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1일 토요일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

여호와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신다 (시146:7)

"자유를 주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주어의 속성에 의해 결정된다. 주어와 동사의 이러한 관계성을 존중하면 자유의 의미는 신적인 차원까지 소급되고 확대된다. 그러나 "갇힌 자들"을 주목하면 자유의 의미가 대체로 사람에게 맡겨진다. 인간의 "갇힌" 양태를 주목하고 인간적인 자유의 개념을 따라 이 싯구를 이해하면 투옥된 자의 물리적인 족쇄가 발목에서 풀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거나 혹은 하나님에 의해 노예가 신분적인, 문화적인, 경제적인, 정치적인 족쇄의 제도적인 해방을 맞는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내용도 싯구에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러한 내용을 자유의 주도적인 의미로 혹은 궁극적인 의미로 여긴다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하나님의 적응계시 은총을 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적인 언표이며 인문학적 도구로 풀어야 할 텍스트일 뿐이라고 여기는 문제가 발생한다. 당연히 해석은 인간문맥 안에서 설정된 사람들의 통념을 맴도는 수준에 안주하게 된다. "갇힌 자들"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신체적 약자들을 의미하고 "자유"는 약자의 굴레를 벗어나 강자의 대열로 진입하는 것이겠다.

하지만 주어이신 "여호와"를 존중하면 해석이 달라진다. "갇힌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갇힌 사람들을 가리킨다. 죄에 의지와 지성과 감정이 중독된 자들, 일평생 죽음에의 종노릇을 끊어내지 못하는 자들, 하나님의 진리에 감격하지 못하고 마귀의 속임수에 흥분하고 헐떡이는 자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결박된 자들, 그리하여 여전히 세상의 관능적인 풍조를 흠모하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공중의 권세자를 추종하고 욕심을 따라 마음과 육체의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 진노의 자녀들 등이겠다.

하나님은 우리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하시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사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시인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될 것이라고 말한 이후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소개하고 있다.

아무리 유력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은 해결해 주신다는 맥락에서 "여호와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는 인간문맥 안에서의 자유를 뜻하기도 하겠지만 보다 궁극적인 의미는 영적인 자유라고 보는 게 적합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의 언급에서 시공간적 자유만이 아니라 보다 궁극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영적인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 마땅하다. 믿음의 선배들은 육체의 갇힘 중에서도 이 영적인 자유를 갈구했고 누렸으며 그리하여 어떠한 것에도 매이지를 아니했다.

하나님은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분이시다. 어떠한 결박도 풀어진다. 영혼과 마음과 생각과 습성과 언어와 행동을 사로잡고 있는 어떠한 종류의 족쇄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박의 효력을 상실한다. 참으로 하나님은 놀랍고 능하고 위대한 분이시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의 첫 소절을 "찬양"으로 채색했나 보다. 

2015년 1월 25일 일요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할 것이다 (요14:14)

예수님 명의로 주문서만 제출하면 무엇이든 만사형통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바램이 투영된 고백이다. 사람들의 미친 욕망의 고삐를 풀어주는 무슨 면죄부도 아니다. 이 구절은 오히려 막대한 책임의 자리로의 초청이다.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 무슨 의미인가? 이는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모든 것들이 예수님과 무관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무관하지 않아야 하고 예수님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아야 하고 예수님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은 누구시고 왜 이 땅에 오셨으며 무엇을 하셨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이 그것과 무관하게 드려지는 기도는 기도도 아니고 응답되는 일도 없고 응답이 우리에게 유익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아들처럼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신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런 방향과 내용을 따라 하나님께 소원을 올리는 게 기도이다. 기도는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과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리고 후사로서 예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 각자가 가진 욕망의 실현을 위해 기도라는 방편을 활용하되 거기에 예수님의 명의를 동원하여 응답률을 높이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게 기도라는 사실에서 기도의 본질과 내용과 방식은 전적으로 달라진다. 이는 기도의 본질과 내용과 방식이 구하는 주체가 아니라 누구의 이름으로 하느냐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도 하시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 구할 것이고 그리하면 모든 구하는 것들이 응답될 것이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말씀이며 그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셨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에 구하라는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주의 말씀이 성취되는 그런 방향과 내용과 영광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초청의 일환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기도를 주님의 이름으로 드린다는 것보다 더 기도의 개념과 본질을 잘 해명하는 말씀은 없으리라.

2015년 1월 18일 일요일

로마서의 성경 해석학

쓸까보다...!!!

해석학에 개혁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다. 성경 해석학이 마치 인간의 주먹만한 두뇌에 맡겨진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의 역한 입냄새가 적잖게 진동한다. 하지만 성경은 스스로 해석한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성경을 자체의 주석(scriptura sui ipsius commentarius)이라 했다. 특히 로마서는 성경 전반에 대한 해석학적 원리를 제공한다. 로마서를 읽으면, 마치 성경 전체에 흩어져 있는 의미의 조각들을 모아 조립한 그러나 이음새가 없는 완벽한 모자이크 작품처럼 여겨진다. 참으로 깊고 절묘하다. 시간은 촌음을 쪼개도 마련되지 않을 상황인데 집필의 욕구가 목까지 차오른다.

증거와 증명

신약은 사도들이 보고 들은 것의 기록된 증언이다. 증인의 활동이다. 증거를 증명으로 여겨서는 아니된다. 성경은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 스스로가 증거한다. 성경의 이러한 자체 가신성은 "우리의 노력"으로 말미암은 증명을 거부한다. 사람의 증명으로 성경의 신뢰성이 승인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증명을 목적으로 다가가지 않고 증거를 들으려고 다가가는 게 온당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이 거북하다. 그래서 거부하고 저항하고 공격한다. 진리가 있는 그대로 증거되면 사람들의 마음은 격분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순전한 진리를 고백하는 자들의 행보는 고단하다. 형통하는 사람들을 때때로 목격한다. 부럽지가 않다. 인간적인 형통이란, 순전한 진리의 길을 걷고 있는지를 돌아볼 일이겠다. 좁은 길과 형통의 대로가 서로 어울리기 힘든 개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개인사와 구별된다. 개인적인 형통이 하나님의 나라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저 땅에서의 향락일 수 있어서다. 형통의 개념도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진리의 충만과 구현을 형통으로 이해하고 기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지길 소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1:14)

신앙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시금석은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텍스트와 문자와 종이로 이루어진 언어적 문헌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의 부재로 인해 빈공간이 마련되면 반드시 다른 인위적인 태도들이 슬그머니 그리로 잠입한다. 이로 말미암은 성경의 인간화는 필연적인 결과겠다. 어떻게 해야하나?

