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4일 목요일

칼빈 이후의 개혁 신학자들

개혁주의 신학총서 7권이 나왔네요.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 9명을 다루었고 저는 아만두스 폴라누스 신학을 맡았는데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옥고들 틈에 졸고를 끼워주신 황대우 교수님과 이상규 원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종교개혁 인물들의 뒤를 이어간 16-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을 인물별 전공자가 한 분씩 맡아서 책으로 묶어내는 시도는 처음인 듯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기원과 형성과 완성에 대한 연구가 한국 신학계에 새롭게 수혈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른 필자들은 아직 책을 입수하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군요.

<칼빈이후 개혁신학자들>

 1. 다네우스 (Lambert Daneaus, 1530-1595)
 2. 샹디외 (Antoine de la Roche Chandieu, 1534-1591)
 3. 퍼킨스 (William Perkins, 1558-1602)
 4. 폴라누스 (Amandus Polanus von Polandorf, 1561-1610) - 한병수
 5. 고마루스 (Franciscus Gomarus, 1563-1641)
 6. 에임스 (William Ames, 1576-1633)
 7. 푸티우스 (Gisbert Voetius, 1589-1676)
 8. 코케이우스 (Johannes Cocceius, 1603-1669)
 9. 튜레틴 (Francis Turretin, 1623-1687)

개혁주의 신학총서 7권: 칼빈 이후의 개혁 신학자들 (개혁주의학술원, 2013)

2013년 4월 3일 수요일

값없는 복음을 값없이 전하라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고전9:18)

이 구절은 복음의 내용과 복음증거 방식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의 마침표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최고의 선(summum bonum)이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이다. 그 복음은 만세 전부터 어떠한 조건도 고려하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서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신 은혜의 깊은 원인을 포함하며, 이 모든 일들을 시작하고 이루시는 하나님 자신이란 궁극적인 근원까지 포함한다. 사람의 어떠한 공로도 끼어들지 못한다. 복음은 값없는 속성을 가졌는데 이는 우리가 복음을 알지도 못했고 필요성도 몰랐고 구하지도 않았는데 주어졌기 때문이며, 복음이 인간의 값으로는 가늠할 수 없어서며, 또한 인간이 복음의 값을 지불한 적도 없어서다. 그래서 복음이다. 바울은 그런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자신의 권한도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말한다. 복음의 본질과 생의 원리가 무관하지 않아서다. 복음과 삶의 이러한 관계성은 주님께서 이미 본 보이신 것이었다. 1세기의 이스라엘 땅에서 주님의 등장은 오늘 같았으면 해외토픽 중에서도 일평생 일순위를 빼앗기지 않으셨을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물위를 걸으시고 앉은뱅이 일어서고 맹인이 세상을 보고 한센병자 정화되고 망자가 살아나고 태양이 빛까지 상실하고 무덤조차 입을 다물지 못하는 초유의 사건들이 주님의 움직임을 뒤따랐다. 주님께서 거하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용신할 수 없도록 인산인해 분위기를 연출했고, 주님의 만져주심 바라며 어린 아이들을 데려오매 제자들이 꾸짖는 걸 보시고 제자들을 꾸짖으실 정도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해야 할 정도였고, 옷자락 정도의 접촉조차 목막라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삭개오는 나무위의 구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집회마다 특별석과 우등석과 일반석을 구별하여 입장료만 챙겼어도 천문학적 액수의 소득을 거두었을 것이지만, 주님은 '그딴짓' 안하셨다. '누구든지 목이 마르다면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처세술 제로의 '미련한' 태도를 굽히지 않으셨다. 당연히 전대를 맡은 유다의 인상이 찌푸려질 일이겠다. 실제로 향유옥합 깨뜨려 물자를 허비한 여인에게 기회를 타서 터져나온 불평과 원성으로 그의 심기가 드러났다. 그때 주님은 자신의 '제자'보다 여인을 편들었을 정도로 세상의 경제관과 완전히 이질적인 관점을 보이셨다. 복음 때문이다. 복음이 복음으로 증거되기 위해 복음처럼 사시고자 하신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고 예수님의 삶은 방식이다. 바울은 그런 인생의 원리를 붙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로잡힌 것'이라고 해야겠다. 그리스도 안에 갇힌 복음의 일꾼이 어떠함을 주님께서 보이셨고 바울이 뒤따랐다.

