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ὅτε γὰρ ἦμεν ἐν τῇ σαρκί, 롬7:5) 죄의 정욕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지체 안에서 역사한다. 당연히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수순이 이어진다. 그러나 과거에 얽매였던 법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육체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율법 조문의 오래된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논지를 율법 폐기론 혹은 율법 무용론 방향으로 몰아가면 안되겠다. 사유의 일반적인 흐름이 그런 식으로 흘러갈 것을 의식한 바울은 곧장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타협의 여지를 불허하는 논박의 쐐기를 박는다.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율법의 속성도 가지런히 열거한다. 이런 율법으로 우리는 죄를 제대로 깨닫는다.
그러나 죄에 대한 깨달음이 신앙의 종착지일 수는 없다. 그런 깨달음은 절망의 출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망의 입구로 이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소망의 문을 만드셨다. 흉물스런 뼈다귀가 나딩구는 절망의 골짜기에 만들어진 문이다. 지성소를 가리던 휘장도 찢어졌다. 다른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밖에서 노려보는 율법의 눈짓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율법에 무지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레미야 및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새 마음과 새 영"으로 다스림을 받게 되어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영으로 다스림을 받는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의 예속과 연결된다.
성령의 법으로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은 율법과의 단절이나 결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이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ἵνα τὸ δικαίωμα τοῦ νόμου πληρωθῇ ἐν ἡμῖν τοῖς μὴ κατὰ σάρκα περιπατοῦσιν ἀλλὰ κατὰ πνεῦμα)이란 바울의 정교한 이해와 진술에서 공히 확인된다.
바울의 논지는 이제 율법을 버리고 우리의 감정과 느낌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것이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것도 향방이 없어서는 아니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며 그 말씀의 방향을 따라 몸의 행실을 죽이되 육신이 아니라 영으로서 그리하란 이야기다.
여기서 "영"이라는 말은 선지자가 언급한 "새 마음과 새 영"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다시 우리에게 대하여 여전히 밖에 있으면서 책임과 의무를 독촉하는 돌판에 새겨진 율법의 몽학선생 기능이 아니라 심비에 새겨진 율법과 관계하고 그 율법의 성취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율법과 영은 서로에게 배타적인 양자택일 대립항이 아니다. 율법은 바울이 명시한 것처럼 살리는 법이며 그 살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이다. 이는 힘과 능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고백한 아모스의 진술과도 무관하지 않다. 육신과 영의 대립을 율법과 영의 대립으로 오인하면 율법과 영에서 어느 하나를 버리는 과격한 극단만이 묘책으로 채택될 것이다.
말씀과 성령은 대립이나 충돌을 불허하고 조화하며 병행한다.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논지를 율법 폐기론 혹은 율법 무용론 방향으로 몰아가면 안되겠다. 사유의 일반적인 흐름이 그런 식으로 흘러갈 것을 의식한 바울은 곧장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타협의 여지를 불허하는 논박의 쐐기를 박는다.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율법의 속성도 가지런히 열거한다. 이런 율법으로 우리는 죄를 제대로 깨닫는다.
그러나 죄에 대한 깨달음이 신앙의 종착지일 수는 없다. 그런 깨달음은 절망의 출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망의 입구로 이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소망의 문을 만드셨다. 흉물스런 뼈다귀가 나딩구는 절망의 골짜기에 만들어진 문이다. 지성소를 가리던 휘장도 찢어졌다. 다른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밖에서 노려보는 율법의 눈짓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율법에 무지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레미야 및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새 마음과 새 영"으로 다스림을 받게 되어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영으로 다스림을 받는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의 예속과 연결된다.
성령의 법으로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은 율법과의 단절이나 결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이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ἵνα τὸ δικαίωμα τοῦ νόμου πληρωθῇ ἐν ἡμῖν τοῖς μὴ κατὰ σάρκα περιπατοῦσιν ἀλλὰ κατὰ πνεῦμα)이란 바울의 정교한 이해와 진술에서 공히 확인된다.
바울의 논지는 이제 율법을 버리고 우리의 감정과 느낌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것이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것도 향방이 없어서는 아니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며 그 말씀의 방향을 따라 몸의 행실을 죽이되 육신이 아니라 영으로서 그리하란 이야기다.
여기서 "영"이라는 말은 선지자가 언급한 "새 마음과 새 영"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다시 우리에게 대하여 여전히 밖에 있으면서 책임과 의무를 독촉하는 돌판에 새겨진 율법의 몽학선생 기능이 아니라 심비에 새겨진 율법과 관계하고 그 율법의 성취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율법과 영은 서로에게 배타적인 양자택일 대립항이 아니다. 율법은 바울이 명시한 것처럼 살리는 법이며 그 살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이다. 이는 힘과 능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고백한 아모스의 진술과도 무관하지 않다. 육신과 영의 대립을 율법과 영의 대립으로 오인하면 율법과 영에서 어느 하나를 버리는 과격한 극단만이 묘책으로 채택될 것이다.
말씀과 성령은 대립이나 충돌을 불허하고 조화하며 병행한다.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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