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4일 화요일

칼빈의 우연

하나님의 섭리는 운명이나 우연한 사건과는 정반대다. 예나 지금이나 만사의 우연한 발생설은 보편적인 견해로 굳어졌다. 야수의 만남, 강풍의 급습과 배의 파선, 나무에 의한 압사 등은 다 우연이라 항목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말씀한다. 이 말씀에서 만사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따라 지배되고 있음을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의 손으로 지배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발휘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따라 원인이 추적되지 않는 온갖 수단들도 적정하게 사용하는 분이시다. 참으로 놀라운 일들의 원인인 태양의 빛을 만드시되 태양 이전에 빛을 만드신 것은 태양이 태양의 창조 이전에 존재하는 것들의 원리 혹은 필연적인 원인일 수 없음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태양 없이도 스스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태양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 히스기야 왕을 위하여 태양의 그림자가 십도 물러간 것은 태양의 일과적인 출몰은 자연의 맹목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자신의 부성적인 은총을 새로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친히 태양의 운행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전능은 이미 정해진 수로를 따라 흐르도록 강에게 명하는 그런 혼란한 운동의 일반적인 원리가 아니라 개개의 특수한 운동을 향해 작용하는 권능이다. 역경에 처했을 때에 우리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명령이 업이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는다. 우리에겐 기이한 힘, 기이한 활동, 기이한 운동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을 따라 모든 피조물은 지배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이 스스로 아시며 원하셔서 결정하지 않는 한 어떠한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섭리는 하나님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하늘에서 팔짱만 끼고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열쇠의 관리자가 되셔서 모든 사건을 지배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게을러서 활동하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에피큐로스 학파의 질병은 항상 세계에 충만하다. "우주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이 제정하신 자연의 질서를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신 개별 피조물을 특별히 돌보시기 때문이란 사실을 저들이 부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저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섭리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하진 않겠다." "우리는 하나님이 개개의 사건들을 조정하며 이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결정된 계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연히 발생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113:5-6). "성경은 하나님의 결정이 없이는 세상에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다 명백하게 설명하기 위해 가장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거들도 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난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신다"(시75:6-7). 나는 이 사실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 없이는 바람이 일어나지 않고 불지도 못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참조: Institutio I.xvi.

개혁교회 공통 신앙고백 컨설팅

Session 2:

Confessional Needs of This Century

21th century human identity

- Social identity is constructed
- With a variety of disordered loves
- Tolerance allows plural forms of identity
- Youth and emerging adults as homeless souls

21th century environment (social and natural) - VUCA

- Volatible
- Uncertain
- Complex
- Ambiguous

- 우리는 글로벌 흐름에 노출되어 있다. 권력에 대한 다른 견해들을 피력하고 있다. 성에 대한 이해도 복잡한 역학이 얽혀 있다.

- 교회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 관용의 시대에다. 다양한 형태의 표상을 허용하는 문화이다. 정부가 다양성을 억압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 세대는 묻는다.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는다.

- 불확실성 시대이다. 예측할 수 없는 문화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왜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생각하며 스스로의 가두어진 관점을 직시하게 된다.

- 변덕과 불확실과 복잡과 애매함이 시대를 규정하고 있다.

In this 21th century setting how are global and local church dynamics changing?

- observe
- name
- describe

Public statements of faith shape church self-identity

Does that identity need reshaping?
여기서 말하는 identity는 무엇을 뜻하는가? 만약 이것이 교회의 본질(nature of church)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과연 교회의 본질이 변했는가? 그렇다면 새로운 고백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교회를 둘러싼 작금의 환경에 포커스를 둔 교회의 변화된 정체성을 표명하는 것이라면 고백서가 아니라 다른 어떤 종류의 선언문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들이 변한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대문에 해석에 있어서 특정한 상황에 걸맞는 변화가 강조점 차원에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벨하: 만약 사람들의 삶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무수한 고백서는 무효하다. 고백서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한다.

고백서는 말씀에 대한 보다 견고한 반응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회 정체성 이해가 핵심이다.

