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7일 화요일

그릇된 가르침을 극복하는 방법

1. 모든 문제의 극복책 일순위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느낌과 판단과 방식으로 성취되지 않는 사안이다.

2.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 확증했다.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가 사랑의 핵심이다.

3.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달리신 십자가 외에는 알지도 자랑치도 않겠다는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집요하게 파고든 사랑의 사도였다.

4.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성경 전체를 사랑한다.

5. 내 느낌과 감정과 감동과 발견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신 성경 전체를 통하여 알려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정확하고 안전하고 합당하다.

6.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의 가장 궁극적인 차원까지 도달한다. 말씀의 길을 벗어나면 엉뚱한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필연이다.

7. 말씀으로 말미암아 도달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이단적인 무리들의 어떠한 해석이나 기적이나 감동이나 미혹보다 더욱 아름답고 향기롭기 때문에 신앙의 가장 안전한 장치이다. 이거 대단히 중요하다. 말씀만이 사랑의 궁극에 도달하는 길이다. 결코 교과서적 멘트가 아니다.

8. 지금 내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동행하는 것보다 더 심오한 차원의 진리와 만족이 주어질 수 없다면 설득의 이빨이 아무리 날카롭고 강력해도 그것에 물려 말씀의 정도를 벗어나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이 깊어지면 이단의 가르침은 당연히 싫어진다.

9. 결국 성령의 검으로 승부하지 않으면 악한 무리에게 넘어간다. 자신을 지켜 악한 무리에게 넘어가지 않으면서 연약한 분들도 보호하고 돌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야로 묵상하고 말씀이 내 안에 내가 말씀 안에 거하는 온전한 연합의 사랑에 이르러야 한다.

10. 이단은 우리에게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아는 지식의 현주소를 솔직히 돌아보고 인정하게 만드는 순기능이 없지는 않다는 의미에서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으시되 악한 자들도 악한 날에 적당히 지으신 신적인 섭리의 일부로서 허락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11. 이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가 없었다. 그들의 접근에 놀라지도 말고 두려움에 빠지지도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에 더욱 바짝 다가가는 계기로 삼는다면 필요악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다. 우리의 싸움은 이단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사랑으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싸움이다.

12.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어떤 희귀한 지식이나 천사들의 언어나 신비로운 기적이나 놀라운 체험이나 황홀경 같은 매혹적인 것에 단 한 조각의 열망이나 갈증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13. 하나님의 사랑은 흥분이나 충동이나 선동이나 전율이나 혁신이 아니라 십자가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보이신 모습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다행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공연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짊어지는 사람은 드물어서 분별하기 용이하다.

철부지 선동가들

오늘 마지막 때를 강조하며 성경을 강조하며 교회를 비판하고
신학교와 교리 무용성을 주장하는 분들의 비디오를 시청했다.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한다.
인간의 연약한 감성을 자극하고
얄퍅한 인과로 지성을 설득한다.
부분적인 사실을 몇 토막 말하면서 은글슬쩍 어거지 주장을 삽입한다.

대세를 거절하고 새로운 혁신의 물꼬를 틀었다는 자의적 영웅심에
스스로 도취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다.
역사의 표피를 전부요 본질인 것처럼 과장하는 것도 심히 어설프다.
초등한 지식과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왜곡하는 모습은 아예 불쌍하다.

간간이 성경 그대로의 문구를 언급하며 그동안의 거짓과 과장을
마치 말씀을 대하듯이 들으라는 교묘한 혼동 유발에는 능숙하다.
마지막 때에 말씀을 읽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릇된 해석 앞에
무방비로 무장해제 시키는 꼼꼼한 버릇은 어디에서 배웠을까.

평소에 교회에 불만이 있고 기분에 거슬리는 지도자가 있던 차에
그런 설교나 선동을 들으면 훅 갈 사람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겸손하고 온유한 인격과 삶과 연단과 눈물과 고난과 역사의 검증 없이
깜짝 등장한 기독교의 아이돌 같은 철부지 선동가를 조심해야 한다.

저마다 '요걸 몰랐지' 같이 철지난 구닥다리 어법으로
무슨 신비로운 내용을 비로소 발설하는 듯한 연출력은
고대나 중세나 근대나 지금이나 변하지도 않고 꾸준히 반복된다.
천상 기독교를 합바지로 깔보고 껌으로 여기려는 철부지 모습이다.

