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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31일 금요일

소요리 문답 4-4 무한성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는 것입니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제가 건축한 이 성전이 어찌 용납할 수 있습니까? (왕상 8:27)

솔로몬은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짓겠다는 아버지 다윗의 성전건축 숙원을 이룬 왕입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그는 드디어 성전을 완공하고 봉헌하는 기도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의 무한성을 위의 본문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땅에 거하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주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늘과 땅도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무한성을 어떻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용납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솔로몬은 너무도 잘 알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건축의 주역인데 생색도 안냅니다.

하늘과 땅과 성전이 하나님의 무한성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기 때문에 가까운 데의 하나님인 동시에 먼 데에도 계신 분이시며 그러한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땅에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 분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묘사하는 하나님은 어떤 시공간에 제한되지 않으면서 모든 시공간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주물 중에 무한성을 가진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만 돌려야 할 무한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유한성에 익숙한 인간에 의한 하나님의 인간화와 유한화가 필히 수반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성 때문에 존재가 무한하며 지혜도 무한하며 사랑도 무한하며 선하심도 무한하며 긍휼도 무한하며 자비도 무한하며 거룩도 무한하며 생각의 규모도 무한하며 계획의 규모도 무한하며 능력도 무한하며 권위도 무한하며 영광도 무한하며 공의도 무한하신 분입니다. 시공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시간적인 무한성 때문에 영원하며 공간적인 무한성 때문에 편재하되 시공간에 제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신데 피조물의 어떠한 것으로도 저울질할 수 없는 독생자의 생명까지 주실 정도의 무한한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시는데 세상의 그 어떠한 절망과 슬픔에 의해서도 제거될 수 없는 영원한 소망과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영광도 주시는데 세상의 그 어떠한 수치와 비참에 의해서도 훼손되지 않고 빼앗아갈 수도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무한한 영광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무언가를 주실 때에도 무한한 것들을 주고자 하시는데 우리는 땅의 유한한 소욕과 남루한 흥정에 들어가고 어리석은 거래에 계약의 손을 내미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유한한 지각에 의해서는 다 파악될 수 없는 분입니다. 다 알지도 못하는 분에 대하여 불공평과 독재와 잔인과 모순을 운운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하고 경박한 것입니다. 전두엽에 꼬인 이성의 어설픈 작업이 생산한 불완전한 지식의 유한한 분량으로 하나님의 무한성을 달아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발칙한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판단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판단하는 분이시지 판단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을 선하시고 자비롭고 의로우신 분으로 계시하도 있다면 우리의 이해나 승인과 무관하게 그러신 분입니다.

계시된 대로 이해된 하나님은 사람의 지각에 의해 측량될 수 없도록 무한하신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경배의 이유도 되지만 동시에 두려움의 이유도 된다는 것은 사람이 모든 타인의 시선을 피하는 극도로 은밀한 곳에서 죄를 짓더라도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눈에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사실 탓입니다. 범죄의 증거를 아무리 인멸하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제거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죄를 짓는다면 죄의 경중은 죄의 대상에게 의존할 것인데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죄를 짓는다면 우리의 죄는 무한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지불해야 할 대가나 부과되는 형벌도 무한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의 무한한 무게를 견딜 수도 없고 해결할 수는 더더욱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당연히 유일하게 무한하신 성자께서 육체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친히 해결해 주시지 않았다면 죄문제는 다른 어떤 식으로도 해결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로 하여금 무한한 죄를 지었다는 것과 무한한 댓가를 지불해야 했는데 무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삼아 지불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고 이렇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공로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유한한 믿음과 선행을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공로로 여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 만족과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어떠한 피조물도 세상에는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 때문에 우리는 마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기쁨은 하나님 바깥에 어떤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기쁨의 원인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공로와 연결되는 어떤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게다가 원인이 아니라 수단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우리의 믿음은 기뻐할 만큼의 가치와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인 것입니다. 우리의 초라한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해 주신다는 것은 설명할 수도 없고 측량할 수도 없는 무한한 은혜와 영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문한성 안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풀고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무한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솔로몬이 세대에 걸쳐 이룩한 위업 앞에서도 건강한 처신이 가능했던 이유도 하나님의 무한성에 대한 이해에 있습니다. 

2014년 1월 30일 목요일

소요리 문답 4-3 불변성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않으리라 (말3:6)

하나님이 변하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의 외부에 혹은 내부에 변화의 어떤 원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불변적인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내부에 변화의 어떠한 원인도 없다는 말입니다. 의지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변하실 의사가 없습니다. 외부의 원인에 대해서도 만물의 근원이고 역사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자신 이외에 자신을 움직이고 변하게 만드는 상위의 원인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는 해와 달도 무색하게 될 정도로 절대적인 빛이시며 빛의 근원이신 분에게는 회전하고 변경되는 그림자가 없다는 말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의나 외부의 원인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신적인 본성이 변화의 원인일 수 있을까요? 저의 대답은 원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에 더하거나 감하는 변화가 발생할 수 없습니다. 이는 가능성의 상태에 있다가 어떤 시점에 이르러서 실현되는 어떤 미완성이 하나님의 본성에는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가 이후에 존재하게 되는 가능태가 하나님의 본성 혹은 실체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시간이 시작된 이후로 종결되는 지점까지 끊임없이 "되어지는" 존재의 발전적인 진행형이 아닙니다.

영광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가감이 없는 완전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긴 하나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이 된다거나 보탬이 된다거나 보완이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영광에 이르러 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후덕한 인격을 갖추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견고한 믿음을 가졌거나 예수님을 보여주는 희생적인 선행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생색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다 인생에게 유익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온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가르치고 선을 행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복인 것입니다.

