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팅겐의 출판사 Vandenhoeck & Ruprecht에서 나의 부족한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하게 되었다. 누가 선지자들 및 사도들이 가르친 기독교 진리의 정통성과 보편성을 계승한 적통인가? 물론 미국의 학계는 이런 물음에 큰 관심이 없다. 그래서 학계가 요구하는 격식을 적당히 차릴 필요성을 충족하는 방식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그러나 나의 본심은 그 물음을 다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물음에 대한 궁구와 역사적 객관성 확보에 몰입했다. 그런데 그런 전략과 논지가 괴팅겐 출판사에 먹혔나 보다. 정말 감사하다. 특별히 해당 시리즈의 책임 편집자인 Herman Selderhuis가 호평을 해 주었으며 나아가 당시 로마 카톨릭의 최고 논객이던 로버트 벨라르민 입장과의 대립각을 보다 예리하게 세우면 좋겠다는 달가운 조언까지 추가했다. 약간의 편집을 거치면 내년 초까지는 출간될 것 같다. 논문이 출판까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주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러야 할지 모르겠다. 논문 작성도 은혜로 했는데 출간의 은혜까지 덤으로 주시다니...ㅜ.ㅜ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로 아직도 가슴이 먹먹한데, 주께서 이렇게 소박한 힐링을 제공해 주셨다고 생각된다. 주님 감사합니다~
2014년 4월 30일 수요일
2014년 4월 23일 수요일
2014년 4월 22일 화요일
사실에 대하여
역사를 공부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사실을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에서 말미암지 않았다는 바울의 진술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고려되지 않은 사실규명 자체가 얼마나 진정한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 은밀한 거짓일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속성까지 소급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실도 제대로는 규명되지 않았다고 함이 정당하다. 그런데 초등적인 사실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면 역사는 그만큼 어두워질 수밖에 없겠다. 바다 바닥만큼 캄캄하다.
2014년 4월 20일 일요일
부활의 역사성
도둑질 하여 갔다고 하여라 (마28:13)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부활은 그 시대의 그들에게 아니 오늘날의 모든 사람에게 생소한 개념이다. 정보로는 전두엽의 한 귀퉁이에 보관해 둘 수는 있어도 전인격 속에서는 머리 둘 곳이 없는 개념이다. 두 마리아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체의 악취가 진동하는 무덤으로 슬픈 걸음을 옮겼었다. 그런데 그 무덤에서 큰 지진을 맞아 땅과 몸과 의식의 두렵고 유쾌한 진동에 휩싸였다.
그녀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신속한 재보를 위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재보의 달음질 도중에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면서 두려워는 말라고 타일렀다. 이제 그들은 두려움이 없는 "큰 기쁨"만을 가지고 제자들을 향해 걸음을 이어갔다.
같은 시각에 이러한 부활의 실재적인 상황을 접수한 경비병 중 몇 사람은 직속 상관에게 알리지 않고 대제사장 무리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그들에게 사실 그대로를 재보했다. 말씀대로 늘 행하셨던 예수님이 부활할지 모른다는 짐작에 근심의 목덜미가 잡힌 종교계가 사전에 경비병의 일부를 매수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대목이다.
결국 종교계의 주류는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의 헐거운 지갑에 거액을 찔러 주면서 예수님의 시체를 그의 제자들이 야밤에 "도둑질해 갔다"는 위조된 정보를 흘리라고 명하였다. 혹 이 일이 총독에게 알려져도 뒷탈이 없을 것이라며 안심시켜 주기까지 했다. 이건 종교계 인사들의 수상한 범정치적 오지랍 사이즈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정치권과 교계의 주류가 취한 반응은 부활을 감추고 왜곡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반응에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삶과 신앙에서 고립과 탄압과 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언로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봉쇄되고 제자들은 시체 도적질을 일삼고 거짓을 살포하는 비도덕적 처신의 주범으로 내몰렸다. 게다가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할 목격자인 여인들의 증언은 당시 법적인 효력을 가졌을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지금까지 부활의 종교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인간에게 가용한 모든 권모와 술수를 동원해도 부활의 역사성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는 증거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응하는 당시 종교계의 유치한 작태는 고작 손바닥 몇 개를 동원해 하늘을 덮겠다는 시도였다. 하늘의 땅의 창조자요 통치자인 하나님의 역사를 안개와 같이 사라질 인생이 뒤틀고 덮으려는 시도 자체가 경악할 오만이요 무지요 패악이다.