프로그램 하나가 센세이션 일으키면 단가가 올라간다. 참가비도 비싸지고 관련 서적들도 베스트로 등극되고 강사들의 몸값도 올라간다. 당연히 집필에 뛰어들고 무대를 휘젓는 강사가 되어 한 몫 잡으려는 종교적 졸부들이 벌떼처럼 몰려드는 가관이 삽시간에 펼쳐진다. 성공이나 출세비법 들으려고 매달리는 목회자도 문제지만, 그런 인간의 유약한 심성을 이용하여 돈벌이의 방편을 고안하고 유포하는 인간들의 문제는 더더욱 심각하다. 사람이 아무리 복음의 심오한 경지를 깨닫고 현장에 구현했다 한들 예수님의 완전한 신지식과 무흠한 삶을 능가하는 자가 누구인가? 주님께서 이 땅에서 값없는 복음이 되시면서 복음을 복음답게 값없이 증거하신 모범을 보여 주셨다면 그보다 당연히 하등한 수준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찌 땅에서의 댓가와 거래하는 복음 훼방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바울을 주께서 귀하게 사용하신 이유는 분명하다. 값없는 복음을 값없이 전해서다.

성공의 첩경이요 출세의 지름길인 줄 알고 목회자의 길에 뛰어드는 분들이 많다. 동기의 뽀얀 속살을 현미경 눈동자로 관찰하면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혹 시작이야 그렇다 할지라도 목회자가 된다는 건 땅에서의 어떠한 보상에도 헐떡이지 않고 그것에 좌우되는 일도 없이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지고한 상급임을 인해 만족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를 일컫는다. 이런 언사를 겁없이 내뱉는 이유는 내가 그런 자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연약한 나 자신의 높은 부패 가능성을 알아서다. 내 입술에서 나온 타자화된 언술이 나를 노려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제어법이 없어서다. 복음의 값없는 본질에 걸맞은 값없는 방식으로 복음의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들~~~

2013년 4월 2일 화요일

죽음으로 부활을 추구하는 신앙

어떻게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게 된다면 (빌3:11)

이는 바울이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고 싶은 이유다. 주님은 부활의 첫열매다. 승천은 이전에도 있었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던 에녹과 불수레에 올라 회리바람 타고 승천한 엘리야가 대표적인 경우겠다. 바리새파 내에 당시의 최고 학풍이라 할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고 초고속 과정으로 제도권에 입문한 바울이 생의 종말을 죽음이 아닌 방식으로 맞이한 믿음의 두 거인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국권도 상실하고 민족의 정체성도 분해되어 현실보다 이상에 눈길이 쏠리는 상황에서 모두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시점인데, 불가피한 죽음이 아니라 자발적인 죽음의 길을 가겠단다.

진실로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거부하고 어떠한 대가나 희생이 요구된다 할지라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어하는 죽음을 오히려 쌍수로 맞이하는 '거북한' 판단과 삶을 고집했다. 범인들의 눈에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고 생각되는 대목이다. 바울의 이유는 한 가지다.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고난과 죽음 가운데서 이르신 그의 부활에 동참하고 싶어한다. 뭔가에 심각하게 중독되고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를 결박하고 사로잡은 주체는 세상의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 예수시다. 바울의 삶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경주였다. 이런 종류의 삶도 있다니!

