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30일 일요일

세상이 목마른 선교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merces tua magna nimis)이다

북방 강대국을 무찌른 아브람은 롯을 비롯하여 포로들을 구하고 모든 빼앗겼던 물건들을 회수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이에 소돔왕은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건은 네가 가지라'는 후한 사례를 제안했다. 그러나 아브람은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않겠다'고 응수했다. 이유는? 치부케 하였다는 자랑의 여지를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땅에 남기지 않으려는 결연함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브람이 자신과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까지 간섭하려 하지는 않았다.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고유 권한이라 할 수락과 거절의 자율성을 자신의 신앙 기준에 의거해 박탈하는 '폭력'을 가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멋진 사람이다. 이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이 구절은 이 땅에 무수한 양태로 잠복해 있는 보상심리 종결구다.

사람들은 땀흘린 소득의 잉여분은 상황에 따라 없어도 어쩔 수 없다지만 수고의 댓가만은 반드시 챙기고자 한다. 그게 땅에서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람의 행보는 사뭇 기이하다. 타인에 대해서는 그런 정의의 구현을 마땅한 것으로 돌리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그 기이함의 핵심이다. 아브람은 그분 자신이 최상급의 보상이란 사실이 보존되는 방식의 삶을 추구한다.

이런 삶은 교과서를 이탈하는 방식이 분명하나, 어쩌면 그래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고차원의 정의를 구현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범사에 인정되는 정의란 아브람이 보여준 하나님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삶에서 발견된다. 이런 정의가 지구촌의 한 구석에서 숨쉬고 있다면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과 자비의 증거임에 분명하다. 그런 가정, 그런 교회, 그런 사회가 있다면 세상은 하늘의 정의를 목격하고 경청할 수 있는 큰 스승을 얻은 것이다.

지금 세상은 이런 선교가 목마르다.

2012년 9월 29일 토요일

중년의 가을을 희망하며

제때 졸업하지 않아 졸지에 칼빈에서 최고참 반열에 오르고야 말았다. 그것도 꽤나 흘렀다. 그런데 오늘 새벽 설교자는 선후배 개념이 공동체의 질서를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대목에서 고성을 동원했다. 물리적인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내 마음에는 그때의 목소리가 피크였다. 찔려서다.

나도 모르게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짠밥' 그릇수에 적응되어 유치한 '선배질'을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많이 있었다. 이곳에서 이 정도 살았으면 목에 힘 좀 줘도 되쟎냐는 뻗뻗하고 천박한 태도가 떳떳하고 정당한 권리인 양 내 속에서 호응을 얻고 있었던 거다. 이거 도려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어 무진장 감사했다.

아마도 무의식 중에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내 안에서 원리와 질서로 군림하는 다른 오만의 원흉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니까 선배의 고자세는 빙산의 타이니 조각에 불과한 거이지. 거듭나는 것의 실질적인 현상은 무엇인지 고심하게 되는 아침이다.

가을이 무르 익었는데 언제까지 난 여전히 설익은 여름일까. 원숙한 중년의 가을이 오기는 오는걸까...

2012년 9월 28일 금요일

신학의 나이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사랑을 강조했다. 그게 빠지면 천하의 보물이라 할지라도 무로 변한단다. 언사가 격하다. 허나 그런 격문이 극도의 강조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다윗의 경우는 주의 인자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단다. 그래도 사랑의 가치와 무게를 다 말하지 못한다.

이런 사랑의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에는 복음의 경계를 한 치만 벗어나도 차가운 저주를 받되 천사들과 사도들도 자유롭지 않단다. 눈섭에 서리가 내릴 정도다. 이처럼 사랑과 진리는 서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자석의 양극이다. 온도차가 극심하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바울의 표정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진지하다.

복음이 없는 사랑과 사랑이 없는 복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상상조차 불허한다. 둘 사이에는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 둘은 두마리 토끼처럼 부지런히 뒷좇아도 좀처럼 개념의 손아귀에 포획되지 않는다. 좁은 복음과 넓은 사랑이 어떤 입맞출 것인지가 궁금하다. 오늘도 그 궁금증의 껍질을 한겹씩 벗기려고 한다.

