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하는 성도 모두는 무엇보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입니다. 본성이 죄로 물들어서 발끝에서 머리 끝까지 전적인 타락의 늪에 깊숙이 빠진 자입니다. 당연히 진리를 추구하든, 선을 추구하든, 덕을 추구하든, 자유를 추구하든, 성경을 읽든, 기도를 하든, 전도를 하든,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의 열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이란 행하는 것마다 죄일 수밖에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거창한 명분을 걸고 세상의 도덕 평균치를 상회하는 덕행의 화려함을 발산한다 할지라도 회칠한 무덤일 뿐입니다. 실상은 모든 사람이 죄 중에 잉태하고 출생하고 모두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죄의 삯으로서 모든 사람들은 저주 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선 자리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결코 이르지 못하는 전적인 타락과 저주와 죽음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고 이해되는 법입니다. 신학을 하려면 먼저 우리가 선 자리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죄로 시작하여 죄로 끝나는 첫번째 아담이 서 있는 자리는 바로 십자가 상(上)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가 선 자리의 전부가 아닙니다. 아담은 마땅히 이런 저주와 죽음의 십자가 위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대신 섰습니다. 우리가 선 자리에 대한 이해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어 졌습니다. 이는 저주가 합당한 우리는 저주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고 저주와는 전적으로 무관한 예수님이 저주의 십자가를 대신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학을 한다는 것, 즉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은 이처럼 은혜의 충만 속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타락한 인류에게 마땅한 진멸의 형벌을 내리시지 않고 가까이 오셔서 건네신 물음에 답하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두 물음에 대한 답변은 서로 분리할 수 없도록 맞물려 있습니다. 정녕 죽었어야 할 아담에게 생명을 보존해 주시고 묻고 답하는 대화 상대자로 부르신 것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또한 첫번째 아담의 실상을 모르면 두번째 아담의 본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이 두 물음은 하나의 쌍으로서 질문과 답변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아담이 선 있는 자리에 대한 물음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선 십자가 위에서만 풀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비로소 그 실상이 발견되는 자입니다. 두번째 물음이 암시하는 답변은 우리의 비참한 실상을 아는 지식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을 통달했던 최고의 신학자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아는 지식을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겨 그것만 알고 그것만 자랑키로 작정했던 이유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교부들이 세운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진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신다는 것 말입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곧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이상과 인간이 추구하고 향유해야 할 궁극적인 대상을 동시에 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고 저는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이상은 바울이 로마서 8장 29절에 만세 전부터 작정된 것으로 명시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궁극적인 추구와 향유의 대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신학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을 과도히 부각시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일성 파괴를 일삼는 기우뚱한 신학으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즉 기독론을 신학의 원리와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지식에 도달할 다른 길이 없습니다. 또한 신학은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처한 비참의 실상과 인간이 도달해야 할 영광의 궁극적인 이상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관련된 모든 피조물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면 인간의 근본적인 실상은 늘 외모를 보는 눈의 관찰에 의존한 피상적 가상으로 대체되어 결국 인간은 스스로 속고 어디에 ‘거쳐 넘어져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영적 캄캄함의 희생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타의로 말미암아 썩어짐에 종노릇 하고 있는 피조물의 깊은 탄식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든 인간을 아는 지식이든 자연을 아는 지식이든 그릇된 길이며 거짓이며 결국 죽음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듭난 제자들을 향해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구약 전체가 이 물음을 묻고 있습니다. 신약이 그 물음에 답변하는 책이라는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교부들은 대부분 이 물음을 다루었고 거기에 답변하는 방식으로 신학을 했습니다. 중세에도 탁월한 학자들은 이 근본적인 물음과 씨름을 했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은 이 물음의 핵심을 벗어난 인간의 종교적 호기심을 거절하고 성경의 본래 물음으로 돌아온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정신을 이어받은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그 물음의 성경적 정통성과 교회사적 보편성을 체계적인 형태로 보존하고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과 성취가 망각과 무지로 파묻히고 버려진 때입니다. 물론 그 보화를 캐내고자 하는 자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터무니 없이 적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록한 것처럼 교회사의 최고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 믿음의 선진들이 다듬어 놓은 ‘올바른 옛길’을 회복해야 할 개혁(Re-formation)의 필요성이 절박한 때입니다. 바른 신학의 깃발을 휘날려서 이정표를 제시해야 할 때입니다. 물론 16세기와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저의 짧은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 시대에 이루어진 신학보다 더 성경에 충실하고, 더 정교하고, 더 명료하고, 더 체계적이고, 더 종합적인 신학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 전체를 신학에 담고자 한 정통주의 시대의 개혁주의 신앙 선배들이 이룩한 신학적 유산을 나누는 일은 그 시대보다 훨씬 복잡해진 오늘날에 한 줄기의 빛을 던져줄 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본 코너를 운영하고 싶습니다. 또한 형제 자매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대화를 통해 함께 꾸며가며 서로에게 유익하며 교회에도 덕을 끼치는 코너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략한 일필을 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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