성경을 묘사함에 있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문구를 사용한다. 정확하고 정당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성경과 그리스도 예수를 모두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대하는 태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한 요한의 기록이 이를 변호하는 듯하다.

말씀의 본질과 속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성경은 정보 꾸러미가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으며 운동력이 있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는 만물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된다고도 했다. 마치 예수님을 묘사하는 듯하다. 예수님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시며, 그의 십자가 앞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실체가 영혼의 차원까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예수님을 대면하는 일과 다르지가 않다. 예수님 자신이 밝히신 것처럼, 모든 성경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성경에는 예수님과 결부되지 않은 어떠한 텍스트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의 실제시다. 문자가 아니라 영이시다. 성경을 예수님 대하듯이 읽을 때에 모든 구절의 가장 정확한 의미와 조우하게 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이며 동시에 말씀의 성취시다. 예수님을 배제하면 말씀이 우리에게 의도한 의미와 가치의 성취는 요원해질 것이다. 성경의 어떤 부분을 읽더라도 예수님이 고려되지 않으면 아무리 어원과 문법과 문맥과 시대적 맥락을 골고루 존중해도 여전히 인위적인 해석의 어중간한 중턱에서 불법적인 안식을 취하는 부작용이 불가피할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과 예수님 자신은 서로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대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 자신을 대하는 태도듯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그것이 가리키는 말씀이신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대하듯 성경을 대하면 성경의 모든 구절들이 예수님에 대해 입술을 열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렇다고 성경을 신주단지 모시듯 신령하게 여기는 '성경주의' 노선을 밟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만이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일그러진 태도와 자세를 가장 올바르게 교정하는 최고급 해법이 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대해야 함을 교훈하는 성경의 가장 강력한 어법이다.

2015년 1월 17일 토요일

경외함과 친밀함

여호와의 친밀함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시25:14)

여기서 "친밀함"은 서로 비밀을 지켜 주어야 하는 둘 사이의 은밀한 소통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소통을 소원한다. '굿모닝 성령님'과 같은 말랑한 표현으로 주님과의 친밀감을 과시하는 분들도 적지 아니하다. 그런데 그분들의 언어와 태도는 눈으로 보기에도 민망하고 경박하다.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주님과의 친밀함 도모를 반대하고 타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친밀함에 도달하는 접근법에 대해서는 면밀한 숙고가 필요하다.

주님과의 친밀함, 그렇게 고상한 명분을 빌미로 자신의 천박한 종교성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뿌듯한 표정으로 마구 발산하는 행보의 창궐이 기독교 내에서는 물론이고 비기독교 안에서도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여호와의 친밀함은 때때로 닭살까지 오르게 하는 겉모양에 의존하지 않는다. 시인의 표현대로 여호와의 친밀함은 그를 경외하는 것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취한 태도들이 이를 입증한다.

모세의 경우는 주님께서 "내 목전에 은총도 입었고 너의 이름도 안다"고 하실 정도로 친밀함의 정도가 기준치를 훨씬 상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마다 "심히 두렵고 떨었다"는 심정을 밝힌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던 다윗도 시편의 전반적인 논조를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라"는 말로 채색했을 정도다. 나아가 성경 자체도 여호와 경외를 인간의 창조적 본성으로 묘사하며 지혜와 거룩과 생명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역설한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여호와를 경외함과 친밀함의 균형이 요구된다. 그 균형은 경외함이 우선이고 친밀함은 그 열매라는 다소 인과적인 관계성에 의해 확보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의 도리이고 친밀함은 그런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이라 할 자비로운 친밀함을 우리가 통제의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 하려는 생각과 태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심각한 수준의 교만이다. 경외함과 친밀함은 역순을 거부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경외여야 한다. 우리에게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이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가 곳곳에서 뒤집혔다. 우리는 '친밀'이란 이름으로 하나님께 너무나도 당당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치를 보는 본말전도 현실을 살아간다. 우리에게 지극히 가깝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경외하게 함이라는 말라기의 기록이 우리의 모양까지 취하시며 가까이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기 전 우리의 마땅한 태도를 가르치고 있다.

* 이는 C국에서 만난 어떤 분에게 받은 교훈이다...

2015년 1월 16일 금요일

사고의 깊이

대가들과 부딪혀야 한다. 부딪히는 만큼 깊어진다. 그러니 역사 속에서 치열했던 사유의 대가들을 선별하고 그들의 글들을 탐독하되 그들보다 한발짝만 더 내미는 연습을 끊임없이 하는거다.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사유에 근육이 오르고 사유의 방향과 추진력과 규모도 마련된다. 그러다 보면, 씨름해야 할 사유의 선수들이 점점 줄어든다. 이런 식으로 우리 시대의 인식론도 극복하고 지구상에 등장했던 다수의 유력한 사상들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방향과 질을 조정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지난한 작업이다. 그러나 대체물이 없다. 사유의 깊이는 아무도 대신 다져주지 않는다.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쓴 글들을 읽다 보면, 왠지모를 공허함이 느껴진다.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인간의 글에는 생명력이 없어서다. 생명력의 유무는 주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결과다. 예수님은 내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 하시었다. 예수님이 생명 자체시기 때문에 그의 입술에서 출고된 말씀도 당연히 생명의 표상이다. 인간의 언어도 동일하다. 인간이 지닌 생명의 기운이 말의 생명력을 좌우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동일한 생각에 동일할 언어를 입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어시면 모든 게 달라진다. 사유의 깊이도 그러하다. 동일한 말도 하나님이 주어시면 깊이는 신적인 차원까지 이른다.

