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7일 수요일

평화의 비용 (2018년 겨울 교수연수회 설교)

에베소서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그는 우리의 화평이며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분단의 담벼락 즉 적개심을 그의 육체 안에서 허무신 분입니다)

평화는 기독교 정신의 끝입니다. 기독교는 온 세계에 평화가 임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를 기뻐하는 자들에게 평화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온 세계의 평화는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의 평화, 나와 나 자신의 평화, 나와 너의 평화, 나와 자연의 평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평화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평화의 배후에는 생명을 건 희생적 사랑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평화이며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분단의 담벼락 즉 적개심을 허무신 분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3가지의 교훈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화평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평화가 없으며 그리스도 없이는 평화의 지속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임의적인 평화는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살얼음 판과 같습니다. 개인과 공동체에 평화를 원한다면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계십시오.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나 자신과 화목하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부모나 배우자나 자녀나 동료들과 연합하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자연의 어떠한 계절에도 적응되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 달라고 그리스도 예수께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주께서는 반드시 어떠한 종류의 평화도 주실 것입니다.

둘째, 모든 평화의 배후에는 십자가의 희생적인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이 잔잔해 보여도 물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큰 에너지가 동원되고 있는지가 최근에 미국 화학학회(ACS)에서 한국인 신학자에 의해 밝혀진 바 있습니다. 평화의 잔잔한 상태도 마치 물과 같습니다. 모든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막힌 모든 종류의 담벼락을 허무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즉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의 막대한 에너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개개인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방식은 희생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를 희생자로 삼는 강압적인 방식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는 방법은 주님처럼 공동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인 선택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어떠한 공동체든 구성원이 평화를 향유하고 있다면 지금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희생적인 사랑을 아끼지 않은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부 사이에 평화가 있습니까? 가정에 평화가 있습니까? 우리 부서에 평화가 있습니까? 전주대에 평화가 있습니까? 우리 나라에 평화가 있습니까? 그 배후에는 자발적인 희생과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그 누군가가 반드시 있습니다.

셋째,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평화가 유지되기 위해 누군가는 정당한 감정의 분출도 자제하며 지금 인내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과격함을 누르고 부드러운 마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랑하며 떠벌리지 않고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수고와 기여를 칭찬하며 높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교만의 뻣뻣한 고개를 내밀지 않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무례히 행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예를 갖추어서 찢어진 관계를 지금도 한 땀 한 땀 봉합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타인의 기쁨과 행복과 만족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정당한 상황 속에서도 터트리면 속이 후련해질 분노조차 격발하지 않고 잘 다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죄악된 본성에 충실하지 않고 우리에게 이질적인 선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그것에 동조하지 않고 의로움을 구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공동체에 평화가 유지되고 모든 구성원이 그 평화를 향유하는 것입니다.

전주대의 교수님들 및 직원 선생님들 모두가 이러한 방식으로 평화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너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특권이라 여기며 서로 앞다투어 희생의 지갑을 열겠다는 경쟁적인 평화의 분위기가 이 캠퍼스의 상쾌한 봄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원수 된 것, 막힌 담으로 인해 나누어진 모든 전쟁과 분열의 관계를 평화로 바꾸시되 그 비용으로 아들의 생명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막대한 비용이 지불된 이 평화를 전주대의 모든 가족 구성원은 다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그 평화를 지키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각자가 자발적인 마음으로 희생의 작은 조각을 기꺼이 평화의 비용으로 지불하여 아름다운 평화의 캠퍼스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주를 기뻐하는 이 지역의 모든 분들에게 평화의 공급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8년 12월 10일 월요일

<곁길>

9월의 태양이 바람 분무기로 뿌리는
투명한 은색 가루가 유난히 눈부시다
그 가루의 마법으로 깨어난 교정을 거닐며
도시의 아침을 소비한다

그런데 오늘은 어쩌다가
발이 평소에 기억하던 산책의 경로를 벗어났다
그러니까 무심코 들어선 곁길이다

길과 발이 만나는 접지면의 생소한 느낌,
행로가 곡선을 그릴 때마다 전환되는 장면들,
행인의 소소한 행복을 위해 밤새 준비한
낯선 물상들의 깨끗한 눈인사, 모두 신비롭다

