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8일 금요일

높으신 자에게로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호세아 7:16)

성경에서 회복의 방법은 새롭게 된다는 혁신이나 변혁이 아니라 돌이키는 것이다. 종교개혁 정신의 핵심도 진리의 새로운 고안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해 아래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언제나 본질은 그대로고 기능의 변화만 미친듯이 일어났다. 자동차는 발의 연장이고 인터넷은 대화의 연장이고 인공위성 및 현미경과 망원경은 눈의 연장이고 핵무기는 주먹의 연장일 뿐 인간의 궁극적 가치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들이다. 기능의 신장과 유용성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인간의 가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회복의 방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돌이켰다. 그러나 돌이킴의 종착지가 문제였다. 높으신 자에게가 아니었다. '곡식과 새 포도주 때문에' 돌이켰던 거다. 돌이킴의 방향이 과녁을 벗어났다. 먹고 마시는 게 과녁이고 하나님은 거기에 이르는 방편으로 동원된 셈이었다. 주님께서 돌이킬 수 있도록 '팔을 연습시켜 강건하게 하였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악을 꾀하는 도구로 쓰였단다. 그래서 '속이는 활과 같다'고 비유했다. 빗나간 돌이킴을 주도한 방백들은 결국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 신세가 될 것이란다.

진정한 회복은 언제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풍요와 건강과 편리는 물론이고 지혜와 정직과 겸손과 관용과 친절과 사랑과 연합과 화해와 용서와 지식과 긍휼과 거룩과 영생조차 우리가 돌이켜야 할 회복의 종착지가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대개 하나님께 돌아간 결과이다. 결과가 원인의 필연성을 강제하지 못한다면, 하늘과 땅에 나의 사모할 자는 오직 여호와 뿐이라는 고백만이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 돌이킴이 우리에게 있다면 힘과 뜻과 마음과 목숨까지 수단으로 삼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생의 최상급 가치가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적었다'는 호세아의 잇따른 기록에서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그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이되 전인격을 수단으로 삼은 것이라면 결국 인생을 위하여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복은 우리 자신이 수단이 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예기겠다.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것, 즉 사랑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까지 수단으로 삼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의 종노릇만 일삼았던 애굽 시절의 그 비참한 조롱거리 신세로 돌아가는 것과 일반이다.

호세아는 결구에서 다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자' 한다. 그리고는 여운이 짙은 물음을 남긴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의인만이 그 도에 행한다'는 자답으로 호세아는 깨달음과 지식을 행함과 연결하고 이렇게 실행하는 자가 의인으로 알려질 것이라는 지적과 함께 예언의 붓을 꺾었다. 아무리 유익하던 것들이라 할지라도 회복의 종착지에 이르지 못하도록 걸음을 현혹하는 유익이라 한다면 바울처럼 언제든지 해로운 배설물로 여길 수 있어야 하겠다. 어느때나 배설물 자랑은 각광을 받았고 경쟁도 치열했다. 돌이키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가는 교회의 회복을 기도한다.

2013년 3월 7일 목요일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는 분이로다 (시33:15)

벌거벗은 느낌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행사를 아신단다. 의식을 마비시킨 대목은 하나님이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 창조자의 자리에서 아신다는 앎의 천상적인 질이었다. 도대체 지으신 창조자가 지어진 창조물을 아신다는 것은 어떤 차원일까? 상상력의 근육이 뻗뻗해질 수밖에 없는 물음이다. 피조물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완벽한 지식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일텐데, 그 분량과 정도가 도무지 가늠되지 않아서다. 서로의 지식이 적당히 가리워진 사람들 사이에는 소통이 필요하고 비로소 관계가 맺어진다. 음이든 양이든 지식이 자랄수록 관계도 깊어진다. 만물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을 고려할 때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쉽게 그려지질 않는다.