남아공 상황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혼합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고백서가 필요하지 않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 상대주의, 각자의 진리가 있다. 우리는 고백서를 reality of current day라고 생각한다. 개념 정의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교회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신조이다. 그러나 개별 교회는 각자의 처한 상황 속에서 시대적 과제를 푸는 고백서를 산출하는 것은 당연하다...(남아공 대표자)

모든 회중이 교회이다. 교회는 행동할 권리를 가진다. 고백서를 산출할 수 있다 (독일 대표자)

- In inviting ways
- With appropriate boundary lines
- Globally as one in Christ Jesus

Public statements shape church witness to the world

Does the global Reformed church need to update its witness?

- Who needs our global witness?
- Can public statements of faith aid that witness?

- 우리가 어떻게 진리에 변경을 가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고백서가 필요한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던 문화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다. 교회정치, 혹은 문화 때문에 고백서의 개념에 차이가 발생한다. 고백서가 삶의 실천과 연관성이 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민이 글로벌 교회 현상을 촉진했다. 교회를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고백서는 가슴에서 나와야 한다. 가슴에 호소하는 것이어야 한다. (카멜론 대표)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언어를 사용하고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남아공 대표)

벨하의 핵심은 고백서로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회개가 관건이다. 

2014년 2월 3일 월요일

한병수의 토론법

중요한 토론에 앞서 생각해야 할 부분들

1. 토론은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는 수단이 아니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타인의 견해와 평가를 건지는 기회이다. 싸움과 승리의 개념에서 벗어나라. 그런 개념이 토론을 지배하면 감정이 상하고 관계가 깨어진다.

2. 토론은 구두로 전달되는 견해의 교환만이 아니다. 표정도 언어이고 반응의 시기와 속도와 색깔과 어투도 많은 내용을 전달하는 언어이다. 입술로 구술된 내용에만 집착하여 상대방의 종합적인 견해를 간과하면 오해의 챗바퀴만 돌아간다.

3. 찬성과 반대의 반응에 감정으로 대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찬성하면 함박꽃이 피고 반대하면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은 때때로 상대방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훼방하는 압박용 행위로 기능한다. 유도하고 몰아 붙이는 수단의 일환으로 말이다.

4. 토론의 주제를 정확히 숙지하고 가능한한 객관적인 논거들을 수집하고 그것에 근거한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정리하고 명료하게 표현한다. 객관적인 논거가 자신의 입장과 충돌될 경우에는 그런 약점도 솔직히 밝히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방어로 기능한다.

5. 토론하는 내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 전체를 의식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과 뜻과 계획과 역사를 사려하며 지금 입술을 열어 말하는 모든 내용들이 거기에 최대한 부합할 수 있도록 마땅히 해야 할 말들을 입에 물려 달라고 성령께 의뢰한다.

6. 토론의 목적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알아가고 순종하는 것에 있다. 이는 상대방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목적과 동전의 양면처럼 등짝을 맞대고 있다. 상대방의 견해를 꺾어야 직성이 풀리는 체질을 가졌다면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것이다. 개선하라.

7. 반론이나 모순이나 억지의 주장을 들어도 절대 흥분하지 않는다. 흥분은 자신의 바닥을 급하게 드러내는 행위이다. 오히려 정확히 듣고 이해하는 경청의 태도를 끝까지 견지하고 침착하게 조목조목 반문하고 재발론을 제시하고 근거를 밝히는 것이 불필요한 갈등과 주변적인 이슈들로 인한 논지의 흐려짐을 면하는 방법이다.

8. 찬성보다 반대에서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고 더 풍성한 이해와 설명이 자극된다. 반대의 유익을 기억하고 반대자를 환영하고 존중한다. 그런 마음의 태도는 토론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능력이다. 그런 분위기의 보존이 건설적인 토론을 가능하게 한다.

9. 토론도 산제사의 일부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다. 사람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간주하면 사람들의 입장 키재기로 그칠 공산이 크다. 한마디 한마디를 상대방의 입장 격파하는 목적이 아니라 신앙고백 하듯이 진실되게 내뱉어야 한다.

10. 토론은 사랑의 수단이다.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올바른 생각을 교환하고 서로의 약점과 단점이 개선될 수 있도록 지적과 평가와 대안의 입술을 여는 행위이다. 모든 율법이 사랑에서 이루듯이, 토론도 사랑에서 종결됨이 합당하다.

