지고 죄로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애통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즉 개인적인 환희에 머물지 않고 나와 똑같이 죄의 끈적한 늪에서의 허우적 행보로 생을 탕진하는 다른 분들의 불쌍함이 치유되는 위로까지 포함한다.

이렇게 애통하는 교회가 있다면 세상을 진동시킬 어떠한 혁명이 일어날지 궁금하다. 지금 대체로 잠잠한 것은, 애통의 복을 교회가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겠다. 주님의 귀에는 쟁쟁하게 들리는 썩어짐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의 처절한 신음을 듣는 귀가 우리에게 없는지도 모르겠다. 교회마다 생존이 급급하고 부패 가리기가 분주한데 다른 피조물의 사정까지 챙길 여력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는,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 규정한 복에 헐떡이고 있어서인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교회가 애통하고 있다면, 이는 그 교회가 이미 복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다. 

글쓰기

모 신문사의 편장님과 쪽지 나누다가 퍼뜩 뇌리를 할퀸 글쓰기 방식에 대한 '스침' (표절예방 각주: Jang Yeol Na 목사님 페북 담벼락에 '스침'의 선행적인 용례에서 차용함 ^^) 

미괄식은 글의 핵심 혹은 결론을 미말에 두는 글쓰기 방식이다. 서두에는 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물음을 던져 독자들의 생각과 의식에 초점을 부여한다. 글을 전개하며 독자들이 흐름를 타도록 돕되, 동시에 문헌적 채널고정 차원에서 관심을 돌릴 수 없도록 궁금증과 호기심을 단계별로 적당히 자극하고 마지막에 결정적인 한 방의 답변으로 훅 가게 만들어 전달력과 설득력의 극대화를 꾀하는 방식이다.

두괄식은 서문만 읽어도 글이 논하고자 하는 결론을 알도록 미리 제시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따개를 딴 콜라처럼 김이 빠져서 글맛이 없다느니, 결론을 알아서 독서의 지속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느니 하는 지적이 가능하다. 그러나 장점이 없지는 아니하다. 문제의 핵심과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서 독자로 하여금 소중한 시간을 자유롭게 쓰도록 완독의 여부 결정할 자율적인 판단을 독자에게 돌리는 배려가 두괄식의 묘미이다.

미국식 글쓰기는 대체로 두괄식에 가깝다. 논문이란 지식유통 방식이 대부분의 글에 채택되어 있어서다. 한국도 논문의 경우 이런 추세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기에 무슨 '글쓰기의 식민지성 폐단'까지 운운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거의 전 세계가 이런 패턴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이제는 방식의 차이가 지역이 아니라 장르에 의존한다. 사실 독자는 대체로 필자보다 영리하다. 두괄식과 미괄식을 불문하고 문헌의 엑기스만 골라 읽어내는 독서감이 탁월하다.

글쓰기의 핵심은 역시 진리와 진실이다. 이게 빠지면 모든 게 맹탕이다. 글쓰기에 핵심이나 결론을 적당히 배치하는 '조삼모사' 신공의 지혜로운 구사력도 동시에 필요하다. 그러나 글쓰기의 승부를 방식에 거는 건 회피대상 일순위다. 그렇다고 진리와 진실만 담는다면 개밥그릇 사용도 괜찮다는 언어경시 풍조도 그에 못지않게 피해야 할 극단이다. 모범적인 글쓰기는 최고의 내용을 최상의 언어와 틀에 담아내는 통합적인 작업이다. 목회자의 어깨에는 생산과 전달의 이중적인 책임이 놓여 있다.

나의 글쓰기 방식을 굳이 말한다면, '재멋대로' 방식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다른 분들도 대부분 약간의 편차를 둔 '재멋대로'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 같더라...

동성애를 생각한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응하는 보응을 그 자신에게 받았도다 (롬1:27)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 행하는 것은 성경이 규정하는 명시적 죄이기도 하지만, '저희의 그릇됨에 상응하는 보응'이란 언급에서 지적된 것처럼 하나님의 형벌이요 신적인 진노의 결과라고 봄이 더 타당하다. 이 진노와 형벌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맞바꾸는 인간의 우둔하고 어두운 마음이 그 원인이요 샘이었다. 당연히 동성애 이해의 주안점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그 배후의 원인에 주어져야 하겠다.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결국 조물주가 아니라 피조물을 경배와 섬김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질서의 전복과 혼동대로 그들을 그들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신 결과로서, 짐승들 중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무한한 색정과 성적인 역리가 개인의 고유한 권리라는 주장을 넘어 제도적 보편성과 법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다양한 방편을 동원하는 단계까지 이르도록 내버려 두셨다. 결과인 동성애의 심각성을 알면 원인인 하나님의 영광 박탈의 심각성도 얼추 가늠될 것이다. 

칼빈은 이 본문을 주석하길, 성적인 도착과 동성애는 모든 시대에 존재했던 악(vitia quae quum saeculis omnibus exstiterunt)이며, 짐승적인 정욕에(in beluinas cupiditates) 스스로를 내던지고 나아가 짐승보다 더 하등한(infra bestias) 그런 비속함의 심연으로 추락한 이유가 본성의 총체적인 질서(totum naturae ordinem)의 전복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총체적 질서의 전복은 그 자체로 발생하는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라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발생한 질서의 전복에 상응하는 형벌의 결과로서 수반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동성애가 오늘날의 갑작스런 일인 것처럼 떠들석할 필요 없다. 모든 시대의 일이었다.

게다가 하나님도 버러지와 손쉽게 바꾸는데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정상적인 질서를 뒤집어서 부끄러운 욕심으로 서로를 욕되게 하는 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겠다. 이러한 현상이 고상한 명분을 가지고 법적인 합의라는 형식으로 머리둘 곳을 물색하는 상황에 거부감을 느끼고 보다 근원적인 질서의 전복을 정직하게 성찰하고 돌이키는 계기로 삼으면서 동시에 이러한 상황을 좌시하지 않고 오해와 불이익을 감수하고 목소리를 내시는 분들이 있다는 건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의 소망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교회가 보다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입술로는 존경하나 마음으론 하나님이 아닌 버러지를 방불하는 우상과 맞바꾼 교회가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철저히 회개하는 것이 우선이다. 먼저 우리가 돌이킨 이후에 사랑과 자비를 따라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감되지 않은 진리 그대로를 분명하게 증거해야 하겠다. 즉 각자의 성적 취향과 기호를 따라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여자가 여자와 더불어, 아비가 자녀와 더불어, 어미가 자녀와 더불어, 자녀가 자녀와 더불어, 할아비가 손주와 더불어, 인간이 짐승과 더불어 부끄러운 일 저지르는 것은 하나님과 피조물 전체에 죄짓는 것이라고 말이다. 

바울은 동성애 문제만 꼬집어서 그 사안에 과도한 핏대를 올리지는 않았다. 문제의 해결이 현상 자체의 완화나 변경에 있지 않고,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 할 하나님의 전복된 영광을 회복하는 것에 열쇠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과 자연을 섬기고 돌보는 가장 우선적인 책무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근원적인 질서의 회복에 있다고 생각한다. 불거진 동성애 문제에 대한 일차적인 관심의 눈길은 교회로 향할 수밖에 없다. 교회의 돌이킴이 무엇보다 우선이고 핵심이다. 이는 교회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인다고 여겨서다. 

2013년 4월 14일 일요일

사랑의 인식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요일4:8)

말씀에 의한 세상창조 사실을
믿음으로 안다는 믿음의 인식론은 모두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사랑의 인식론은 낯설고 희귀하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원인으로
사랑을 지목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꼬집는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주장,
믿음의 인식론도 좋지만
사랑의 인식론에 더 이끌리는 건 왜일까.
덩달아 "우리가 사랑을 사랑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cum diligimus caritatem, aliquid diligentem diligimus)"는
어거스틴 언술까지 귀에 달콤하다.

과연 사랑은 지식의 혈관이다.
참된 지식이 사랑 밖에서는 흐르지를 않아서다.
사랑으로 알고 사랑하는 만큼 안다.
어떤 이가 실천하는 사랑의 크기를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분량도 대충 가늠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거인들은
사랑의 거인이지 않은 경우가 없다.