신학의 나이테가 이마의 주름처럼 한줄 한줄 늘어간다. 년수는 쌓이는데 성숙은 의문이다. 

2012년 9월 27일 목요일

베자의 신약성경 헬-라 대조판

베자의 해설이 담긴 헬-라 대조판 신약이다. 스캔 상태도 쵝오지만 헬라어 활자도 깔끔하고 예쁘다. 이런 걸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시대에 산다는 게 감사할 뿐이다. This is the New Testament of Jesus Christ (Geneva, 1565) in parallel of Greek and Latin, also with a short annotation of Beza. The Greek font of the book is great, as well as its scan quality. I must be blessed, given that I am living in this generation when such a precious treasure is graciously discharged.

Jesu Christi D.N. Novum Testamentum, sive foedus, graece et latine, Theodoro Beza interprete (Geneva, 1565)

2012년 9월 26일 수요일

마음이 비추이는 것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췬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지으셨다. 서로의 마음이 서로 비취도록.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나와 타인의 마음 사각지대 부분을 보도록 하셨다는 말이다. 레비나스 철학이 잠언의 지혜로운 문구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통찰력은 인간문맥 일반에서 발견되기 어려운 차원까지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을 끌어올린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타인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논리가 탈력을 받는 시대란 인간이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이요 미덕이 발휘되는 시대라고 하겠다. 마치 예수님이 이웃을 친구로 간주하고 친구를 위해 목숨 버리는 것을 최고의 사랑으로 규정하신 것과 의미의 맥락이 얼추 포개진다. 

사람들과 더불어 있으면 서로가 서로를 제어하는 묘한 관계의 자기장이 형성된다. 단순히 눈치에서 발생한 자기관리 차원만은 아닌 것이 감지된다. 서로의 좋은 모습만 보이고 부끄럽고 추한 것은 가려 자신의 몸값을 관리하는 측면이 왜 없겠는가! 그건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너무도 분명한 이유가 보다 깊은 은밀하고 본질적인 촉발의 이유를 못보도록 가리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인과의 짝이 선명해도 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고 그 본질과 목적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 인식까지 나아가지 않은 분석과 해석은 아직도 실체의 어정쩡한 그림자만 더듬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을 지으셨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것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라는 의미 되겠다. 나아가 사람들 사이에 서로의 마음이 비치도록 지으셨다. 서로가 서로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도록 소통의 근본적인 장치를 마련해 두셨다는 말이다.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소통의 오가는 외적 수단들이 없어도, 마음이 통하다는 건 창조의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며 하나님이 태초부터 그렇게 의도하신 현상이다. 난 마음의 비추임을 '사람의 향기'라고 부른다. 아무리 코를 막고 눈을 가리고 귀를 덮어도 각 사람의 영혼은 서로의 향기를 감지하는 마음의 코가 있어서 서로를 안다는 점에서. 게다가 주님은 인간이 서로를 더 사랑하면 할수록 서로를 더 잘 알도록 지으셨다. 

오늘도 안면이 마주치는 사람들의 마음은 내 마음의 거울이 비추어질 것이다. 감지된 정보를 악한 의도로 활용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심사를 관찰하는 이유는 그분들을 예리하게 정죄할 장비를 준비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 모든 배후의 움직임을 다 읽더라도 그들을 용서하고 품고 사랑으로 진실하게 대우하는 마음의 준비를 위해서다. 잘 몰라서 괜찮아 보이니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하고 부패한 본성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랑이 성도에게 요구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날카로운 분석과 야박한 비판을 한다 할지라도 그 방향은 그를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준비로서 사람들을 깊이 탐구해야 한다. 이것이 창조적 차원에서 서로의 마음까지 비취게 한 이유이다.

케커만의 전집 1, 2권

독일 단찌히의 개혁파 신학자 케커만의 전집 1권이 구글에서 링크되지 않았다가 다운로드 가능하게 된 것 같다. 근수가 조금 무겁지만 내려받아 장서 리스트에 보관할 필수도서 되겠다. 케커만은 철학 및 학문 전체와 신학과의 상관성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신학과 일반학문 사이의 혼탁한 무질서를 평정할 여러 작품들이 1권에 수록되어 있다. 혹 2권이 없으신 분들은 아래 답글에서 찾으시면 되겠다.

