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요17:24)
예수님의 이 기도문에 의하면,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의 의미는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어떤 것일까요? 아마도 목격자의 진술이 가장 객관적일 것이며 목격자가 다수일 경우에는 진술의 객관성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에 다들 동의하실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라는 공동체가 본 예수님의 영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님의 영광이 의미하는 바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과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충만한 은혜와 진리로 둘러싸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그 자체가 은혜이며 본인이 진리시기 때문에 은혜와 진리로 충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당신의 백성들이 지은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러 오셨으며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선포하고 온전히 성취하신 분이기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광을 제자들도 보고 누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하나님 향유는 눈부신 번영이나 초고속 승진이나 막대한 재물이나 막강한 권력의 확보나 취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유월절 즈음에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영광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바울의 지적처럼,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을 수반하고 고난을 관통해야 비로소 보이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제자들이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암시된 것처럼 1) 성부의 허락 없이는 안된다는 것과 2)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부께서 허락하신 자가 아니면 아무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시라"고 기도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선을 모세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면서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는 당신의 절대적 주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있지 않으면서 독생자의 영광을 목격할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에 관하여 제자도의 어법에 따르면,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때가 바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때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때가 바로 인자의 영광을 목격하고 취득하는 때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상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향유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향유자는 이런 십자가의 생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십자가는 믿는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진리가 입맞추는 곳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이 거기에 있습니다.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이며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보기를 원하였던 영광은 바로 고달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예수님과 동행할 때에 비로소 목격되고 취득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영광을 목격하는 일은 마치 하늘에 별따기와 같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는데, 이는 독생장의 영광이 무엇이고 그것을 목격하고 취득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유하고 싶다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보십시오. 그 영광을 보고 싶으시면 예수님과 함께 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와 동행하는 방법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과 방법은 없습니다. 영광의 의미와 방법은 모두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것을 외면하고 있는 듯합니다. 개념적인 왜곡과 방법론적 회피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독생자의 영광을 목도하지 못할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그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세상에 캄캄한 어두움을 드리우는 결정적인 주범은 교회일 것입니다. 영광도 모르고 거기에 이르는 방법도 모르는 무지가 어두움과 패망을 낳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영광의 의미와 방법을 뒤틀어 버린다면 가장 어두운 거짓과 패악이 자행되고 있는 셈일 것입니다. 교회가 두려워 하고 심히 떨어야 할 일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에 있어서 세상과 교회가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교회에는 재앙이요 세상에는 형벌일 것입니다.
교회는 독생자의 십자가 영광을 보고 보여주는 곳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말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허락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우리들도 보게 해 주시도록 아버지의 허락과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우리들도 보게 해 주시도록 아버지의 허락과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여 영광의 일그러진 개념을 반듯하게 펴 주옵소서. 그 영광을 우리도 보고 세상도 볼 수 있도록 십자가의 길을 영광으로 간주하며 걷게 하옵소서. 모세가 간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 기도문에 의하면,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의 의미는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어떤 것일까요? 아마도 목격자의 진술이 가장 객관적일 것이며 목격자가 다수일 경우에는 진술의 객관성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에 다들 동의하실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라는 공동체가 본 예수님의 영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님의 영광이 의미하는 바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과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충만한 은혜와 진리로 둘러싸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그 자체가 은혜이며 본인이 진리시기 때문에 은혜와 진리로 충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당신의 백성들이 지은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러 오셨으며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선포하고 온전히 성취하신 분이기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광을 제자들도 보고 누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하나님 향유는 눈부신 번영이나 초고속 승진이나 막대한 재물이나 막강한 권력의 확보나 취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유월절 즈음에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영광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바울의 지적처럼,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을 수반하고 고난을 관통해야 비로소 보이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제자들이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암시된 것처럼 1) 성부의 허락 없이는 안된다는 것과 2)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부께서 허락하신 자가 아니면 아무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시라"고 기도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선을 모세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면서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는 당신의 절대적 주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있지 않으면서 독생자의 영광을 목격할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에 관하여 제자도의 어법에 따르면,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때가 바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때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때가 바로 인자의 영광을 목격하고 취득하는 때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상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향유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향유자는 이런 십자가의 생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십자가는 믿는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진리가 입맞추는 곳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이 거기에 있습니다.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이며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보기를 원하였던 영광은 바로 고달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예수님과 동행할 때에 비로소 목격되고 취득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영광을 목격하는 일은 마치 하늘에 별따기와 같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는데, 이는 독생장의 영광이 무엇이고 그것을 목격하고 취득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유하고 싶다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보십시오. 그 영광을 보고 싶으시면 예수님과 함께 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와 동행하는 방법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과 방법은 없습니다. 영광의 의미와 방법은 모두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것을 외면하고 있는 듯합니다. 개념적인 왜곡과 방법론적 회피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독생자의 영광을 목도하지 못할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그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세상에 캄캄한 어두움을 드리우는 결정적인 주범은 교회일 것입니다. 영광도 모르고 거기에 이르는 방법도 모르는 무지가 어두움과 패망을 낳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영광의 의미와 방법을 뒤틀어 버린다면 가장 어두운 거짓과 패악이 자행되고 있는 셈일 것입니다. 교회가 두려워 하고 심히 떨어야 할 일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에 있어서 세상과 교회가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교회에는 재앙이요 세상에는 형벌일 것입니다.
교회는 독생자의 십자가 영광을 보고 보여주는 곳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말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허락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우리들도 보게 해 주시도록 아버지의 허락과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우리들도 보게 해 주시도록 아버지의 허락과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여 영광의 일그러진 개념을 반듯하게 펴 주옵소서. 그 영광을 우리도 보고 세상도 볼 수 있도록 십자가의 길을 영광으로 간주하며 걷게 하옵소서. 모세가 간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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