바울이 밥먹듯이 내뱉았던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은 그의 인생관이 실린 고백이다. 그 고백의 문맥을 둘러싼 부활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의 그리스도 때문이다. 세상에는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카피하고 싶은 인생의 괜찮은 범례들이 적지 않다. 심오한 지혜와 광범위한 박식과 민첩한 처세술과 고매한 품격과 다복한 가정과 존경받는 리더십의 소유자가 얼마든지 찾아진다. 그런데도 그리스도 예수만을 알고 자랑하고 본받기로 작정했다. 게다가 그분의 멋지고 화려한 측면에 필이 박혀서 곱고 흠모할 만한 것들을 추구한 게 아니다.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도 등돌리고 거부하고 저주까지 했던 그런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에서 그 의미마저 좌우로 매달린 강도들의 동류처럼 간주되는 십자가의 죽음, 그걸 추구했다.

부활의 길과 죽음의 길은 동전의 양면이다. 공존한다. 취사선택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죽음의 고난이 없는 부활의 영광은 존재하지 않아서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라는 바울의 천국 후사관은 죽음과 부활 원리의 다른 표현이다. 각자에게 당한 고난의 경주가 있다. 시대마다 교회에 부과된 멍에와 고난의 짐이 있다. 주님께서 맡겨두신 것이다. 영광의 예고편일 뿐이다. 피하거나 거부하지 마시라. 주님은 쉽고 가볍다고 말씀한다. 그분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계셔서다. 바울이 부활의 영광 때문에 시작하여 중단할 수 없었던 십자가의 길은 쉽고 가벼웠다. 물리적인 어려움과 무거움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바울의 고난은 상상을 불허한다.

그러나 주님과의 동행 때문에 쉽고 가벼웠다. 우리에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생의 원리이다. 이런 원리가 삶의 체계로 굳어지면 좋겠다. 교회와 신학교에 수혈되면 좋겠다. 세상의 헤게모니 다툼이 명함도 못내밀 수준의 지저분한 정치와 부끄러운 거래가 죽음과 부활의 원리 앞에서 일곱길로 도망가면 좋겠다. 부활의 영광 때문에 죽음의 길을 기필코 가고야 말겠다는 바울의 각오와 판단이 목회자와 교수의 심장에서 격하게 박동하면 좋겠다. 죽음을 불쾌한 것으로 느끼고 있다면, 아직도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념할 의사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활은 연중행사 '부활절'의 당일치기 기념일 주제가 아니라 바울처럼 날마다 현장에 구현해서 기념해야 할 삶이다. 종교개혁 선배들이 절기 준행하는 것을 이교도적 행습으로 여겨 거절했던 결연한 정신의 회복이 목마른 아침이다...

2013년 4월 1일 월요일

그리스도 지옥강하

어느 페친이 질문을 주셨다: '주님께서 지옥으로 가셨다는 것의 교부적 해석과 베드로의 언급에 대한 해석에 관해 자세한 설명 부탁 드립니다.' 하여 다소 신학적인 이야기를 조금 길게 적는다. 관심자 외에는 스킵해도 되시겠다.