하나님이 사랑이란 사실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멀리서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취득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분리되지 않도록 온전하게 묶는 끈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연합되지 않고
하나님과 연합하지 않으면 지식도 불가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랑이란 하나님의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형제와 원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질은
기껏해야 귀신들도 알고 떠는 정보의 수준이다.
실제로는 그런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자부한다.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가르치는 자를 가르치는 자리에 가지는 말아야 하겠다.
향후 진로를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칼빈 이후의 개혁 신학자들] 폴라누스 신학 결론부...

한국에서 공수된 [칼빈 이후의 개혁 신학자들] 논문 모음집이 오늘에야 도착하여 철문을 두들겼다. 활자와 편집과 제질과 표지, 골고루 마음에 든다. 졸고의 꼬리를 조금 잘라서 옮긴다... 

"종교개혁 시기가 성경의 올바른 증거와 성례의 적법한 집례를 교회의 표지로 규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성도의 지상적 순례를 훼방하던 로마 카톨릭의 신학적 오류와 문화적 인습을 타파하고 개신교가 교회의 진정한 전통을 이어가는 적통임을 입증하고 개신교에 대해 사악한 음모로 말미암은 오해와 거기에 근거한 핍박의 광포함을 고발하고 변증하되 말탄 자와 싸워야 하는 긴박한 ‘전쟁의 때’였다고 한다면,

정통주의 시대는 교회의 정체성과 기본적인 질서가 잡혀 이제는 교리의 고백화와 체계화와 조직화와 교육화를 위해 일반적인 학문 전체와의 통합성 속에서 교회와 학교와 가정과 국가를 비롯한 삶의 전 영역을 성경의 계시된 진리로 정돈하되 핍박과 위협의 수위가 다소 수그러든 보행자와 경주하는 상대적인 ‘평화의 시기’였다. 물론 하나님은 동일하고 진리도 동일하고 믿음도 동일하고 교리도 동일하고 교회도 동일하다.

그러나 시대의 바뀌어진 양상에 걸맞은 형식적 변화의 필요성은 각 영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정통주의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신학의 형식적 변화가 발생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진리의 항상성은 보존되어 왔다는 관점으로 종교개혁 시대와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이해하면 심각한 오해나 왜곡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2013년 4월 13일 토요일

은혜로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눅23:34)

죄사함의 은혜와 인간의 무지가 절묘한 인과로 엮긴 구절이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르는 죄악과 그 심각성을 잘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시는 것이라면
구원의 원인이 인간 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말이겠다.

만물보다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의 실상도 모르고
감추어진 허물과 죄악을 능히 알 자가 없다고 한다면
그런 무지의 상태에서 회개한들 부실한 회개일 수밖에 없겠다.
여전히 죄사함이 인간의 회개에 의존하지 않음을 확인한다.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주님께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저희 죄를 사한다는 구절도
강조점은 자백 자체나 자백의 주체가 아니라
자백하게 하시고 그걸 자백으로 봐 주시는 주님께 있다.

죄도 모르고 회개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시작된 용서와 구원,
혹 회개를 하더라도 인간 스스로가 깨우쳤기 때문이 아니라
먼저 다가와 돌이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거꾸러진 것이기에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또 돌이키기 전까지의 죄에 준하는 형벌은 당하라고 않으시고
부실한 회개조차 의롭다고 여기시는 '불공정한' 주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부요한 지혜와 깊은 지식에 측량불가 입장을 밝힌
바울의 심정에 수긍할 수밖에 없어진다...은혜로다!


폴라누스 장인: 그리네우스

요한 제이콥 그리네우스(Johann Jacob Grynaeus, 1540-1617)는 바젤 출신이고 아만두스 폴라누스 장인이고 신학을 가르쳐 준 스승인데 루터주의 신학에 심취했던 분입니다. 오콜람파디우스와 사이먼 그리네우스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루터의 글을 탐독하고 미코니우스와 슐쩌의 영향을 받으면서 뚜렷한 개혁주의 입장보다 당시 대세였던 루터주의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570년 중엽부터 개혁주의 입장을 보이는데 그 원인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당시 유지였고 쯔빙글리 입장을 두둔했던 에라스투스 신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리네우스의 글을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본인은 어느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깊이 읽으면서 신학적 '회심'을 했다고 하는군요.

그의 신학적 변화는 개인적인 것을 넘어 바젤을 비롯하여 하이델베르크 지역까지 대대적인 개혁신학 확립에 영향을 미칩니다. 무엇보다 바젤에서 단행한 개혁은 대학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마치 제네바를 방불하는 개혁주의 아성로 변합니다. 커리큘럼, 목회자의 신학적 관심사, 성경연구 방법, 전통에 대한 재발견 및 재해석 등등의 굵직한 제도적 신학적 변화들이 그로 말미암아 펼쳐지게 되는데 이에 비하면 폴라누스의 바젤 입성은 이런 분위기에 숟가락을 하나 얹은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신학적 토양의 변화에서 최고의 신학적 열매를 결실한 인물은 폴라누스이지만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리네우스가 칼빈의 강의를 듣지 않았는데 칼빈과 신학적 결을 같이하되 바젤 특유의 개혁주의 신학을 펼친 분입니다. 

논문수정 후유증~~~

오늘 학위논문 수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논문방어 전까지는 수정하지 않는다.

논문을 쓰는 건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배움의 기쁨과 생산의 즐거움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은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샅샅이 뒤지고 드러내고 도려내는 일이다.

그러니 수정은 불쾌와 거북과 고통이 뒤따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다듬고 바꾸는 건 수정이다.

양파껍질 벗기듯 아무리 수정해도 수정의 여지는
여전히 제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내게서는 결코 선하고 온전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불멸의 진리가 뚜렷한 실상으로 경험된다.

무엇이 잘못되고 부실한 것인지를
나 자신의 친숙한 지적 배설물을 재료로 삼았으니 
제대로 배운다는 건 자명하다.

당연히 일자리가 없으면 논문수정 알바로도
살아갈 수 있겠다고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쟝르의 오류와 실수와 부족을 감별할 수 있게 되었다.

암튼, 수정에만 매달렸던 한 주간
결코 버려지는 소모적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졸업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는 생각에 휩싸였던 한 주였다.

2013년 4월 12일 금요일

불편의 유익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나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잠14:4)

소시쩍에 시골에서 소를 키웠었다. 소의 질퍽한 배설물 중앙에 비자발적 족적을 찍은 경험이 한두번에 아니었다. 그런 날은 하루종일 꿀꿀한 기분이 떠나지를 아니했다. 그런데 소는 자신의 배설물을 배로 뭉개고 뒹구는 게 일상이다. 축축한 배설물에 잡다한 동류들이 달라 붙고 적당한 굳기가 오르면 부드러운 갈퀴로 털을 빗으며 '갑옷' 벗겨주는 건 나의 일상이었다. 그런 일상에서 구유의 악취는 약과였다. 그때에는 소가 없었으면 인생이 그렇게 고달프지 않을 것 같았었다. 그러나 당시 소가 집안의 미래라는 건 시골의 상식으로 통하였다.

우리는 나에게 유익하고 편하고 즐거우면 하나님의 뜻이고 손해와 불편과 불쾌를 수반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그분의 자의로 결정되지 못하고 우리의 편이와 기호로 인해 강요된다. 기도는 우리의 전적인 포기이고, 전적인 의존이며, 전적인 항복인데, 실상은 그것들이 주님께 강요되고 있어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것이 나의 뜻이 되도록 씨름하는 자기부인 행위인데,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삼도록 하나님께 관철하는 작업처럼 여겨지고 있다. 때때로 알아 들으실 때까지 절식과 절면도 불사한다.

젊어서의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랬다. 그러나 고생의 진가는 급속하게 확인되는 게 아니어서 청년들은 요리조리 피하는 처세술에 귀가 민감하다. 그런 정보의 유통은 얼마나 급속한지 모른다. 물론 나도 고생 한가닥은 했다고 내밀 명함은 없다. 그러나 고생은 주어질 때 붙들어야 한다는 교훈 정도는 체득했다. 그래서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야고보의 역설이나, 고난을 시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했던 시인의 고백도 낯설지가 않다. 고난으로 얻는 소득이 너무나도 커 고난이 선물처럼 보였었다.