진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더 옳으시고 도 참되실 수 없도록 완전히 옳으시고 참되신 분입니다. 어두움과 애매함과 거짓과 속임수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진리는 없으며 하나님 위에 보다 더 높은 진리도 없으며 소급될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진리도 없으며 도달해야 할 더 궁극적인 진리도 없습니다. 진리의 근원이며 궁극이신 하나님은 완전하기 때문에 가변적인 상대적인 진리나 점진적인 진리가 그에게는 없습니다. 그에게는 완전한 진리만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진리는 불변적인 것입니다. 선악의 구별은 완전한 진리에만 의존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모든 선악의 구별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계획에 있어서도 완전하기 때문에 원하시고 정하시면 변경되지 않습니다. 그분이 작정하신 것은 누구도 변경하지 못하며 그의 펴신 팔은 굽힐 자가 없습니다. 말라기의 본문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불변성 때문에 야곱이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하신 자는 반드시 구원하고 마시는 분입니다. 다른 어떠한 것도 여기에 변경을 가하지 못합니다. 시간 속에서 상황에 따라 인간의 설득에 의해서 뜻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원 속에서 작정하신 모든 것들은 시간 속에서 그대로 실행되고 구현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후회도 하시고 탄식도 하시고 진노도 하시고 타협도 하시고 변경도 하시기 때문에 변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의지와 감정과 행위가 인간의 가지적인 언어로 묘사되긴 하였어도 사람의 통상적인 언어이해 습관을 따라 하나님을 사람처럼 변덕스런 분으로 여긴다면 소통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낮추신 적응의 은택을 왜곡하고 오용하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변화이기 때문에 시간에 속한 우리에게(quoad nos)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편에서는 불변인 것이 시간적인 인간의 눈에는 변화로 지각되는 것 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보좌도 움직일 수 있고 하나님의 계획도 수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서고 하나님의 은총을 돌이키게 하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계획에 수정이나 변경이 일어난 것처럼 신적인 작정의 불변성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방식은 인간의 지각이나 이성으로 그 자취를 추적할 수 없도록 은밀하며 우리와 기도로 소통하며 당신의 뜻과 계획을 우리와 더불어 조율하는 것처럼 지각되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 오시는 방식인 것입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어서 사람들이 협조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협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못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신과 인간은 서로 협력적인 동역자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신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여 더욱 열심히 섬기라는 동기부여 차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 개념까지 고안해 낸 노력과 의도는 가상하나 '동역자'란 이름으로 하나님과 어깨를 겨누는 것은 흉내도 내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우리는 백성이고 하나님은 주인이고 우리는 사환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무에서 존재를 만드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입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역의 완성을 위해 인간을 비롯한 다른 어떤 것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조력을 받아야 비로소 일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명하시고 순종을 원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도 드러나고 하나님의 나라도 확장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도 드러나게 되는 '협력적인 현상'이 있는 것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극도로 복되게 하시려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인 것입니다.

본성과 존재와 진리와 계획과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흔들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불변성은 우리의 복된 삶에 얼마나 중요한 근원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기에 우리에겐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가 절망의 음부에 자리를 깔지라도 거기에 계시며 죽어야 마땅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운명에 결박되어 있더라도 자신이 생명을 던져 사망의 결박을 푸시고 자녀의 자유를 명하시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도록 성령의 불변적인 보증으로 인치신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변합니다. 한번도 동일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를 못합니다. 시간이 정지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변합니다. 시간이 인간의 유전인자 속에 제거될 수 없도록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이상 세월의 변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에 시간의 가변성에 매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격과 믿음과 행실은 지칠 줄 모르고 변덕을 부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변하시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인격의 몰락과 믿음의 역주행과 선행의 부재에 면죄부를 발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열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자녀로 대우해 주셨기에 우리는 나태와 방종의 삶이 아니라 성실과 절제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총은 상식의 항복과 논리의 붕괴와 인과의 마비처럼 인간의 모든 지성적인 무장을 해제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땅에서의 인과응보 논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제 외부의 강요나 강압이나 의무에 떠밀려 억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내부의 감격과 감사와 자발성에 의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고 그분의 자비와 긍휼은 무궁하기 때문에 야곱은 진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불변성에 우리의 소망과 만족과 안식과 평강이 있습니다. 

2014년 1월 28일 화요일

소요리 문답 4-2 영원성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90:2)

하나님은 무한하며 영원하며 불변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사람의 머리로는 능히 파악되지 않기에 인간이 확실히 아는 것들에서 유추하는 속성의 지식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가 늘상 경험하는 온갖 종류의 한계가 전혀 없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영원성은 피조물의 속성이라 할 시간성이 없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불변성은 무시로 변하는 피조물의 가변성이 하나님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속성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유한성과 시간성과 가변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속성으로 서술될 수 없는 분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서술할 때에는 부정적인 어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긍정적인 "이다"가 아니라 부정적인 "아니다"의 술어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어법 사용에 두각을 드러냈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질적인 속성의 제한이 없으신 선이시며(sine qualitate bonum) 분량으로 가늠되지 않으시는 웅대한 분이시며 (sine quantitate magnum) 결핍이 없으신 창조자가 되시며 (sine indigentia creatorem) 처소가 없이 거하시는 분이시며 (sine situ praesentem) 만물을 조건 없이 유지하는 분이시며 (sine habitu omnia continentem) 공간에 제한됨이 없이 도처에 편재하는 분이시며 (sine loco ubique totum) 시간에 국한되지 않는 영원하신 분이시며 (sine tempore sempiternum)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시되 변동될 것들을 만드는 분이시며 (sine ulla sui mutatione mutabilia facientem) 외부에서 당하시는 수동성이 없으신 분(nihilque patientem)"이라고 했습니다.

위에 언급된 시편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시작도 없으시고 끝도 없으시기 때문에 시간의 유한한 길이에 얽매여 살아가는 인생에 의해 파악되실 수도 없고 판단 받으실 수도 없는 분입니다. 비록 자신에 대하여 처음과 나중이란 표현을 쓰셨지만 그렇다고 시간성이 투사된 '처음'과 '나중' 개념에 근거하여 시간적인 사유의 틀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읽으려는 태도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함을 땅으로 끌어내릴 빌미를 언어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초대교회 시대부터 구사된 것이었고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때로는 언어사용 중단으로 대응하고 때로는 언어의 역설적인 사용으로 맞서 왔습니다.