누군가가 나를 알고 있다면 두려움이 앞설 것이다. 모든 인간이 떳떳한 것보다 켕기는 게 많아서다. 나에 대한 타인의 지식이 깊을수룩 두려움도 가중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강점은 은근히 노출하고 약점은 가리거나 미화한다. 관계를 맺더라도 솔직한 민낯으로 만나지 않고 사회적 아바타로 얼굴을 가린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이는 이미 상식이고 암묵적인 합의이다. 물론 가리는 문화는 아담과 하와의 태초로 소급된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지칠 줄 모르고 그 콘텐츠의 종류와 분량이 줄기차게 급성장한 문화가 바로 은폐의 문화였다. 그 배후에는 죄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어서 들키지만 않는다면 좋겠다는 일반의 심사가 작용했을 터다. 자기 양심의 조밀한 그물망도 투과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 벗겨먹을 심산으로 약점의 은밀한 꼬투리를 물고 늘어지실 분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시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지식의 분량과 사랑의 질이 비례적 관계를 가졌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아시면 아실수록 우리에게 좋은 일이겠다. 남편과 아빠로서 아내와 자식들을 아는 나의 지식은 유한하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사랑이 그 지식의 한계선 밖으로는 확장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제한이 없으시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아는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높고 깊고 길고 넓으시다. 당연히 자애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택하는 게 현명한 일이겠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할 수 없으시다. 아시면서 모른 척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지각이 미칠 수 없는 영역까지 다 커버할 것이다. 주먹 한 덩어리의 뉴우런을 펼쳐서 커버할 수 있는 지각의 영역이 지구의 표피만도 못하다면,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시고 지으신 자로서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분량일 것이다. 그런 무한한 차원의 지식이 무한한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가 겨우 알고 느끼고 경험하고 확인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의 일각의 일각일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고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갑절로 급하게 박동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동시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그분을 만홀히 여기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섬뜩하고 오싹한 마음 가누지를 못하겠다. 스스로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려는 그런 무례함이 가슴 한 구석에서 음흉한 미소를 퍼뜨린다. 죄가 청하는 가증한 결탁의 악수를 뿌리치지 못하고 슬그머니 거머쥐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죄를 범하여도 탈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나와 동류로 여기려는 사악함이 무시로 의식을 자극하고 때때로 장악한다. 방자함의 이러한 극치에 이르러도 하나님의 이렇다 할 반응이 감지되지 않으면 급기야 무신론의 땅 출입도 불사한다. 인간이 이렇다. 자신의 무지로 하나님의 전지를 덮으려는 것과 일반이다. 하나님의 침묵과 인내를 그렇게 해석하고 처신한다. 

주님께서 제대로 반응하면 끝장인 줄 모른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기 때문에 진멸되지 않고 있다는 선지자의 통찰을 애써 외면한다. 하나님을 제대로 두려워할 만큼 두려워할 자가 없다는 시인의 지적은 너무도 정확하다. 하나님은 일반의 심사를 지으셨고 모든 행사를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침묵과 인내는 몰라서 초래되는 무지의 무반응이 아니었다. 아시면서 우리가 돌이킬 회복의 시간적인 여백을 마련하신 거다. 아시면서 그러셨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온갖 일들을 그 원인과 출처와 정도와 성격과 본질과 목적까지 아시면서 여전히 아침마다 죄인과 선인에게,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빛을 비추시고 적당히 비도 내리시는 거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참 무지하다.

주님의 사랑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터질 듯하다.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도무지 측량되지 않아서다. 아예 가슴이 터지도록 그분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념해야 할 일이겠다. 동시에 그런 사랑이 우리의 무지와 무신경에 눌려 침묵으로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가슴을 터지게 만든다.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셔야 할 일이겠다. 이러한 극과 극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현실을 하루하루 관찰한다. 이중창을 투과한 뒷뜰 풍경은 환한 햇살로 수북하다. 출처모를 바람이 준동한 나뭇가지 부딛히는 가벼운 소리가 그 풍경과 어울린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오늘도 연장되나 보다. 일반의 마음이 그렇게 느끼도록 의도하신 듯하다.