세상의 모든 명서와 명품과 명화와 명곡과 명인의 공통점은 고통의 결과라는 거다. 인생의 표피만 건드리는 것에서는 걸작을 기대하지 못한다. 삶의 심연에 큰 울림을 주는 것들은 대체로 고통의 도가니 속에서 정제되고 숙성된 것들이다. 주님은 인간의 타락한 실상을 영원한 차원까지 벗기시되 성부께서 성자를 버리시는 무한한 심각성을 죽음의 십자가로 보이셨다. 동시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시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기쁨과 희락의 극한도 보이셨다. 이를 위하여 불편하고 억울하고 비참하고 고통스런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부패한 세상에 진리를 심고 가치를 구현하는 일에는 수고와 고통이 수반된다. 쉬웠다면 주님께서 그토록 부당하고 처참한 대우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죄많은 나에게 진리가 새겨지고 생의 의미를 담아내는 과정도 이를 방불한다. 소의 지저분과 악취가 우리의 이맛살을 구길 수는 있겠으나 그넘의 소 잃고 외양간 수리하는 뒷북의 허탈함에 비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불편과 불쾌와 손해와 억울과 곤란을 만나거든 신앙의 뼈가 여무는 호기로 여기시고 쌍수로 맞으시라. 할수만 있다면 이 고난의 잔을 옮겨 달라는 절규가 저절로 나올 만큼 막상 부딪치면 실천이 어려울 것이지만, 그래도 원칙은 끝까지 고수할 작정이다...

2013년 4월 11일 목요일

이타적인 윤택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잠11:25)

성경에는 평서문도 명령문을 방불한다. 사실의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의 우회적인 표현으로 봄이 합당하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가 윤택하여 진다는 건 세상 굴러가는 이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섭리를 완곡하게 표명하신 거다. 본문은 타인을 구제하는 성품의 소유자는 풍요롭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관용이 풍요를 낳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기계적인 인과가 아니라는 얘기다.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을 구제하면 스스로 괜찮다는 자평에 들어간다. 그로 인해 명성도 높아지고 재산도 불어나면 자신이 쌓은 공덕의 정당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단호하게 말하건대, '그거 아니거든~~~'

동일한 현상의 반복적인 관찰에서 우리는 수학적인 공식이나 기계적인 질서를 건져낸다. 사회과학 분야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리 정밀한 현미경 수준의 관찰로도 만물과 역사의 질서가 사물과 사건 자체 안에서는 그 궁극적인 원인이 발견되지 않도록 가리워져 있어서 늘 엉뚱한 대상에게 공로를 돌리는 게 인간의 지적 본성적 한계이다. 그래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일에 경이로울 정도의 민첩합을 보인다. 희생하고 기부하고 행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섬기는 분에게 존경과 칭찬이 이어지는 것은 그분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질서를 조성하고 붙잡으신 결과이다.

자신의 윤택이 타인의 윤택에서 비롯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사회적인 질서이다.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이다. 개인적인 삶의 방식도 동일하다. 즉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타인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라는 일급 계명과도 맥락이 상통한다. 그러나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질서도 모르고 이와는 정반대로 질주하는 세상은 늘 자기를 향하여 명예와 재물과 용모와 지식을 추구하고 축적하고 활용한다. 때때로 타인을 향하는 모양새도 취하는데 그건 노골적인 자기애를 적당히 가리는 방편이요 나아가 자기애의 극대화를 노리는 투자 차원이다. 타인의 윤택 자체를 우선적인 가치로 여기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타인을 칭찬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을 배부르고 풍요롭고 윤택하게 하는 윤리의 방향성이 정착된 가정이나 사회가 진정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다. 또한 주님께서 원하시는 개별적인 생의 모습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생소하다. 타인의 윤택에서 복통이 유발되는 문화가 보다 친숙해서 그렇다. 근본적인 고민과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교회가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기보다 자체의 승승장구 기조로 나간다면 박윤선 목사님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섭리적 질서에 역류하는 불경한 '꼬라지'가 연출되고 말 것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은 고사하고 시커먼 소금뿌림 당하기가 일수겠다. 가까운 곳에서 타인을 윤택하게 하는 연습을 시작하고 땅끝까지 이르면 좋겠다.

정녕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말씀과 전통의 긴장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하느니라 (막7:8)

역사신학 전공자로 교회사에 등장했던 신학전통 중에서 성경에 가장 충실하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높이와 넓이와 길이와 깊이를 가장 풍요롭게 구현하고 담아낸 최고의 신학적 체계와 내용을 물색하기 위해 나는 지금까지 다양한 먹물을 먹으며 이제 조금 몸풀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본격적인 여정을 떠나도 될 티켓을 겨우 장만한 뿌듯함과 유사하다. 그러나 지금도 고민의 아랫목을 차지하며 늘 두려움과 떨림을 무시로 일으키는 주제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전통 사이에서 감지되는 미묘한 긴장이 바로 그것이다.

폴라누스 아제의 교부학을 공부하며 한 수 배웠다고 생각되는 건, 아무리 기라성 같은 믿음의 거인이라 할지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와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제롬, 바질, 그레고리, 크리소스톰, 암브로스, 시릴 등 동서를 종횡무진 오가며 탐독하고 연구하며 교부학의 수맥을 짚어내되 동일한 교부의 동일한 저작 내에서도 늘 성경적 진리의 절대적 기준이란 촘촘한 그물망에 투과되는 것들만 취하려는 신중한 취사선택 자세를 독하게 고수했다.

교부의 명성이 뛰어나고 신학적 선이 굵고 교리적 질량이 묵직한 문헌이라 할지라도 내용이 진리의 성경적 정통성과 범교회적 보편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차가운 냉대를 불사했고 필요에 따라서는 비판의 날 세우기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교회사적 악명이 자자했고 잡다한 사상의 짜집기식 혼합으로 신학적 정체성도 모호했던 인물이나 문헌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진리의 섬광이 한 줄기만 발하여도 동료들의 오해를 의식하지 않고 당당히 그 대목을 인용했다. 나의 눈에는 폴라누스 교부학이 전통의 무분별한 배끼기를 계시 의존적인 사색으로 극복한 사례였다.

개혁주의 신학을 좋아해서 개혁주의 신학의 원숙한 골격 세우기에 탁월했고 고대와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가용한 문헌들을 낱낱이 수색하여 진리의 정통성과 보편성이 도톰하게 오른 교리적 살쩜까지 꼼꼼하게 채운 폴라누스 아제의 신학을 택하였다. 그러나 폴라누스 신학의 판박이 복제는 금물이다. 사람은 추종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의 전통이 자칫 하나님의 말씀을 폐할 수도 있어서다. 그렇다고 기존의 개혁주의 전통과의 차별이 무슨 신학의 혁신적인 대로인 양, 새부대의 새술인 양, 전통의 갈비뼈에 거만한 옆차기를 가하는 것도 동일하게 위험하다. 신학적 긴장감은 여기에서 돈다.

교회는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최소한 다른 '누가 가라사대' 권위로 안심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라는 말이다. 아무리 인품이 뛰어나고 명성이 자자하고 광범위한 공감대를 확보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권위에 의존하는 진리의 확립은 용납되지 않는다. 교부들도, 종교개혁 인물들도,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도 이런 태도를 견지했다. 자신을 따르지 말라고 정색을 하며 거절의 격한 손사래를 친 어거스틴 할배가 대표적인 경우다. 하물며 어거스틴 신학의 신들메도 풀지 못하는 분들이 '나를 따르라'며 부끄러운 줄 모르고 협박에 가까운 독촉의 막대기를 휘두르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겠다.

우리는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지 말아야 한다. 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지 않으면 괜찮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폐할 여지나 빌미도 제공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까지 추구해야 한다. 늘 올바른 길을 가는데도 은큼하게 틈타는 죄의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의 배척이 아니라 좋은 선배들과 좋은 문헌들을 부지런히 탐독하고 소화하되 사람자랑 전통자랑 같은 탐구의 중턱에 주저앉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의 진리가 보일 때까지 완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신앙의 거인 거명하는 것이 즐거운 그 지점의 유혹을 지나가야 한다. 심히 어렵지만 말이다...