벌써 그런 걸 보고 민망한 마음이 드는 나이까지 먹었다...ㅡ.ㅡ

2013년 5월 6일 월요일

예수님의 지혜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8:7)

이 질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판정을 빌미로 예수님을 책잡아' 고소할 저의를 가진 바리새인 및 서기관의 도전을 뒤집으신 예수님의 역습이다. 짤막한 단문의 위력은 대단했다.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외에는 정죄의 돌을 거머쥔 자들이 모두 떠나갔다. 여인을 두둔하면 모세의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여인을 무리들과 더불어 정죄하면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셨던 메시지와 스스로 모순되는 코너에 몰린 예수님의 사면초과 사태에 한판승 쾌재를 준비하던 자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다들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다.

예수님은 논박의 달인이다. 방대한 지식을 동원하지 않았고 현란한 언어의 수사학적 설득력과 예리한 논리의 날카로운 분석에 호소하신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접근법은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한번도 포기되지 않았던 인간의 죄악된 본성, 그것만 건드리면 어떠한 자랑과 교만과 자만도 수치의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인간 정체성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추악하고 은밀한 죄악상을 일일이 거명하며 고발하는 식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논적들의 심기는 뒤틀리고 '그런 적 없고 기억도 안난다'는 망각의 이름을 빗대어 탄력을 받은 거센 반발의 집단적인 물결을 감수해야 하셨을 것이다.

그런 반발을 촉발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느끼도록 하는 예수님의 어법에는 신적인 위엄이 있었고 변론할 때에 이웃의 세세하고 은밀한 치부는 드러내지 말라는 지혜자의 금언도 빛을 발하였다.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고 생각과 도모의 길을 아시는 '신인(God-Man)이신 예수님은 고발자의 무례하고 불경한 속내를 읽고 계셨으나 그것을 직접 겨냥하지 않으셨고 공의와 자비의 취사선택 구도에 휘말리신 것도 아니시며 인간과 대등한 자리에서 논증의 고지를 점하려고 논지를 펼쳐 결국은 인간적인 질문이 파놓은 함정의 틀에 갇히게 되는 대응도 피하셨다.

난관은 언제나 주님의 지혜가 번뜩이는 현장이다. 사랑과 공의 사이의 양자택일 반응을 기대하던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근본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질문을 던지셨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다. 인간의 묻고 답하는 논박의 문맥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인간적인 논증적 사고의 중단을 촉구하는 탈문맥적 어법이다. 물론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은 증인이 우선적인 정죄의 투석을 가하라는 신명기에 명시된 율법의 관행(more legis)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의미에 있어서는 1) 죄인인 인간은 심판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 2) 공의와 사랑은 대립이나 취사선택 문제가 아니라는 것, 3) 죄가 노출되고 은폐되는 것의 차이는 인간의 눈에만 그러하고 하나님의 눈에는 다르지 않다는 것 등이 암시되어 있다.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사람들도 만나지만 진리를 가지고 진리를 반박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후자가 더 난감하다. 성경에는 문맥에 따라 의미는 다르지만 동일한 표현들이 정반대의 의미로 구사되는 경우가 간혹 등장한다. 그럼 입맛에 따라 하나는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분들이 다가온다. 그들의 입장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셈이 되고 친구도 잃는 결과가 빚어진다. 반면 동의하면 성경의 다른 부분을 부정하여 결국 성경의 모순에 찬동하는 셈이 되는 난처한 상황에 봉착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자리에서 사태를 분석하고 해법을 추구하는 바리새인 및 서기관의 문법을 존중해 주면서도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성육신 사랑의 기조는 꺾지 않으셨다.

참으로 주님은 지혜 자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으나 예수님의 신적인 위엄 담지자는 아니며, 예수님의 어법을 우리의 입술로 카피해도 동일한 위력이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스게야의 아들들이 경건의 능력도 없이 바울의 모양만 취했다가 낭패를 당한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것이 최상이다. 달리 표현하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 안에서 사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란 이야기다. 내 입술과 내 생각과 내 의지가 동원되나 주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발휘되는 수단이요 통로로서 주님께 드려져야 한다. 방대한 지식과 반듯한 논리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바울의 고백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는 게 해법이다.

주여, 언제나 나의 지혜가 되옵소서...