2013년 3월 6일 수요일

개미의 교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6:6)

만물의 영장이 하찮은 미물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전제된 구절이라 불쾌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라고 하신 말씀이다. 인간이 곤충보다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게으름은 아주 평범한 사례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사례만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다. 지혜와 여호와 경외는 분리될 수 없고 경외가 깊은 사랑의 결과라고 한다면, 다른 모든 문제가 다 그렇듯이 여호와 경외의 부재, 나아가 사랑의 빈곤이 결국 게으름의 원흉이라 하겠다. 개미는 이러한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지혜자가 지목한 최고의 스승이다. 물론 우리의 영광과 감사는 그 개미를 지으시고 그것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신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겠다.

지혜자가 관찰한 개미의 지혜로운 행실은 딱 하나다. 즉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는데 여름 동안에 양식을 예비하며 추수 때에 곡식을 모은다는 거다. 행위의 주체가 단수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본문의 초점이 공동체 의식이나 협동정신 같은 집단적인 교훈이 아니라 개개인의 자율성이 여기서는 지혜의 핵심임을 확인한다. 외부의 권위와 지시와 강압이 개미의 행실을 유발하지 않았다는 그런 자율성 말이다. 물론 개미의 자율성은 본능적인 것이다. 개미의 행실이 겨울의 혹독한 환경을 예측하고 여름과 추수기가 양식을 비축할 적기라는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합리적 행위라는 의미의 자율성은 아니라는 얘기다.

사태를 분별하고 행실을 조절하는 보다 고급한 상황판단 기재를 가진 인간이 지혜를 상실하면 개미의 본능 의존적인 행실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관이 보란듯이 펼쳐지는 거다. 사실 어느 사회를 보더라도 인간은 지도자와 감시자와 권위자가 생략된 환경에서 사람답게 생각하고 처신하는 경우가 대단히 희귀하다. 자율성은 없고 충만한 타율의 반응자로 살아간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독재가 사라지면 자유로운 삶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감지된다. 진정한 자율성은 사실 외부의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다. 감옥에서 죄인과 노예라는 신분의 외투를 걸친 오네시모 면전에서 그를 형제라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바울의 행실이 대표적인 자율성의 발휘라고 하겠다.

자율성은 사회적인 인간문맥 안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다. 신앙의 본질도 그것과 결부되어 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지도자요 감시자요 주권자다. 그러나 그분은 보이지 않으신다. 그렇게 안계시는 분처럼 스스로를 감추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건 여호와를 본 자는 살지 못하기에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의 은둔이다. 동시에 여호와를 본 것에 근거하여 행위가 촉발되는 그런 타율성을 방지하는 배려시다. 하나님은 두령과 간역자와 주권자의 부재 속에서도 스스로 올바르게 처신하는 개미처럼 우리에게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시기 때문에 스스로를 숨기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생산하기 위해 위협과 강압의 짱똘을 던지지 않으신다. 감독자의 억압적인 눈빛을 흘기지도 않으신다. 자원하는 심령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강제적인 법령의 형식으로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새기셨고 준행할 부드러운 마음도 지으셨던 거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극도의 자율성이 발휘되는 사랑의 결과로서 진정한 순종이 비로소 가능함을 잘 보여준다. 보상의 잿밥에 눈이 어두워 투자 차원에서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의 형벌이 너무도 과중하여 두려움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의 일환으로 순종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이 아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의 도의적인 보답 차원에서 마지못해 드리는 인색한 순종의 제사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순종과는 무관하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자원하는 마음이다.

지혜자의 조언을 따라 개미가 살아가는 방식을 꼼꼼하게 관찰해야 한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라면, 모든 영역에서 두령과 간역자와 주권자의 유무와 무관하게 사랑의 자율성을 따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경주해야 하겠다. 행위의 속도와 지구력 문제는 게으름의 본질이 아니라 결과다. 사랑의 자율성이 없으면 누구도 게으른 자의 혐의를 털어내지 못한다. 진정한 순종의 주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율성의 소유자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고 싶다...