2013년 4월 10일 수요일

어거스틴 초상화를 아바타로

어거스틴 마스크를 아바타로 채택했다...얼굴값을 못할 터이지만, '당분간' 이 얼굴로 간다...젊은 어거스틴 그림도 있었지만, 전공 탓인지 비록 연령대는 안맞아도 나이 지긋이 든 15세기 어거스틴 그림에 휠이 끌리었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였고 사보나롤라 영향을 많이 받은 산드로 보티첼리 작품, "연구 중인 어거스틴 (Augustine in his study)." 작가의 의도에 대한 추정에 따르면, 그림에서 히포의 주교는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절박한 연구 중이란다. 텍스트 탐독을 넘어 신령한 지혜의 빛줄기를 갈구하는 어거스틴 특유의 학구열, 그거이 목말라서 선택한 그림이다.


우연성 문제: 어거스틴 및 칼빈

바실은 운명이나 우연이란 말이 이교도적 용어이며 그것이 풍기는 기운에 경건한 사람들이 취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모든 진정한 번영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고 재난과 역경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한다면, 인간사에 운명이나 우연이란 말은 발붙일 곳이 없다는 말이겠다. 어거스틴 역시 인상적인 고백을 남겼다.

"나는 아카데미 학파에 대한 논박에서 이따금씩 운명이란 말 언급한 것을 나 스스로 유감으로 생각한다. 물론 내가 그 말로써 어떤 여신이나 그 용어에 투영되는 다른 것을 가리키려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선한 일이든 악한 일으든 외부적인 사건에 있어서의 우연적인 결과를 지칭하려 한 것 뿐이었다. 운명(fortuna)이란 말에서 우연히(forte), 아마(forsan), 혹시(forsitan), 어쩌면(fortasse), 뜻밖의(fortuito) 같은 말들이 나왔는데 이러한 것들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상요할 수 있는 말들이며 모두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된 것임에 분명하다. 이에 대하여 나는 침묵하지 않고 흔히 운명이라 부르는 것이 은밀한 질서로 말미암아 조정되는 것이며 우연한 사건이란 우리가 그 원인과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실로 그렇게 말하기는 하였어도 나는 이런 식으로 운명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을 후회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주 나쁜 습관에 젖어 있어서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이 뜻하신 것이다'고 할 것을 '이것은 운명의 뜻이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히포의 주교는 만일 무엇이든 운명에 맡겨 버린다면 세계는 목적이 없이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늘상 주장했다. 하나님의 명령 없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발칙한 광기라고 이해했다.

칼빈은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의 아둔한 마음은 하나님의 높은 섭리까지 이르기에 너무도 낮은 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끌어올릴 구별이 필요하다. 나는 만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확실한 분배에 따라 장하여 졌으나 그것들이 우리에겐 우연적인 것이라고 구별을 지으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운명이 세계와 인류를 지배하며 만물을 멋대로 상하로 굴러가게 한다는 그런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리석은 생각은 당연히 기독인의 가슴 속에는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의 질서와 이유와 목적과 필연성은 대부분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감추어져 있고 인간의 생각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의 의지로 발생하는 것인데도 운명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의 성질에 따라 생각되든 우리의 인식이나 판단에 따라 평가되든, 그것들이 겉으로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Calvin, Institutio 1559, I.xvi.8.

2013년 4월 9일 화요일

상보성 원리에 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보성 개념

"서로 돕고 보완한다" 의미를 가진 상보성(complementarity) 원리는 닐스 보어의 빛이나 전자가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가지되 실험하는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긴 하지만 둘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상되는 것이므로 파동성과 입자성이 상호보완 관계에 있다는 물리학적 개념에서 착상된 듯합니다. 이것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적용할 경우, 3가지로 구분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먼저 하나님 자신, 즉 본질을 따라서(secundum substantiam, ad se ipsum)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 위격을 따라 그 자체로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단일하고 동일한 본질의 통일성(unitas) 속에서 분리될 수 없는 동등성(aequalitas)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각 위격의 신성과 영광에 보충될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상보성 개념의 사용은 곤란할 것입니다.

2) 그리고 삼위의 상호관계 즉 관계를 따라서는(secundum relavitum, ad invicem atque ad alterutrum), 비록 낳으심(ingenitus)과 나심(genitus)과 나오심(processio), 혹은 아버지 되심(paternitas), 아들 되심 (filiatio), 내쉬어짐(spiratio)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각 위격의 고유성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나 위격적 존재의 완전성을 돕고 보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도 상보성 개념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아버지 없이는 성자의 신적인 완전성이, 성자 없이는 성부의 신적인 완전성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없이는 성령의 신적인 완전성이 없다는 사색에 기초하여 위격적 상호보완 혹은 보충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도 다소 궁색해 보입니다. 낳으심과 나심과 나오심은 신적인 본성(essentia)의 일이며 신적인 의지(voluntas)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보충이나 보완 개념으로 위격의 존재나 위격적 관계를 풀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3) 끝으로 피조물과 관련된 우연을 따라서 본다면(secundum accidens, Secundum ad creaturam),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될 수 없듯이 분리됨이 없이 일하시는 분입니다(quamuis pater et filius et spiritus sanctus sicut inseparabiles, ita inseparabiliter operentur). 이는 히포의 주교가 범교회적 신앙(fides catholica)으로 이해했고 그러하기 때문에 또한 자신의 신앙(mea fides)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피조물과 관련된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의지의 행위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동시적인 일이되 실체적인 사역(opera essentialia)과 위격적인 사역(opera personalia)이 맞물려 있습니다. 즉 작정과 창조와 섭리는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통적인 일이면서 특정한 위격의 고유한 사역도 결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과 관련된 우연에 있어서도, 상보성 개념보다 우열도 없고 정도도 없고 다소도 없고 대소도 없고 분리도 없고 그렇다고 혼합도 아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동시적 일하심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실체적 사역이든 위격적 사역이든 보완이나 보충이 필요한 부족이나 결핍이 있다는 오해의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신학의 완성과도 같은 일입니다. 이 땅에서는 성령의 명료한 계시를 따라 희미한 지식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신비이기 때문에 다양한 개념을 동원해서 더 많이 더 정확하게 더 깊이 이해하는 노력이 우리의 삶이어야 하겠으나 할수만 있다면 유추의 방식이라 할지라도 성경적 계시의 경계선을 넘어서지 않도록 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상보성 개념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지식과 삶의 원리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계시의 우선성에 우리의 편리와 쾌감까지 복종케 하는 태도도 동일하게 견지해야 할 듯합니다. 

겸손

칼빈은 겸손이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토대라는 것과
신앙의 덕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며
천사를 마귀로 만드는 건 교만이나
사람을 천사로 만드는 건 겸손이라 한
교부들의 생각을 항상 열렬히 (semper vehementer) 곱씹으며
기독교의 교훈을 묻는 이들에게 "항상" 이렇게 답하였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humilitatem)이다."

우리는 본성의 가능성에 대해 (de naturae possibilitate)
무엇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것은 상하였고 부서졌고 뒤틀렸고 망하였다.
그런데도 사람이 자기에게 어떤 덕이 있다고 의식하며
자랑과 교만을 삼가는 것은 겸손이 아니며
겸손 이외에는 자기에게 피난처가 없다고
진심으로 느낄 때에 거기에 비로소 겸손이 있다.

우리 자신은 악에 불과하기 때문에 (non nisi mali)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설 수 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돌린다고 돌린 그것만큼
우리의 복지가 손상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낮음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을 준비이다 (in remedium paratam).

지금 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진정한 겸손에 엎드리기 위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생각을 접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자애와 야심(φιλαυτίας και φιλονεικίας)이란
질병을 버리라고 요구한다.
이 병 때문에 사람들은 시야가 흐려지고
스스로를 과대하게 평가한다.

하여 나는
성경이란 진실한 거울 (veraci scripturae speculo) 속에서
스스로를 바르게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칼빈에게 겸손은 결국 '성경 앞에서의 겸손'이다.
기독교 교훈의 총화를 겸손으로 보되,
성경 전체를 관통해서 보고자 한
칼빈의 계시 의존적인 태도가 참 좋다.
다양한 종류의 겸손들을 상대화할 기준이
성경이란 사실! 다짐하게 하는 사람이다.

Calvin, Institutio 1559, II.ii.11.

