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일 일요일

베드로의 선택: 하나님의 아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마14:28, 22-33)

도입: 인생은 선택의 충만과 연속인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도 선택이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도 선택이고 어디를 가는 것도 선택이고 누구를 만나는 것도 선택이고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선택이고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선택이고 불평하고 감사하는 것도 선택이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도 선택이기 때문에 선택을 떠나서는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삶과 선택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선택의 달인이 될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베드로의 예수님 선택을 살피면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를 선택하는 삶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배경: 본문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발생한 일입니다. 22절에 보면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는 예수님의 다급한 모습이 나옵니다.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왜 그렇게 서두르신 것일까요? 그것은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보인 무리들의 반응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요한의 기록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고" 했다고 나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급한 필요인 끼니를 경이로운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경험한 무리들이 로마의 압제에 짓눌려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고대하던 그 오랜 갈망이 예수님에 의해 해소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으로 의도했던 목적을 완전히 빗나간 것입니다. 광야에서 주린 자들을 먹이신 것은 바람과 모래만 가득한 광야에서 맛나로 조상들을 먹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깨닫게 하고 맛나의 실체가 바로 자신의 피와 살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 것인데 그런 목적이 무산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매한 갈망과 기대를 접한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슬프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그 이후에 벳새다로 가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곳으로 먼저 제자들을 재촉하여 보내신 것은 제자들도 무리들의 정치적 메시야 추구에 경도되고 거기에 반응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할 사명을 져버릴 수 있음을 아시고 취한 조치인 듯합니다. 사실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는 그들의 모친과 더불어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발탁해 달라는 정치적 야심을 내비쳤고 이에 다른 제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도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갈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이런 유아적인 상태에 있는 제자들을 보호하실 의도로 제자들을 서둘러 뱃길에 오르도록 독촉하신 듯합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적인 메시야란 사실을 보이고자 한 사건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베드로가 물 위로 걸은 기적 이후에는 예수님의 신분을 의심하는 종교 지도자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냐에 대한 기적과 의심 사이에 센드위치처럼 끼어 있습니다. 당연히 본문도 그리스도 예수의 정체성 계시와 관계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배를 타고 건너편에 간너가는 중에 일어난 놀라운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기록처럼 오병이어 사건의 장소는 벳세다로 가는 도상에 있는 한 들판이라 한다면 제자들은 그 근방에서 벳새다로 가고자 했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항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그들의 가는 뱃길이 순적하지 않았고 역풍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도했던 벳세다로 가지 못하고 예기치 않게 게네사렛 지역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실 육로와 해로의 길이가 비슷하기 때문에 제자들이 얼마든지 걸어서도 갈 수 있었는데 뱃길을 택한 것을 보면 폭풍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5절을 보십시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지 않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십시오.

제자들이 뱃길에 오른 시점은 저녁 직후이기 때문에 늦어도 8시에는 육지를 떠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밤 사경이 새벽 3시부터 6시에 해당되는 시간이라 한다면 배를 탄 시간은 최소한 7시간 이상이고 역풍과 사투를 벌인 시간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참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심기가 심히 불편하고 슬프고 두려운 상황에서 인간적인 재앙만이 아니라 자연적인 재앙까지 맞이하고 여러 시간 사투까지 벌이는 제자들의 심경은 한마디로 참담했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와 슬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까지 있었을 지도 모를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물로 뛰어들어 주님께로 갔고 다른 제자들은 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세찬 바람을 보고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이에 주님은 베드로를 건져주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을 하였느냐?"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께 배에 오르매 바람이 그쳤다고 말합니다.  

생각1: (폭풍과 인생) 제자들이 폭풍을 만난 것은 우리가 처한 삶의 현실과 상당히 유사해 보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발생한 폭풍은 평소에는 잠잠하다 급작스런 변화가 일어나는 지중해성 기후의 전형적인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지도 않았고 특별한 원인이 제공되지 않았는데 커다란 위협과 공포가 인기척도 없이 배를 급습하는 것, 마치 인생이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합니다. 

생각2: (도전과 망설임) 여기서 제자들이 경험한 폭풍은 선택의 대상이 아닙니다. 선택의 자유와 무관하게 들이닥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고통을 당했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을 때에는 두려워 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어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며 아우성을 질렀다고 말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입술을 열어 "만일 주시라면 물 위로 걸어가게 명령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주님께서 "오라" 하셔서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위협적인 환경을 보다가 믿음은 의심으로 교체되고 물 위를 걷던 발은 물 속으로 빨려들어 갔습니다. 결국 실패한 것입니다. 

