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3일 수요일

값없는 복음을 값없이 전하라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고전9:18)

이 구절은 복음의 내용과 복음증거 방식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의 마침표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최고의 선(summum bonum)이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이다. 그 복음은 만세 전부터 어떠한 조건도 고려하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서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신 은혜의 깊은 원인을 포함하며, 이 모든 일들을 시작하고 이루시는 하나님 자신이란 궁극적인 근원까지 포함한다. 사람의 어떠한 공로도 끼어들지 못한다. 복음은 값없는 속성을 가졌는데 이는 우리가 복음을 알지도 못했고 필요성도 몰랐고 구하지도 않았는데 주어졌기 때문이며, 복음이 인간의 값으로는 가늠할 수 없어서며, 또한 인간이 복음의 값을 지불한 적도 없어서다. 그래서 복음이다. 바울은 그런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자신의 권한도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말한다. 복음의 본질과 생의 원리가 무관하지 않아서다. 복음과 삶의 이러한 관계성은 주님께서 이미 본 보이신 것이었다. 1세기의 이스라엘 땅에서 주님의 등장은 오늘 같았으면 해외토픽 중에서도 일평생 일순위를 빼앗기지 않으셨을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물위를 걸으시고 앉은뱅이 일어서고 맹인이 세상을 보고 한센병자 정화되고 망자가 살아나고 태양이 빛까지 상실하고 무덤조차 입을 다물지 못하는 초유의 사건들이 주님의 움직임을 뒤따랐다. 주님께서 거하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용신할 수 없도록 인산인해 분위기를 연출했고, 주님의 만져주심 바라며 어린 아이들을 데려오매 제자들이 꾸짖는 걸 보시고 제자들을 꾸짖으실 정도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해야 할 정도였고, 옷자락 정도의 접촉조차 목막라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삭개오는 나무위의 구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집회마다 특별석과 우등석과 일반석을 구별하여 입장료만 챙겼어도 천문학적 액수의 소득을 거두었을 것이지만, 주님은 '그딴짓' 안하셨다. '누구든지 목이 마르다면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처세술 제로의 '미련한' 태도를 굽히지 않으셨다. 당연히 전대를 맡은 유다의 인상이 찌푸려질 일이겠다. 실제로 향유옥합 깨뜨려 물자를 허비한 여인에게 기회를 타서 터져나온 불평과 원성으로 그의 심기가 드러났다. 그때 주님은 자신의 '제자'보다 여인을 편들었을 정도로 세상의 경제관과 완전히 이질적인 관점을 보이셨다. 복음 때문이다. 복음이 복음으로 증거되기 위해 복음처럼 사시고자 하신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고 예수님의 삶은 방식이다. 바울은 그런 인생의 원리를 붙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로잡힌 것'이라고 해야겠다. 그리스도 안에 갇힌 복음의 일꾼이 어떠함을 주님께서 보이셨고 바울이 뒤따랐다.

프로그램 하나가 센세이션 일으키면 단가가 올라간다. 참가비도 비싸지고 관련 서적들도 베스트로 등극되고 강사들의 몸값도 올라간다. 당연히 집필에 뛰어들고 무대를 휘젓는 강사가 되어 한 몫 잡으려는 종교적 졸부들이 벌떼처럼 몰려드는 가관이 삽시간에 펼쳐진다. 성공이나 출세비법 들으려고 매달리는 목회자도 문제지만, 그런 인간의 유약한 심성을 이용하여 돈벌이의 방편을 고안하고 유포하는 인간들의 문제는 더더욱 심각하다. 사람이 아무리 복음의 심오한 경지를 깨닫고 현장에 구현했다 한들 예수님의 완전한 신지식과 무흠한 삶을 능가하는 자가 누구인가? 주님께서 이 땅에서 값없는 복음이 되시면서 복음을 복음답게 값없이 증거하신 모범을 보여 주셨다면 그보다 당연히 하등한 수준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찌 땅에서의 댓가와 거래하는 복음 훼방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바울을 주께서 귀하게 사용하신 이유는 분명하다. 값없는 복음을 값없이 전해서다.

성공의 첩경이요 출세의 지름길인 줄 알고 목회자의 길에 뛰어드는 분들이 많다. 동기의 뽀얀 속살을 현미경 눈동자로 관찰하면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혹 시작이야 그렇다 할지라도 목회자가 된다는 건 땅에서의 어떠한 보상에도 헐떡이지 않고 그것에 좌우되는 일도 없이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지고한 상급임을 인해 만족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를 일컫는다. 이런 언사를 겁없이 내뱉는 이유는 내가 그런 자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연약한 나 자신의 높은 부패 가능성을 알아서다. 내 입술에서 나온 타자화된 언술이 나를 노려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제어법이 없어서다. 복음의 값없는 본질에 걸맞은 값없는 방식으로 복음의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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