되찾은 평정

아그들의 요란한 봄방학이 끝나면서
난 다시 '자유로운' 방콕 평정을 되찾았다.
하여 하루종일 학위논문 수정에 매진한다.

논문을 재검토할 때마다
그동안 들키지 않았던 문법오류 및 오타들의
삐딱한 짝다리 냉소가 실소를 자아낸다.
영어의 멱살을 거머쥐고
엎어치기 들어가고 싶도록 말이지.

아~~~ 편집은 내 적성이 아닌갑다...ㅡ.ㅡ

2013년 4월 8일 월요일

Wolterstorff의 Mighty and Almighty

교회와 국가의 관계, 신적인 권위와 제도적 권위의 관계, 국가권위 한계와 제도적 순종의 근거들을 건드리는 개혁교회 철학의 대부 Nicholas Wolterstorff의 논문 모음집 되시겠다. 여기서 저자는 전통적인 이중통치 개념을 거절하고 로마서 13장의 재해석을 시도한다. 읽어봐야 되겠다. 대단히 재미있는 책 같다. 15년간 자신의 견해를 조금씩 수정해 온 책이다. 특별히 폴리캅과 어거스틴, 칼빈, 본훼퍼, 바르트 이야기가 절묘하게 맞물려 있어 보인다...일독강추!!!

Nicholas Wolterstorff, Mighty and Almighty (Cambridge, 2012)

바빙크의 스코틀랜드 언약신학 이해

링크된 글은 스코틀랜드 청교도 신학에 대한 바빙크의 생각이 담긴 짧은 글로 얼스킨 가문(Erskines)의 설교집 재출판본 서문이다. 바빙크는 자기 시대의 문제로 영혼에 대한 영적 지식의 빈곤을 손꼽았다. 여기서 영적 지식이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놀라운 삶의 현장에서 생동하는 지식을 일컫는다. 그런데 그것이 청교도의 언약신학 및 설교에는 있다고 주장하며, 얼스킨 설교집의 일독을 독자에게 권한다. '죄와 은혜가 무엇인지, 죄책과 용서가 무엇인지, 회개와 중생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실제로는 모르고 있구나'를 자각할 수 있는 양서라는 차원에서 말이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학과 설교는 언약을 예정의 은택들이 수여되는 창구로 간주하기 때문에 인간의 첫상태는 물론이고 구원의 교리 전체를 언약의 관점에서 다룬다고 바빙크는 진단한다. 예정론과 언약의 조화로운 논의를 제공하는 주요 인물들로 사무엘 러더포드, 패트릭 길레스피, 토마스 보스톤 및 얼스킨 가문을 언급한다. 이론적인 지식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회개의 필연성을 강조하되 죄와 은혜, 율법과 복음이란 양극을 오가는 방식으로 개인의 심장과 삶에서 구체적인 열매를 맺도록 이끈단다. 그 결과 설교는 한편으로 마음의 깊은 심연을 파고들어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영적 빈곤과 비참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 무너진 영혼의 가슴에 복음의 부요함을 수혈하고 전방위적 각도에서 그것을 배우고 나아가 그것을 삶의 전 영역에 적용한다. 

스타일은 곰팡이가 피었고 인간적인 재치의 발휘도 빈약하고 아쉬운 주석의 결핍도 눈에 걸리지만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관통하는 중심주제 포섭력의 출중함은 진정 자신의 시대를 부끄럽게 만든다고 바빙크는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택자들 개개인에 대한 것보다 공동체적 언약 개념으로 확장하고 체계를 구축한 것이 스코틀랜드 언약 신학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바빙크의 대륙적인 시각으로 본 영국 섬나라의 언약신학 이해도 좋은 연구주제 같다...^^

Herman Bavinck on Scottish Covenant Theology and Reformed Piety, trans. Henk van den Belt.

Ebenezer Erskine, The Whole Work (1871), volume 1, volume 2, volume 3
Ralph Erskine, The sermons and other practical works (1865)

2013년 4월 7일 일요일

온유와 두려움을 가지고

온유와 두려움을 가지고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하여 그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 (벧전3:15)

강영안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다원주의 시대에 타종교 혹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이 쵝오라고. 온유와 두려움은 복음 증거자가 높이 비상할 수 있는 태도의 필수적인 양날개다. 돼지에게 진주가 어울리지 않듯이 더럽고 추한 그릇은 보다 고급하고 중요한 것을 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으로 '은혜롭고 감동적인 말씀'을 도덕성이 세상의 평균치에 이르지도 못하는 설교자의 입에서 출고되는 기현상을 목격한다. 당나귀의 입도 빌리시고 상황에 따라서는 돌들을 통해서도 찬양의 음률을 생산해 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해명을 시도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의 뒤틀린 기호와 귀에 달콤한 설교가 손잡은 남루한 흥정의 결과라고.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의 백성들을 통하여 모독을 당한다는 사실을 때때로 언급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능력과 지혜와 자비가 그의 백성들과 무관하지 않아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라고 하시었다. 이는 지금도 오늘을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 즉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든지 멸시와 조롱을 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핵심은 그의 백성된 우리로 말미암아 모독을 당하시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언약은 분명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증거지만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죄를 본성으로 가진 추하고 부패한 인간과 자신을 끊어질 수 없는 '운명'의 끈으로 묶으신 일이었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산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이유 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때문에 거룩하고 온전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여정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저자시고 친히 증거하는 분이시다. 성경의 객관적인 진리와 더불어 예레미야 및 에스겔 선지자의 기록처럼 우리의 마음과 영에 새기신 동일한 주관적인 진리가 있다. 하여 진리를 맡은 자들에겐 성경의 객관성에 이를 것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그리스도 닮기가 요구된다. 이는 베드로가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에 관하여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의 방식을 따르라고 한 맥락이다.

소망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리스도 예수를 준비하는 것은 강제와 강요의 주먹이 아니라 주님의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과 경박함이 아니라 사안의 위중함에 적합한 경외의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사회가 기독교를 조롱하는 것은 그 진리가 아니라 증거자의 됨됨이와 행실이다. 예수님이 미워서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영광이다. 면류관과 같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못나서 주님이 욕을 당하시는 상황이다. 예수님은 좋은데 그를 따르는 자들은 싫다는 형국이다. 너희의 주님과 너희는 왜 그렇게 다르냐는 조롱과 비난이다. 이를 두고 골리앗의 할례받지 않은 방자함을 운운하며 다윗의 짱돌을 던져야 한다고 격정을 토하는 것은 수치의 기본기도 모르는 처신이다. 문제의 근원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야 하고 십자가 위에서 사선을 넘듯이 두렵고 떨림으로 복음 증거자가 되는 게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진리의 엄밀성을 추구하는 자일수록 고차원의 온유와 경외가 요구된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학을 공부하고 알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그릇이 되어 쓰임을 받으시라. 과격하고 거칠고 무례하고 교만하고 경박한 찌끼와 흠결부터 제하시라.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었다. 예수님과 같이 되지 않으면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전하지도 못한다.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으로 무장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침묵이 하나님의 나라 확정에 협조하는 일이겠다. 하여 두렵고 떨린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진리를 혼탁하게 하는 흙탕물의 주범이 될까봐서 그렇다. 신학의 물 좀 마셨다고 목이 곧고 어깨가 뻣뻣해 진다면 정상이 아니다. 진리가 깊을수록, 그 맛을 알수록 더 온유하고 더 겸손하고 더 떨려야 마땅하다. 

2013년 4월 6일 토요일

아이들의 구원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분들의 구원과 어린이 및 치매환자 등의 구원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분명한 것부터 짚어 나가자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이야기해. 믿음이 없이는 의인도 되지 못하고 의인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란 사실에서 우리는 믿음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주시는 건지가 궁금할 거야.

성경은 사람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어떤 이는 긍휼의 그릇으로 어떤 이는 진노의 그릇으로 된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어. 나아가 믿음의 선물을 받을 긍휼의 그릇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정하심은 사람의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것이라고 그래.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것도 없다는 이야기지.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일이야.