2014년 2월 2일 일요일

베드로의 선택: 하나님의 아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마14:28, 22-33)

도입: 인생은 선택의 충만과 연속인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도 선택이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도 선택이고 어디를 가는 것도 선택이고 누구를 만나는 것도 선택이고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선택이고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선택이고 불평하고 감사하는 것도 선택이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도 선택이기 때문에 선택을 떠나서는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삶과 선택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선택의 달인이 될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베드로의 예수님 선택을 살피면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를 선택하는 삶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배경: 본문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발생한 일입니다. 22절에 보면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는 예수님의 다급한 모습이 나옵니다.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왜 그렇게 서두르신 것일까요? 그것은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보인 무리들의 반응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요한의 기록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고" 했다고 나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급한 필요인 끼니를 경이로운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경험한 무리들이 로마의 압제에 짓눌려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고대하던 그 오랜 갈망이 예수님에 의해 해소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으로 의도했던 목적을 완전히 빗나간 것입니다. 광야에서 주린 자들을 먹이신 것은 바람과 모래만 가득한 광야에서 맛나로 조상들을 먹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깨닫게 하고 맛나의 실체가 바로 자신의 피와 살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 것인데 그런 목적이 무산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매한 갈망과 기대를 접한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슬프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그 이후에 벳새다로 가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곳으로 먼저 제자들을 재촉하여 보내신 것은 제자들도 무리들의 정치적 메시야 추구에 경도되고 거기에 반응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할 사명을 져버릴 수 있음을 아시고 취한 조치인 듯합니다. 사실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는 그들의 모친과 더불어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발탁해 달라는 정치적 야심을 내비쳤고 이에 다른 제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도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갈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이런 유아적인 상태에 있는 제자들을 보호하실 의도로 제자들을 서둘러 뱃길에 오르도록 독촉하신 듯합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적인 메시야란 사실을 보이고자 한 사건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베드로가 물 위로 걸은 기적 이후에는 예수님의 신분을 의심하는 종교 지도자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냐에 대한 기적과 의심 사이에 센드위치처럼 끼어 있습니다. 당연히 본문도 그리스도 예수의 정체성 계시와 관계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배를 타고 건너편에 간너가는 중에 일어난 놀라운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기록처럼 오병이어 사건의 장소는 벳세다로 가는 도상에 있는 한 들판이라 한다면 제자들은 그 근방에서 벳새다로 가고자 했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항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그들의 가는 뱃길이 순적하지 않았고 역풍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도했던 벳세다로 가지 못하고 예기치 않게 게네사렛 지역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실 육로와 해로의 길이가 비슷하기 때문에 제자들이 얼마든지 걸어서도 갈 수 있었는데 뱃길을 택한 것을 보면 폭풍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5절을 보십시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지 않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십시오.

제자들이 뱃길에 오른 시점은 저녁 직후이기 때문에 늦어도 8시에는 육지를 떠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밤 사경이 새벽 3시부터 6시에 해당되는 시간이라 한다면 배를 탄 시간은 최소한 7시간 이상이고 역풍과 사투를 벌인 시간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참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심기가 심히 불편하고 슬프고 두려운 상황에서 인간적인 재앙만이 아니라 자연적인 재앙까지 맞이하고 여러 시간 사투까지 벌이는 제자들의 심경은 한마디로 참담했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와 슬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까지 있었을 지도 모를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물로 뛰어들어 주님께로 갔고 다른 제자들은 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세찬 바람을 보고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이에 주님은 베드로를 건져주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을 하였느냐?"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께 배에 오르매 바람이 그쳤다고 말합니다.  

생각1: (폭풍과 인생) 제자들이 폭풍을 만난 것은 우리가 처한 삶의 현실과 상당히 유사해 보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발생한 폭풍은 평소에는 잠잠하다 급작스런 변화가 일어나는 지중해성 기후의 전형적인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지도 않았고 특별한 원인이 제공되지 않았는데 커다란 위협과 공포가 인기척도 없이 배를 급습하는 것, 마치 인생이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합니다. 

생각2: (도전과 망설임) 여기서 제자들이 경험한 폭풍은 선택의 대상이 아닙니다. 선택의 자유와 무관하게 들이닥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고통을 당했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을 때에는 두려워 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어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며 아우성을 질렀다고 말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입술을 열어 "만일 주시라면 물 위로 걸어가게 명령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주님께서 "오라" 하셔서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위협적인 환경을 보다가 믿음은 의심으로 교체되고 물 위를 걷던 발은 물 속으로 빨려들어 갔습니다. 결국 실패한 것입니다. 

