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7일 월요일

사람의 도를 넘어가면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고통이다.
고통도 한계선을 넘으면 고통으로 여기질 않는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측량할 수 없다.
지혜와 지식도 도가 넘으면 있는 줄도 모른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 분량이다.
사랑도 도가 넘으면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점을 기억함이 좋겠다.

인간의 주먹 사이즈의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아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고 믿음의 비약이 필요하다.

성령의 조명도 믿음도 다 은혜이기 때문에
성경을 바르게 읽어내는 것은 은혜의 결과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기 때문에 믿음으로 더듬어야 한다.

자유를 생각한다

1. 인간의 자유는 피조된 자유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와는 다르다. 인간에게 설정된 피조물적 자유를 넘어가면 자유가 박탈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유의 확대라고 착각한다. 이걸 읽어내는 게 중요하다.

2. 인간의 자유는 외부에서 부여된 자유가 있다. 돈이 있고 시간이 있고 명성이 있으면 허락되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소유물이 제공하는 자유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댓가의 지불이 요구된다. 워낙 은밀해서 감지되기 어려운 댓가이다.

3. 인간이 생각하는 자유는 오히려 구속을 자유로 오인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내가 소유하여 누리는 자유의 수단에 내가 결박된다. 사람들은 우리가 많이 소유하면 자유도 그만큼 확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만큼의 은밀한 결박이 확대된다.

4. 부자유의 가장 큰 원흉은 인간 자신이다. 돈이 없어서 소비하지 못하는 부자유, 건강이 나빠서 움직이지 못하는 부자유, 관계가 틀어져서 소통하지 못하는 부자유 등은 아직도 본질적인 부자유가 아니다. 자신을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부자유가 최악의 부자유다. 

5.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기에 자신의 소유물에 의해 자유가 좌우된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돈에 결박되고,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에 결박되고, 권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에 결박되고, 죄성을 가지고 있으면 죄의 노예가 된다.

6. 소유물이 제공하는 자유의 배후에는 결박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은 소유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소유물에 의해 사유자가 소유당한 바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계시는 방식으로 그분을 소유하면 자유는 차원이 달라진다. 

7. 인간이 생각하고 구현할 수 있는 자유의 차원은 고작해야 피조물적 자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자유는 신적인 차원까지 확대된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8. 성도에게 허락된 자유는 신적인 자유이다. 목에 죽음의 칼이 들어와도 빼앗기지 않는 자유는 신적인 것이다. 땅의 육신을 위협하고 죽이는 권세에 얽매이지 않고 영혼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분에게만 제한되는 자유의 확대가 성도에게 가능하다. 

9. 성도의 자유는 빈부나 귀천에 의존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늘의 원리가 붙들고 있어서다. 땅의 어떠한 요소도 간섭할 수 없는 하늘의 자유는 성도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땅의 자유와 하늘의 자유를 거래하는 우매자가 적지 않다. 

10. 자유의 극대치 혹은 가장 높은 차원의 자유는 내가 부인되면 될수록 증대된다. 부자유의 마지막 원흉은 인간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부인 없이는 진정한 자유의 구가도 그림의 떡이겠다. 자기를 부인하는 최고의 방편은 믿음이다.

11. 믿음이 제공하는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저촉을 받는 무한대의 자유이다. 바울처럼 모든 것에 자유한다. 믿음은 우리의 신분과 재산과 지식과 경험과 인맥과 업적의 공로적 횡포에서 우리를 구제하는 수단이다. 믿음보다 더 좋은 선물을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12. 무한하고 광대하고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피조물적 자유의 최대치 그 이상의 차원이 제공되는 근거이다.

13.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어두움의 결박은 풀어지고, 생명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시면 사망의 결박도 없어지며, 거룩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부패의 횡포도 소멸되고, 소망이신 그분으로 인해 절망의 사슬도 끊어진다.

14. 아들이 자유케 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유하지 못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자유의 열쇠시다. 잃어버린 자유를 찾아서 우리는 자아를 회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부인에서 그리고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신앙에서 그 열쇠를 발견한다. 