언어의 한계와 빈곤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는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는 언어를 개선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렇게도 유한하고 빈곤한 언어의 옷을 입었어도 계시는 여전히 하나님이 주어로 계시다는 사실에서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기록된 계시가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고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고 인간 저자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계시가 인간의 오류와 역사의 우연성과 언어의 빈곤에 억류되어 있다고 보아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 계시를 읽는다면 기록된 계시의 주변적인 요소들 속에 갇히게 될 것이지만 저자이신 하나님의 영으로 조명을 받는다면 결코 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성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시편에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 되시는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강건하면 기껏해야 80줄에 이르는 인생은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아나고 저녁에 시드는 풀과 같다가 티끌로 돌아갈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섬광처럼 짧게 지나가는 인생인데 엎친 데 덮치기로 모든 날이 하나님의 진노 중에 지나가고 평생이 한숨 같이 증발하고 만답니다. 이러한 인생을 잘 아는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란 기도를 올립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대비되는 시간적인 생의 어떠함을 깨닫는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시간성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시간적인 인간이 구해야 하는 지혜로운 삶과 관련하여 모세는 1)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주의 종들에게 보이시고 2)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보이시고 3)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시고 4) 하나님의 은총을 베푸사 우리의 손으로 한 일들이 견고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립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행하신 일들을 본다는 것은 복입니다. 하나님의 영화로운 광채를 가시광선 수준만 상대하던 눈이 목격하는 것도 다른 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도 놀라운 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행한 모든 일들이 덧없는 인생과 더불어 소멸되지 않고 견고하게 보존되는 것도 세상이 줄 수 없는 천상의 복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지식의 습득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한 인생 전체와 결부되어 있는 실천적인 앎입니다. 인생의 의미와 삶의 동기와 내용과 목적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시간적인 인간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의해 건강하게 정립될 수 있습니다. 땅에서의 유한하고 빨리 지나가는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있으며 그러한 사려를 통하여 우리는 겸손과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이 시간의 짧은 토막을 살아가는 인생의 주먹만한 전두엽 분석을 통해서는 결코 읽혀지지 않습니다. 태초에서 종말까지 스치고 지나간 인생들의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해 최대치의 집단적인 지성으로 살핀다고 할지라도 영원의 한 귀퉁이도 밝혀내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과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역사의 한 페이지에 개입하되 육신의 옷을 입으시고 언어의 소통으로 우리에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육체에 머물러 계시고자 그렇게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경계선을 한발짝도 넘어서지 못하는 우리를 영원의 영역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죄인의 바닥까지 스스로를 낮추신 것입니다. 낮추어진 상태로 계속해서 머물러 계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아지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올리실 목적으로 낮추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내려오신 것만이 아니라 승천까지 하셨으며 죽으신 것만이 아니라 부활까지 하신 것입니다.

살아갈 시간의 날수가 하루하루 줄어들 때마다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살면 살수록 설레임이 커지고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갈 날들에 대한 기대로 땅에서의 유한한 삶의 단축에 대한 비애를 극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고 영원토록 거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땅에서도 영원의 삶을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영원의 삶을 맛본 사람들은 인생의 가치가 시간적인 길이에 있지 않고 영원한 삶 즉 영생의 소유에 있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을 알면서도 옛사람의 시간적인 가치관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이 인생관을 강타한 사람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아는 분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수단은 삶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데도 그 지식에 부응하는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전할 수 없습니다. 증인은 입술에서 정보의 파장을 퍼뜨리는 자가 아니라 삶의 파장으로 살아가는 곳곳마다 진동을 일으키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삶은 그런 하나님을 전파하는 증거의 장입니다. "와 보라"고 전도하기 위해서는 삶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땅에서의 시간적인 삶으로 하늘의 영원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증인이길 원합니다. 

2014년 1월 27일 월요일

소요리 문답 4-1 영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요4:24)

예배에 관하여 이것보다 명료하고 강력한 선언은 없을 것입니다. 예배는 기독교의 꽃이며 성경의 주제이며 삶의 정수이며 인생의 절정이며 영혼의 잔치이며 최고의 사건이며 복중의 복입니다. 이러한 예배는 무엇보다 누구에게 예배를 드릴 것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예배의 본질과 내용과 방식은 예배의 대상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온 세상에 인간의 종교성이 발휘된 온갖 종류의 예배를 일별해 보십시오.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에 근거하여 우상숭배 가능성 측면에서 본다면 숭배의 대상이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물 속에 있는 것들일 수 있겠고 거기에 그것들을 숭배하는 주체의 다양성을 더한다면 예배의 종류는 천문학적 수치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첫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며 예배의 대상을 하나님 한 분으로만 제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속성은 하나님이 육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는 요구되는 예배의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빈곤하면 비록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한다 할지라도 "알려지지 않은 신"(Ἀγνώστῳ θεῷ)에게 경배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경배의 진정한 개념도 애매해질 것이고 예배의 합당한 방법에도 무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경배하는 아테네 지성들의 빈곤한 신개념과 재단을 쌓고 사당을 세우는 그들의 인위적인 방식에 엄중한 일침을 가합니다. 그리고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손으로 지어진 전에 계시지 않으시며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점을 이유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너무도 위대하신 분이셔서 땅에 거하실 수 있으시며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 할지라도 그분을 능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테네 이방인의 무지와는 달리 유대인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데 예배의 유일한 처소가 예루살렘 지역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백 투 더 예루살렘" 운동도 어떤 특정한 지역에 과도한 종교성을 부여한 지역주의 맹신의 희생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유대인의 '지역주의' 오해를 듣고 예루살렘 지역을 예배의 처소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답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는 "여기서도 말고 저기서도 말고" 즉 물리적인 장소에 매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 같은 특정한 장소에 특별하고 신비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도 계시며 누구와도 만나시며 언제든지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순서가 구비되지 않으면 예배가 불가능한 것처럼 어떤 인위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분이 아니시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분입니다.

이러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지구상의 어떤 지점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진리 안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적인 예배와 올바른 예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혼 차원에서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영혼은 어떤 식으로도 꾸며지지 않는 곳입니다. 예배의 무늬만 갖추는 가식이나 연출이 불가능한 곳입니다. 우리의 타락과 비참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자로 발견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영혼의 추한 실상을 생각하면 우리에겐 도무지 예배자의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망의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삼으시고 영원토록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가 계십니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내주 때문에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가슴에서 터지는 감격과 눈물을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는 크고 무한한 은혜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만 강조하는 분들은 대체로 어떤 신비로운 황홀경을 예배의 지고한 경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정지된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엘리야가 보여준 주님과의 신비로운 조우와 연합의 사례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시라 할지라도 영혼의 신령한 상태만이 예배의 전부가 아님을 예수님은 "진리 안에서"란 문구를 추가하며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영혼과만 결부되지 않고 삶을 의미하는 우리의 몸과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육체로 오신 예수시며 성경 전체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란 방식은 결코 예사롭지 않으며 성경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배가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면서 동시에 성경 전체와 관계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그 전체가 우리의 신앙과 인격과 삶의 규범이기 때문에 우리의 전인격과 전생애가 예배와 결부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다"는 바울의 권고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비해서 볼 때 자칫 바울이 예수님의 예배관에 무례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몸과 영을 서로 대립적인 쌍극으로 이해한 이원론적 사유에의 무의식적 적응이 빚은 선입견일 뿐입니다.

