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 혹은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갈1:8)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방법은 오직 성경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다른 원리를 따라서 아무리 치성을 올리고 접신에 도취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만에 빠지는 사망과 저주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이 비록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지만 그들이 자의로 휘갈긴 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말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이 사도들의 붓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만약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사도라도 저주를 받습니다. 하늘의 천사가 전하는 메시지라 할지라도 성경의 경계선을 함부로 출입하면 저주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다양한 양태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에 물리적인 가감을 가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말시온과 같은 인물은 바울서신 및 누가복음 일부로만 성경을 구성하고 나머지는 제거하는 불경을 저지른 바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성경을 삭감한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로마 카톨릭은 정경이 아닌 소위 외경들을 성경에 포함시킨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물리적인 첨삭은 아니지만 거기에 준하는 불경이 설교하는 강대상 위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즉 설교할 때 특정한 본문의 의도적인 배제가 그렇고 성경이 침묵하는 부분을 과도하게 주장할 때에도 동일한 불경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경우는 해석학적 첨삭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저자이신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가감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성경 해석자가 성경의 제1 저자이신 하나님 자신의 뜻까지 소급해 올라가지 않고 인간 기록자의 의도나 문맥에 머무는 해석학적 인간화가 있습니다. 이런 인간화가 인간적인 열심과 충동을 자극하는 것에는 유익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과 영원한 뜻에까지 이르기를 원하는 성경의 의도와 목적은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윤리나 처세술의 보고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불변적인 진리가 담긴 책입니다.
세번째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례는 순종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물리적인 첨삭과 해석학적 가감을 범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알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용은 올바르고 충실한데 그것이 구현되는 삶의 현장에서 말씀이 가감되어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물리적인 보존도 중요하고 말씀의 의미가 가감되지 않는 적정하고 통합적인 해석도 중요하고 말씀의 가시적인 표상이라 할 삶의 실천도 중요해 보입니다. 이는 하나를 택하면 다른 것들은 버려도 되는 택일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빼거나 더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최고의 선으로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믿어야 할 것들과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들의 규범이요 원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리면 사도나 천사들도 예외 없이 저주를 받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면서 성경을 취사선택 대상으로 대하거나 사사로이 해석하고 삶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교회를 기만하는 것이며 세상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향유하는 방법은 오직 성경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다른 원리를 따라서 아무리 치성을 올리고 접신에 도취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만에 빠지는 사망과 저주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이 비록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지만 그들이 자의로 휘갈긴 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말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이 사도들의 붓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만약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사도라도 저주를 받습니다. 하늘의 천사가 전하는 메시지라 할지라도 성경의 경계선을 함부로 출입하면 저주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다양한 양태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에 물리적인 가감을 가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말시온과 같은 인물은 바울서신 및 누가복음 일부로만 성경을 구성하고 나머지는 제거하는 불경을 저지른 바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성경을 삭감한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로마 카톨릭은 정경이 아닌 소위 외경들을 성경에 포함시킨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물리적인 첨삭은 아니지만 거기에 준하는 불경이 설교하는 강대상 위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즉 설교할 때 특정한 본문의 의도적인 배제가 그렇고 성경이 침묵하는 부분을 과도하게 주장할 때에도 동일한 불경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경우는 해석학적 첨삭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저자이신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가감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성경 해석자가 성경의 제1 저자이신 하나님 자신의 뜻까지 소급해 올라가지 않고 인간 기록자의 의도나 문맥에 머무는 해석학적 인간화가 있습니다. 이런 인간화가 인간적인 열심과 충동을 자극하는 것에는 유익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과 영원한 뜻에까지 이르기를 원하는 성경의 의도와 목적은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윤리나 처세술의 보고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불변적인 진리가 담긴 책입니다.
세번째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례는 순종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물리적인 첨삭과 해석학적 가감을 범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알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용은 올바르고 충실한데 그것이 구현되는 삶의 현장에서 말씀이 가감되어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물리적인 보존도 중요하고 말씀의 의미가 가감되지 않는 적정하고 통합적인 해석도 중요하고 말씀의 가시적인 표상이라 할 삶의 실천도 중요해 보입니다. 이는 하나를 택하면 다른 것들은 버려도 되는 택일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빼거나 더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최고의 선으로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믿어야 할 것들과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들의 규범이요 원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리면 사도나 천사들도 예외 없이 저주를 받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면서 성경을 취사선택 대상으로 대하거나 사사로이 해석하고 삶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교회를 기만하는 것이며 세상을 속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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