2013년 3월 5일 화요일

구제의 은밀함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레19:10)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구제의 원칙이다. 그러나 이런 은밀함의 원칙은 점진적 계시가 절정에 이른 예수님의 때에 비로소 반포되지 않았다. 율법이 주어지던 첫 순간에 이미 구체화된 원칙이다. 계시의 점진성은 내용의 추가가 아니라 의미의 판명성과 관계된 것임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물론 예수님이 '새 계명'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추가하신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 계명이 있다. 허나 요한은 이것도 처음부터 가졌던 옛 계명이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과 같은 방법론의 추가일 뿐임을 잘 지적했다. 물론 꼼꼼히 따지자면 방법론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으로 주겠다는 말씀에 함축된 것이기에 '새롭다'는 수식어 붙이기가 어색하다.

본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제의 은밀함이 저변에 짙게 깔린 계명이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고 떨어진 열매는 줍지 말라'는 부분은 낭비와 손해를 권유하는 듯해 그 첫인상이 낯설다. 그러나 분명한 두 가지의 합목적적 이유로 제시된 명령이다. 첫째,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의 구제를 위함이다. 포도원의 수확하지 않은 열매와 떨어진 것들은 그들의 몫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들에게 전달되는 절묘한 방식이 예술의 경지에 가깝다. 공급자와 수혜자가 서로 민망하게 대면할 필요가 없는 방식이다. 재화의 이동으로 인한 두 당사자 사이의 미묘한 주종관계 형성을 차단하는 방식이다. 구제를 해도 보상의 책무와 기대가 각자에게 촉발되지 않는 방식이다. 공급자는 생색을, 수혜자는 불쾌한 동정의 느낌을 가질 수 없는 방식이다. 공급자는 오직 은밀히 갚으시는 하나님만 기대하고 수혜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면 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접고 과수원 주인이 될 필요까진 없다. 교회에는 '헌금' 문화가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기 19장의 정신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일단 '헌금 실명제'를 폐기해야 한다. 헌금의 액수가 바닥까지 추락할지 모를 가슴 철렁한 제안인 줄 안다. 이런 위기감 자체가 중병의 증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가 가난을 감수하고 오른손의 일을 왼손은 물론 타인의 손까지 알도록 적극 들키려는 생색의 여지를 말끔히 제거하는 것이 교회가 영적 부요함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한다. 헌금의 근수에 기반한 권력 키재기도 사라질 효과까지 기대되는 처방이다. 연말정산 소득공제 혜택과의 남루한 거래 혹은 금전적인 투자 개념으로 헌금의 정신이 훼손되는 것도 방지된다. '헌금 실명제'만 폐기해도 이렇다. 이런 제안이 불편한 분들은 지원군을 찾아 성경구절 부지런히 뒤지시면 되겠다.

본문의 두번째 궁극적인 의미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우리의 여호와란 사실에서 발견된다. 구제 이야기는 구약과 신약이 동일한 맥락에서 등장한다. 즉 은밀한 구제는 하나님의 주시는 속성과 그의 백성된 우리의 신분 때문이다. 구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은밀한 중에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도록 무수한 은총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구제 방식에 비하면 아주 간소한 흉내요 조촐한 연습에 불과하다.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늘 주시는 분으로 계시되 우리가 땅의 지각으로 능히 감지할 수 없는 은밀한 방식으로 당신 자신까지 선물의 항목으로 포함시킨 분이시다. 우리 자신이 타인과 이웃에게 주어질 것을 의식하고 구제하되 은밀함이 보존되는 방식으로 예술의 경지까지 이르는 섬김의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다.