영혼과 몸을 과도하게 분할하지 마십시오. 영과 몸은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서로 조화하고 상응하여 한 인격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예배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배제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몸이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와 무관한 다른 예배가 아니라 "영적 예배"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몸의 배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몸은 삶을 의미하고 바른 삶은 진리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이 12장에서 밝힌 몸의 산제사를 가능하게 하는 성경 전체의 영적인 구속사적 가르침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말씀은 영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몸과 영에 모두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은 삶입니다. 몸이 없으면 삶도 없습니다. 몸이 거하는 모든 곳에서는 어디서든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루살렘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배에 대해 원천봉쇄 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온 세상에 흩어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과 진리 안에서만 경배를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거하시지 않고 진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거룩한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믿고 알고 몸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처럼 최고로 복된 삶입니다. 삶이 예배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살았어도 죽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 전체가 거룩하고 영적인 예배라는 바울의 권고를 빌미로 삼아 모이기를 힘쓰고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하는 기독교의 장구한 전통을 무시하고 소멸하는 것은 주님의 다른 말씀을 핑계로 자신의 기호를 슬그머니 표출하는 야비한 극단인 것 같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나 다른 날들에 드려지는 구별된 예배를 통해 우리는 영과 진리 안에서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의 본질과 범례을 배우고 익히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삶의 모든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영적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도 점검할 수 있습니다.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아무데나 적용하는 고질적인 병폐는 기독교에 발을 디디지도 못하도록 조속히 근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순처럼 보인다고 버리면 기독교의 진리는 남아나는 게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않으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의미도 모르고 어떠한 삶이 바른 것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예배하고 진리를 깨닫고 딱 그만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신 분이심을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예배를 드리고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소요리 문답 3-3 믿음의 대상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요한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으며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시려는 계획이 있으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신약의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도 예표되어 있던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말씀이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생명의 속전으로 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난감한 점은 독생자가 주어지는 방식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고 이것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나무에 매달았던 행위와 나란히 대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뱀은 구약에서 사단의 고약한 이미지를 풍기는 짐승이며 온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오는 범우주적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원흉으로 대단히 교활하고 사악한 존재인데 어떻게 지극히 순전하고 흠도 없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연결되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는 표현처럼 어떻게 뱀과 예수님이 나란히 대비될 수 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 내몬 불뱀의 놋형상이 장대에 매달린 사건과 불뱀과는 반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신 사랑의 예수님이 게다가 어떤 대체물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이 마치 동일한 사건인 양 나란히 언급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명료성을 믿는데 이렇게 난해하고 모순적인 듯한 구절을 만나면 자칫 혼돈이나 불신의 비탈로 나뒹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땅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의 깊은 차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심으시기 위해 주님은 외관상 모순이나 역설로 보이는 방식을 때때로 동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땅에서는 역설이요 모순인데 하늘의 논리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믿는 자에게는 진리의 무한한 깊이에 파묻히는 경우 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을 뒤바꾸는 말인데 상식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진리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뱀과 예수님의 대비도 우리에게 갑절의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주의한 사람들은 뱀과 예수님을 일대일로 대응시켜 예수님도 뱀처럼 간사하고 사악하기 때문에 저주의 대상만이 매달리는 십자가에 못박힐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터무니가 없으며 결코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곡해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며 무흠하신 분입니다. 자신과 관련해서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뱀의 경우는 다릅니다.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 몰고간 악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이유로도 저주의 십자가에 일순위로 못박혀야 할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뱀의 매달림은 외형은 같지만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삯을 지불해야 우리가 매달려야 할 저주의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원수의 간사한 머리와 음흉한 궤계를 깨뜨리는 것이기에 의미에 있어서는 마치 사탄이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서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인 불뱀을 저주의 망대에 매달아 제거한 셈입니다. 즉 십자가에 오르신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그 위에서 일어난 일은 1) 땅의 이성이 납득할 수 없는 아버지의 무궁한 사랑이 확증되고, 2) 여전히 죄인이요 원수였던 우리의 죄는 사해지고, 3) 하나님의 영광을 넘보고 그의 백성을 함부로 건드린 마귀의 권세는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사랑은 독생자를 주심으로 확증되고 우리로 믿고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므로 성취가 되었으며 동시에 결과적인 면에서는 원수도 십자가에 못박혀 멸망한 셈입니다. 이런 식으로 십자가 위에서 사랑과 정의가 입맞춘 것입니다. 신약과 구약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를 예언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할 지가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성경은 어디를 펼쳐서 읽더라도 우리는 허기진 믿음의 배를 채우는 양식을 얻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믿음으로 먹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는 것입니다.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요리 문답 3-2 선행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1) 공의를 행하고 2) 인자를 사랑하고 3)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미가는 이러한 인간의 도리가 인간의 합의나 추정으로 도출된 결론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행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우리에게 친히 보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보이신 이 내용은 미가 선지자가 던진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물음의 답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당연히 주께서 보이신 선은 높으신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는 것과 결부시켜 이해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먼저 공의를 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높으신 여호와께 나아가 경배하는 선을 뜻합니다. 여기서 공의(מִשְׁפָּ֥ט, κρίμα)는 사람 편에서의 공정한 행위나 판결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공의로운 행위와 판결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의 기준과 개념과 실행은 사람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것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공의는 사람들의 공의에 대한 목마름을 임시방편 차원에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고 요구하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는 하나님의 일인데,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다윗의 줄기에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와 이 땅에서 공의를 행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역시나 그리스도 예수와 연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성육신은 공의로운 심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은 심판을 받지 않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믿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대등절 문장에서 현재형과 완료형이 동시에 사용된 어법을 쓰십니다. 이는 말씀의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믿음과 불신이란 자발적인 반응의 형태로 내려지는 심판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오심은 호세아가 기술한 것처럼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의를 비같이 쏟으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도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신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라 불려지는 한 아이가 이 땅에서 정의와 공의(מִשְׁפָּ֖ט וּבִצְדָקָ֑ה)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말씀의 성육신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되고 산출된 공평한 판결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세상의 재판관이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행해야 할 책임이고 몫입니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공의는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이 되어 온 땅에 말씀의 성육신 즉 완전한 신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밝혔듯이 인간의 증거를 구하지 않으시고 성부 성자 성령께서 증인이 되신다고 하셨기에 우리가 증인으로 이 땅에서 공의를 수행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도 아니고 직접적인 것도 아니고 전적인 은혜로 그 영광의 직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에게 원하시는 두번째 본분은 인자(חֶסֶד, 헤세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헤세드"는 변함없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 무조건적 사랑, 희생적인 사랑, 값없이 주어지는 무한한 사랑, 받을 자격이 안되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역시나 헤세드는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헤세드를 사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을 뜻하면서 동시에 그분이 행하신 헤세드 자체를 사랑하고 추구하고 구현하고 따른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창조주요 구속자요 통치자요 희생양이 되셨으며 영원토록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의 길을 사모하며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스런 증인의 대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삶으로 보이면서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은 우리로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세번째는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상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가지이고 예수님은 나무라는 사실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행위 이전의 상태와 관계된 말입니다. 동행이란 단순히 존재상의 공존이나 하나님과 우리가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물리적인 걷기나 행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동행은 의지와 방향과 기호와 가치와 관심과 감정과 동기와 목적과 내용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보이신 것인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문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면 우리도 원하고 하나님이 향하시는 방향을 나도 향하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나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가지신 관심을 나도 가지고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을 나도 동일하게 느끼며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을 나의 이유와 목적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본성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온갖 신령한 은혜와 복을 주신 이유는 바로 신적인 본성의 참예자가 되는 것에 있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주님과의 이러한 연합이란 베드로의 이해와 다르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한" 동행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즉 하나님과 전방위적 연합은 우리가 하나님께 맞추는 것인데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해야 하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하나님도 존중해야 한다는 식의 무례하고 불경한 역발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선이라고 한 미가의 기록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고 명하시는 도리와 책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자유로운 인생에 족쇄를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고 경배하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2014년 1월 25일 토요일