창세전에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이루어진 선택에 뿌리를 둔 구원의 구체적인 서정은 부르심을 시작으로 믿음과 회개로 구성된 회심이 있고 거룩한 삶이 있고 죽음과 더불어 영화로 종결되는 가시적 과정들이 이어져.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서정이 반드시 가시적인 형태로 밝히 나타나는 것인가를 물어야 해. 의사표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구원에서 원천배제 되는 것이냐는 물음이지. 또 하나는 의사표시 이전의 문제로서 사리판단 능력이 없는 경우도 생각해야 해.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래. 땅의 어떠한 조건에도 구원의 여부가 좌우되지 않는다는 거야. 의사표시 및 사리분별 능력의 부재가 구원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입장이지. 가시적인 의사표시 못해도 믿음을 가질 수는 있겠고, 사리분별 능력이 없고 언어의 뼈도 여물지 않은 어린아이 혹은 금치산자 경우에도 택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다고 의사표시 및 사리분별 능력이 없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건 아니야.

구원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자신만이 아신다고 생각해. 비록 인간적인 관찰의 가시적인 그물망에 걸리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 앞에서만 식별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거든. 마치 엘리야가 당대의 최고 선지자요 믿음의 거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는 7천의 무릎꿇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지 못했듯이 말이야. 이런 이유로, 믿음의 선배들은 가시적인 교회 안에도 이리가 있고 가시적인 교회 밖에도 하나님의 양이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지.

구원은 행위능력, 의사표시 능력, 사리분별 능력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는 거. 그게 핵심이야...구원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시공간 속에서의 피조물 혹은 우연적 일들에 의존하지 않고 예정에 의존하고 있는다는 거.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이 실현되는 구원의 서정이 반드시 우리의 눈으로 관찰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 우리의 관찰 밖에서도 구원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거 말이야. 그러면 마치 구원이 우리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듯하여 불쾌한 분들도 있겠지만.

성경에 분명히 명시된 하나님의 예정이 언뜻 보기에는 불편해도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 그리고 우리의 겸손과 확신과 감사와 기쁨과 평강의 소스인 것 같애...비록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난 하나님의 예정이 무쟈게 좋아

2013년 4월 4일 목요일

검술사의 훈련

성경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 (엡6:17)

성도가 이 땅에서 전투하기 위해 취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 유일한 공격용 무장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를 열등한 무장으로 본다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보아서는 아니된다. 어느 것 하나라도 허술하게 대비할 수 없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총체적인 무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무장방식 취하는 이유는 싸우는 상대방이 혈과 육에 속하지 않은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함이다. 당연히 보이지도 않고 정체성도 뚜렷하지 않고 어디에 복병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방식으로 공격할지 모르는 대상과의 씨름은 하나님의 전신갑주 없이는 백전백패 결과가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특성에 있어서는 나머지가 타인에 대해 수동적인 무장이라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무장이다. 공격수가 되려면 말씀의 검술사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말씀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하여 관절과 골수는 물론이고 영과 혼까지 찔러 쪼갠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상식이다. 말씀의 이런 속성은 우리가 영혼의 차원까지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뇌과학과 유전공학 및 심리학과 의학이 인간을 해부하는 깊이와는 차원이 다른 비밀이 말씀으로 벗겨지기 때문에 과학자나 의학자나 심리학자 이상의 배움과 단련이 필요하다. 사람잡는 선무당의 심각성을 넘어 어설픈 성령의 검술사는 사람을 잡더라도 가장 치명적인 피해의 원흉이 될 소지가 얼마든지 있어서다.

당연히 하나님의 공격용 전신갑주 취하려면 지극히 국부적인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겠다. 사도들이 합의한 것처럼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되 전인격과 삶 전체를 동원해야 하고 일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 무장이다. 말씀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성령의 검 소지자는 하나님의 속성이 발휘될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지 않고서는 오히려 검을 반납하는 것이 좌우에 선 예리한 날에서 자신과 타인을 보호하는 길일 것이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형상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 한다면 바울이 그 마음을 본 받으라고 한 온유와 겸손은 성령의 검 다루는 자의 기본기일 수밖에 없다. 그런 주님의 성품을 가지고 타인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거룩함과 화목함을 좇아야 하겠다.

무장을 온전히 이루어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늘 넘어질 가능성이 다분한 피조물의 한계와 연약함을 의식해야 하겠고, 완전히 엎드려져 넘어진 듯한 순간에도 검술사가 마땅히 거쳐야 할 생의 과정이요 훈련이요 준비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인내로써 이겨내야 할 것이다. 군사는 사사로운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이는 가정에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나 책임을 방기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에 얽매이지 않을 정도로 가정을 잘 다스릴 만큼 단련하고 성숙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한다는 부름의 목적도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해서는 심기를 구기고 인상을 찡그리게 만들어도 된다는 식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 반대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라도 더불어 화목하기 때문이다.

선민사상, 특권의식, 우월주의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검술사의 목덜미를 조이고 무장해제 시키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지극히 인간적인 흉물들도 경계의 일급 대상이다. 지극히 고결하고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명을 수행하는 자가 그에 걸맞은 무장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 겸손과 온유와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지 않고서는 역으로 마귀의 손에 놀아나는 가장 비참한 노리개요 교회에 가장 치명적인 복병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 했던 조언처럼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거룩에 대하여 꼼꼼한 전인격적 연단이 필요한 이유겠다. 무엇보다 신학교가 이런 군사의 훈련소 역할에 충실해야 하겠지만, 학교 울타리에 제한되지 않는다. 졸업장 받았다고 종결되는 훈련과 준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의 검이 칼집에만 꽂혀 있는 검술사가 되지는 말아야 하겠는데...

칼빈 이후의 개혁 신학자들

개혁주의 신학총서 7권이 나왔네요.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 9명을 다루었고 저는 아만두스 폴라누스 신학을 맡았는데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옥고들 틈에 졸고를 끼워주신 황대우 교수님과 이상규 원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종교개혁 인물들의 뒤를 이어간 16-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을 인물별 전공자가 한 분씩 맡아서 책으로 묶어내는 시도는 처음인 듯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기원과 형성과 완성에 대한 연구가 한국 신학계에 새롭게 수혈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른 필자들은 아직 책을 입수하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군요.

<칼빈이후 개혁신학자들>

 1. 다네우스 (Lambert Daneaus, 1530-1595)
 2. 샹디외 (Antoine de la Roche Chandieu, 1534-1591)
 3. 퍼킨스 (William Perkins, 1558-1602)
 4. 폴라누스 (Amandus Polanus von Polandorf, 1561-1610) - 한병수
 5. 고마루스 (Franciscus Gomarus, 1563-1641)
 6. 에임스 (William Ames, 1576-1633)
 7. 푸티우스 (Gisbert Voetius, 1589-1676)
 8. 코케이우스 (Johannes Cocceius, 1603-1669)
 9. 튜레틴 (Francis Turretin, 1623-1687)

개혁주의 신학총서 7권: 칼빈 이후의 개혁 신학자들 (개혁주의학술원, 2013)

2013년 4월 3일 수요일

값없는 복음을 값없이 전하라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고전9:18)

