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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0일 화요일

어거스틴의 진리

"감관에 아름다운 것으로 비치는 모든 것은...지성을 통해서, 감관의 중개를 거쳐서 물체들의 미가 파악되고 판단된다. 그런데 (아름다와 보이는 사물이 갖춘) 저 균등과 통일성은 공간 안에 분산되거나 시간 안에 변천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들은 단일하고 불변하는 균등의 척도에 의해서 판단되고 있다. 사각형의 광장이든 사각의 돌이든 사각형 책상이나 조그마한 사각의 보석이든 그밖의 무슨 물건이든 간에 그것이 사각형인 한, 우리는 사각형의 법칙에 준해서 판단한다. 이와 동일하게 부지런히 달려가는 개미의 걸음폭을 비례의 법칙에 의거해서 판단을 하듯이 점잖게 걸어가는 코끼리의 걸음폭도 우리는 동일한 비례의 법칙에 의거해서 판단한다. 그렇다면... 이 법칙, 모든 예술에 적용되는 이 법칙은 불변하는 것이다. 다만 그 법칙을 직관할 수 있도록 허용된 인간 지성은 오류의 변화를 겪을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의 척도가 되는 이) 법칙은 우리의 지성을 초월하는 것임이 분명하며, 이 법칙을 일컬어 진리(眞理)라고 한다." De vera religione, xxx.56.

우리 육체가 자리잡는 공간에 그것(단일성 혹은 진리 혹은 규범)이 자리잡고 있다면, 저 동방에서 물체들에 관해서 우리와 똑같은 식으로 판단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공간에 내포되는 것이 아니다. 판단을 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항상 거기에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것은 공간을 통해서는 그 어디에도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능성을 통해서는 없는 곳이 없다”(nusquam est per spatia locorum et per potentiam nusquam non est). De vera religione,xxxii.60.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성과 진리 사이에, 인식 주체와 인식대상 사이에 설정되는 공간을 부인함과 아울러, 인간 지성과 진리 사이에 어떠한 매개체도 거부하고 “진리는 어떤 사물을 인식케 만드는 내면의 빛"(veritatem, id est lucem interiorem, per quam illum intellegimus)이라고 한 선언에서 그 의미를 더잘 드러낸다.

인간의 "추론이 이 진리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오직 발견할 따름이다(non enim ratiocinatio talia facit, sed invenit).그러므로 [진리는] 발견되기 전에도 스스로 존재한다." De vera religione, xxxix.73.

2013년 12월 7일 토요일

행복에의 회복

히포의 주교에게 1) 하나님 추구와 2) 행복 추구와 3) 진리 추구는 동일하다.

귀하고도 부러웠다. 하나님 추구와 진리 추구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런 생의 판단력과 체질을 가진다는 것은 놀라운 저력이다. 하나님과 진리와 행복의 동일시가 이론적인 지식으로 고수하는 사람들을 보았어도 그것이 전인격과 생을 관통하는 경우는 희귀한데 희포의 주교는 이런 점에서도 본받고 싶은 귀감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 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어거스틴 진단은 이렇다. 행복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면 추구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와 부패에 참여한 것처럼 타락 이전의 아담이 누렸던 행복에도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으로 행복에 참여하는 것인지, 실재로 참여하는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우리는 아담이 잃어버린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살아가게 되어 있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었다. 참된 삶이란 진리를 갈구하는 삶이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이니 결국 진리를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삶이고 행복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것은 진리와 하나님과 행복과 진정한 삶을 동시에 등돌린 격이었다. 모든 것이 절망으로 돌변했다.

유일한 회복은 말씀으로 돌이키는 것인데 그 말씀이 우리에게 오셨다. 회복의 성취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몫이었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진정한 블레싱의 삶이 오직 그분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행복론은 불행론의 다른 이름이다. 행복의 개념적 도전은 이제 종결이다. 그러나 행복의 체질전환 문제는 별개이다. 

2013년 11월 9일 토요일

진리 앞에서의 유연성

지성은 수단이지 원천이 아니라고 바빙크는 말한다. 지식의 기관과 원천의 동일시는 이념의 산물이다. 이는 눈을 빛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사유의 과정에서 사상 자체를 연역하는 것과 일반이다. 엉뚱하다.

세상에는 이런 뚱딴지 논법이 이곳 저곳에서 난무한다. 사물과 사물의 표상, 존재와 사유, 존재하는 것과 지각하는 것은 종류에 있어서 전적으로 다르다. 결코 동일하지 않는데도 끝까지 혼돈을 고집한다.

성경의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서의 문제로서 히포의 주교가 지적한 두 가지가 떠오른다. 즉 “진리가 알려지기 이전에 전제를 가지는 것”과 “진리가 알려진 이후에도 잘못된 전제를 여전히 옹호하는 것” 말이다.

진리 앞에 다른 전제를 앞세우는 오만함과 진리인식 이후에도 그 전제를 고집하는 완고함이 건강하고 순수하고 정직한 학문과 삶의 목덜미를 붙잡는다. 진리로 시작하고 진리에 머물고 진리를 지향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진리 자체의 우선성과 진리 앞에서의 유연성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