소요리 문답 3-1 믿음과 선행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그를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여기서 다루는 세번째 문항은 성경의 주된 가르침이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일들로 대별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소요리 문답들은 이런 구분을 따라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에 관한 문항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4-38 문항은 우리의 믿음에 관한 것이고 39-107 문항은 우리의 도리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은 소요리 문답의 이중적인 구성을 산출한 근거로 언급된 구절인데 내용은 요한복음 기록의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다른 많은 기적들이 다른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35가지도 넘지만 요한은 그 중에서 7가지 정도만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은 메시야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요한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그 결과로서 생명을 얻게 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에 대해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이 어떤 것인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는 메시야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은 베드로가 감동을 받아 했던 고백인데 요한도 동일하게 복음서의 주제로 삼았는데 이 주제는 복음서의 첫 부분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태초에 말씀이 계시는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 자신"이란 사실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목격한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 우리의 신앙과 영생을 위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술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록의 목적이 암시하는 것은 성경의 목적이 바요나 시몬의 고백처럼 "주는 메시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하나의 단일한 주제를 강요하는 것은 해석학적 횡포를 가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의 단일성은 요한과 같은 한 사도의 사사로운 견해나 입장이 아니라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는 영생을 얻고자 함이고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5:39)며 성경의 제1 저자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밝히신 입장을 기억하고 복음서 전반에 고스란히 반영시킨 것입니다.

성경이 다루는 주제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의 주제를 보더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관점의 수효는 해석하는 사람의 머릿수에 버금갈 정도로 많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단일한 주제로 수렴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고 오히려 분산되고 상대화될 소지는 훨씬 많습니다. 율법의 수효도 얼추 613개 조항이나 되는데 개별 항목의 표면만 보면 서로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각자 저마다의 관점과 주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는 책이라고 스스로 밝힙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수렴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성경의 주석이란 사실을 교회사 전체의 정통적인 입장으로 승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믿어야 할 것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가 되신다는 사실을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고 있기에 아무도 이것을 거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이 친히 그렇게 해석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고안된 그럴듯한 생각을 섞어서 성경의 본질과 주제에 혼돈을 가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어떤 글이나 대상이나 사태에 대해 성경 자체가 부여하고 있는 의미의 분량을 임의로 확대하고 축소해서 예수님에 대한 포커스를 흐려지게 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이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성경의 주제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이신 제2 위격에 대해서만 다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신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란 세 위격으로 존재하며 실체는 하나이신 분입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류 전체를 말합니다. "예수"라는 주제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포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성자께서 육체로 오신 것도 믿어야 하겠기에 인간에 대한 지식도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담의 창조도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하고 그의 죄와 타락을 비롯한 온 인류의 죄와 타락도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중심으로 그 무게를 가늠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와 인생의 회복도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로 저울질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물과 죄와 타락과 사건과 설명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연결되지 않지 않는 조각들로 나누어져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해석되지 않도록 진술되어 있씁니다. 성경은 요한이 복음서 끝자락에 분명히 밝힌 것처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즉 완전한 신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2014년 1월 23일 목요일

소요리 문답 2-3 성경이 기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3:16-17)

여기서 바울은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와 절대적인 유용성을 동시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권위의 근원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른 어떠한 책이나 행위나 현상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분명한 객관성을 제공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양한 인간 기록자의 사사로운 견해들을 임의로 묶은 편집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들을 도구로 삼으셔서 당신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기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으며 인간적인 것이 전혀 혼합되지 않았기에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리는 경의와 동일한 수준의 경의를 성경에도 표해야 한다(eandem scripturae reverentiam deberi quam Deo deferimus)고 말합니다.

성경의 유용성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즉 성경만이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보다 선명한 실감을 위해 뒤집어서 생각하면 성경은 신앙과 삶의 완벽한 규범이기 때문에 성경을 활용하지 않으면 신앙과 삶 전체에서 부패와 무질서가 필히 초래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없이는 누구도 온전하게 되지 못하며 어떠한 선행도 행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강하거나 반듯하고 괜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본성의 부패 때문에 외부에서 규범이 제시되지 않으면 한발짝의 걸음도 똑바로 내디딜 수 없습니다. 소수의 천재성과 다수의 보편성이 보증하는 걸음도 필경은 사망을 향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과 책망과 교정과 의에 이르는 교육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교훈이 성경의 첫번째 용도로 가장 먼저 거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훈에서 실패하면 나머지 세 가지의 기능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합당해 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과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명료한 최고급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성경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도 모르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다른 피조물도 모르는 무지의 슬픈 향연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 속에서는 어떠한 책망과 교정과 훈련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무리 온전한 교훈이라 할지라도 지식의 단순한 전달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책망과 교정과 훈련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입술은 황금빛 언어를 내뱉는데 삶에서는 고약한 배설물을 슬그머니 분비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이는 교훈에만 심취한 결과인 듯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성경이 가르치는 투명한 교훈의 빛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점검하지 않는다면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나아가 한번 비췸을 받고도 교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괴이한 면역력이 생겨 다시 비추임을 받았을 때에도 지각이 없는 짐승처럼 반응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성경은 바른 교훈과 따끔한 책망과 성실한 교정 이후에 의로운 삶에 이르게 만듭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의 원수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구석구석 살펴보면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허물려는 원수의 집요한 노력이 얼마나 다양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꼼꼼하고 꾸준하게 지속되어 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절대적인 유용성을 가리려고 얼마나 많은 화려하고 매혹적인 수단들을 동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분적인 진리까지 교모하게 인용하고 광명의 천사로 변장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기에 사단의 집요한 성경파괴 전략은 볌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사람의 눈으로는 도무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은밀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성경의 권위와 유용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것은 때때로 신학교가 사단의 그런 음흉한 전략에 앞장서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수순을 보면 대체로 신학교가 먼저 타락하고 목회자가 그 다음으로 타락하고 성도들이 맨 나중에 타락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고 허물려는 원수의 타깃이 신학자란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원수의 전략적인 표적이 말씀에 전무하는 자들이란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 신학자와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 신앙이나 삶이나 가치의 어떤 우열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성경의 우선적인 기능이 올바른 교훈을 전달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우리의 인격과 삶에 적용하여 교정하고 의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 없이는 어떠한 교훈도 책망도 교정도 의에의 도달도 그림의 떡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성경은 비록 인간의 언어와 붓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저자시며 하나님의 말씀이며 무에서 존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사실을 뒤로 하고 인간 저자성에 과도히 집착하고 기록자의 생각을 분석하고 정보의 문자적인 능력에만 호소하면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삶의 안내자는 성경이며 그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깨달음과 훈육과 회복됨와 온전함에 이른다는 사실에 어떠한 의심이나 흔들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리 큰 유익을 주더라도 권위와 유용성의 우선순위 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한 타협이나 혼동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소요리 문답 2-2 성경의 견고성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더라도 권함을 받지 않으리라 (눅16:31)