생각3: (진정한 성공과 실패)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는 어떤 것일까요? 그의 실패는 자신의 연약한 믿음과 의심 때문에 발생한 일이지만 결국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받아 함께 물위를 걸어서 배로 돌아 왔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과 주님의 강함을 경험했고 자신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로 진정한 성공의 근원이 어떤 것인지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에 머물러 있었던 제자들은 비록 베드로의 실패는 모면할 수 있었지만 주님의 성공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생각4: (무모한 도전?)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불에 뛰어든 것을 보고서 무모하고 돌발적인 행동을 취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배의 행선지라 할 벳세다 출신 어부였고 그것도 신출래기 어부가 아니라 수십년의 경험을 가진 베테랑 어부였기 때문에 폭풍에 출렁이는 바다의 위험성과 대처법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을 것이기 때문에 충동적인 행동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베드로는 위험을 알면서도 뛰어든 것입니다. 이 행동은 오히려 "오라"는 예수님의 명령과 베드로 자신의 믿음에 의해 촉발된 행동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생각5: (두려움과 본질) 상황을 다시 보십시오. 모든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두려움이 닥치면 사사로운 일들은 뒷전으로 밀리고 사느냐 죽느냐의 가장 긴급하고 본질적인 문제만이 전면에 부곽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유일한 관심사는 사느냐 죽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다른 것에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본질에 대한 집중력의 차이를 낳습니다. 비록 동일한 폭풍 가운데에 있지만 베드로가 물 위에 선 것과는 달리 다른 제자들은 배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마도 그 제자들은 배 안에서의 상황이 물 위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배는 물보다 더 안전한 곳입니다. 당연히 배의 안전은 그들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기에 그들의 생각과 마음과 시간과 도모와 에너지도 본질이 아닌 수단에 불과한 배에 쏠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6: (베드로의 선택은 동행) 교회도 이러한 두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교회는 사느냐 죽느냐의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나 어떤 교회는 안전의 유무가 교회의 재정과 건물과 조직과 행정에 있다고 생각하여 거기에 엄청난 재원을 쏟습니다. 교회에는 상당히 많은 사사로운 일들과 비본질적 사안들이 막대한 재원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분쟁과 말썽과 대립과 다툼과 분열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일들에 일일이 개입해야 한다면 몸이 열이라도, 인생을 수십번 살더라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선택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는 폭풍에 격동하는 바다의 위험을 알면서도 예수님과 더불어 있으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더 편하고 안전하게 보이는 배 안에 머물고자 하지 않고 겉으로는 불편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물에 뛰어들어 주님께로 간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위기는 폭풍처럼 격동하는 세상이 교회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위기의 본질은 오히려 자신의 안목을 따라 안전이라 판단되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되 정작 주님과는 동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생각7: (궁극적인 실패) 실패는 가시적인 행동이 아니라 무의식적 상태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에서 실패를 생각하면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든 가시적인 모습이 눈앞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두려움의 현장에 찾아 오셨어도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 배에 머물고자 했던 다른 제자들의 상태가 제 눈에는 실패로 보입니다. 이런 실패는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했던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피난처요 안식처가 되십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못하는 분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천사나 인간이나 동물이나 하늘과 땅에 있는 그 어떠한 것도 감히 겁박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이보다 더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안식처가 없습니다. 모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생각8: (주님과의 '불편한' 동행)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동거하고 동행하는 것의 실상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녹의 경우에도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들리운 것을 마치 에덴동산 같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에서 일평생 주님과 걷다가 죽음도 생략하고 천국으로 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랬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고속도로 같이 평탄하고 순적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협착한 길입니다. 문도 좁아서 출입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길입니다. 제자들만 보아도 12명 중에서 베드로만 주님께로 갔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마치 삶과 죽음이 등짝을 맞대고 있는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있는다고 해서 폭풍이 자동으로 잠잠해 지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님께로 가서 주님과 동행을 했지만 폭풍의 기세가 꺾어진 것은 아닙니다. 배에 돌아왔을 때에 비로소 바람이 그쳤다고 말합니다. 주님과의 동행을 편안하고 나른한 땅에서의 안식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좁고 협착하고 불편하고 위태로운 길처럼 보이는 인생의 길입니다. 