2014년 7월 3일 목요일

신학의 정의를 다루다

ITS 강의 셋째날, 신학의 정의를 다루었다. 신학의 정의를 생각하면 할수록 막강한 부담감에 압도된다. 신학을 대충 정의하고 싶어질 정도다. 신학에 대한 이해가 신학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에 의존하는 경향이 감지된다. 정보를 다룬다는 자세로 신학을 하면 신학함에 나의 생명과 삶이 개입되지 않아도 될 정의에 만족한다. 그러나 목숨과 인생을 걸고 신학을 할 각오로 신학에 접근하면 나의 생명과 삶도 수단으로 동원되는 신학의 정의에 도달한다.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하였고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맞물려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근거하여 믿음의 선배들은 신학을 하나님에 의해 학습되고 하나님을 배우고 가르치며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 자신이 신학의 주체와 대상과 목적이란 개념을 확립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 선언문을 언급하기 전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전제하고 있다는 대목을 주시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신적인 지혜와 지식의 완전한 정복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도달하는 것과 연결된다. 미묘하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이성의 필름이 끊어지는 단절적인 비약 없이는 출고될 수 없는 고백이다. 그 비약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측량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신비를 인간의 유한한 머리에 구겨넣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신앙의 귀결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논리로 그 비약의 안다리를 걸어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은 신비로운 분이시다. 신학의 주체와 대상과 목적이 그런 분이시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신비로 둔 영역은 신비대로 존중하고, 나타내신 것은 성경이 밝힌 명료성의 정도까지 이르러야 한다. 신학의 적정선은 이런 신비성과 명료성의 성경적 비율이 최대한 존중되는 지점에서 그어져야 한다. 그 선이 무시되면 하나님의 영광도 무시된다. 같은 맥락에서 이론과 실천의 성경적 배합도, 사랑과 정의의 성경적 균형도, 그런 적정선의 일부로서 존중해야 되겠다.

이건 자랑이다...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표정은 대체로 진지하고 밝았다. 오늘도 학생들이 푸짐한 밥상을 마련했다. 모밀국수, 해물 부침개와 풋고추도 곁들였다. 교수 회의실의 데스크 다리가 휠 정도였다. 점심식사 중 "어려운데, 한 마디도 놓칠 수 없습니다," "신학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인 줄 예전에는 몰랐네요," "밥상의 질은 강의의 질에 의존하는 범인데, 오늘은 개교 이래로 최고의 밥상인 듯합니다" 등의 피드백이 쏟아졌다.

이렇게 젊은 교사에게 적당한 격려성 멘트에 인색하지 않으신 어르신 학생들의 재치에 감사한 마음, 가누지를 못하였다. 

2014년 7월 2일 수요일

하나님을 아는 지식

ITS 강의 둘째날이 끝났다. 첫날보다 좋았다. 민망한 자평이다...

오늘은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의 인식론을 길게 다루었다. 난 이 대목이 제일 재미있다. 강의할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이 누적된다. 그래서 더 좋아진다. 오늘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 자체의 무한한 영광과 기쁨을 많이 강조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영생이며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영생을 맛보는 삶이다. 영생은 최고의 선물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삶은 그 최고의 선물을 누리고 즐기는 삶이다. 향유의 달기가 송이꿀을 능가한다. 견줄 대체물이 없을 정도로 황홀하다.

가장 슬프고 고통스런 삶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무지의 삶, 그분을 경외함이 없는 무신경의 삶이다. 이는 타락한 인류의 근본적인 고통이고 재앙이며 저주이다. 하나님 없는 자들이 아무리 형통해도 분통해 할 필요없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라.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무엇이 고통인지 모르고 고통에 대한 의식나 신경이 없을 정도로 불쌍하다. 고통의 분량은 무한대다. 고통도 도를 넘어서면 고통 감지력도 무의미해 진다. 게다가 형통까지 더해지니 고통에 대한 무지는 극도로 치닫는다. 불쌍의 정도는 증폭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의 비밀이 나로 하여금 건강한 가치관과 처신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너무도 고상하다. 피조물 안에서는 비유가 없을 정도다. 심지어 유익한 흠모의 대상도 배설물과 해로운 것으로 상대화될 정도이다. 기독교 인식론의 매력이다.

2014년 7월 1일 화요일

공로, 하나님의 선물

주님은 우리의 선한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행한대로 갚으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언급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어거스틴 해석이 존중되지 않으면 자칫 인간이 선행의 주체인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 어법을 따라 우리의 공로를 다시 묘사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tua meritum)를 치하해 주신다. 
그러나 우리의 공로로서(tanquam tua meritum) 그러하지 않으시고
그의 선물로서(tanquam sui dona) 우리의 공로를 치하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선물을 주시되 마치 우리 안에서 우리의 기호가 발동하여 우리가 주체인 것처럼 그 선물을 누리도록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아주 높은 방식으로 선행을 선물하는 분이시다. 그 선행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인데 그것에 대해 보상까지 주신다는 것은 은혜 위의 은혜겠다.

하나님의 은혜는 생각하면 할수록 신비롭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돌릴 공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다. 특정한 대상과 관계된 것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마다 모든 사안에서 그러하다. 

멋쟁이 주님, 영원토록 변치 않으셔서 너무도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