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4일 토요일

종교개혁: 인격과 삶의 신학

1.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신다.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보복의 칼을 뽑으면 월권이다. 그렇다면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원수를 축복하고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당하는 피동성이 아니라 적극적인 능동성의 표출이다. 우리는 그렇게 저항한다. 이는 마치 오른뺨 맞고 왼뺨 돌리는 격이겠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대응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의 해법이다.

2. 종교개혁 기념하는 시기에 우리가 엄밀하고 순수한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그 신학의 품격만큼 고품격 대응이 가능한 인품과 삶의 준비를 숙고해야 한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대체로 개혁주의 신학을 바르게 아는 것도 빈사상태 수준이며,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도 안하무인 수준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원래 입술의 작용이 아니라 치열한 인격과 삶이었다. 어떤 신학자는 신학을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르고 복되게 사는 삶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그런 속성을 가진 신학을 정보로 취득하고 입술로 출고한다. 이건 아니다. 원래는 신학을 인격으로 흡수하여 삶으로 표출해야 했다.

3. 올바른 신학은 늘 성경으로 돌아갈 발판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대한 갈증을 일으킨다. 그러나 고착된 제도나 교리나 의식에 안주하면 성경을 대체하고 성경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던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필히 답습하게 된다. 성경에 지문 한번 묻히지 않고서도 사제직을 수행함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로마 가톨릭의 문제는 중세만의 현상도 아니고 특정한 집단만의 전유물도 아니고 온 교회가 늘 경계해야 할 교훈으로 오랜 역사 속에 지속되어 온 하나님의 섭리적 허용이다.

4. 나는 다양한 신학적 경험을 가졌지만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 기원과 발전과 체계화의 시대를 연구했다. 그런데 연구하면 할수록 진리의 엄밀성을 추구하게 되고 그 진리의 샘인 성경으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오류와 실수의 늪에서 허덕일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준비와 서곡 차원에서 신학을 공부한다. 그런데 인격이 그리스도 예수를 품고 삶이 십자가의 도를 담아내지 않으면 진리의 엄밀성은 결코 추구되지 않으며 성경은 아무리 다가가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먼 당신임을 늘 확인한다. 신학은 원래 경건을 요구하고 인격의 변화를 요구하고 삶의 혁신을 요구하고 실제로 수반한다.

5. 종교개혁 정신을 따라 진정 성경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경건하고 검증된 신학의 계보를 따라 믿음의 선배들이 때로는 실수로 때로는 본으로 남긴 신앙의 역사적 자취를 분별하고 가장 좋은 유산만을 선별하고 계승하고 순전하고 명료하고 충분하고 온전하고 무오류한 하나님의 신적인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되 인격과 삶의 방식으로 그리해야 한다. 인격과 삶 없이는 결코 성경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인격과 삶의 변화와 혁신과 거듭남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 요청에 부응하지 않고서도 올바른 신학을 배우고 익혔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이다.

6. 역사 속에서 구현되고 오랜 세월 검증된 바른 신학을 배우고 계승하여 인간의 고질적인 오류를 걸러내고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을 성경답게 존중하고 성경 안에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삶이 올바른 신학이다. 엄밀한 신학은 온 세상과 역사를 다 품어낸다. 신비롭다. 엄밀성과 포용성의 동행은 가능하다. 물론 그 방식은 타협과 변질과 타락의 형태가 아니라 안으로는 진리의 엄밀성을 고도로 추구하되 밖으로는 진리에 역행하는 자들의 까칠한 광기도 참고 그런 광기의 지속도 인내하는 사랑의 극한 아픔과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이다.

7. 진리의 엄밀성, 그것을 담아내는 바른 신학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마치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율법 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고스란히 드러내신 죽음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길을 가는 도상에서 부득불 그런 고통이 떠밀어낸 신음 차원에서 신학적 의분을 격발할 수는 있겠으나 그러한 때에라도 나의 신학적 후련함을 추구하지 않고 혹시 모를 진리의 훼손과 거부감 유발을 의식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때로는 비겁하게 보이고 때로는 무기력해 보인다. 그러나 진리의 부흥, 인격과 삶의 바른 회복은 인간적인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늘 인정하며 진리의 단 한 조각이라 할지라도 바르게 증거됨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각오로 묵묵히 인내의 걸음을 옮기는 게 우리의 도리이고 우리의 최선이라 생각한다.

8. 언어적인 방식이든 문헌적인 방식이든 신학적인 사안이든 문화적인 사안이든 보복은 월권이다. 그러나 보복의 중지는 여전히 소극적인 대응이다. 축복하고 기도하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런 대응의 방식으로 신학의 엄밀성을 전인격과 삶 전체로 추구하되 온 천하와 만민과 온 역사가 다 품어질 때까지 그리해야 한다. 급하게 변론의 칼을 뽑거나 비판과 정죄의 검을 휘두르는 건 승부의 포기이며 패배의 자인이다. 올바른 신학의 길은 초인의 길, 하나님만 바라보는 승부, 진리만이 위로와 만족이 되는 행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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