이 구절은 복음의 내용과 복음증거 방식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의 마침표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최고의 선(summum bonum)이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이다. 그 복음은 만세 전부터 어떠한 조건도 고려하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서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신 은혜의 깊은 원인을 포함하며, 이 모든 일들을 시작하고 이루시는 하나님 자신이란 궁극적인 근원까지 포함한다. 사람의 어떠한 공로도 끼어들지 못한다. 복음은 값없는 속성을 가졌는데 이는 우리가 복음을 알지도 못했고 필요성도 몰랐고 구하지도 않았는데 주어졌기 때문이며, 복음이 인간의 값으로는 가늠할 수 없어서며, 또한 인간이 복음의 값을 지불한 적도 없어서다. 그래서 복음이다. 바울은 그런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자신의 권한도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말한다. 복음의 본질과 생의 원리가 무관하지 않아서다. 복음과 삶의 이러한 관계성은 주님께서 이미 본 보이신 것이었다. 1세기의 이스라엘 땅에서 주님의 등장은 오늘 같았으면 해외토픽 중에서도 일평생 일순위를 빼앗기지 않으셨을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물위를 걸으시고 앉은뱅이 일어서고 맹인이 세상을 보고 한센병자 정화되고 망자가 살아나고 태양이 빛까지 상실하고 무덤조차 입을 다물지 못하는 초유의 사건들이 주님의 움직임을 뒤따랐다. 주님께서 거하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용신할 수 없도록 인산인해 분위기를 연출했고, 주님의 만져주심 바라며 어린 아이들을 데려오매 제자들이 꾸짖는 걸 보시고 제자들을 꾸짖으실 정도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해야 할 정도였고, 옷자락 정도의 접촉조차 목막라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삭개오는 나무위의 구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집회마다 특별석과 우등석과 일반석을 구별하여 입장료만 챙겼어도 천문학적 액수의 소득을 거두었을 것이지만, 주님은 '그딴짓' 안하셨다. '누구든지 목이 마르다면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처세술 제로의 '미련한' 태도를 굽히지 않으셨다. 당연히 전대를 맡은 유다의 인상이 찌푸려질 일이겠다. 실제로 향유옥합 깨뜨려 물자를 허비한 여인에게 기회를 타서 터져나온 불평과 원성으로 그의 심기가 드러났다. 그때 주님은 자신의 '제자'보다 여인을 편들었을 정도로 세상의 경제관과 완전히 이질적인 관점을 보이셨다. 복음 때문이다. 복음이 복음으로 증거되기 위해 복음처럼 사시고자 하신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고 예수님의 삶은 방식이다. 바울은 그런 인생의 원리를 붙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로잡힌 것'이라고 해야겠다. 그리스도 안에 갇힌 복음의 일꾼이 어떠함을 주님께서 보이셨고 바울이 뒤따랐다.

프로그램 하나가 센세이션 일으키면 단가가 올라간다. 참가비도 비싸지고 관련 서적들도 베스트로 등극되고 강사들의 몸값도 올라간다. 당연히 집필에 뛰어들고 무대를 휘젓는 강사가 되어 한 몫 잡으려는 종교적 졸부들이 벌떼처럼 몰려드는 가관이 삽시간에 펼쳐진다. 성공이나 출세비법 들으려고 매달리는 목회자도 문제지만, 그런 인간의 유약한 심성을 이용하여 돈벌이의 방편을 고안하고 유포하는 인간들의 문제는 더더욱 심각하다. 사람이 아무리 복음의 심오한 경지를 깨닫고 현장에 구현했다 한들 예수님의 완전한 신지식과 무흠한 삶을 능가하는 자가 누구인가? 주님께서 이 땅에서 값없는 복음이 되시면서 복음을 복음답게 값없이 증거하신 모범을 보여 주셨다면 그보다 당연히 하등한 수준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찌 땅에서의 댓가와 거래하는 복음 훼방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바울을 주께서 귀하게 사용하신 이유는 분명하다. 값없는 복음을 값없이 전해서다.

성공의 첩경이요 출세의 지름길인 줄 알고 목회자의 길에 뛰어드는 분들이 많다. 동기의 뽀얀 속살을 현미경 눈동자로 관찰하면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혹 시작이야 그렇다 할지라도 목회자가 된다는 건 땅에서의 어떠한 보상에도 헐떡이지 않고 그것에 좌우되는 일도 없이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지고한 상급임을 인해 만족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를 일컫는다. 이런 언사를 겁없이 내뱉는 이유는 내가 그런 자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연약한 나 자신의 높은 부패 가능성을 알아서다. 내 입술에서 나온 타자화된 언술이 나를 노려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제어법이 없어서다. 복음의 값없는 본질에 걸맞은 값없는 방식으로 복음의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들~~~

2013년 4월 2일 화요일

죽음으로 부활을 추구하는 신앙

어떻게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게 된다면 (빌3:11)

이는 바울이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고 싶은 이유다. 주님은 부활의 첫열매다. 승천은 이전에도 있었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던 에녹과 불수레에 올라 회리바람 타고 승천한 엘리야가 대표적인 경우겠다. 바리새파 내에 당시의 최고 학풍이라 할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고 초고속 과정으로 제도권에 입문한 바울이 생의 종말을 죽음이 아닌 방식으로 맞이한 믿음의 두 거인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국권도 상실하고 민족의 정체성도 분해되어 현실보다 이상에 눈길이 쏠리는 상황에서 모두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시점인데, 불가피한 죽음이 아니라 자발적인 죽음의 길을 가겠단다.

진실로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거부하고 어떠한 대가나 희생이 요구된다 할지라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어하는 죽음을 오히려 쌍수로 맞이하는 '거북한' 판단과 삶을 고집했다. 범인들의 눈에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고 생각되는 대목이다. 바울의 이유는 한 가지다.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고난과 죽음 가운데서 이르신 그의 부활에 동참하고 싶어한다. 뭔가에 심각하게 중독되고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를 결박하고 사로잡은 주체는 세상의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 예수시다. 바울의 삶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경주였다. 이런 종류의 삶도 있다니!

바울이 밥먹듯이 내뱉았던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은 그의 인생관이 실린 고백이다. 그 고백의 문맥을 둘러싼 부활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의 그리스도 때문이다. 세상에는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카피하고 싶은 인생의 괜찮은 범례들이 적지 않다. 심오한 지혜와 광범위한 박식과 민첩한 처세술과 고매한 품격과 다복한 가정과 존경받는 리더십의 소유자가 얼마든지 찾아진다. 그런데도 그리스도 예수만을 알고 자랑하고 본받기로 작정했다. 게다가 그분의 멋지고 화려한 측면에 필이 박혀서 곱고 흠모할 만한 것들을 추구한 게 아니다.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도 등돌리고 거부하고 저주까지 했던 그런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에서 그 의미마저 좌우로 매달린 강도들의 동류처럼 간주되는 십자가의 죽음, 그걸 추구했다.

부활의 길과 죽음의 길은 동전의 양면이다. 공존한다. 취사선택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죽음의 고난이 없는 부활의 영광은 존재하지 않아서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라는 바울의 천국 후사관은 죽음과 부활 원리의 다른 표현이다. 각자에게 당한 고난의 경주가 있다. 시대마다 교회에 부과된 멍에와 고난의 짐이 있다. 주님께서 맡겨두신 것이다. 영광의 예고편일 뿐이다. 피하거나 거부하지 마시라. 주님은 쉽고 가볍다고 말씀한다. 그분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계셔서다. 바울이 부활의 영광 때문에 시작하여 중단할 수 없었던 십자가의 길은 쉽고 가벼웠다. 물리적인 어려움과 무거움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바울의 고난은 상상을 불허한다.

그러나 주님과의 동행 때문에 쉽고 가벼웠다. 우리에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생의 원리이다. 이런 원리가 삶의 체계로 굳어지면 좋겠다. 교회와 신학교에 수혈되면 좋겠다. 세상의 헤게모니 다툼이 명함도 못내밀 수준의 지저분한 정치와 부끄러운 거래가 죽음과 부활의 원리 앞에서 일곱길로 도망가면 좋겠다. 부활의 영광 때문에 죽음의 길을 기필코 가고야 말겠다는 바울의 각오와 판단이 목회자와 교수의 심장에서 격하게 박동하면 좋겠다. 죽음을 불쾌한 것으로 느끼고 있다면, 아직도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념할 의사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활은 연중행사 '부활절'의 당일치기 기념일 주제가 아니라 바울처럼 날마다 현장에 구현해서 기념해야 할 삶이다. 종교개혁 선배들이 절기 준행하는 것을 이교도적 행습으로 여겨 거절했던 결연한 정신의 회복이 목마른 아침이다...

2013년 4월 1일 월요일

그리스도 지옥강하

어느 페친이 질문을 주셨다: '주님께서 지옥으로 가셨다는 것의 교부적 해석과 베드로의 언급에 대한 해석에 관해 자세한 설명 부탁 드립니다.' 하여 다소 신학적인 이야기를 조금 길게 적는다. 관심자 외에는 스킵해도 되시겠다.