이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의 결론부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음부로 간 부자는 자신의 형제들이 그 고통의 처소로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 달라는 놀라운 의리를 보입니다. 만약 죽은 자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간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할 것이라고 부자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입장은 다릅니다. 즉 이미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의 기록된 말씀이 있고 만약 그 글을 믿지 않는다면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그들에게 가더라도 그들이 설득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들어갈 것이지만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지는 것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쉽다"는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복음과 율법은 복음이 오면 율법이 소멸되는 배타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기록된 말씀과 부활의 사건은 회개와 돌이킴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부활을 목격하는 것과 율법을 묵상하는 것의 기능적인 차이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듣지 않으면 부활을 목격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기적을 보여주면 돌이키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아는 분들 중에서도 어떤 기적을 보여주면 보다 확실히 회개하고 믿음도 강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성정은 그런 기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일시적인 효과 면에서는 기적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는 역기능도 만만치 않습니다.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나은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꿈과 환상과 다른 예언과 기적에 허덕이지 마십시오. 어떤 요란한 방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적의 사람 엘리야는 바위를 깨뜨리는 강한 바람이나 땅바닥을 뒤흔드는 지진이나 모든 것들을 소멸하는 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혹은 부드러운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분입니다. 다윗도 눈부시고 획기적인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향유하며 주야로 묵상한 분입니다. 이방인 문둥병자 경우에도 치유가 아니라 예수님과 나눈 대화에서 근원적인 확신을 얻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확신은 엄청난 기적이 아니라 들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죽음과 생명, 무와 존재가 교차하는 기적이 믿음의 회개와 확신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물리적인 몸은 세월이 흐르면서 약해지고 죽습니다. 잠시 건강하게 되는 것에 신앙과 가치관을 내맡기지 마십시오. 사람은 결국 죽습니다. 그렇다고 결국 죽으니까 그냥 죽자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생명의 일시적인 연장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와 소통하는 분입니다. 그런 방식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다른 어떠한 방식보다 좋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에 이르도록 우리를 안내하는 최고의 방식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을 방문하고 돌아온 자가 우리에게 오는 방식보다 더 탁월함을 예수님의 나사로 이야기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된 계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영화롭게 하고 향유할 최고의 방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기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질병이 치료되고 불가능한 일들이 성취되는 기적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주신다면 큰 은혜로 알고 감사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기적 추구자로 부르시지 않았고 기적이 어떤 가치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의도하신 가장 보편적인 생의 원리와 방식을 따르는 게 좋습니다. 심은대로 거두고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살아갈 때가 죽을 때가 있다는 것 등이 대표적인 원리일 것입니다.

만약 기적을 과도하게 선망하고 기적을 보여준 사람에게 과도한 경외심을 갖는다면 교회에는 권위의 혼란과 무질서가 초래될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가시적인 비본질이 교회의 관심과 에너지와 시간을 잠식하게 될 것입니다. 신비를 동경하는 인간의 충동적인 종교성을 노리는 간사한 이리들의 궤계와 광란은 제어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앙의 기반은 약해지고 유치한 기적 키재기로 인해 비교와 시기와 질투의 관계성은 독버섯과 같이 교회에 급속도로 번질 것입니다. 신앙은 말씀에 의해 제어를 받을 때 가장 건강한 것입니다.

사실은 자연의 질서를 초월하는 기적은 추구해야 목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고 살고 기동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임을 알리는 신호의 성격이 더 강해 보입니다. 자연과 초자연을 구분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초자연 영역에 제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자연과 초자연 모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와 개입이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확연하게 알아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초자연적 일들보다 우리에게 익숙하여 자연처럼 보이는 일상의 기적이 더 신비로운 일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우리에게 본고로 믿고 확신하는 것보다 보지 않고서도 믿고 확신하는 것이 더 복되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기적은 믿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복에 있어서도 보다 낮은 비교급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함에 있어서도 동일한 비교급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2014년 1월 21일 화요일

소요리 문답 2-1 성경의 가감

우리나 혹은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갈1:8)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방법은 오직 성경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다른 원리를 따라서 아무리 치성을 올리고 접신에 도취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만에 빠지는 사망과 저주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이 비록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지만 그들이 자의로 휘갈긴 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말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이 사도들의 붓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만약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사도라도 저주를 받습니다. 하늘의 천사가 전하는 메시지라 할지라도 성경의 경계선을 함부로 출입하면 저주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다양한 양태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에 물리적인 가감을 가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말시온과 같은 인물은 바울서신 및 누가복음 일부로만 성경을 구성하고 나머지는 제거하는 불경을 저지른 바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성경을 삭감한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로마 카톨릭은 정경이 아닌 소위 외경들을 성경에 포함시킨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물리적인 첨삭은 아니지만 거기에 준하는 불경이 설교하는 강대상 위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즉 설교할 때 특정한 본문의 의도적인 배제가 그렇고 성경이 침묵하는 부분을 과도하게 주장할 때에도 동일한 불경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경우는 해석학적 첨삭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저자이신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가감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성경 해석자가 성경의 제1 저자이신 하나님 자신의 뜻까지 소급해 올라가지 않고 인간 기록자의 의도나 문맥에 머무는 해석학적 인간화가 있습니다. 이런 인간화가 인간적인 열심과 충동을 자극하는 것에는 유익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과 영원한 뜻에까지 이르기를 원하는 성경의 의도와 목적은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윤리나 처세술의 보고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불변적인 진리가 담긴 책입니다.