Keckermann, Opera omnia, vol.I (Geneva, 1614)
Keckermann, Opera omnia, vol.II (Geneva, 1614)

2012년 9월 25일 화요일

Thomas James, A Treatise of the Corruptions (1612)


종교개혁 이후로 성경과 교부문헌 및 공의회 문서들에 대한 이 정도의 꼼꼼한 본문비평 서적이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토마스는 당시 로마 카톨릭 학자들이 교황주의 및 비성경적 종교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성경을 비롯하여 당시 신학적 권위로 통용되는 거의 모든 주요 문헌들의 본문을 첨삭하는 방식으로 진리를 위조하여 건강한 영의 양식이 교회에 조달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을 추구한 것으로 간주하고, 옥스포드 대학 보들리안 도서관의 최초 사서의 숙달된 전문성을 십분 발휘하여 마치 해변의 모래알 틈에 낀 불순물도 색출할 수준의 정밀한 현미경 눈동자를 굴리며 당시 출판된 거의 모든 교부문헌 및 동시대 문헌들을 탐색하고 수상한 위조의 낌새가 보이는 본문들은 모조리 색출하고 고발하려 했다.

토마스의 이런 지난한 작업의 목적은 17세기 당시 교황주의 학자들의 신학적 궤변을 제거하고, 무지한 자들에게 올바른 진리의 지식을 수혈하고, 자신에게 날아드는 모든 화전을 막아낼 변증의 근거와 내용을 마련하고, 나아가 로마는 바벨론과 같고 교황은 적그리스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가 받았을 핍박은 형설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이런 진리의 엄밀성 추구에 소명의 불을 태우시는 분들이 계시는 줄 안다. 참으로 귀하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비방과 고독에 생명의 위협까지 따른다면 그 누구도 피하려고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거짓으로 타인의 영혼을 혼탁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에 무질서를 대량으로 살포하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저지르고 있다면 그것을 저지할 누군가의 등장이 절실히 필요한데 17세기 초반에는 토마스 제임스가 바로 적임자로 나섰던 거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공유하는 특권과 책임이 있지만 동시에 성령께서 각 지체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들도 있다. 주님과의 내밀한 영적 소통과 성찰로 모두가 분별하고 붙들어야 할 것들이다. 물론 인식의 표면에 그 정체가 드러내지 않더라도 주께서 뜻하신 모든 것들은 다 이루어질 것이지만, 깨달아 알고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게 어느모로 보나 낫다. 이게 토마스가 오늘 내게 던진 도전이다. 

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오콜람파디우스 생애와 사상

Reformer of Basel: The Life, Thought, and Influence of Johannes Oecolampadius (RHB, 2011)

최근에 읽은 책이다. 바젤의 종교 개혁자 오콜람파디우스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은혜로운 소개서다. 바젤을 개혁의 도시로 바젤 대학에 개혁주의 신학의 주춧돌을 세운 주역이며, 이후에 요한 그리네우스와 아만두스 폴라누스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루터도 비록 칼쉬타트와의 신학적 결탁을 의심하여 절교를 했지만 '그의 탁월함과 확신과 기독교인 다움 때문에 그의 영혼을 접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과 칭찬은 거두지 않았었다.

특별히 오콜람파디우스의 교제권, 즉 루터, 칼빈, 쯔빙글리, 멜랑히톤, 에라스무스, 카피토와의 관계성을 살피는 재미가 솔솔하다. 언약론과 권징 분야에 남긴 거대한 족적을 추적한 대목도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영어로 번역되지 않은 그의 주석서들 중 이사야 일부를 영어로 번역한 공로도 지적해야 하겠다. 헤리티지 출판사가 내놓은 만큼 대단히 은혜로운 연구서다.

 여성의 부드럽고 섬세한 붓길을 따라 역사의 먼지에 덮혔던 바젤 개혁자의 삶과 신학을 경험하기 원하시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The Bible without chapters and verses

원래 성경에는 장절이 없었다. 장은 대개 13세기초에, 절은 16세기 중엽에 지금의 장절이 만들어진 것이다.

19세기 말 훗설이 유럽 인문학 위기의 원흉으로 수학화 정신을 지목한 바 있었다. 세상은 수리화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학화를 고집할 경우 인간의 지성이 자연에서 벗어난 그만큼 인지적 폭력이 가해지니 위기는 필연적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게 요지다.