부활은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선포한다.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를 증거한다. 죄에 대한 고발 및 참소에 대한 공의와 자비의 승리를 확증한다. 인간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성공을 공포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크고 놀랍고 기쁜 반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계는 이것을 사람의 비열한 도모로 남루한 금품살포 비책으로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나귀도 웃을 일이고 돌들도 증언의 입술을 벌릴 일이겠다.
진리는 사람이 가린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사람이 탁 트인 무대에 올린다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전달은 기적이고 은혜이다. 오늘날 부활의 명확한 역사성이 숨쉬고 있다면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숨결로 간주함이 마땅하다.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부활은 그 시대의 그들에게 아니 오늘날의 모든 사람에게 생소한 개념이다. 정보로는 전두엽의 한 귀퉁이에 보관해 둘 수는 있어도 전인격 속에서는 머리 둘 곳이 없는 개념이다. 두 마리아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체의 악취가 진동하는 무덤으로 슬픈 걸음을 옮겼었다. 그런데 그 무덤에서 큰 지진을 맞아 땅과 몸과 의식의 두렵고 유쾌한 진동에 휩싸였다.
그녀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신속한 재보를 위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재보의 달음질 도중에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면서 두려워는 말라고 타일렀다. 이제 그들은 두려움이 없는 "큰 기쁨"만을 가지고 제자들을 향해 걸음을 이어갔다.
같은 시각에 이러한 부활의 실재적인 상황을 접수한 경비병 중 몇 사람은 직속 상관에게 알리지 않고 대제사장 무리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그들에게 사실 그대로를 재보했다. 말씀대로 늘 행하셨던 예수님이 부활할지 모른다는 짐작에 근심의 목덜미가 잡힌 종교계가 사전에 경비병의 일부를 매수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대목이다.
결국 종교계의 주류는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의 헐거운 지갑에 거액을 찔러 주면서 예수님의 시체를 그의 제자들이 야밤에 "도둑질해 갔다"는 위조된 정보를 흘리라고 명하였다. 혹 이 일이 총독에게 알려져도 뒷탈이 없을 것이라며 안심시켜 주기까지 했다. 이건 종교계 인사들의 수상한 범정치적 오지랍 사이즈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정치권과 교계의 주류가 취한 반응은 부활을 감추고 왜곡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반응에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삶과 신앙에서 고립과 탄압과 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언로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봉쇄되고 제자들은 시체 도적질을 일삼고 거짓을 살포하는 비도덕적 처신의 주범으로 내몰렸다. 게다가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할 목격자인 여인들의 증언은 당시 법적인 효력을 가졌을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지금까지 부활의 종교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인간에게 가용한 모든 권모와 술수를 동원해도 부활의 역사성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는 증거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응하는 당시 종교계의 유치한 작태는 고작 손바닥 몇 개를 동원해 하늘을 덮겠다는 시도였다. 하늘의 땅의 창조자요 통치자인 하나님의 역사를 안개와 같이 사라질 인생이 뒤틀고 덮으려는 시도 자체가 경악할 오만이요 무지요 패악이다.
부활은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선포한다.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를 증거한다. 죄에 대한 고발 및 참소에 대한 공의와 자비의 승리를 확증한다. 인간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성공을 공포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크고 놀랍고 기쁜 반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계는 이것을 사람의 비열한 도모로 남루한 금품살포 비책으로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나귀도 웃을 일이고 돌들도 증언의 입술을 벌릴 일이겠다.
진리는 사람이 가린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사람이 탁 트인 무대에 올린다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전달은 기적이고 은혜이다. 오늘날 부활의 명확한 역사성이 숨쉬고 있다면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숨결로 간주함이 마땅하다.
2014년 4월 19일 토요일
영음사 방문
합신 채플은 세월호의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한 눈물의 기도로 질퍽했다. 기도가 끝나도 신학교의 흐느낌은 멈추지를 않았다. 예배가 끝나고 나는 영음사에 계신 조주석 목사님을 만나뵈러 핸들을 잡았다. 영음사에 계신 귀한 분들과 다같이 점심을 먹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점심을 전후로 끊임없이 쏟아내신 조 목사님의 특강이다. 노트를 챙겨가지 않아서 후회가 될 정도로 귀한 통찰과 교훈이 가득했다. 가슴에 오래 새겨 두어야 할 교훈들...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푸짐한 선물까지 주셨다. 최근에 출간된 박윤선 목사님의 책이었다. 폭풍흡입 들어갔다. 박 목사님 특유의 담백한 어법과 묵직한 교훈과 짙은 경건과 깊은 통찰이 알알이 박힌 책이었다. 4시간의 강의까지...슬픔과 기쁨과 흡족과 피곤이 두루 버무려진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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