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0일 화요일

아내는 남편의 자아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2:23)

아내는 남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가 담긴 구절이고 이후에는 남자가 여자의 출처라는 말이 이어진다. 아내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노예적인 종속의 굴레를 아내에게 뒤집어 씌우는 건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말씀에 분명히 기록된 것처럼 아내는 남편 존재의 노른자에 해당된다.

어설픈 '평등'이란 말로 아내는 남편의 노른자요 남편은 아내의 출처라는 성경에 명시된 '불평등'해 보이는 본래적 질서를 묵살하는 일은 금물이다. 아내의 실수와 잘못은 남편에게 가장 치명적인 실수와 잘못이며 당연히 책임은 남편의 몫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와의 죄를 방조했고 게다가 자신이 저지른 죄의 책임을 하와에게 떠넘겼다.

부끄럽고 치졸하고, 정말 실망이다. 아담이 하와의 출처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하와는 아담의 일부이다. 부속품 혹은 악세사리 같은 평범한 일부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존귀한 노른자다. 하와가 지은 죄의 궁극적인 책임은 아담에게 있다. 피하지 말았어야 했다. 책임을 아내에게 돌리는 것은 어떻게든 피했어야 했다.

아내는 남편의 가장 소중한 일부이다. 당연히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일인치의 오차도 없는 진리이다. 남편이 아내를 자기처럼 사랑하는 것은 마땅하다. 별과 별의 영광도 다르고 달과 달의 영광도 다르지만, 성경은 유독 아내는 남편과 더불어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할 자라고 증언한다.

그런데 나는 수시로 옛사람 아담이다. 치졸하고 부끄럽고 실망스런 모습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아내는 내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인데 나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지 않는다.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주심 같이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고 싶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에 있어서는 결코 지나침이 없을 듯하다. 

2013년 9월 9일 월요일

영혼의 갈망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42:3)

이는 '사람들이 종일 다윗에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란 뾰족한 물음 때문이다. 범인들에 의한 신존재 부정이 그로 하여금 눈물로 음식을 대신하게 된 배경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그의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기' 때문이란 이유를 놓쳐서는 안된다. 단순한 신지식의 대조상태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도 가세했다. 

슬프고 안타까워 식음의 의욕마저 상실할 정도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가 하나님의 존재가 지워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심리적 상태를 이 구절보다 더 절절하게 보여주는 곳이 드물다. 하여 지나칠 수 없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세상을 향한 긍휼이 씨줄과 날줄처럼 한 사람의 정신세계 속에 촘촘히 교차하며 이렇게 아름답고 애절하고 절박한 노래가 될 수 있다니.

나는 뭘 먹고 사는지 돌아보게 된다. 눈물이 음식이 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마음의 동기는 다윗을 따라잡지 못한다. 나 자신도 영혼의 위장에 고인 눈물의 실체가 궁금하다. 억울해서, 분하고 원통해서, 시기하고 질투해서, 초라하고 비참해서, 아니면 정말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갈망과 긍휼이 배합된 액체가 음식의 자리까지 장악하게 된 결과일까? 후자는 너무나도 희귀하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무리들과 동행하며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발하는 중에도 다윗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자신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무리들을 떠올리며 마음이 상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상처를 받고 명예가 실추되고 입지가 흔들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마음이 상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나는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갈망으로 이해한다.

다윗의 마음에 투영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읽으면서 그 갈망이 오늘은 심히도 목마르다...

소통의 달인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4:6)

은혜로운 언어의 구사자는 참으로 지혜롭다. 평화로운 소통에 찬물을 끼얹는 언폭의 소유자가 얼마나 많은가. 말에 실수가 없는 자를 완전한 자라 하였던가. 지난달 어떤 선생님은 30분만 대화를 나누어도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고 앞으로 무엇을 할 사람인지 읽어낼 수 있다신다. 언어라는 매체에 담기는 삶과 인격의 함량이 많다는 뜻이겠다.

지혜자는 '경우에 합당한 말이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라 했다. 개밥그릇 속에 음식 찌꺼기 같은 어법도 있다는 얘기겠다. 타이밍이 화법의 질을 좌우한다. 이런 타이밍을 기본으로 깔고 바울은 지금 소통의 은혜로운 태도를 권면한다. 나아가 상대방을 이기고, 설득하고, 지적하고,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높이고자 하는 태도도 소통의 극약이다.

화법의 개혁과 원숙은 "은혜" 없이 단순한 다독과 수다의 분량으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맛깔스런 소통의 구현은 은혜의 열매이다. 소금이 맛이라는 열매만 산출하고 자신은 종적을 감추듯이 자신이 전면에 전혀 부각되지 않으면서 만남을 윤택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 어떠한 상황이든 마땅히 대답할 말을 깨닫는다.