사람의 글과 하나님의 글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사람의 글이 하나님의 진리를 담아내는 만큼 그 글은 깊이가 더해진다. 그 이전에 하나님의 권위가 그 사람의 사고를 주장하는 만큼의 생명력이 그 사람의 글에서 작용한다. 그 이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그 사람 안에 거하셔서 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안에 사시면 그 만큼 강력하게 하나님의 권위가 그 사람의 사고를 주장한다.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사로잡힌 사람의 글과 씨름하면 독자의 사유도 깊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역시 사유의 깊이를 추구하는 것은 주어를 선택하는 문제이다. 말씀의 묵상은 깊은 사유에 이르는 첩경이고 유일한 방편이다.

2015년 1월 5일 월요일

원수들에 대한 기도

죄악되고 사악한 자들의 팔을 꺾으소서 (시10:15)

이 기도문은 악인들이 교만하고 가련한 자들을 심히 압박하며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들을 처형하고 있으며, 그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고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도사리고 있으며, 급기야 그들이 하나님은 없고 당연히 하나님의 감찰과 심판도 없기에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상황 속에서 시인의 가슴에 고여 있던 의협심이 입술로 분출된 탄식이다. 참으로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가 쏟아내는 기도이다. 나도 그렇게 기도했고 지금도 그렇게 기도한다. 이러한 동의 속에서도 복음의 관점에서 과연 최적의 기도일까? 질문하게 된다.

이런 기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일한 상황에서 얼마든지 터뜨릴 수 있는 사회적인 공분이요 개인적인 경건의 표출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이것이 가볍게 발설하기 어려운 내용임을 확인한다. 이는 '죄악되고 사악한' 성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다. 자신도 자유롭지 않아서 심판과 형벌의 대상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들의 팔을 꺾어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칫 '너 죽고 나 죽자'는 공멸를 주문하는 것과 유사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이 싯구는 인간의 연약한 성정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을 추구하는 자는 비록 자신이 형벌의 리스트에 올라 있더라도 신적인 공의와 정직의 구현을 갈망할 수 있어야 하고 갈망해야 한다. 그러나 원수에 대한 우리의 기도는 단순히 원수들이 밉고 싫어서 그들의 패망을 주문하는 감정표출 수준의 속풀이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원수와 우리가 모두 불의하다. 본인도 똑같이 의롭지 않으면서 원수들의 불의를 고발하는 것으로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 반사이익 챙기려는 성향을 다스리지 못하면, 기도를 원수들로 인해 축적된 분노와 감정을 쏟아내는 속풀이의 출구로 오용하기 쉬워진다.

물론 시인의 기도문에 긍정적인 의미가 없지는 아니하다. 첫째는 죄악되고 사악한 자들을 죄와 사탄과 그 졸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정하면 이 기도는 너무도 정당한다. 특정한 사람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신적인 권능의 집행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와 사탄에 대해서는 피흘림을 불사하고 끝까지 싸우는 게 마땅하다. 둘째는 자신이 원수의 팔을 직접 꺾겠다고 나서지를 않고 하나님께 원수 갚는 것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자신이 스스로 원수를 갚는다면 그건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을 묵살하는 월권이요 세상적인 보복이며 또 다른 보복의 씨앗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는 무언가 달라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수들의 죄악되고 사악한 상태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우리 자신도 그들 중에 포함되어 있다는 심정으로 늘 기도에 착수해야 한다. 그러면 원수들에 대해서도 속이 후련해질 판결과 형벌과 파멸에 대한 요청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 달라는 기도, 돌이켜 달라는 기도, 그래도 복 주시라는 기도가 쏟아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원수였고 유다와 같은 배신자를 방불하는 자였음도 기억하게 된다.

사실 원수들은 우리의 본래적인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주변에 원수들이 눈에 거슬리고 때때로 뾰족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면 우리의 부패한 죄성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용서와 긍휼을 확인할 절호의 기회이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멱살을 거머쥐며 존재도 부인하고 신성도 무시하고 능력도 조롱하고 뺨도 갈기고 창으로 찌르고 멸시의 침도 투척하던 우리의 원수행각 및 사악한 풍조의 맹목적인 추종의 때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는 찬양과 감사가 입술에서 번진다. 급기야 인간 원수들에 대해서도 기도하고 축복하며 사랑하는 마음까지 솟구친다.

사회적인 정의는 원수들이 멸망하는 방식보다 그들이 돌이키는 방식으로 구현됨이 더 좋다.

2015년 1월 3일 토요일

리차드 멀러의 삶과 신학

삶과 공부

역사신학 분야에서 왕성한 연구와 출판으로 공인된 미국의 세계적인 석학, 리차드 알프레드 멀러(Richard A. Muller)는 1948년 10월 12일 뉴욕에서 출생했다. 1969년에는 퀸즈 칼리지의 학부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후에 목회자로 소명을 받고 1972년에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M.Div)를, 1976년에는 듀크 대학에서 종교개혁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Ph.D)를 취득했다. 1980년부터 1992년까지 풀러 신학교의 조직신학 및 역사신학 분과에서 교편을 잡았었고 1992년 이후로는 칼빈 신학교로 옮겨 지금까지 존더반 석좌교수 자격으로 역사신학 분과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학술지들 중에는 Sixteenth Century Journal과Reformation and Renaissance Review에서 편집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의 가장 방대한 사료들을 디지털로 소개하고 있는 Junius Institute for Digital Reformation Research에서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판으로 구체화된 그의 학문성은 다음의 저서들 안에서 확인된다.

BOOKS:

After Calvin: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a Theological Tradi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Korean translation, with a new preface by the author, Seoul: Revival and Reformation, 2011.

Calvin and the Reformed Tradition: On the Work of Christ and the Order of Salvation. Grand Rapids: Baker, 2012.

Christ and the Decree: Christology and Predestination in Reformed Theology from Calvin to Perkins. Studies in Historical Theology, Volume II. Durham, N.C.: Labyrinth Press, 1986; paperback edition, Grand Rapids: Baker, 1988; reissued with a new preface, Grand Rapids: Baker, 2008.

