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요한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으며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시려는 계획이 있으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신약의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도 예표되어 있던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말씀이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생명의 속전으로 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난감한 점은 독생자가 주어지는 방식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고 이것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나무에 매달았던 행위와 나란히 대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뱀은 구약에서 사단의 고약한 이미지를 풍기는 짐승이며 온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오는 범우주적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원흉으로 대단히 교활하고 사악한 존재인데 어떻게 지극히 순전하고 흠도 없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연결되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는 표현처럼 어떻게 뱀과 예수님이 나란히 대비될 수 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 내몬 불뱀의 놋형상이 장대에 매달린 사건과 불뱀과는 반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신 사랑의 예수님이 게다가 어떤 대체물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이 마치 동일한 사건인 양 나란히 언급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명료성을 믿는데 이렇게 난해하고 모순적인 듯한 구절을 만나면 자칫 혼돈이나 불신의 비탈로 나뒹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땅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의 깊은 차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심으시기 위해 주님은 외관상 모순이나 역설로 보이는 방식을 때때로 동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땅에서는 역설이요 모순인데 하늘의 논리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믿는 자에게는 진리의 무한한 깊이에 파묻히는 경우 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을 뒤바꾸는 말인데 상식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진리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뱀과 예수님의 대비도 우리에게 갑절의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주의한 사람들은 뱀과 예수님을 일대일로 대응시켜 예수님도 뱀처럼 간사하고 사악하기 때문에 저주의 대상만이 매달리는 십자가에 못박힐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터무니가 없으며 결코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곡해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며 무흠하신 분입니다. 자신과 관련해서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뱀의 경우는 다릅니다.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 몰고간 악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이유로도 저주의 십자가에 일순위로 못박혀야 할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뱀의 매달림은 외형은 같지만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삯을 지불해야 우리가 매달려야 할 저주의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원수의 간사한 머리와 음흉한 궤계를 깨뜨리는 것이기에 의미에 있어서는 마치 사탄이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서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인 불뱀을 저주의 망대에 매달아 제거한 셈입니다. 즉 십자가에 오르신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그 위에서 일어난 일은 1) 땅의 이성이 납득할 수 없는 아버지의 무궁한 사랑이 확증되고, 2) 여전히 죄인이요 원수였던 우리의 죄는 사해지고, 3) 하나님의 영광을 넘보고 그의 백성을 함부로 건드린 마귀의 권세는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사랑은 독생자를 주심으로 확증되고 우리로 믿고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므로 성취가 되었으며 동시에 결과적인 면에서는 원수도 십자가에 못박혀 멸망한 셈입니다. 이런 식으로 십자가 위에서 사랑과 정의가 입맞춘 것입니다. 신약과 구약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를 예언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할 지가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성경은 어디를 펼쳐서 읽더라도 우리는 허기진 믿음의 배를 채우는 양식을 얻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믿음으로 먹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는 것입니다.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한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으며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시려는 계획이 있으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신약의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도 예표되어 있던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말씀이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생명의 속전으로 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난감한 점은 독생자가 주어지는 방식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고 이것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나무에 매달았던 행위와 나란히 대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뱀은 구약에서 사단의 고약한 이미지를 풍기는 짐승이며 온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오는 범우주적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원흉으로 대단히 교활하고 사악한 존재인데 어떻게 지극히 순전하고 흠도 없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연결되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는 표현처럼 어떻게 뱀과 예수님이 나란히 대비될 수 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 내몬 불뱀의 놋형상이 장대에 매달린 사건과 불뱀과는 반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신 사랑의 예수님이 게다가 어떤 대체물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이 마치 동일한 사건인 양 나란히 언급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명료성을 믿는데 이렇게 난해하고 모순적인 듯한 구절을 만나면 자칫 혼돈이나 불신의 비탈로 나뒹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땅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의 깊은 차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심으시기 위해 주님은 외관상 모순이나 역설로 보이는 방식을 때때로 동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땅에서는 역설이요 모순인데 하늘의 논리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믿는 자에게는 진리의 무한한 깊이에 파묻히는 경우 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을 뒤바꾸는 말인데 상식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진리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뱀과 예수님의 대비도 우리에게 갑절의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주의한 사람들은 뱀과 예수님을 일대일로 대응시켜 예수님도 뱀처럼 간사하고 사악하기 때문에 저주의 대상만이 매달리는 십자가에 못박힐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터무니가 없으며 결코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곡해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며 무흠하신 분입니다. 자신과 관련해서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뱀의 경우는 다릅니다.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 몰고간 악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이유로도 저주의 십자가에 일순위로 못박혀야 할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뱀의 매달림은 외형은 같지만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삯을 지불해야 우리가 매달려야 할 저주의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원수의 간사한 머리와 음흉한 궤계를 깨뜨리는 것이기에 의미에 있어서는 마치 사탄이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서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인 불뱀을 저주의 망대에 매달아 제거한 셈입니다. 즉 십자가에 오르신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그 위에서 일어난 일은 1) 땅의 이성이 납득할 수 없는 아버지의 무궁한 사랑이 확증되고, 2) 여전히 죄인이요 원수였던 우리의 죄는 사해지고, 3) 하나님의 영광을 넘보고 그의 백성을 함부로 건드린 마귀의 권세는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사랑은 독생자를 주심으로 확증되고 우리로 믿고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므로 성취가 되었으며 동시에 결과적인 면에서는 원수도 십자가에 못박혀 멸망한 셈입니다. 이런 식으로 십자가 위에서 사랑과 정의가 입맞춘 것입니다. 신약과 구약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를 예언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할 지가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성경은 어디를 펼쳐서 읽더라도 우리는 허기진 믿음의 배를 채우는 양식을 얻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믿음으로 먹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는 것입니다.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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