생각3: (진정한 성공과 실패)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는 어떤 것일까요? 그의 실패는 자신의 연약한 믿음과 의심 때문에 발생한 일이지만 결국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받아 함께 물위를 걸어서 배로 돌아 왔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과 주님의 강함을 경험했고 자신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로 진정한 성공의 근원이 어떤 것인지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에 머물러 있었던 제자들은 비록 베드로의 실패는 모면할 수 있었지만 주님의 성공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생각4: (무모한 도전?)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불에 뛰어든 것을 보고서 무모하고 돌발적인 행동을 취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배의 행선지라 할 벳세다 출신 어부였고 그것도 신출래기 어부가 아니라 수십년의 경험을 가진 베테랑 어부였기 때문에 폭풍에 출렁이는 바다의 위험성과 대처법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을 것이기 때문에 충동적인 행동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베드로는 위험을 알면서도 뛰어든 것입니다. 이 행동은 오히려 "오라"는 예수님의 명령과 베드로 자신의 믿음에 의해 촉발된 행동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생각5: (두려움과 본질) 상황을 다시 보십시오. 모든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두려움이 닥치면 사사로운 일들은 뒷전으로 밀리고 사느냐 죽느냐의 가장 긴급하고 본질적인 문제만이 전면에 부곽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유일한 관심사는 사느냐 죽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다른 것에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본질에 대한 집중력의 차이를 낳습니다. 비록 동일한 폭풍 가운데에 있지만 베드로가 물 위에 선 것과는 달리 다른 제자들은 배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마도 그 제자들은 배 안에서의 상황이 물 위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배는 물보다 더 안전한 곳입니다. 당연히 배의 안전은 그들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기에 그들의 생각과 마음과 시간과 도모와 에너지도 본질이 아닌 수단에 불과한 배에 쏠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6: (베드로의 선택은 동행) 교회도 이러한 두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교회는 사느냐 죽느냐의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나 어떤 교회는 안전의 유무가 교회의 재정과 건물과 조직과 행정에 있다고 생각하여 거기에 엄청난 재원을 쏟습니다. 교회에는 상당히 많은 사사로운 일들과 비본질적 사안들이 막대한 재원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분쟁과 말썽과 대립과 다툼과 분열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일들에 일일이 개입해야 한다면 몸이 열이라도, 인생을 수십번 살더라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선택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는 폭풍에 격동하는 바다의 위험을 알면서도 예수님과 더불어 있으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더 편하고 안전하게 보이는 배 안에 머물고자 하지 않고 겉으로는 불편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물에 뛰어들어 주님께로 간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위기는 폭풍처럼 격동하는 세상이 교회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위기의 본질은 오히려 자신의 안목을 따라 안전이라 판단되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되 정작 주님과는 동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생각7: (궁극적인 실패) 실패는 가시적인 행동이 아니라 무의식적 상태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에서 실패를 생각하면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든 가시적인 모습이 눈앞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두려움의 현장에 찾아 오셨어도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 배에 머물고자 했던 다른 제자들의 상태가 제 눈에는 실패로 보입니다. 이런 실패는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했던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피난처요 안식처가 되십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못하는 분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천사나 인간이나 동물이나 하늘과 땅에 있는 그 어떠한 것도 감히 겁박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이보다 더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안식처가 없습니다. 모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생각8: (주님과의 '불편한' 동행)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동거하고 동행하는 것의 실상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녹의 경우에도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들리운 것을 마치 에덴동산 같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에서 일평생 주님과 걷다가 죽음도 생략하고 천국으로 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랬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고속도로 같이 평탄하고 순적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협착한 길입니다. 문도 좁아서 출입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길입니다. 제자들만 보아도 12명 중에서 베드로만 주님께로 갔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마치 삶과 죽음이 등짝을 맞대고 있는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있는다고 해서 폭풍이 자동으로 잠잠해 지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님께로 가서 주님과 동행을 했지만 폭풍의 기세가 꺾어진 것은 아닙니다. 배에 돌아왔을 때에 비로소 바람이 그쳤다고 말합니다. 주님과의 동행을 편안하고 나른한 땅에서의 안식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좁고 협착하고 불편하고 위태로운 길처럼 보이는 인생의 길입니다. 

