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일 화요일

죽음으로 부활을 추구하는 신앙

어떻게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게 된다면 (빌3:11)

이는 바울이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고 싶은 이유다. 주님은 부활의 첫열매다. 승천은 이전에도 있었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던 에녹과 불수레에 올라 회리바람 타고 승천한 엘리야가 대표적인 경우겠다. 바리새파 내에 당시의 최고 학풍이라 할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고 초고속 과정으로 제도권에 입문한 바울이 생의 종말을 죽음이 아닌 방식으로 맞이한 믿음의 두 거인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국권도 상실하고 민족의 정체성도 분해되어 현실보다 이상에 눈길이 쏠리는 상황에서 모두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시점인데, 불가피한 죽음이 아니라 자발적인 죽음의 길을 가겠단다.

진실로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거부하고 어떠한 대가나 희생이 요구된다 할지라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어하는 죽음을 오히려 쌍수로 맞이하는 '거북한' 판단과 삶을 고집했다. 범인들의 눈에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고 생각되는 대목이다. 바울의 이유는 한 가지다.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고난과 죽음 가운데서 이르신 그의 부활에 동참하고 싶어한다. 뭔가에 심각하게 중독되고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를 결박하고 사로잡은 주체는 세상의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 예수시다. 바울의 삶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경주였다. 이런 종류의 삶도 있다니!

바울이 밥먹듯이 내뱉았던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은 그의 인생관이 실린 고백이다. 그 고백의 문맥을 둘러싼 부활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의 그리스도 때문이다. 세상에는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카피하고 싶은 인생의 괜찮은 범례들이 적지 않다. 심오한 지혜와 광범위한 박식과 민첩한 처세술과 고매한 품격과 다복한 가정과 존경받는 리더십의 소유자가 얼마든지 찾아진다. 그런데도 그리스도 예수만을 알고 자랑하고 본받기로 작정했다. 게다가 그분의 멋지고 화려한 측면에 필이 박혀서 곱고 흠모할 만한 것들을 추구한 게 아니다.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도 등돌리고 거부하고 저주까지 했던 그런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에서 그 의미마저 좌우로 매달린 강도들의 동류처럼 간주되는 십자가의 죽음, 그걸 추구했다.

부활의 길과 죽음의 길은 동전의 양면이다. 공존한다. 취사선택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죽음의 고난이 없는 부활의 영광은 존재하지 않아서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라는 바울의 천국 후사관은 죽음과 부활 원리의 다른 표현이다. 각자에게 당한 고난의 경주가 있다. 시대마다 교회에 부과된 멍에와 고난의 짐이 있다. 주님께서 맡겨두신 것이다. 영광의 예고편일 뿐이다. 피하거나 거부하지 마시라. 주님은 쉽고 가볍다고 말씀한다. 그분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계셔서다. 바울이 부활의 영광 때문에 시작하여 중단할 수 없었던 십자가의 길은 쉽고 가벼웠다. 물리적인 어려움과 무거움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바울의 고난은 상상을 불허한다.

그러나 주님과의 동행 때문에 쉽고 가벼웠다. 우리에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생의 원리이다. 이런 원리가 삶의 체계로 굳어지면 좋겠다. 교회와 신학교에 수혈되면 좋겠다. 세상의 헤게모니 다툼이 명함도 못내밀 수준의 지저분한 정치와 부끄러운 거래가 죽음과 부활의 원리 앞에서 일곱길로 도망가면 좋겠다. 부활의 영광 때문에 죽음의 길을 기필코 가고야 말겠다는 바울의 각오와 판단이 목회자와 교수의 심장에서 격하게 박동하면 좋겠다. 죽음을 불쾌한 것으로 느끼고 있다면, 아직도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념할 의사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활은 연중행사 '부활절'의 당일치기 기념일 주제가 아니라 바울처럼 날마다 현장에 구현해서 기념해야 할 삶이다. 종교개혁 선배들이 절기 준행하는 것을 이교도적 행습으로 여겨 거절했던 결연한 정신의 회복이 목마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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