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4일 월요일

가난하고 곤란한 형제와의 동거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할 것이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15:11)

같은 문맥에서 예수님은 천상의 윤리로서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다. 희생이 요구되는 말씀을 접할 때마다 해석학적 도피가 의식을 빛의 속도 수준으로 장악한다. 본능에 가까운 이런 반응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성향이기 때문에 떳떳한 공감대가 순식간에 형성된다. '경내'에 곤란하고 궁핍한 자가 없도록 외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좋겠다는 낯뜨거운 해법까지 뻣뻣한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전혀 이상하지 아니하다. 인간의 죄성을 관습과 제도로 가리는 행습은 아담과 하와가 태초부터 이미 현저한 모델로 선보였던 바여서다. 

가난하고 곤란한 형제에게 긍휼의 손을 뻗으라는 것은 명령이다. 당연히 해석학적 차원의 마사지를 불허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그냥 명하여진 그대로 행하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불편하고 거북하다. 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적 해석'의 후진성을 꼬집으며 자기방어 모드로 들어간다. 본인뿐만 아니라 유력한 자들의 인색에 종교적 면죄부도 발부해야 할 사회적 '책무'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번뜩이는 학자들의 협조를 얻어 역사적인 맥락도 살펴보고 어원적 뿌리도 뒤진다. 수천년 전에 주어진 명령이라 어떻게든 빠져 나갈 구멍이 있을 것이라는 경도된 일념으로 때로는 본문의 오류 가능성과 원어로 된 사본의 부재 문제까지 건드린다. 

이런 태도를 견지하면 결국 귀에 달콤하고 구미에 당기는 해석을 요리해 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말씀의 본의를 잃는다는 거다. 행하고자 하면 아버지의 뜻에까지 소급되는 의미의 궁극에 이르지만 어떻게든 피하고자 하면 말씀의 인간화가 불가피한 결과겠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속성과 결부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본문을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이 만물의 주관자란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부자나 빈자나 속이는 자나 속는 자나 다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부하다는 것은 신앙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 우월성의 증거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뒤따르는 현상이다. 물론 자신을 마땅히 복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의 근원이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이 마음껏 유통되는 통로요 방편이다. 자신을 복의 최종적인 수혜자로 여기면 사해처럼 생명력을 상실한다. 지식이든 건강이든 재산이든 권력이든 성품이든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것들은 그런 유통의 목적을 이루도록 그 진가가 발휘될 것을 요구하는 선물이다. 주변에 가난하고 곤란을 겪는 형제가 있다는 것은 선물의 진가가 발휘될 기회인 것이다.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그에게 넉넉히 꾸어 주라'는 명령을 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범사에 우리의 손으로 하는 바에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모세의 에드립은 우리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의 속성과 섭리에 근거해야 함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상황이나 사태들이 많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곤란하고 궁핍한 형제와의 화목한 동거는 하나님의 속성이 발휘되고 그 섭리가 증거되는 신비로운 장치이다. 종교와 도덕을 불문하고 이런 동거가 실현되는 현장에는 밑에서 시작된 혁명의 필연적인 수반이 목격된다. 현란하고 떠들석한 혁명이 아니라 가슴을 움직이며 번지는 잔잔한 혁명 말이다. 구제라는 것은 초대교회 정체성의 한 기둥이다. 의미상의 왜곡과 변질에 시달리긴 했으나 그래도 구제는 여전히 아름답고 향기롭다. 모든 교회가 각자의 경내에서 가난하고 곤란한 형제들을 요란하지 않게 진심으로 돌아보면 어떤 혁명이 일어날지 궁금하다. '너나 잘 하세요' 멘트가 나를 노려본다. 맞다. 나부터 잘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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