생각9: (하나님의 아들) 베드로를 비롯하여 이 상황을 지켜본 모든 제자들은 엎드려 절하며 경의를 표할 정도로 심히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적 자체에 눈이 휘둥그레 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물에서의 걷기가 어떻게 가능하며 어떤 것인지의 문제로 쑥덕대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으로 반응을 했습니다. 요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거친 자연이 예수님께 순한 양처럼 순응하는 기이한 일을 면밀히 분석하고 꼼꼼하게 모방하고 싶어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런 수단적인 것에 관심을 빼앗기지 않고 이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신 주체로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의 종착지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무리에게 전달하기 원하였던 교훈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안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 및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동의했던 고백의 씨앗은 이때부터 심겨졌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다른 제자들도 삶의 선택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 뿐이라는 교훈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경험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수렴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기적적인 경험 자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여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베드로의 가시적인 실패와 다른 제자들의 무의식적 상태의 실패보다 훨씬 심각하고 은밀한 실패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기적에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따라서는 안되는데 기적에 머물면 그런 실패를 답습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맛보고도 주님께로 나아가지 않는 분들의 전형적인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교훈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적용

1.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하고 전능하고 전지하고 자비롭고 인자하고 공의롭고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만물과 역사의 창조자요 주인이요 통치자요 심판자가 되신다는 지식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분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폭풍의 한 가운데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이 가장 안전한 안식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2. 사나운 폭풍이 우리의 인생을 강타할 때에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두려운 상황은 오히려 우리에게 본질을 보여주고 사사로운 것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돌리게 만들며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선명하게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환란날에 주님을 구하면 그가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놀라운 축복의 징후가 폭풍일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3. 선택의 기로에서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동행하는 길을 가십시오. 물 위를 걷고 싶다면 만족과 안주의 배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를 배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땅의 안전과 만족과 안식을 과감히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안전하다 생각하는 때가 안전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망각하는 가장 위태로운 때일 수 있습니다. 편안하고 안전하고 무탈한 삶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겉으로는 조금 더 불편하고 조금 더 불안하고 조금 더 분주해도 물이라는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현장으로 뛰어드는 것이 본질적인 안전을 추구하는 길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증거하는 길입니다. 

4. 주님과 동행할 때에 경이로운 일들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자랑하지 마십시오. 특이한 경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수단일 뿐입니다. 이적과 기사 자체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자연'처럼 보이는 경이로운 기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수효를 능히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모든 자연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무감각은 누구의 개입도 없는 자연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항구적인 기적에 적응되고 익숙해진 것일 뿐입니다. 무수한 기적들 중에 몇 가지를 경험한 것에 신앙과 인생을 걸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무한한 기적의 몇 조각을 경험했을 뿐입니다.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기적은 그러한 본질의 수단일 뿐입니다. 

5. 실패를 두려워 마십시오. 믿음이 작고 의심이 있다는 지적도 두려워 마십시오. 실패하면 실패를 경험하고 그 실패를 아는 것만큼 성공한 것입니다. 나의 한계를 알면 아는 만큼 성공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의 선택을 저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이해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기준을 취하는 순간 삶의 모든 내용들은 그 기준의 횡포에 노출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환난이 닥칠 때마다 세상의 기준을 홍보하는 처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거하고 동행하는 것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환란이든 형통이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만 영화롭게 되고 증거될 것입니다.

6. 김명일 목사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위대한 분이심을 보는 구경꾼이 되지 말고 그분을 담아내는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배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관찰하고 위대한 분이라고 찬양하는 것은 쉽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위인들을 존경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명이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자여야 하고 그분의 위대하고 영화로운 생명의 복음을 체득하고 전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막상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실 때 입을 열어서 고백할 수 있었던 사람은 베드로 뿐이었습니다.

7. 편하고 익숙한 삶에 젖으면 믿음으로 사는 삶의 원리를 상실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을 얻었어도 믿음을 빼앗기면 모든 것들을 잃는 것입니다.

8. 주님과 동행하는 것과 무관한 모든 것들은 개인이든 교회이든 과감하게 제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번거롭고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도 수반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과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때때로 그런 고통의 결단이 감수해야 할 듯합니다. 편하고 익숙한 것에 안주하는 것보다 불편하고 낯설어도 예수님과 동거하고 동행하는 것이 훨씬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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