주님께서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descent into hell, descensus Christi ad inferos)는 말은 사도신경 영어판에 포함되어 있고 미국의 교회 대부분은 예배시에 그것을 읽습니다. 아들에게 익숙한 단어라 대화할 때 그냥 있는 그대로의 용어를 썼습니다. 이것의 의미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를 않아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는 것은 대체로 교부들의 보편적인 용어였던 것 같습니다. Polycarp, Justin Martyr, Origen, Hermas, Irenaeus, Cyprian, Tertullain, Hippolytus, Clement of Alexandria, Athanasius, Ambrose, Augustine 같은 분들의 글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최초의 언급은 2세기 초의 이그나티우스 서신에서 나타난 것이구요. Hell의 개념에 대해서는 Hades, Inferna, Netherworld, Grave, Suffering and Death 등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Hades는 신약에서 주로 망자의 영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망자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택자와 유기자를 모두 가리키는 것인지, 택자만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유기자만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다양해요. 대부분의 교부들은 예수님이 하데스로 강하하실 때에 그곳에는 구약의 의인들이 머물러 있었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로 요세푸스 경우,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데스가 의인과 불의한 사람이 함께 거하는 곳이라고 말하면서 본인은 하데스는 악인이 가는 곳이며 의인은 천국으로 곧장 간다는 입장을 펼칩니다. 필로는 다소 헬라화된 변경을 가하지만 대체로는 요세푸스 입장에 숟가락을 얹습니다. 랍비 문헌들 내에서도 크게 위의 두 입장으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데스를 게헨나(Gehenna)와 예리하게 구분하여 하데스는 죽은 망자들을 받았다가 생명과 심판의 부활 이후에는 게헨나로 바뀐다고 말합니다. 성경 안에서도 하데스를 모든 영혼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언급들(눅16:23, 26; 행2:27, 31; 시16:8-11)과 거기는 불의한 영혼만이 가는 곳이며 의인들의 경우는 다르게 표현되는 구절들(계20:13f; 눅16:9, 23:43; 고후5:8; 빌1:23; 히12:22)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해들과 맞물려 주님께서 지옥으로 강하하여 복음을 증거하신 것과 관련하여 이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떤 유익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1) 주님의 구속적인 행위가 구약의 족장들과 선지자들 등에게 제한됨 (Ignatius, Irenaeus, Tertullian), 2) 홍수 이전의 의로운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 (Clement of Alexandria 외에 Alexandrian theologians, Origen), 3) 대단히 악한 자 이외에는 모든 자들을 구원한다 (Melito, Gregory of Nazianzus, Ephraem) 등 교부들 사이에도 입장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Cyril of Alexandria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옥에 강하하여 성도를 삼키는 모든 하데스를 멸하셨고, 죽음의 만족할 줄 모르는 심연을 비웠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사단으로 절망에 처하게 만들고 마셨다는 얘깁니다. 루터주의 입장은 시릴의 재판인 셈입니다.

중세에는 이 문제가 천국, 지옥, 연옥, 족장들의 림보 (limbus patrum) 및 세례받지 않은 아이들의 림보와 하데스의 중간상태 사상이 서로 복잡하게 섞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경우, 그리스도 지옥강하 의미를 공간적인 이동이 아니라 영적인 효력으로 보면서 주님은 지하세계 가셨으나 불신자의 회심이 아니라 그들을 불신과 사악에 대해 부끄럽게 하시려고 가셨다고 말합니다. 의롭고 거룩한 족장들의 영혼은 주님의 강하로 원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게 되지만요. 아이들의 림보에 있는 영혼들은 또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루터는 전 그리스도(Totus Christus), 신이요 인간(Deus-Homo)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옥으로 가셨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가셔서 지옥을 파멸하고 사단을 결박하여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진정한 승리의 주가 되셨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지옥의 강하는 그리스도 승귀의 첫단계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루터파 중에서도 Flacius와 Calovius 같은 분들은 약간 다르게 주님의 지옥 강하를 유기자에 대한 심판의 정죄적인 표명이라 했습니다.

칼빈의 경우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의 지옥강하 용어를 용인하고 쓰면서도 개념적 구별을 가합니다. 즉 '지옥'은 '무덤'을 뜻하는 것이며 성부와 성자의 신적인 관계에서 성자가 버림을 당하시는 고통, 인간의 죄로 인한 결과지만 인간이 상상치도 못할 영적 고통과 아픔을 관통해야 하셨는데 그런 고통과 수난과 죽음과 무덤의 의미가 지옥이란 용어에 담겼다고 본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데스를 가셨다는 것은 이처럼 설명할 수 없도록 지옥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고통을 의미하는 풍유적 표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독론적 표현을 쓴다면, 그리스도 비하의 마지막 단계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견해는 이미 14세기 Durandus, Pico Della Mirandola, Nicholas of Cusa 등의 중세 인물들이 inferna를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형벌이란 뜻이라고 본 것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쯔빙글리 역시 그리스도 강하를 주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고통스런 형벌의 경험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이후로 개혁주의 입장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49-50)과 하이델 교리문답(44)에서 보이듯이 칼빈을 따라 주님의 지옥 강하를 그리스도 비하의 마지막 단계로 보는 것입니다. 영국 성공회와 심지어 바르트도 이런 입장을 취합니다.