[with James E. Bradley] Church History: An Introduction to Research, Reference Works, and Methods. Grand Rapids: Eerdmans, 1994.

A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Drawn Principally from Protestant Scholastic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5.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Sources and Directions of Scholastic Protestantism in the Era of Early Orthodoxy. Grand Rapids: Baker, 1991.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The Rise and Development of Reformed Orthodoxy, ca. 1520 to ca.1725. I. Prolegomena.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second edition, 2003. Korean translation, Seoul: Jireh, 2002.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The Rise and Development of Reformed Orthodoxy, ca. 1520 to ca. 1725. II. Holy Scripture: the Cognitive Foundation of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93; second edition, 2003.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The Rise and Development of Reformed Orthodoxy, ca. 1520 to ca. 1725. III. The Divine Essence and Attributes. Grand Rapids: Baker, 2003. Korean translation, with a new preface by the author, Seoul: Revival and Reformation, 2014.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The Rise and Development of Reformed Orthodoxy, ca. 1520 to ca.1725. IV. The Triunity of God. Grand Rapids: Baker, 2003.

[with Rowland S. Ward] Scripture and Worship: Biblical Interpretation and the Directory for Public Worship. Phillipsburg: P & R Publishing, 2007.

The Study of Theology. Foundations of Contemporary Interpretation, vol. VII. Grand Rapids: Zondervan, 1991. Korean translation, with a new preface by the author, Seoul: Revival and Reformation, 2011.

The Unaccommodated Calvin: Studies in the Form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Korean translation, Seoul: Sharing & Serving, 2003.

ACADEMIC INAUGURAL ADDRESSES:

Ad fontes argumentorum: The Sources of Reformed Theology in the 17 Century [Belle van Zuylenleerstoel Inaugural Address, delivered 11 May, 1999, Universiteit Utrecht]. Utrechtse Theologische Reeks, deel 40] Utrecht: Faculteit der Godgeleerdheid, 1999.

Scholasticism and Orthodoxy in the Reformed Tradition: An Attempt at Definition [P. J. Zondervan Chair of Historical Theology, Inaugural Address, delivered in the Calvin Seminary Chapel, 7 September, 1995]. Grand Rapids: Calvin Theological Seminary, 1995.

EDITED VOLUMES:

with James E. Bradley, Church, Word and Spirit: Historical and Theological Essays in Honor of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987.

with Marguerite Shuster, Perspectives on Christology: Essays in Honor of Paul K. Jewett. Grand Rapids: Zondervan, 1991.

with John L. Thompson, Biblical Interpretation in the Era of the Reformation: Essays Presented to David C. Steinmetz in Honor of His Sixtieth Birthday. Grand Rapids: Eerdmans, 1996.

with Arie C. Leder. Biblical Interpretation and Doctrinal Formulation in the Reformed Tradition: Essays in honor of James A. De Jong.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2014.

남편과 같은 고장에서 자라 오랜 세월동안 교제를 나누었고 함께 가정을 이루게 된 멀러의 아내인 간호사 출신 글로리아(Gloria Muller)는 남편의 건강을 돌보며 그의 학문적인 활동을 내조하되 2011년도에는 남편과 함께 한국 방문길에 올라 범국가적 내조의 훌륭한 본을 보이기도 했다. 필자는 통역자로 멀러와 글로리아 두 사람을 한국에서 수행하며 멀러가 종교개혁 분야의 학문적 동향을 주도하는 세계적인 석학인 동시에 한 아내의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임을 확인하고 받은 감동과 깨달음이 적지 아니했다. 학문에 있어서는 고도의 문헌적 객관성과 해석학적 엄밀성을 기하지만 아내에 대해서는 참으로 인간다운 남편의 자상함을 보이고 나아가 제자들에 대해서는 실력만이 아니라 향후의 진로와 신학적 활동까지 세심하게 권고하며 챙기시는 인자한 스승의 모습을 보이는 멀러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학문적 성과만이 아니라 원숙한 인간미도 뚜렷이 관찰하게 된다.

학문의 객관성을 향하여

이러한 석학의 학문적인 여정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멀러는 학문의 첫발을 내디디며 역사에 각별한 애착을 가지고 지식의 객관성 문제에 심취했다. 그는 역사적 사실에 어떤 이념을 투사시켜 결국 그 사실의 시대적 맥락 속에서의 의미가 파괴되고 왜곡되고 오용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신학을 전공할 때에도 역사적 사실의 문맥적 의미를 존중하는 태도는 그에게 신학연구 방법론의 정수였다.

다음은 그가 박사과정 학생으로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멀러는 수업이 끝나면 곧장 도서관에 가서 교수가 추천한 1차 문헌들을 다 찾아 대출해서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해당과목 교수의 연구실로 가서 읽은 것들과 강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질문을 하며 신학적 대화를 나누었다. 필자는 듀크에서 공부할 때 그의 지도교수 데이빗 스타인메츠와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멀러는 자신에게 가장 까다롭고 피곤하게 만든 학생이라 한다. 이는 수업시간 중에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인물들의 원문들을 추천하면 읽는 사람들이 거의 전무한데 멀러만은 몇 날이 못되어 그것들을 다 읽고 와서 원문들을 강의의 내용과 대조하며 답변하기 힘든 질문들을 무더기로 쏟아냈기 때문이라 한다.

멀러는 이처럼 신학적 지식을 취득하고 축적하되 교과서나 2차 문헌들의 가이드를 받되 의존하지 않고 문헌적인 근거를 찾아 확인하고 원문 텍스트를 당시의 컨텍스트 속에서 판독하여 문헌의 역사적 객관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학문적인 주의를 기울이려 했다. 나아가 멀러는 신학의 통합적인 연구와 이해를 선호하며,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전체와 부분, 신학의 원리들과 신학의 부분들 사이의 균형과 통합의 필요성을 추구하고 강조했다.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분야는 석의의 훈련에서 시작하여 거대한 신학적 체계화로 나아가는 하나의 해석학적 구조이기 때문에 신학은 엄밀한 분활화를 넘어 하나의 전체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멀러의 학문성은 특별히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의 개혁주의 신학을 타겟으로 삼았다.