세번째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례는 순종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물리적인 첨삭과 해석학적 가감을 범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알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용은 올바르고 충실한데 그것이 구현되는 삶의 현장에서 말씀이 가감되어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물리적인 보존도 중요하고 말씀의 의미가 가감되지 않는 적정하고 통합적인 해석도 중요하고 말씀의 가시적인 표상이라 할 삶의 실천도 중요해 보입니다. 이는 하나를 택하면 다른 것들은 버려도 되는 택일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빼거나 더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최고의 선으로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믿어야 할 것들과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들의 규범이요 원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리면 사도나 천사들도 예외 없이 저주를 받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면서 성경을 취사선택 대상으로 대하거나 사사로이 해석하고 삶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교회를 기만하는 것이며 세상을 속이는 것입니다.

2014년 1월 20일 월요일

소요리 문답 1-4 하나님 향유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요17:24)

예수님의 이 기도문에 의하면,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의 의미는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어떤 것일까요? 아마도 목격자의 진술이 가장 객관적일 것이며 목격자가 다수일 경우에는 진술의 객관성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에 다들 동의하실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라는 공동체가 본 예수님의 영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님의 영광이 의미하는 바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과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충만한 은혜와 진리로 둘러싸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그 자체가 은혜이며 본인이 진리시기 때문에 은혜와 진리로 충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당신의 백성들이 지은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러 오셨으며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선포하고 온전히 성취하신 분이기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광을 제자들도 보고 누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하나님 향유는 눈부신 번영이나 초고속 승진이나 막대한 재물이나 막강한 권력의 확보나 취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유월절 즈음에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영광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바울의 지적처럼,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을 수반하고 고난을 관통해야 비로소 보이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제자들이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암시된 것처럼 1) 성부의 허락 없이는 안된다는 것과 2)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부께서 허락하신 자가 아니면 아무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시라"고 기도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선을 모세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면서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는 당신의 절대적 주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있지 않으면서 독생자의 영광을 목격할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에 관하여 제자도의 어법에 따르면,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때가 바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때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때가 바로 인자의 영광을 목격하고 취득하는 때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상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향유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향유자는 이런 십자가의 생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십자가는 믿는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진리가 입맞추는 곳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이 거기에 있습니다.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이며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보기를 원하였던 영광은 바로 고달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예수님과 동행할 때에 비로소 목격되고 취득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영광을 목격하는 일은 마치 하늘에 별따기와 같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는데, 이는 독생장의 영광이 무엇이고 그것을 목격하고 취득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유하고 싶다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보십시오. 그 영광을 보고 싶으시면 예수님과 함께 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와 동행하는 방법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과 방법은 없습니다. 영광의 의미와 방법은 모두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것을 외면하고 있는 듯합니다. 개념적인 왜곡과 방법론적 회피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독생자의 영광을 목도하지 못할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그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세상에 캄캄한 어두움을 드리우는 결정적인 주범은 교회일 것입니다. 영광도 모르고 거기에 이르는 방법도 모르는 무지가 어두움과 패망을 낳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영광의 의미와 방법을 뒤틀어 버린다면 가장 어두운 거짓과 패악이 자행되고 있는 셈일 것입니다. 교회가 두려워 하고 심히 떨어야 할 일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에 있어서 세상과 교회가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교회에는 재앙이요 세상에는 형벌일 것입니다.

교회는 독생자의 십자가 영광을 보고 보여주는 곳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말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허락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우리들도 보게 해 주시도록 아버지의 허락과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우리들도 보게 해 주시도록 아버지의 허락과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여 영광의 일그러진 개념을 반듯하게 펴 주옵소서. 그 영광을 우리도 보고 세상도 볼 수 있도록 십자가의 길을 영광으로 간주하며 걷게 하옵소서. 모세가 간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옵소서...

소요리 문답 1-3 향유의 대상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73:25) 

여기에는 하나님을 영원히 향유하는 것의 의미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논지는 하늘과 땅에 주님 이외에 사모하고 소원하고 즐거워할(חָפֵץ) 어떠한 대상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이 돌려지는 때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그의 주석에 의하면, 우리의 애착이나 열정의 지극히 미소한 부분(minimam partem)이 피조계에 돌려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져야 할 영광을 횡령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현상은 모든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불경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아가 그 구절은 시인이 하나님 외에는 자신의 "사모할" 자가 없다는 말에 근거할 때 하늘과 땅을 매혹하여 사모하게 만드는 모든 거짓들과 환영들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상은 미혹으로 차고 넘칩니다. 미혹의 종류와 양태가 무수하고 날로 진화하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도 쏟을 관심과 애정을 적당하게 안배하고 싶은 충동을 유발하는 매혹적인 대상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홍수에 시인 자신도 휩쓸려서 미끄러질 뻔 했다고 밝힙니다.

이러한 미혹의 원흉들로 시인은 2절에서 14절까지 '악인이 형통하는 것'과 '악하고 오만한 자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오히려 힘이 강건하여 지는 것'과 '일반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재앙도 그들에겐 없다는 것'과 '생이 부요해서 눈이 튀어나올 정도이고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는 것'과 '악인들이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 것' 등인데 이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내용은 일평생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루종일 주님만 섬기는 자기는 '종일 내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다는 것' 등이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반석이요 영원한 분깃이라."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이해가 축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에게 몸과 마음이 무너질 때 존재와 상태의 보존을 가능하게 하시는 반석이 되십니다. 시인 자신을 보존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원수들의 공격도 무력하게 할 정도로 안전하고 견고한 안식처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은 눈으로 관찰되지 않고 손으로 수리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와 본질을 정확하게 아시고 최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기에 외부의 것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그 필요의 전부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주를 멀리하는 자...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하나님을 기준으로 한 거리의 원근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망하고 가까이 하는 자는 복되다는 결과적인 대조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가까이 함이 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며 최고의 복 자체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복된 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를 받고 멸망을 당합니다. 이는 밤의 경점과 같이 짧은 인생이 고려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습니다.