성경을 장절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환원주의 방식의 편이성이 환원주의 사고에 안주하게 만드는 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잘게 부수고 세밀하게 관찰하고 정교하게 분석하는 환원주의 이후에는 반드시 그 모든 조각들을 연결하고 통합하는 전체주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성경은 하나요 동일하신 하나님의 동일한 진리의 말씀을 담고 동일한 방향과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진리의 기적 통일체다. 비록 기록자가 다양하고 독자가 다양하고 쟝르가 다양하고 시대가 다양하고 시대적 환경이 다양하나 그 어떠한 다양성도 성경의 주어가 하나님 한 분이라는 주체의 통일성을 파괴하진 못한다.

어제 친구에게 받은 선물 [The Books of the Bible New Testament]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에 입혔던 색상을 제거하고 두 개로 나누어진 칼럼을 제거하고 장절을 제거한 신약이다. 장절로 구분된 성경 읽기에 익숙한 한국 목회자와 성도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경을 통으로 읽는 문화의 형성을 위해서는 성경의 장절 없는 독서가 대단히 유익할 것 같다. 나아가 성경 한 장 혹은 한 구절로 박사학위 받아 말씀 가르칠 자를 가르치는 강단에 설 자격을 취득하는 일부 병폐도 대충 지적하고 경계할 수 있는 유익도 예상되는 성경읽기 방식이다.

한국에서 정절을 생략한 성경이 출간되어 정절이 구분된 성경과 더불어 읽혀지면 어떨까 생각한다. Better than nothing!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오클람파디우스의 아내

바젤의 개혁자 요한 오클람파디우스 싸모님 비브란디스 로젠블라트(Wibrandis Rosenblatt)의 삶이 기구하다. 달리 생각하면 축복으로 볼 수도 있겠다.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과부가 되어 46세의 중년이 된 바젤의 개혁자 오클람파디우스와 재혼을 하시었다. (바젤의 개혁자는 당시에 '파렴치한' 내지는 '파렴치한 도둑'으로 몰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ㅋㅋ) 남편을 주님 곁으로 보내고 3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남편의 대학교 절친 볼프강 카피토와 결합했다. 카피토가 죽은 이후에는 전남편의 또 다른 절친 마틴 부쩌가 이미 3번이나 결혼한 여인을 신부로 맞이했고 오클람파디우스 자녀들과 카피토 자녀들을 양육했다.

세 명의 종교 개혁자를 비롯하여 4번 결혼하며 슬하에 요한과 볼프강과 마틴의 자녀들을 둔 어머니 로젠블라트 인생을 읽으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이 여인이 글을 썼다면 3인분의 종교개혁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역작이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안타깝게 그녀는 팬을 들지 않았다. 그 후손들의 향후가 어떠했을 지가 궁금하다. 족보를 둘추자니 사도바울 눈빛이 무섭고 접자니 역사가의 직무를 유기하는 듯하고...어케하나!  

2012년 9월 19일 수요일

칼빈의 원수동기

칼빈에게 원수가 생기게 된 이유에 대한 자신의 소견이다.

"내게 원수들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원수들인 경우다. 나는 개인적인 동기로 혹은 투쟁본성 때문에 적개적인 태도를 취한 적이 단연코 없었다. 사실 나는 그런 분쟁의 원인 제공자가 된 적이 없다. 내게 원수가 생기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가 [주님의] 거룩한 가르침과 교회의 회복에 맞서기 위해 불경스런 도발을 감행한 경우가 되겠다."

세르베투스가 화장용 장작에 오르기 두 시간 전에도 칼빈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토록 심각한 괴로움 당하는 것을 원한 적이 없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선 세르베투스 면전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어쩌면 극도의 잔인한 처사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칼빈의 진정성을 믿는다면 그가 얼마나 공사를 뚜렷이 구분했고 한 사람의 존엄성 보존에 얼마나 깊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글을 읽으며 비판의 입술을 함부로 열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주의 진리와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것은 짓밟혀도 아무렇지 않으면서, 내 이름을 건드리고 내 이익을 넘보는 이들이 불쾌하고 괘씸하여 쏟아내는 비판, 혹은 다른 원인들로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해소할 요량으로 심심풀이 땅콩처럼 송곳니를 세워 결국 교회 으깨기를 시도하는 비판이 의외로 많다. 다들 비판자격 미달이다. 물론 무비판이 능사는 아니다.

