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Mysterion)란, 1) hiddenness, 2) ungraspability, 3) ambiguity, 4) paradox.
신비에 대한 두 가지의 사유방식:
1. mystery - driven by negatives
1) What we can’t know: 하나님 지식은 인간이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가? God’s self inaccessible. 인간은 유한한데 하나님은 무한하다. 우리는 예배를 하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올려도 하나님 자신에 도달하진 못한다.
2) What we can’t speak about: God’s self unspeakable (apaphatic tradition: 위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가 대표적인 인물),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만질 수 없고 지각할 수 없다. PPST. 음악,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전달하는 도구이다. 보이지 않고 세상을 넘어선 것에 도달하는 수단이다. Music opens the door for us to an unknown realm a world that has nothing in common with the outer world of the senses that...
3) 신비의 건조화를 피해야 한다.
2. mystery – driven by pasitives
신약에서 신비는 open secret이다. 즉 The saving plan of God, shown and effected in Jesus Christ. Christ himself is the mystery of God. 복음으로 하나님의 신비가 드러났다. 그런데 왜 신비라고 말하는가? Mystery needs to be revealed.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시는데 이는 사람에게 발견되게 하려 하심이다. God’s self accessible. God’s self becomes speakable. 복음을 통해서다. 말씀을 통해서다. 우리의 세상은 신비 자체가 파고든다.
신비의 네 가지 의미는 예배에 의해 극복된다.
1) Recovery of hiddenness. 우리는 스스로 발견할 수 없다. 1) 신비는 우리에게 보여질 필요가 있다. Infinites of space and time. Melody fragments a music of compassion, noise of enchantment. Among the inner parts something open. Something wild a long rumour of wisdom keeps winding into each tune cantus firmus fierce vigil of contingency love’s congruence. Michael o’siadhail.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아무리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도 소음일 뿐이다. 음악적인 매타포,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위해 필요하다. 말과 이미지는 그것을 통하여 실질적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우주를 보라. 기계가 아니다. 건축을 보라. 건물에 투영된 우주와 세상과 신판과 긍휼을 보라. 우리의 보는 눈을 돕는다. 생명의 나무,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모든 열방의 치유를 위해 접근이 가능하다. 놀라운 우주의 광대함과 경이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 냉소, 무신경 등등...
2) Recovery of ungraspability, 이것은 성경의 단어 ‘신비’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신비는 계시되어 파악되는 것으로서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연합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uncontainable이다. 무한하다. 그래서 드러난 신비이고 유한을 옷입은 무한이다. 말할 수 없고 형설할 수 없는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되신 분이시다. 음악은 이런 상황에 중요한 수단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음악가의 중요성은 지대하다. 우리가 증거하고 들어야 할 복음이 전달되는 수레이다. What is the world that art takes for granted? It is one in which perception is always incomplete...
3) Recovery of ambiguity.
Present age Resurrection of Jesus + outpouring of Spirit
Coming age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부으심 때문에 모든 이 땅에서의 애매함은 사라진다. 복음은 현재를 부정하는 듯하나 진정한 현재와 실재를 말하기 때문에 애매한 것이 아니다. 음악과 예술에서 아직 이르지 않은 미래에 대해 앞당겨 묘사하고 말하고 표상한다.
4) Recovery of paradox.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희생. 모든 역설은 이것에 집중한다. 온 세상에 모든 관원들의 눈에는 덮혀진 것이었다. 당연히 십자가는 역설이다. 많은 비유가 역설을 활용한다. 음악과 예술. 캠브리지 교회의 동쪽 창문. 윗쪽 창문. 예수님의 십자가, 그 밑에 실재의 역사적인 왕의 그림이 있다. 아마도 헨리 8세이다. 누가 진짜 왕인가? 여기서 진정한 권세의 역설이 풀어진다. 신비는 우리를 흡입한다.
James MacMillan. 수치스런 십자가 죽음이 영광과 입맞춘다. 주님의 내려오심, 그것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심. 역설이다. 음악은 하강과 상승이 교차한다. 거기에 조화가 아름다운 향기를 풍긴다. 감미로운 멜로디와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이 병행하는 음악을 들었다. 음악은 언어가 서술하지 못하는 그런 역설의 신비를 묘사한다.