생각9: (하나님의 아들) 베드로를 비롯하여 이 상황을 지켜본 모든 제자들은 엎드려 절하며 경의를 표할 정도로 심히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적 자체에 눈이 휘둥그레 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물에서의 걷기가 어떻게 가능하며 어떤 것인지의 문제로 쑥덕대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으로 반응을 했습니다. 요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거친 자연이 예수님께 순한 양처럼 순응하는 기이한 일을 면밀히 분석하고 꼼꼼하게 모방하고 싶어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런 수단적인 것에 관심을 빼앗기지 않고 이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신 주체로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의 종착지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무리에게 전달하기 원하였던 교훈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안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 및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동의했던 고백의 씨앗은 이때부터 심겨졌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다른 제자들도 삶의 선택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 뿐이라는 교훈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경험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수렴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기적적인 경험 자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여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베드로의 가시적인 실패와 다른 제자들의 무의식적 상태의 실패보다 훨씬 심각하고 은밀한 실패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기적에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따라서는 안되는데 기적에 머물면 그런 실패를 답습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맛보고도 주님께로 나아가지 않는 분들의 전형적인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교훈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적용

1.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하고 전능하고 전지하고 자비롭고 인자하고 공의롭고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만물과 역사의 창조자요 주인이요 통치자요 심판자가 되신다는 지식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분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폭풍의 한 가운데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이 가장 안전한 안식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2. 사나운 폭풍이 우리의 인생을 강타할 때에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두려운 상황은 오히려 우리에게 본질을 보여주고 사사로운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돌리게 만들며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선명하게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환란날에 주님을 구하면 그가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놀라운 축복의 징후가 폭풍일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3. 선택의 기로에서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동행하는 길을 가십시오. 물 위를 걷고 싶다면 만족과 안주의 배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를 배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땅의 안전과 만족과 안식을 과감히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안전하다 생각하는 때가 안전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망각하는 가장 위태로운 때일 수 있습니다. 편안하고 안전하고 무탈한 삶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겉으로는 조금 더 불편하고 조금 더 불안하고 조금 더 분주해도 물이라는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현장으로 뛰어드는 것이 본질적인 안전을 추구하는 길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증거하는 길입니다. 

4. 주님과 동행할 때에 경이로운 일들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자랑하지 마십시오. 특이한 경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수단일 뿐입니다. 이적과 기사 자체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자연'처럼 보이는 경이로운 기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수효를 능히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모든 자연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무감각은 누구의 개입도 없는 자연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항구적인 기적에 적응되고 익숙해진 것일 뿐입니다. 무수한 기적들 중에 몇 가지를 경험한 것에 신앙과 인생을 걸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무한한 기적의 몇 조각을 경험했을 뿐입니다.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기적은 그러한 본질의 수단일 뿐입니다. 

5. 실패를 두려워 마십시오. 믿음이 작고 의심이 있다는 지적도 두려워 마십시오. 실패하면 실패를 경험하고 그 실패를 아는 것만큼 성공한 것입니다. 나의 한계를 알면 아는 만큼 성공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의 선택을 저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이해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기준을 취하는 순간 삶의 모든 내용들은 그 기준의 횡포에 노출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환난이 닥칠 때마다 세상의 기준을 홍보하는 처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거하고 동행하는 것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환란이든 형통이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만 영화롭게 되고 증거될 것입니다.

6. 김명일 목사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위대한 분이심을 보는 구경꾼이 되지 말고 그분을 담아내는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배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관찰하고 위대한 분이라고 찬양하는 것은 쉽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위인들을 존경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명이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자여야 하고 그분의 위대하고 영화로운 생명의 복음을 체득하고 전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막상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실 때 입을 열어서 고백할 수 있었던 사람은 베드로 뿐이었습니다.

7. 편하고 익숙한 삶에 젖으면 믿음으로 사는 삶의 원리를 상실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을 얻었어도 믿음을 빼앗기면 모든 것들을 잃는 것입니다.

8. 주님과 동행하는 것과 무관한 모든 것들은 개인이든 교회이든 과감하게 제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번거롭고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도 수반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과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때때로 그런 고통의 결단이 감수해야 할 듯합니다. 편하고 익숙한 것에 안주하는 것보다 불편하고 낯설어도 예수님과 동거하고 동행하는 것이 훨씬 났습니다. 

