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4일 일요일

소통의 범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가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합니다 (수1:17)

이 구절은 지도자와 백성 사이의 아름다운 소통의 범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종이었던 여호수아의 지도자 등극을 인정하고 환영했다.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처럼 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고 서약했다. 대신 백성이 원하는 요구는 단 하나였다. 하나님이 모세와 동행하신 것처럼 그와도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는 소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안목이 대단하다. 주님과의 동행이 인간 여호수아 자신에게 좌우되지 않고 주님께 속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의 아들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그에게도 그러시길 원한다고 했다. 국운의 성쇠를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리는 태도는 기억하며 본받아야 하겠다.

반면 어떤 해석가는 눈의 아들이 집권 초기라서 실권을 장악하지 못했고 군기를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백성이 하나는 주고 하나는 취하는 동등한 국정운영 파트너로 버릇없이 나대는 것을 방지하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독교의 지도력은 다스리고 지배하고 장악하고 탈취하고 조종하고 조작하고 겁박하는 권세와는 무관하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섬기는 신분이다. 당연히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막대한 카리스마 휘두르며 사람들의 수족은 물론이고 감정과 생각까지 결박하는 무소불위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목회자의 도리이고 사환의 본분이다. 결과는 공포와 불안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와 자비와 긍휼과 화평과 같은 성령의 열매이다.

무서운 주먹을 보이면서 사람들을 움직이려 드는 사람들이 종종 목격된다. 마음의 자발성을 따라 이루어진 행위가 아닌 모든 강압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따르고 뒤틀린 결과가 초래된다. 돈과 힘과 다른 수단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에게는 권력의 유지를 위해 더더욱 돈과 힘 및 그와 유사한 수단들 확보에 집착하게 된다. 백성의 아픔은 당연히 다각도로 증대된다.

그런 지도자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지도자의 눈치 살피기가 일과이고 모든 면에서 그런 눈치 의존적인 체질로 고착된다. 인격도 습관도 생각도 언어도 행실도 그런 식으로 변질된다. 이는 성도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세우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세우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런데 그걸 통치력의 승리라고 오독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개인의 체질과 가정의 체질과 교회의 체질과 교계의 체질로 눈길을 돌리면 동일한 현상이 목격된다. 개인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에 적응된 삶을 살아가고 가정은 가장의 심기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교차하며 교회는 담임 목회자의 카리스마 기운이 말씀의 권세와 흥왕을 대신하며 교계는 패거리 문화의 온상처럼 추락하고 있다.

어떤 공동체건 지도력을 발휘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덕목은 주님과의 동행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야만 한다. 지도자와 대립각이 세워질 법한 사안에 대해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그런 상황은 이미 그 자체가 대대적인 수술이 요구되는 중증이다. 어떤 특정한 사안보다 그걸 둘러싼 상황이 더 사실에 가깝다.

지도자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백성은 바로 그 권위에 순응하되 그러한 이상에의 갈망을 입술로 자유롭게 발설할 수 있는 분위기가 건강의 괜찮은 척도이다. 무섭게 겁박하고 광기를 쏟으면서 주변을 장악하려 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 사람도 불행하고 그와 더불어 있는 공동체도 불행하다.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 사이의 그 아름다운 소통이 그리운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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