주님께서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descent into hell, descensus Christi ad inferos)는 말은 사도신경 영어판에 포함되어 있고 미국의 교회 대부분은 예배시에 그것을 읽습니다. 아들에게 익숙한 단어라 대화할 때 그냥 있는 그대로의 용어를 썼습니다. 이것의 의미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를 않아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는 것은 대체로 교부들의 보편적인 용어였던 것 같습니다. Polycarp, Justin Martyr, Origen, Hermas, Irenaeus, Cyprian, Tertullain, Hippolytus, Clement of Alexandria, Athanasius, Ambrose, Augustine 같은 분들의 글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최초의 언급은 2세기 초의 이그나티우스 서신에서 나타난 것이구요. Hell의 개념에 대해서는 Hades, Inferna, Netherworld, Grave, Suffering and Death 등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Hades는 신약에서 주로 망자의 영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망자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택자와 유기자를 모두 가리키는 것인지, 택자만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유기자만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다양해요. 대부분의 교부들은 예수님이 하데스로 강하하실 때에 그곳에는 구약의 의인들이 머물러 있었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로 요세푸스 경우,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데스가 의인과 불의한 사람이 함께 거하는 곳이라고 말하면서 본인은 하데스는 악인이 가는 곳이며 의인은 천국으로 곧장 간다는 입장을 펼칩니다. 필로는 다소 헬라화된 변경을 가하지만 대체로는 요세푸스 입장에 숟가락을 얹습니다. 랍비 문헌들 내에서도 크게 위의 두 입장으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데스를 게헨나(Gehenna)와 예리하게 구분하여 하데스는 죽은 망자들을 받았다가 생명과 심판의 부활 이후에는 게헨나로 바뀐다고 말합니다. 성경 안에서도 하데스를 모든 영혼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언급들(눅16:23, 26; 행2:27, 31; 시16:8-11)과 거기는 불의한 영혼만이 가는 곳이며 의인들의 경우는 다르게 표현되는 구절들(계20:13f; 눅16:9, 23:43; 고후5:8; 빌1:23; 히12:22)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해들과 맞물려 주님께서 지옥으로 강하하여 복음을 증거하신 것과 관련하여 이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떤 유익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1) 주님의 구속적인 행위가 구약의 족장들과 선지자들 등에게 제한됨 (Ignatius, Irenaeus, Tertullian), 2) 홍수 이전의 의로운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 (Clement of Alexandria 외에 Alexandrian theologians, Origen), 3) 대단히 악한 자 이외에는 모든 자들을 구원한다 (Melito, Gregory of Nazianzus, Ephraem) 등 교부들 사이에도 입장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Cyril of Alexandria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옥에 강하하여 성도를 삼키는 모든 하데스를 멸하셨고, 죽음의 만족할 줄 모르는 심연을 비웠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사단으로 절망에 처하게 만들고 마셨다는 얘깁니다. 루터주의 입장은 시릴의 재판인 셈입니다.

중세에는 이 문제가 천국, 지옥, 연옥, 족장들의 림보 (limbus patrum) 및 세례받지 않은 아이들의 림보와 하데스의 중간상태 사상이 서로 복잡하게 섞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경우, 그리스도 지옥강하 의미를 공간적인 이동이 아니라 영적인 효력으로 보면서 주님은 지하세계 가셨으나 불신자의 회심이 아니라 그들을 불신과 사악에 대해 부끄럽게 하시려고 가셨다고 말합니다. 의롭고 거룩한 족장들의 영혼은 주님의 강하로 원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게 되지만요. 아이들의 림보에 있는 영혼들은 또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루터는 전 그리스도(Totus Christus), 신이요 인간(Deus-Homo)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옥으로 가셨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가셔서 지옥을 파멸하고 사단을 결박하여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진정한 승리의 주가 되셨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지옥의 강하는 그리스도 승귀의 첫단계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루터파 중에서도 Flacius와 Calovius 같은 분들은 약간 다르게 주님의 지옥 강하를 유기자에 대한 심판의 정죄적인 표명이라 했습니다.

칼빈의 경우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의 지옥강하 용어를 용인하고 쓰면서도 개념적 구별을 가합니다. 즉 '지옥'은 '무덤'을 뜻하는 것이며 성부와 성자의 신적인 관계에서 성자가 버림을 당하시는 고통, 인간의 죄로 인한 결과지만 인간이 상상치도 못할 영적 고통과 아픔을 관통해야 하셨는데 그런 고통과 수난과 죽음과 무덤의 의미가 지옥이란 용어에 담겼다고 본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데스를 가셨다는 것은 이처럼 설명할 수 없도록 지옥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고통을 의미하는 풍유적 표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독론적 표현을 쓴다면, 그리스도 비하의 마지막 단계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견해는 이미 14세기 Durandus, Pico Della Mirandola, Nicholas of Cusa 등의 중세 인물들이 inferna를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형벌이란 뜻이라고 본 것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쯔빙글리 역시 그리스도 강하를 주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고통스런 형벌의 경험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이후로 개혁주의 입장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49-50)과 하이델 교리문답(44)에서 보이듯이 칼빈을 따라 주님의 지옥 강하를 그리스도 비하의 마지막 단계로 보는 것입니다. 영국 성공회와 심지어 바르트도 이런 입장을 취합니다.

저는 다소 절충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지옥을 무덤으로 간주하고 주님께서 지옥으로 가셨다는 것을 주님께서 경험하신 무한한 영적 고통의 풍유적 표현으로 보되, 동시에 물리적 장소적 강하는 아니지만 죽은 영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신 것으로 본다면, 택자에게 간 경우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초림으로 말미암는 복음의 최종적인 명료성을 알리시고 유기자에 대해서는 믿지 않은 고로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 이전의 모든 이들에게 확증시켜 입증하되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흔들지 못하는 승리의 최종적인 선언으로 보는 이해에 대해서도 문을 열어 놓는다는 입장 말입니다. 주님의 완전한 이루심을 선포하되 이로써 택자들이 비로소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유기자의 멸망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며, 택자들은 이미 받은 구원에 복음의 동일한 판명성을 확인하고 유기자는 멸망의 너무도 명백한 증거를 접하면서 그들의 멸망에 핑계나 변명이나 원망이 없어지고 결국 이렇게든 저렇게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엄중한 공의가 모두에게 증거되는 셈입니다. 칼빈이 첫번째 베드로 서신(3:19)을 설명할 때에 취한 태도처럼, 예수님이 찾아간 영혼들을 베드로가 명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두 그룹의 무차별적 혼합으로 여기지는 아니하되, 주님의 죽음은 택자들과 유기자들 모두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봄이 좋을 듯합니다.

제가 언급하지 않은 보다 다양한 견해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 생각과 다른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건강한 성경 교사들의 글들을 더 읽으면서 얼마든지 잘못되고 미비된 것은 수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계속 공부하고 생각하되, 칼빈이 취한 태도처럼 성경의 난해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이 벗겨주는 만큼 이해하는 것이 안전하고 성경의 명료한 부분들과 상치되는 경우에는 성경이 그은 계시의 경계선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일 듯합니다.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구체성 혹은 엄밀성의 차이에 관하여 성경을 훼손하지 않는 입장들에 대해서는 니편내편 떠나서 존중하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동시에 성경의 난해한 부분에 다양한 입장이 있다는 이유로 망측한 궤변으로 성경의 본질적 진리까지 뒤흔들며 교묘한 반사이익 챙기려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경계와 입장을 표명함이 좋을 듯합니다. 

앤아버 방문

오늘은 미국에서 꽤나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에 부활절 및 30주년 기념예배 참석차 다녀왔다. 존경하는 어르신들, 늘 그립고 사랑스런 형제 자매들, 어여쁘고 귀여운 아이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청소년들, 고국에 대한 사무친 향수를 달래기에 충분하고 벅차고 과분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타이를 풀고 하루종일 주저앉아 이야기 보따리를 실컷 풀어 교환하고 싶었지만 빌린 차 반납시간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털어야 했다.

 그런데 살인적인 고속도로 교통체증 때문에 반납시간 문턱을 몇발짝 넘어서고 말았다. 부과될 벌금 생각이 하루종일 가슴에 충전된 만남의 기쁨을 삽시간에 압도했다. 차량반납 장소는 고객들로 붐볐다. 5분을 기다려야 했는데 일하는 친구가 한 걸음에 뛰어와 굽신굽신 자세로 미안하다 말하면서 벌금은 부과않고 20불어치 쿠폰을 내밀며 기다리게 한 '죄'용서를 구하였다. 당근, 용서해 주었다.

하하하...완전 반전!!! 벌금을 쿠폰으로 바꾸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몸은 무쟈게 피곤한 지금, 화끈한 끝마무리 땜시 좋은 피곤한 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