사랑으로 회복하고 세우되 자기 목숨이나 이익이 희생되는 대안까지 고려되지 않은 비판은 오히려 침묵이 더 요긴한 상책이다. 원수가 없을 수는 없겠으나 원수 맺는 동기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하겠다. 원수를 맺더라도 하나님 앞에 합당한 동기의 소유자가 되면 조으겠다.

2012년 9월 18일 화요일

[청교도 신학]이 곧 나온단다.

오늘 헤리티지 서점에 갔드랬다. 어떤 분이 선물로 준 기프트카드 소비하기 위해서다. 10여권의 장서를 구입했다. 도서 리스트에 [청교도 신학: 삶을 위한 교리]도 있어서 벌써 나왔냐고 물었더니 소식지에 미리 올렸지만 책은 10월에 나온단다. 예상보다 일찍 일독할 수 있겠다는 급하게 얻은 기대감이 풍선에 바람 빠지듯 급속히 사라졌다. 다음은 [청교도 신학]에 대한 멀러 교수님의 추천사다.

"조엘 비키와 마크 존스의 본서는 청교도와 초기 개혁주의 신학 연구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며, 여기에 수록된 학자들의 최근 논문들은 17세기 신학 전반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제공한다. 본서는 일차 문헌들에 대한 깊은 판독력과 이차 자료들에 대한 높은 간파력을 입증해 보인다. 이 두가지 공적은 청교도 신학에의 건강한 접근력을 제공하고, 그 신학이 기독교적 삶과 동떨어진 하나의 엄격하고 통일된 합리론적 체계라는 미신도 타파한다. 아마도 본서의 가장 일관되고 통합적인 주제는 바로 '신앙과 실천의 근본적인 결합'이다. 이는 청교도와 초기 개혁파 인물들의 교리 해설의 근간을 이루었다. [청교도 신학: 삶을 위한 교리]는 앞으로 수년동안 청교도 사상의 심층연구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A Puritan Theology: Doctrine for Life (R&B, 2012), edited by Joel Beeke and Mark Jones.

2012년 9월 17일 월요일

뇌물의 유혹?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뇌물의 유혹은 그걸 활용하면 형통하게 된다는 것에 있다. 그러니 보석으로 보이는 게 당연하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실상도 이를 두둔한다. 뇌물의 달인들이 권력과 재력을 장악하는 현실 말이다. 그래서 유혹이다. 돌떵이로 보인다면 뇌물에 어리석은 지문을 찍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혹은 달콤하고 탐스럽고 유익하게 보여야 유혹이다. 세상은 그런 유혹으로 충만하다.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라는 마귀의 유혹에 타협의 손을 내밀었다. 죄와 무관했던 첫조상도 무너졌다. 놀랍게도 마귀의 유혹은 거짓이 아닌 듯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눈도 밝아지고 하나님도 그들이 '우리와 같이' 되었다고 하셨다. 눈 앞에 펼쳐지는 객관적인 사실이 수단으로 동원되는 유혹은 그만큼 은밀함도 깊고 달콤함도 짙은 법이다.

유혹은 대체로 그런 속성을 가졌다. 세상에는 잘못을 저질러도 뒷탈이 수반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처럼 두둑한 임상적 증험들이 거룩한 법에서의 탈선을 부추긴다. 게다가 주님의 길이 참으심 때문에 즉각적인 징계가 없어 보이므로 하나님도 행악에 동조하는 것처럼,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분인 것처럼 여길 정도다. 이 정도면 양심도 적당히 설득되어 고발의 기능도 쉬 마비된다. 법과 제도도 이를 두둔하는 방향으로 정비되는 건 자연스런 수순이다.

