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다 (롬6:23)
사망과 영원한 생명이 대조되고 있고 각각의 원인들인 죄와 하나님의 은사도 대조되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 했다.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이 연결되어 있고, 죄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사망이 하나의 범주로 묶여졌다. 여기서 나는 인식론적 사망을 주목하고 싶다.
죄의 삯은 단순히 생명의 시공간적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로 하여금 살았으나 죽은 것과 진배없게 만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도 직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거룩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의 연관성이 도출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성경을 이해하고 싶어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 결단의 허리띠를 졸라맨 사람들은 거룩을 제쳐서는 안되겠다.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마음에 죄가 있으면 진리가 인식되지 않는다. 정말 신비롭다. 물론 일상에는 아무런 지장도 초래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를 진리에 대해 무뎌지게 만드는 죄의 맹독성은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죄는 있다가도 없고 회개하면 그만이고 얼마든지 삭제와 수정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벗처럼 친밀하게 지낸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대한 영적 감각은 점차 마비된다. 차츰 사람들의 폭넓은 수긍에 힘입어 일상의 레벨에서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처신하는 습관에 빠진다. 나아가 성경을 읽고 지식을 얻더라도 앙상한 논리와 명제만 취득하고 고유하고 다채로운 현실에 획일화된 기준을 들이대는 종교적 폭력을 휘두르며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반감만 부추기게 된다.
이렇게 마음의 죄는 아무짓도 안하는 듯 하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은밀한 것을 탈취한다. 죄의 가장 무서운 기능은 생명의 저자시며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무뎌지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준하는 지식을 차단하는 것에 있다. 회개가 그렇게도 중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올바른 지식에 이르는 것은 신학을 회개의 눈물로 적시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개인이든 교회든 죄를 돌이키는 회개, 즉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결연한 투쟁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서 주어지는 거룩을 회복하지 못한다. 거룩의 회복이 없으면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에도 이르지 못한다. 당연히 그런 개인이나 교회는 영원한 생명의 향기보다 사망의 역하고 유독한 악취의 온상으로 필히 전락한다. 세상의 매서운 발길질은 필연적인 삯이겠다.
죄는 결코 머리에 괴기스런 뿔을 부착하고 날카로운 괴성으로 우리를 위협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곧장 달려가게 만들 정도로 어리석은 단선적 존재가 아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머리털 수효보다 많다고 고백한다. 능히 깨달을 수 없어 자신의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도 했다. 거룩,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필히 싸워야 할 싸움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지각으로 쉽게 헤아려질 수 없을 만큼 은밀하고 교묘하고 중다한 죄를 다스릴 정도의 수준까지 거룩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나는 그에게 거룩이 보이지 않는데도 신학적 지식의 방대함은 자랑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를 대가라고 부르고 싶지가 않다. 거룩의 통로를 거쳐 이르른 하나님 지식만이 하나님의 사람을 대가로 만든다.
믿음의 선배들은 신학을 Theologia sacra라고 했다. '거룩한' 신학이다. 신학은 주체와 대상과 내용과 방식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 할 신학은 거룩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런데 신학자들 안에서 거룩의 정수를 쉽게 목격하지 못한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큰 비극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을 알고서도 돈과 권력과 명예와 쾌락 추구가 급급하다.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 그런 현실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않다. 은혜가 필요하다. 그게 유일한 대안이다.
사망과 영원한 생명이 대조되고 있고 각각의 원인들인 죄와 하나님의 은사도 대조되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 했다.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이 연결되어 있고, 죄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사망이 하나의 범주로 묶여졌다. 여기서 나는 인식론적 사망을 주목하고 싶다.
죄의 삯은 단순히 생명의 시공간적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로 하여금 살았으나 죽은 것과 진배없게 만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도 직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거룩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의 연관성이 도출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성경을 이해하고 싶어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 결단의 허리띠를 졸라맨 사람들은 거룩을 제쳐서는 안되겠다.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마음에 죄가 있으면 진리가 인식되지 않는다. 정말 신비롭다. 물론 일상에는 아무런 지장도 초래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를 진리에 대해 무뎌지게 만드는 죄의 맹독성은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죄는 있다가도 없고 회개하면 그만이고 얼마든지 삭제와 수정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벗처럼 친밀하게 지낸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대한 영적 감각은 점차 마비된다. 차츰 사람들의 폭넓은 수긍에 힘입어 일상의 레벨에서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처신하는 습관에 빠진다. 나아가 성경을 읽고 지식을 얻더라도 앙상한 논리와 명제만 취득하고 고유하고 다채로운 현실에 획일화된 기준을 들이대는 종교적 폭력을 휘두르며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반감만 부추기게 된다.
이렇게 마음의 죄는 아무짓도 안하는 듯 하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은밀한 것을 탈취한다. 죄의 가장 무서운 기능은 생명의 저자시며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무뎌지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준하는 지식을 차단하는 것에 있다. 회개가 그렇게도 중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올바른 지식에 이르는 것은 신학을 회개의 눈물로 적시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개인이든 교회든 죄를 돌이키는 회개, 즉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결연한 투쟁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서 주어지는 거룩을 회복하지 못한다. 거룩의 회복이 없으면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에도 이르지 못한다. 당연히 그런 개인이나 교회는 영원한 생명의 향기보다 사망의 역하고 유독한 악취의 온상으로 필히 전락한다. 세상의 매서운 발길질은 필연적인 삯이겠다.
죄는 결코 머리에 괴기스런 뿔을 부착하고 날카로운 괴성으로 우리를 위협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곧장 달려가게 만들 정도로 어리석은 단선적 존재가 아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머리털 수효보다 많다고 고백한다. 능히 깨달을 수 없어 자신의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도 했다. 거룩,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필히 싸워야 할 싸움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지각으로 쉽게 헤아려질 수 없을 만큼 은밀하고 교묘하고 중다한 죄를 다스릴 정도의 수준까지 거룩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나는 그에게 거룩이 보이지 않는데도 신학적 지식의 방대함은 자랑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를 대가라고 부르고 싶지가 않다. 거룩의 통로를 거쳐 이르른 하나님 지식만이 하나님의 사람을 대가로 만든다.
믿음의 선배들은 신학을 Theologia sacra라고 했다. '거룩한' 신학이다. 신학은 주체와 대상과 내용과 방식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 할 신학은 거룩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런데 신학자들 안에서 거룩의 정수를 쉽게 목격하지 못한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큰 비극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을 알고서도 돈과 권력과 명예와 쾌락 추구가 급급하다.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 그런 현실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않다. 은혜가 필요하다. 그게 유일한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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