신학적 특성들

멀러가 보기에 신학의 역사적 객관성에 충실을 기하면 기할수록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에 대한 기존의 신학적 경향성을 띠는 평가가 가진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분명했다. 종교개혁 신학이나 개혁주의 전통이 진공에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과거와의 전적인 단절의 결과로 급조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의 망각이 학계의 심각한 병폐라는 사실을 그는 그의 스승 스타인메츠와 스승의 스승인 오버만의 강의와 대화를 통해 처절히 인식하게 되었다. 역사적 신학적 방법론적 연속성과 불연속성 모두가 어떠한 시대의 어떠한 분야를 연구하든 균형있게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의 강조와 더불어 멀러가 1995년도부터 제시한 16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반까지 이르는 정통주의 시대에 대한 연구의 기본적인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연속성과 불연속성: 종교개혁 시대와 정통주의 시대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문제는 중세에서 16세기와 17세기로 이어지는 지성사 일반의 연속과 불연속에 대한 연구라는 배경에 비추어서 다루어야 한다.

2) 철학의 역동적인 발전: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마치 16세기에서 17세기로 진행되는 동안 역사적 발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정적인 현상 혹은 순순하게 중세적인 현상으로 이해되면 안된다.

3) 용어의 문맥적 의미: ‘스콜라주의’에 관한 진술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 전통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와 16세기와 17세기 개신교 학자들의 문헌들 모두에서 발견되는 그 용어의 의미를 사려해야 한다.

4) 스콜라주의와 이성주의 구별: 스콜라주의와 이성주의는 역사적, 철학적, 신학적 배경에 기초하여 명확히 구별되지 않으면 안된다.

5) 방법과 내용의 구별: 방법과 내용은 비록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구별될 필요는 있다.

6) 해석학적 연속성과 불연속성: 해석학적 혹은 석의적 전통에 있어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문제는 적어도 스콜라적 방법론과 철학적 용법에 있어서의 발전들과 동일한 비중을 갖고 다루어야 한다.

7) 기준의 객관성 확보: 개별적인 종교개혁 사상가들 혹은 그들의 개별 작품들은 종교개혁 시대 전체를 판단하는 척도로, 혹은 정통주의 시대의 개별적인 사상가들 또는 작품들의 개혁주의 성향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간주되지 말아야 한다.

8) 신학의 다양성 존중: 종교개혁 이후 신학의 다양성은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이후의 정통주의,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 경건주의와 합리주의 간의 관계성에 대해 굳어진 편견들의 상대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연구되지 않으면 안된다.

9) 탈문맥적 전제들의 거부: 19세기와 20세기의 신학적 가정들이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연구들에 전제나 기준처럼 작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10) 중심교리 이론의 거절: ‘중심인물’ 혹은 ‘중심교리’ 이론의 다양한 형태들은 그것들이 칼빈과 개혁파 정통주의 사이의 역속을 보여주는 것이든 불연속을 보여주는 것이든 모두 제거되지 않으면 안된다.

11) 이념적 신학화의 거부: 16세기와 17세기에서 ‘신학의 보편 논제들(loci communes),’ ‘논쟁집(disputationes),’ ‘기초적인 교리들(institutiones),’ 혹은 ‘신학적 체계’라고 불리울 수 있는 문헌들의 형태, 구조, 내용에 대한 문제들이 마치 교리적 이유들이 촉발한 결과들 혹은 신학 내에서의 ‘갈등’에 대한 반응들인 것처럼 그것들을 교의적인 관점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도 멀러는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의 신학적 독특성에 대해 탐구의 붓을 든 19세기와 20세기의 무수히 많은 학자들의 학문연구 일반을 정교하게 분석하고 분류하여 문제점과 오해와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학자적 성실성을 수다한 발표와 방대한 출판의 방식으로 꾸준히 발휘하고 있다. 여러 논문들과 저작들 중에서도 멀러의 최근 입장을 가장 잘 정리하고 요약한 문헌은 2011년도에 한국의 총신대 신대원을 방문하여 발표되고 이후에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 (Calvin and the Reformed Tradition)에 수록된 논문이다. 거기에서 멀러는 16세기와 17세기 정통주의 연구가 복잡하고 난해한데 이는 그 시대가 개신교 신앙과 신학, 교회적 문화와 지성사적 문화가 뒤엉긴 복합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때라서 그렇다고 진단한다.

1) 특별히 지성사적 관점에서 멀러는 정통주의 사상의 고백적, 교회적, 학문적, 교의학적 체계화의 현저한 발전을 연구할 때에 종교개혁 역사를 연구하는 일반 학자들이 성취한 종교개혁 이전의 스콜라주의 및 인문주의 시대에 대한 학문연구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신학과 교회의 문화적 변화를 고려할 때에, 16세기와 17세기의 정통주의 연구는 개혁주의 전통 자체의 본질과 독특성도 탐구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그 시대에 이루어진 교부들 및 중세 학자들의 신학적 문헌들에 대한 선별적인 활용과 수용까지 탐구의 대상으로 포함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3) 특별히 중세 후기의 종교적 신학적 문맥을 살펴보면 그 안에 광범위한 중세 후기적 종교개혁 토양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으며 그것이 종교개혁 및 정통주의 시대로 유입됨에 있어서는 신학자들 개인마다 신학적 수용의 다양한 유형들을 보인다는 점을 존중해야 한다.