인생이 익숙한 경로가 아니라
낯선 곁길로 접어들면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하다
시간의 낭비, 진보의 정지 혹은 퇴보로 해석한다

그러나 길이 평탄하지 않고 심히 낯설어도
내 삶의 설계자는 다 아시고 걸음을 이끄신다
물론 인생에는 일그러진 곁길도 있지만
어떤 곁길은 갑갑한 자아의 닫힌 세계를
슬그머니 확장하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물이다

곁길이 그릇된 삶으로 이어질 때에는
그 실패의 지점에 서서 뒤따르는 행인들을 위해
돌아가야 한다는 반환점이 되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출구일 때에는
약진해야 한다는 이정표가 된다면,
곁길은 아름다운 청춘이다

곁길에 선 신학자는 행복하다

2018년 9월 15일 토요일

추석 가정예배

잠언 20장 24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지혜자는 인간이 자신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길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걸음이 여호와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다양한 교훈들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걸음이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걸음의 방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걸음의 가까운 문맥을 파악하고 자신의 길을 해석하면
삶에 왜곡과 오류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우리의 길도 보입니다.

둘째, 자신의 길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앞길이 캄캄할 때마다 하나님을 신뢰해 보십시오.
어쩌면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 자체가
늘 걸어가야 할 우리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셋째, 삶의 출처이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왜 살아가야 하는가를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 물음은 태초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며
삶의 모든 국면들을 경험한 전도자가 내린 인생의 결론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 무지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경외하는 인생의 본분에는
그 무지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늘 감사하며 사십시오.

기도문

사랑의 주님,
무지한 인생의 길에 등대가 되어 주옵소서
사람들의 합의나 나의 욕망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우리에게 복입니다
우리의 길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움과 염려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경외해야 하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인생이 길하든 흉하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옵소서

이번 추석에도 혹시 열매가 부실해 보인다면
슬픔과 근심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신뢰하고 경외하는
경건의 채찍으로 삼아 감사하게 하옵소서

서나 넘어지나 들오며 나오며
늘 복을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8년 7월 27일 금요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스10:2)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 에스라는
그 이름의 의미대로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은 인물이다.

진실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칭찬과 존경을 두루 받은 분이지만
그의 행보는 왕의 수라상에 낄려고
겸상의 군침을 흘리거나
이미지 관리로 거룩한 척 하는
경건의 코스프레 따위와는 무관했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늘 주시했다.
단순히 관찰자나 구경꾼이 아니라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의 운명 공동체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했다.
그에게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엎드렸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마치 예수님의 기도문이
구약에도 있었다는 인상까지 주는 표현이다.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였고
백성의 죄는 "우리의 죄"로 여겨졌다.
사회나 교회나 개인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대체로 불똥이 튈까봐 서둘러 정죄의 손가락을 내뻗으며
죄인과 섞이지 않으려는 거리 만들기에 주력한다.

그러나 에스라는 백성을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 여겼고
그들의 죄를 우리의 죄로 품었으며
통회하는 죄인의 자리에서 엎드렸다.
그러자 많은 백성이 덩달아 크게 통곡했다.

이런 통곡은
주님의 귓가에 참으로 아름다운 멜로디다.
에스라의 리더십이 아름답다.
여호와의 도우심이 아름답다.
그런 아름다움, 지금은 너무도 희귀하다 ㅡ.ㅡ

2018년 7월 25일 수요일

땅책읽기

오늘은 유난히도 땅이 아름답다.
새벽에 두 발로 땅을 지그시 보듬으며
천잠산의 능선을 오르는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해 심지어 설레인다

땅도 글을 쓴다는
헤르만 헤세의 예리한 관찰이 뇌리를 파고든다
땅의 모든 무늬는 사연이 빼곡히 담긴 문장이다.
날마다 이루어진 산책은 발로 읽어가는 땅 독서였다

땅은 표현력이 뛰어나다
한번도 반복되지 않는 문장들이 온 땅에 수북하다
단문도 있고 복문도 있고
때로는 적절한 지점에서 마침표와 쉼표와도 마주친다

땅은 하나님의 입술이다
지면의 모든 굴곡은 그 입술에서 나온 메시지다
땅끝까지 이르러 빠짐없이 읽어내고 싶다
달리지 않고 서행하며 속독이 아니라 정독으로

지금은 전주의 땅책 읽기만도 벅차고 과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