2014년 1월 31일 오전 10시, Calvin College Chapel
신비에 대한 두 가지의 사유방식:
1. mystery - driven by negatives
1) What we can’t know: 하나님 지식은 인간이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가? God’s self inaccessible. 인간은 유한한데 하나님은 무한하다. 우리는 예배를 하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올려도 하나님 자신에 도달하진 못한다.
2) What we can’t speak about: God’s self unspeakable (apaphatic tradition: 위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가 대표적인 인물),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만질 수 없고 지각할 수 없다. PPST. 음악,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전달하는 도구이다. 보이지 않고 세상을 넘어선 것에 도달하는 수단이다. Music opens the door for us to an unknown realm a world that has nothing in common with the outer world of the senses that...
3) 신비의 건조화를 피해야 한다.
2. mystery – driven by pasitives
신약에서 신비는 open secret이다. 즉 The saving plan of God, shown and effected in Jesus Christ. Christ himself is the mystery of God. 복음으로 하나님의 신비가 드러났다. 그런데 왜 신비라고 말하는가? Mystery needs to be revealed.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시는데 이는 사람에게 발견되게 하려 하심이다. God’s self accessible. God’s self becomes speakable. 복음을 통해서다. 말씀을 통해서다. 우리의 세상은 신비 자체가 파고든다.
신비의 네 가지 의미는 예배에 의해 극복된다.
1) Recovery of hiddenness. 우리는 스스로 발견할 수 없다. 1) 신비는 우리에게 보여질 필요가 있다. Infinites of space and time. Melody fragments a music of compassion, noise of enchantment. Among the inner parts something open. Something wild a long rumour of wisdom keeps winding into each tune cantus firmus fierce vigil of contingency love’s congruence. Michael o’siadhail.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아무리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도 소음일 뿐이다. 음악적인 매타포,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위해 필요하다. 말과 이미지는 그것을 통하여 실질적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우주를 보라. 기계가 아니다. 건축을 보라. 건물에 투영된 우주와 세상과 신판과 긍휼을 보라. 우리의 보는 눈을 돕는다. 생명의 나무,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모든 열방의 치유를 위해 접근이 가능하다. 놀라운 우주의 광대함과 경이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 냉소, 무신경 등등...
2) Recovery of ungraspability, 이것은 성경의 단어 ‘신비’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신비는 계시되어 파악되는 것으로서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연합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uncontainable이다. 무한하다. 그래서 드러난 신비이고 유한을 옷입은 무한이다. 말할 수 없고 형설할 수 없는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되신 분이시다. 음악은 이런 상황에 중요한 수단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음악가의 중요성은 지대하다. 우리가 증거하고 들어야 할 복음이 전달되는 수레이다. What is the world that art takes for granted? It is one in which perception is always incomplete...
3) Recovery of ambiguity.
Present age Resurrection of Jesus + outpouring of Spirit
Coming age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부으심 때문에 모든 이 땅에서의 애매함은 사라진다. 복음은 현재를 부정하는 듯하나 진정한 현재와 실재를 말하기 때문에 애매한 것이 아니다. 음악과 예술에서 아직 이르지 않은 미래에 대해 앞당겨 묘사하고 말하고 표상한다.
4) Recovery of paradox.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희생. 모든 역설은 이것에 집중한다. 온 세상에 모든 관원들의 눈에는 덮혀진 것이었다. 당연히 십자가는 역설이다. 많은 비유가 역설을 활용한다. 음악과 예술. 캠브리지 교회의 동쪽 창문. 윗쪽 창문. 예수님의 십자가, 그 밑에 실재의 역사적인 왕의 그림이 있다. 아마도 헨리 8세이다. 누가 진짜 왕인가? 여기서 진정한 권세의 역설이 풀어진다. 신비는 우리를 흡입한다.
James MacMillan. 수치스런 십자가 죽음이 영광과 입맞춘다. 주님의 내려오심, 그것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심. 역설이다. 음악은 하강과 상승이 교차한다. 거기에 조화가 아름다운 향기를 풍긴다. 감미로운 멜로디와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이 병행하는 음악을 들었다. 음악은 언어가 서술하지 못하는 그런 역설의 신비를 묘사한다.
2014년 1월 31일 오전 10시, Calvin College Cha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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