저는 다소 절충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지옥을 무덤으로 간주하고 주님께서 지옥으로 가셨다는 것을 주님께서 경험하신 무한한 영적 고통의 풍유적 표현으로 보되, 동시에 물리적 장소적 강하는 아니지만 죽은 영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신 것으로 본다면, 택자에게 간 경우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초림으로 말미암는 복음의 최종적인 명료성을 알리시고 유기자에 대해서는 믿지 않은 고로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 이전의 모든 이들에게 확증시켜 입증하되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흔들지 못하는 승리의 최종적인 선언으로 보는 이해에 대해서도 문을 열어 놓는다는 입장 말입니다. 주님의 완전한 이루심을 선포하되 이로써 택자들이 비로소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유기자의 멸망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며, 택자들은 이미 받은 구원에 복음의 동일한 판명성을 확인하고 유기자는 멸망의 너무도 명백한 증거를 접하면서 그들의 멸망에 핑계나 변명이나 원망이 없어지고 결국 이렇게든 저렇게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엄중한 공의가 모두에게 증거되는 셈입니다. 칼빈이 첫번째 베드로 서신(3:19)을 설명할 때에 취한 태도처럼, 예수님이 찾아간 영혼들을 베드로가 명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두 그룹의 무차별적 혼합으로 여기지는 아니하되, 주님의 죽음은 택자들과 유기자들 모두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봄이 좋을 듯합니다.

제가 언급하지 않은 보다 다양한 견해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 생각과 다른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건강한 성경 교사들의 글들을 더 읽으면서 얼마든지 잘못되고 미비된 것은 수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계속 공부하고 생각하되, 칼빈이 취한 태도처럼 성경의 난해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이 벗겨주는 만큼 이해하는 것이 안전하고 성경의 명료한 부분들과 상치되는 경우에는 성경이 그은 계시의 경계선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일 듯합니다.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구체성 혹은 엄밀성의 차이에 관하여 성경을 훼손하지 않는 입장들에 대해서는 니편내편 떠나서 존중하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동시에 성경의 난해한 부분에 다양한 입장이 있다는 이유로 망측한 궤변으로 성경의 본질적 진리까지 뒤흔들며 교묘한 반사이익 챙기려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경계와 입장을 표명함이 좋을 듯합니다. 

앤아버 방문

오늘은 미국에서 꽤나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에 부활절 및 30주년 기념예배 참석차 다녀왔다. 존경하는 어르신들, 늘 그립고 사랑스런 형제 자매들, 어여쁘고 귀여운 아이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청소년들, 고국에 대한 사무친 향수를 달래기에 충분하고 벅차고 과분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타이를 풀고 하루종일 주저앉아 이야기 보따리를 실컷 풀어 교환하고 싶었지만 빌린 차 반납시간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털어야 했다.

 그런데 살인적인 고속도로 교통체증 때문에 반납시간 문턱을 몇발짝 넘어서고 말았다. 부과될 벌금 생각이 하루종일 가슴에 충전된 만남의 기쁨을 삽시간에 압도했다. 차량반납 장소는 고객들로 붐볐다. 5분을 기다려야 했는데 일하는 친구가 한 걸음에 뛰어와 굽신굽신 자세로 미안하다 말하면서 벌금은 부과않고 20불어치 쿠폰을 내밀며 기다리게 한 '죄'용서를 구하였다. 당근, 용서해 주었다.

하하하...완전 반전!!! 벌금을 쿠폰으로 바꾸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몸은 무쟈게 피곤한 지금, 화끈한 끝마무리 땜시 좋은 피곤한 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