그런 게 세상이다. 이런 세상의 혼탁에 답답해 할 필요 없다. 해아래 세상의 정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만 소금과 빛의 필요성이 교회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작금의 교회가 그런 혼탁의 원흉이나 되지는 말라는 질타만 면해도 좋겠다는 하한선 희망에도 부응하지 못할까봐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무엇보다 '뇌물'로 인한 형통이 그림자도 얼신거릴 수 없도록 교회가 먼저 정화의 스텝을 내디뎌야 하겠다. 지금의 시대만 그런 게 아니다. 개혁된 교회의 항상적인 개혁(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정신은 모든 시대의 요청이다. 

2012년 9월 15일 토요일

교부들의 유익

때때로 교부들이 일상의 예화들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그들은 성경 구절들의 조합에 가까운 글쓰기를 구사한다. 즉 이해나 설득 차원에서 지나가는 정도로 모두가 공감하는 사안을 언급하긴 하지만 진리의 부요함과 엄밀성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다. 그것은 대체로 성경이 성경을 푸는 방식으로 수행되기 때문이다.

교부 문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게 교부의 글인지 아니면 성경구절 인용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경적 표현들로 충만하다. 하여 주님께서 교부들의 글 속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듯한 인상과도 이따금씩 마주친다. 깊은 경건과 정제된 표현과 진리의 본질에 충실한 태도가 어우러져 빚어낸 것으로 사료된다.

사도들의 시대와 가까운 그 만큼, 삐딱선을 타면 심각한 이단으로 교회의 전 역사에 걸쳐 정죄되고 정통의 길에 머무르면 '교회의 아버지' 호칭과 더불어 경건의 긴 가문을 형성한다. 아마도 진리인식 문화가 종합과 통일성을 추구하고 있어서 어떤 방향으로 가든 그 영향력이 막대했던 것은 아닐까.

분할된 전문성이 모든 분야에서 추앙을 받는 작금의 현실에 비록 다 파악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누구나 뭔가는 잘못 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그런 가려진 문제를 푸는 열쇠 중 탁월한 해명 가능성을 보이는 후보가 있다면 교부들의 문헌이 아닌가 싶다.

교부 문헌들을 부지런히 펼치고 읽어야 할 때다. 아기자기, 알콩달콩 신학도 좋지만 그것으론 문제의 등만 긁어주고 문제의 본질은 외면하기 일쑤다. 교부들에 대한 독서, 시대를 역행하는 퇴보적 발상 아니다. 오히려 본질로 소급하여 보다 먼 미래로 보다 안전하게 도약하는 수천년 동안 검증된 방식이다.

문화와 진리의 혼합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는 자들이 의롭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소유하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 살았지만 영원토록 동일한 진리의 고백들을 산출한 교부들 같은 인물들의 글을 읽으며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이다. 내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해 보는 것이다.

난 매일 교부들의 글을 한편씩 읽는다. 좋은 교훈과 안목이 많이 발견되고 내 안에 조금씩 축적되고 있음을 느낀다. 한글이나 영어로 번역된 교부 문헌들이 많다. 아무리 낮추어 생각해도 최소한 번역될 정도의 가치는 충분히 가진 것들이다. 아무거나 잡고 읽으시면 된다. 많지도 않으니까 고르는 수고도 필요치 않다. 닥치는 대로 읽어도 된다. 물론 어거스틴 문헌은 단연 일순위다.

결코 망각되지 말아야 할 단서는, 모든 문헌들이 그렇듯이 말씀의 저울질은 필수라는 거다. 

2012년 9월 14일 금요일

마음의 지향점

항상 무언가를 주시는 하나님,
그러나 주시는 그분이 누구신지 모르도록 스스로 감추시는 하나님,
보이지 않아도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믿음의 방식으로 알리시는 하나님,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범사에 그를 인정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
성도의 삶을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고 못박으신 그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한다.

내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선물로 받아 누리며 그 속에 파묻혀 살지만
적당한 관조의 거리를 두고 그 모든 것들을 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더듬어야 하겠다.
모든 것들을 밝히 보고 누리도록 빛을 비추지만
정작 그 빛을 발광하는 태양을 쳐다볼 수 없어 눈을 감아야 잔상이 보이듯이,
육의 눈꺼플을 내리고 주님께 마음의 지향점을 맞추어야 하겠다.

오늘은 왠지 그분이 많이 보고싶다.

