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그를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여기서 다루는 세번째 문항은 성경의 주된 가르침이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일들로 대별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소요리 문답들은 이런 구분을 따라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에 관한 문항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4-38 문항은 우리의 믿음에 관한 것이고 39-107 문항은 우리의 도리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은 소요리 문답의 이중적인 구성을 산출한 근거로 언급된 구절인데 내용은 요한복음 기록의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다른 많은 기적들이 다른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35가지도 넘지만 요한은 그 중에서 7가지 정도만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은 메시야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요한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그 결과로서 생명을 얻게 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에 대해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이 어떤 것인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는 메시야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은 베드로가 감동을 받아 했던 고백인데 요한도 동일하게 복음서의 주제로 삼았는데 이 주제는 복음서의 첫 부분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태초에 말씀이 계시는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 자신"이란 사실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목격한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 우리의 신앙과 영생을 위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술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록의 목적이 암시하는 것은 성경의 목적이 바요나 시몬의 고백처럼 "주는 메시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하나의 단일한 주제를 강요하는 것은 해석학적 횡포를 가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의 단일성은 요한과 같은 한 사도의 사사로운 견해나 입장이 아니라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는 영생을 얻고자 함이고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5:39)며 성경의 제1 저자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밝히신 입장을 기억하고 복음서 전반에 고스란히 반영시킨 것입니다.
성경이 다루는 주제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의 주제를 보더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관점의 수효는 해석하는 사람의 머릿수에 버금갈 정도로 많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단일한 주제로 수렴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고 오히려 분산되고 상대화될 소지는 훨씬 많습니다. 율법의 수효도 얼추 613개 조항이나 되는데 개별 항목의 표면만 보면 서로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각자 저마다의 관점과 주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는 책이라고 스스로 밝힙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수렴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성경의 주석이란 사실을 교회사 전체의 정통적인 입장으로 승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믿어야 할 것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가 되신다는 사실을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고 있기에 아무도 이것을 거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이 친히 그렇게 해석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고안된 그럴듯한 생각을 섞어서 성경의 본질과 주제에 혼돈을 가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어떤 글이나 대상이나 사태에 대해 성경 자체가 부여하고 있는 의미의 분량을 임의로 확대하고 축소해서 예수님에 대한 포커스를 흐려지게 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이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성경의 주제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이신 제2 위격에 대해서만 다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신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란 세 위격으로 존재하며 실체는 하나이신 분입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류 전체를 말합니다. "예수"라는 주제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포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성자께서 육체로 오신 것도 믿어야 하겠기에 인간에 대한 지식도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담의 창조도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하고 그의 죄와 타락을 비롯한 온 인류의 죄와 타락도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중심으로 그 무게를 가늠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와 인생의 회복도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로 저울질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물과 죄와 타락과 사건과 설명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연결되지 않지 않는 조각들로 나누어져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해석되지 않도록 진술되어 있씁니다. 성경은 요한이 복음서 끝자락에 분명히 밝힌 것처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즉 완전한 신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루는 세번째 문항은 성경의 주된 가르침이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일들로 대별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소요리 문답들은 이런 구분을 따라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에 관한 문항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4-38 문항은 우리의 믿음에 관한 것이고 39-107 문항은 우리의 도리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은 소요리 문답의 이중적인 구성을 산출한 근거로 언급된 구절인데 내용은 요한복음 기록의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다른 많은 기적들이 다른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35가지도 넘지만 요한은 그 중에서 7가지 정도만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은 메시야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요한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그 결과로서 생명을 얻게 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에 대해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이 어떤 것인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는 메시야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은 베드로가 감동을 받아 했던 고백인데 요한도 동일하게 복음서의 주제로 삼았는데 이 주제는 복음서의 첫 부분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태초에 말씀이 계시는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 자신"이란 사실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목격한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 우리의 신앙과 영생을 위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술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록의 목적이 암시하는 것은 성경의 목적이 바요나 시몬의 고백처럼 "주는 메시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하나의 단일한 주제를 강요하는 것은 해석학적 횡포를 가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의 단일성은 요한과 같은 한 사도의 사사로운 견해나 입장이 아니라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는 영생을 얻고자 함이고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5:39)며 성경의 제1 저자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밝히신 입장을 기억하고 복음서 전반에 고스란히 반영시킨 것입니다.
성경이 다루는 주제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의 주제를 보더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관점의 수효는 해석하는 사람의 머릿수에 버금갈 정도로 많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단일한 주제로 수렴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고 오히려 분산되고 상대화될 소지는 훨씬 많습니다. 율법의 수효도 얼추 613개 조항이나 되는데 개별 항목의 표면만 보면 서로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각자 저마다의 관점과 주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는 책이라고 스스로 밝힙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수렴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성경의 주석이란 사실을 교회사 전체의 정통적인 입장으로 승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믿어야 할 것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가 되신다는 사실을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고 있기에 아무도 이것을 거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이 친히 그렇게 해석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고안된 그럴듯한 생각을 섞어서 성경의 본질과 주제에 혼돈을 가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어떤 글이나 대상이나 사태에 대해 성경 자체가 부여하고 있는 의미의 분량을 임의로 확대하고 축소해서 예수님에 대한 포커스를 흐려지게 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이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성경의 주제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이신 제2 위격에 대해서만 다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신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란 세 위격으로 존재하며 실체는 하나이신 분입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류 전체를 말합니다. "예수"라는 주제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포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성자께서 육체로 오신 것도 믿어야 하겠기에 인간에 대한 지식도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담의 창조도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하고 그의 죄와 타락을 비롯한 온 인류의 죄와 타락도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중심으로 그 무게를 가늠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와 인생의 회복도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로 저울질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물과 죄와 타락과 사건과 설명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연결되지 않지 않는 조각들로 나누어져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해석되지 않도록 진술되어 있씁니다. 성경은 요한이 복음서 끝자락에 분명히 밝힌 것처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즉 완전한 신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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