아~~ '너나 잘 하세요' 항목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일평생 하나님의 진리 한 조각만이라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턱도 없는 소리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지향점은 변경되지 말아야 하겠기에, 교회가 구제의 예술적 은밀함을 통해 하늘의 진품이 전시되는 겔러리가 되면 좋겠다는 바램은 가슴에 끝까지 간직하려 한다. 

2013년 3월 4일 월요일

가난하고 곤란한 형제와의 동거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할 것이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15:11)

같은 문맥에서 예수님은 천상의 윤리로서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다. 희생이 요구되는 말씀을 접할 때마다 해석학적 도피가 의식을 빛의 속도 수준으로 장악한다. 본능에 가까운 이런 반응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성향이기 때문에 떳떳한 공감대가 순식간에 형성된다. '경내'에 곤란하고 궁핍한 자가 없도록 외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좋겠다는 낯뜨거운 해법까지 뻣뻣한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전혀 이상하지 아니하다. 인간의 죄성을 관습과 제도로 가리는 행습은 아담과 하와가 태초부터 이미 현저한 모델로 선보였던 바여서다. 

가난하고 곤란한 형제에게 긍휼의 손을 뻗으라는 것은 명령이다. 당연히 해석학적 차원의 마사지를 불허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그냥 명하여진 그대로 행하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불편하고 거북하다. 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적 해석'의 후진성을 꼬집으며 자기방어 모드로 들어간다. 본인뿐만 아니라 유력한 자들의 인색에 종교적 면죄부도 발부해야 할 사회적 '책무'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번뜩이는 학자들의 협조를 얻어 역사적인 맥락도 살펴보고 어원적 뿌리도 뒤진다. 수천년 전에 주어진 명령이라 어떻게든 빠져 나갈 구멍이 있을 것이라는 경도된 일념으로 때로는 본문의 오류 가능성과 원어로 된 사본의 부재 문제까지 건드린다. 

이런 태도를 견지하면 결국 귀에 달콤하고 구미에 당기는 해석을 요리해 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말씀의 본의를 잃는다는 거다. 행하고자 하면 아버지의 뜻에까지 소급되는 의미의 궁극에 이르지만 어떻게든 피하고자 하면 말씀의 인간화가 불가피한 결과겠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속성과 결부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본문을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이 만물의 주관자란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부자나 빈자나 속이는 자나 속는 자나 다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부하다는 것은 신앙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 우월성의 증거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뒤따르는 현상이다. 물론 자신을 마땅히 복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의 근원이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이 마음껏 유통되는 통로요 방편이다. 자신을 복의 최종적인 수혜자로 여기면 사해처럼 생명력을 상실한다. 지식이든 건강이든 재산이든 권력이든 성품이든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것들은 그런 유통의 목적을 이루도록 그 진가가 발휘될 것을 요구하는 선물이다. 주변에 가난하고 곤란을 겪는 형제가 있다는 것은 선물의 진가가 발휘될 기회인 것이다.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그에게 넉넉히 꾸어 주라'는 명령을 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범사에 우리의 손으로 하는 바에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모세의 에드립은 우리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의 속성과 섭리에 근거해야 함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상황이나 사태들이 많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곤란하고 궁핍한 형제와의 화목한 동거는 하나님의 속성이 발휘되고 그 섭리가 증거되는 신비로운 장치이다. 종교와 도덕을 불문하고 이런 동거가 실현되는 현장에는 밑에서 시작된 혁명의 필연적인 수반이 목격된다. 현란하고 떠들석한 혁명이 아니라 가슴을 움직이며 번지는 잔잔한 혁명 말이다. 구제라는 것은 초대교회 정체성의 한 기둥이다. 의미상의 왜곡과 변질에 시달리긴 했으나 그래도 구제는 여전히 아름답고 향기롭다. 모든 교회가 각자의 경내에서 가난하고 곤란한 형제들을 요란하지 않게 진심으로 돌아보면 어떤 혁명이 일어날지 궁금하다. '너나 잘 하세요' 멘트가 나를 노려본다. 맞다. 나부터 잘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