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소요리 4-5 하나님의 지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3)

저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싶습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은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이러한 본성적인 지혜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는 신적인 지혜가 오묘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창조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묘사하되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분”(시136:5)이라고 하였으며, 바울은 새로운 창조물인 교회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하늘의 통치자들 및 권세들 모두에게 알리고자 원하셨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각종 지혜”(엡3:10)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이것은 “영원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일”(엡3:11)이라고 말합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부터 창조의 시대와 그 이후의 재창조 시대까지 펼쳐져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지혜가 번뜩이지 않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의 지혜가 개입하지 않은 역사는 한 순간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양적인 부요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단순히 분량의 차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질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히 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사람의 기준으로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은 사람의 머리가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단순히 사물이나 사태나 사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쉽게 추적되고 헤아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골2:3). 그렇기에 그리스도 예수를 모르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발견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이가 인간문맥 안에서 약간 더 지혜롭고 박식하면 그에게로 가서 지혜와 지식을 구합니다. 그러나 보석 수준의 지혜와 지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석학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제공하는 땅에서의 지혜가 아닙니다. 시대와 장소를 따라 변동되는 세상 통치자의 임시적인 지혜도 아닙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감취었던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인데 그 지혜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고전1:23, 2:7). 이 지혜는 너무도 심오해서 이 땅에서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이 세상에는 없다고 선언하고 입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지혜에 비하면 이 세상의 지혜는 미련한 것일 뿐입니다.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십시오. 로마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음을 촘촘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영원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작정에서 창조와 섭리에 이르는 구원의 모든 경륜사는 하나님의 지혜가 펼쳐지는 장입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으나 결국 타락하여 죄악과 저주와 절망의 사슬에 결박되어 있었을 때에 노아를 부르시고 아브람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다윗을 부르시고 선지자를 부르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고 사도들을 보내셔서 인류의 회복을 이루시되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으로 자신의 백성이 택자임을 보이시고 율법을 주셔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죄 아래 가두시고 인간의 혈통에 따른 편협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택하심을 따라 보편적인 교회의 구원을 이루셔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온 천하와 역사와 만민에게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범세계적 구원에 있어서 혹시 모른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 믿음의 조상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시되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의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셔서 혈통에 따른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 되셨다고 바울은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비록 인간의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지만 믿음이 결코 폐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께서 율법의 마침과 완성과 성취가 되셨으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개념에 모든 율법을 함축시켜 천하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단 하나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과 이방인, 할례와 무할례, 율법과 복음의 조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경륜은 단순히 땅에서의 인과율에 뿌리를 두지 않고 시간 이전의 영원으로 그 원인이 소급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지적하며, 사도는 위의 본문에서 아구의 개패가 조절되지 않을 정도의 메머드급 감탄사를 격발했던 것입니다. 한 인간의 구원은 땅에서의 변동적인 원인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소급하고 소급하여 더 이상의 상위 근원으로 소급할 수 없는 구원의 마지막 인자라고 할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됨됨이나 사람의 지식과 행실도 고려되지 않았기에, 바울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리브가를 향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기 위한”(롬9:11) 것이라는 진단을 내립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식이나 논리나 추론에 의해서는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질문하고 답하는 문답법이 백기를 들고 투항해야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을 책잡을 수 없고 잘못을 저질러도 하나님이 뜻하신 것이니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자들은 하나도 없게 되는 것 아니냐’는 힐문 투척자에 대해 “이 사람아 네가 누구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을 던지느냐…토기 제작자가 진흙으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반박하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앞에서 인간의 그 경솔한 아구를 닫으라고 했습니다.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을 만드신 토기장이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의 섭리는 인간에게 이성의 논리적인 동의를 구걸하기 위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과 능력이 창조만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도 분명히 증거되어 모든 입술이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부르게 만듭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경외의 탄성을 지르며 항복의 백기를 올립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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