4) 개별 인물들을 연구할 때에도 해당 인물들이 몸담고 있었던 보다 광범위한 종교적 신학적 문맥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들 각각이 개혁주의 전통의 형성에 끼친 영향의 개별적인 내용과 독자적인 방식을 제대로 파악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특별히 칼빈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칼빈은 개혁주의 전통의 창시자도 아니고 저자도 아니고 주도적인 지도자도 아니었고 특정한 인물이 영웅처럼 부각되는 ‘칼빈’주의 용어도 칼빈 자신이 들었다면 쌍수를 휘저으며 거부했을 표현이며 개인의 신학이나 새로운 신학의 도입에는 어떠한 관심도 없었으며 다만 교회의 신학자로 교회의 보편적 신학을 펼치고자 한 여러 종교개혁 주창자들 및 개혁주의 인물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16-17세기의 특정한 인물을 종교개혁 신학과 개혁주의 전통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그를 중심으로 당시의 신학적 판도를 재구성한 후 그의 신학을 중심으로 다른 인물들의 신학적 노선을 규정하고 분류하는 “중심인물 접근법”(master narrative)은 광범위한 신학적 일반화와 근대 초기의 지성사에 대한 후기 칸트적 이해에 기초한 여러 철학적 전제들에 의존하고 있다. 멀러는 이러한 접근법의 다양한 유형들을 세 가지로 묶어서 요약한다. 즉 1) 예정론을 칼빈주의 교의학의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 2) 예정과 언약을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 3)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과 예정론 중심적인 신학을 대립적인 구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만 보더라도 그는 교의학의 전반적인 체계와 내용을 구성하는 지배적인 원리로서 예정론을 취하지 않았으며, 예정론과 언약론이 아무런 모순 없이 칼빈의 신학적 체계에 조화롭게 수용되고 있으며, 대학에서 비록 인문주의 훈련을 받았지만 스콜라적 요소도 그의 문헌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멀러는 실증한다. 그리고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은 교리를 정립하고 교의학을 구성함에 있어서 칼빈만이 아니라 불링거, 무스쿨루스, 부쩌, 버미글리 및 종교개혁 시대의 다른 유력한 인물들의 신학에 의존하고 있기에 중심인물 접근법을 따라 칼빈의 이름을 수식어로 붙여 신학적 노선을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그렇다고 멀러가 칼빈이 정통주의 시대에 미친 현저한 신학적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멀러는 중심인물 접근법의 배후에 특정한 방법론이 특정한 신학적 내용과 결부되어 있다는 강박적인 선입견이 있음을 주목하며 인문주의 방법론과 스콜라적 방법론 중의 택일이 특정한 신학적 노선으로 필히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펼친다. 즉 인문주의 방법론을 취하면 보편적 속죄와 언약적 혹은 구속사적 사유 및 성경적 신학을 지향하게 되고 스콜라적 방법론을 취하면 제한적 속죄와 엄격한 예정론적 사상과 건조한 교의학을 산출하게 된다는 주장의 문헌학적 증거는 거의 전무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칼빈의 경우에 그의 예정론을 스콜라적 성향과 연결하고 그의 언약론을 청년기의 인문주의 훈련과 연결하여 결국 방법론을 기준으로 한 사람의 신학을 분할하는 것은 궁색한 해석이며, 개혁주의 전통을 제한속죄 가르치는 스콜라적 예정론 학자들과 가정적 보편주의 가르치는 친절하고 온화한 인문적인 언약론 학자들로 분할하는 것도 동일하게 궁색하고 역사 기만적인 처사라고 평가한다.

스콜라적 방법이든 인문주의 접근이든 방법은 논증의 정밀성과 형태와 종류와 주제들의 배열과 교의학적 체계와 관련된 것이지 교리적 내용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고 멀러는 주장한다. 특별히 16세기와 17세기의 교황주의 학자들과 루터주의 학자들과 개혁주의 학자들은 비록 스콜라적 방법론과 인문주의 접근법을 동일하게 사용하긴 했지만 신학적 견해는 달랐다는 점에서 특정한 방법론 채택과 특정한 신학적 결론의 필연적인 인과를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당시의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은 신학적 작업을 하면서 스콜라적 배열과 교리문답 배열과 신조적 구조와 용법을 알았으며 스콜라적 모델의 경우에는 다소 인과적인 순서를 따르고 교리문답 경우에는 보다 분석적인 순서를 따른다는 함의까지 간파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신학적 내용이나 어떤 교리적 입장을 변경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론을 구사하며 교리의 위치를 배정하고 주제의 범위와 세목들을 설정하는 작업들을 순조롭게 수행했다.

중심인물 접근법과, 방법과 내용의 필연적 인과의 거부만이 아니라, 멀러는 16세기와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을 단일한 논제로 축소하여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심지어 연속성과 불연속성 개념도 19세기와 20세기의 편중된 학문연구 유형들 중에 칼빈과 칼빈주의 인물들 사이의 단절성과 중세의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의 극단적인 단절을 주장하는 자들의 불연속 주장에 대한 대응책일 뿐이지 개혁파 정통주의 탐구의 주된 초점은 아니며 오히려 연속성-불연속성 개념도 축소의 주범일 수 있다고 진단한다.

종교개혁 시대와 정통주의 시대의 관계성을 대하는 자신의 접근법은 단순히 연속성과 불연속성 개념이나 일치성과 차이성 비교의 틀을 넘어서 그 시대의 다양한 발전과 변화의 광범위한 요소까지 담아내려 했다고 자평한다. 개혁주의 전통의 방대함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접근법은 최소한 1) 칼빈이나 다른 종교 개혁자를 각 전통의 규범적인 대표자로 만들지는 않아야 하고, 2) 교리적 체계화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과 배경들과 환경들을 존중해야 하고, 3) 정통주의 당시의 기준을 따라 개혁주의 전통을 풀어가되 개혁주의 인물들이 개입한 많은 논쟁들은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었고 전통을 무시한 새로운 고백적 문헌을 산출하기 위함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멀러는 16세기와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의 연구에 있어서 자신에게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공적이 있다면, “칼빈주의 문제를 다루는 현대의 학자들로 하여금 칼빈과 16-17세기의 다른 개혁주의 학자들의 배경을 이해하는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와 그들의 연구문헌 목록을 확장하되 그들이 격렬히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읽지는 않았던 16세기 후반과 17세기 개혁주의 인물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대체로 간과했던 스콜라주의 및 인문주의의 본질에 대한 폭넓은 학문연구 일반까지 넓히려고 한 노력에 있다”고 자평했다.