2013년 5월 5일 일요일

사랑과 공의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마9:9)

'세리와 죄인,' '세리와 이방인,' '세리들과 창기들' 같은 표현들은 당시 '세리'라는 말의 문맥적 의미를 제공한다. 교회의 권면에도 회개치 않는 자들은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무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될 수 없는 부류의 전형이요, 자기를 사랑하는 자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이같이 하지 않느냐'는 산상의 교훈처럼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자기애의 대명사가 세리였다. 이처럼 예수님의 어법 속에서도 세리는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라고 하는 세리에게 다가가 '나를 좇으라'는 소명의 팔을 내미셨다. 게다가 하나님 나라의 초석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는 막중한 사도직을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 중의 죄인에게 맡기셨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마태의 지파적 출신을 규정하는 것은 자료가 빈약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유다지파 소속의 예수님 혈통에도 최소한 두 사람의 '레위'가 있었듯이 '레위'라는 이름은 레위지파 밖에서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마태를 유다지파 소속으로 규정하고 코드인사 아니냐는 혐의를 제기하는 것도 불가능한 '유치함'은 아니겠다.

아마도 '레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부르심을 받은 레위지파 소속처럼 하나님께 쓰여지면 좋겠다는 부모의 기대감 속에서 작명된 이름일 것이다. '레위'라는 이름 대신에 '마태'라는 생소한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도 당시 세리직의 야비하고 부끄러운 생리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칼빈은 추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을 세리가 부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보다 현란한 유흥의 접대(a divitibus lautius accipi) 를 기대하며 부자들만 건드리는 분으로 간주했던 참으로 기발한 발상의 소유자도 칼빈의 시대에는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칼빈은 마태의 부르심을 계파나 부와 무관한 예수님의 값없는 선하심의 범례(specimen gratuitas suae bonitatis)이며 모든 부르심이 우리 자신의 의로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순전한 너그러움 (mera sua liberalitate) 때문이란 사실의 증명이며 전형(testimonium et typus)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어떠한 신분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은혜 앞에서의 평등에 대해서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 옳고 정당하다. 그러나 누가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며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과 더불어 '모든 것을 버렸다(καταλιπὼν πάντα)'는 사실을 굳이 언급한다.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마태의 반응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마태가 자신을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totum dedisse) 복음의 모든 장애물을 버렸다고 설명한다. 죄인에게 구원과 최상의 부르심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죄인의 자리에서 그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죄의 자리에 머물러도 된다는 승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에서의 떠남을 의미한다. 세상이 괜찮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정하신 죄의 자리에 제도의 합법적인 돗자리를 깔고 머물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와 평등을 운운하는 것은 주님을 욕보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능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공의에 상응하는 우리의 변화도 수반한다. 사랑을 명분으로 공의를 짓밟거나 공의를 명분으로 사랑을 져버리는 것은 동일하게 위험한 편협이다. 타인에 대해서는 공의를 휘두르고 자신에 대해서는 사랑을 적용하는 것은 비겁하고 야비하다. 십자가의 제자도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타인과 자신 모두에게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공의가 입맞추는 제자됨을 요구한다. 모든 사람들을 한없이 사랑하되 죄와의 단절은 철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일상의 기독교적 재조명이 필요하다

1. 밥하고 빨래하고 설겆이도 도맡아서 하시는 '괴짜' 선배님이 계시다. 이렇게 전자제품 관련 가사들을 직접 행하면서 주부들의 고뇌와 필요를 경험하고 읽어내는 것이 30여종 이상의 특허출원 비법이란 알짜배기 정보도 곳곳에 전파하고 공유하는 분이시다. 그분에게 일상은 가치와 의미의 출처였다. 가장 일상적인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 부분의 소비자란 이야기고 거기에서 한 발짝만 앞서가면 대박이 난다는 건 삼척동자 고개도 끄덕이는 사실이다.

2. 플라톤의 철학은 이론의 상아탑 축조와는 정반대로 실천적인 삶이라는 목소리를 내시는 참으로 존경스런 전천후 박학다식 철학자가 계시다. 철학의 중년을 넘어 완성의 고지에 거의 도달하신 그분의 붓은 지금 일상 번역으로 분주하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웃고 자고 주거하고 옷입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은 그분이 판독하는 최상의 정직한 철학 텍스트다. 지금까지 그분이 생산한 철학 이야기는 마치 일상 벗기기의 준비운동 내지는 예고편이 아닌가도 싶다.

