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3일 목요일

신학의 정의를 다루다

ITS 강의 셋째날, 신학의 정의를 다루었다. 신학의 정의를 생각하면 할수록 막강한 부담감에 압도된다. 신학을 대충 정의하고 싶어질 정도다. 신학에 대한 이해가 신학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에 의존하는 경향이 감지된다. 정보를 다룬다는 자세로 신학을 하면 신학함에 나의 생명과 삶이 개입되지 않아도 될 정의에 만족한다. 그러나 목숨과 인생을 걸고 신학을 할 각오로 신학에 접근하면 나의 생명과 삶도 수단으로 동원되는 신학의 정의에 도달한다.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하였고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맞물려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근거하여 믿음의 선배들은 신학을 하나님에 의해 학습되고 하나님을 배우고 가르치며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 자신이 신학의 주체와 대상과 목적이란 개념을 확립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 선언문을 언급하기 전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전제하고 있다는 대목을 주시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신적인 지혜와 지식의 완전한 정복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도달하는 것과 연결된다. 미묘하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이성의 필름이 끊어지는 단절적인 비약 없이는 출고될 수 없는 고백이다. 그 비약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측량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신비를 인간의 유한한 머리에 구겨넣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신앙의 귀결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논리로 그 비약의 안다리를 걸어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은 신비로운 분이시다. 신학의 주체와 대상과 목적이 그런 분이시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신비로 둔 영역은 신비대로 존중하고, 나타내신 것은 성경이 밝힌 명료성의 정도까지 이르러야 한다. 신학의 적정선은 이런 신비성과 명료성의 성경적 비율이 최대한 존중되는 지점에서 그어져야 한다. 그 선이 무시되면 하나님의 영광도 무시된다. 같은 맥락에서 이론과 실천의 성경적 배합도, 사랑과 정의의 성경적 균형도, 그런 적정선의 일부로서 존중해야 되겠다.

이건 자랑이다...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표정은 대체로 진지하고 밝았다. 오늘도 학생들이 푸짐한 밥상을 마련했다. 모밀국수, 해물 부침개와 풋고추도 곁들였다. 교수 회의실의 데스크 다리가 휠 정도였다. 점심식사 중 "어려운데, 한 마디도 놓칠 수 없습니다," "신학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인 줄 예전에는 몰랐네요," "밥상의 질은 강의의 질에 의존하는 범인데, 오늘은 개교 이래로 최고의 밥상인 듯합니다" 등의 피드백이 쏟아졌다.

이렇게 젊은 교사에게 적당한 격려성 멘트에 인색하지 않으신 어르신 학생들의 재치에 감사한 마음, 가누지를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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