끝으로 멀러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이해의 핵심으로 용어들의 올바른 정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즉 “정통주의”(orthodoxy)는 신학적 내용을 가리키며 “올바른 가르침”(right teaching)을 뜻하는 용어이며,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는 올바른 가르침의 효과적인 정리와 전달을 위한 방법(method)일 뿐이다. “올바른 가르침”과 관련하여 멀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가 개혁주의 신학의 기준 혹은 규범이라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규범”이 다른 고백서들 및 신조들은 전혀 기준이나 규범일 수 없다는 배타적 성격의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방법은 교회의 필요를 따라 종교개혁 신학의 제도화와 체계화와 교육화와 조직화에 현저한 영향과 도움을 끼쳤으나 어떤 신학적 결론을 필히 생산하는 것은 아니라고 멀러는 지적한다. “스콜라적”(scholastica) 용어가 주는 신학의 중세적 부패 이미지 때문에 스콜라적 ‘방법’도 부패된 ‘신학’으로 간주하며 거부하고 정죄하는 것은 내용과 방법이 동일시될 수 없다는 인지의 부재에서 비롯됨을 꼬집는다.

멀러의 신학적 특징들을 보면서, 우리는 신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내용과 방법을 혼돈하지 말아야 하고 근대 초기의 유럽사회 전체의 지성사적 문맥과 개혁주의 고백의 통일된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이 공존하고 있어서 특정한 인물이나 문헌을 정통주의 평가의 기준으로 삼거나 그것을 중심으로 연구의 방향과 목적을 설정하지 말고 최대한 역사적 객관성과 문맥적 포괄성이 존중되는 방향으로 신학을 연구해야 함을 확인한다. 필자는 멀러의 신학적 중요성을 특별히 16-17세기 정통주의 시대의 통합적인 신학과 그것에 대한 통합적인 신학연구 방법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동시에 오늘날 구현의 가능성도 자신의 학문적인 활동으로 보여 주었다는 사실에 찾는다.

그가 저술한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주의 교의학』(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은 이러한 기존의 학문연구 일반이 노정해 온 탈문맥적 신학과 방법론적 한계와 주관적인 결론을 극복하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이해를 추구하되, 당시의 학문적인 풍조를 존중하고 신학적 다양성을 고려하며 원문 텍스트를 읽고, 저자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신학적 과제를 이해하고 그들의 고유한 입장에 가감과 왜곡을 가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려 한 결과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기원과 본류 탐구에 있어서 이보다 더 탁월한 문헌적 객관성과 시대적 맥락이 고려된 문헌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산출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한 석학이 일평생을 바친 연구의 결과물을 이제 우리의 국어로도 읽고 공유할 수 있게 되어서 하나님과 저자와 부흥과개혁사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혹시 인용하실 경우,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20-29라는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

스스로의 지혜부인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잠3:7)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신뢰도가 높을수록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희락의 유무도 자신에 의해 좌우된다. 삶이 자신을 기준으로 형성된다. 삶 전체가 자아의 연장이다. 입술에서 나온 언어나 수족에서 주조된 행실이나 머리에서 다듬어진 생각이나 가슴에서 빚어진 감정이 모두 자아의 표출이다. 이렇게 자신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는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해야 한다는 바울의 다짐에 위배된다.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그런 여김의 부재를 요청하는 '말라'보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라' 라는 강한 '하라'의 역설적인 표현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는 순간 스스로의 지혜로 똘똘 뭉친 자에게서 하나님의 지혜는 머리 둘 곳을 상실하게 된다.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겨 자신을 신뢰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멸시하고 그를 신뢰하지 않는 자여서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면 다른 것을 의뢰할 마음의 여력은 없어지는 게 정상이다. 의뢰는 마음의 분할을 용납하지 않는다. 전심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은 심신을 다스리는 종교적 장신구가 아니다. 목숨과 마음과 뜻과 힘 전부가 동원될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 범사에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은 또한 높은 차원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하나님 인정과 자기 부인은 동전의 양면이다.

사실 나의 지혜가 부인되지 않을수록 우매함의 정도는 더해간다. 왜냐하면 땅의 터는 여호와의 지혜로 놓여졌고, 하늘도 그의 명철로 견고히 세워졌고 깊은 바다의 갈라짐도 그의 지식으로 이루어진 일이며 공중에서 내리는 이슬도 신적인 지식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의 존재와 사건과 사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와 무관한 것들이 하나도 없는데도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따라 읽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무지의 소치인가! 지혜자가 아니라 우매자다.

만약 온 세상을 우리의 지혜로 만들고 하늘과 땅의 움직임이 인간의 명철에 의해 유지되고 역사가 사람의 도모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면 인간이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고 자신의 지혜를 신뢰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만이 천지를 지으시고 보존하며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말씀과 판단과 행하심은 그 자체로 지혜이다. 인정하고 존중하고 경외하고 경배함이 마땅하다.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는 말보다 더 우리를 진정한 지혜로 돌이키게 하는 노골적인 경책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징계와 꾸지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고 권고한다. 물리적인 징계와 도덕적인 꾸지람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가 구현되는 고도의 섭리적인 장치이다. 신구약을 빼곡하게 채운 무수히 많은 '말라'와 '하라'의 율례들은 우리가 마땅히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하나님의 지혜이며 당연히 순종은 그런 신적인 지혜의 습득이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망각하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는 지혜자의 기록은 하나님은 지혜 자체시며 지혜로 만물을 지으시고 명철로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기에 그러한 분의 말씀은 그 모든 것들이 고려된 지혜의 총화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하나님을 지혜롭게 여기고 마음을 다하여 신뢰하며 살아가는 자의 가슴과 머리와 입술과 수족은 이제 더 이상 부패한 자아를 연장하는 흉물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구현되고 발산되는 의로운 병기들로 사용된다.