하여 소통의 진정한 달인은 달변가가 아니라, 대화의 주도권을 거머쥐지 않고 말수도 적으면서 여전히 마땅히 할 말을 발설하여 소통의 참맛을 더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마땅히 할 말"의 내용이 생략되면 대화의 처세술 이상의 의미는 파묻힌다. "마땅히 할 말"은 "그리스도 예수의 비밀"이란 골로새서 전체의 주제가 바로 은혜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처럼 은혜로 소금맛을 내는 소통의 참맛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달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비약인가? ^^

2013년 9월 6일 금요일

본보기 리더십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5:3)

사람을 움직이는 리더십의 스타일이 다양하다. 대체로 본인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발산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떤 사람은 리더십의 수단으로 분노를 사용한다. 어떤 행실에 노를 격발하면 상대방은 이 사람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된다는 판단에 급속하게 도달한다.

노를 두어번만 반복하면 상대방의 처신에 각인된다. 눈치가 9단인 사람의 경우에는 노의 단일한 격발로도 학습효과 만점이다. 문제는 이 짭짤한 효과에 중독되어 분노는 서서히 인격으로 스며들고 영혼을 결박하여 분노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든다는 거다.

눈물과 슬픈 목소리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적인 리더십도 있다. 주체할 수 없도록 쏟아지는 눈물과 슬픔을 말하는 게 아니다.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출된 방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문제는 연출이 신속하고 매끄러워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거다.

주로 약자들이 구사하고 아쉬울 게 없는 강자들은 매료되지 않는 방식이다. 물론 약자나 강자라는 말은 고정된 상태나 신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 아쉬워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필요가 절박한 상황에 처한 모든 이들이 약자의 자리에 있고 나머지는 강자인 거다.

강하고 부한 자들의 리더십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신에게 가용한 권력이나 금력 의존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사람의 마음이 가볍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이란 영적인 속성을 가졌는데 인간적인 수단으로 정직하고 진실한 움직임이 유발될지 의문이다.

상대방의 정서적 신경을 움직이기 위해 상처 받기에 급속하고 눈물과 슬픔을 조장하는 것은 비록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어도 본인에게 돌아오는 피해는 막심하다. 물론 타인에게 상처나 슬픈 눈물을 유발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자의 행동을 자제하게 만든다.

몇 번은 제대로 먹힌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눈물이나 슬픔이란 영혼의 섬세한 작용과 아름다운 향기까지 얼마든지 언제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인상을 해프게 남발한다. 결국 타인으로 하여금 나의 가장 깊은 은밀한 영역까지 불신하게 만드는 역기능을 감수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들의 버릇을 고치고 뜻을 관철시킬 때에 주로 심리적인 위협을 동원한다. 아이들은 무서워 겉으로는 부모의 의도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속으로는 상처를 받고 부모의 어그러진 방식을 모방하고 타인에게 신속히 적용한다. 못난 성격과 습관이 대를 이어간다.

가장 좋은 리더십은 가장 좋은 방법을 요청한다. 타인으로 하여금 되기를 원하는 됨됨이와 삶을 스스로 본보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아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기도의 횟수가 밥그릇의 수만큼 많았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이 되도록 내가 먼저 그런 경건한 사람이 되고 삶을 살아내는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절감한다. 내가 안되니까 아이들의 됨됨이와 삶을 움직이는 다른 인위적인 수단에 호소하게 된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나 본보이는 리더십의 부재가 늘 아쉽다.

2013년 9월 5일 목요일

인생은 안개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4:14)

사도는 오랜 발전의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이루어진 유구한 문명의 생산자라 할 인간의 존엄을 가볍게 생략한 채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을 안개의 덧없는 운명으로 묘사한다. 당연히 실체도 없고 수명도 짧은 안개와 비교되는 기분이 유쾌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햇살 앞에 자신의 뿌연 존재감을 급히 상실하는 안개는 인생의 군더더기 없는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도의 입술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눈에는 인간이 안개에 불과하다. 땅에서 무엇하나 움켜잡을 손이 없는데도 욕심의 운무는 온 지면을 다 덮을 기세다.

사도 야고보가 우리에게 권하는 삶은 악하고 허탄한 자랑을 중단하고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선을 행하란다. 안개와 같은 인생이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 바로 선행이다. 그러나 그 선행은 자랑의 빙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드러나는 통로이다.

태양이 떠오르면 안개는 자취를 감추듯이 하나님의 찬란한 속성을 드러낸 후 우리의 존재와 자랑으로 뿌엿게 가려서는 안되겠다. 안개가 안개이길 고집하면 스스로 안개의 덧없음에 머물지만 사라지면 비로소 가치와 의미를 확보하는 역설의 존재가 바로 안개 되시겠다.

스스로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부서지고 산화되는 존재라며 탄식의 바닥, 두들기지 마시라. 오히려 인생의 본질에 더욱 가깝도록 떠밀리고 있음에 감사하자. 인생의 실상을 가장 선명하게 관찰하는 곳이 바로 바닥이다. 우리는 원래 안개였다. 높은 구름은 태양만 가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높은 구름에 부러움의 시선을 빼앗긴 채 원망의 생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