2012년 9월 13일 목요일

죄를 미워하라

죄는 대놓고 미워해야 할 대상이다. 문 앞에 엎드리어 유혹할 때에 못내 뿌리치는 정도의 거절로는 죄를 바르게 대우하는 게 아니다. 피 흘리기까지 미워해야 한다. 즉 죽음보다 미워해야 할 대상이 죄라는 말이다.

그러나 대체로 죄는 우리가 죽음을 불사하고 미워할 정도의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서 죄는 '미움'이란 인간의 감정을 작심하고 쏟아내도 될 유일한 대상으로 지목된다. 미움은 나와 이해관계 얽힌 사람에게 폭발할 감정이 아니라 죄와 정당하게 묶여진다.

죄를 미워하는 우리의 행위는 피동적인 반응이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여야 한다. 마지못해 죄와 등지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성경은 죄 미워하는 것을 여호와 경외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전 생애를 걸고 적극성을 발휘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오늘은 죄를 대제로 미워하는 하루를 시도하려 한다. 

2012년 9월 12일 수요일

보나벨처 논리: 무에서의 창조

무에서의 창조(ex nihilo)에 대한 보나벤처 논법은 아래와 같다.

생산된 것보다 생산자가 선행하고 더 완전하다. 무언가를 행하거나 무엇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그 주체는 보다 고상하고 완전하다. 그렇다면 가장 고상하고 완전한 것은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주체이다. 하나님이 그런 주체이다. 가장 고상하고 완전하다.

무언가를 생산할 때에 주체만 홀로 있는 상황이라 한다면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무언가를 산출하거나 아니면 무에서 산출할 수밖에 없다.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사물을 생산하진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주체가 무의 일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무의 일부일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만물을 무에서 창조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2012년 9월 11일 화요일

재물과 공의

재물은 진노의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우리를 건진다.

사물의 중요성은 죽음의 무게로 달아 보아야 제대로 가늠된다. 목숨을 걸고 집착했던 것들이 허상으로 확인되는 것보다 허망한 일이 있을까. '재물'은 그런 모든 허상의 총화를 가리킨다. 재물로 인하여 공의를 굽히는 것이 허상에 목숨을 건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모든 세상사의 재판관은 주님이다.

뇌물이 통하는 현상은 세상의 이치를 가리는 가상이다. 뇌물은 어두운 돈의 뒷거래만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로운 공의를 망각한 모든 처사가 추한 뇌물에 머리를 숙이는 일이다. 범사에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의 뇌리를 파고드는 생소한 그러나 너무도 달콤한 무질서는 바로 뇌물이다. 이거 먹으면 반드시 탈난다. '무익'을 넘어 '유해'하다.

신앙의 피가 이처럼 일상의 혈관을 관통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매사에 믿음으로 산다. 삶의 전반적인 양태는 다 신앙의 소산이다. 원인과 결과 형식으로 확인되지 않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믿음으로 산다'는 원리가 변경되는 건 아니다. 그 원리가 너무도 깊어 우리의 안목으로 잘 포착되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아무런 충돌이 없는 우리 편에서의 믿음은 삶을 해석하고 세상을 판독하는 키워드다. '믿음대로 된다'는 말씀은 기복적인 각도로 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자리에서 이해하면 인생의 비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하나님의 공의를 믿자. 그게 현실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의 공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뜻) 의존적인 믿음대로 된다. 

Ames'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강연 모음집

William Ames, The Substance of Christian Religion: or A plain and easie draught of the Christian catechisme.

링크된 문헌은 신앙과 학문의 자유를 찾아 화란으로 간 윌리엄 에임즈가 프라네커 대학에서 수행한 52번의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강연 모음집 되겠다. 여기서 에임즈의 방식과 목적은 교리문답 자체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텍스트를 선택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설교적 전달을 통해 기독교 교리문답 밑그림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여 문헌은 부드럽고 은혜롭다. 성경을 풀면서도 에임즈는 교리문답 각 항목의 주제를 능숙하게 포섭한다. 대륙의 교리문답에 대한 퓨리탄 주해라는 점도 이 문헌의 남다른 특징이라 하겠다. 1659년에 저술된 이 설교식 교리문답 강해집이 국어의 옷을 입고 서가에 등장하면 한국의 달구어진 교리교육 무드에 기름을 끼엇는 격이라 예상된다.