3. 연구 실험실이 목양실 옆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천재 신학자가 계시다. 과학은 신학의 마지막 대화자로 모든 학문을 블랙홀 수준으로 흡수하고 있으며 일상은 그런 대통합적 과학의 최첨단 분야가 되었다는 문명의 현주소를 고도의 경건과 박학으로 읽으시는 분이시다. 기라성 같은 세계적인 노벨상 수상 및 입후보 과학자들 모임에서 발표도 하시고 논문도 게제하는 그분은 일시적인 기적을 일상이란 항구적인 기적의 맛배기라 하시었다.

4. 사도들도 풀기 어려운 것이 있어서 어거지 해석의 위험성을 경고해야 할 정도로 진리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의 극대치를 논구한 사도가 있었다. 그는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너무도 깊어서 측량할 수 없고 그의 길은 추적되지 않는다는 백기투항 멘트로 교리적 논의를 종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삼층천에 준하는 경지까지 이르렀고 그러므로 우리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하나님 경외와 경배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5. 몸은 일상의 다른 표현이다. 최고의 사도가 신구약 전체의 진리를 종합하고 그것에 준하는 우리의 마땅한 도리와 본분으로 몸을 산 제사로 드리란다. 일상을 주목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을 사소한 것, 무가치한 것, 평범한 것, 지루한 것,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기 싶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높이는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일상에서 찾으신다. 하나님이 주목하면 사단도 주목한다. 하나님의 기쁨이 큰 것일수록 사단의 속임수는 보다 간교하다.

6. 일상은 너무도 소중하다. 문화는 일상이다. 문화의 중심부에 가정이 있다. 가정이 무너지면 문화가 무너진다. 사단이 가정에 왜곡과 파괴의 군침을 흘리는 건 당연하다. 지금 가정의 정체성과 질서가 심히 흔들리고 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지식과 교양과 양심과 문화를 배양하는 가정의 소중함이 무시되고 세상에서 매겨진 가치의 유행성 순번을 따라 죄마저 인간의 위엄과 존엄성 일번지로 간주하는 사회적 합의점이 세상 곳곳에서 선진국의 척도처럼 앞다투어 공포되고 있다.

7. 죄는 죄다. 다윗의 고백처럼 죄는 본질상 하나님을 향한다. 죄의 여부는 하나님에 의해서 가늠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라고 규정하신 것을 죄라고 고백해야 한다. 여기에 다른 이야기를 섞어서는 아니된다. 사실 가정보다 근본적인 일상은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본성이 죄로 물들었다. 우리는 본성의 차원까지 죄와 친숙하다. 그래서 가정이 없는 사람들도 피해갈 수 없는 일상이 본성이요 죄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인간의 본성과 죄문제의 왜곡은 일상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겠다.

8. 예수님은 죄라는 범인륜적 일상을 해결하러 오셨는데, 죄악된 본성에 왜곡이 가해지면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은 헛다리를 짚으신 일이겠다. 만세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죄에서의 자유라는 구원도 불필요한 일이니 세상의 일에서도 통치와 섭리의 손을 거두셔야 하시겠다. 죄문제를 건드리면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님의 존재와 행하시는 일에 불경한 도전의 칼끝을 겨냥하는 셈이겠다. 과도한 비약적 풀이라고 반박해도 좋다. 원하시는 대로 생각해도 자유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9. 나에게는 일상이 너무도 소중하다. 희귀한 전문가용 진리의 특정한 조각이 아니라 모든 진리가 개입하고 합력하는 현장이 바로 일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죄도 거기에 개입한다. 일상이 너무도 신비롭다. 오늘날의 과학이 신학보다 앞질러 일상에 눈독을 들이고 최상급 의미를 투하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일상의 기독교적 재조명이 저자권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겠다. 일상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것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10. 삶을 철학으로 이해하는 철학자는 모든 분야에 관여한다. 일상을 신학의 대상으로 주목하는 신학자도 모든 곳을 진리로 조명해야 한다. 신학의 현장은 일상이다. 진리가 진동하는 현장도 책상과 학회가 아니라 일상이다. 신학의 목적을 실천으로 이해한 믿음의 선배들이 제공하는 통찰은 수백년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번뜩인다. 사람은 사람이고 동물은 짐승은 짐승이고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이고 남편은 남편이고 아내는 아내이고 부모는 부모이고 자녀는 자녀인데 이걸 강조하면 법에 저촉되는 뒤틀린 일상의 시대가 지금이다.

11. 할 일이 태산이다. 죽는 날까지 신학의 붓을 꺾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