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롬11:36)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와 12장부터 16장까지로 말입니다. 앞부분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credenda)에 대한 것이고 뒷부분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들"(agenda)에 대한 것입니다. 신학도 이런 구분에 근거하여 "믿음에 대하여"(de fide)와 "행위에 대하여"(de operibus)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위에 인용된 구절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의 결론이요 요약인 동시에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들의 전제와 같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 영원토록 영광을 돌린다는 말의 핵심적인 의미와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만물의 관계성에 대한 지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며 만물의 보존자며 만물의 목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영광의 핵심적인 내용은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와야 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을 예로 들자면, 신학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전적으로 뿌리를 두어야 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전개해야 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학자 아퀴나스 같은 경우에는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진 것이고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고 하나님께 이르는 것"(Theologia a Deo docetur, Deum docet, ad Deum ducit)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정의는 이후로도 경건한 학자들에 의해 고수되어 온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신학의 정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께 뿌리를 두어야 하고 하나님을 통하여야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의지의 원인과 이유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나와 세상에 있다거나, 계획의 실행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적인 방식이나 세상적인 수단에 의존하고 있다거나, 계획의 목적이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나의 유익이나 세상적인 만족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삶이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어떤 위인이 되고 무엇을 하더라도 시작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돌릴 영광은 단 한 조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힘과 재능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자신의 몫으로 챙길 영광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에 내 것이라고 주장한 어떠한 것도 없고 무익한 종으로서 하여야 할 일을 했다는 고백만 날길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과 과정과 나중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과 결부되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다른 것의 공로에 해당되는 영광을 그것에 돌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만이 처음과 과정과 나중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됨됨이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너무도 지고하고 신비로와 인간의 지력이 능히 미치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은혜여서 어떠한 공로도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먼저 알았으며 누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갚으심을 받을 수 있느냐고 바울은 묻습니다. 이는 존재도 주님의 선물이고 보존도 주님의 은혜이고 목적도 하나님 자신인데 어떻게 인간에게 어떤 공로나 보상이 돌려질 수 있느냐는 물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러한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세세토록 그분께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에게 삶의 전적인 이유와 도움과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어떤 결핍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과 영광을 취하셔야 비로소 속성이 온전하게 된다거나 피조물의 어떤 보완이나 승인을 받아야 하나님의 신성이 온전하게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에게 만물과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피조물이 창조자를 대하는 마땅한 반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치가 될만한 것인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려서 그것이 가진 가치의 분량에 상응하는 보상을 그에게서 돌려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유가치한 어떤 소유물이 없습니다. 있다면 주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며 다시 주님께 돌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지 그것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기만 한 피조물의 창조자에 대한 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감 보완과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와 12장부터 16장까지로 말입니다. 앞부분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credenda)에 대한 것이고 뒷부분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들"(agenda)에 대한 것입니다. 신학도 이런 구분에 근거하여 "믿음에 대하여"(de fide)와 "행위에 대하여"(de operibus)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위에 인용된 구절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의 결론이요 요약인 동시에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들의 전제와 같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 영원토록 영광을 돌린다는 말의 핵심적인 의미와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만물의 관계성에 대한 지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며 만물의 보존자며 만물의 목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영광의 핵심적인 내용은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와야 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을 예로 들자면, 신학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전적으로 뿌리를 두어야 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전개해야 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학자 아퀴나스 같은 경우에는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진 것이고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고 하나님께 이르는 것"(Theologia a Deo docetur, Deum docet, ad Deum ducit)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정의는 이후로도 경건한 학자들에 의해 고수되어 온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신학의 정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께 뿌리를 두어야 하고 하나님을 통하여야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의지의 원인과 이유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나와 세상에 있다거나, 계획의 실행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적인 방식이나 세상적인 수단에 의존하고 있다거나, 계획의 목적이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나의 유익이나 세상적인 만족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삶이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어떤 위인이 되고 무엇을 하더라도 시작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돌릴 영광은 단 한 조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힘과 재능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자신의 몫으로 챙길 영광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에 내 것이라고 주장한 어떠한 것도 없고 무익한 종으로서 하여야 할 일을 했다는 고백만 날길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과 과정과 나중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과 결부되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다른 것의 공로에 해당되는 영광을 그것에 돌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만이 처음과 과정과 나중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됨됨이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너무도 지고하고 신비로와 인간의 지력이 능히 미치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은혜여서 어떠한 공로도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먼저 알았으며 누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갚으심을 받을 수 있느냐고 바울은 묻습니다. 이는 존재도 주님의 선물이고 보존도 주님의 은혜이고 목적도 하나님 자신인데 어떻게 인간에게 어떤 공로나 보상이 돌려질 수 있느냐는 물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러한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세세토록 그분께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에게 삶의 전적인 이유와 도움과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어떤 결핍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과 영광을 취하셔야 비로소 속성이 온전하게 된다거나 피조물의 어떤 보완이나 승인을 받아야 하나님의 신성이 온전하게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에게 만물과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피조물이 창조자를 대하는 마땅한 반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치가 될만한 것인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려서 그것이 가진 가치의 분량에 상응하는 보상을 그에게서 돌려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유가치한 어떤 소유물이 없습니다. 있다면 주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며 다시 주님께 돌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지 그것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기만 한 피조물의 창조자에 대한 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감 보완과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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