2014년 2월 1일 토요일

신비 (Jeremy Begbie)

신비(Mysterion)란, 1) hiddenness, 2) ungraspability, 3) ambiguity, 4) paradox.

신비에 대한 두 가지의 사유방식:

1. mystery - driven by negatives

     1) What we can’t know: 하나님 지식은 인간이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가? God’s self inaccessible. 인간은 유한한데 하나님은 무한하다. 우리는 예배를 하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올려도 하나님 자신에 도달하진 못한다.
     2) What we can’t speak about: God’s self unspeakable (apaphatic tradition: 위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가 대표적인 인물),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만질 수 없고 지각할 수 없다. PPST. 음악,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전달하는 도구이다. 보이지 않고 세상을 넘어선 것에 도달하는 수단이다. Music opens the door for us to an unknown realm a world that has nothing in common with the outer world of the senses that...
     3) 신비의 건조화를 피해야 한다.

2. mystery – driven by pasitives

신약에서 신비는 open secret이다. 즉 The saving plan of God, shown and effected in Jesus Christ. Christ himself is the mystery of God. 복음으로 하나님의 신비가 드러났다. 그런데 왜 신비라고 말하는가? Mystery needs to be revealed.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시는데 이는 사람에게 발견되게 하려 하심이다. God’s self accessible. God’s self becomes speakable. 복음을 통해서다. 말씀을 통해서다. 우리의 세상은 신비 자체가 파고든다.

신비의 네 가지 의미는 예배에 의해 극복된다.

1) Recovery of hiddenness. 우리는 스스로 발견할 수 없다. 1) 신비는 우리에게 보여질 필요가 있다. Infinites of space and time. Melody fragments a music of compassion, noise of enchantment. Among the inner parts something open. Something wild a long rumour of wisdom keeps winding into each tune cantus firmus fierce vigil of contingency love’s congruence. Michael o’siadhail.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아무리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도 소음일 뿐이다. 음악적인 매타포,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위해 필요하다. 말과 이미지는 그것을 통하여 실질적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우주를 보라. 기계가 아니다. 건축을 보라. 건물에 투영된 우주와 세상과 신판과 긍휼을 보라. 우리의 보는 눈을 돕는다. 생명의 나무,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모든 열방의 치유를 위해 접근이 가능하다. 놀라운 우주의 광대함과 경이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 냉소, 무신경 등등...

2) Recovery of ungraspability, 이것은 성경의 단어 ‘신비’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신비는 계시되어 파악되는 것으로서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연합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uncontainable이다. 무한하다. 그래서 드러난 신비이고 유한을 옷입은 무한이다. 말할 수 없고 형설할 수 없는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되신 분이시다. 음악은 이런 상황에 중요한 수단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음악가의 중요성은 지대하다. 우리가 증거하고 들어야 할 복음이 전달되는 수레이다. What is the world that art takes for granted? It is one in which perception is always incomplete...

3) Recovery of ambiguity.
        Present age                 Resurrection of Jesus + outpouring of Spirit
                                          Coming age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부으심 때문에 모든 이 땅에서의 애매함은 사라진다. 복음은 현재를 부정하는 듯하나 진정한 현재와 실재를 말하기 때문에 애매한 것이 아니다. 음악과 예술에서 아직 이르지 않은 미래에 대해 앞당겨 묘사하고 말하고 표상한다.

4) Recovery of paradox.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희생. 모든 역설은 이것에 집중한다. 온 세상에 모든 관원들의 눈에는 덮혀진 것이었다. 당연히 십자가는 역설이다. 많은 비유가 역설을 활용한다. 음악과 예술. 캠브리지 교회의 동쪽 창문. 윗쪽 창문. 예수님의 십자가, 그 밑에 실재의 역사적인 왕의 그림이 있다. 아마도 헨리 8세이다. 누가 진짜 왕인가? 여기서 진정한 권세의 역설이 풀어진다. 신비는 우리를 흡입한다.

James MacMillan. 수치스런 십자가 죽음이 영광과 입맞춘다. 주님의 내려오심, 그것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심. 역설이다. 음악은 하강과 상승이 교차한다. 거기에 조화가 아름다운 향기를 풍긴다. 감미로운 멜로디와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이 병행하는 음악을 들었다. 음악은 언어가 서술하지 못하는 그런 역설의 신비를 묘사한다.

2014년 1월 31일 오전 10시, Calvin College Chap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