진실로 말씀이 우리의 감정과 생각과 말과 행실을 주장하게 함이 지혜이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으신 그리스도 예수만이 증거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2015년 1월 2일 금요일

중서울노회 신년하례회


오늘은 중서울 노회에서 신년 하례회로 모였는데 2가지가 나의 새해를 사로잡을 전망이다. 첫째는 설교이고 둘째는 경건이다. 1부 예배시간 설교를 맡으신 서호 목사님은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법 요약으로 말씀을 전하셨다. 정암에 의하면, 교부들은 선포적인 설교에 집중했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강의식의 설교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설교법이 네러티브 설교여야 한다고 외치셨다. 물론 네러티브 방식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기에 신중한 분별이 필요하다. 나로서는 선포와 강의와 이야기가 적당히 버무려진 설교법을 선호하고 청중과 상황에 따라 강조점을 조절함이 좋다고 생각한다.

2부는 박영선 목사님의 특강이 백미였다. 핵심은 기독교가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종교가 죽음의 십자가를 지면서 따르라고 말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되 정작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이를 주님이라 부르는 그런 종교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게 기독교다. 죽었는데 이기는 종교가 기독교다. 부족해도 괜찮은 종교가 기독교다. 실수하고 실패해도 괜찮은 종교가 기독교다. 부족과 실수와 실패에서, 어떠한 것도 내세울 수 없는 상황에서, 전적인 무가치와 무기력과 무능에도 불구하고 승리가 주어지는 전적인 은혜의 종교가 기독교다.

인간의 비전이 결과를 초래한 게 아니다. 조용기 목사를 통해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결과가 발생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도 하나님 앞에서 살려 달라고 부르짖은 사람이지 무슨 거대한 비전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회개는 우리의 자책을 제거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본받아 죽음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는 바울의 언급에서 무슨 비장함을 도출하는 정서적 추상화는 금물이다. 죽었는데 이겼다는 기독교 진리의 역설로 보셔야 한다. 성경 구절에서 교훈의 살쩜을 예리하게 발라내는 장인의 능숙함이 돋보이는 교훈들이 아닐 수 없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무언가 자신의 위대한 일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무자격한 자가 전적인 무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존재가 되었냐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간음하고 살인하고 가정이 파탄하는 끝모를 추락을 거듭한 다윗의 인생은 오직 하나님이 다윗을 다윗되게 한 은혜를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실패도 사역이다.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왜 그랬어?"의 추궁이 아니라 "밥은 먹었냐?"는 물음으로 편들어 주는 종교가 기독교다. 특강시간 내내 웃고 울고 감격하고 진지했다. 지루할 틈이 없도록 선언과 강의와 이야기가 오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법은 우리의 시대에 참으로 탁월한 모델이다. 연세가 드실수록 설교의 내용은 깊어지고 방법은 절묘해져 간다. 신년 하례회에 출석하여 이루 설명할 길 없는 은혜와 감격과 도전에 제대로 휩싸였다. 귀한 스승이요 선배님이 계셔서 감사하다. 

속사람의 새해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6)

본문을 둘러싼 문맥에는 다양한 대조들이 의미의 얼개를 제공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과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 "경한 것"과 "중한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잠깐"과 "영원함" 등의 대조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대조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겉사람의 후패와 속사람의 항구적인 혁신과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다. 즉 "어두운 데," "질그릇," "우겨쌈," "답답한 일," "박해," 거꾸러 뜨림," "죽음," "환난," "경한 것," "잠깐," 그리고 "보이는 것" 등은 겉사람과 관계하고 이러한 것들과 쌍을 이루는 나머지는 모두 속사람과 결부되어 있다. 겉사람은 어두운 곳이다. 우겨쌈과 답답한 일과 박해와 거꾸러 뜨림과 죽음과 환란을 당한다. 그러나 속사람은 우겨쌈을 당하지 아니하며 낙심하지 아니하며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망하지 않으며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으로 설레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사람과 관계된 긍적적인 내용들이 겉사람과 결부되길 소원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가 않다. 새해에도 겉사람은 다양한 방식으로 후패하게 될 것이다. 시간이 강요하는 겉사람의 물리적인 후패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상황적인 후패도 사람이 임의로 조절하지 못한다. 사실 새해는 겉사람을 위하지 아니한다. 겉사람 편에서는 새해가 오히려 거북한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 간다. 여기서 바울은 겉사람의 후패와 속사람의 혁신 사이에 묘한 인과적 관계성을 설정하고 있는 듯하다. 즉 겉사람의 후패가 속사람의 혁신을 이룬다는 듯.

나는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겉사람의 후패가 속사람의 혁신에 기여하고 있음을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는 진술로 승인하고 있다. 이르게는 이미 다윗의 시어에서 분명히 지적된 사상이다. 그는 고난 당하였던 것이 유익인데 그 이유가 이전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몰랐으나 고난 이후에는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 하였고, 바울은 죽음도 유익임을 밝히면서 이러한 사상에 신앙적인 방점을 찍는다.

겉사람의 거듭되는 후패와 속사람의 지속적인 혁신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보이는 겉사람의 후패와 보이지 않는 속사람의 혁신 중에서 택일을 촉구하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택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겉사람의 후패도 가볍고 찰라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사실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 그 자체는 그렇게 가볍지도 않고 극복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볍고 쉽게 여겨지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쉬게 하시고 멍에를 쉽고 가볍게 만드신 주님의 은혜 덕택이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당하는 환난이 잠깐이고 경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최면이나 가상이 아니라 실상이다. 보는 눈과 듣는 귀에 근거하면 환난은 참으로 괴롭고 고단하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진정한 실상은 가볍고 일시적인 환난이다. 어디에 의존할 것인가? 보이는 환난을 눈으로 주목하면 인생은 죽는 것보다 사는 게 고단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광을 믿음으로 응시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고 어떠한 환난도 가볍고 일시적인 것일 뿐임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눈은 하나님의 창조를 누리는 수단이지 의지의 대상은 아님을 명심하자.

해 아래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고 전도자는 선언한다. 새해에 걸맞은 새로움을 땅에서는 찾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새해'라는 말은 겉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날로 새롭게 되는 속사람과 관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항구적인 새로움이 가능하다. 이러한 속사람의 지속적인 혁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한 형상을 닮아가는 여정을 가리킨다. 혁신의 도상에는 무수한 환난들이 등장할 것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생명이 역사하고 증거되는 가볍고 일시적인 계기들일 뿐이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대한 갈증만 증폭시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새해를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