2012년 9월 2일 일요일

잠언이 좋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잠언 스타일에 매료된다. 통일된 철학적 체계나 정교하게 다듬어진 개념이나 그 개념들의 절묘한 조합으로 구축된 사상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다.

잠언은 일상적인 용어에 지혜를 담되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지혜의 차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이 지나쳐 현실에서 멀어지는 일도 없고 구체가 과도해서 코앞의 현실만 관여하는 것도 아닌 적정의 지혜, 인간이 최고의 균형과 조화를 빚어내는 삶이 가능하게 하는 차원 말이다.

그리고 잠언은 내가 비워지지 않으면 내게 담아질 수 없는 지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내 안에 나의 주인으로 남아 있고서도 깨달아질 지혜를 잠언에서 찾는다면 허수고다. 하여 최고로 경건한 자기부인 연습은 잠언이 제공하는 지혜와의 씨름으로 실현된다.

또한 집중력과 추리력을 가동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시선과 의식을 사로잡는 드라마나 영화와는 달리 잠언은 우리의 전인격을 힘써 몰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스타일로 기록되어 작금의 스크린 혹은 바보상자 시대가 부추기는 무신경과 무사유의 달콤한 유혹에 철퇴를 가하는 능력의 사색가로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런 수고 없이 주어지는 깨달음과 즐거움과 정보는 효율성 면에서는 흠모할만 하지만 우리에게 우리의 정신상태 일반이 심하게 훼손되는 댓가를 납부하게 만든다. 때때로 편하고 효율적인 것이 속임수의 방편이 된다는 얘기다. 생각의 여백이 없는 게임이나 스크린은 자제해야 한다. 

우리 내면에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 자극되는 환경을 제공하는 건 부모의 몫이다. 그런 환경으로 피폐된 자녀들의 내면에 왕짜증 공법을 구사하며 다스리려 하는 태도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아이들의 가슴에 상처와 저항감만 기른다. 말씀을 읽히는 게 상책이다. 

2012년 9월 1일 토요일

말씀의 달인

성경을 읽다가 때때로 낯선 구절들과 만난다. 내 상황과 어떠한 접족점도 없는 내용들을 접할 때마다 솔직히 관심과 초점이 흐려진다. '주께서 헛다리를 짚으셨네.' 이런 불경한 생각과 더불어 내게 주어지지 않은 양식이라 여기고 중시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내가 미처 생각하지 않았고 경험하지 않았고 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구절들이 내게 가장 긴요한 말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이 내 의식과 주의를 끌지 못하는 건 그 말씀이 쓸데없는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현상은 우리의 경험이 짧고 생각이 좁고 마음이 둔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모든 인생과 만물과 역사를 다 아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란 가장 기초적인 사실만 정직하게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우리가 생소하고 나랑 무관하게 보이는 말씀을 접할 때가 의식의 얕음과 경험의 왜소함과 사유의 빈곤을 인정하며 모든 부분에 있어서 지평을 넓혀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는 때다. 

원수들이 사방으로 우겨싸고 있어 주님만이 피난처요 안식처가 되신다는 시인의 고백을 접할 때에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너무 평탄한 삶을 살고 있다는 현실을 비추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정직한 실상은 우리가 인생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아니라 우리가 헛다리를 짚는 인생을 산다는 증거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 낯설고 무신경한 구절과의 만남은 전인격적 지평 확대의 호기다. 성경 덮지 마시라. 오히려 변화와 성장의 기회를 포착함이 마땅하다. 

상상할 수 없이 많은 단어들을 알게 된 비결을 털어놓은 어떤 영어의 달인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책을 읽을 때마다 전투적인 자세를 취했단다. '내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기만 해 봐라.' 해서 그는 그런 단어가 나올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의미의 살쩜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그 단어의 뼛속까지 구석구석 발라 먹었단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와의 만남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갈증을 지닌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사전이 되는거다. 이는 자연법에 해당한다. 

의미도 모르고 내용도 생소하고 써먹을 만한 구석이 도무지 발견되지 않는 말씀을 만나거든 미친듯이 기뻐하며 꿀보다 더 달콤한 음식을 접한 듯 드시라. 세상은 지금 말씀의 달인들을 요구한다. 그런 분들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