1천년의 기간도 고작 하루에 불과하신 분에게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무리 화려하고 존귀하게 살아도 안개처럼 곧장 사라지는 환영일 뿐입니다. 측정이 불가능한 영원 속에서의 상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시간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도록 놀라운 은혜와 기쁨과 영광의 상태를 영원히 누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화려함과 쾌락에 취하여 영원에 비추어진 자신의 실상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가장 비참한 멸망의 내용은 아닐까요? 문제의 관건은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물리적인 거리 좁히기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멀리' 혹은 '가까이'와 같은 거리 개념의 의미론적 전환이 필요할 듯합니다. 본문에는 "가까이 함"의 의미가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라는 표현으로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믿음의 조상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상당부분 겹칩니다. 피난처는 나 자신의 일부만 보호하고 가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부가 완전히 파묻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도 물리적인 주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의하면, 거룩과 순종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단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거룩과 순종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고서도 거룩해질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순종은 행위이고 거룩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행위와 상태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기에 시인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피난처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고 거하는 방식은 물리적인 거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여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뜻합니다. 이는 또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가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이고 싶어 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시지만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하지도 않습니다. 시인의 글에서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복"의 구체적인 개념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심지어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것까지도 주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저는 시인이 말하고자 한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복의 구체적인 의미를 여기에서 찾습니다.

이보다 강렬한 그리스도 연합을 추구했던 다른 인물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생명과 죽음까지 상대화할 줄 알았던 사람이 바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방향과 안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4년 1월 18일 토요일

소요리 문답 1-2 영광의 의미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롬11:36)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와 12장부터 16장까지로 말입니다. 앞부분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credenda)에 대한 것이고 뒷부분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들"(agenda)에 대한 것입니다. 신학도 이런 구분에 근거하여 "믿음에 대하여"(de fide)와 "행위에 대하여"(de operibus)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위에 인용된 구절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의 결론이요 요약인 동시에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들의 전제와 같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 영원토록 영광을 돌린다는 말의 핵심적인 의미와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만물의 관계성에 대한 지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며 만물의 보존자며 만물의 목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영광의 핵심적인 내용은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와야 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을 예로 들자면, 신학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전적으로 뿌리를 두어야 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전개해야 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학자 아퀴나스 같은 경우에는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진 것이고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고 하나님께 이르는 것"(Theologia a Deo docetur, Deum docet, ad Deum ducit)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정의는 이후로도 경건한 학자들에 의해 고수되어 온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신학의 정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께 뿌리를 두어야 하고 하나님을 통하여야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의지의 원인과 이유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나와 세상에 있다거나, 계획의 실행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적인 방식이나 세상적인 수단에 의존하고 있다거나, 계획의 목적이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나의 유익이나 세상적인 만족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삶이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어떤 위인이 되고 무엇을 하더라도 시작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돌릴 영광은 단 한 조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힘과 재능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자신의 몫으로 챙길 영광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에 내 것이라고 주장한 어떠한 것도 없고 무익한 종으로서 하여야 할 일을 했다는 고백만 날길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과 과정과 나중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과 결부되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다른 것의 공로에 해당되는 영광을 그것에 돌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만이 처음과 과정과 나중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됨됨이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너무도 지고하고 신비로와 인간의 지력이 능히 미치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은혜여서 어떠한 공로도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먼저 알았으며 누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갚으심을 받을 수 있느냐고 바울은 묻습니다. 이는 존재도 주님의 선물이고 보존도 주님의 은혜이고 목적도 하나님 자신인데 어떻게 인간에게 어떤 공로나 보상이 돌려질 수 있느냐는 물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러한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세세토록 그분께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에게 삶의 전적인 이유와 도움과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어떤 결핍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과 영광을 취하셔야 비로소 속성이 온전하게 된다거나 피조물의 어떤 보완이나 승인을 받아야 하나님의 신성이 온전하게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에게 만물과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피조물이 창조자를 대하는 마땅한 반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치가 될만한 것인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려서 그것이 가진 가치의 분량에 상응하는 보상을 그에게서 돌려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유가치한 어떤 소유물이 없습니다. 있다면 주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며 다시 주님께 돌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지 그것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기만 한 피조물의 창조자에 대한 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감 보완과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2014년 1월 17일 금요일

소요리 문답 1-1 하나님의 영광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먹고 마시고 행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동물들도 먹고 마시고 행합니다. 식음과 행동은 모든 살아있는 생물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는 어떤 가치가 구별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달라도 무의미한 오십보 백보의 차이일 뿐입니다. 방향이 부여될 때에 가치의 구별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구별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는(εἰς) 것에 있습니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특정한 기간에 특별한 방식으로 수행하는 단회적인 이벤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판을 벌이거나 멍석을 깔지 않고 인생의 지극히 기본적인 현장에서 호흡처럼 중단되지 않고 벌어지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항상 범사에 쉬지 않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자체가 우리의 삶입니다. 생의 의미와 가치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먹어도 먹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추구되지 않는 마심도 무의미한 액체의 흡입일 뿐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할 때에 비로소 무엇을 먹고 마시고 행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기가막힌 요리를 먹고 최고급 음료의 잔을 기울이고 온 세상의 시선을 사로잡는 행위의 화려함을 발산한다 할지라도 헛된 짓입니다.

표피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식음과 행위는 생명과 몸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보이지만, 성경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입니다. 바울이 권하는 것처럼, 가난하고 연약한 분들을 잔치의 상석으로 모시고 자기의 양심과 유익이 아니라 타인의 양심을 따라 모든 사람들을 즐겁고 이롭게 하는 일들이 우리의 행위를 장악하게 하십시오. 물론 사람의 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일환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방향성을 이탈하면 무엇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것이고 무엇을 마셔도 해갈되지 않을 것이고 무엇을 행하여도 성취되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과 타인의 입맛에 맞는 삶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살았어도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빠진 삶은 이가봇의 삶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법궤는 빼앗기고 시아버지, 시동생, 남편은 비운의 죽음을 맞아 아들을 낳았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삶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무의미와 허무보다 무서운 인생의 저주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향할 때에 인생다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지극히 본성적인 것이며 일상적인 것이며 자연스런 일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행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고 근원적인 기쁨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궁극적인 영광인지 모릅니다.

인생의 기본적인, 본성적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며 추구하는 것입니다. 본래 모든 인간은 그렇게 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온 인류에게 가장 큰 유익을 끼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 각 시대와 온 세상이 유익을 얻습니다. 어떤 종교적 최면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의적인 억견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거창한 구호의 화려한 장미빛에 몽롱하게 도취하는 정도로만 만족하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